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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박정윤 교수(경영학)
1974년 여름, 영남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던 해에 군 미필 상태로 한국외환은행 신입 행원으로 채용된 것은 참으로 행운이었다. 당시 은행에서는 군 미필자에 대해 받은 점수의 15%를 감점하여 선발했기 때문이다. 본점에서 근무하던 중, 1976년부터 서울대학교 야간 대학원 과정에 합격하여 2년간 석사 과정을 공부할 수 있었던 것도 좋은 기회였다.
미국에서 석사과정을 공부하게 된 배경
그 무렵 외환은행은 경영학, 경제학, 법학 전공자 중 매년 3명을 선발하여 해외 대학에서 석사 과정을 유학할 수 있는 제도를 운영하고 있었다. 전공 시험과 영어 시험 성적을 합산하여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사람이 최종적으로 선발되었다. 두 시험 모두 은행이 서울대학교에 의뢰하여 관리하였다.
은행에서는 많은 행원이 매월 영어 시험을 치르도록 장려하였고, 본인이 받은 최고 점수를 선발 시 사용할 수 있었다. 대구지점에서 근무할 때, 출장 허가를 받아 영어 시험을 치렀는데 은행 전체에서 1등을 하게 되었다. 따라서 경영학 시험 성적만 잘 나오면 해외 학술 연수자로 선발될 확률이 높다고 판단했다.
시험 당일, 경영학 시험 문제지를 받았을 때 마치 모든 문제가 나를 위해 출제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성적이 잘 나올 것 같은 예감이 들었고, 1977년 크리스마스 전날 인사부로부터 합격 통지의 전화를 받았을 때는 뛸 듯이 기뻤다. 삼일빌딩 안에 위치한 외환은행 본점 인사부로 가기 위해 신용조사부 별관 건물 밖으로 나섰을 때, 함박눈이 내려 나를 축복해주는 것 같았다.
유학을 떠나기 전에 결혼을 하기로 작정하였다. 같은 부서에서 일하던 여직원의 소개로 지금의 아내를 1978년 4월에 만나 7월에 결혼하였으니 제법 초고속으로 진행된 셈이다. 인사부에서는 서둘러 대학을 선정하여 1년 이내에 유학을 떠나도록 독려하였다. 다행히 미리 유학을 떠난 은행 동료가 연락을 해와 자신이 공부하고 있는 Arizona State University로 오면 입학 허가를 신속히 받을 수 있도록 돕겠다고 하여, 친구의 도움으로 순조롭게 유학 절차를 밟을 수 있었다.
생각보다 힘들었던 첫 유학생활
대학 시절, 누구보다 영어 공부를 열심히 했기에 나름대로 영어를 잘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미국 대학 강의실에서 수업을 들었을 때, 교수의 강의가 잘 이해되지 않았다. 어떤 과목은 담당 교수에게 양해를 구하고 강의를 녹음해 집에서 다시 들었지만,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결국 교재를 더 열심히 읽으며 학습 내용을 이해해야 했다.
유학을 떠날 당시만 해도 성적이 잘 나오면 박사과정까지 공부하여 교수가 되겠다는 꿈을 품고 있었다. 밤늦게까지 힘을 다해 공부했지만 성적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고, 대학원 입학 허가에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 GMAT(Graduate Management Admission Test) 성적도 좋지 않았다. 나는 공부할 자질이 부족하다고 판단하고, 교수의 꿈을 접은 채 은행에서 성실히 근무하다가 해외 지점에서 한 번 근무해보는 것을 새로운 목표로 삼았다. 그렇게 1980년 여름, 귀국하게 되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2년간의 유학 생활 속에 좋은 일도 많았다. 경영학 석사 학위를 받은 것 외에도 딸이 그곳에서 태어났고, 신앙이 깊은 친구가 일요일 아침마다 열정적으로 전화해준 덕분에 한인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다. 설교 시간에 졸기도 했지만, 예배 후 성도들과 함께 식사하며 교제한 시간은 무미건조한 유학생활 속에서 큰 즐거움이었다. 유학생들과 함께 그랜드 캐니언을 구경했고, 캘리포니아와 라스베이거스 등 여러 곳을 여행한 추억도 아름답게 남아 있다.
경영학 교수 양성 유학생 선발시험에 낙방한 이유
1980년 여름, 귀국 후 외환은행 본점 조사부에서 국내 경제 조사역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대리로 승진하기 위해서는 시험을 치러 합격해야 했지만, 나는 외국에서 유학하던 시기에 승진 시점이 되어 시험 없이 대리로 승진할 수 있었다.
조사역으로서 맡은 주요 업무는 매월 발간되는 조사월보에 필요한 자료를 점검하고, 영문 월보를 편집하는 일이었다. 조사부에서 1년간 근무하는 동안 「기업의 상품선물시장 활용」이라는 주제로 논문을 작성하여 조사월보에 게재하였고, 「Korea’s Banking Reform」이라는 제목의 논문도 Monthly Review에 실었다.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은행 생활이 따분하게 느껴졌다. 유학 시절에는 은행의 넉넉한 경제적 지원 덕분에 여유롭게 생활했지만, 국내에서는 인플레이션의 영향으로 대리 월급만으로는 빠듯한 생활을 해야 했다. 경제적 여유가 없자 다시 박사과정을 공부하여 교수가 되고자 하는 소원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문교부에서 IBRD(국제부흥개발은행; 세계은행) 자금으로 경영학 교수 양성을 위한 해외 유학 대상자를 선발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총 50명을 선발할 예정이었다. 시험에 응시한 결과, 영어 시험과 전공 시험 모두 1차 합격 통보를 받았다. 2차는 면접 시험이었는데,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수업을 받았던 교수가 면접관으로 참여했다. 특별한 실수는 없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1차 시험 합격자가 약 30명이라는 정보를 들었고, 50명을 선발할 예정이었기에 면접에서 결정적인 실수가 없었다면 당연히 합격할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전화로 합격 여부를 확인했을 때, 담당자는 내 이름이 명단에 없다고 알려주었다. 이상했다. 왜 낙방했을까?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제출한 GMAT 성적이 기대하는 기준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일 것으로 추정된다.
기대하지 못한 은사의 제안
경영학 교수 양성 유학생 선발시험에 불합격한 뒤 한동안 실의에 빠져 있었다. 그러던 중, 영남대학교 은사 한 분을 찾아뵙고 인사를 드렸다. 외환은행에서 유학을 다녀온 이야기를 말씀드리자, 그분께서 “경영학과에서 재무관리를 가르칠 교수를 한 사람 채용할 계획이 있다”고 하시며, 모교에 올 계획이 있다면 나를 추천해주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전혀 뜻밖의 제안이라 바로 답을 드릴 수 없었고, 우선 생각해보겠다고 말씀드렸다.
원래 나의 계획은 박사과정을 마친 후 교수가 되는 것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먼저 영남대 교수로 올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다. 그러나 큰 걸림돌이 하나 있었다. 은행으로부터 2년 동안 유학에 필요한 등록금과 생활비를 전액 지원받았기 때문에, 최소한 2년간은 은행에서 의무적으로 근무해야 했다. 전직을 고려하던 시점에 이미 1년을 근무한 상태였기에, 나머지 1년에 해당하는 금액을 상환해야 했다.
결국 퇴직금으로 일부를 상계하고, 부족한 금액은 다른 은행에서 차입하여 상환한 뒤 1981년 2학기에 경영학과 교수로 발령을 받았다. 그런데 교수로 채용되기 위해서는 논문 두 편을 제출해야 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미국에서는 경영학 석사학위를 받기 위해 졸업시험에 합격하면 되었기 때문에 학위논문이 없는 상태였지만, 외환은행 조사부에서 근무할 때 작성하여 게재한 두 편의 논문이 아주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세밀하게 인도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또한 강의 경력 증명서도 필요했는데, 조사부에서 근무하던 시절 저녁 시간에 성균관대학교와 단국대학교에서 강의한 경험이 있어 이를 제출할 수 있었다.
다시 박사과정 유학을 준비하다
처음으로 교수 생활을 시작하니, 강의 외에도 승진을 위해 논문을 작성해야 했다. 또한 교수로서 박사학위를 받는 것이 당연한 과제로 여겨졌다. 당시 영남대학교는 재직 교수가 해외에서 박사과정을 공부할 경우, 최대 3년까지 기본급을 지급하며 교수 신분을 유지할 수 있는 제도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몸이 너무 피곤하여 병원에서 검진을 받았는데 간 기능 수치가 높고 B형 간염 보균자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이제 해외 유학은 물거품이 되고 마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즈음, 알고 지내던 목사님이 인도하는 부흥집회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그분이 나를 보자마자 이렇게 말씀하셨다. “박 집사님, 피곤하시지요. 그런데 3일 금식기도를 하면 건강해질 수 있습니다.”
마침 처남 목사도 전화를 걸어왔다. “내가 수원 칠보산 기도원에 갈 계획인데, 현미 아빠도 시간이 되면 같이 가면 좋겠어요.” 나는 유학 문제를 놓고 기도하기 위해 처남과 함께 기도원에 가기로 약속했다. 그렇게 해서 난생처음 3일 금식기도를 하게 되었다. 처남은 밥을 먹지 않는 대신, 목마를 때마다 생수를 마시도록 금식 요령을 알려주었다.
기도원에서 첫날은 설교를 들으며 보냈다. 그런데 둘째 날 새벽, 잠을 자고 있던 중 마음을 가득 채우는 성경 말씀이 떠올랐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새벽 집회를 알리는 종소리에 일어나자마자 그 말씀을 노트에 기록하고 성경을 뒤적였더니, 빌립보서 4장 13절이었다.
나는 이 말씀을 우선 3일 금식기도에 적용해보았다. 내 힘으로는 금식기도를 마치는 것이 어렵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는 가능하다는 믿음이 생겼다. 또한 박사과정 유학도 내 힘만으로는 어려울 수 있지만,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의지하면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마침내 고민하던 유학 문제가 해결된 셈이었다.
TOEFL과 GMAT 시험을 준비할 때는 학교 연구실 책상 위에 성경을 펼쳐두고 먼저 말씀을 읽은 후 문제집을 풀었다. 신기하게도 성경을 읽고 기도한 후 공부한 날은 그렇지 않은 날보다 진도가 더 잘 나갔고, 마음도 평안해지는 것을 체험했다. 이렇게 준비한 결과, 두 시험 모두 미국 대학의 박사과정 입학 기준을 넘는 점수를 받을 수 있었다.
여덟 개 대학에 지원서를 보냈고, 그중 네 곳에서 입학 허가를 받았다. 그런데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한 학과에서 해외 유학을 갈 수 있는 인원은 전체 교수의 10% 미만이어야 한다는 인사 규정이 있었기 때문에, 나보다 먼저 미국에서 공부 중이던 선배 교수가 귀국해야만 내가 출국할 수 있었다. 선배 교수의 귀국이 늦어지자 부득이하게 한 학기 지체되었다. 그래서 입학 허가를 받은 네 개 대학에 사정을 설명하고 입학 허가를 연장해달라고 요청했는데, 그 가운데 렉싱턴에 소재한 University of Kentucky만 입학 허가 기간을 연장해주었다.
Donald J. Mullineaux 박사를 지도 교수로 선정한 이유
박사과정 유학 절차를 모두 마치고, 1985년 1월 아내와 두 자녀를 데리고 렉싱턴 공항에 도착하자 현지 한인교회 목사님과 성도들이 마중 나와 주었다. 첫 주일, 담임 목사님은 우리 가족을 교회에 소개하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제 박 교수 가정은 우리와 4~5년 함께 지내게 될 것입니다.” 이에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목사님, 짧을수록 좋습니다.” 당시 영남대학교는 3년까지만 휴직을 허락했기 때문에, 내 머릿속에는 반드시 3년 안에 학위를 마쳐야 한다는 각오가 자리 잡고 있었다.
첫 학기부터 나는 빌립보서 4장 13절과 잠언 3장 5~6절 말씀을 종이에 적어 모든 교재에 책갈피로 사용했다. 공부에 앞서 반드시 성경을 읽고 기도한 후 수업을 들었다. 그 결과, 첫 학기에 수강한 세 과목 모두 A학점을 받았다. 다음 학기에도 좋은 성적을 유지하자 반 장학금에서 전면 장학금으로 전환되었고, 등록금 면제와 함께 매월 생활비까지 지원받는 경제적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모든 코스워크를 마친 후 종합시험을 준비할 때도 기도하며 임했고, 1차에 합격하였다. 이제 논문 작성을 위해 지도교수를 선정해야 했다. 이때 떠오른 말씀은 잠언 15장 22절이었다. “의논이 없으면 경영이 무너지고, 지략이 많으면 경영이 성립하느니라” 이 말씀에 따라 재무관리 학과장과 금융기관론을 강의하던 교수를 지도교수 후보로 생각하고, 내가 구상하던 연구 주제를 간단히 정리해 두 교수에게 전달하며 의견을 부탁드렸다. 학과장 교수는 궁금한 점만 지적했지만, 금융기관론 교수는 주제가 너무 복잡하니 연구 범위를 좁히는 것이 좋겠다며 대안까지 제시해 주었다. 그 조언을 듣고 나는 금융기관론 교수에게 지도교수를 부탁하기로 마음먹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그 교수는 금융기관에서 근무하다가 대학으로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석좌교수로서 유명 저널에 다수의 논문을 게재한 분이었다. 그의 이름은 Donald J. Mullineaux였다. 나는 곧장 Mullineaux 교수를 찾아가 지도교수가 되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렇잖아도 Mr. Park이 찾아올 줄 알았어요. 그런데 제가 지도하는 학생이 많으니 다른 교수와 공동 지도를 했으면 좋겠어요.” 나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며, 다른 세 분의 위원도 추천해 달라고 부탁드렸다. 그렇게 지도위원회를 구성할 수 있었다.
당시 금융 분야에서는 주식의 인플레이션 헤지 효과에 대한 실증 분석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었다. Mullineaux 교수는 Fama와 Schwert의 공동 연구 논문을 주며, 그 방법론을 활용해 부동산 투자신탁(REITs)의 인플레이션 헤지 여부를 검증해보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했다. 나는 그 제안을 받아들여 연구를 시작했다.
실증 분석에 필요한 자료는 도서관에서 수작업으로 수집해야 했는데, 다행히 한 학기 전 재무관리 교수의 연구조교로 일할 때 이미 미국 재무성 증권의 일별 수익률 자료를 모두 수집해 두었던 것이 기억났다. 그 교수에게 다시 요청하자 흔쾌히 자료를 제공해 주셨고, 덕분에 자료 수집에 드는 시간을 크게 절약할 수 있었다. 연구조교로서 수집했던 자료가 내 박사 논문에 그대로 활용되다니,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자료 수집을 마친 후 통계 분석을 시작했고, 분석 결과를 바탕으로 논문을 부분적으로 작성해 지도교수에게 전달하며 지도를 받았다. 외국 학생이 쓴 논문이라 부족한 점이 많았지만, Mullineaux 교수는 매번 신속하게 교정을 해주었다. 약 9개월이 지나 중간 발표를 할 수 있었고, 발표 후 계량경제학 교수의 날카로운 비평에 걱정이 많았다.
그러나 그 지적을 충실히 반영해 최종 발표를 마쳤을 때, 같은 교수로부터 “아주 좋은 논문이며 유명 저널에 게재 신청을 해도 좋겠다”는 칭찬을 들었다. 어리둥절할 정도로 놀라운 순간이었다.
코스워크를 마치는 데 2년이 걸렸고, 논문 완성까지는 1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결국 3년 이내에 박사 과정을 마칠 수 있었고, 모든 심사위원 부부를 저녁 식사에 초대해 감사의 시간을 가졌다.
학위 논문을 저널에 직접 투고하고 싶었지만, 귀국 일정이 촉박해 Mullineaux 교수에게 대신 게재 신청을 부탁드렸다. 그는 귀찮은 기색 없이 흔쾌히 수고를 맡아주었고, 귀국 후 2년 만에 「Are REITs Inflation Hedges?」라는 제목으로 The Journal of Real Estate Finance and Economics(Park, Mullineaux, and Chew, 1990)에 게재된 인쇄본을 우편으로 보내주셨다.
박사과정 유학의 성공 요인
석사과정 유학 당시에는 공부할 자질이 부족하다고 판단하여 교수의 꿈을 포기했었다. 그런데 박사과정 유학은 어떻게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을까?
첫째,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유학생활을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다는 능력의 말씀—“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립보서 4장 13절)—을 약속받고, 그 말씀이 이루어질 것을 신뢰하였다.
둘째, 매일 성경을 읽으며 말씀을 통해 삶의 지혜를 얻고 실천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지도교수를 선정할 때는 “의논이 없으면 경영이 무너지고, 지략이 많으면 경영이 성립하느니라”(잠언 15장 22절)라는 말씀을 통해 지혜를 얻었다.
셋째, 기도회를 통해 성도들과 함께 서로의 기도 제목을 나누며 기도한 것이 큰 유익이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회를 시작하도록 두 차례 인도하셨다. 한 번은 교회에서, 또 한 번은 어느 성도의 집에서 기도회를 인도하게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약속하셨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한복음 15장 7절).
넷째, 두 가지 일이 갈등을 일으킬 때는 하나님 나라를 우선적으로 선택하였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 배운 삶의 원리이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태복음 6장 33절). 여기서 ‘이 모든 것’은 의식주를 포함한 경제적인 문제를 의미한다. 실제로 유학생활 3년 동안 장학금을 지급받아 경제적으로 부족함이 없었다.
다섯째, 찬양과 감사가 넘치는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유학 시절에 작은 고난도 있었지만, 기도할 때마다 문제를 해결해주셨기에 다윗의 고백처럼 찬양이 내 입에서 넘쳤다.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시편 40편 3절). 유학생활 중 우왕좌왕하며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지만, 하나님께서는 평온함 가운데 기뻐하는 삶을 살게 하셨고, 결국 박사학위 취득이라는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셨다.
짧지 않은 두 번의 유학생활을 통해 내가 깨달은 것은, 모든 일이 내 계획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걸음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언 16장 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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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교수님, 진솔하게, 전공으로 들어가서 오늘까지 학자로 이끌어오는 과정을 보여주시는, 옥고에 정말 감사드립니다. 고비마다 아슬아슬하게 작용하신 힘을 선명하게 느끼게 합니다. 또 원고를 깔끔하게 편집해 보내셨기 때문에 별로 손댈 곳도 없었습니다. 더욱이 "이제 숙제 끝냈어요!"라며 달아놓으신 말씀이 가슴을 '쿵' 하게 했습니다. 숙제 끝내심을 축하드리고, 그리고 많이 부담드려 죄송합니다. 그런데 아직도 숙제의 하나로 관련 사진을 주시면 더욱 좋겠습니다. 많이 배웠습니다!
김정숙 교수님
바쁘실텐데
저의 글을 수필작가의 섬세한 손으로 잘 편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행복한 부자학회 밴드회원들과 공유하였습니다
즐거운 한날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