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충신에 대하여...
1576년(선조 9)∼1636년(인조 14).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금성(錦城), 子는 가행(可行), 號는 만운(晩雲),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정충신장군은 선조 9년(1576년)에 하동정씨 경열공 정지장군(1347~1391)의 9대손으로 광주에서 태어난 금천군(錦川君) 윤(綸)의 아들이다.
미천한 집에서 태어났으며 절도영(節度營)에 속한 정병(正兵)이었고, 부(府)에 예속된 지인(知印: 通引)을 겸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주목사(光州牧使) 권율(權慄)의 휘하에서 종군하였다.
이때 권율이 장계를 행재소에 전달할 사람을 모집하였으나 응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17세의 어린 그가 가기를 청하여 왜군으로 가득한 길을 단신으로 뚫고 행재소에 도착하였다.
병조판서 이항복(李恒福)은 그가 범상치 않음을 알고, 학문과 무예를 닦으라 권유했고, 또 <사서(史書)>를 가르쳤는데 머리가 총명하여 아들같이 사랑하였다. 이해 가을에 행재소에서 실시하는 무과에 응시하여 급제하였다. 훗날 정충신은 이항복이 유배를 가자 함께 따라갈 정도로 아버지로 모셨고, 이항복이 죽은 뒤에도 정충신은 3년동안 상주처럼 생활했다.
1621년(광해군 13) 만포첨사로 국경을 수비하였으며, 이때 명을 받고 여진족 진에 들어가 여러 추장을 만나기도 하였다.
1623년(인조 1) 안주목사로 방어사를 겸임하고, 다음해 이괄(李适)의 난 때에는 도원수 장만(張晩)의 휘하에서 전부대장(前部大將)으로 이괄의 군사를 황주와 서울 안산(鞍山)에서 무찔러서 진무공신(振武功臣) 1등으로 금남군(錦南君)에 봉하여졌다.
이괄과 친분이 두터웠던 그가 이괄의 난이 일어났을 때 자신의 결백을 나타내기 위하여 성을 버리고 달아나 문회(文晦) 등의 고발로 체포되었으나 은혜를 입고 풀려났다.
1627년 정묘호란 때에는 부원수를 지냈고,
1633년 조정에서 후금(後金: 淸)에 대한 세폐의 증가에 반대하여 후금과의 단교를 위하여 사신을 보내게 되자 김시양(金時讓)과 함께 이를 반대하여 당진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장연으로 이배되었고, 곧 풀려나와 이듬해 포도대장·경상도병마절도사를 지냈다.
1636년 병이 심하여지자 왕이 의관에게 명하여 치료에 진력하였으나 효험을 보지 못하였다.
죽은 뒤에 왕이 내시로 하여금 호상하게 하고 어복(御服)을 주어 수의(壽衣)로 하게 하였으며, 관청에서 의로써 장사를 치르게 하였다.
키가 작으면서도 씩씩하였고 덕장이라는 칭송을 들었으며, 민간에 많은 전설을 남겼다.
천문·지리·복서·의술 등 다방면에 걸쳐서 정통하였고, 청렴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광주(光州) 경렬사(景烈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만운집》·《금남집 錦南集》·《백사북천일록(白沙北遷日錄)》 등이 있다.
정충신장군의 묘
지정번호 : 문화재자료 210호
지정년월일 : 1984.5.17
시대 : 조선시대
소재지 : 충남 서산시 지곡면 대요리
충무공 정충신 장군의 묘는 서산시 지곡면 대요리에 건립된 장군의 사우 진충사에서 서편으로 800여m 떨어진 마힐산의 국사봉 중턱에 장군의 부인과 함께 나란히 쌍분으로 안장되어 있다.
2개의 봉분 중앙 전면에 묘비가 서있고 그 앞에 상석이 놓여져 있으며 그 앞 양옆으로 각종 석의가 있다.
장군의 묘소가 이곳에 있게 된 연유는 저선 인조2년(1624)에 일어난 이괄의 난때 장군이 전부대장으로서 토벌군을 이끌고 서울 길마재에서 반군을 전멸 시켜 난을 평정한 공으로 진무 일등공신이 되어 나라에서 국사봉을 중심으로 약 45만여평의 땅을 장군에게 사패지지로 하사하였다.
이에 장군 생존시에 아들 빙과 지상을 대동하고 유택을 친히 잡아 놓고 아들에게 내가 죽은 뒤에 반드시 이 자 자리에 장사지내 주도록 당부한 곳이라고 전한다.
장군이 숙환으로 1636년 5월 4일 한양 반송방 자택에서 61세로 별세하여 이곳에 예장하였다. 장군이 자손들에게 유언하기를 내가 죽거든 작은 공은 이미 역사에 기록된 바이니 죽은 뒤에 문자로 공적을 미화 찬양하거나 시호를 청하거나 비와 석물을 세우지 말고 다만 그릇만 묻어 달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정충신장군의 사당(진충사)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206호로 지정되었다.
충청남도 서산시 지곡면(地谷面) 대요리에 있다. 1636년(인조 14) 왕명으로 건립하였으며, 1737년(영조 13)에 중수하였다. 1800년(정조 24) 5세손 곡성현감 정세환이 정미면 신시리로, 1897년(고종 34) 9세손 정재칠(鄭在七)이 13손 정종열 집 옆으로 이건하였다. 1970년에 현재의 위치로 다시 옮기면서 개축하였다. 사당과 삼문이 있다.
삼문은 솟을대문이며,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며, 처마는 겹처마이다. 전면 1칸을 개방하였고 그 내부에는 우물마루를 깔고 뒷면에 영정을 봉안하였다. 둥근 주춧돌 위에 둥근기둥을 세우고, 공포(처마 끝의 하중을 받치기 위해 기둥머리 같은 데 짜맞추어 댄 나무 부재)는 전형적인 무출목 익공집 형태이다.
기둥의 주춧돌·기둥·창방·대들보의 부재는 시멘트이고, 주심도리(기둥 중심선 위에 있는 도리), 장혀와 익공은 목재를 사용하였다. 창방과 주심도리 사이에는 접시받침이 중앙칸 4개, 양협칸 2개가 끼워져 있다.
사당에는 영정뿐만 아니라 투구·군령기·교지 등의 1978년에 중요민속자료 제36호로 지정된 정충신장군유품 및 저서 《백사북천일록(白沙北遷日錄)》 《만운집(晩雲集)》 등이 보관되어 있다.
정충신(1576~1636)은 체구는 비록 작지만 담력이 컸고, 임진왜란 때 권율(權慄:1537~1599)이 행주대첩에서 승리하는데 크게 일조하였다. 이후 장만(張晩:1566~1629)을 따라 청의 연경에 다녀왔으며, 1630년 평안북도 철산 지방에서 일어난 유흥치의 난을 평정하였다. 1617(광해군 10)에는 오윤겸(吳允謙:1559~1636)을 따라 일본에 다녀왔다.
1618년에는 대북파의 음모로 인목대비가 서궁에 감금되자 주모자를 소탕하였으나 허균의 부재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후 관직을 버리고 북청으로 유배되는 이항복을 따라 그를 받들었다. 이때 저술한 저서가 《백사북천일록》이다. 치밀한 전략가로서 청의 정세에 밝았기 때문에 늘 군비 확장에 주력하였다.
정충신장군유품
정충신장군의 유품(중요민속자료 제36호)은 갑옷, 사명기, 영정, 향로 등을 한데 묶어 이르며, 서산군 지곡면 대요리 740에 있는 장군의 사당에 보관하고 있었으나 1975년 도난당하고 2개월만에 다시 찾은 일이 있다고 한다.
원래는 장군의 유품으로 관과 검도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없고, 투구도 1975년 도난당할 당시 범인들이 바다에 버렸다고 한다. 원두형의 나무로 만든 장군의 투구는 높이가 50cm, 직격이 40cm 정도 이어서 머리에 직접 쓰기는 어려운 대형투구였다고 하며, 현재는 사진만 남아 있다.
-갑옷은 1630년 5월 가도에서 일어난 병란을 토벌할 때에 인조가 활과 화살, 검과 함께 하사한 것으로 그가 생전에 입었던 군복이다. 길이는 116cm로 갑옷 속에는
쇠미늘[鐵札(철찰)] 대신 가죽을 2.2cm 간격으로 호아서 누빈 목면 3겹이 들어 있다.
형태는 두루마기와 비슷하여 옆에는 무를 달고 앞에는 섶은 대었다. 앞판과 뒤판 모두 지름 1.8cm의 두정을 박았고 앞판에는 U자형의 목둘레를 중심으로 넓은 무를 대었다. 어깨의 견장은 철로 만들었고 머리와 몸통 사이에 경첩을 달아 활동하기 편하도록 하였다. 옷단과 소매단의 가죽선은 흔적이 없으나 앞판 가슴 부분에는 가죽의 흔적이 남아 있다.
-서군사명기(西軍司命旗) 1매는 총길이 138cm, 나비 55.5cm로 황색 비단 바탕에 ‘서군사명(西軍司命)’이라 씌어 있다. 가장자리에는 가로 19cm, 세로 16.5cm의 주황색 비단이 호아져 있다.
-향로는 좌우에 손잡이가 달린 놋쇠향로인데, 둘레에 문양을 부조하였으며 삼각다리 형태를 하고 있다. 뚜껑은 반구형으로 문양을 투조하였으며, 가운데에 손잡이가 있다. 그 밖에 향합은 둥그런 형태에 굽다리가 3개이고, 뚜껑 중앙에 꼭지가 달려 있으며 향로에 비해 형태가 훨씨 소박하고 표면에 무늬가 없다.
-향합 역시 둥그런 형태에 굽다리가 3개이고, 뚜껑 중앙에 꼭지가 달려 있으며 향로에 비해 형태가 훨씬 소박하고 표면에 무늬가 없다.
정충신 장군의 금남군정충신영정각(錦南君鄭忠信影幀閣)
종목 :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 33호
명칭 : 금남군정충신영정각
지정일 : 1984.04.01
소재지 : 전북 장수군 장계면 금곡리 413-4
만운 정충신(1576~1636)의 영정을 모신 곳이다.
이곳은 후손인 정백흥이 순조 11년(1811)에 지었으며 앞면 3칸·옆면 1칸 규모의 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의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만운 정충신(晩雲 鄭忠信)(1576∼1636)은 나주사람으로 자는 가행(可行), 호는 만운(晩雲),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선조 25년(1592년) 가을 무과에 올랐고, 인조 2년(1624년) 이괄(李适)의 난을 평정하여 진무공신(振武功臣)을 받고 금남군(錦南君)에 피봉(被封)되었다. 이 영정(125㎝×75㎝)은 견본채색(絹本彩色)으로 금남군의 좌상(座像)을 모사한 것인데, 작자는 미상이다. 후손인 현감 정백흥(鄭百興)이 순조 11년(1811년) 3월 16일에 이곳 금곡(金谷)에 영당(影堂)(정면 3칸, 측면 1칸, 맞배지붕)을 세워 영정을 모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