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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海峡を越えて】埋もれた日韓歌謡史 第4部
“해협을 넘어서” 묻힌 한일가요사 제4부
(1)JODK
戦時下に消えゆく庶民の歌
전시하 살아져 가는 서민의 노래
「これで本日の放送は全部終了しました。ただいまの時刻は…時…分でございます。こちらは京城中央放送局です。JODK…」
“이것으로 오늘의 방송을 모두 종료합니다. 현재 시간은…시…분입니다. 여기는 경성중앙방송국입니다. JODK….
1945(昭和20)年8月15日夜、アナウンサーの古賀登恵(とえ)はマイクに向かい、いつものようにこうしゃべるはずだった。ところが-。
1945년8월15일 밤 아나운서 고가 토에는 마이크를 향하고 언제나처럼 이렇게 말할 참이었다. 그런데….
「お昼に玉音放送があり、終戦を知りました。独立、解放を喜ぶ朝鮮の人たちが街中にあふれ、とても出社できる状況じゃない。夕方、将校さんが車で自宅まで迎えに来たのです」
“낮에 천황의 방송이 있었고 종전을 알았습니다. 독립, 해방을 기뻐하는 한국인들이 거리에 쏟아져 나와 도저히 출근할 상황이 아니었지요. 해질녘에 장교가 차로 자택까지 마중 왔었지요”
騒乱を避け、ソウル市内にあった日本陸軍の官舎へ避難した。
소란을 피하고 서울시내에 있는 일본육군 관사로 피난했다.
JODK。そのコールサインも今はない。1926年11月、日本人がソウルに設立し、翌年2月から放送を始めた社団法人京城放送局(のちに朝鮮放送協会)が管轄する京城中央放送局の呼び出し符号だ。東京(JOAK)、大阪(JOBK)、名古屋(JOCK)に次ぐ4番目の放送局であることを示している。
JODK. 이 콜 사인은 이제 없다. 1926년11월 일본인이 서울에 설립하고 다음 해 2월부터 방송을 시작한 사단법인 경성방송국(후의 조선방송협회)이 관할하는 경성중앙방송국의 호출 부호다. 도쿄(JOAK) 오사카(JOBK) 나고야(JOCK)에 이어서 4번째의 방송국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OBらで編集した『JODK-朝鮮放送協会回想記』などによると、終戦の夜から翌日早朝にかけて放送したのは、朝鮮総督府の談話「終戦に当たりて」と「朝鮮民衆に訴える」だった。そして、9月9日に中継した総督府の降伏文書受諾式を最後に、放送業務は米軍のもとに置かれる。
OB 들이 편집한 “JODK-조선방송협회 회상기” 등에 의하면, 종전된 밤부터 다음 이른 아침까지 방송한 것은 조선총독부의 담화 “종전에 임해서”와 “조선민중에 호소한다” 였다. 그리고 9월9일에 중계한 총독부의 항복문서 수락식을 최후로 방송업무는 미군정 하에 두게 된다.
古賀は官舎に1週間避難したのち、着の身着のままで連絡船に乗り、引き揚げた。89歳のいまもJODKに在籍した当時のことはよく思い出すという。
고가는 관사에 1주일간 피난한 뒤, 입은 그대로 연락선을 타고 귀국했다. 89세인 지금도JODK에 재직했던 당시의 일이 자주 생각난다고 한다.
「第一放送に入局した1940年ごろは、まだのんびりした時代でしたね」
“제1방송에 입사한 것은 1940년경, 아직 느긋하던 시절이었지요”
第一放送は日本語で流す。ニュースや料理番組などを担当したほか、クラシック音楽や李朝の雅楽、宝塚歌劇の舞台中継などを放送した。スタジオには芸能人もよく訪れたという。
제1방송은 일본어로 말한다. 뉴스, 요리 등의 프로를 담당하는 것 외에 클래식 음악, 이조아악, 다카라즈카 가극의 무대중계 등을 방송했다. 스튜디오에는 예능인도 자주 들렸다고 한다.
「佐野周二さんに藤山一郎さん、淡谷のり子さん…。藤山さんは番組に出演して流行歌か軍歌を歌っていましたよ」
“사노 슈지 씨, 후지야마 이치로 씨, 아와야 노리코 씨…. 후지야마 씨는 음악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유행가와 군가를 불렀었지요”
藤山一郎といえば古賀政男作曲の「酒は涙か溜息か」や「丘を越えて」などの大ヒットで知られ、淡谷のり子は服部良一が作曲した「別れのブルース」をスタジオで歌った。朝鮮半島でも内地と同じ大衆歌謡がラジオから流れていた。
후지야마 이치로라고 하면 고가 마사오 작곡의 “사케와 나미다카” “오카오 고에테” 등의 대히트로 알려지고, 아와야 노리코는 핫토리 료이치가 작곡한 “와카레노 블루스”를 스튜디오에서 불렀다. 한반도에도 일본국내와 같이 대중가요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もちろんアリランなど朝鮮民謡も流れましたよ。その後は次第に、歌謡曲でも甘ったるい歌は士気が下がる、と言われ、放送されなくなりました」
“물론 아리랑 등, 한국민요도 방송했지요. 그 뒤에는 차차 가요곡이라 해도 감미로운 노래는 사기를 저하시킨다고 하여 방송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JODKには朝鮮語の第二放送もあった。第一放送とは番組編成が異なり、スタジオが隣でも現場のスタッフ同士の交流は少なかったという。ニュースや子供番組、講座番組のほか大衆歌謡の番組もあった。
JODK에는 조선어의 제2방송도 있었다. 제1방송과는 프로그램편성이 달라, 스튜디오가 옆이라도 현장의 스태프끼리 교류가 적었다고 한다. 뉴스나 어린이 프로그램, 강좌프로그램 외에 대중가요 프로그램도 있었다.
東亜日報の当時の番組欄をのぞくと、1934年12月16日に放送された「新民謡選作発表」という番組では「木浦の涙」のヒットで知られる李蘭影が郷土への思いをこめた新民謡を歌っている。
동아일보의 당시 프로그램 난을 들여다보면 1934년1월16일에 방송된 “신민요선작발표”라는 프로그램에서 “목포의 눈물”의 히트로 알려진 이난영이가 향토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신민요를 노래했다.
1938年2月9日には歌謡界の第一人者だった南仁樹の「哀愁の小夜曲」や張世貞の「連絡船は出て行く」などが流され、のちに作詞家・半夜月として活躍する秦芳男は「不孝者は泣きます」を1940年5月12日の放送で歌った。
1938년2월9일에는 가요계의 제1인자였던 남인수의 “애수의 소야곡”이며 장세정의 “연락선은 떠난다” 등을 방송했다. 나중에 작사가 반야월이라는 이름으로 활약하는 진방남은 “불효자는 웁니다”를 1940년5월12일의 방송에서 노래했다.
韓国の大衆芸術を研究する李英美は「JODKに関する研究は資料も少なく、ほとんどされていませんが、番組欄を見る限り当時の大衆歌謡を代表する音楽家が数多く出演しています。選曲も庶民の耳になじんだ曲が多い」と話す。
한국의 대중예술을 연구하는 이영미는 “JODK에 관한 연구는 자료도 적고 거의 손대지 않고 있었지만 프로그램 난을 보면 당시의 대중가요를 대표하는 음악가가 적지 않게 출연하고 있었습니다. 선곡도 서민의 귀에 익은 곡이 많았어요” 라고 말한다.
が、こうした雰囲気も長くは続かない。流行歌手だった白年雪が1942年ごろ、スタジオで2カ月間毎日歌ったのは、軍歌「息子の血書」だった。古賀もやがて“雄たけび調”でニュースを読むようになる。
그러나 이런 분위기도 오래 계속되지 않았다. 유행가수였던 백연설이 1942년경 스튜디오에서 2개월간 매일 노래한 것은 군가인 “아들의 혈서” 였다. 고가도 얼마 후에 호령하는 듯한 어조로 뉴스를 읽게 된다.
(2)KBS「歌謡舞台」
KBS ”가요무대”
伝統文化になった懐メロ紹介番組
전통문화가 된 그리운 멜로디 소개프로
戦前、戦中の朝鮮放送協会を引き継ぐ形で戦後設立されたKBS(韓国放送公社)。今では衛星放送を含めテレビ、ラジオに複数のチャンネルをもつ。2002年には韓流ブームのきっかけをつくったドラマ「冬のソナタ」も放映された。
전전, 전시의 조선방송협회를 인계한 모양새로 전후에 설립된 KBS(한국방송공사). 지금은 위성방송을 포함 TV, 라디오에 복수채널을 가지고 있다. 2002년에는 한류 붐의 계기를 만든 드라마 “겨울의 소나타”도 방영되었다.
そんなKBSに、年配者を中心とした大衆歌謡のファンが楽しみにするテレビ番組がある。毎週月曜の夜に放送される「歌謡舞台」。1985年11月のスタートだから歴史はほぼ四半世紀。懐メロを紹介するのはこの番組ぐらいだという。
그런 KBS에 중 장년층을 중심으로 대중가요 팬들이 즐기는 TV 프로그램이 있다. 매주 월요일 밤에 방송되는 “가요무대”. 1985년11월에 스타트했으니까 그 역사는 거의 4반세기가 된다. 그리운 멜로디를 소개하는 것은 이 프로그램 정도라고 한다.
「韓国の歌謡曲を埋もれさせない。そんな気概で番組をつくってきました」。そう話すのは70年代にヒット曲「楽しいアリラン」(歌・金相姫)などを作曲した金康燮。KBS管弦楽団長・音楽顧問として、3年前まで「歌謡舞台」の選曲や構成などに携わっていた。
“한국의 가요곡을 묻어버릴 수는 없다. 그런 기개로 프로그램을 만들어 왔지요” 그렇게 말하는 이는 70년대에 히트곡 “즐거운 아리랑”(노래: 김상희) 등을 작곡한 김강섭이었다. KBS관현악단장, 음악고문으로서 3년 전까지 “가요무대”를 위한 선곡과 구성 등에 종사했었다.
韓国の大衆歌謡は、50年代にポップス、60年代にはロック、70年代はフォークへと若者たちの熱狂が移りゆく中で、70年代後半にはほとんど聞かれなくなっていた。
“한국의 대중가요는, 50년대 팝, 60년대 록, 70년대 포크로 젊은이 들의 열광이 변해 가는 과정에서 70년대 후반부터는 거의 들을 수 없게 되었다.
そんなとき、81年に全斗煥大統領が「伝統文化の創造的継承」を政策として掲げる。これを受けてKBSでも「昔の歌謡をよみがえらせる」方針で、公開収録の「歌謡舞台」が始まった。
그런 때에 1981년 전두환대통령이 “전통문화의 창조적 계승”을 정책으로 들고 나왔다. 이것을 받아 KBS에서도 “옛 노래를 되살린다”는 방침을 세워 공개 수록한 “가요무대”가 시작되었다.
「他郷暮らし」「木浦の涙」…。スタート時は30年代から50年代の大衆歌謡の名曲を中心に構成され、ときにはその歌を吹き込んだ往年の人気歌手も出演した。「涙に濡れた豆満江」を熱唱する金貞九らに感動するファンも多かったという。
“타향살이” “목포의 눈물” 등등. 스타트할 때에는 30년대부터 50년대의 대중가요 명곡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때로는 그 노래를 취입한 왕년의 인기가수도 출연했다. “눈물 젖은 두만강”을 열창한 김정구 등에 감동하는 팬도 많았다고 한다.
金康燮は「当時40歳以上の世代にとって大衆歌謡は耳になじんでいました。なのに放送がなかった。だから『歌謡舞台』の登場を喜んでくれましたね。激動の時代を生きた人々は自身の半生と歌を重ね合わせる機会を得たのでしょう」と話す。
김강섭은 “당시 40세 이상 세대에게는 대중가요가 귀에 익었다. 그럼에도 방송되지 않았지요. 그래서 “가요무대”의 등장을 기뻐해 주었지요. 격동의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은 자신의 반생과 노래를 오버랩 하는 기회를 얻은 거겠지요” 라고 술회했다.
名物アナウンサー、金東建の語り口も人気を呼び、番組は爆発的にヒットした。毎回、「哀しみ」「花」「母」などテーマが決められ、それにちなんだ曲が並ぶ。当初はベテラン歌手が出演していた。やがて歌唱力のある若い歌手たちが、自分の持ち歌のほかに昔の曲を歌うようになった。
명 아나운서 김동건의 말솜씨로 인기를 더하고 프로그램은 폭발적으로 히트했다. 매회 “슬픔” “꽃” “어머니” 등의 테마가 결정되고 그에 연관 있는 곡이 선곡된다. 당초는 베테랑가수가 출연했었다. 차차 가창력이 있는 젊은 가수들이 자신의 노래 외에 옛날노래를 부르게 되었다.
誰にどの歌を歌わせるか。入念な話し合いの中心にいたのが金康燮だ。現在77歳。若いころに李蘭影や高福壽ら大歌手のレコーディングにピアノ担当として立ち会ったこともある。
누구에게 무슨 노래를 부르게 할 것인가? 깊이 논의하는 중심에 있었던 김강섭은 현재 77세. 젊은 시절 이난영, 고복수 등 대가수의 레코딩에 피아노 담당으로 자리를 같이 한적이 있다.
「私は昔の歌手やその雰囲気を直接知っていたから、番組のイメージをうまくリードできたと思います」
“나는 옛날 가수와 그 분위기를 직접 알고 있었으니까 프로그램의 이미지를 잘 리드할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懐メロ番組は日本でも「NHK歌謡コンサート」など数えるほどしかないが、KBSの「歌謡舞台」は放送1千回を超える長寿番組。
그리운 노래 프로그램은 일본에서도 “NHK가요콘서트” 등 셀 수 있는 정도이지만 KBS의 “가요무대”는 방송 1000회를 넘는 장수 프로그램이다.
2005年には光復60周年で「国民歌手特集」を10回連続で行い、戦前の金貞九や南仁樹ら、戦後の李美子や趙容弼らの名曲を紹介した。
2005년에는 광복60주년으로서 “국민가수특집”을 10회 연속 상연했고, 전전의 김정구, 남인수, 전후의 이미자, 조용필 등의 명곡을 소개했다.
気になるのは番組の今後。最近の視聴率は10%を割り込んでいるという。視聴者の世代交代も進む。大衆歌謡におそらく関心はない若い世代の登場。Kポップなど新しい音楽に流れるのは必然だろう。
마음에 걸리는 것은 프로그램의 장래. 최근의 시청률은 10%로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시청자의 세대교체도 진행된다. 대중가요에는 아마도 관심이 없어하는 젊은 세대의 등장. K팝 등 새로운 음악으로 흘러가는 것은 필연일 것이다.
だが金康燮は「心配ありませんよ。今の若者も年をとれば昔の歌謡曲の情緒を好むようになる。民族の歌なのだから。番組は続くでしょう。やめるべきではない」と強気だ。
그러나 김강섭은 “걱정 없어요. 지금 젊은이도 나이 들면 옛 가요곡의 정서를 좋아하게 됩니다. 민족의 노래니까요. 프로그램은 계속하겠지요. 그만 둘 일이 아니지요” 라고 의욕적이다.
もう一つ、番組を続ける理由がある。「歌謡舞台」はアメリカやドイツ、リビア、日本などで幾度も海外収録を行ってきたのだ。
또 하나 프로그램을 계속할 이유가 있다. “가요무대”는 미국, 독일, 리비아, 일본등지에서 몇 번이고 해외에 나가서 수록해왔다.
今や国際的な評価も高い。またKBSの国際放送を通じて、海外に暮らす韓国人たちの郷愁を誘ってきた。
이제는 국제적인 평가도 높다. 또한 KBS의 국제방송을 통해서 해외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의 향수를 달래 왔다.
「世界各地に散らばる同胞たちの反響は大きい。その声は常に意識しておくべきでしょう」
“세계각지에 흩어져 있는 동포들의 반향은 큽니다. 그 소리를 항상 의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金康燮の願いでもある。
김강섭의 바람이기도 하다.
(다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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