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with Jorge Luis Borges
(대담: 보르헤스가 보르헤스에 대해 말하다)
리타 기버트(Rita Guibert)
나는 "스페인어의 삶" 기자로서 하버드 대학 교환 교수로 와 있는 보르헤스에게 전화를 걸어 인터뷰를 청했다. 일주일 후, 우리들은 그의 아파트에서 만났다. 아르헨티나의 전통적인 군인이자 지식인 집안의 후예인 보르헤스는 그 시대, 그 계층의 사람들에게 있어 전통적이고 특징적인 그런 예절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 대부분이 그러하듯 그의 옷 입는 방식도 매우 보수적이었다. 그는 연약해 보이고,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생기가 있었고 열정적이었으며, 목소리는 묵직하고, 쩌렁쩌렁했다. 그는 케임브리지의 여러 거리들을 산보하기를 좋아했다. 매일 아침 일찍 집에서 힐스 도서관에 있는 연구실까지 걸어가고, 점심시간에는 집까지 걸어오는 것을 반복했다. 추위나 눈조차도 이 행보를 막지 못했다. 나는 여러 차례 그의 이러한 행보에 동행하곤 했다. 보르헤스는 옛 북구의 신화들과 영국의 시들을 암송하거나, 빨간 벽돌로 된 보스턴 시의 집들에 관해 얘기를 하곤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항상 향수에 젖은 얼굴로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거리들을 잊지 못하고 있는 듯 그곳을 들먹이곤 했다.
그는 거의 장님에 가까웠던 그는 매우 뛰어난 기억력과 집중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한 차례 내게 말하기를) 자주 눈길에 미끄러지고 넘어지곤 했다면서도 한사코 한 블록 정도 떨어져 있던 나의 호텔까지 나를 동반하기를 고집하곤 했다. 그는 찾고 싶은 책이 책장의 어느 곳에 꽂혀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고, 전화가 걸려오거나 누가 문을 두드리면 비호같이 방을 내닫곤 했다. 보스턴의 텔레비전 방송국과 인터뷰가 있었던 어느 날 오후, 택시 운전사가 그를 찾으러 왔다가 문가에 있는 그를 보고 물었다.
"소경 한 사람을 모시러 왔는데요."
전혀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보르헤스가 대꾸했다.
"내가 바로 그 소경이오. 잠깐만 기다려주시겠소."
보르헤스와 그의 작품은 동시대의 세계로부터 유리되어 있다.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그의 세계는 상징적이고 마술적이다. 그의 세계는 상상의 존재들, 환상들, 미로들, 단도들, 거울들로 가득 차 있다. 보르헤스는 인터뷰를 하는 동안 그것들을 "내가 미치도록 사랑하는 것들"이라고 칭하면서 덤덤하면서도 향수에 젖은 얼굴로 자신의 작품과 삶과 친구들과 좋아하는 장소들에 대해 말했다.
기버트: 시력의 상실은 당신의 삶과 작품에 어떤 영향을 미쳤습니까?
보르헤스: 아버지 가계 쪽에서 시력을 잃은 사람들 중 저는 다섯 번째, 아니 여섯 번째에 해당하는 세대일 겁니다. 나는 나의 아버지와 할머니가 장님이 되는 것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나는 시력이 좋았던 때가 전혀 없었지만 나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나는 1년 이상 장님의 생활을 하면서 나의 아버지가 보여준 그 온화함과 아이러니한 태도에 감탄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마 그러한 부드러움은 마치 귀먹은 사람들이 쉽게 화를 내는 것처럼 장님들에게 있어서 아주 전형적인 모습인지도 모릅니다. 장님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 속에서 어떤 평온함을 느낍니다. 이것은 귀가 먹은 사람들에 대한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들은 많지만 장님들에 대해서는 그런 이야기가 없다는 데서 증명됩니다. 장님에 대한 농담은 하나의 잔인한 죄악입니다. 나는 도대체 얼마나 많이 수술을 했는지 횟수조차 잊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1955년 페론 정권을 붕괴시킨 "자유혁명"이 나를 국립도서관장에 임명했을 때 나는 이미 책을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자비에 관한 시'라는 시 한 편을 썼지요. 나는 그 시에서 신에 대해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형용할 길 없는 아이러니와 함께/신은 내게 책들과 밤을 동시에 주었다……." 8만여 권에 달하는 국립도서관의 책들, 그 당시 나를 덮쳐오고 있던 밤. 그러나 황혼이 아주 느리게 왔기 때문에 (천천히 시력을 잃어갔기 때문에-역주) 결코 애절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단지 큰 글자로만 된 책을 잃을 수 있었던 때가 있었지요. 그리고 더 이상 아무 것도 읽을 수 없게 된 때가 왔지요. 나는 지금 아주 희미하기는 하지만 당신을 볼 수가 있어요. 그런데 약간 볼 수 있는 것과 완전히 보지 못하는 것 사이에는 거의 절대에 가까운 차이가 있지요. 볼 수가 없는 사람은 마치 감옥에 갇힌 죄수와도 같아요. 반대로 나는 어떤 자유의 착각과 함께 여기 케임브리지나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돌아다니기에는 충분한 시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나는 사람들의 도움 없이는 길을 건널 수가 없지요. 그러나 브에노스 아이레스뿐만 아니라 여기 뉴잉글랜드(미국 동북부의 6개 주-역주) 사람들은 친절해서 내가 인도의 끝부분에 서서 멈칫거리고 있으면 서로 동시에 손을 내밀곤 합니다.
시력의 상실은 확실히 나의 작품에 영향을 미쳤지요. 나는 그것을 두 따옴표("") 사이라고 부릅니다. 나는 단 한 번도 장편소설을 써본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장편소설이 독자에게 있어 연속의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작가에게 있어서도 단지 연속의 방식으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단편소설은 단 한 차례 읽는 것으로 끝낼 수 있는 그 어떤 것이라 말할 수 있지요. 마치 포우(Poe)가 한 말처럼 말입니다. "소위 장편시라는 그 어떤 것도 없다." 나는 내가 쓰고 있는 것을 감시하는 것을 좋아하고, 따라서 그것이 바로 나로 하여금 긴 단편들을 버리고, 물론 자유시를 한 편 쓰기는 했지만 시의 고전적 형태로 돌아가게끔 만든 거지요. 왜냐하면 운율이란 엄격함의 미덕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말하자면 한 편의 소네트는 일종의 휴대용 시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지요. 나는 머릿속에 소네트 한 편을 담고 그것을 다듬고 고치면서 도시를 돌아다닐 수 있습니다. 게다가 저는 밀롱가(아르헨티나의 전통 민요-역주)와, 한 페이지나 한 페이지 반에 들어갈 수 있는 우화나 비유 같은 짧은 형식의 글들을 쓰고 있습니다. 이것들 또한 머릿속에 담고 다닐 수가 있고, 나중에 구술을 하고 교정을 할 수 있는 그런 것들이지요.
기버트: 미국 학생들과 아르헨티나 학생들 사이에 큰 차이점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보르헤스: 나는 이 시대의 나쁜 점이 한 나라와 다른 나라 사이의 차이점들을 지나치게 과장하는 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어느 나라의 젊은이가 되었든 간에 그들은 서로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아르헨티나 학생들은 미국 학생들에 비해 훨씬 수줍음을 많이 탑니다. 여기 미국에서는 학생이 선생의 말을 막고 질문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기서는 학생이 교수에게 질문을 하는 것이 무례하기 때문이 아니라 내용이 재미있어 그러는 걸로 이해되고 있기 때문인 듯 합니다. 아마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어떤 학생이 질문을 한다면 사람들은 그가 수업을 방해하기 위해 그렇게 하는 거라고 생각할 겁니다.
기버트: 히피와 마약 복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보르헤스: 나는 히피든 마약 복용이든 그것이 그 어떤 의미 있는 자극이 된다고는 생각치 않습니다. 나는 히피란 미국의 전형적인 어떤 것과 아주 일치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모든 장점들과 함께 미국인들은 고독에까지 뻗어나갔고, 뻗어나갔다는 말이 낫겠지요, 고독의 희생자들이지요. 문득 데이비드 레이스먼의 "외로운 구름"이라는 책이 생각나는군요. 나는 미국 사람들에 비해 라틴아메리카 사람들이 가진 장점 중의 하나가 아주 쉽게 친구들을 사귈 수 있다는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미국에서는 친구를 사귄다는 게 매우 어려운 것 같아요. 그래서 미국 사람들은 단체들을 만들고 가슴에 이름표를 단 채 사람들끼리 모여 회합 따위를 하고, 크리스마스 파티와 같은 축제들을 벌이면서 안 그런 척 위장을 합니다. 나는 이 모든 것이 우정이나 누군가와 함께 있다는 동반감의 애절한 환영에 불과하고, 한 사람 한 사람 모두는 고독감을 느낄 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들은 혼자 있다는 것에 대해 전혀 신경을 쓰지 않기는 하지만 이러한 점은 영국 사람들에게서도 특징적인 현상이지요. 그들은 혼자 있을 때 편안함을 느끼지요. 나는 서로 친한 친구임에도 불구하고 절대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지 않는 영국인들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서로를 친구라고 생각하지요. 게다가 내가 히피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내 생애에 단 한 번도 히피와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없으니까요. 언젠가 길에서 사람들이 내게 약간 옷차림이 단정치 못한 한 젊은이를 가리키며 그가 "히피"라고 말한 적이 있었지요. 나는 볼 수가 없기 때문에 보았다는 시늉만 했지요. 그 후 나는 히피가 긴 머리에 구레나룻을 기른다는 것을 들었고, 그리고 나는 그들이 마약을 복용하다는 사실도 압니다. 나는 그러한 것들 그 어떤 것도 좋은 게 아닐뿐더러 그들이 끝간 데까지 그렇게 가리라고는 생각치 않습니다. 그런데 세상 일이란 역시 다 똑같아요. 만일 어떤 사람이 현재의 관습에 반대하고 싶다면 그것을 공격하는 유일한 방법은 또 다른 관습을 만들어내는 거지요. 수염을 깍는 게 관례가 되어 있는 시대에는 수염을 기르고, 수염을 기르는 시대에는 수염을 깎는 것. 사실, 지금은 하나의 관습의 시대로부터 다른 관습의 시대로 넘어가는 전환기라고 볼 수 있지요. 내가 여기 도착해 처음 밤 외출을 했던 날 나는 하버드 광장에 갔었지요. 사람들이 내게 아주 이상한 옷차림을 하고 있는 젊은이들이 그들이 히피라고 말하더군요. 사람들이란 항상 일반화를 시키기를 좋아하는 것처럼 나 또한 생각했지요. "모든 것에 반대를 하게 된 이 젊은이들에게 어떻게 해야 아르헨티나 문학을 가르칠 수 있을까?" 그러나 첫 강의를 하게 되었을 때 나는 사람들이 말했던 것과는 다르고, 히피는 없고, 설사 있다 해도 소수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지요.
기버트: 토인비는 히피란 기술과 과학의 산물이라고 했습니다. 동의하시는지요?
보르헤스: 나는 그들이 이미 나온 뒤에 기술과 과학이 그들을 만들었다고 말하는 게 더욱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나타나기 전에 그것을 말했더라면 더욱 흥미로웠을 겁니다.
기버트: 만일 지식인이 이따금 현실을 망각한 채 자신의 상아탑 속에 갇혀 있다면 그러한 그가 자신의 몸담고 있는 사회의 문제들을 해결하거나 변화시키는 데 공헌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보르헤스: 나는 상아탑 속에 갇혀 다른 것들에 대해 생각하는 것 또한 현실을 변화시키는 하나의 방법이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나는 당신이 말한 대로 상아탑 속에 있기 때문에 어떤 시 한 편을 떠올리고 있고, 어떤 책 한 권을 구상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이것은 다른 어떤 것만큼이나 현실적인 겁니다. 나는, "현실은 일상적인 것이고 그것이 아닌 다른 것은 비현실적"이라는 일반적인 사람들의 생각은 오류라고 생각합니다. 지구가 생겨온 이래 정열과 관념과 추측들은 일상적인 것만큼이나 현실적이었고, 그리고 게다가 그것들은 늘 일상적인 것들까지 만들어내곤 했습니다. 나는 세계의 모든 철학자들이 실생활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버트: 당신의 작품으로 돌아가서 당신이 영감을 받았던 작가들은 누구입니까?
보르헤스: 내가 영감을 받았던 사람들은 내가 읽었던 책들과 그리고 또한 내가 읽지 않았던 책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앞서의 모든 문학. 나는 내가 이름을 모르고 있는 사람들에게 빚을 지고 있습니다. 상상을 해보세요, 한 사람이 한 언어로 작품을 쓴다, 영문학의 영향을 받은 어떤 사람이 스페인어로 글을 쓴다라고. 이것은 내게 수많은 작가들이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뜻합니다. 언어에는 한 문학의 전통 전체가 스며들어 있지요.
예를 들어, 나는 중국 철학에 대한 공부로 여러 해를 보냈었지요. 특히 내게 아주 흥미로웠던 도교, 그리고 불교 또한 공부를 했었지요. 또한 나는 수피교에도 관심을 가졌었지요. 따라서 이 모든 것들이 내게 영향을 끼쳤지만 어느 선까지 영향을 끼쳤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나는 이 동양의 종교들, 또는 철학들을 사색과 행동을 위한 하나의 가능성으로서의 공부를 했거나, 또는 문학을 위한 상상력의 관점에서 그것들을 공부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이러한 게 모든 철학에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어떤 책을 대하면서 쇼펜하우어, 또는 버클리를 제외하고 세계에 대해 진실되고, 심지어는 그럴 듯하게조차라도 묘사하고 있는 책을 읽고 있구나 하는 느낌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는 오히려 형이상학에서 더 많은 환상문학성을 발견했지요. 예를 들어, 나는 내 자신이 기독교인인가에 대한 확신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신학적인 의문 때문에 "자유 의지", "영원한 벌과 영원한 환희" 등과 같은 신학에 관한 많은 책들을 읽었지요. 이 모든 것들이 내겐 흥미로웠지만 그것들은 단지 나의 상상력을 풍요롭게 하기 위한 가능성으로서였지요.
물론 만일 어떤 이름들을 언급해야 한다면 나는 기쁘게 휘트먼, 체스터턴, 쇼우와 에머슨처럼 자주 읽게 되곤 하는 어떤 작가들에게 은혜를 느낀다고 말할 겁니다. 또한 문학적으로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그런 사람들도 포함시킬 수 있을 겁니다. 예를 들어, 내가 만났던 사람들 중 개인적으로 내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겼던 사람은 아르헨티나의 작가 마세도니오 페르난데스입니다. 그는 작가로서보다는 보수주의자로 더 잘 알려져 있지요. 그는 독서는 많이 하지 않았지만 아주 독창적인 생각을 가진 그런 사람들이었지요. 그는 내게 일종의 아주 거대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나는 왈도 프랑크(미국 작가, 1889-1967-역주)나 오르떼가 이 가세뜨(스페인의 철학자, 1883-1955-역주)와 같은 다른 나라의 유명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지만 그들과 나눈 이야기를 거의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만일 지금 마세도니오 페르난데스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고 가정해 본다면 나는 내가 이미 죽어 버린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고 그런 기적의 충격조차 잊어 버리고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리고 내가 지금 유령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 버리게 될 겁니다. 또한 스페인의 안달루시아 출신 유태인이자 모든 시대에 걸쳐 살고 있는 작가인 라파엘 깐시노스 아센스(스페인 작가,1883-1964-역주) 역시 내게 많은 영향을 끼쳤지요. 나는 그를 스페인에서 만났습니다. 내가 만났던 사람들 중-왜냐하면 나와 아주 가까웠기 때문에 판단을 내릴 수 없는 아버지를 제외하고- 내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사람은 마세도니오 페르난데스와 깐시노스 아센스였습니다. 나는 루고네스(아르헨티나의 시인, 1874-1938-역주)에 대해서도 아주 유쾌한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루고네스의 글은 내가 그와 나누었던 대화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현재의 내가 있기까지 필수불가결했던 한 사람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 것은 부당하고 비합리적인 일일 겁니다. 내게 있어 몇 안되는 절대불가결한 사람들 중의 하나, 즉 나의 어머니입니다. 나의 어머니는 지금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계십니다. 그녀는 영광스럽게도 페론의 독재 시절 나의 여동생과 조카들 중의 하나가 그랬던 것처럼 감옥에 가 계셨었지요. 나의 어머니는 지금 91세임도 불구하고 나와 내가 알고 대부분의 여성분들보다 훨씬 젊습니다. 나는 어머니가 어떤 방식으로든 간에 내가 썼던 글들을 함께 썼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반복하지만, 나에 대해 말하면서 레오노르 아세베도 데 보르헤스(어머니의 이름)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면 하나의 어불성설을 저지르는 일이 될 겁니다.
기버트: 당신의 책에 보면 다른 언어로 된 단어들이나 인용들이 많이 나오는데 이따금 그것이 독자로 하여금 혼동을 느끼리라 생각치 않으십니까?
보르헤스: 물론이지요. 그렇지만 나는 늘 영어로 생각을 하고, 그리고 게다가 번역이 불가능한 영어 단어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 그것들을 쓰는 거지요. 말하자면 나는 척하기 위해 그것을 쓰고 있는 게 아닙니다. 게다가 어쩔 수 없이 그런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거지요. 다시 영어로 말하게 됩니다만 I have done most of my reading in English(나는 나의 대부분의 독서를 영어로 했습니다). 그래서 맨 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영어인 것은 아주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저도 독자들로 하여금 불편을 느끼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노력을 합니다. 스티븐슨은 한 장의 글에서 모든 단어들은 한쪽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외국어로 된 한 단어가 나온다면 그것은 다른 쪽을 바라보는 게 되고, 그것은 독자로 하여금 혼란감을 느끼도록 만들지도 모르지요. 그렇지만 사람들이 전혀 그 뜻을 놓치지 않게 되는 그런 단어들이 있는 법입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뜻하고 있는 어떤 것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기버트: 당신은 영화 시나리오도 쓰신 걸로 알고 있는데요.
보르헤스: 우고 산띠아고와 아돌포 비오이 까사레스와 함께 환상적인 성격을 가진 시나리오 하나를 썼지요. 제목은 "침략"이 될 겁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가 무대인데 나의 단편 '죽금과 나침반'에 나오는 부에노스 아이레스, 그러니까 꿈과 악몽의 부에노스 아이레스지요. 구성은 산띠아고가 했고, 그가 아마 감독을 하게 될 겁니다.
나의 또 다른 단편인 '죽은 자'가 아마 미국에 영화화될 겁니다. 그 작품은 브라질 국경에서 일어난 사건을 다루고 있는데 내 생각에 아마 미국에서 영화를 찍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이야기의 플롯이지 지역적 색깔이 아닙니다. 나는 그 배경을 미국 서부 깊숙한 지역으로 바꿔보라고 권고를 했었지요. 아마 벌써 시나리오 작업에 들어갔으리라 생각합니다.
비오이 까사레스와 함께 썼던 다른 두 편의 시나리오는 아르헨티나 영화사들로부터 퇴짜를 맞았고, "근교" 그리고 "믿는 자들의 천국"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발간이 되었습니다.
기버트: 어떤 타입의 영화를 좋아하십니까?
보르헤스: 나는 예를 들어 "모든 계절에 맞는 사람들"과 같이 대사가 가장 중요한 위상을 점하고 있는 그런 영화를 좋아합니다(약한 시력 때문에-역주). 또한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나 "마이 페어 레이디" 같은 뮤지컬들도 좋아하지요. 반대로 이탈리아 영화나 스웨덴 영화는 내게 별로에요. 왜냐하면 나는 이탈리아 어나 스웨덴 어를 잘 모르고, 보지도 못하고, 그래서 소외감을 느끼니까요. 나는 서부 영화와 히치콕의 영화들을 아주 좋아합니다. 내게 가장 인상 깊었던 영화들 중의 하나가 "하이눈"이었지요. 왜냐하면 우리들은 작가들이 시 또는 문학의 가장 오래된 형태-왜냐하면 시가 산문보다 먼저 나왔기 때문에-가 서사라는 것을 잊어 버리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으니까요. 나는 할리우드가 서부 영화를 가지고 세계의 서사성을 살려놓았다고 생각합니다. 서사시들의 가치, 용기와 모험의 즐거움을 찾는다고 생각합니다. 일반적으로 나는 다른 나라의 영화보다 미국 영화를 좋아합니다. 나는 프랑스 영화는 '지리함에 대한 열광'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파리에 머무는 동안 저는 많은 프랑스 작가들과 얘기를 나누었고, 그들을 놀려주고, 그리고 게다가 솔직하게 내 느낌을 털어놓기 위해 미국 영화를 더 좋아한다고 말했지요. 그들은 모두 만일 어떤 사람이 흥분과 재미를 찾기 위해 극장에 간다면 그것을 미국 영화에서 발견하게 될 거라는 점에서 동의를 하더군요. 그들은 "마리앵바드에서의 지난 해", 또는 "히로시마 내 사랑" 등과 같은 작품은 일종의 의무감으로 만들었지만 그 영화들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고 말하더군요.
기버트: 당신은 탐정소설에 대해 관심이 있으십니까?
보르헤스: 물론이지요. 비오이 까사레스와 함께 저는 한 아르헨티나 출판사에 시리즈로 탐정소설들을 출판하라고 제의를 했었지요. 처음에는 그런 유의 소설들을 미국, 또는 영국에서나 읽지 아르헤티나에서는 아무도 읽지 않을 거라고 고개를 젓더군요. 그러나 마침내 우리는 그들을 설득시키는 데 성공했고-그렇게 하는 데 1년이라는 세월이 걸렸지요-, 현재 비오이와 내가 기획을 하고 있는 "일곱 번째 원" 시리즈는 거의 200여권의 탐정소설을 발간했지요. 그 중 어떤 것들은 3판에서 4판까지 찍은 것들도 있습니다. 저는 또 그 출판사에 공상과학 소설을 출판하라고 제안을 했지요. 그런데 그들은 아무도 사보지 않을 거라고 역시 고개를 젓더군요. 현재 다른 출판사가 그것을 출판하고 있고, 나는 첫 번째 권으로 브래드뷰리의 "화성 연대기"를 추천했지요.
기버트: 노벨상에 관해-최근에 미겔 앙헬 아스뚜리아스(과테말라 작가-역주)에게 주어졌지만- 사람들이 라틴 아메리카 작가들 중에서는 보르헤스와 네루다의 이름을 거명하고 있는데…….
보르헤스: 몇 사람의 이름, 즉 버트란트 러셀, 버나드 쇼, 포크너와 같은 이름들을 생각한다면 그것이 내게 주어진다는 것은 어불성설이겠지요.
기버트: 이번의 결정에 동의하십니까?
보르헤스: 내가 아스뚜리아스를 선호하는지는 모르겠으나 보르헤스에게 주어지기 전에 먼저 네루다에게 주어져야 한다고는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비록 우리가 정치적으로 나누어져 있지만 저는 그가 뛰어난 시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몇 해 전 딱 한 차례 네루다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우리 둘은 젊었고, 그리고 "스페인어로 시를 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차라리 영어로 쓰는 게 낫다, 왜냐하면 스페인어는 아주 조악한 언어이기 때문이다,"라는 결론에 도달했지요. 아마 그때 우리는 약간 상대로 하여금 감탄하도록 만들기 위해 서로 자신의 의견을 지나치게 과장했던 것 같습니다. 사실 나는 네루다의 작품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만 그는 월트 휘트먼, 또는 아마 칼 샌드버그의 뛰어난 후예라고 생각합니다.
기버트: 동시대 작가들 중 누가 당신의 문체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다고 생각하십니까?
보르헤스: (그들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그 누구도 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작가는 하나의 영향이지요. 저는 문학을 하나의 대화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그들에게 빚을 지고, 아마 그들 또한 내게 빚을 지었을지도 모르지요. 중요한 것은 서로 주고받는 게 영향이라는 거지요.
기버트: 젊은 작가들에게 충고를 하신다면?
보르헤스: 젊은 작가들에게 아주 초보적인 충고를 하나 하고 싶습니다. 작품의 발표가 아닌 작품 자체에 대해 생각하라고. 발표를 하려고 서두르지 말고, 독자를 망각하지 말라고. 그리고 픽션을 쓰려거든 진지성을 가지고 상상할 수 없는 그 어떤 것도 쓰지 말라고. 단지 놀랍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것들을 쓰지 말고, 자신의 상상이 용인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들을 쓰라고. 그리고 문체에 관해서는 어휘의 풍요함보다는 어휘의 빈곤함을 추종하라고 충고하고 싶습니다. 문학 작품에서 흔히 발견되는 도덕적 흠집의 하나를 말하라고 한다면 그것은 '공허성'입니다. 내가 비록 그의 재능이나 천재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무엇보다 루고네스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들 중의 하나는 그의 글쓰기에서 어떤 공허함 같은 것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만일 한 페이지의 글에서 모든 형용사들과 비유들이 새로운 것이라면 독자의 감탄을 기대하는 이러한 양식은 늘 공허함이 되고 맙니다. 게다가 나는 독자가 그런 글을 대하고서 "아, 이 작가는 솜씨가 있구나,"하고 느끼리라 생각치 않습니다. 반대로 작가가 그렇게 느끼고, 독자는 그렇게 느끼지 않는 게 낫습니다. 모든 것이 잘 되어 있을 때는 그것이 쉬워 보일 뿐만 아니라 또한 절대적으로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보일 겁니다. 또한 나는 작가가 즉흥적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작가가 지나치게 빨리 어떤 어휘를 맞는 것으로 단정하게 되는 것을 의미하고, 그러한 어휘는 내게 그럴 듯한 사실성이 전혀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단 한 작품이 끝나면, 그것이 비밀스러운 전략과, 공허한 기교가 아닌 겸허한 솜씨로 가득 차 있을지라도 즉흥적인 듯한 것으로 보여야 합니다.
기버트: 당신의 정치적 입장은 무엇입니까?
보르헤스: 나는 보수당에 속해 있고, 왜 그런지는 설명을 하겠습니다. 대통령 선거가 있기 며칠 전 저는 보수당에 가입을 했지요. 나는 항상 급진주의자였는데 그것은 내 가계의 전통 때문이었지요. 나의 외할아버지인 아세베도는 알렘(아르헨티나 급진주의 정당의 지도자,1842-1896-역주)의 절친한 친구였고, 따라서 자신의 정치관이나 판단이 아닌 의리 때문에 그와 같은 길을 걸으셨지요. 후에 나는 급진주의자들이 공산주의자들과 동맹을 맺으려 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나는 선거가 있기 5일인가 6일 전에 아르도이(보수당의 간부)를 찾아가 민주보수당에 가입하고 싶다고 말했지요. 그는 경악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고, 내게 말하더군요.
"그렇지만 우리는 선거에서 패배할 것인데 당신이 가입한다는 게 우스운 일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나는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신사는 항상 잃는 자의 편이지요."
"만일 잃는 자의 편이 되고자 한다면-그가 내게 대꾸하더군요-, 더 이상 딴 데로 갈 필요가 없습니다. 여기가 바로 그곳입니다."
우리들은 웃었고, 그리고 나는 보수당에 가입했지요……. 그리고 보수당은 현격한 차이로 급진주의자들을 이겼지요. 나는 많은 사람들에게-특히 여기 미국에서- 아르헨티나에서 보수주의자가 되는 것은 우익이 아닌 중립이 되는 것임을 설명해야 하곤 했습니다. 즉 나는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나의 태도와 마찬가지로 민족주의자들이나 파시스트들에 대해서도 진저리를 느낍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언제나 내가 있었던 바로 그 자리에 계속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대략 저는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나는 무엇보다도 반페론주의자입니다. 페론 정부는 이것에 대해 전혀 의구심을 갖지 않았지요. 그들은 내게서 보잘 것 없는 작은 직장마저 빼앗아 가면서 저를 박해했지요. 그러나 나의 어머니, 누이, 그리고 한 조카는 감옥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나는 그 시대 실상의 목격자이지요.
기버트: 당신은 종교인입니까?
보르헤스: 아닙니다.
기버트: 당신은 여행하기를 좋아합니까?
보르헤스: 나는 전혀 여행하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전에 내가 여행을 많이 했다는 사실을 좋아합니다. 나는 '사람은 기억을 통해 여행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물론 과거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일단 그 당시로서의 현재가 있어야겠지요.
기버트: 새로운 세대를 위해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까?
보르헤스: 아니요. 그리고 저는 여타의 사람들에게 그 어떤 충고도 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나의 인생조차도 겨우 간신히 꾸려왔으니까요……. 나는 약간 표류하며 나의 삶을 살았지요.
:: 리타 기버트
이 글은 69세의 나이로 이미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던 보르헤스가 하버드 대학 교환 교수로 와 있을 때 "스페인어의 삶 Life en Español"의 기자 리타 기버트 Rita Guibert와 했던 대담을 발췌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