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산 도심 속에 숨겨진 상큼한 뒷동산, 배산 '
천하 제일의 항구 도시이자 우리나라 2번째 대도시로 콧대로 높은 부산(釜山) 도심 한복 판에 배산(盃山, 254m)이란 조그만 산이 솟아있다. 이 산은 연제구 연산동과 수영구 망미동(望美洞) 사이에 자리해 있는데 남쪽으로 금련산 (金蓮山)과 바짝 이어져 있다. 허나 그 사이로 연산로와 주택가가 비집고 들어오면서 그 들의 각별한 사이를 끊어버려 졸지에 시가지에 포위된 외로운 신세가 되었다. 하긴 배산 뿐이겠는가? 서울과 부산 등 대도시에는 개발의 칼질로 강제로 섬이 되어버린 가련한 작 은 산들이 적지 않다.
산의 모양이 마치 술잔을 엎어놓은 듯한 모양이라 하여 배산이라 불리며, 254m의 높이로 대도시 도심 속에 박힌 뫼치고는 제법 높아 보인다. 허나 부산은 백양산(白羊山)과 승학 산, 시약산, 황령산 등 400~600m급 산들이 도심 속에 무수히 포진해 있어 254m 정도로는 감히 명함도 내밀지 못한다.
서울에 서식하고 있는 내가 부산 사람들도 잘 모르는 배산을 주목한 것은 이미 오래전에 일이다. 배산 서북쪽 자락에 연산동고분군(連山洞古墳群)을 2006년에 간 적이 있기 때문 이다. 그 후로 오랫동안 새까맣게 잊고 살다가 다시금 배산 생각이 간절해졌다. 하여 인 연을 엿보다가 봄이 한참 기지개를 켜던 4월, 광안동에 사는 선배와 해운대(海雲臺), 송 정(松亭) 20리 해안산책(☞ 관련글 보러가기)을 즐기고 남은 시간을 이용해 배산을 찾았 다.
송정에서 부산시내버스 141번(송정↔당감동)을 타고 배산역(3호선)에서 하차하여 무작정 배산이 보이는 북쪽으로 올라갔다. 워낙 인지도가 낮은 동네 뒷산이라 이정표가 거의 없 어 여러 골목을 들쑤신 끝에 드디어 연산병원 부근에서 산길을 찾아 배산의 품으로 들어 섰다.
배산에는 무척이나 오래된 배산성(盃山城, 부산 지방기념물 4호)의 흔적이 남아있다. 이 성은 삼국시대 초반에 동래(東萊) 지역에 둥지를 튼 거칠산국(居漆山國) 때 축성된 것으 로 여겨져 그 나라의 조촐한 중심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거칠산국은 1세기 후반까지 숨을 쉬다가 신라 탈해왕(脫解王) 때 신라에게 병합되었으며 얼마 뒤 가락국(駕洛國, 금관가야)이 접수하여 가야(伽倻)의 일부가 되었다. 그 이후 가 락국 제왕(帝王)이 보낸 관리나 지역 세력이 배산에 머물며 이곳을 다스리다가 법흥왕( 法興王) 시절 다시 신라 땅이 되었다. 배산 서북쪽 자락에는 부산에서 가장 오래된 고분인 연산동고분군(부산 지방기념물 2호) 이 있는데 이들은 배산성을 토대로 이 지역을 다스렸던 지배층의 무덤으로 짐작된다.
배산성은 산 정상을 둘러싸고 만든 테뫼식으로 산 허리 부분과 정상에 축성되었으며, 쌍 가락지 모양의 2중성으로 흙으로 다져진 토성(土城)이었다. 허나 신라 중기 이후 버려지 면서 억겁의 세월과 대자연의 집요한 괴롭힘으로 웅장했을 토성은 쏴르르 녹아내리고 토 성 기초 부분만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희미하게 남아 있다. 그리고 산 일대에서 가야~신 라시대 그릇 조각과 기와조각이 많이 발견되어 옛날 이곳의 상황을 희미하게 전해준다.
배산에는 이렇게 배산성터와 연산동고분군 외에 거칠산국 사람들이 썼다고 전하는 우물 터가 있다. 이 우물터는 근래에 정비되었으나 우리는 아쉽게도 그 존재를 알지 못해 가 지 못했다. 그 외에 겸호대(謙戶臺)란 명소가 있었는데 김겸호란 선인(仙人)이 노닐었다 하여 붙여 진 이름이라 전하며, 고려 말에 정추(鄭樞, 1333~1382)가 동래현령(東萊縣令)을 지냈을 때 그곳에서 지은 시가 있는데, 그 위치가 막연히 배산 위라고만 할 뿐, 정확한 위치는 아직도 오리무중(五里霧中)이다. 하지만 그가 지었다는 겸호대 시는 우리 곁에 잘 살아 남아있으니 내용은 이렇다.
謙孝濯濯似蓮花 胸呑八荒氣凌霞 回首肯羨萬戶邑 翩翩來徒神仙家
겸효의 밝은 빛은 연화를 닮고 가슴으로 품은 기품 속세를 떠났구나 고개를 돌리니 만호읍이 바로 거긴데 휘적휘적 신선가를 오간다
지금은 주거지가 되버린 배산 동북쪽 밑 부산광역시립 연산도서관 자리에는 거울바위가 있었다. 바위의 이름 그대로 아마도 거울처럼 생긴 모양이다. 옛날에 어느 문둥병 환자 가 거울바위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경악하여 그 바위를 내리쳤다고 하며, 어느 여인을 사모하던 남자가 그 바위에 비친 자신의 못생긴 얼굴에 발작하여 돌로 쳐서 깨뜨렸다고 한다. 그래서 바위는 흔적도 없이 한 토막 전설이 되어버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