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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동뮤지션 - I Love You
“자, 오늘은 약속대로 일찍 끝내줄게.”
“와아아아!”
빛 하나 없는 삭막한 공간에 눈부신 태양이라도 다녀간 것처럼 저마다의 기쁨을 표출해내는 아이들이 보였다. 벌써부터 급식실에 내려갈 준비를 하는 아이들, 다급하게 짐부터 싸는 친구들, 하다못해 남은 시간 동안이라도 잠을 보충할 생각인지 딱딱한 책상에 제 몸을 맡기는 놈들도 다반사였다. 그 후폭풍 사이에서 시름시름 앓고 있는 녹초가 돼버린 나도 있었다. 어제의 도경수가 남기고 간 의미심장한 말 때문인지 머릿속은 진절머리가 나도록 요동치고 있었다. 차라리 눈을 감고 잠이라도 청하면 좋겠건만, 이놈의 몸은 또 그걸 도와주지 않았다. 눈은 감기는데 잠은 안 오는 거. 딱 고문이었다. 뻐근해져오는 목 부분을 풀기 위해 느릿하게 고개를 돌리자 낯선 뼈 소리가 징그럽게 느껴져 금세 자세를 고쳐 잡았다. 다시금 목을 돌리며 옆에서 신 나게 웃고 있는 변백현을 바라보니 괜스레 심술궂은 느낌이 가슴께를 짓눌렀다. 나는 어제 도경수의 말이 이렇게나 신경 쓰이는데 넌 뭐가 그렇게 재밌냐 이거였다. 이렇게 보면 나만 유난떠는 게 되지 않느냐. 신경질적으로 책상을 밀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무시하는 게 답이다. 이런 일 저런 일 신경 쓰면 나만 골치 아파지는 거니까. 난 내 일만 딱 하자. 아마 이번시간에 내내 졸음과 전쟁이라도 한 건지 반쯤 감긴 눈으로 앉아있는 민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시간도 남았으니 급식실 자리라도 빨리 잡자. 반사적으로 민예의 손을 잡고 시장 통 사이를 헤쳤다. 배고픔에 굶주린 아이들은 가히 이성을 잃은 짐승 같아 보이기도 했다.
“야, 변백현! 변백현!”
“…….”
“변백현 교실에 있어?”
“응? 저…….”
“여깄네. 이 시발새끼야. 너 헤어졌어?”
반사적으로 드는 생각이 있었다. 누가 봐도 저 아이는 변백현 친구일 것 같다는 그런 확신. 그러나 그것 따위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우선 허기진 배부터 채우는 게 급선무였다. 심드렁한 표정으로 민예의 손을 잡고 걸음을 재촉했다.
“야, 김종인. ○○○이 너랑 친해지고 싶대.”
“뭐? 내가?”
“나 저 여자애 모르는데? 변백현 네 친구냐?”
“내 친군데 쟤가 김종인 너랑 친해지고 싶대.”
“아, 그래? 안녕.”
“…….”
“○○○, 너 김종인이랑 친해지고 싶다며, 인사 안 해?”
“나 그런 적 없는…….”
다소 경직된 얼굴로 두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다 정면으로 코를 찡긋하며 익살스러운 표정을 보이는 변백현을 보고서야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이것도, 내 연애코치를 위해서다 이 말이지? 그런 거라면 망설일 거 없지. 마치 짜인 대본을 읽는 것처럼, 당연하다는 듯 미소를 띠우는 나였다. 그래도 눈치 없다는 소리는 안 듣고 살았단 말이야.
“아, 이야기 많이 들었어! 나 너랑 진짜 친해지고 싶었는데!”
단단하게 굳어있던 아까의 목소리와는 상반된 음성이었다. 기가 막힌 내 센스에 변백현은 숨이라도 넘어갈 지경으로 소리 없는 고통스런 웃음을 참아야만 했다. 그 덕분에 나까지 괴상한 소리가 터져 나올 것 같았지만, 그건 내 돈가스 값이 저 멀리 하늘나라로 날아가 버리는 것과 다름없는 짓이다.
“변백현이랑 친구야? 얘 원래 친구 중에 여자는 없는데.”
“야, 그러니까 오죽하면 내가 친구로 사귀겠냐고. 진짜 괜찮은 애니까 그런 거지.”
“아, 그래? 친하게 지내자.”
“응, 나 ○○○이야!”
“나 김종인이야.”
막상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에 닥치면 내 거지 같은 연기력도 혼신의 힘을 발휘할 수 있구나. 센스 있는 대사에 술술 속아 넘어오는 바보 같은 놈이었다. 대체 무슨 꿍꿍이로 내게 이런 짓까지 시키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어쩌겠냐. 여전히 지금의 난 약자고, 변백현은 강자다. 거의 반쯤 혼이 나간 얼굴로 어색한 상황을 지키고 있는 김종인의 뒤로 여전히 제 입을 막으며 죽어라 웃음을 참고 있던 변백현에게 시선을 옮겼다. 하도 웃어서 벌게진 얼굴에 한심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애써 양 입술을 앙다물고 나만 보이는 작은 입모양으로 무어라 중얼거리기 시작하는 놈의 입모양이 보였다. 눈썹 사이가 좁혀졌다. 모두 저 개새끼 입에서 나온 말 때문이었다.
“미친, 존나 연기 잘해.”
“…….”
“가식쟁이.”
참을 인, 이라는 한자를 가슴 속 깊이 새겼다. 예로부터 참는 자에게 복이 온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지금의 나도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미세하게 떨리는 손목의 강도가 내 인내심을 테스트 하는 것 같았다. 언제부터 나를 놀리는 재미에 맛을 들인 건지 친구들을 보내고 혼자 급식실로 향하는 내 뒤를 졸졸 따라오며 지독하게도 성질을 자극해대는 변백현이었다.
“아, 오지 마! 네 친구들 두고 왜 나한테 와?”
“나도 너 도와주느라 애들 다 보냈는데? 도와줘서 고맙다고는 못할망정 어디서 지랄이야?”
“그럼 먼저 가서 받던가, 왜 따라 오냐고.”
“너도 혼자잖아.”
제길, 반박할 수 없었다. 지랄 맞게도 맞는 사실이었기 때문에.
“근데 너 연기 왜 그렇게 잘해? 연기 대상 나가 봐, 상 같은 거 받을 거 같은데.”
“…….”
“혹시 배우 ○○○씨 아니세요?”
“…….”
“저 팬인데 싸인 좀 해주세요, 그렇게 가식적인 연기를 잘하신다고.”
“…….”
“설마 지금 이것도 가식? 시발, 소름끼쳐!”
속에서 꾹 참고 있던 화가 서로 나오겠다며 바둥거렸다. 모든지 앞서 행동하면 해가 되어 돌아온다고 했다. 웃어야 복이 와요, 참아야 복이 와요. 그런 내 속을 알기에 만무한 변백현은 여간 신이 난 게 아니었다. 이젠 아예 내 옆에 딱 붙어서 한계점을 살살 긁어내기까지 했다. 신경질적으로 급식을 받고 주위를 살폈다. 혹시라도 이 새끼에게서 나를 구제해 줄 천사를 찾을 심산이었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왔으면 친구들을 찾고도 남았을 텐데 이미 인산인해인 급식실에 그마저도 금방 수포가 되어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언제 뒤이어 급식을 받은 건지 내 옆까지 와 떡하니 바로 앞에 있는 자리에 앉아버리는 놈이었다. 세상은 가혹했다. 내 상황 또한 그랬다. 자욱하고도 뿌연 한숨을 내뱉었다. 선택권은 없었다. 변백현의 말대로 지금의 난 혼자였기 때문에. 인생을 포기한 사람처럼 놈의 앞에 급식판을 놓고 자리 잡았다. 불편한 사람과 식사를 같이 하는 기분이 딱 이런 거구나 싶더라.
“김치 좀 먹어 김치, 존나 편식하고 있어.”
“나 김치 먹거든? 고기 먹다가 막히면 먹으려고…….”
“꼭 김치 못 먹는 새끼들이 핑계 그딴 식으로 대요.”
마음속으로는 놈을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죽이고 싶었다. 앞니를 이용해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런 내 기분을 눈치 채주기 바란 건 괜한 기대였을지도 모른다. 걸신이 들린 사람처럼 숟가락이 닿는 대로 입 안에 욱여넣기 시작했다. 그런 내 행동에 기이한 광경을 보는 듯 석고상처럼 굳어버린 새끼였다. 놈이 날 어떤 식으로 생각하던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저 지금 이 거지같은 상황에서 벗어나는 게 제일 우선시였으므로.
“나 다 먹었어, 먼저 간다?”
“너만 먹어? 난 아직 못 먹었는데, 나도 너 먹을 때 가만히 기다렸잖아.”
“그게 어떻게 기다린…….”
“아, 입 다물어. 빨리 가고 싶으면 말 시키지 마.”
가슴께에 뜨거운 폭발음이 머리끝까지 울려 퍼졌다. 이젠 한숨도 깨끗하게 나오지 않았다. 무언가 걸린 것처럼 적어도 한 번은 떨려서 나왔다. 참담한 호흡을 토해내고 시름시름 제 자리로 엉덩이를 붙였다. 의자에는 송곳이라도 솟아있는 건지 온 몸이 따끔거리고 불편해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가기를 원했다. 두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주먹이라도 날아갈 안타까운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 옆에선 잘 익은 겉절이를 정교하게 반토막내며 괴상한 웃음을 짓는 개새끼가 있었다.
“아까 김종인이라는 애 봤지.”
“누구? 김종인?”
“교실에서 너랑 인사시킨 애.”
“아, 걔 뭐야? 왜 그런 건데?”
“걔 나 말고 도경수랑도 친한 친구야. 아마 더 친하면 친했지, 덜 친한 건 아니고. 도경수랑 같은 반이기도 하고.”
“뭐? 야, 그럼 미리 말해주지! 예쁘게 보여야 하는데…….”
“걔한테 예쁘게 보여서 뭐하시게요.”
“네가 저번에 그랬잖아? 나 좋게 말해줄 도경수 주변 사람 찾으라고. 이왕이면 예쁜 여자라고 말해주면 얼마나 좋아.”
“멍청아 봐봐.”
김치를 조각내던 젓가락을 급식판 위에 내려놓으니 기분 나쁜 쇳소리가 무의식적으로 미간 사이를 좁히게 만들었다. 놈은 다른 방향으로 그랬다. 양쪽 볼에는 불고기가 가득 찬 채로 답답하다는 듯 제 눈을 강하게 감으며 미간을 움직였다. 무언가 성에 안 찬다는 뜻이었다. 난 그저 내 귓가에 속삭이는 그 소리에 침묵하는 일 밖에는 할 수 없었다.
“김종인이 널 그냥 예쁜 애라고 소개하지? 그럼 그냥 예쁜 여자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냥 예쁜 여자.”
“…….”
“그래서 너를 궁금해 한다고 치자, 도경수가 널 보러 우리 교실에 온다는 가정 하에. 그럼 그 다음은?”
“…….”
“그럼 끝이잖아. 얼굴 보면 끝인데 너랑 말할 구실이 있겠어?”
“……그럼 나 어떻게 해?”
“다시 반대로 돌아가서 김종인이 널 재밌고 말하면 괜찮은 애라고 소개를 했다고 생각해 봐, 또 다시 널 교실에 보러 왔어. 그럼 그 다음은 어떨 거 같아.”
“……진짜 말하면 재밌을 앤가 궁금해 하겠지.”
“이제 몇 번 말해줬다고 척척 알아듣네.”
“나 그럼 어떻게 해야 해? 김종인이랑 친해져야 하나? 아니면 뭐 웃긴 개그라도…….”
“노력할 필요는 없어, 김종인은 그냥 말 그대로 매개체니까.”
“…….”
“여자애들한테 하는 그대로 행동하면 돼, 모든 것들을. 그 상황은 내가 만들어줄 거고.”
순식간에 방 안 구석구석 널브러져있던 퍼즐들이 제 자리를 찾아서 움직였다. 또 다른 방면으론 정신없이 엉켜져있던 실타래가 기분 좋게 단번에 풀린 느낌이었다. 이제 마지막 한 조각만 맞추면, 그리고 마지막 한 줄만 푼다면 무언가 대단한 보물이라도 나올 것 같은 기대감이 들었다. 그 느낌은 날 충분히 격양되게 만들었다. 흐릿하던 경수의 얼굴에 점차 색이 입혀졌다. 온갖 지방 방송이 난무하는 시장 통에도 오로지 내 시선은 놈의 입이 움직일 타이밍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심장은 조여 왔고, 시간은 느릿했으며 변백현은 현명했다. 약한 자를 조종하는 법을 알았다. 그리고 정말로 나와 경수를 이어줄 진정한 매개체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도.
“상황을 만들어주면 넌 눈치 빠르게 행동하면 되는 거야.”
“…….”
“결국 내가 뒤에서 코치해준다고 해도, 도경수한테 보이는 건 너니까.”
약 봉지를 뜯고 입 안 가득 캡슐 두 개와 알약 하나를 털어 넣었다. 언제나 그렇듯 물을 삼키기 전, 약만 들어있는 느낌은 썩 달갑지 않았다. 오만상을 다 지으며 냉수와 함께 모든 것을 삼켜버렸다. 그에 반사적으로 숨을 참았던 고통의 신음이 튀어 나왔다. 변백현을 피하려 밥을 급하게 먹었더니 그에 대한 보상이 이런 식으로 돌아온 거다. 더부룩한 속은 결국 날 양호실까지 이끌었다. 웃음기 하나 없는 헐떡한 얼굴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필이면 이런 날 다음 시간이 체육인 게 문제였다. 이런 쪽에서는 늘 운수가 젬병이었다. 지금 서두르지 않으면 체육복을 갈아입을 시간이 없다는 것쯤은 휴대폰의 시간을 보고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축 쳐진 몸을 이끌고 힘겹게 다리를 폈다. 벌써 제 체육복을 들고 화장실로 들어가는 여자 아이들을 보고서야 서두르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박혀왔다.
“야, ○○○.”
“변백현 나 지금 체육복 챙겨야 해서 나중에…….”
“너 아프냐? 얼굴 존나 이상해. 아까 전까지는 괜찮았잖아.”
내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제 체육복을 든 채로 내게 가까이 다가오는 놈이었다.‘너랑 밥 먹는 것 피하려다 이렇게 됐어.’라는 말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그랬다간 죽빵이라도 맞으려나. 장난스런 얼굴로 괜찮다고 고갯짓을 했다. 그런 내 의도는 눈치 채지 못 한 건지, 코앞까지 다가와 자연스럽게 내 양쪽 뺨 위로 제 손을 얹어버리는 놈이었다. 체온을 재는 듯 눈동자를 허공 위로 올리며 무언가를 생각 하는듯한 행동에 당황스러운 건 나였다. 아무렇지 않게 달아오른 볼에 반사적으로 놈의 팔을 세게 내리쳤다. 낯간지럽게 이게 무슨 짓이냐는 뜻이었다. 순간적으로 일어난 상황에 놀란 두 눈이 제 갈 길을 잃고 방황했다. 그럼에도 놈이 왔다간 흔적은 여전히 따뜻했다.
“아, 아프면 골치 아픈데.”
“……왜.”
“체육복 말이야, 가서 김종인한테 빌리라고.”
“나 체육복 있는데?”
“누가 모르냐고, 약속 했잖아. 상황은 만들어 준다고.”
“근데 걔 체육복을 왜 빌려?”
“수업 시작 시간 5분남은 거 알지? 지금 빌리고 와도 갈아입으려면 시간 존나 모자라.”
“……나 근데 진짜 남자한테 말 못 거는데.”
“4분인데? 너 지금 안 가면 진짜 지각…….”
“아, 알았어! 김종인? 아까 걔 맞지?”
“가서 시간 없다고 빨…….”
“알았어, 진짜 너 때문에 늦으면 스파게티 없어!”
“진짜 급하다고 해, 알겠어?”
새롱거리는 말로 내 성질을 자극해오는 변백현의 마지막 말을 깡그리 무시하곤 경수네 반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시간은 촉박했다. 고로 다시금 경수와 얼굴을 마주하는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가슴 속에 거대한 풍선이 제멋대로 부풀었다. 보이지 않는 사소한 경련이 눈썹 위에 파르르 떨려왔다. 이번엔 걸음을 살짝 달리했다. 당차던 느낌은 곧이어 살랑거리는 원피스를 입은 소녀처럼 변했다. 고개를 빼꼼 내밀어 교실 안을 살피니 그런 나를 발견하지 못한 건지 휴대폰 게임에만 빠져 이래라 저래라 으름장을 놓는 김종인이 보였고, 그리고 그 옆은 살근거리는 웃음을 보이며 내 가슴을 조이는 경수가 눈에 들어왔다. 반사적으로 등을 돌려 차오르는 숨을 배제했다. 더 이상 흥분하면 웃긴 꼴이 될 게 뻔했다. 누가 봐도 난 도경수를 좋아하는 티를 너무 많이 냈으니까. 그건 언제나 민예에게 들어왔던 충고 중 하나였다. 딜레마에 빠질 것 같다. 오히려 도경수 혼자 있었을 때 말을 걸기가 쉽다는 것이 참으로 의아했다. 아마 시선 때문이겠지. 무거운 발걸음을 힘겹게 움직였다. 난 온통 너에게 모든 관심이 쏠려 있는데, 그런 날 의식 못하고 다른 곳만 바라보고 있는 너에게로. 모든 영화에 클라이맥스 장면에 나오는 슬로우 기법처럼 지금의 내 상황도 그랬다. 경수와 나를 빼고 모든 것이 느렸다.
“저, 김종인…….”
“응? 아, ○○……○? 맞나?”
“응, 혹시 체육복 있어?”
“체육복? 나 체육복 없는데.”
“아…….”
변백현이 없으니 아무것도 못하는 포맷상태가 돼버렸다. 바보같이 고개만 끄덕이며 참혹하게 등을 돌릴 뿐이었다. 세상은 다시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나와 경수까지도. 등을 돌려 포기하는 시간은 어떤 것보다 빨랐다. 비릿한 한숨을 내쉬며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정말로 지각이었다. 지금 체육복을 빌려도 지각이라는 건 확실시 돼버린 순간이었다. 그 와중에 누군가와 가볍게 어깨를 부딪혀 비참함은 배로 늘어갔다. 변백현에게 뭐라고 변명을 할지도 문제였다. 꼭 경수가 아니라도 날 골치 아프게 하는 일은 수도 없이 많은 게 다행이었다. 그래야 괜한 죄책감으로 감정을 소비할 일이 조금이라도 줄어드니까.
“야, 김종인 너 체육복 있어?”
“아, 왜 다 나한테 물어보고 난리야. 없다니까?”
“그럼 타오 너는?”
“나도 없는데.”
“민혁아 너는?”
“체육복 아까 너희 반 애한테 빌려줬는데.”
“아, 어떡해, 그럼 도경수 너…….”
“도경수, 체육복 있어? 나 그때 김종인한테 뭐 좀 전해달라고 부탁했던 앤데 체육복 좀 빌려주면 안 돼? 응? 내가 꼭 줄게, 응? 부탁할게, 부탁합니다!”
어깨에 부딪혔던 사람이자 전자는 우리 반에서 남자아이들과 잘 어울린다고 소문난 수정이었다. 그런 수정이가 김종인, 타오, 김민혁에 이어 마지막으론 도경수에게까지 말을 붙였을 땐, 흐릿해진 정신이 생각하는 바와 다르게 말부터 튀어나왔다. 말을 뱉고 생각하자니 여간 민망한 게 아니었다. 다급한 내 목소리에 원을 만들어 게임을 하던 남자아이들 시선이 자연스럽게 내쪽으로 쏠렸다. 구경거리가 된 기분이었다. 이건 내가 제일 싫어하는 느낌이었다. 머쓱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그 다음 대답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죽어도 수정이에게는 경수의 체육복을 입히기 싫었다. 이건 내 마지막 발악이었다. 멍한 얼굴로 내 애절한 청을 들은 경수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곤 두어 번 눈을 깜빡이며 곧이어 내 말꼬리를 이었다.
“있어.”
“…….”
“빌려줄까.”
“진짜?”
“잠깐 기다려 봐.”
감당하기 힘든 수많은 눈동자들은 일제히 경수에게로 옮겨졌다. 경수가 체육복을 꺼내고 다시금 등을 돌려 바로 내 앞으로 올 때까지 숨 막히는 정적은 깨질 생각이 없었다. 그런 초조한 심정을 대변해주기라도 하는 듯 살근거리는 짜릿한 기분이 온 몸에 동요했다.
“이거 좀 클 수도 있…….”
“고마워, 내가 꼭 바로 가져올게!”
“늦게 가져와도 되는데.”
“아니야, 내가 꼭 가져올게! 꼭! 고마워 도경수, 내가 진짜 이거 꼭 가져올게!”
“…….”
“아싸! 체육복 빌렸다!”
“…….”
경수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문제는 뒷전이었다. 지금 중요한 건 나 스스로 체육복을 빌린 일이라는 것과, 그게 경수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젠틀해 보이는 외모와는 다르게 아무렇게나 제 멋대로 주름이 진 채로 헐렁하게 늘어난 체육복을 그대로 품 안에 넣었다. 그럴수록 더 실감나는 건 우리의 거리였다. 아직은 한참이나 멀리 떨어져 있지만, 적어도 한 발자국은 움직이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이번에도 제대로 된 김칫국을 원샷 해버리는 나였다. 구름이 날 제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 이어 끝이 없는 무지개를 건넜고, 마지막으론 하늘 위에서 세차게 흔들리는 파도를 내려다 봤다. 파도는 요동쳤으며, 뜨거웠다. 지금에 내가 경수에게서 느끼는 아이 같은 감정처럼.
“쟤 아까 봤냐? 체육복 빌렸다고 좋아하는 거? 어지간히 급했나보다. 도경수 네가 존나 좋은 일 했네.”
“귀엽다 진짜, 체육복 빌렸다고 아싸래.”
“도경수 최소 영웅?”
“개웃기네, 체육복 빌려줬다고 영웅됨.”
“김종인 너 아는 애냐? 아까 쟤가 너 이름 말하지 않았냐?”
“응, 오늘 알았는데 착하더라. 이름이 뭐더라, ○…….”
“○○○.”
“응?”
“쟤 이름 ○○○이랬어.”
경수는 어렴풋한 미소를 지었다. 곧이어 어제 아침에 처음 ○○을 만났던 기막힌 상황을 생각했다. 김종인에게 자신의 물건을 전해달라고 했던 순간부터, 다소 웃긴 모습으로 체육복을 빌려간 지금까지. 그리고 변백현과 나란히 손을 들고 복도에서 서 있던 것도. 그건 꽤나 궁금한 이야기였다. 변백현과 친한 여자애라고 하면 당연히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건 가능한 일도,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일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무슨 사이냐며 비아냥거리는 톤으로 내게 질문하는 김민혁에게 아무것도 아니라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어댔다. 경수가 할 수 있는 건 딱 그것뿐이었다. 정말로 ○○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이름과, 변백현의 친구라는 것. 그 두 가지 뿐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