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년 재래시장에 자리잡은 저항과 자유의 상징, 레프트뱅크(Left bank) 서점
시애틀의 별명은 ‘에메랄드 도시’다. 숲이 많고 강과 호수, 바다 등 녹색 자연이 아름다워서 이런 별명이 붙었을 것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도시지만 사실 이곳은 1899년 대화재로 도심 전체가 완전히 타버려 다시 태어난 재생의 비밀을 품고 있다. 파이어니아 광장을 중심으로 형성된 도심 공간에 대화재가 발생했고 대부분 목조건물로 구성된 도심을 거의 다 태워버려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입었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다고 한다.

이후 도시를 재생하면서 화재에 강한 석조건축물로 많이 대체했고 덕분에 계획적으로 도시를 재구성할 수 있었던 건 장점이었다. 이곳에 관광객들의 명소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pike place market)’이 있다. 2007년에 설립 백 년을 맞은 이 재래시장은 시애틀을 찾는 이라면 누구나 들러가는 명소다. 남대문 시장처럼 하루종일 이곳만 걸어다녀도 심심치 않을 만큼 재미난 것들로 가득하다. 근처에 커피애호가의 성지처럼 되어버린 스타벅스 1호점도 있고, 시장 정문에는 중국인들이 복을 빌며 한 번씩 만지고 간다는 ‘Rachael’ 이라는 이름의 살진 돼지(동상)도 있다.

그러나 내가 이 마켓에서 흥미를 가진 것은 다름아닌 헌책방들이다. 시장 상가에 무려 4개의 헌책방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중 첫 눈에 들어온 게 바로 <레프트 뱅크>다. 서점 안에 들어서자 눈을 잡아당기는 붉은 카펫, 시선을 들어 서가를 살피면 카운터를 둘러싸고 뒷 벽에 불끈 주먹 쥔 노동자들의 그림이 한가득이다. 자세히 살펴보니 모두 티셔츠와 에코백인데 전세계 노동자 농민 흑인과 여성 등 소수자와 약자들이 자유와 평등, 인권을 위해 투쟁하는 이들의 모습이 담겼다.


“와, 멋지네요”
다가가 말을 거는 내게 돌아온 답변.
“네, 우리는 래디컬(radical)한 서점입니다”
전 세계 급진 좌파들의 모든 구호와 운동을 담은 이 책방은 특정한 주인이 없이 비영리로 운영되며 나와있는 이들은 모두 자원봉사 회원들이다. 원하는 시간에 자원봉사를 신청해서 앞 사람이 뒷 사람에게 인수인계를 하는 식으로 릴레이 운영이 이어진다. 이곳을 돌다가 우리나라 ‘전국농민회’ 이름이 새겨진 포스터를 발견했다.

그리고 재미난 그림책 한 권도.
“A is for activist”라는 제목의 그림책은 말하자면 어린이들에게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해 가르치는 책 정도 될까.
“A is for activist. advocate, abolitionist
B is for banner
C is for Co-op, cooperating cultures
Little d democracy. More than voting, you’ll agree
Equal rights black, brown, or white
F is for Feminist......”



이 작은 그림책에 진정 감동받았다. 진보적이라는 건 이런 거구나, 어린 친구들과 이런 글과 그림으로 함께 대화할 수 있다는 것.
‘Radical Reds’ the headline said. ‘Ruinous Rioters1! the Rumors spread....Really?


분단국가인 우리나라에서는 언제쯤 이런 주제로 자기검열을 거치지 않는 대화와 토론, 교육이 가능할까?

문득 눈길이 간 것은 <아나키스트 북페어> 포스터였다. 시애틀에서는 2009년부터 연 1회 아나키스트, 반자본주의자, 급진좌파들이 모여 관련 책을 전시하고 세미나 등 여러 행사를 진행한다고 한다. 한국에 돌아와 검색해보니 1981년 런던에서 몇 몇 출판사가 모여 아나키스트들이 함께 만날 수 있는 자리를 계획한 것이 첫 시작이었다고 나와있다. 그때부터 매년 북페어를 여는데 지금은 파리, 뉴욕, 바르셀로나, 벨파스트, 리스본 등 전 세계 40 여개 도시에서 행사가 진행된다고 한다. 아나키즘과 반자본주의에 대한 생각들을 나누고, 아나키스트들의 자서전 등 관련 출판물을 전시 판매하는데 어린이책과 만화책도 있으니 아이들을 데리고 가족과 함께 와서 즐기라는 초대의 글이 인상적이었다.
분단국가가 아니라면, 냉전이 아니라면, 전쟁과 학살을 경험하지 않았더라면, 그랬더라면 우리들도 좀 더 자유롭게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 혹은 무정부주의 같은 말들을 입에 올리며 사상과 신념의 자유를 구가할 수 있었을까? 대통령을 탄핵하면 헌법재판소장도, 전임 대통령 구속영장을 청구하면 검찰총장도, 법원장도 모두 ‘빨갱이’ 동조자가 되어버리는, 아닌 줄 알면서도 교묘하게 그런 프레임으로 국민들의 반목과 분열을 꾀하는, 그럼으로써 생존이 가능한 2017년의 대한민국에서 나는 <레프트 뱅크>서점, 그리고 아나키스트 북페어가 몹시도 새롭고 경이롭기까지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