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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상은 나치 독일의 선전 장관 요제프 괴벨스의 말을 인용하며, 어떤 나라를 침략하면 그 나라 국민이 레지스탕스, 협력자, 그리고 대다수의 민중 세 부류로 나뉜다고 설명합니다 [00:24].
일본이 조선을 침략했을 때도 독립운동가, 친일파, 그리고 혼란에 빠진 민중으로 나뉘었으며 [01:15], 일본은 식민지 근대화론을 내세워 민중을 친일파 편에 서게 하려 했습니다 [01:33].
일본은 친일파를 앞세워 조선의 땅, 쌀, 이름, 말, 심지어 생명까지 빼앗았습니다 [01:59].
이에 맞서 독립운동 세력은 해외로 나가 임시정부를 세우고 독립군을 조직하여 필사적으로 싸웠습니다 [02:14].
반면 친일파들은 독립군을 비웃고, 심지어 일본군이 되어 독립군을 잡아 죽이는 데 직접 나서기도 했습니다 [02:38].
독립군들은 친일파들을 증오하여 암살을 위한 비밀 조직을 결성하기도 했습니다 [03:05].
일본이 항복하자 상황은 역전되었고, 친일파들은 숨어버렸습니다 [03:52].
그러나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를 38선으로 분할 점령하기로 합의했습니다 [04:07].
1945년 9월 8일 미군이 서울에 들어오자 한국인들은 자주적인 통일 국가를 세우려는 독립운동 세력, 미국에 복종하는 친일파, 그리고 혼란에 빠진 민중으로 다시 나뉘었습니다 [04:30].
미군정은 친일 경찰과 관리들을 복귀시켜 자주 독립 세력을 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05:03].
1945년 10월, 이승만이 귀국하고 이어 김구가 상해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국내로 들어왔습니다 [05:38].
국내 독립운동가들은 임시정부의 수장 김구보다 프린스턴 박사 학위를 가진 이승만에게 기대를 걸었습니다 [06:00].
그러나 미국 CIA 문서에는 이승만이 사적인 권력을 채우기 위해 독립운동을 했으며, 자신의 출세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는 충격적인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06:43].
이승만은 몰락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일찍이 미국 선교사를 통해 기독교를 접하고 미국의 힘을 배웠습니다 [07:32].
그는 목회자가 되겠다는 서약을 하고 조지 워싱턴 대학에 편입하여 미국 장로교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프린스턴에서 2년 만에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08:07].
그는 하버드에 편지를 보내 석사 학위까지 받는 등 비상한 머리로 미국인들과 거래하는 능력이 뛰어났습니다 [09:01].
1913년 하와이에 도착한 이승만은 박용만이 설립한 독립군 부대와 사관학교와 달리 교민 교육 사업을 진행했습니다 [10:35].
그는 호놀룰루 신문에 일본을 비난하지 않고 반일 감정을 일으킬 생각이 없다고 썼으며 [11:15],
워싱턴 포스트와의 기자회견에서는 일본의 식민 지배가 한국을 발전시켰다고 말했습니다 [11:45].
이는 일본의 식민지 근대화론과 동일한 주장이었습니다 [12:10].
그는 미국과 일본의 관계가 좋을 때는 일본의 조선 지배를 극찬하며 미국인들의 비위를 맞추고, 한국인들과 있을 때는 반일 의식이 강한 교육자로 변신하는 이중 플레이를 통해 하와이 한인 사회 지도자로 급부상했습니다 [13:15].
이승만은 자신을 안중근과 같은 독립투사로 보이려 했고, 감옥에서 고문을 당해 손끝이 시리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14:17].
사실 그는 일제 강점기 때 한국에 머문 적이 거의 없었고, 감옥살이는 고종황제 때 한 것이 전부였습니다 [14:47].
그러나 순진한 한인들에게는 이러한 거짓말이 잘 먹혔고, 열성적인 지지자들이 몰려들었습니다 [15:16].
그는 추종자들에게 맹목적으로 자신을 따르라고 요구했습니다 [15:48].
이승만의 첫 번째 목표는 박용만을 지지하는 하와이 국민회를 장악하는 것이었습니다 [16:00].
국민회는 미주 지역 최대의 독립 자금 조달처였고, 이승만은 자신의 추종자들을 이끌고 국민회를 장악하기 위해 싸웠습니다 [16:10].
그는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테러까지 동원하며 국민회를 장악했고 [17:28],
국민회 재산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돈을 챙기고 자기 소유로 만든 국민회 재산을 매각하여 목돈을 챙기는 부동산 재테크를 했습니다 [17:45].
이는 독립운동을 빙자한 횡령 범죄로, 현재 법률로는 징역 7년 이하의 형에 처해지는 죄였습니다 [18:59].
이승만이 장악한 국민회의 공금 집행에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나타나자, 이승만은 추종자들을 동원해 물증을 빼앗고 입을 막으려 했습니다 [19:41].
그는 재정 문제를 제기한 국민회 대의원들을 경찰에 고발하며 폭동이나 소요를 일으킬 수 있는 위험 인물로 몰았습니다 [20:28].
1918년 2월 27일 재판이 시작되자 이승만은 법정 증인으로 나와 미국 판사에게 박용만 패당이 미국 영토에 한국인 군대를 만들고 위험한
반일 행동을 하며 미국과 일본 사이에 중대 사건을 일으켜 평화를 방해하려 한다고 증언했습니다 [20:42].
이는 자기 조국에 대한 명백한 반역 행위였습니다 [21:27].
1919년 3월, 한국에서는 200만 명이 참가한 독립 시위가 벌어졌고, 일본은 이를 무자비하게 진압했습니다 [23:14].
그러나 조선인들의 독립 의지는 꺾이지 않았고, 수많은 민중들이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이 되어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습니다 [23:30].
이때 저명한 독립운동가들은 중국 상해에 모여 임시정부 수립을 준비했고,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헌법을 만들며 독립운동의 최고 지도자를 선출하는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23:49].
다수의 독립운동가들은 이승만을 최고 지도자로 추천했습니다 [24:09].
이는 기호파 신진 세력이 미국에서 활동하고 자신들과 교분이 가까운 이승만을 쉽게 꼽았기 때문이었습니다 [24:19].
결국 돈과 출세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인물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25:07].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제일 먼저 임시정부의 돈줄부터 장악하려 했습니다 [25:24].
그는 워싱턴에 구미 위원부를 설립하고 독립운동에 쓰겠다며 국채를 발행해 돈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25:33].
그는 임시정부가 이미 모으고 있던 독립운동 성금 모금을 중단하라고 명령하고, 정부에서 거둔 돈도 전부 넘기라고 요구했습니다 [25:50]. 그러나 기호파 세력이 아닌 임정 요인들은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26:02].
임시정부는 한인들이 내는 성금으로 국내 비밀 조직을 확대하고 만주의 독립군 부대를 통합하며 본격적인 독립 전쟁 준비에 착수했고, 캘리포니아에 비행학교를 세워 공군 창설까지 추진했습니다 [26:16].
그러나 이승만은 집요하게 재정권 장악을 추진했고, 1920년 3월 결국 독립 성금을 둘러싼 갈등은 이승만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26:39].
그러자 임시정부는 사분오열되었습니다 [27:01].
이승만은 돈줄을 장악한 후 미국 대륙을 돌아다니며 대대적인 모금 활동을 벌였고, 22살짜리 여대생과 여행하며 최고급 레스토랑과 호텔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즐겼습니다 [27:30]. 샌프란시스코에서 미국 수사관들에게 잡힌 이승만은 부도덕한 성관계를 목적으로 주 경계선을 넘는 것을 금지하는 법을 어긴 혐의로 기소되었습니다 [27:59].
그는 백인 여자들에게도 접근해 데이트를 즐겼던 것이 드러났습니다 [28:40].
이 사건이 한인들에게 알려지면 독립 성금을 받을 수 없게 될 것을 우려한 이승만은 비밀리에 백인 유력 인사들의 도움을 받아 위기에서 벗어났습니다 [29:03].
1920년 10월, 일본은 만주의 독립군을 초토화시키기 위해 대규모 병력을 동원했고, 홍범도와 김좌진은 부대를 이끌고 청산리 일대에 집결했습니다 [30:27].
3천여 명의 독립군은 3만 5천 명의 일본군에 맞서 6일간의 대격전을 벌여 일본군을 크게 박살 내는 전과를 올렸습니다 [30:43]. 이 전투에서 일본은 조선인 독립군에게 치욕적인 패배를 맛보았습니다 [31:19].
그러자 일본군은 조선인 민가들을 습격하며 소름 끼치는 대학살을 저질렀습니다 [31:40].
상해 임시정부는 발칵 뒤집혔고, 강경파와 온건파가 대립하는 상황에서 이승만이 상해로 왔습니다 [31:50].
임정 요인들은 이승만을 환영하고 정부 개혁 방안들을 건의했지만, 이승만은 모조리 거부했습니다 [32:20].
결국 정부 요인들은 폭발 직전에 이르렀고, 이승만은 대통령 교서를 발표했습니다 [32:47].
그의 독립운동 전략은 전쟁 준비를 국민들에게 맡기고, 국민들은 여가 시간에 병법을 연마하고 무기를 각자 구비하며, 좋은 시기가 오면 나서서 싸우자는 것이었습니다 [33:19].
독립운동가들은 이승만의 허무맹랑한 전략에 울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34:16].
임시정부 수립 후 한인들은 독립 성금을 냈고 정부는 예산을 편성해 독립군 부대를 양성했는데, 이승만은 성과도 못 내는 외교 활동을 내세우며 13%만 송금했습니다 [34:32].
독립 전쟁 준비를 모두 국민들에게 떠넘기면 이승만 정부에 보내야 할 돈을 더 파격적으로 줄일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34:59].
결국 임정 요인들은 이승만에게 물러나라고 요구했지만, 이승만은 이를 거부했고 상황은 파국으로 치달아 국무총리 김규식과 안창호마저 임정을 떠났습니다 [35:09].
이승만은 결국 럭셔리 레스토랑이 있는 미국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36:25].
1924년 상해에서는 임정을 개혁하려는 독립운동가들이 의정원의 실권을 장악하고 이승만의 대통령 권한을 정지시켰습니다 [36:45].
미국에서 이 소식을 들은 이승만은 독립운동의 자금줄을 완전히 끊어버렸습니다 [37:04].
악질 친일파를 능가하는 이승만의 행동에 임시정부는 이승만을 탄핵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지만, 이승만은 돈을 가진 자가 정치 권력에서 헤
게모니를 쥘 수 있다는 발상으로 돈줄을 끊어버렸습니다 [37:35].
그 뒤 임정은 새 출발을 하려 했지만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38:13].
이때 별로 주목받지 못했던 김구가 임시정부의 새로운 지도자로 떠올랐습니다 [38:26].
그는 나라를 잃은 분한 마음에 일본 첩자를 맨주먹으로 때려잡았던 터프한 남자였고, 조국이 독립할 수만 있다면 임정의 문지기가 돼도 좋다는 순정파 로맨티스트였습니다 [38:37].
김구는 냉정한 국제관계를 정확히 파악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현실적인 독립운동 전략을 세웠습니다 [39:07].
그는 상해 일본군 사령부, 국내 조선총독부, 만주의 관동군, 도쿄의 일본 천황까지 직접 타격하는 목표를 설정하고 이를 위해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1932년부터 실행에 들어갔습니다 [39:27].
목표 달성은 쉽지 않았지만, 그때 운명처럼 김구를 찾아온 청년이 윤봉길이었습니다 [40:00].
윤봉길의 희생은 어리석은 짓이 아니었고, 장제스 총통은 한국의 레지스탕스들을 전폭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했습니다 [41:31].
드디어 임시정부가 독립운동에 새로운 활로를 개척한 것입니다 [41:56].
일본과 미국이 친할 때는 외교 노선이 제약되었던 이승만은 일본이 미국의 적이 되자 화려하게 변신했습니다 [42:41].
그는 자신을 반일 항전의 투사로 변신시켜 미국의 유력자들과 접촉하며 다시 최고 권력자가 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43:06].
이때 임시정부는 연합국의 일원으로 대전에 참전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고, 미국의 전략 정보국이 한국인들을 대전에 활용하는 전략을 세우면서 좋은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43:48].
미국은 먼저 이승만과 접촉했지만, 그가 자신들과의 관계를 대외 선전용으로 이용한다고 판단하고 관계를 끊어버렸습니다 [44:02].
그리고 임시정부의 광복군에 직접 손을 내밀었습니다 [44:21].
1945년 5월, 마침내 임시정부는 OSS와 한미 공동 작전에 합의했습니다 [44:42].
이는 국내 진공 작전이라 불리는 이글 프로젝트였습니다 [44:42].
광복군 병사들은 힘든 훈련을 받으면서도 가슴이 벅찼습니다 [45:07].
만약 광복군이 국내로 들어가 직접 일본군을 몰아낸다면 임시정부가 한국의 독립에 대해 당당하게 발언권을 얻게 되고, 독립운동가들이 구상해온 새로운 민주주의 국가를 세울 수 있게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45:15].
그들은 인민의 자유와 권리를 최대한 보장하고 약자를 보호할 수 있는 사회경제적 합의를 이루는 나라, 즉 지금의 프랑스나 영국 같은 유럽
국가들과 가장 비슷한 나라를 꿈꿨습니다 [45:30].
임시정부의 이런 활발한 움직임에 이승만은 초조해졌고, 상황을 역전시킬 승부수를 찾았습니다 [46:49].
그는 연합군 총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를 공략하기로 결심하고 미친 듯이 러브레터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47:01].
물론 소련은 방해한 적이 없었지만, 이승만은 맥아더의 사랑을 얻기 위해 약간의 거짓말을 섞었고, 3일 후 맥아더에게서 답장이 왔습니다 [47:57].
원자 폭탄을 맞자 일본은 예상보다 빨리 항복을 선언했습니다 [48:33].
이는 독립운동가들에게 비극적인 소식이었습니다 [48:43].
국내 진공 작전을 실행하지 못했으니 한국인들이 당당하게 독립을 주장할 권리를 얻지 못하게 된 것이고, 강대국들이 한반도를 자기들 마음대로 이용하려 들 것이며 최악의 경우 미국과 소련의 꼭두각시가 되어 대리 전쟁을 치러야 할지도 모른다는 비통함에 독립운동가들은 울고 있었습니다 [48:56].
그러나 이때 이승만은 웃고 있었고, 신이 나서 맥아더를 향해 더욱 노골적인 구애를 했습니다 [49:35].
당시 맥아더는 도쿄에서 일본 문제를 처리하느라 바빴고, 연합국은 침략 전쟁의 책임자들을 처벌하라고 요구했습니다 [50:04].
히로히토는 전범 재판에 회부되어 사형을 받을까 봐 잠도 제대로 못 자는 상태였습니다 [50:17].
9월 27일 히로히토는 조용히 맥아더를 찾아가 정치적 거래를 시도했습니다 [50:26].
맥아더는 히로히토를 전범 재판에 회부하지 않았고, 그 대가로 미국은 일본에 미군을 계속 주둔시킬 수 있는 권리와 동북아 방위의 교두보를 확보했습니다 [51:07].
이제 다음 차례는 한반도 문제였고, 맥아더는 미국의 국익을 최대로 보장해 주는 인물을 원했습니다 [51:26].
1945년 10월 13일 이승만은 도쿄로 향했고, 한국의 미래가 결정될 운명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5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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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전쟁 Part 1] 두 얼굴의 이승만- 권해효 나레이션(풀버전)
https://youtu.be/idbhQx10-9A?si=W4ITkKpabObFyoE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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