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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진은 1962년 음악을 좋아하는 은행원인 아버지와 유관순 열사와 함께 옥살이했던 외할머니, 한국 걸스카웃
연맹 총재를 지낸 어머니를 둔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다. 바이올리니스트의 꿈을 가졌던 아버지 덕분에 어려서
부터 수많은 음악을 듣고 성장한다. 9세때 뜻밖의 뇌막염에 걸려 학교를 가지못할 시기 외할머니가 가르쳐 준
피아노에 흥미를 느끼고 다른 피아니스트보다 늦은 9살에 피아노를 시작한다. 그러나 어려서 항상 들어온 클래식
음악의 감성은 그를 빠른 피아니스트로 성장시켜 2년 후인 1973년에 국립교향악단과 협연을 할 정도로 급성장하고
이듬해인 1974년 데뷔 독주회를 한다. 1974년 예원콩쿨, 1975년 이화.경향콩쿨에 우승하고 예원을 거쳐
서울예고에 입학하여 예고 3학년인 1979년 동아콩쿨에서 대상을 받고 중앙음악콩쿨에서 우승한다.
서울대학교 재학중 줄리어드음대로 유학하고 줄리어드 재학 중이던 1985년 클리브랜드에서 열린 제6회 카사드쉬
국제피아노 콩쿨(현,클리브랜드 국제콩쿨)에서 우승한다.
피아니스트 김대진은 피아니스트로서는 대단히 늦은 9세에 피아노를 처음 접하지만 클래식 음악을 어려서부터 듣고
자란 덕에 빠른 성장을 할 수 있게 된다. 피아노를 처음 시작부터 좋은 환경, 훌륭한 선생에게서 공부할 수 있었던
그는 빠르게 성장하고 서울 예고 시절 부터 테크닉적으로나 음악적으로 동년배를 추월하고 대학생들과 겨룬 동아,
중앙콩쿨에서 우승을 하여 일찌감치 한국 피아노계를 대표 할 피아니스트로 성장한다. 줄리어드를 마치고 그가 찾은
고국에서 모교인 서울음대 교수 채용에 두 번씩이나 거절당해 커다란 시련을 맞이하지만 때맞춰 개교한 한국 예술
종합 학교 교수로 임명된다. 1994년 시절은 연주 전문 피아니스트로만 한국에서 생활하는 자체가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귀국 후 선택한 교수직은 그를 세계적 피아니스트 조련 교수로 세계 음악계에 각인시켜준다.
교수직을 수행하면서 다양한 연주 활동을 한 그는 서서히 많은 제자를 발굴하여 탄탄한 피아니스트로 성장시킨다.
2001년 15세 그의 제자 손열음이 한국에서만 받은 음악교육으로 독일 에트링겐 국제 청소년 피아노콩쿨에서
우승한다. 3년 후 2004년 16세의 김선욱이 같은 콩쿨에서 우승, 2006년 18세의 김선욱이 리츠 국제 피아노
콩쿨에서 최연소 우승 2012년 16세의 문지영이 독일 에트링겐 콩쿨 우승을 시작으로 2014년 쥬네브 콩쿨
우승, 2015년 부조니 콩쿨에 우승하여 그의 제자들이 한국에서만 그에게 지도를 받고 세계 최상급 음악콩쿨에서
두각을 보인다, 이는 우연의 결과가 결코 아닌 그의 지도력이 출중하다고 밖엔 달리 생각할 수 없는 결과물이다.
필자가 예를 든 위의 세 명의 제자뿐만 아니라 그의 많은 다른 제자들이 우리나라 피아노계에서, 세계 무대에서
연주력을 확장하고 있다.
그의 제자들은 하나같이 다양한 자신들만의 특유한 음악적 칼라들을 가지고 있다. 절대로 한 교수의 제자들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다양한 그의 제자들은 피아니스트 김대진이 개개인 특성에 맞게 폭넓은 시각에서의 지도력이
아니라면 이루어 낼 수 없는 결과일 것이다. 그는 인터뷰에서 그의 제자 중 두각을 나타내는 제자들은 자신에게
지도를 받지 않았더라도 현재 위치에 있을 것이란 이야기한다. 그러나 필자는 그의 말에 동의할 수 없다.
물론 각자의 그릇이 있어 어느 위치까지는 도달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잘못된 방향을 잡아 주고, 모난 부분을
갈아내고, 성장에 맞는 혁신의 계기를 심어주어 피아니스트로 발전되는 과정이 절대로 스스로만이 이루어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듯이 그가 우리나라 피아노계 발전에 공헌한 부분은 그 어떤 피아니스트보다도 질적으로 높이
평가해야 하는 일 일 것이다. 이렇듯 피아니스트 김대진은 피아노 연주가로나 지도자로나 우리나라 음악계뿐만
아니라 세계 음악계에 이미 큰 족적을 남겼다.
2005년부터 그는 타의에 의해 수원시향의 상임 지휘자로 임명돼 지휘자의 길을 병행하고 있는데 지휘자의 길은
그리 녹록한 길이 아니라는 것을 그 자신은 느끼고 있을 것이다. 피아니스트의 길을 걷고 있던 그에게 갑자기 상임
지휘자 자리를 맡아 달라고 한 수원시향 관계자나 전혀 지휘자의 길을 생각하지도 않은 그가 상임지휘자를 맡은
결정이나 필자가 생각하기에는 참으로 끔찍한 행위였다고 생각한다. 프로의 세계는 냉정하다. 스코어를 잘 읽어
내고 음악적 지식이 많이 있다고 해서 훌륭한 지휘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오케스트라의 생리를 알아야 하고 그
못지않게 모든 악기의 특성이나 오케스트라 경영의 흐름 등 종합적으로 파악이 되어야 하고 이는 적어도
20대 때 지휘자로 자신의 목적을 분명히 정해 전문적인 지휘자의 길을 밟아 나가도 세계적인 지휘자가 되기에는
엄청난 노력이 따라야 하는데 40이 넘은 나이에 새로이 지휘자의 길을 선택한 일은 결코 좋은 결정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레날드 번스타인이 지휘자 시절 이따금 피아노를 직접 치며 지휘를 했다. 그의 피아노에서 우리가 전달
받은 느낌은 전문 피아니스트를 욕보이는 자신의 지나친 욕심의 결정체였다. 지휘자 정명훈이 다시 피아노 연주를
하겠다면서 요즈음 가끔 연주회를 하는데 그 역시 욕심에서 나온 결정이라고 본다. 지휘와 피아니스트의 길은 전혀
다른 분야다. 두 개를 병행한다는 그 자체가 성립이 되지 않는다. 단 하루라도 연습을 게을리하면 퇴보를 느끼는
것이 클래식 음악에서 프로의 세계다.
지휘자로써 10년의 경력을 쌓은 그를 필자가 볼 때 초반기보다는 분명히 많은 발전이 있었다는 점은 인정을 하나
지휘자로써 김대진은 아직 아마추어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한 느낌뿐이다. 이점이 가장 안타까운 일이다.
지휘공부에 빼앗긴 시간을 피아노나 후배양성에 쏟았다면 하는 생각은 필자만의 생각일까?
이제 그도 50대 중반에 접어든다. 아직 에너지가 있을 때 어떤 길이 한국음악계, 아니 세계 음악계를 위하는 길일까,
그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그 일에 전념해주기를 바라며 글을 마친다.
"필자 느낌의 글보다 객관적인 다음과 같은 글을 올립니다. 피아니스트 김대진을 잘 이해할 수 있는 글이라 생각
됩니다."
감성과 논리를 지적으로 단아하면서도 명석한 음색을 창출하는 피아니스트. 유연한 테크닉과 개성이 강한 작품
해석으로 독자적인 연주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정상급 연주자이다. 줄리어드 음대에 재학중이던 1985년 클리블랜드
에서 개최된 제6회 로베르 카사드쉬 국제 피아노 콩쿨(현, 클리브랜드 국제 콩쿨)에서 영예의 1위에 입상하여
한국인의 음악적 예지를 빛낸 피아니스트로의 탄탄한 길을 약속 받게 되었다. 1987년 미국 머킨홀에서 가진 뉴욕
데뷔 리싸이틀 에선 솔리스트가 되기 위한 모든 능력을 갖춘 훌륭한 연주자(뉴욕타임즈) 라는 찬사를 받았고
스위스의 티보 바르가 국제음악제, 미국 보드윈 국제음악제, 일본 이시카와 국제 페스티벌 등 유명음악제의 초청
독주회 및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 프랑스 빠드루 교향악단, 프랑스 릴 국립 교향악단, 뉴욕 화이트 플레인즈
오케스트라, 줄리아드 오케스트라(남미 순회연주), KBS교향악단, 서울시향(88서울올림픽 문화 페스티발,
교향악 축제, (한국의 아티스트 시리즈), 부천시향(모차르트 서거 200주년 기념연주), 등 국내외 정상급
오케스트라와 협연했다.
어느 작품을 대하든지 여러 가지 모양의 접근 방식을 모색함으로써 연주자의 의식이 작품 속에 투영되어야 한다는
음악관을 갖고 있는 그는 줄리어드 음대와 대학원에서 학사, 석사, 박사과정을 마친 후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에 관한 연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감성과 논리를 지적으로 조화시켜 단아하면서도 명석한 음색을 창출하는
피아니스트. 유연한 테크닉과 개성이 강한 작품해석으로 독자적인 연주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정상급 연주자다.
항상 다양하고도 의욕적인 기획연주 시도와 자신의 독특한 음악세계를 보여주는 그는 슈베르트 탄생 200주년
기념 독주회, 쇼팽 서거 150주년 기념 협주곡 전곡 연주회 등을 통해 호평을 받은바있다. 특히 2000년 4월
2일에 있었던 베토벤 협주곡 전곡 1일 연주회는 우리나라 악단의 한 획을 그은 연주회로 음악과 한 인간으로서
자신에 대한 열정적 노력을 통해 청중을 감동시켜 그의 음악세계를 함께 공감하고픈 욕구를 만들어 줌으로써
많은 이들의 지지를 이끌어 냈다. 이어 2001년 <낭만 콘체르토 시리즈 - 건반 위의 낭만>은 슈만, 그리그,
라흐마니노프의 명 협주곡을 한 무대에 올림으로써 그만의 색채로 대곡들을 거뜬히 소화해내어 그야말로 건반
위에 그린 낭만이었다는 감탄과 찬사를 끌어내었다.
2002년 5월 호암아트홀에서 John Field Nocturnes 전곡연주회를 가졌고 <김대진 렉처 콘서트>
2001년에 시작한 모차르트 협주곡 전곡 연주회는 2004년 12월 막을 내리기까지 매회 마다 매진을 기록하였다.
음반 작업도 활발히 진행되어, 2000년 Chopin 4 Ballade and Poulenc 8 Nocturnes이 수록된 음반이
Arcadia label로 출시되었고, 2001년 John Field the Complete Nocturnes 음반이 Monopoly label로
출시되었다. 2003년에는 Chopin Nocturnes 전곡이 출시되어 "연륜의 굴곡이 그대로 묻어나는 듯 정과 동의
세계가 한을 풀어내듯 허공을 향해 울려 퍼졌다"라는 호평을 받았고, 2004년 Sony classic label로 폴란드
국립라디오 교향악단과 함께한 Mozart Piano Concertos가 출시되다.
한국에서는 오정주 교수를 줄리어드 에서는 마틴 캐닌 교수를 사사한 그는 1994년부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우수한 제자들을 배출한 명교수로도 인정 받고 있으며 현재 가장 두터운 순수 팬을 확보하고 있는
연주자임과 동시에 헌신적인 교육자로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2002년 12월에 한국음악협회에서 기악부문 한국음악상을 수상 받아 다시 한 번 우리나라 음악계에 큰 공헌을 인정
받은 그는 '주간 동아'가 선정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분야별 40대 리더 40인 중 유일하게 음악인으로 선정
되었고, 또 2003년과 2005년 '동아 일보사'에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프로들이 뽑은 우리 분야 최고' 설문에서
'국내 최고의 연주가'로 연속 선정되었다. 또한, 2005년 문화관광부 올해의 예술상 음악부분, 예총예술문화상
음악부분에서 대상을 차지하였으며 2007년에는 2005년 1회 수상에 이어 금호음악스승상을 다시 수상하였다.
2003년 11월 26일 그는 마렉 야노프스키가 이끄는 역사적인 베를린 방송 교향악단 내한 공연에서 협연을 했으며,
한국예술실연자연합회에서 수여하는 제 5회 실연자 대상(음악부문)을 수상하였다. 2005년에는 미국 링컨
센터에서 독주회, 한국인 최초로 아일랜드 더블린 국립교향악단과 협연, 프랑스 쿠쉬빌(Courchevel) 국제음악제
연주, 일본 삿포로 교향악단과 동경 산토리 홀에서의 협연을 했으며 같은 해 7월 강동석, 조영창과 함께 프라하
심포니와의 협연을 가졌다. 또한, 2007년부터 금호아트홀 챔버 뮤직 소사이어티를 창단, 음악감독으로 활동을
하고 있으며 클리브랜드(2005), 에트링겐(2006), 센다이(2007), 클라라 하스킬(2007) 파다레프스키
(2007), 라흐마니노프(2008) 국제 콩쿠르 심사위원으로 위촉되어 세계무대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피아니스트로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2005년에는 수원시립교향악단을 통해 지휘자로 데뷔하였으며 2008년
수원 시립 교향악단 6대 상임지휘자로 위촉되었다.
"김대진 home page 발췌"
랑랑(1994년),손열음(2000년),김선욱(2004년),문지영(2012년) 등을 배출한 독일 에틀링겐 국제 청소년
피아노 콩쿠르는 피아노 영재들의 소문난 등용문입니다. 공교롭게도 순수 국내파인 세 명의 한국인 우승자는 모두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 음악원 김대진 교수의 제자들입니다. 김 교수 자신도 1973년 열한살의 나이로 국립
교향악단과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1번을 협연하고, 예원학교, 서울예고를 다니는 동안 이화, 경향, 중앙, 동아 등
국내 음악 콩쿠르를 휩쓸었던 전설적인 인물입니다. 서울대 음대 2학년이던 82년 줄리아드 음대로 유학을 떠난
그는 85년 로베르 카자드쥐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한 뒤 세계적인 교향악단들과 협연을 계속하는 한편,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연구로 줄리아드에서 흔치 않은 박사 학위까지 받았습니다. 94년 맨해튼 음대 예비학교 교수로
일하던 그가 갓 개교한 한예종 교수로 귀국한 것은 당시로는 상당히 이례적인 선택이었습니다. 귀국 후 그는
누구보다도 자주 무대에 서면서도 늘 최고의 기량을 보여주는 ‘전천후 피아니스트’로 평가받았고, 제자를 키워
지속적으로 국제무대에 내보냈으며, ‘김대진 렉처 콘서트’ 등 클래식 대중화를 위한 다양한 기획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했습니다. 2005년에는 지휘자로 데뷔하여 2008년부터 수원시향의 상임지휘자도 맡고 있습니다.
다음 세대를 키우는 데 일찍이 헌신한 뛰어난 스승을 만난다는 설렘으로 서울 서초동 한예종의 연구실을
찾았습니다. 교습을 위한 두 대의 피아노가 나란히 놓인 연구실은 생각보다 좁고 추웠습니다. 옆방의 노래와 악기
소리도 그대로 전달되었습니다.
노스웨스트를 끊고 가셨다가 대한항공으로 바꿔 일찍 귀국하다 사고당한 서울대 음대 오정주 교수
제자의 콩쿠르 준비 때문이었어요 교육자의 열정이 뭔지 깨달았죠 선생님 뒤를 잇겠다 생각했어요
불쑥불쑥 튀는 애들을 보면 잔디깎기 기계처럼 깎아냈어요 국제 콩쿠르에서 안 틀리고 입상은 할 수 있게
만들었지만 지구상에 딱 한명 ‘오리지널’로 키우진 못했어요 한국 아이들, 무대 올라서면 살기 느껴져
-12월14일 고양 아람누리에서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1번과 베토벤 교향곡 5번 지휘하시는 걸 봤습니다.
손열음, 김선욱 등 제자들과 눈길을 주고받으며 지휘할 때 가장 행복해 보인다는 평이 많던데, 그날 피아니스트
이진상과의 연주도 역시 좋더군요. “협연자를 편안하게 해주고, 그들이 뭘 원하는지 알아내는 건 지휘자의
기본이에요. 협연자와 교감하지 못할 거면 지휘할 이유가 없죠.”
-베토벤 교향곡 5번은 웬만한 클래식 애호가라면 전곡을 따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유명한 곡이라 지휘자에게도
부담이 클 텐데요.
“사실 엄청난 부담이죠. 그래서 그 곡으로 음반도 내고 연주도 여러 번 하면서 자신감을 쌓아왔어요. 연주자나
교향악단마다 그릇의 크기는 다 다르지만, 수원시향의 그릇을 우리가 노력해서 채웠다고 느끼는 순간, 자신 있는
연주가 만들어지거든요. 그 진심과 열정이 전달될 때 감동이 있는 거죠.”
-고양 아람누리에 모인 청중의 반응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집중도가 굉장히 높더군요.
“청중의 전반적인 수준도 올랐지만 그날 관객이 더 특별했던 것 같아요. 정말 음악이 듣고 싶어 온 분들인 걸 저도
느꼈거든요. 저는 연주 시작하기 전에 걸어 나가면서 동물적인 감각으로 느껴요. 걸어 나갈 때 연주자는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살짝 뜨고, 청중은 반대로 연주자를 누른다 싶게 살짝 가라앉은 분위기가 최상이에요. 우리나라 연주회는 번잡스럽게 약간 떠 있는 느낌일 때가 많거든요. 그날처럼 무게 있는 분위기에 나가면 절로 기분이 좋아지죠.”
-제자들 연주회에 빠짐없이 참석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제 연주회와 겹칠 때 빼고는 다 가려고 노력해요. 저에게 큰 도움이 되니까요. 연습실에서 6개월을 가르친 것보다,
실제 연주회 한 번을 보면서 애의 성향을 더 많이 파악할 수 있거든요. 연습실은 의식의 세계지만, 무대는 무의식의
세계예요. 놀랄 때 ‘아이고’라고 외치는 것을 ‘엄마야’로 바꾼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 교육이 성공했는지를 알려면
실질적으로 애를 깜짝 놀라게 하는 수밖에 없어요. 연습실은 의식의 세계라 교육의 결과를 확인할 방법이 없고,
무대에 올라야 평소에 내가 주문한 것들이 어느 정도 받아들여졌는지 확인할 수 있죠. 의식의 세계에서 모든 것을
다 입력시켜, 무의식의 세계에서 어떤 상황에 부딪히더라도 실력을 발휘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게 교육이에요.”
-상당히 무서운 선생님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아마도.(웃음) 그런데 지난 9월 영국의 리즈 콩쿠르 심사에 갔다가 가르침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뀌었어요. 국제
콩쿠르 심사를 처음 하는 게 아닌데, 그 전에 못 보던 걸 이번에 보게 되었거든요. 한국 애들과 유럽 애들의 차이가
눈에 확 들어온 거예요. 우리 애들이 무대에 올라오면 일단 무서워요. 어둡고 긴장되어 있는데 거의 살기가 느껴질
정도예요. 안 틀려서 입상해야겠다는 의지가 그만큼 강해요. 그런 애들을 보면 심사위원도 긴장이 돼요.
듣는 사람도 (몸을 바짝 세우고 앞을 무섭게 쳐다보며) 이렇게 딱 경직이 되기 마련이죠. 저도 그렇게 경직된
상태로 듣다가 ‘가만있어 봐. 왜 이러는 거지?’ 고민을 하게 됐어요. 유럽 애들은 기능적으로는 우리보다 떨어지지만, 어쨌든 자기 이야기를 하거든요. 무대 위에서 즐기며 연주하니까 듣는 사람도 편안하게 거기에 빨려 들어가며
감상을 할 수 있어요. 축구도 똑같더라고요. 축구공을 보면 무서운 코치만 생각나는 우리 애들과 축구공을 놀이로
생각하는 남미 애들의 차이랄까.”
-원인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과거에 저는 불쑥불쑥 튀어나온 특징 있는 애들을 보면 마치 잔디를 깎듯이 그 울퉁불퉁한 부분을 깎아냈어요.
시간도 오래 안 걸렸어요. 6개월이면 완벽하게 깎아서 객관적인 부분만 남길 수 있었죠. 걔네들이 국제 콩쿠르
나가서 실수 없이 상도 타고 그랬어요. 그런데 그런 애들에게 자신만의 얼굴이 있었나 생각해 보니, 잘
모르겠더군요. 후회가 밀려왔어요. 이 아이는 지구상에 딱 한 명이에요. 그 한 명이 자기 느낌을 표출하고 자기
주장을 하는 게 진짜거든요. 오리지널! 남이 절대 흉내 낼 수 없는 거죠. 그걸 끌어내는 게 교육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하든 튀지 않는 게 중요한 나라잖아요.”
-잔디 기계가 깎기 전에 잔디가 스스로 자기를 깎기도 하죠.
“정확한 표현이에요. 흔히 말하는 정석 코스, 즉 예원, 예고 나온 애들의 피아노 치는 게 다 흡사한 이유가 거기
있어요. 우리는 남과 다를까 걱정하고, 외국 애들은 남과 같아질까 걱정하죠. 물론 그림이 되려면 일단 액자 안에
들어가야 해요. 남에게도 인정받을 수 있는 객관성이라는 틀을 갖춰야 하죠. 그러나 액자 안에 들어가면서도,
어디선가 본 듯한 그림이 아니라, 난생처음 본 그림이라는 느낌을 줘야 해요. 그런데 제가 지금까지 액자 만드는
방법만 가르친 게 아닌지 반성하고 있어요.”
9살 때 뇌막염은 피아니스트 인생의 출발
-과거의 방법으로도 손열음, 김선욱 같은 훌륭한 연주자를 키워내셨잖아요. “물론 저도 자기 합리화가 필요하니까
‘그래도 네가 잘못만 한 건 아니야. 네 학생 중에는 누구도 있고 누구도 있잖아?’라고 자문하죠. 하지만 걔네들은
어딜 가도 성공했을 애들이에요. 원래부터 개성이 있었죠. 외국 애들은 액자에 안 들어가는 그림을 그리고 우리
애들은 아주 견고한 액자만 만드는데, 걔들은 그 두 가지를 다 갖춘 특별한 경우였어요. 저는 그 특별한
애들이 너무 옆으로 빠지거나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모를 때 방향을 제시해줬을 뿐이에요.”
-결국 타고난 게 중요한 건가요?
“타고난 것만 중요한 건 아니고요. 예를 들면 제 학생 중에 페달을 너무너무 못 쓰는 아이가 있었어요. 그래서 4년
내내 제가 페달 밟기만 가르쳤어요. 졸업 연주 하루 전날 바로 이 자리에서 레슨을 하는데 결국 다 고쳐진 걸 보고,
제가 일기에 썼어요. ‘다 고쳤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훌륭한 선생이다!’ 그리고 졸업연주회에 갔는데 걔가 신입생
때보다도 더 나빠진 상태로 연주를 하더군요. 원점이 아니라 마이너스로 간 거예요. 그날 밤 ‘아, 나 같은 사람이
누구를 가르쳐도 되는가?’ 회의가 밀려들었어요. 그런데 몇 년 후 걔한데 이메일이 왔는데 ‘유학 와서 제가 페달이
안 좋다는 걸 깨달았어요’ 이렇게 적혀 있는 거예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김 교수님께서 내내 지적했던 문제잖아요?
“그러니까 제가 가르친 것은 걔한테 하나도 입력이 안 된 거예요.(웃음) 뭘 가르친다는 게 의미가 없고, 자기 스스로
깨닫는 순간이 와야 하는 거죠. 굳이 얘기하자면 그걸 깨닫게 해주는 거울 역할을 하는 게 선생이고요. 인내를 갖고
더 긴 시간 바라봐야 하는 거죠.”
“1983년 오정주 선생님이 미국을 다녀오는 길에 대한항공기 피격 사건으로 세상을 떠나셨어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충격이었죠. 비행기표를 끊으러 가실 때 저도 따라갔기 때문에 잘 알아요. 노스웨스트를 끊고 가셨다가 대한
항공으로 바꾸어 며칠 일찍 귀국하다가 사고를 당하셨거든요. 왜 그랬을까 생각해 보니, 순전히 제 짐작이지만,
며칠 일찍 들어오면 당신 제자가 콩쿠르 준비하는 걸 한 번 더 들어주실 수 있었어요. 그것 말고는 비싼 돈 주고
표를 바꿀 이유가 없었거든요.
선생님의 죽음을 보고 교육자의 열정이 뭔지 깨달았죠. 선생님 연구실의 유품도 제가 정리했어요. 그때부터
선생님의 뒤를 이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인생의 큰 전환이었죠.”
-한예종을 선택한 이유는?
“미국에서 교수를 하던 중 서울대 교수 공채를 보고 당연히 제 갈 길이라 생각하고 두 번 지원했는데 다 떨어졌어요.
살면서 가장 힘든 순간이었죠. 두 번째 떨어지고 미국으로 돌아가기 전날 이강숙 선생님께 인사 전화를 드렸는데,
바로 만나자고 하시더군요. 찾아뵈니 당장 마음을 정하면 (한예종 교수로) 뽑아주겠다. 지금 이 자리에서 정하라’고
하셨어요. 뭔가에 홀렸다고 할까요, 그 자리에서 그냥 ‘알겠습니다’ 해버렸어요.”
-해외 음악인으로 국내 교향악단과 협연하며 받던 개런티와 귀국 후 받는 개런티가 너무 달라서 놀랐다고 하던데요.
“똑같은 사람인데 귀국하자마자 거의 3분의 1로 깎이더군요. 그런데 1997년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국내
음악인에게 발전의 계기가 찾아왔어요.
외환위기로 외국 음악인들을 불러올 수 없게 되면서 저희가 전부 대타를 뛰게 됐거든요. 그때부터 봇물 터지듯이
국내 음악인들의 새로운 기획이 시작됐어요. 무언의 공감이 있었던 거죠. 그 전까지는 국내에서 단 두 명이라도 함께
모여 기획연주를 의논한 적이 없는데, 그때부터 좋은 기획이 이루어지고 청중들도 ‘돈 주고 가서 들을 만하다,
싸고 좋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피아노 하면 한국! 이상한 애국심의 정체는?
-유학파로서 순수 국내파 양성에 헌신한 이유도 궁금합니다.
“1980년대에는 ‘피아노 하면 모스크바’였어요. 특별한 이유 없이 그때부터 저는 ‘피아노 하면 한국’이 안 될 이유가
어디 있나 생각했어요. 국내파를 키울 뿐만 아니라 해외에서 유학 오게 만들겠다는 꿈을 꿨죠. 실제로 지금은
일본에서 비행기 타고 저에게 개인 레슨 받으러 오는 학생들이 생겼어요.”
-뒤늦게 지휘자로 데뷔한 이유는 뭔가요?
“지휘자를 꿈꾼 적은 없지만, 우리 음악계의 고질적인 문제에 대한 고민은 있었어요. 국내파보다 유학파가 우대를
받는 것도 문제지만, 연주자를 꿈꾸며 유학을 마친 그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것도 문제거든요.
일자리가 없으니 대개 레슨을 하는 교육자가 되는데, 일자리가 없다고 하면서도 교향악단에는 들어오지 않아요.
연주자를 꿈꾸던 사람이 교향악단에 들어오는 건 한마디로 창피하다는 거죠. 대우도 워낙 열악하고요.
그런데 해외는 베를린필이든, 뉴욕필이든 거기 들어가면 주변 사람들이 국제 콩쿠르 1등 한 것만큼 축하해 줘요.
우수한 연주자가 교향악단에 들어와 교향악단의 기량이 향상되면 청중도 모이기 마련이죠. 우리나라는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훌륭한 교향악단을 만들 수 있는 기본 자원을 갖춘 나라인데, 그런 순환이 제대로 이루어지지를
않았어요. 그런 고민을 하던 중에 수원시향에서 지휘자 제안을 받았죠. 처음에는 피아노 협연을 하자는 줄 알았는데,
교향곡을 정하라기에 전화를 잘못 받은 줄 알았어요.(웃음) 그런데 시장님 만나고 마음이 움직여서 지휘자를 맡게
됐죠. 수원시향이 일정한 수준에 올라 인구에 회자되고 이제는 줄리아드 졸업생이 들어올 정도가 된 데 보람을
느껴요. 지금도 지휘자로서 야망은 없고, 대한민국이 음악 강국이 되는 기본 구조를 만드는 데 기여하고 싶을
뿐이에요.”
-삶의 바탕에 깔린 이상한 애국심은 어디서 나온 거죠, 외할머니?
“설명은 못하겠어요. 그냥 원래 그래요.(웃음)”
-살면서 가장 따뜻했던 순간을 꼽는다면?
“학생들이 잘됐을 때죠. 콩쿠르 우승할 때도 좋지만, 학생이 자기 벽을 뚫고 한 단계 도약하는 걸 볼 때마다 제가
느끼는 순수한 감동이 있어요. 그게 저의 존재 이유고요.”
‘슈퍼 엘리트’에 속하는 그의 가문과 경력 때문에 인터뷰를 하기 전에 솔직히 잠깐 주저했습니다. 그러나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느 분야든 일가를 이룬 사람에게는 배울 점이 있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했습니다. 특히 ‘가르침’에 대한
김대진의 최근 깨달음은 비수처럼 팍팍 제 가슴에 꽂혔습니다. 남이 흉내 낼 수 없는 오리지널을 키우지 못하고
액자 만드는 법만 가르치는 것은 비단 음악계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항을 상징하던 이른바
‘386세대’가 어느덧 ‘다음 세대를 키우지 않는 꼰대들’로 비판받는 시절이 되었습니다. 운동권과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았던 김대진이지만, 그가 보여주는 좀 다른 차원의 애국심과 후진 양성의 열정이 어쩌면 386세대를 위한
가장 훌륭한 알리바이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녹취·진행 최우리 기자 ecowoori@hani.co.kr
피아니스트 박종화 김철웅 조재혁 박종훈 김대진
franciscopa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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