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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 모든 정욕과 탐욕을 넘어
거룩함의 욕망으로 충만하라.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마 23:25》
들어가는 말
오늘 날 우리는 역사상 유례없는 소비의 시대를 살고 있다. 소비가 줄면 경기가 가라앉을까 할 수 만 있으면 경기 활성화를 위하여 과소비를 부추긴다. 경제의 구조가 끝없는 소비를 하지 않으면 굴러갈 수 없는 구조이다. 그래서 인간의 탐욕적 소비를 부추긴다. 생산 없는 부동산 활성화는 세수는 늘지만 가진 특정한 사람들은 상상 초월한 불로소득이 생긴다. 그렇게 되면 빈부의 격차는 더 심해진다. 게다가 지금은 빚을 두려워하지 않는 과소비의 시대를 살고 있다. 빚으로 집을 사고 건물을 사고 건설경기를 부추기는 과소비의 시대다. 조급증까지 더한 탐욕은 현명한 판단력과 통찰력을 마비시킨다. 집을 지닌 가정마다 억대 이상의 빚을 지지 않은 사람이 별로 없다. 우리는 탐욕을 조장 받아 과소비의 위험에 노출된다. 눈에 보이는 것들에 대한 욕망을 부추기는 감각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절제하는 삶을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즉 정신적 절제와 물질적 절제이다. 정신적 절제라면, 분노가 일어날 때 노(怒)하지 말며, 시기가 일어날 때 시기하지 아니하며, 탐욕이 일어날 때 탐내지 아니하며, 음욕이 일어날 때 음란하지 아니하며, 말 많이 하게 될 때 그 말을 억제하여 정신적 절제를 가하는 것이다.
철학자 플라톤은 이성은 흰 말로, 욕망과 본능은 검은 말로 표현하였다. 이성의 흰 말이 수레를 끌어야 인생이 무너지지 않는다. 욕망과 본능의 검은 말이 수레를 끌면 늘 위태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것은 자명하다. 이성은 먼저 적절한가의 지혜와 다가오는 현상에 대한 통찰이 있다. 그리고 취해야 할 선택과 행동이 뒤따른다. 그러나 욕망과 본능은 그 반대이다. 게다가 멈추어야할 시점과 통제 없어 끝없이 질주할 뿐이다.
이솝 우화에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있다. 우화 이야기를 간단히 소개해보면 이렇다.
어느 날 우연히 노부부가 거위 한 마리를 얻게 되었다. 그런데 그 거위는 황금알을 낳아 주었다. 그것도 단 하루만 낳은 것이 아니라 매일 하루에 하나씩 낳았다. 그래서 이 노부부는 큰 부자가 되었다. 그런데 이 노부부는 한꺼번에 많은 황금을 얻고 싶은 탐욕이 생겼다. 거위 속에는 많은 황금알이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거위의 배를 갈랐다. 안타깝게도 거위의 뱃속에는 황금이 하나도 없었다. 이 일로 거위는 죽었고, 다음 날부터 이 노부부는 황금알을 얻을 수 없었다.
바로 이것이 탐욕이다. 사람이 이 탐욕에 사로잡히게 되면,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가지고 싶어서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을 하게 된다는 교훈의 이야기이다.
삶의 절제란 없거나 모자라기 때문이 아니라 많지만 아끼고 삼가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절제된 삶은 우리를 아름다움답게 하고 사람답게 만든다. 불필요한 것을 다 덜어내고 나서 최소한의 꼭 있어야 될 것만으로 이루어진 본질적인 단순하고 간소한 삶은 정말 아름답다. 그러한 아름다음은 한 송이 꽃으로 피어난 모습이기도 하다. 수많은 아름다음 중 최상의 아름다움은 '절제된 아름다움'에 있다.
본 론
사전적인 의미로서의 탐욕(정욕)과 본래 욕망의 차이
욕망 혹은 욕구는 육체적인 기능적인 욕구는 식욕, 수면 욕, 안목 욕, 성욕, 감각 욕, 쾌락 욕 등등은 없애거나 제거의 대상이 아니다. 절제와 통제의 대상이다. 이것들은 생명력 있는 건강한 삶을 통한 절제가 뒤 따라야한다.
그런데 절제란 내면의 욕구문제라 그리 간단치 않다. 절제의 정도 차이가 있을 뿐 모든 인간의 근본 문제이다. 어디까지가 기본욕구이고 어디서부터가 탐욕인지 선명한 경계선이 없다. 왜냐하면 욕구하는 인간의 처지와 상황이 개개인마다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 인간 존재론 적인 본질적인 욕구는 인격적이며 정신적인 충족 욕, 거룩에 대한 갈망 욕. 영원한 생에 대한 갈망 욕 등등은 인간욕구의 보다 더 근원적인 것들이 있다.
그러면 탐욕(貪慾)의 사전적인 정의를 보면 지나치게 탐하는 욕심이다. 그리고 그 탐욕을 부리면 그 탐욕에 눈이 어두워지다고 정의했다. 구약에서 탐욕 또는 탐심이라는 말은 히브리어 원어 ‘아와’(Awa), ‘헤멧’(Hemet)과 같은 단어로 표현되어있고 신약에서는 헬라어 원어 ‘플레오넥시아’(Pleonexia), '에피두미아‘(Epidumia)와 같은 단어로 표현되어 있다.
그런데 성경에 근거한 정통적인 견해는 인간의 내면에 나오는 욕구는 모두가 탐욕과 정욕으로 정의되었다. 그리고 정통적인 성서학자들도 인간 내면서 욕구하는 모든 것은 타락한 본성에서 기인한 것으로 가르쳐 왔다. 그래서 불교에서 조차 탐욕이 인생의 고통(苦痛)과 번뇌(煩惱)를 일으키는 삼구(三垢)의 하나로. 자기 뜻에 맞는 사물에 애착하여 만족할 줄 모르는 일이라고 했다.
십계명에서는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출 20:17)했다. 탐욕은 모든 죄의 원천이고 원죄(Original Sin)의 뿌리다. 탐욕이란 한 마디로 '과도한 욕심'을 말한다. 즉 자기의 정당한 몫(Share) 이상의 것을 바라는 모든 욕심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참고: 눅 12:15, 롬 1:29, 벧후 2:14, 딤전 6:10) 그러므로 우리가 지상에서의 생존에 필요 되는 기본 욕구이다. 그것만 욕구하는 것과 그것에 만족하는 절제와 그것 이상의 것을 욕망하는 탐욕이 존재한다.
탐욕을 정리해보면
첫째, 이기심과 깊은 관련이 있다.
둘째, 탐욕은 내면의 즐거움과 뿌리가 같다.
셋째, 탐욕은 계명과 윤리를 어긴 것이며, 그 대가는 하나님의 심판이다
부는 탐욕이 아니다. 인간이 그것을 대하는 태도가 탐욕을 결정한다. 그리고 그 탐욕과 정욕은 뿌리가 같다. 탐욕은 물질적이며 소유욕에 근거를 두고 정욕은 오감과 감성, 그리고 정신적인 측면서 만족을 모르고 끝없는 욕구를 부리는 것으로 정의해 본다.
한 건강전문잡지 칼럼에 다음과 같은 글아 실려 있었다. 암이란 무엇인가. 세포가 무한대로 성장하는 것이다. 우리의 몸의 모든 세포들은 일정 기간 성장했다가 때가 되면 죽는다. 그 죽은 세포의 자리를 새로운 세포가 채워주는 순환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장과 죽음을 반복해야 할 세포의 유전자에 변이가 생겨, 결코 죽지 않고 끊임없이 자라나는 세포가 나타났다. 이것이 바로 암세포다.
암세포가 무서운 것은 끊임없이 자라나기 위해서 다른 세포들의 영양분을 혼자서 차지한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것도 한 군데서 만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리를 옮기면서 말이다. 이렇게 암세포는 영양분을 낚아채서 독식하며 성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소멸하는 일 없이 암환자가 죽을 때가지 암은 계속 증식하고 퍼져간다. 그래서 암세포의 본질은 탐욕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로 탐욕에 사로잡히면 그 사람은 서서히 탐욕에 의해 부패하고 변질되어간다. 암세포가 다른 세포들에게 큰 피해를 입히는 것처럼, 탐욕에 사로잡힌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큰 피해를 입히기 시작한다. 암세포가 사람 몸 전체를 파멸시키는 것처럼, 탐욕에 사로잡히면 자신은 물론이고 공동체 전체를 파멸시킨다. 결국에는 암세포가 사람을 죽이고 나면 암세포 자신도 죽게 되는 것처럼, 탐욕에 사로잡힌 사람 자신도 죽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탐욕에서 벗어나지 아니하면 안 되는 절대적인 운명에 처해 있다.
욕망의 기원 - 창조자의 원하심 곧 창조자의 욕망에서부터
우리는 지금까지 진화론이냐 창조론이하는 우주의 기원을 논했을 뿐이다. 만약 진화론이라 할지라도 즉 왜 우주는 진화하는가? 즉 진화하는 추진력, 진화의 욕구는 어디서 왔는가의 문제가 발생한다. 만약 우주의 기원을 창조라 한다면 그리고 우주를 창조한 창조주를 인정하고 우주를 창조한 그분의 능력까지 인정한다 할지라도 우주를 왜 창조했는가의 문제가 남는다. 그럼으로 우주를 왜 지었는가는 창조자의 마음이다. 그분의 주권이며 뜻이다. 그분의 원하심 때문에 우주가 창조되고 그분의 원하심 때문에 우주가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그 창조자의 원하심 곧 창조자의 욕망이다. 우주만물과 모든 생명체를 지으신 것은, 생명체의 진화 적응력의 기능을 창조하신 것은 창조자의 원하심에서 비롯되었다. 이것이 창조자의 절대 욕망이다. 그분의 본래적이고도 경이로운 원하심이 없었다면, 광대하고 경이로운 우주만물은 존재할 수 없었다. 창조자의 본래적인 원하심은 창조자의 욕망이다. 그 욕망은 우주만물과 생명의 원초적 원동력이 되었다.
인간의 존재 욕구(욕망)과 생명체들의 존재 욕구의 기원
창조자의 원하심 곧 창조자의 욕망이 낳은 모든 존재하는 것들을 낳았고 그것은 욕망하는 존재들이다. 특히 생명체는 생존욕구의 존재들이다. 스스로 생존 욕구에 따라서 낳고 소멸하면서 존속해간다.
창조자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인간은 욕망의 존재이다. 본래 인간의 원초적 본성에는 탐욕은 실재하지 않았다. 단지 인간의 존재론적인 본능적인 욕구만이 존재했는데 기능적인 면에서 순수함만이 존재했다. 이는 지적인 욕망의 존재이며 의지적인 욕망의 존재이다. 또한 오감으로부터 오는 감정과 내적감정의 욕구의 존재이다. 더 궁극적인 것은 본래 창조자가 자기 형상을 낳은 인간은 창조자의 본성을 갈구하는 거룩한 욕망의 존재이다. 창조자의 욕망은 자기가 낳은 인간의 욕망이 자기를 향한 사랑으로만 나타나기를 원하신다. 그것이 에덴동산의 주인공이 누리는 행복의 욕구이며 생육번성을 누리는 생명욕구이다. 순수한 쾌락욕구이며, 제한이 따르는 자유의 욕구이다. 또한 영원한 생의 욕구이고 거룩함의 교제의 욕구이다. 그 거룩함의 교제의 요구는 영원하신 분으로 오는 사랑에 대한 갈구와 영원한 생명과 삶에 대한 욕구,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케 하는 거룩함에 대한 갈망이다.
본성적으로 욕망하는 것은 인간의 내면에만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의 과학은 원자와 세포 안에 이 경이로운 욕망이 실재함을 인정했다. 환경이 주어지면 몸에서 분리되어 나온 세포도 정교한 창조 욕구 프로그램이 내재되어 있어 스스로의 욕구로 분열과 재생을 하며 자라기도 하고 생존을 위한 모색을 스스로 한다. 막대기 같은 줄기세포가 그 한 예다. 원자의 세계는 더 이상 설명의 필요 없이 그 원자 자체에 창조자의 경이로운 프로그램에 의한 욕망이 실재함으로, 원자가 분열과 융합의 작용으로 지금의 우주만물이 지탱되고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모든 창조물의 원초적 욕망은 경이로운 우주만물이 스스로 존재하며 서로 공존하며 지탱되어지게 했고 생명체의 생존 본능은 진화와 적응을 낳아왔다. 그리고 창조자가 보시기에 아름다운 세계였다.
심지어 타락한 인간이라 할지라도 잃어버린 에덴의 파라다이스와 영원을 스스로 회복하려는 욕구가 문명과 문화를 이룩했다 할 수 있다. 그것도 알고 보면 인간 내면에 창조의 원초적 욕망이 내재함으로 오늘의 문명과 문화를 이룬 것이다. 물론 세상은 그 부패한 마음을 가진 후손들 곧 사람들로 채워져서 죄악의 욕망이 문명과 문화를 창조하는 동기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세상은 죄악이 가득한 세상이 되어 있다.
욕구의 변질이 가져온 탐욕의 정욕의 기원
그 정욕 곧 탐욕의 기원은 사탄으로부터, 사탄의 말을 듣는 순간부터이다. 그래서 요한복음 8:44은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라 했다.
본래 사탄은 원래부터 하나님을 싫어하고 그분 대신에 세상을 통치하고 싶어서 안달하는 존재였다. 존재하는 목적 자체가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어떻게든 떼어놓는 것이다. 에덴동산에서도 하나님과 즐겁게 교제하는 인간을 가만 두고 볼 수 없었다. 발람의 나귀가 말했던 것처럼 뱀의 경우는 사탄의 도구로 사용되었다. 그 화려하고 영악한 모습은 여자에게 가까이 접근용으로, 간교한 입은 유혹 도구로 사용되었다. 남자보다 더 연약하고 또한 쉽게 미혹당할 수 있는 존재란 것을 간파(벧전 3:7)한 사탄은 가장 가까운 친구처럼 다가온 다가 왔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참으로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질문한다. 이는 사탄이 뱀의 입을 빌어 하나님의 금지 명령을 몰랐을 리 만무한데도 물은 것은 하와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의심병과 불신병을 심어 심정적으로 하나님과 분리되는 순간이다.
이제 여자가 그 선악과의 열매를 바라보았더니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였다. 본래 선악과가 여자가 바라본 것 같은 이미지를 주었는지는 성경 어디에 표현이나 설명 혹은 상상력을 불어 넣는 곳은 없다. 오히려 선악과를 보는 순간마다 자신은 상대적으로 거룩한 존재인 피조물인 반면에 그분은 절대적인 창조주 하님을 인식하는 거룩한 말씀이었고 자신의 존재 가치와 영원한 생명, 그리고 모든 것을 주시고 지금도 함께하신다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 시켜주는 나무이었다. 그런데 아직 타락하기 이전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의 분리된 여자의 마음은 그 시선이 바뀌어 선악과를 욕망의 대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는 하나님을 향한 경배의 거룩한 욕망이 이제는 자기를 위한 탐욕의 욕망으로 바뀌어버린 순간이다. 탐욕의 마음이 먹어 소유하려는 탐식으로 변했다. 선악과를 바라보는 눈도 변하여 따고 싶은 탐욕의 눈으로 바라본다는 뜻이다(마 5:28-29). 결국 따 먹고 남편도 주매 주저 없이 먹었다. 아담은 선악과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을 직접 들은 자로서(창 2:16, 17) 아내의 잘못을 지적하고 회개토록 이끌 책임이 있었다. 그래서 성경은 이 범죄를 아담의 범죄로 규정한다.
그래서 하와 사건을 배경으로 요한일서 2:16은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한 것으로 이해된다.
육신의 정욕은 동물적인 의미에서 인간의 육신을 의미하지만 좀 더 깊은 의미는 인간의 육신 속에 내재되어 있는 욕망의 근원을 의미한다. 육신의 정욕은 타락한 사람의 본성으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자기만족만을 추구하는 자세를 의미한다. 이미 밝혔지만 하와의 경우 타락 이전이라 할지라도 사탄의 말에 귀 기울이는 순간 심정적으로 하나님과 분리되어 자신을 만족 시키고자하는 욕망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안목의 정욕은 시각적으로 다가오는 모든 것들에 탐욕과 정욕이 일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성적인 욕망은 물론 보이는 모든 사물을 탐닉하는 욕망을 의미한다. 이생의 자랑은 그것은 소유하고 있는 물질 뿐만 아니라 태도나 행위를 자랑하거나 혹은 과대평가하여 허세를 부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 자랑의 중심에는 스스로 하나님의 자리에 오르려는 교만의 탐욕과 제 잘난 맛에 살아가려는 경향성이다. 그러므로 이것들은 모두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들어온 것에 대한 타락한 사람들의 마음에서 비롯된 탐욕과 정욕임을 밝히고 있다. 결국 이 세상도 그것이 대한 욕망도 다 지나가고 소멸한다. 그러므로 세상을 향한 정욕과 탐욕을 물리치고 죄를 미워하며 오직 주의 사랑의 법에 순종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그 분 안의 영원한 생명으로 인해 영원히 그 안에 거하게 될 것이다(요일 3:14; 5:11-12; 고후 4:18).
탐욕의 기원에서 본 인간내적 탐욕의 시작점은 하나님과 분리된 자아로터 곧 이기심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홀로된 자아는 이기심을 바탕으로 자기를 위한 욕망을 추구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를 위한 만족과 기쁨을 추구하고 그것은 끝이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결코 채워질 수 없고 바닥이 보이지 않는 욕망으로 눈에 보여 지는 거들로는 채워지지 않는다. 혹 채워졌다 하더라도 곧 더욱 더욱 욕망하기 때문에 전도서는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는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도다"《전 1:8》 했다. 그리고 또 다른 욕망을 갈구한다. 하늘의 영원한 것으로 채워지기까지는 결코 만족이란 없다.
거룩한 인간 육체의 본성이 육체의 탐욕과 정욕 본성으로의 타락과 그 실상
인류의 시조 첫 한 사람의 타락은 신분의 변화뿐 만 아니라 내면의 타락 곧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창 8:21)같은 부패를 인류에게 가져왔다. 그래서 타락한 인간의 본래적인 거룩한 욕망은 자기를 위한 탐욕과 욕정으로 변질되었다. 그 후 인간의 마음과 생각 속에는 진정한 자아를 상실한 자기 본위의 욕심과 욕정이 내재하게 되었고, 그 정욕과 탐욕에 뿌리를 둔 악과 선이라는 개념이 생겨 스스로 판단하는 심판자 곧 자기의 의가 싹이 나기 시작했다.
이것은 하나님과 분리되자 자신과도 분리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을 모르는 모든 자연인에게는 자아를 찾는 것이 평생의 과제가 되었다. 하나님을 찾아서 그 안에서 안식을 찾기 전에는 진정한 자아 발견 혹은 실현은 전혀 불가능하다. 헛되고 헛된 인생일 수밖에 없다. 탐욕과 정욕에서 비롯되는 죄는 또 이웃과도 진정한 사랑의 관계를 파괴하고 서로 탐욕의 관계로 변질 시켰다. 피조세계와도 인간의 탐욕에서 비롯된 안락만 목적으로 무분별한 자연정복 분리를 되게 만들었다.
그래서 인간의 진정한 하나님 형상의 자아는 상실되어지고 부패한 자아만 남았다. 그리고 그러한 자아를 가진 사람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고뇌와 선악 판단은 오직 갈등과 싸움을 양산할 뿐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마음의 생각과 행위가 모두 탐욕과 욕정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에베소서는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 2:3》라고 했다.
현대인들은 자아실현을 어릴 때부터 인생에서 가장 필수적인 조건이고 위대한 가치라고 배워 왔다. 이것은 오랜 시간 동안 반복과 훈련을 통해 형성된 라이프 스타일이다. 현대인은 적극적으로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욕구를 자가가 우상이 되어 자기만족을 위해 사용하며 살고 있다. 고도화된 자기중심 곧 자기를 우상화하여 살아가는 것이다. 더 이상 인간의 욕구는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해 사용되지 않는다.
심지어는 탐욕과 정욕에서 비롯되는 욕망의 자유를 외친다. 술 마시고 방탕하게 사는 자유를, 욕망에 따라 내키는 대로 사는 자유를, 보이지 않는 질서와 서로의 공존을 위한 윤리와 도덕에서 조차 자유를, 모든 성적인 구속에서 자유를 외치다. 겉으로 보면 대단한 자유인 것 같으나 속을 들여다보면 사실은 자유가 아니라 욕망의 노예이다.
얼마 전 조선일보 Why 이 사람을 거의 한 시간짜리 대담을 글로 옮겨놓은 것을 읽은 적이 있다. 그는 현재 교수로 있고 이혼 상태이며 몸은 약해질 대로 약해져 걸음걸이조차 떨고 있는 상태로 보인 사람이다. 윤리의 관습과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성의 무한 자유를 외치는 사람이었다. 꼴리고 상대가 원하면 누구든 섹스 하는 자유를 외치었고 금서로 규정될 큼 섹스의 자를 소재로 한 소설을 썼다. 그리고 그 자신도 그렇게 살아왔음을 고백했다. 지금도 누구든 맘이 드는 사람이 있으면 그렇게 정욕을 불태우며 자유롭게 살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그가 간과한 것은 정욕의 노예가 되었을 뿐 인생의 참 자유는 없는 것이다. 섹스로 나타난 정욕은 그것을 끝없이 요구하기 때문이다.
좀 더 살펴보면 탐심은 우상인데 그것은 자기를 만족시키기고, 충족시키기 시키려는 수단으로서의 욕구의 결정체이다. 그래서 우상숭배라는 것은 결국 자기숭배다. 세상의 이방종교는 다 이런 것이다.
우상은 인간의 탐욕을 형상화 한 것으로 인간의 탐욕을 충족시키는 매개로 이용되어 온 것은 역사가 증명한다. 탐욕이 이미지화된 우상은 이렇게 또 다른 힘 있는 탐욕 자들에 의하여 제국의 탄생 의미부여의 도구로, 권력 장악 명분이나 정적 제거의 도구로, 통치의 권력의 힘의 근원이나 통치자의 힘의 도구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하나님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것으로 비록 종교적으로 희생적이고 이타적인 삶을 사는 것과 욕망의 노예가 되어 탐욕스럽게 사는 것은 아주 차원이 달라 보지만 이 둘 다 자기를 숭배한다는 점에서는 뿌리가 같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종교가 자기로 출발하여 자기를 숭배하고 자기를 완성해 가는 자기중심 종교의 범주에 모두 들기 때문이다.
심지어 인간에게 있는 거룩을 향한 욕구마저도 자신을 위해 사용된다. 자신을 위해 욕구가 사용될 때 ‘소비’라고 할 수 있다. 소비에는 절대로 만족이 없다. 기독교인들 가운데 많은 교인들이 만족이 없는 소비적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자기 자신의 만족과 소유욕을 채우기 위한 욕망은 역리이다. 그것의 욕구는 탐욕과 정욕으로 변질되며 그것은 로마서 1장에서 말씀하는 것처럼 욕구가 자신의 만족과 쾌락을 위해 사용될 때 남자가 남자를, 여자가 여자를 성적 대상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게 여겨진다. 그것은 성적인 욕구에서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욕구가 가지는 특징이다. 창세기 3장에서처럼 욕구가 자신을 위해 마땅히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은 사탄의 거짓이다. 사단은 이것을 선악과 유혹에서부터 인간에게 효과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욕구는 자신을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고 사단은 거짓으로 인간을 유혹한다. 이 거짓의 유혹으로 인해 인간은 역리로 욕구를 사용하게 되고 결국 욕망의 노예가 되어 죄의 종으로 살아가는 모습이다.
심지어 예수님은 종교지도들 조차 “화 있을 진 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마 23:25) 하시므로 그들의 신앙의 경건한 행위조차 탐욕과 방탕에 뿌리를 둔 위선이라고 독설을 퍼 부셨다. 이 탐욕은 단순히 소유에 대한 욕심의 차원이 아니었다. 탐욕은 하나님과 나의 관계, 나와 너의 관계, 나와 자연의 모든 관계를 파괴한다. 나이 들고 목회의 연륜이 쌓일수록 모든 탐욕 곧 명예, 물질, 이성, 성공 등등에서의 자유가 그다지 쉬운 과제가 아님을 깨닫는다. 현대교회도 자본주의 사회와 대형주의 및 물신주의의 가치에 포위되어 있다. 우리의 교회들은 세속 문화의 가치에 사로잡혀 있고 대개는 그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탐욕과 야망, 성공, 물신주의에 기초하여 교회 성장을 이루었다면 그것은 재앙이다. 하나님의 심판밖에 아무 소망이 없는 죽은 교회이다.
영원하고 거룩한 분의 본성적인 것에서 오는 것 외에는 결코 채워질 수 없는 탐욕과 정욕의 내적 요인들
사실 거룩한 창조자의 욕망과 본질적으로 같은 인간 내면에 내재되어 있는 거룩한 욕망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본성을 욕망하게 되어 있고 그 하나님의 본성인 거룩하심으로부터 오는 거룩함의 은혜만이 인간의 본성적인 거룩함을 향한 무한한 욕구가 만족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거룩함의 욕구가 변질되거나 욕망의 대상이 벗어나면 그 변질된 욕망은 정욕과 탐욕의 본성으로 나타나 그것의 한계가 없는 끝이 없다. 예레미야는 “무릇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흙에 기록이 되오리니 이는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버림이니이다"《렘 17:13》”했다. 생수의 근원 자를 떠나서는 어디에서 생수를 구할 수 없음으로 끝없이 목마를 뿐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마음에 뿌리를 둔 욕정과 탐욕은 깨진 항아리에 물 붓 기다. 세상 것으로, 보이는 것으로, 쾌락적이고 감각적인 것으로, 채워도 채워지지 않고 여전히 갈증에 시달리고 굶주림의 허기에 시달리는 것은 마음에 욕정과 탐욕이 내재하기 때문이다. 정욕과 탐욕의 노예가 되어 그 것들의 욕구에 따라서 수단과 방을 가리지 않고 악행들을 행하고 그 악행들의 함정에 빠져서 고통과 괴로움에 허우적거리면서 나는 불행하다고 말한다. 이미 변질된 인간의 탐욕의 마음을 채울 수 있는 것이란 이 세상에 없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다”고 하셨다. 이 물은 샘물이지만 세상이 주는 물은 먹을수록 갈등을 느끼고 목마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자신의 정욕과 탐욕의 마음을 해결하거나 절제로 다스리지 못하면, 인간은 삶에 만족할 수 없어 끝없는 중독에 빠져 죽음의 수렁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 구체적인 예를 사무엘하 11장에서 발견할 수 있다. 늦잠을 자고 옥상을 거닐던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가 목욕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마음속에 정욕이 일어났다. 그를 왕궁으로 불러 동침함으로 간음죄를 저질렀다. 밧세바가 임신하자, 이 사실을 덮기 위해 전쟁터에 있던 우리야를 불러들여 아내를 만나게 합방시켜 우리야의 씨로 둔갑시키려했다. 이로써 거짓의 죄를 더했다. 충성심에서 남달랐던 우리야는 그런 호사를 거절하자, 다윗은 그를 전쟁터 최선봉에 서게 하여 죽게 했다. 살인죄까지 저지르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은밀히 저질러진 숨은 죄 이었다. 어느 누구도 왕의 이 행위를 본 사람이나 증명하여 드러낼 사람은 지상에서는 없었다.
삼하 12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선지자 나단을 통해서 다윗을 숨은 죄를 드러내시고 책망하셨다. 그 내용이 부자가 가난한 사람의 것을 탐내서 힘으로 그것을 빼앗았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비유를 통해 바로 다윗의 마음에 도사리고 있던 탐욕을 지적하여 드러내신 것이다.
그렇다. 사람이 탐욕에 사로잡히게 되면, 죄줄 알면서도 정욕에 이끌려 죄를 짓게 된다. 한 가지 죄만 짓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게 된다. 바로 탐욕이 모든 죄의 뿌리가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인간의 원초적인 거룩한 욕망이 타락으로 변질된 것이 탐욕과 정욕인데 이것들은 허공이라 그 어떤 것으로도 인간의 마음을 채울 수 없다. 공허한 인간의 마음을 채울 수 있는 것은 오직 창조자의 거룩한 본성으로부터 오는 거룩함이다. 그 거룩함의 은혜는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의 마음에서 비롯된다. 그 창조자는 성육신 하셔서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하셨다.
영원하고 거룩한 분의 본성적인 것에서 오는 것 외에는 결코 채워질 수 없는 탐욕과 정욕의 외적인 요인들
민수기 11장은 이스라엘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먹는 것에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영향을 받아 만나를 먹는 것도 모자라 다시 울며 이르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고 애굽에 있을 때는 애굽인을 위해 부엌에서 일하면서 몰래 값없이 고기와 생선, 그리고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을 먹던 것이 생각난다하면서 탐욕을 부려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했다.
그러자 자비의 하나님께서는 참으시고 오히려 고기를 냄새도 싫어하기까지 한 달 동안 먹게 하시리라고 하셨다. 그러자 모세는 제가 인도하는 백성이 여자와 아이들을 제외하고도 60만 명이나 되는데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이 한 달 동안 먹을 고기를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양떼와 소떼를 다 잡고 바다의 모든 고기를 잡아도 부족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내가 할 수 없는 일이 있느냐?’ 하시면서 바람을 보내 바다에서부터 메추라기를 몰아 진영과 그 주변 일대에 내리게 하시어 진영에서 사방으로 하룻길 떨어진 지역까지 메추라기가 지상에서 약 1미터 높이로 날아다녀 백성들이 쉽게 잡도록 하셨다. 그러자 백성들은 또 더 탐욕을 부렸다. 그것은 만나를 거두듯이 매일 필요한 만큼만 잡았어야 하는 데 내일 또 먹을 메추라기를 보내시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백성들은 탐욕을 부려 메추라기가 보내져 온 첫 날 밤과 낮, 그리고 그 다음 날 저녁까지 메추라기를 잡았는데 가장 적게 잡은 사람도 약 10가마 정도 잡을 정도로 탐욕을 부렸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육포로 먹으려 말리려고 진영 주변에 사방 널어놓았다. 탐욕부린 그들이 그 메추라기 고기를 입 안에 넣고 씹기도 전에 여호와께서 노하셔서 무서운 재앙으로 그들을 수없이 죽이셨다. 탐욕으로 주어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또 더 큰 탐욕을 부리려다 진멸의 징계를 받은 것이다.
사실 탐욕과 정욕을 만족시킬 세상의 보이는 것이나 물질에서는 없다. 탐욕은 끝이 없고 정욕은 멈추지 못하며 세상은 항상 부족하고 결핍되어 있다.
인간이 아무리 소유하려고 탐욕을 부려 천하를 다 가진들 에덴의 아담만큼 풍요할까? 인간이 아무리 진선미를 추구해도 에덴의 아담만큼 그 진선미가 충족될 수 있을까? 인간이 아무리 먹는 것을 탐해도 에덴의 보기에도 좋고 맛있는 것을 먹는 풍요로움과 무공해, 최고의 품질 먹는 아담만큼 육체의 욕구를 채울 수 있을까? 인간이 쾌락을 위하여 성적인 욕을 채우려하고 최고의 성적 존재를 소유하려한들 에덴의 아담과 이브가 서로 누렸던 만족의 질과 양에서 따를 수 있을까?
인간이 남녀의 만남을 통해서 한없는 만족을 누리려 탐욕을 부려도 아담부부가 서로 당신은 ‘내 뼈 중의 빼요 살 중의 살로다’라고 고백했던 것에서 보듯이 동등한 존재론적인 인격 위치에서 서로 완전한 사랑, 완전한 한 몸, 완전한 관계를 이루었던 이들과 같을 수 있는 이가 있을까? 인간이 스스로 영생을 탐하고 그것의 욕망을 채우려 수명을 늘리고 젊을 유지하려고 뜯어고치고 갈아 치우려한들 영원한 생 삶을 암시하는 생명나무와 그것의 열매를 따 먹는 자유를 누려 왔던 아담과 같을까? 남자가 아무리 아름답고 예쁘고 완벽한 몸매의 최고 지성을 가진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다한다 한들 하나님이 직접 만든 아담의 아내 이브만 할까? 여자가 아무리 재산이 많고 멋지고 지성적이고 남적적인 남편을 맞이한다 한들 아담만한 남자가 있을까? 인간이 아름다운 세계를 보려고 여행을 한들 아담이 누렸던 완전하고 아름다운 세계에서의 그의 즐거움에 이를 수 있을까? 인간이 아무리 에덴동산을 만든 들 아담이 누린 에덴동산 같으랴? 인간이 아무리 생수를 만들고 찾아 메어 마신들 에덴동신에서 흐르는 생수 같으랴? 인간이 아무리 금은보석으로 치장한들 에덴으로부터 흐르는 강들의 보화 같으랴? 그래서 전도서 2장 3-11절은 “내가 내 마음으로 깊이 생각하기를 내가 어떻게 하여야 내 마음을 지혜로 다스리면서 술로 내 육신을 즐겁게 할까 또 내가 어떻게 하여야 천하의 인생들이 그들의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어떤 것이 선한 일인지를 알아볼 때까지 내 어리석음을 꼭 붙잡아 둘까하여 나의 사업을 크게 하였노라 내가 나를 위하여 집들을 짓고 포도원을 일구며 여러 동산과 과원을 만들고 그 가운데에 각종 과목을 심었으며 나를 위하여 수목을 기르는 삼림에 물을 주기 위하여 못들을 팠으며 남녀 노비들을 사기도 하였고 나를 위하여 집에서 종들을 낳기도 하였으며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들보다도 내가 소와 양 떼의 소유를 더 많이 가졌으며 은금과 왕들이 소유한 보배와 여러 지방의 보배를 나를 위하여 쌓고 또 노래하는 남녀들과 인생들이 기뻐하는 처첩들을 많이 두었노라 내가 이같이 창성하여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들보다 더 창성하니 내 지혜도 내게 여전하도다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나의 모든 수고를 내 마음이 기뻐하였음이라 이것이 나의 모든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몫이로다 그 후에 내가 생각해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로다” 이룬 것에 대한 해 아래서의 허무와 채울 수 없는 욕망을 노래하고 있다.
맺는 말
첫째, 탐욕과 정욕을 부리는 주체인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고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 심령이 새롭게 변해야 한다.
탐욕을 극복하려면 사람이 새롭게 변하는 것이 필요하다. 사람이 변하지 않고는 결코 탐욕을 극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에베소서 4:22-24를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으라는 말씀이다. 우리 자신의 욕구 안에 뿌리박고 있는 정욕과 탐욕은 우리 스스로 뿌리치지 못하고, 탐욕에 종노릇할 수밖에 없는 것은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성경에서는 이것을 옛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우리가 이 옛사람이 새롭게 변화되지 않으면 결코 탐욕을 극복할 수 없는 것이다. 육체의 부패의 본성이 십자가에 죽고 그리스도 안의 새 사람의 거룩한 본성으로 다시 태어나야한다.
갈라디아서 5:24를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그리스도인들은 탐욕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탐욕과 정욕의 원천인 옛 사람, 곧 자기를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함께 못 박아 죽었으니 탐욕과 정욕도 못 박혀 죽은 것이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로 믿음의 연합으로 말미암아 거룩함을 욕망하는 새로운 피조물 창조되었고 하나님의 아들로 다시 태어난 사람이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탐욕을 부리는 주체인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이다. 이제는 더 이상 탐욕이 그 사람에게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하게 된 사람들인 것이다. 그러나 진리 안에서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로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이지만 아직 우리는 타락한 몸을 가진 존재로 지상에 거하기 때문에 시시 때때로 밀려오는 유혹들은 탐욕과 정욕의 풍랑으로 우리를 몰아 넣으려한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 3:5》하시므로 우상 숭배인 탐심을 땅에 있는 모든 부패한 지체들을 죽여야 한다. 십자가에 못 박아야 죽어야할 대상은 탐욕과 정욕의 주체인 자신을 죽이는 것이다.
둘째,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려면 본래 생명을 부여했던 거룩한 영의 욕망을 따르는 삶이어야 한다.
성령의 행하심은 하나님의 원하심대로 행하는 삶이다. 그러데 그 성령님은 우리의 내면에 거하시면서 육체의 소욕이 아닌 성령의 소욕대로 이끄신다. 새사람이 된 후에도 육체안의 정욕과 탐욕은 강력해서 언제든지 탐욕의 늪으로 빠질 수 있다. 성령의 능력 안에 거할 때 더 이상 탐욕의 욕구를 거룩한 욕구로 승화시킬 수 있다. 갈 5:16절은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라 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3:17에서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했다. 이는 우리가 성령을 따라 살게 되면 자유를 누리게 된다는 말씀이다. 우리가 성령을 따라 살면 속박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가 탐욕으로부터의 자유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탐욕에서 벗어나려면 성령의 능력을 덧입고 성령을 따라 살아야 한다. 성령 내적 충만을 경험하면서 거룩함을 갈망할 때 무가치한 것들에서 집착을 끊고 더러운 정욕과 부패한 탐욕에서 벗어날 수 있다.
셋째는 거룩한 욕구의 기능(function)의 회복이다.
그 거룩한 욕망은 거룩하신 창조주를 갈구하는 것이요 거룩함의 은혜를 욕망하는 예배의 욕구이다. 거룩함에 이르고자하는 욕구는 천국에서 우리가 살기 위해 필수적인 욕구이다. 인간의 기본욕구를 억누르고 부인하는 것은 위선이고, 인간 중심의 외식이다. 그래서 지금의 현대인들은 욕망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고통당하고 있다. 욕망이라는 것은 그 이면에 심리적인 문제를 배경으로 깔려있다. 이미 많은 연구들로 밝혀진 바지만 식욕, 성욕 같은 것들은 충동, 불만족, 두려움 같은 마음의 지배를 받는다. 따라서 사람이 자기중심적이 되면 욕구는 더욱 거세진다. 사실 사람이 죽지 않는 한 욕망은 사라질 수 없다. 욕망은 채워져야 하는 대상이다. 그 욕망이 참다워 지는 방법은 하나님을 경배하는데 그 욕망을 쓰는 것이 거룩한 욕망이요 욕구이다. 거기서 욕망의 참 만족이 있고 행복이 있다.
날마다 주님의 십자가의 그 깊고도 풍성한 의미를 재확인하며, 그분의 은혜와 권능을 실제로 받아 누리려는 데에 먼저 동원되어야 한다. 성령의 인도를 구하여서 우리 의지력으로 의의 열매를 맺으려 하기보다는, 성령께서 우리를 통해 열매 맺게 해주시도록 우리 자신을 모두 부수고 깎아서 내어드리는 데에 의지가 동원되어야 한다.
우리의 생명의 욕망이 있는 한 그 욕망의 본성에 자리 잡고 있는 탐욕과 정욕은 사탄의 세상 유혹에 앞에 항상 꿈틀거리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시킨 사실을 믿고 그 거룩한 분에 대한 경배와 찬양으로 우리의 욕망을 충족시켜야하겠다.
넷째 거룩한 하나님의 형상이 탐욕과 정욕의 본성에 회복되어 그리스도의 거룩한 형상 곧 거룩한 영광의 빛이 충만이 드러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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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아무리 아름다운 옷을 입으려한들 아담 스스로 벗었음을 깨닫고 수치심을 느끼기 전의 상태 곧 창조 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아 그분께로부터 부여 받았던 순수하고 고귀한 영적인 순결, 곧 내적인 거룩의 옷을 입음 같을까?
사실 하나님이 인간을 자기 형상대로 창조하심이 인간의 몸을 따뜻하게 해야 하고 부끄러워 몸을 가려야할 할 만큼 옷이 필요한 존재로 불완전하게 창조 했을까? 아니다! 하나님이 현현 했을 때 그의 거룩의 영광이 시각적으로 들어 났듯이 아담도 하나님의 형대로 지음 받은 존재로서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그의 형상도 하나님을 닮아 그의 안에 있는 하나님의 거룩의 영광이 시각적인 차원서 머리에서 발끝 까지 발산되어서 몸 전체를 둘렀을 모습으로 나타났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 영광이 사라져서 영적인 벌거벗음이 그의 내면에 일어났고 내적 거룩의 영광으로 둘러싸여 졌었던 몸은 그 영광의 옷이 사라졌음을 깨달았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에 대하여 내적이고 육체적인 수치심과 두려움이 동시에 일어났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그 영광의 빛에 증명은 성경 여러 곳에 있다(출 34:29-35; 출 29:37; 출 30:29; 고후 3:7; 마 13:43; 행 6;15; 히 1:3).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 4:4b》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갈 4:19》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오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골 1:15》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골 3:10》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3》
이상의 말씀 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의 형상을 회복해야하는 것의 확신이며 본질적으로 이루어지는 약속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의 충만함을 입어 탐욕과 정욕의 욕구를 넘어 인간의 본질적인 욕구가 충족되는 충만한 삶이 영위됨을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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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파일을 다운 받아서 차근하게 밑줄을 그으며 읽었습니다. 내용이 너무 성경적이고 실제적으로 차근하게 정리가 잘 되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종합적인 정리를 하셨는지 놀랍습니다. 탐욕을 이기는 거룩함에 대한 교과서로 써도 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