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론은 에너지의 방향성을 추적하는 방법으로 미래를 예견하고 변화에 대응하는 이론이다. 에너지는 정해진 길을 가므로 우리는 사건의 다음 단계를 예측할 수 있다. 세상은 변하지만 변화의 규칙은 불변한다. 우리는 변화 속의 불변을 이용하여 변화에 대응할 수 있다. 문제의 답을 찾을 수 있다.
문제는 지도를 보는 방법이다. 좌표를 중심으로 봐야 하는데 우리는 눈에 띄는 표지에 매몰되는 실패를 저지른다. 큰 건물이나 높은 산을 기준으로 길을 찾으면 동서남북이 틀려서 망한다. 객체 자체의 내재적 질서를 중심으로 보는 눈을 얻어야 한다. 그것은 특별히 훈련되어야 하는 깨달음의 눈이다.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는 방법은 환원주의다. 환원주의는 부분과 전체의 관계를 이용한다. 부분의 합은 전체와 같다는 대전제가 필요하다. 그런데 부분의 합은 전체보다 작다. 양자역학 시대에 환원주의는 해체된다. 그러나 환원주의 아이디어는 유효하다. 환원주의를 대하는 인간의 방법론이 틀렸다.
많은 경우 내부를 잘게 쪼개서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답이 찾아진다. 환원주의는 틀렸는데 왜 우리는 환원주의에 의존하고 있을까? 입자의 환원주의가 아닌 에너지의 환원주의가 필요하다. 사물의 환원주의가 아니라 사건의 환원주의가 필요하다. 원자 환원주의는 틀렸지만 구조 환원주의는 유효하다.
세포가 부분이면 생명은 전체다. 생명은 세포의 합으로 정의되어야 한다. 그러나 세포도 쪼개진다. 궁극적인 단계까지 나아가면 최후의 단위에 도달하지 못하고 희미해진다. 그것이 양자역학이다. 원자를 쪼개고 소립자를 쪼개면 또 무엇이 나온다. 거기서 부분의 합이 전체보다 작다는 모순을 만난다.
부분은 원자인가? 아니다. 원자의 존재는 인간의 희망사항이다. 최후의 입자가 있었으면 좋겠지만 없다. 양자역학의 최종 결론은 우주는 시뮬레이션이라는 대전제를 가리키고 있다. 갈수록 아리송해진다. 구조론의 답은 변화다.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것은 원자가 아니라 변화다. 세상은 변화의 합이다.
1. 부분의 합은 전체보다 작으므로 기계론 환원주의는 거짓이다.
2. 부분이 변화이면 변화의 합인 부분의 합+결맞음은 전체와 같다.
3. 변화는 움직이고 움직임은 방향이 있고 합은 방향의 결맞음이다.
원자는 원리적으로 없고 그 자리를 대체하는 것은 변화의 결맞음이다. 부분의 합이 전체보다 작은 모순의 발생 이유는 부분을 불변으로 놓는 오류 때문이다. 계속 쪼개면 최후에 불변의 요소가 나온다는 근거는 없다. 계속 쪼개면 최후에 변화가 나온다. 부분의 합이 전체가 되려면 결맞음이 필요하다.
존재를 쪼개면 나타나는 것은 공간을 점유하는 원자가 아니라 공간을 이동하며 시간이 흐르는 변화다. 원자 환원주의와 구조 화원주의 차이는 시간을 반영하느냐에 있다. 부분의 합에는 시간이 없다. 사건의 순서가 없다. 바둑을 해체하면 최후에 바둑알로 환원되는게 아니라 바둑알과 기보로 환원된다.
변화에는 방향이 있으므로 전체는 부분의 합에 없는 결맞음이 있다. 공간의 방향과 시간의 순서라는 질서가 있다. 방향과 순서를 합치면 결맞음이다. 레고블럭도 방향이 맞아야 조립된다. 이 부분을 간과하므로 전통적인 환원주의와 기계론적 사고는 틀렸다. 결맞음을 반영한 구조 환원주의가 필요하다.
원자 환원주의 - 전체는 부분의 합과 같다.
구조 환원주의 - 전체는 변화의 결맞음(방향과 순서)과 같다.
원자 환원주의는 틀렸지만 구조 환원주의는 옳다. 구조론은 자연계의 모든 현상을 물리학으로 환원시킨다. 사회학은 심리학에 기대고, 심리학은 뇌과학에 기대고, 뇌과학은 생물학에 기대고, 생물학은 화학에 기대고, 화학은 물리학에 기대고, 물리학은 수학에 기댄다. 수학은 구조론의 질서로 환원된다.
우주에 에너지의 질서가 있을 뿐이다. 변화의 질서가 있을 뿐이다. 낮은 단위에서 모르는 것은 높은 단위에서 답을 찾는다. 방향이 문제다. 원자 환원주의는 잘게 쪼개면 답이 나오지만 구조 환원주의는 크게 합쳐야 답이 나온다. 합쳐야 에너지 공급자인 결맞음이 일어난다. 원인은 결과보다 커야 한다.
활은 화살보다 크다. 원자론이 화살을 들고 활을 찾는 관점이라면 구조론은 활을 들고 화살을 매기는 관점이다. 관심의 방향이 다르다. 원자론은 잃어버린 레고블럭 조각 하나를 찾지만 구조론은 설계도를 찾는다. 설계도에는 전체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먼저 틀을 정하고 내부를 채워넣는 관점이다.
원자론 - 작은 것이 답이다. 잃어버린 조각을 찾아라.
구조론 - 큰 것이 답이다. 잃어버린 설계도를 찾아라.
차원을 쪼개면 0차원 점에 도달한다. 점은 더해도 점이다. 점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반대로 차원을 합치면 사차원 계에 도달한다. 계는 닫힌계 내부에 밸런스의 축과 대칭을 갖춘다. 닫힌계 내부에 압력을 걸어주면 밸런스의 복원력이 작동하므로 우리는 미래를 예견하고 변화에도 대응할 수 있다.
자연계의 모든 자발적 변화는 무너진 밸런스를 복원하는 한 방향으로 움직인다. 변화는 결맞음에서 멈춘다. 그러므로 미래를 예견할 수 있다. 불변은 알 수 없지만 변화는 알 수 있다. 변화는 동력을 소모하므로 공세종말점에서 멈춘다. 잃어버린 동전이 어디까지 굴러가는지 안다. 오르막에서 멈춘다.
원자론은 쪼개기 관점이다. 차원을 쪼개면 점에 막혀서 허무해진다. 점은 쪼갤 수 없으므로 어떻게 해볼 수 없다. 거기가 막다른 절벽이다. 거기서 막힌다. 차원을 합치면 객체 내부의 자체 엔진이 찾아진다. 내재적 질서가 있다. 에너지의 방향성이 있으므로 사건의 다음 단계와 진행경로를 알 수 있다.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하는지가 명백해진다. 바둑을 처음부터 다시 두어보면 초기 단계에서 포석이 잘못되어 승부가 결정된 것을 깨닫는다. 변화의 결맞음을 조립하여 차원을 높여가면 완전성이 드러난다. 우리가 찾는 답은 완전성에 있다. 물질 원자가 단위가 아니고 변화의 완전성이 단위다.
원자론 관점 - 작은 알갱이가 단위다.
구조론 관점 - 에너지를 품은 큰 완전성이 단위다.
완전성은 씨앗이다. 씨앗은 작아도 우주를 품는다. 배아와 배젖이 있다. 있을 것은 다 있다. 미래의 모든 가능성을 포함한다. 장차 꽃이 되고, 잎이 되고, 열매가 되고, 뿌리가 되고, 줄기가 될 싹수가 숨어 있다. 싹수를 보고 우리는 그 사람이 크게 될 사람인지 평범하게 살아갈 사람인지 알아낼 수 있다.
닫힌계 안에 내재적 질서가 있다. 축이 대칭을 장악하고 압력을 조절한다. 축이 공유되는 효율성으로 대칭의 상대를 이긴다. 이기는 팀을 따라가면 우승팀을 맞출 수 있다. 진 팀을 따라가봤자 인천공항으로 출국해서 자기나라로 귀국해 버리므로 얻는게 없다. 언제나 사건의 결맞음을 따라가야 한다.
우리는 하부구조로 내려갈수록 단순해진다고 생각한다. 사실은 상부구조로 올라설수록 단순해진다. 기슭에서는 복잡하지만 정상은 단순하다. 말단의 일처리는 복잡하지만 정상의 일처리는 단순하다. 기업의 총수를 만나면 5분 만에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다. 원자론이 말단직원이라면 구조론은 총수다.
세상은 단순한 것의 복제다. 단순한 것은 내부에 변화를 갖추고 있다. 그것이 완전성이다. 세상은 단순한 원자의 집합이 아니라 내부에 자체 질서를 갖춘 완전성의 복제다. 하나의 세포는 완전하다. 세포는 분열해도 완전하다. 원자 내부에 아무 것도 없지만 완전성 내부에 복제 가능성을 갖추고 있다.
질량보존의 법칙에 따라 에너지는 생겨나지 않으므로 변화를 설명하려면 원래부터 변화가 있었다는 대전제를 인정해야 한다. 여기서 관점이 달라진다. 이후 완전히 다른 길로 가게 된다. 불변이 어떤 알 수 없는 이유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의 변화가 구조에 의해 가지런해지면 그것이 불변이다.
우주는 내부에 질서를 갖춘 완전성의 복제다. 구조는 변화의 단위, 의사결정의 단위다. 구조는 돌멩이처럼 죽어있지 않고 세포처럼 살아있다. 내부에 충분히 갖추어져 있으므로 외부의 간섭 없이 능동적으로 변화를 격발한다. 바람이 불든 비가 오든 자연의 저절로 움직이는 것에는 모두 구조가 있다.
존재의 기본 단위는 당겨진 활처럼 화살이 매겨져 있고 겨낭된 총처럼 총알이 장전되어 있다. 외부의 영향이 없이 내부 모순에 의한 의사결정은 척력의 형태로 일어난다. 우주의 근원은 더 많은 공간을 차지하려고 하는 척력이므로 가만 두면 점점 더 많은 공간을 차지하게 되는 것이 엔트로피 증가다.
인력은 척력 둘의 결맞음이다. 인력은 결맞음이라는 특별한 조건을 충족해야 하므로 자발적으로 조립되지 않는다. 인력을 성립시키려면 반드시 상부구조를 두어야 한다. 2층이 무너지는 형태로만 1층은 저절로 건축된다. 외부의 개입에 의해서만 인력은 성립한다. 무한동력이 만들어지지 않는 이유다.
세상이 복잡한 것은 중복과 혼잡 때문이다. 중복과 혼잡을 제거하면 구조가 남는다. 세상은 구조다. 우리가 구조를 찾지 못하는 이유는 관점의 오류 때문이다. 관측은 주체와 객체의 대칭이다. 대칭은 축의 공유다. 관측자와 객체가 서로 공유한다. 외부 관측자와 대칭되며 객체 내부 자체 대칭이 깨진다.
관측에 의한 오염이다. 모든 관측은 오염된다. 내부의 축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밖에서 건드리면 부부관계가 깨진다. 오염시키지 않고 관측할 방법은 없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내부에서 스스로 관측하게 하는 것이다. 인간이 개입하지 않고 활몸이 활시위를 당기고 활시위가 화살을 날리면 된다.
구조는 내부구조다. 객체 내부에 자체 엔진이 되는 의사결정 구조가 있다. 외부 영향을 받는 가변적 관계를 내부의 고정된 구조로 바꿔보는 관점의 훈련이 필요하다. 관측자를 배제하고 객체 자체의 규칙성을 찾아내는 내재적 관점을 획득해야 한다. 깨달음의 눈으로 바라보면 세상은 오직 밸런스다.
밸런스의 복원은 인력이다. 언밸런스는 척력이다. 우주의 모든 힘은 궁극적으로 척력이며 인력은 척력의 교착이다. 원자나 소립자는 척력의 교착이다. 입자의 겉모습은 인력이지만 객체 내부에는 척력이 도사리고 있다. 우주의 근원은 척력의 언밸런스이며 세차운동을 통해 자체 질서를 획득한다.
행성이 타원궤도를 돌며 조금 빨라졌다 느려졌다 한다. 언밸런스가 겉보기 밸런스를 얻는 방법이다. 모든 행성은 본질에서 언밸런스이나 세차운동의 타원궤도에 의해 겉보기 밸런스를 이룬다. 언밸런스 둘이 나란하면 관측자에게는 밸런스다. 언밸런스 + 언밸런스 = 밸런스다. 척력 + 척력은 인력이다.
1. 척력 + 척력은 인력이다.
2. 언밸런스 + 언밸런스는 밸런스다.
3. 언밸런스가 밸런스로 위장하는 것은 세차운동이다.
4. 모든 밸런스는 내부에 언밸런스의 결맞음을 숨기고 있다.
5. 우주 안의 모든 힘은 밸런스의 복원력이므로 미래를 예견할 수 있다.
인력은 언밸런스 둘의 결맞음이 만든 겉보기 밸런스다. 내부에 언밸런스를 숨기고 있으므로 언제든 폭발할 수 있다. 엔트로피의 증가는 우주가 본질에서 척력이기 때문이다. 밸런스가 깨지면서 거리가 멀어져 더 많은 공간을 차지하는 것이 엔트로피 증가다. 자연계의 자발적 변화는 척력 뿐이다.
우리는 에너지의 방향성을 추적하여 미래를 예견하고 변화에 대비하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잘게 쪼개는 환원주의 방법은 원리적으로 틀렸지만 잘게 쪼개다보면 우연히 답이 찾아진다. 쪼개다보면 합쳐지는 방법의 설계도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구조론은 그것을 우연이 아닌 필연으로 찾아낸다.
1. 환원주의는 틀렸지만 우리는 환원주의로 성과를 낸다.
2. 우리는 환원주의로 잘게 쪼개다가 우연히 답을 찾아낸다.
3. 잘게 쪼개다가 우연히 합치는 설계도가 발견되기 때문이다.
4. 구조론은 부분과 전체의 관계를 통해 필연적으로 답을 찾는다.
5. 부분에서 전체로 발산은 틀렸고 전체에서 부분으로 수렴은 옳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