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소라 히바리 (美空 ひばり )는 1937년 카나가와 켄 (神奈川県 )요코하마 시 (橫濱市 )이소고 구 (磯子區) 에서 네 남매의 장녀로 태어났다. 본명은 '카토 카즈에 (加藤 和枝)' 로 학력은 세이카가쿠인 고교 (精華學園 高校 )출신이라는데 확실치는 않다고 하고, 특히 그녀의 아버지 카토 마스키치 (加藤 增吉) 가 한국인이라는 유력한 설이 있다 (어머니 성함은 카토 키미에 加藤 喜美枝).
그녀는 1943년 2차세계대전 참전군인들을 위한 송별회 파티에서 노래를 부르면서 재능을 처음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이에 그녀의 아버지는 딸의 연예활동을 위해 적금을 해약하여 투자를 하였다고한다. 이렇게해서 미소라 히바리는 1945년 8살의 아니에 요코하마의 콘서트홀에서 데뷔를 한다.
그리고 이때 그녀는 어머니의 제안으로 성을 '미소라 (美空)' 로 개명한다.
이듬해 그녀가 9살이 되던 해에 미소라는 NHK 방송에 출연하게 되고 그녀의 재능은 작곡가 Masao Koga 의 눈에 띄게 된다. 코가 마사오는 미소라의 대담함과 이해력 그리고 감성의 원숙도 등에서 그녀를 신동이라 여기고 그녀를 훈련시키고, 11살이 되는 향후 2년 동안의 활동으로 미소라는 이미 인정받는 가수가 되고 그녀의 콘서트는 전회 매진이 된다. 12살이 되는 1949년 부터 미소라는 레코드를 취입하기 시작했고, 이름을 '미소라 히바리(美空 ひばり)' 로 개명한다. 그리고 같은 해 7월, 미소라 히바리는 콜롬비아 레코드에서 그녀의 첫 싱글 '河童ブギウギ(카파 부기우기)' 를 취입하는데, 이 싱글을 히트를 치며 모두 45만 장 이상이 팔려나갔다. 이어서 '悲しき口笛 (카나시키 쿠치부에)' 를 발표하는데 라디오 방송을 타고 일본 전국에서 히트를 친다. 역시 같은 해에 그녀는 첫 영화 'のど自慢狂時代 (노도짐 안쿄 지다이, 1949)' 에 주연으로 출연하고 그녀의 이름을 일본 전국에 알리게 되는데, 그녀는 이떄 1949년부터 1987년까지 약 160여편의 영화에 출연하며 여배우로도 활동을 하고, 수상도 여러번 하였다. 특히 '東京キッド (도쿄 키도, 1950)' 에서 길거리 고아역으로 나온 그녀는 당시 戰後 패망한 일본의 궁핌한 모습과 함께 일본인들에게 희망을 비춰주는 역으로 일본인들의 사랑을 받게 된다. 패전국 일본인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며 꿈과 희망을 노래해 주었며 온 국민의 사람을 받던 미소라 히바리는 1957년 1월 13일, 아사쿠사 국제극장에서 한 광신팬의 염산 공격을 받고 얼굴에 부상을 입는 사건을 당한다. 하지만 다행히도 상처는 남지 않았다. 이어서 1960년, '哀愁波止場(애수 부두)' 로 일본 레코드대상 가창상을 수상하고, 1962년 당시 인기 영화배우였던 고바야시 아키라 와 결혼했지만, 2년 만인 1964년에 이혼하게 된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에 텔레비전 드라마 '柔(야와라)' 의 주제가로 사용된 동명의 곡을 발표해 크게 인기를 얻어 180만 매의 음반을 판매하고, 일본 레코드대상을 수상한다. 곧이어 1966년에 발표한 '悲しい酒 (카나시이 사케)' 145만 매, 1967년의 '真赤な太陽 (마카나 타이요)' 는 140만 매를 판매하며 크게 인기를 끌었다. 이렇게 패전 후 폐허가 된 일본과 실의에 빠진 일본인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준 미소라 히바리는, 역시 패전국 국민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준 시대의 영웅, 역도산 力道山 (1924-1963) 과의 스캔들이 터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일본인들에게 기사거리를 주기위한 기획사들의 스캔들로 사실이 아닌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외에도 그녀가 27세 되던 해부터는 TBS-TV가 그녀의 이름을 딴 '미소라히바리 극장' 이란 프로도 만들었으며, NHK 홍백가요제전에 16년 계속 출연하는 기록도 갖고 있다. 그리고 1973년, 미소라 히바리의 동생인 카토 테츠야는 야쿠자와 관련된 혐의로 기소당한다. 비록 당시에 NHK 는 그러한 사실을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미소라 히바리는 코하쿠 우타가센(紅白歌合戰)에서 18년만에 처음으로 제외된다. 이에 훗날 그녀는 수년 동안 NHK 출연을 거부하기도 한다. 1980년대에 들어 미소라 히바리의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곧이어 친동생과 친구마저 차례로 사망하는 비운을 맞게 된다. 인기 또한 전성기와는 다르게 눈에 띄게 떨어져 미소라 히바리는 술과 담배에 의존하는 정도가 높아졌고, 몸은 나빠지기 시작했다. 1987년 4월 22일 (50세), 후쿠오카로 공연을 가던 미소라 히바리는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으로 이송된다. 그녀는 '만성 간염으로 인한 양측 대퇴골 골두 괴사”라는 진단이 내려졌다. “재기 불가능” 이라는 평을 받았지만, 수 개월간 요양한 뒤 8월 3일에 퇴원, 10월에 신곡 'みだれ髪(미다레가미)' 를 레코딩 해 복귀한다. 1988년 4월 11일에는 도쿄돔(東京ド-ム)에서 재기콘서트 '不死鳥(후시초) - 날아라 새로운 하늘을 향해' 를 가져 완전 복귀를 선언한다. 이때 관람객이 5만명이었다고 한다. 쇼와 덴노 (昭和天皇 1901-1989) 가 죽고 연호가 헤이세이 (1989-) 로 바뀐 1989년 1월 11일, 미소라 히바리는 자신의 인생이라고도 할 수 있는 '川の流れのように (카와노 나가레노 요니, 흐르는 강물처럼)' 을 발표한다. 곧 전국 투어 콘서트를 시작하지만, 이미 상한 몸으로 인해, 전국 공연을 가지던 도중에도 수차례 극비 입원과 임시 퇴원을 반복 하는 등, 위험한 징조는 이미 나타나고 있었다. 3월 21일, 자택에서 닛폰 호소 (ニッポン放送)에서의 라디오 특집 생방송 '미소라 히바리, 감동의 이 한 곡' 을 방송하고 난 뒤 급격히 악화되어 준텐도 병원(順天堂病院)에 입원하게 되고, 이로 인해 이 후 예정되었던 콘서트나 전국투어도 모두 중지되었다. 그리고 1989년 6울 13일, 결국 의식불명으로 인공호흡을 시작했고, 6월 24일, 간질성 폐렴으로 인한 호흡부전으로 인해 향년 52세로 사망했다.
미소라 히바리. 그녀의 죽음을 일본의 모든 방송국은 임시뉴스로 전국 방방곡곡에 알렸고, 전 일본이 슬픔에 잠겨 애도의 뜻을 전하며, 마치 국장(國葬)을 지내는 분위기였다고 한다.(美空ひばり 葬禮式 ) 1989년 6월29일 간질성 폐렴으로 죽기 3개월 전까지도 가수활동을 한 그녀는 사망 후, 1989년 7월, 레코드대상, 특별영예가수상과, 그리고 일본 여성 최초로 일본 정부가 수여하는 '國民栄誉賞 (고쿠민 에이요쇼)' 을 수상하였다. 이 후 7월 22일에 거행된 장례식은 각 방송사에서 생중계를 했고 팬들을 포함해서 4만 2천여명이 조문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녀는 요코하마 시고난구(港南區)에 안장되었다. 이 후에도 수년간 가요제의 특별상 등을 여러차례 수상하였다. 미소라 히바리는 모두 1,200 곡을 레코딩하였고, 총 6천 8백만장의 음반이 팔렸다. 그녀가 사망하고 그녀의 음반의 판매가 급격히 늘어서 모두 8천만장 이상이 펼렸다.
또한 그녀의 가수인생 말년의 '川の流れのように(카와노 나가레노 요니)' 는 그녀를 기리는 의미에서 관현악단이나 다른 가수들이 자주 공연하는 곡이 되었으며, 특히 The Three Tenors (스페인/이탈리아), Teresa Teng (대만), 그리고 멕시코의 Mariachi Vargas de Tecalitlan 등이 불렀다. 1990년부터는 TV와 라디오 방송국에서 매년 미소라 히바리의 생일에 이 곡을 방송하고 있으며, 그 외에도 상영회 등이 각지에서 주기적으로 개최되고 있다. 또한 1997년 NHK 에서 조사한 바로는 그녀의 최후의 곡인 '川の流れのように (카와노 나가레노 요니, 흐르는 강물처럼)' 은 천만 명 이상의 투표로 "일본을 대표하는 명곡" 으로 선정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