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 대사의 생애
원효는 신라의 귀족출신으로
본명은 설사(薛思)였다.
신라의 개국공신이자
박혁거세를 추대한 자로
6촌의 촌장 가운데 한 사람었던
설거백 또는 설호진의 후손으로,
설곡(薛嚳)의 4대손이다.
잉피공의 손자이자
내마(乃末) 설담날(薛談捺)과
조씨(趙氏)의 둘째 아들로
상주(湘州) 경산현 불지촌(佛地村)
율곡(栗谷)의
사라수(밤나무) 밑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할아버지 잉피공의 집이
금성에 있었으므로 금성인 이라고도 한다.
그의 어머니 조씨가
그를 수태했을 때,
꿈에 유성(流星)이
품속으로 드는 것을 보고
원효를 임신하였다.
어머니가 태기가 있어 임신을 하고
만삭이 되어 출타했다가
마침 집에 돌아오던 중
불지촌 율곡 고개에 있는
밤나무 밑을 지나다가
갑자기 산통이 있어 해산하였다 한다.
《삼국유사》에 이르기를
그때 오색구름이 땅을 덮었다 한다.
할아버지 잉피공(仍皮公)은
또는 적대공(赤大公)이라고 했는데,
고려시대 중기
김부식과 일연이 살던 시대까지도
경주 적대연(赤大淵) 옆에
잉피공의 사당이 존재하고 있었다.
원효에게는 형제가 몇 명 있었는데,
경주 설씨와 순창 설씨의 족보에는
그의 형 중 한 사람이 이름이
설을신(薛乙臣)으로 나온다.
* 화랑 시절
어려서 서당(誓幢)
또는 신당(新幢)으로 불렸으며,
또 다른 이름은 모(毛)였다.
뒤에 이름을 사(思)로 정하였다.
나면서부터 총명하고
남보다 뛰어났으며,
기억력이 뛰어났다.
그는 일찍이 고향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유교를 가르치는 태학에 입학하였다.
공부를 잘하여
더 이상 스승을
따라 배울 것이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
부친 담날과
조부 잉피공의 기대를 받으며
화랑으로 활동하였으나,
15세 때 또는 28세 때
어머니 조씨의 죽음에 충격을 받고,
삶과 죽음에 대해 오래 고민하다가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황룡사(黃龍寺)에 들어갈 때
집을 희사하여
초개사(初開寺)를 세우게 했으며,
자신이 태어난 사라수 옆에도
절을 세워 사라사(沙羅寺)라 하였다.
그가 출가를 결심했을 때
아버지 설담날과
할아버지 잉피공의
실망이 대단하였다 하며,
그에게는 형 을신이 있었으므로
처음에는 출가를 반대하였으나,
그의 뜻이 확고 하자
할 수 없이 허락하였다 한다.
* 출가 이후
영취산(靈鷲山)의 낭지(郎智),
흥륜사(興輪寺)의 연기(緣起)와
고구려 반룡산(盤龍山)의
보덕(普德) 등을
찾아다니며 불도를 닦으니
뛰어난 자질과 총명이 드러났다.
34세 때인 650년(진덕여왕 4년)
의상과 함께
당나라 고승 현장에게
불법을 배우러 가다가
요동 근처에서
고구려 순라군(국경경비대)에게 잡혀
첩자로 오인 받았다가 풀려났다.
661년(문무왕 1년)
다시 의상과 함께
당나라로 유학을 가던 길에
당항성 근처의
한 무덤가에서 잠이 들었다.
잠결에 목이 말라
달게 마신 물이
다음날 아침에
깨어나 다시 보니
해골이 고인 더러운 물이었다.
이 사실을 알고
구토증을 느끼다가
갑자기 깨달음을 얻는다.
“마음이 생기니
가지가지 법이 생기고
마음이 없어지니
가지가지 법이 없어진다.
삼계(三界)는 오직 마음뿐이요,
만법이 오직 식(識) 뿐이라
마음 밖에 법이 없으니
어찌 달리 구할 것이 있겠는가?”
(心生則種種法生
心滅則種種法滅
三界唯心 萬法唯識
心外無別法 胡用別求)
이와 같이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도리를 깨달아
유학을 포기하고 신라로 돌아온다.
그 뒤 분황사에 있으면서
독자적으로 불교활동을 하며
서민대중 속에
불교를 보급하기에 노력했다.
분황사(芬皇寺)에 주석하면서
화엄경소(華嚴經疏)를 저술하다가
화엄경소의
제4 십회향품(十廻向品)에서
절필(絶筆)을 한다.(삼국유사)
원효는 특히
대승불교의 경론을
널리 통달 많은 저술을 남긴다.
화엄대가였을 뿐만 아니라
통불교의 입장에서
모든 불교사상을 회통하여
나중에 한국불교의 특성이
통불교라고 말하게 된 것이
원효에 이해 형성되었다 할 수 있다.
* 요석공주와의 만남
하루는
원효가 서라벌 거리에서
이런 말을 외치고 다녔다.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내게 주겠는가,
내가 하늘을 받칠 기둥을 깎으리다
(誰許沒柯斧 我斫支天柱)."
사람들이 듣고
무슨 말인지 몰랐으나,
태종 무열왕이 이를 듣고
"대사가 귀부인을 얻어
슬기로운 아들을 낳고자 하는구나.
나라에 큰 현인이 있으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없을 것이다.
(此師殆欲得 貴婦産賢子之謂
爾國有大賢 利莫大焉)"라며
요석궁의 홀로된
둘째 공주 요석의 처소로
스님을 안내하게 한다.
궁리가 무열왕의 명을 받고
시내로 나가 원효를 찾자
스님은 마침
문천교(蚊川橋)를 지나다
스스로 물에 빠져 옷을 적신다.
이런 원효를
요석궁으로 안내하게 되었다.
이 일로 인해
나중에 설총이 태어나게 되었다.
이후 스스로 파게(破戒)한 원효는
소성거사(小姓居士),
또는 복성거사(卜姓居士)라 자칭하면서
속세의 복장을 하고 마을에 나다니다가
우연히 한 광대가
괴상한 박을 가지고
춤과 만담을 벌이는 것을 보고,
그와 같은 물건을 만들어
《화엄경》의
'일체무애인(一切無碍人)
일도출생사(一道出生死)'에서
'무애'라는 말을 따
무애로 박의 이름을 짓고
〈무애가(無碍歌)〉라는
노래를 지어 춤추고 노래하며
여러 마을을 돌아다녔다.
이에 세상 사람들이
원효를 따라
부처님 명호를 듣고
염불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한다.
원효의 교화가 그만큼
크게 서민들에게 미쳤다는 말이다.
그러나
원효의 춤과 노래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광대들이 생계에
지장 있음을 호소하자
그는 이를 그만두었다.
원효는 100여부
240여권의 저서를 남긴
대저술가로 불린다.
약간의 혼란이 있는
저술 목록을 감안하더라도
그가 90종에 가까운
저술을 했다는 것 확실하게 판명된다.
그러나
현재까지 전해지는 것은
아쉽게도 20부 22권 뿐이다.
원효는 우리나라 뿐 아니라
당시 동아시아를 통틀어서
그 양과 질에 있어서
최고 수준의 저술가였다.
사실 한국불교사상
원효를 능가하는
저술가는 찾기 어렵습니다.
신라의 의적(義寂)이 25부,
경흥(憬興)이 40여부,
태현(太賢)이 50여부의 저술을 남겼지만
원효에 비할 바는 못 된다.
중국의 학승도
원효를 따르지 못했다.
천태지의는 30여부,
현수법장(法藏)은 50여부,
백본소주(百本疏主)로 불리는
규기(窺基)의 경우도
50여부의 저술을 남겼다.
원효의 많은 저서,
그 대부분이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중국 및 일본에 전해져
높이 평가되고 많은 영향을 주었기에
더욱 의미가 큰 것이다.
『십문화쟁론』를 본 이들은
모두 훌륭하다고 했고,
번역되어 인도에까지 유포되었다.
『금강삼매경론』은
신라를 비롯하여 일본과 중국 등지에서도
찬양받았던 저서이다.
『기신론소』와 『화엄경소』는
법장을 비롯한
당나라 화엄학승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저서며,
『보살계본지범요기』는
일본의 명혜(明惠)가 강의했으며,
8세기 초의 일본 지경(智憬)은
원효의 『무량수경종요』에
대한 소를 지었다.
만일 『능가경』을 강의하려면
원효의 소에 의지해야한다고
의천은 말했고,
또 그는 원효소에 의하여
『금강경』을 강의하기도 했다.
원효는 불교 뿐만 아니라
도가와 유가에도 밝았고,
한비자등
제자백가의 사상에도 지식이 많았다.
특정한 스승 없이
영취산의 낭지,
고구려의 보덕,
항사사(현 오어사)의 혜공 등에게서
배웠다고 전해지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일정한 스승이 없었다 한다.
원효는 당시의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선진 문물을 배우기 위해
34세와 45세 때
의상과 함께 두 번에 걸쳐
당나라 유학을 시도했다.
두 번째 구법 여행 중
삼계유심(三界唯心)의 원리를 깨달아
구법행을 포기하고 돌아왔다.
그 후 원효는
요석공주와의 관계 등
숱한 일화를 남기며
불교를 대중화시키고,
화쟁사상을 선양하여
민중을 통합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 입적(入寂)
원효는 당시 전하던
거의 모든 경론(經論)에 대해
주석(註釋)을 하여
100여 종의 저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현존하는 것은 20부 22권뿐이다.
이 중
《대승기신론소》 2권,
《금강삼매경론》 3권,
《십문화쟁론》 2권 등은
원효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데,
원효 사상의 핵심인
일미(一味) 화쟁(和諍) 사상이
잘 나타나 있다.
원효는 한국은 물론이고
중국과 일본의 승려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유식학(唯識學)이나
불교논리학 등에 있어서
그의 영향력은 매우 크다.
원효는 한국의
무속신의 하나로도 숭배되고도 있다.
그 자세한 기원은 알 수 없으나
해골의 물을 마신 것에서
범부를 초월한
신적능력이 있다고 본 것에서
기인된 것으로 보인다.
수많은 저서를 남기고
70세 되던 해 음력 3월 30일
혈사(穴寺)에서 입적했다.
고려 숙종 때 와서
숙종이
대성화정국사(大聖和靜國師)라는
시호를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