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대 정종실록]
[1. 태조의 세자 책봉과 왕자들의 반발]
태조는 둘째 부인 강씨를 총애했다. 강씨는 젊고 총명했으며 친정이 권문세가였기에 태조에게 힘이 되어주기도 했다. 그 때문에 태조는 많은 부분을 그녀에게 의존했으며, 그녀 또한 태조의 집권 거사에 직접 참여하여 막후에서 대단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그녀는 정도전 등 신진사대부 출신의 개국 공신들과도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러한 강씨의 영향력은 마침내 세자 책봉에까지 미치게 된다. 태조는 첫째부인 한씨 소생의 장성한 왕자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강씨 소생인 여덟째 아들방석을 세자에 책봉했다. 1392년 8월, 그때 방석의 나이 불과 11세였다. 혈기왕성했던 한씨소생의 아들들은 아버지의 처사에 분개했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1392년 7월, 태조가 조선을 개국하고 한 달 뒤에 소년 방석을 세자로 책봉했을 때 장남방우의 나이는 이미 불혹을 바라보는 39세였고, 방석의 세자 책봉에 대해 가장 불만이 많았던 정안군 방원의 나이는 26세였다. 방원은 맏형인 방우를 세자로 책봉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태조는 단호하게 거부했다. 방원은 위화도에서 회군한 이성계에게 개경의 최영 부대를 쳐야한다고 주장했으며, 정몽주를 살해해 개국 반대 세력을 제거했는가 하면, 왕대비 안씨를 강압하여 공양왕을 폐위시키고 이성계를 등위시킨 주인공이었다. 따라서 공적을 따진다면 세자 자리는 당연히 방원에게 돌아가야 했지만, 조선 개국 후 그에게 돌아온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왕후 강씨와 정도전 등 개혁파의 배척으로 군권을 상실하고 개국 공신책록에서도 제외당하는 굴욕을 맛보아야 했다. 그런 가운데 세자 자리마저 강비의 소생인 방석에게 돌아갔던 것이다.
태조는 원래 계비 강씨의 요구에 따라 일곱째 아들 방번을 세자로 책봉하려 했다. 하지만 공신인 배극렴, 조준 등은 방번이 아직 어리고 자질이 세자에 적당하지 않기 때문에 방원의 세자 책립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태조는 방번 대신에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고 정도전으로 하여금 세자를 가르치도록 했다. 태조와 강비 그리고 정도전의 방원에 대한 지나친 경계와 냉대, 이것이 화근이 되어 조선왕조는 개국 초장부터 피비린내 나는 살육전을 감내해야 했다.
[2. 제1차 왕자의 난]
1398년 무인년 8월 25일, 방원을 비롯한 신의왕후 한씨 소생 왕자들이 사병을 동원하여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 반대파 세력을 불의에 습격하여 살해하고, 세자 방석과 그의 동복형 방번을 죽인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을 '제1차 왕자의 난', '방원의 난' 또는 '무인정사','정도전의 난'이라고 한다. 조선 건국 이후 개국 공신들의 지위는 급격히 상승되었다. 1392년 의흥삼군부 설치를 계기로 하여 정도전을 중심으로 추진되기 시작한 병권 집중운동과 중앙 집권화 정책은 권력구조면에서 큰 변화를 가져왔다. 특히 개국 공신 중에서 정도전의 지위가 크게 부상되었고 여타의 훈신과 왕실 세력 그리고 개국 핵심 세력인 무장 세력들은 정치 일선에서 소외되기 시작했다.
정도전은 개국 과정에서 스스로를 한나라의 장량에 비유하면서 한고조 유방이 장량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장량이 한고조를 이용했다면서 이성계보다 자신이 더 개국의 주역임을 내세우곤 했다. 그는 통치자가 민심을 잃었을 때는 물리력에 의해 통치자를 교체할 수 있다는 맹자의 역성혁명론을 주장하였고 실제로 그 혁명 논리에 따라 왕조 교체를 수행했다. 또한 재상을 최고의 실권자로 하여 권력과 직분이 분화된 합리적인 관료 지배 체제를 이상적인 정치제도로 보았다. 정도전의 이러한 정치관은 신권 중심의 왕정이라는 점에서 왕족들에게는 대단히 위협적인내용이었다. 이방원이 정도전을 제거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게다가 정도전은 세자방석과 왕후 강씨를 끼고 있었다.
조선 개국 이후 방원은 정치 일선에서 완전히 물러났지만 정계 복귀를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던 중 1396년 최대의 난적이자 세자 방석과 정도전의 배후 세력인 강비가 병으로 죽자 방원의 정계 복귀 노력은 한층 가속화되었다. 그러나 그간 꾸준히 병권 집중운동을 벌여오던 정도전 일파는 1398년 이른바 진법 훈련 강화를 내세우며 왕족들이 거느리고 있던 사병을 해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과정에서 방원과 정도전의 대립은 불가피해졌다. 정도전은 왕족들이 사병을 통수하고 있는 한 병권이 정부로 모아질 수 없다고 보았고, 방원은 사병을 잃을 경우 완전히 힘을 빼앗기고 말 처지였다. 말하자면 사병은 방원의 마지막보루였던 셈이고, 정도전은 사병만 해체하면 정적의 기세를 완전히 제거하는 셈이었다.
상황이 여기에까지 이르자 방원은 극약처방을 내렸다. 한씨 소생의 왕자들은 세자 책봉문제로 불만이 팽배해진 상태였고 게다가 계모 강씨마저 이미 죽고 없는 상황이었다. 방원은 방의와 방간 등 형제들과 함께 정도전 일파를 살해하기로 결정하고 정도전 일파의밀모설을 만든다. 즉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이 밀모하여 태조의 병세가 위독하다고 속이고왕자들을 궁중으로 불러들인 후 일거에 한씨 소생의 왕자들을 살육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방원은 이것을 미연에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사병을 동원, 정도전 일파를 습격해살해하고, 세자 방석은 폐위하여 귀양 보냈다가 방석의 동복형 방번과 함께 죽여버렸다. 태조는 이때 병중이어서 내막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뒤늦게 방번, 방석 형제가 살해당한사실을 알고는 무척 상심하여 왕위를 내놓고 말았다.
방원이 거사에 성공하자 하륜, 이거이 등 방원의 심복들은 그를 세자로 책봉하려 했으나 방원은 극구 사양했다. 이에 따라 장남인 방우가 1393년에 이미 병사하고 없었기에 방원의뜻에 따라 둘째인 방과가 세자에 책봉되고 곧 왕위를 이었다.방과가 비록 세자에 책봉되고 곧 왕위를 넘겨받긴 했지만 실권은 방원에게 있었다. 방원일파는 정종 즉위 후 정사공신에 서훈되었으며, 또한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여 병권 집중과 중앙 집권체제의 강화를 위한 제도 개혁을 추진하게 된다.방원은 정도전에게 병권이 집중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를 제거했지만, 자신이 권력을 잡자세력 강화를 위해서 왕족들의 사병을 혁파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훗날 이것이 '제2차 왕자의 난'을 유발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3. 정종의 등극과 퇴위](1357-1419, 재위 기간 1398년 9월-1400년 11월, 2년 2개월)
'왕자의 난'으로 방석과 방번 형제가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태조는 그 다음달인 1398년9월 둘째아들 방과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상왕으로 물러났고, 방과는 동생 방원의 뜻에 따라 조선 제2대 왕으로 등극했다. 영안군 방과는 원래 왕위에 뜻이 없었다. 세자 책봉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도 그는"당초부터 대의를 주창하고 개국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업적은 모두 정안군(방원)의공로인데 내가 어찌 세자가 될 수 있느냐?"고 반문하며 세자 되기를 극구 사양했다. 그러나 방원의 양보와 권유로 세자로 책봉되었고, 1개월 후에 태조가 물러나면서 왕위에 올랐다. 태조가 물러난 것은 자의보다는 타의에 의한 면이 짙다. 이미 조정은 방원의 세력이 포진해있었고, 태조는 와병 중이어서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방원의 양보로 즉위한 정종이 비록 왕좌에 있긴 했으나 권력이 방원의 손에 집중되어있었기 때문에 정종조 때의 정치는 거의 정안군 방원의 뜻에 따라 진행되었다.1399년 서울의 지형에 문제가 있다 하여 수도를 다시 개경으로 옮겨갔으며, 같은 해 8월 분경금지법을 제정, 관인(관직에 있는 사람)이 왕족과 외척들에게 의존하는 것을 금지하여 권력을 가진 귀족들의 힘을 약화시켰다. 그 후 '제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방원을세제(왕위계승자로 결정된 동생을 일컬음)로 책봉하였고, 그 해에 왕족 및 권력가들의 사병을혁파하고 병권을 의흥삼군부로 집중시켰다. 또한 도평의사사를 의정부로 고치고 중추원을 삼군부로 고치면서, 삼군부에 직을 두고 있는 자는 의정부에 합좌하지 못하게 해 정무와 군정을 분리시켰다. 이러한 일련의 개혁은 왕권 강화를 위한 것으로 모두 방원의 영향력 하에서 이루어졌다.1399년 3월에는 집현전을 설치하여 장서와 경적의 강론을 담당하게 했으며, 5월에는 태조때 완성된 '향약제생집성방'을 편찬하였고, 이듬해 6월에는 노비 변정도감을 설치하여 노비의 변속을 관리했다.
정종은 재위시에 정무보다는 격구 등의 오락에 탐닉했는데 이는 그 나름의 보신책이었다. 이런 보신책 덕분에 정종은 방원과의 우애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1400년 11월 마침내 방원에게 왕좌를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상왕으로 물러나는 것은 그와 그의 정비 정안왕후의 간절한 바람이기도 했다. 그것이 현실적으로 목숨을 유지하는 유일한길이었기 때문이다. 정종은 상왕으로 물러난 뒤에는 인덕궁에 거주하면서 주로 격구, 사냥, 온천, 연회 등의유유자적한 생활을 하다가 왕위에서 물러난 19년 후인 세종 원년에 63세로 일기를 마쳤다. 그는 죽은 후에도 오랫동안 묘호도 없이 공정대왕으로 불리다가 1681년(숙종 7년)에 비로소 정종이라는 묘호를 받았다. 그의 능은 후릉으로 개성시 판문군 령정리에 있으며, 정안왕후김씨와 함께 묻혀 있다. 정종의 묘호가 숙종 대에 와서 정해진 것과, 능이 일반 왕족들이 묻히는 개성시 판문군에 있는 점으로 미뤄볼 때 그는 조선 중기까지 왕으로 대우를 받지 못한듯하다.
정종은 정안왕후 김씨를 포함해 총 8명의 부인에게서 15명의 아들과 8명의 딸을 두었다. 야사에는 정종에게 왕좌를 내주라고 권고한 사람은 정안왕후 김씨라고 한다. 김씨는 정종이 왕위를 더 오래 유지하고 있다가는 방원에게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잠자리에서정종에게 그만 물러날 것을 권고했고, 정종 역시 그녀의 생각과 같았기에 권고받은 바로 다음날 왕위에서 물러났다고 한다. 그만큼 정종과 정안왕후는 잠자리에서조차 죽음을 걱정해야 할 정도로 동생 방원을 두려워했는데, 이는 실권없는 왕과 왕후의 처지가 얼마나 비참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라 하겠다.
표: 제2대 정종 가계도
조선의 제2대 왕인 정종(방과, 영안대군)은, 1357년에 태어나 1419년에 세상을 떴다. 재위기간은 1398년 9월부터 1400년 11월까지로 2년 2개월간이다. 아래에 정종의 가계도를 약술한다. 정종은 태조와 신의왕후 한씨 사이에서 난 차남으로 조선의 제2대 왕이 되었으며, 부인8명에게서 15남 8녀의 자녀를 두었다.정안왕후 김씨 사이에서는 자식을 얻지 못했다. 성빈 지씨에게서 덕천군, 도평군 등 2남을 두었고, 숙의 지씨에게서 의평군, 선성군, 임성군, 함양옹주 등 3남 1녀를 두었으며, 숙의 기씨에게서 순평군, 금평군, 정석군, 무림군, 숙신옹주 등 4남 1녀를 두었으며, 숙의 문씨에게서1남 종의군을 두었고, 숙의 윤씨에게서 수도군, 임언군, 석보군, 장천군, 인천옹주 등 4남 1녀를 두었으며, 숙의 이씨에게서 1남 진남군을 두었고, 다른 후궁에게서 덕천옹주, 고성옹주, 상원옹주, 전산옹주, 함안옹주 등 5녀를 두었다.
[4. '정종실록' 편찬 경위]
'정종실록'은 총 6권 1책으로 구성됐으며, 1399년 1월에서 1400년 12월까지 2년 동안에 있었던 각 방면의 역사적 사실을 연월일순에 따라 편년체로 서술하고 있다. 원래 명칭은'공정왕실록'이며 숙종 때 정종이라는 묘호가 정해진 뒤로 비로소 '정종실록'으로 불리게 되었다. 현재 다른 실록과 함께 국보 151호로 지정되어 있다.1422년(세종 4년) 태종이 죽자 이듬해 12월 세종은 공정왕과 태종의 양조 실록을 수찬하라고 지시하고 사관들에게 사초를 제출하라고 명했다. 사초 제출 기한은 한성에 있는 자는 그 해 2월까지, 경기도 등 중부권에 있는 자는 3월까지, 그리고 경상, 전라, 평안,
함경도에 있는 자는 4월까지 제출토록 하였다. 편찬 작업은 1423년 3월부터 시작돼 3년 뒤인 1426년 8월에 '공정왕실록'이 먼저 완성되었다. 편찬 장소는 동부 연희방에 있는 덕흥사 내에 마련한 사국이었으며 책임자는변 계량과 윤회였다. 하지만 1430년 변계량이 사망하자 좌의정 황희와 우의정 맹사성이 가담하였다.그 뒤 1438년, 변계량이 지은 헌릉 비문 가운데 두 번에 걸친 왕자의 난에 대한 기술에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있자 세종은 이를 개수하도록 하여 1442년에 개수 작업이 완료되었다.'공정왕실록'은 7년 동안의 작업 끝에 1431년 '태조실록', '태종실록'과 함께 충주사고에 봉안되었고, 1445년 3부를 더 필사하여 신설한 전주, 성주사고에 추가 봉안되었다.
정종 시대의 세계 약사
정종 시대의 세계 주요 사건을 살펴보면 중국에서는 '삼국지연의'를 지었던 나관중이 7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고(1400년), 또 이 해에 '켄터베리 이야기'의 저자 영국의 초서도 6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조선왕조 제2대 정종
이성계의 세자책봉과 화근의 시작
태조는 둘째 부인 강씨를 총애했다. 강씨는 젊고 총명했으며 친정이 권문세가였기에 태조에게 힘이 되어주기도 했 다. 그 때문에 태조는 많은 부분을 그녀에게 의존했으며, 그녀 또한 태조의 집권 거사에 직접 참여하여 막후에서 대단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1392년 7월, 태조가 조선을 개국하고 한 달 뒤에 소년 방석을 세자로 책봉했을 때 장남 방우의 나이는 이미 불혹 을 바라보는 39세였고, 방석의 세자 책봉에 대해 가장 불만이 많았던 정안군 방원의 나이는 26세였다.
태조와 강비 그리고 정도전의 방원에 대한 지나친 경계와 냉대, 이것이 화근이 되어 조선왕조는 개국 초장부터 피비린내 나는 살육전을 감내해야 했다.
1차 왕자의 난
1398년 무인년 8월 25일, 방원을 비롯한 신의왕후 한씨 소생 왕자들이 사병을 동원하여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 반대파 세력을 불의에 습격하여 살해하고, 세자 방석과 그의 동복형 방번을 죽인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을 '제1 차 왕자의 난' '방원의 난' 또는 '무인정사' '정도전의 난'이라고 한다.
그간 꾸준히 병권 집중운동을 벌여오던 정도전 일파는 1398년 이른바 진법 훈련 강화를 내세우며 왕족 들이 거느리고 있던 사병을 해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상황이 여기에까지 이르자 방원은 극약처방을 내렸다. 방원은 방의와 방간 등 형제들과 함께 정도전 일파를 살해하기로 결정하고 정도전 일파의 밀모설을 만든다.
즉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이 밀모하여 태조의 병세가 위독하다고 속이고 왕자들을 궁중으로 불러들인 후 일거에 한씨 소생의 왕자들을 살육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방원은 이것을 미연에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사병을 동원 정도전 일파를 습격해 살해하고 세자 방석은 폐위하여 귀양보냈다가 방석의 동복형 방번과 함께 죽여버렸다. 방원은 정도전에게 병권이 집중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를 제거했지만 자신이 권력을 잡자 세력 강화를 위해서 왕족 들의 사병을 혁파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훗날 이것이 '제2차 왕자의 난'을 유발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정종의 등극 그리고 퇴위
'왕자의 난'으로 방석과 방번 형제가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태조는 그 다음달인 1398년 9월 둘째 아들 방과에 게 왕위를 넘겨주고 상왕으로 물러났고, 방과는 동생 방원의 뜻에 따라 조선 제2대 왕으로 등극했다.태조가 물러난 것은 자의보다는 타의에 의한 면이 짙다. 이미 조정은 방원의 세력이 포진해 있었고 태조는 와병중 이어서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다. 방원의 양보로 즉위한 정종이 비록 왕좌에 있긴 했으나 권력이 방원의 손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정종조때의 정 치는 거의 정안군 방원의 뜻에 따라 진행되었다.
정종은 재위시에 정무보다는 격구 등의 오락에 탐닉했는데 이는 그 나름의 보신책이었다. 이런 보신책 덕분에 정종은 방원과의 우애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1400년 11월 마침내 방원에게 왕좌를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 났다. 상왕으로 물러나는 것은 그와 그의 정비 정안왕후의 간절한 바람이기도 했다. 그것이 현실적으로 목숨을 유지하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정종은 상왕으로 물러난 뒤에는 인덕궁에 거주하면서 주로 격구, 사냥, 온천, 연회 등의 유유자적한 생활을 하다가 왕위에서 물러난 19년 후인 세종 원년에 63세로 일기를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