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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사정동백나무(錦社亭冬柏)와 정문손(鄭文孫)
본관은 하동(河東)이요. 자는 광윤(光胤), 호는 모효재(慕孝齋)다. 成宗 4년 癸巳年(西紀一四七三年)출생 하시고, 明宗 9년 甲寅年(西紀一五五四年)에 82세로 생을 마치신 조선전기의 유학자 이다. 정문손(鄭文孫)은 중종(中宗) 정묘년(丁卯年 서기1507년)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경의(經義)로 선발되어 성균관에 들어갔다.
금사정은 조선 중종14 년(1519년)에 남곤, 홍경주, 심정 등 훈구파의 모함으로 정암(靜庵) 조 광조(趙光祖)를 비롯해 사림파 신진세력 100여명이 화를 당한 기묘사화(己卯士禍)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자, 당시 조광조(趙光祖)를 따르던 정문손(鄭文孫), 임붕(林鵬), 김두(金豆), 김식(金軾), 나일손(羅逸孫), 진이손(陳二孫), 진삼손(陣三孫), 정호(鄭虎), 김구(金臼), 김안복(金安福), 진세공(陳世恭) 등 나주출신 태학관(太學館)유생 11명은 이들의 구명을 위해 태학관 유생 200여명의 호응을 얻어 집단상소를 올렸다. 하지만 중종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즉시 귀향해 錦江(영산강)가에 아옥(芽屋)을 짓고 금강계(錦江契)를 조직했다. 주동 인물은 정 문손과 임붕 두 사람이 대표고 상소문은 정문손이 썼다.
이 일로 성균관에서 쫓겨난 후 조광조를 구명하던 태학관 유생 11명이 낙향하여 금강(錦江 영산강)가에 금강정(錦江亭)을 짓고 함께 축출된 11명과 소요하며 시를 읊조리고 노래하며 지냈는데, 정문손은 서로 더불어 익힌 공부는 ‘양심을 존하고 천성을 기르며 의리를 강명한다. 존심양성강의명리(存心養性講義明理)는 여덟 글자를 써서 금강정(錦江亭)벽 위에다 걸어두고 모여 놀면서 언제나 좋은 계절이 오면 강 위에다 배를 띄우고 흐름 따라 노닐었는데 스스로 자기수양을 갈고 닦으며 세상의 이치를 논했다.
그 때 누가 그 십일명(十一名)의 얼굴을 그리고 이름하여 금강계회도(錦江契會圖)라고 했었다. 한림(翰林) 나창(羅昶)은 공과 동서간이고 육봉박우(六峯朴祐)는 공과는 유별난 친구였는데 늘 그들과 함께 시를 읊곤 하였다,
모효공(鄭文孫)이 금강정(錦江亭)에다 쓴 시(詩)에 그의 정을 헤아릴 수 있는 시어를 남긴다
十載經營屋數椽 (십재경영옥수연) 십년에 걸쳐 집 한간 마련하니
錦江之上月峰前 (금강지상월봉전) 금강위에 달이 뜨니 봉우리 아래 있네
桃花浥露紅浮水 (도화읍로홍부수) 이슬 젖은 복사꽃 떨어져 강물 위에 붉게 물들이고
柳絮飄飄白滿船 (류서표표백만선) 버들 솜 바람에 흩날려 나룻배안에 가득 채웠네
石逕歸僧山影外 (석경귀승산영외) 돌길을 걸어 돌아가는 중은 산 그림자 밖에 있고
烟沙眠鷺雨聲邊 (연사면로우성변) 물안개 자욱한 백사장에 잠든 백로 빗소리 가에 있누나
若令摩詰遊於此 (약령마힐유어차) 만약 왕마힐(王摩詰, 王維)이 이곳에서 노닐게 했더라면
不必當年畵輞川 (불필당년화망천) 그때 굳이 남산의 망천도를 그리고 읊조리진 않았으리라.
<금강정(錦江亭)-정문손 鄭文孫>
하여고 나공(羅公) 역시 시(詩)를 쓰기를
十有一人枌社舊(십유일인분사구) 열하고 또 한사람 같은 고향 친구로서
靑松心事竹天眞(청송심사죽천진) 마음들은 청송이요 천진하기 대나무라네
此生榮悴誰先後(차생영췌수선후) 이생의 영고성쇠 앞 뒤 따져 무엇 하리
莫學桃花孄作春(막학도화란작춘) 화사한 복사꽃일랑 흉내 내지 말자구나
했으며 박공(朴公)도 계서(契序)를 쓴 것이 있는데 유실 되어 전해지지 않고 있다.
김공(金公)의 시(詩)는
先世交情及後裔(선세교정급후예) 선세의 사귄 정을 물려받은 우리후손
如今好事摠天眞(여금호사총천진) 지금 같은 좋은 일 그 모두가 천진이라네
年年契會期何日(년년계회기하일) 해마다 우리 모임 어느 날이 좋다던 가
莫過重陽在暮春(막과중양제막춘) 구월구일 삼월삼일 넘기지 마세 그려
하였는데 이상 제공(諸公)들 시를 보면 그 당시 풍류가 어떠했던가를 상상 할만하다. 그리고 그 사적은 여지승람(輿地勝覽)에 기록되어 있다.
금사정동백나무(錦社亭 冬柏)
정자 앞 동백나무는 선비들의 충절의 뜻을 상징하고 살아온 지 500년, 동백은 꽃잎이 한 장씩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꽃 전체가 한꺼번에 통째로 떨어진다는 것을 이 선비들은 알았다. 그래서 금강계 11인은 그들의 지조에 걸 맞는 동백나무의 심은 뜻을 헤아릴 수 있다.
어느덧 11인 선비가 심은 이곳 금사정의 동백나무는 높이 6m, 뿌리 부근 둘레 2.4m 단 일목으로 우리나라 동백나무 가운데가장 굵고 제일 크며 반구형으로 아름답고 수세도 좋아, 동백나무를 대표하는 나무로 역사·문화적 가치가 있어 천연기념물 515호로 지정되었다. 귀향한 11명 가운데 한 사람인 정문손이 기묘사화 이전의 태학관 유생 시절을 그리워하며 지은 시(詩)에 나타나 있듯 금사정은 이들이 낙향하고 10여년이 지난 1520년대말, 또는1530년대초쯤 건립됐으며 1869년 중수 전까지는 금강정(錦江亭)으로 불렀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이 정자를 지을 당시는 초가였음을 이곳의 현판의 시에서 나타나고 있다.
草堂新築小溪東(초당신축소계동) 적은시내 동쪽에 草堂을 새로 지었으니
半世棲遲象外水(반세서지상외수) 半世토록 서식하니 물외에 종적 이로다
坐對沙頭獨眼鶴(좌대사두독안학) 앉아서 모래머리에 홀로 자운 백구를 대하고
臥看天未點孤鴻(와간천미점고홍) 누워서 하늘 끝에 외로운 기러기를 보았어라
江聲入耳慶綠省(강성입이경록성) 강소리 귀에 들어오니 慶綠을 살피었고
山雨瓢飮醉睡情(산우표음취수정) 산비를 받아 마시니 취하여 자운 정이로다
新月又篩佳菊影(신월우사가국영) 새달은 아름다운 국화 그림자를 꾸며주니
淸香時送北空風(청향시송북공풍) 맑은 향기 때때로 보내니 북풍이 부러오도다
<錦沙 河潤九>
금사정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65년(현종6년)에 김만영(金萬英), 나기(羅棋), 김이상(金履相) 등에 의하여 재건되었다. 1869년(高宗6年)에 중수하였으며 1973년에 새로 세웠다. 전라남도 나주시 왕곡면 송죽리 외구마을에 있는 정자로, 조선 중기에 처음 건립되었다.
동백나무는 겨울에 붉은 꽃이 강렬하게 핀 후 꽃이 통째로 떨어지는 모습에서 아름다움과 애절한 슬픔을 담고 있어서 양화소록 등 문헌에도 자주 등장하며 우리 옛 사람들이 가까이한 전통 꽃나무로 유래와 더불어 역사·문화적 가치가 있다. 금사정 동백나무가 천연기념물 제515호로 지정된 건 2009년 12월이다. 오랫동안 우리 민족의 사랑을 받아온 나무이건만 독립 노거수로서 동백나무 한 그루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것은 이 나무가 처음이다.
국가로부터 버림받았던 선비들의 한을 국가가 보상해 주었다는 기쁨이라도 있었던 걸까. 국가 지정 문화재로 지정된 이태 전의 겨울을 지내고 금사정 동백나무는 이듬해 햇살 따스하던 봄날, 여느 때보다 더 아름답게 꽃을 피웠다고 전한다.
금사정 동백나무에 유난히 애착이 가는 건, 나무를 심은 사람들의 삶에 서리서리 맺힌 붉은 한을 기억할 수 있기 때문이다. 500년 전인 조선 중종 14년, 기묘사화의 참혹한 피바람이 세상을 휩쓸던 때의 일이다. 급진 개혁을 주창하던 풍운아 조광조가 유배지에서 사약을 받고 죽음의 길로 떠난 뒤, 그를 따르던 선비들에게도 죽음의 피바람이 불어 닥쳤다.
그들 가운데 이곳 나주 출신의 선비들이 있었다. 승지를 지낸 임붕(林鵬), 직장 벼슬을 지낸 나일손(逸孫), 생원 정문손(鄭文孫) 등 11명이었다. 현실 정치에서 좌절하게 된 그들은 피바람을 피해 고향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고향에서 금강 11인계를 조직한 그들은 짬짬이 세상 이치를 짚어 보며 훗날을 기약했다.
정자를 지은 건 그들이 낙향하고 10년쯤의 세월이 지나서였다. 정자는 ‘개혁정치’의 이상을 포기할 수 없는 선비들의 토론장으로 쓰였다. 정자를 다 지은 그들은 금강결사의 뜻을 따 ‘금강정’(錦江亭)이라 이름 붙이고 정자 앞에 나무를 심었다.
그들이 골라낸 나무는 동백나무였다. 세상이 변한다 하더라도 사철 내내 푸른 동백나무의 잎처럼 뜻을 잃지 말자는 다짐이었다. 또 좌절한 그들의 핏빛 한이 언젠가는 동백꽃처럼 화려하게 피어날 것이라는 기대도 담았다. 세월은 무심히 흘러 11명의 선비들은 채 꿈을 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고, 한 그루의 동백나무는 금사정 앞에 듬직하게 서서 옛 선비들의 이루지 못한 뜻을 지켜 왔다.
2013. 08,06. 금사정답사기
모효공 12세손 가선대부오위장 종현(嘉善大夫五衛將 鍾鉉) 曾孫 燦鉦 拜.
상훈(賞勳)과 추모(追慕).
나라에서 명종 원년(1546년) 생존(生存)시에 정려(旌閭)를 내리고 복호(復戶)의 특혜를 주었다. 고을 사람들이 그가 살던 곳을 모효동(慕孝洞)이라 하고 그 집을 모효재(慕孝齋)라 하였다.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이 지은 「사마재연회시서(司馬齋宴會詩序)」는 모두 7백여 자인데, 정문손의 덕을 매우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타고난 품성이 매우 효성 스스러웠고 지혜롭고 총명하였으며 어려서부터 공부를 좋아하고 게을리 아니하여 일찌감치 문예를 이루었다. 중종 조에 생원에 올라 반학(泮學)하였으며, 기묘사화 때에는 200여 관생과 함께 상소하여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의 신원을 구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임천으로 물러나서 금강정(錦江亭)을 짓고 후진을 지도하였다.
재야에 있으면서도 지극히 효도하여 마을에서 모두 공경하였다는 사실이 『기묘명현록(己卯名賢錄)』에 기록되었다. 모산사(茅山祠)에 배향되었다.
묘지명(墓誌銘)태학생(太學生)정공(鄭公)의묘지명제16권/ 다산시문집
공은, 휘는 문손(文孫), 자는 광윤(光胤)이다. 나면서부터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70세가 되어도 부모를 사모하는 마음이 쇠하지 않았고, 죽었어도 이름이 민멸(泯滅)되지 않았다. 그래서 향중 사람이 그 터를 가리켜 모효동(慕孝洞)이라 하고, 그 집을 모효재(慕孝齋)라 하였으니, 이것이 모효공(慕孝公)이 된 까닭이다.
조금 장성하여 《소학(小學)》을 읽었는데 더 부지런히 힘썼다. 나이 이미 70~80이 되어 아 버지가 병들자 그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임으로써 반년을 더 살게 하였고, 어머니가 병들자 그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임으로써 3개월을 더 살게 하였다. 부모가 죽게 되자 모두 삼년 동안 여묘 살이 하였다. 이 일이 나라에 알려지자, 정려(旌閭)하고 복호(復戶)를 성급(成給)하였다.
공은 경의(經義)로 상사(上舍 생원(生員)ㆍ진사(進士)를 말함)에 올랐다.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자 태학생(太學生) 2백여 인이 궁문(宮門)을 밀치고 호곡(號哭)하고, 상소하여 조 문정(趙文正, 조광조(趙光祖)의 시호)의 원통함을 송변(訟辨)하였는데, 사실은 임붕(林鵬)과 공(公)이 우두머리였던 것이다.
축출 당하게 되어서는 금강(錦江 영산강) 가에 집을 짓고 축출된 사람 11인과 소요하고 읊조리고 노래하며 그의 초상(肖像)을 그려 전하였다.
그리고 서로 더불어 탁마(琢磨)하는 바는 ‘양심을 보존하고 천성을 기르며, 의리를 강명한다. 존심양성강의명리[存心養性講義明理]’는 여덟 글자일 뿐이었다.
기고봉(奇高峯, 기대승(奇大升)의 호)의 사마재연회시서(司馬齋宴會詩序)는 모두 7백여 자인데 공의 덕을 매우 자세히 기술하였고, 그 좋아하고 사모하는 정을 표한 것이 매우 진실하였다. 아, 고봉 같은 이도 이와 같으니 공을 알 수 있다.
공의 시조(始祖)는 휘는 도정(道正)이고, 그 뒤에 육세(六世)휘 지연(芝衍)이 있었는데 고려에 벼슬하여 대관이 되었다. 증조부의 휘는 희주(希周)이니 사헌부 장령이고 할아버지의 휘는 의중(宜仲)이니 담양부 교수(潭陽府敎授)이고 아버지의 휘는 승서(承敍)이니, 수의부위(修義副尉)이다.
부인은 평산 신씨(平山申氏) 참군(參軍) 계규(季糾)의 딸이다. 3남을 낳았는데, 맏이는 강(綱)이니 군자감 판관(軍資監判官)이고, 다음은 순(純)이니 군수(郡守)이고 다음은 윤(綸)이니 직장(直長)이다.
공은 성종4년(成宗4年) 계사년(서기1473)에 태어나서 명종9년(明宗9年) 갑인년(甲寅年 西紀1554年)나이 82에 죽으니 무덤은 모효동(慕孝洞) 유좌(酉坐)의 언덕에 있다.
전라남도 나주시 성산리 모효동 (慕孝齋 孝子 成均館 生員 河東 鄭公 文孫 之墓)
공은 성종4년(成宗4年) 계사년(서기
후손 수암 보(遂嵒甫)가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묘명(墓銘)을 청한다. 공의 행적을 살펴보니 효자이며 행한 바의 일에 우뚝한 것이 많았다. 사람들이 ‘효성스럽다.’ 하였으나 공은 예사로 여겼으므로 내가 감히 써서 공의 뜻을 손상치 못한다. 명은 다음과 같다.
孰艾能慕(숙애능모) 뉘라서 늙어도 부모 사모하랴
毁不言耈(훼불언구) 애훼(哀毁)하며 늙음 말하지 않네
孰詘舍信(숙굴사신) 어느 것 굽히고 펴라
乃割其拇(내할기무) 엄지손가락 잘랐도다
有綽其楔(유작기설) 훌륭한 정문(旌門)이요
有緜其後(유면기후) 연면한 후손이네
略疏與异(략소여이) 용행(庸行)과 이절(異節)을 대략 써서
以蘄公受(이기공수) 공이 복 받기를 빌도다.
복호(復戶) : 충신ㆍ효자ㆍ절부(節婦)가 난 집의 호역(戶役)을 면제하던 일.
유좌(酉坐) : 유방(酉方)을 등진 자리. 곧 서쪽을 등지고 동쪽을 향한 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