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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한국교회의 분열
한국교회의 대립은 신사참배를 기준으로 찬성측 세력과 반대측 세력간의 정치적 분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신사참배를 거부한 사람들은 감옥에 가서 고문을 받아 죽거나 극심한 장애를 입어 영육간에 치명적인 상해를 입은데다가 교회마져 일본군의 손에 넘어간 경우가 허다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사참배를 한 사람들은 교회의 지도자로서 일본군부권력과 내통하며 자리를 보전하는가 하면 교단과 교회를 손아귀에 넣고 쥐락펴락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해방이 된 후에도 교단 권력자들이 스스로를 변호하며 순교자들과 대립하는 양상을 보여주며 이들은 새로운 신학적 사조에서 조차 일치되지 못하였습니다. 그후 보수주의와 정통주의 신학자들과 진보주의와 자유주의 신학자들간의 대립은 교단의 분열로 이어졌고 신학교의 태동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로서 박형룡과 박윤선으로 대변하는 보수주의와 고려신학교가 설립되었고 김재준과 송창근으로 대변하는 진보주의와 조선신학교의 독립을 도래하였습니다.
(1) 조선신학교와 진보주의, 그리고 기장의 분열과 탄생
1940년, 진보주의 신학자 김재준과 채필근, 송창근이 설립한 “조선신학교”는 보수주의 색채가 강한 평양신학교와 대비되는 신학사조로 출발하였습니다. 황국의 기독교 교역자를 양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조선신학교는 함태영, 김관식, 오진영, 조희염, 김길성, 김영주, 윤인구, 김영철, 한경직 목사등이 참여하였으며 감리교의 아빙돈단권주석사건(1935)에 관련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기독교의 5대 근본원리 “➀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➁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 ➂ 성경의 무오성, ➃ 대속의 죽음, ➄ 그리스도의 임박한 육체적 재림” 은 1930년대까지 한국교회를 지도해 온 유일한 신학사조였습니다. 그러나 조선신학교는 가장 중요한 핵심교리인 성경의 무오성에 관하여 의문을 제기하였습니다. 1940년, 김재준은 조선신학교의 설립의의를 조선인에 의해 독립적으로 설립된 신학교라고 정의하였습니다. 김재준은 성경무오설에 관하여 집요한 의문을 제기하였습니다. 인간은 오류가 있을 수 밖에 없고, 오류가 존재하는 인간이 무오한 성경을 기록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습니다. 성경의 원본 무오설에 대한 김재준의 생각은 과연 원본이 존재하는가? 하는 의문 제기와 함께 현존하는 모든 권위는 사본뿐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는 오류가 있지만 구원의 무오한 법칙이 있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김재준은 칼바르트의 실존주의적 성경해석과 신학논리를 계승하였습니다. 김재준은 “인격적 신임”(personal commitment)을 강조하며 신자의 인격적 신앙고백을 중요한 핵심고리로 사용하였습니다. 김재준은 성경관에 있어서 살아있는 인격적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을 달성하였다는 측면에서 오류가 없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보고 기계적영감설을 주장하였습니다. 정통보수주의자들의 성경전체가 영감되었다는 축자, 유기적 영감을 목적영감으로 이해함으로서 구원에서는 무오함, 다른 면에서는 유오함을 선언하였습니다.
성경의 권위에서 구원과 믿음의 측면에서 강조한 사상은 1891년, 유니온신학교 찰스 브릭스 교수가 주창하고 칼 바르트와 1924년, 어번신학교 어번선언, 그리고 화란의 신학자 벌카우어와 로저스와 매킴이 주장하였습니다. 제임스 패커(James Packer), 해롤드 린셀(Harold Lindsell), 데이빗 웰스(David Wells) 등 정통주의적 복음주의자와 조지 말스던(George Marsden), 나단 해치(Nathan Hatch), 도날드 블러쉬(Donald Bloesch) 등 진보주의자들의 충돌은 1890년대 이후 끊임없이 이어져 왔습니다. 일본 청산학원에서 수학한 김재준은 칼 바르트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로 인하여 이러한 진보적 신학을 정립하게 되었습니다. 조선신학교는 신학은 자유, 신앙은 보수라는 정경옥 교수의 가치처럼 에밀 브루너, 폴 틸리히, 루돌프 볼트만 등의 저서들이 조선신학교의 칼라를 주도하였으며 대표적인 진보주의 신학교로 성장해 갔습니다. 1946년, 남부총회의 인준을 받은 조선신학교는 한국 유일의 장로교 신학교가 되었습니다. 조선신학교는 선교사들을 배재한 순수 조선인 신학교라는 자긍심을 갖고 있습니다. 또한 보수주의로 대변하는 한국선교 50주년에 그와 대비되는 새로운 경향을 가진 신학사조의 등장이라는 긴장감을 갖게 됨으로서 보수주의 신학이 더욱더 체계를 갖추는 계기를 제공하였습니다.
1947년 4월17일, 조선신학교 학생 김준곤, 엄요섭, 정규오, 이노수, 차남진, 이치복, 박종삼, 강용서, 최윤조, 손치호, 이성권, 박요한, 정회찬, 최석홍, 윤광섭 등 51인은 연대서명을 기록하며 자유주의 신학교육에 관한 문제를 총회에 청원하였습니다. 51명의 조선신학교 학생들은 오늘날 합동과 통합과 보수장로교단의 대표들이었습니다. 학생들은 조선신학교의 신학교육이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신학사조에서 이탈하여 진보적인 사상이 매우 앞서나간 측면에서 의구심을 갖고 총회차원에서 조사를 해줄 것을 요청한 것이었습니다. 51인의 학생들은 개혁교회는 성경에 절대권위를 두고 천계의 영감으로 기록된 초자연적인 성경관을 지지한다고 선언하였습니다. 학생들은 자유주의 신학사상에 관한 김재준 관련자료를 총회에 첨부하며 1년여 기간의 조사가 계속되었습니다. 김재준은 전통적인 모세오경의 모세 저작권을 부인하고 이사야서의 2권구분, 바벨탑과 노아홍수의 역사성 부인, 바벨론 신화와 법전의 유대교 법전의 영향설 등 신학논쟁의 카테고리는 수없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조선신학교에는 주일을 부인하는 스웨덴 보르그사상에 심취된 자들과 흡연자, 학교도서관 서적을 도적질한 자, 천주교인, 공산주의자들이 함께 포함되어 있어서 신학생 입학과정에서 아무런 제한이 없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총회 조사위원회는 김재준과 송창근 교수를 소환하여 장기간 조사에 들어갔으며 결국 이 문제는 박형룡 박사의 귀국과 함께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박형룡 박사는 김재준의 변호에 대하여 김재준의 성서관은 파괴적 고등비평의 성서관이며 교리문제는 신신학의 교리관이라고 지적하며 모세오경 저작부인과 성경무오설 오류의 위험성을 간과해서는 않된다고 하였습니다.결국 총회는 박형룡 박사를 교장으로 하는 장로회신학교를 새롭게 설립하였고 1949년 총회의 인준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김재준의 조선신학교는 총회의 개혁안을 거부하고 문제해결 여지가 보이지 않자 총회는 장로회신학교 인준을 취소하고 장로회신학교와 조선신학교를 통합한 총회 직영신학교를 설립하였습니다. 1951년 9월18일, 변변한 학교도 없는 상태에서 519명의 학생들이 등록하여 “장로회총회신학교”가 대구에서 새롭게 개교하였습니다. 교수진에는 박형룡 직전 고려신학교 교장을 비롯하여 김치선, 계일승, 권세열을 정교수에, 한경직, 김상권, 명신홍, 이자익 목사를 겸임교수에 각각 임명하였습니다.그러나 김재준과 조선신학교를 옹호하는 경기노회는 총회의 결정에 반발하고 자신에 대한 제명결정에 불복하면서 교단을 이탈하고 세로운 신학교 설립을 주도하였습니다.
1953년 6월10일, 진보주의신학과 관련한 장로교 총회의 김재준 사태는 결국 총회를 탈퇴하고 “한남신학교”(한국신학대학)라는 진보주의 성향의 새로운 신학교를 설립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결국 법통 “제38회 총회”를 개최하고 김세열이 총회장에 취임하였습니다. 한국신학대학은 자유복음주의, 그리스도 중심의 신앙, 산앙과 신학양심의 자유사상, 노예적인 의존사상을 배격하고 자립자조적인 정신함양, 세계교회 협력병진을 천명하며 자유주의적 칼라를 드러내었습니다. 경기노회를 중심으로 김제, 경서, 경북, 충북, 충남, 전남, 전북, 군산, 목포 등 9개 노회 48명이 분립 총회를 지지하며 700개교회 120,000명이 참여하는 “기독교장로회”가 1954년, 탄생하였습니다. 전성천, 김재준, 한완상, 이종성, 유부웅 등 이들은 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신학문제를 넘어 교권남용과 기득권을 누리려는 세력의 치밀한 계획이라고 주장하며 새로운 교단을 탄생시켰습니다.
(2) 고려신학교와 보수주의, 그리고 보수주의의 분열과 탄생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주도한 한상동 목사와 박윤선 박사가 주축이 된 고려신학교는 보수주의 신학의 교과서였습니다. 배교자들에 의해 장악된 조선신학교와 달리 신사참배를 반대한 53명의 학생들로 시작된 고려신학교는 순교자의 피를 계승한 가장 정통주의 신학에 근접한 유일한 신학교였습니다. 조선신학교는 친일파에 의해 유지 존속되었던 폐교로서 보수주의 신학생들이 공부할수 있는 학교가 아니었습니다. 신사참배 반대자들에게는 그들이 다녀야 할 새로운 학교의 필요성을 절감하였습니다. 한상동 목사와 주남선 목사는 1946년 4월 박윤선 목사와 함께 부산지역에 새로운 보수주의 신학교 설립을 합의하였습니다. 한상동, 주남선, 박윤선 목사는 5월20일, 기성회를 조직하고 진해 하사관훈련 수련관에서 63명의 수강생을 대상으로 신학강좌를 개설함으로서 고려신학교가 태동하였습니다. 1946년 7월9일, 진해읍교회에서 개최된 경남노회 47회 임시노회에서 한상동 목사가 제안한 신학교 설립안이 통과되었고 학생천거와 재정지원을 약속하였습니다. 고려신학교는 평양신학교의 전통을 계승하고 이를 상징적으로 뒷받침하는 의미로 만주에 거주중인 박형룡 박사를 교장으로 청빙할 것을 결정하였습니다. 박형룡 박사를 청빙해 올 남영환 전도사가 병환으로 인하여 만주에 들어가지 못해 일정이 지연되자 노회는 신학교 설립부터 시작하였습니다. 9월20일, 부산 금성중학교(일신여학교) 김상순 목사(교장)의 배려로 한 개의 강의실을 임대하여 박윤선 목사가 교장서리에 취임함으로서 고려신학교는 정식 개교하였습니다. 고려신학교는 정통신앙을 파수하여 생활의 순결을 지켜 순교자의 정신으로 교역자를 양성한다는 목적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신학교 창립예배에서 김치선 목사는 “신학과 신조”라는 제목으로 설교하였고 미국 군목 존 비졸드 목사의 축사가 이어졌습니다. 고려신학교 교수진에는 박윤선, 이상근, 한상동, 브루스 헌트(Bruce F.Hunt,한부선), 해밀톤(Floyd E.Hamilton,함일돈), 윌리엄 치솜(William H.Chisholm,최의손), 말스베리(Dwight R.Malsbary,마두원) 선교사들이 합류하였고, 1948년, 손양원 목사가 총무로 봉직하였습니다. 헌트 선교사의 고려신학교 교수임직으로 웨스트민스터신학교와의 국제적인 교류관계가 이루어졌습니다. 고신의 설립목적은 회개운동과 평양신학교의 신학적 전통계승과 신사참배 반대자들의 위상과 가치를 이어 온 것입니다. 조선신학교가 진보주의적 사관을 견지함으로서 평양신학교와의 단절을 의미하였다면 고려신학교는 정통주의적 보수주의를 신앙함으로서 평양신학교의 연속성을 의미하였습니다. 이를 위해 만주 봉천신학교 교장으로 재임중인 박형룡 박사를 청빙하였으며 1947년 4월, 송상석 목사가 봉천으로 가서 9월20일, 박형룡 박사와 함께 귀국하였습니다. 1947년 10월14일, 박윤선, 브루스 헌트 교수의 취임식과 함께 박형룡 박사가 “사도적 신학소론”이라는 제목으로 교장 취임강연을 하였습니다. 고려신학교는 구학파의 계승과 더불어 화란개혁주의 전통을 접목함으로서 한국적 캘빈주의 신학체계를 완성해 갔습니다. 고려신학교의 모델은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 기초하였습니다. 웨스트민스터신학교는 프린스톤 전통을 계승한 그레샴 메이첸(Gresham Machen)과 화란개혁주의 전통을 계승한 코넬리우스 반틸(Cornelius Van Til)의 보수적 개혁주의 신학을 체계적으로 정립하였습니다. 1941년 창설된 국제교회협의회(ICCC) 제2차 총회 참석을 위해 1954년 7월29일, 박윤선, 한상동 등 4명의 교려파 지도자들이 미국을 방문하였습니다. 박윤선과 한상동 목사는 맥킨타이어의 훼이스신학교에서 명예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10월 중순 귀국하였습니다. 미국내 극단적 근본주의자이며 분리주의 이상을 지향하는 맥킨타이어와의 교류는 국제적인 신학교로 발돋움 하려는 고려신학교의 미래지향적인 관점에서 조명해야 할 것입니다.
신사참배 교역자와 신사참배 반대 교역자간의 충돌과 불신은 예견했던 일이었습니다. 1946년 12월3일, 진주 봉래동교회에서 개최된 제48회 정기노회에서 일제교단시대 경남교구장 김길창 목사가 노회장에 선출되면서 양측은 대립각을 세웠습니다. 더 나아가 48회 노회는 47회 노회에서 결정한 고려신학교 인준을 취소하고 신학생 추천도 취소하는 결의를 하였습니다. 이에 분노한 한상동 목사는 경남노회가 바로 설때까지 탈퇴한다고 선언하고 퇴장하였습니다. 진해 경화동교회(이약신목사), 초량교회, 문창교회, 부산진교회, 거창읍교회, 영도교회, 남해읍교회와 경남노회 소속 67개 교회가 48회 노회의 결정을 항의하였습니다. 1947년 12월9일, 부산 광복교회에서 개최된 49회 정기노회는 47회노회 결의안을 재확인하고 불복자들에 대한 사과서와 함께 자숙권고안을 결의하였습니다. 일시적으로 탈퇴하였던 한상동 목사가 경남노회로 복귀하고 박형룡 박사가 고려신학교 교장으로 취임하면서 고려신학교 문제는 일단락 되는 듯 하였습니다. 그러나 메이첸주의자 였던 박형룡박사와 한상동 박사간에는 심각한 이론이 있었습니다. 박형룡 박사는 49회 정기노회에서 고려신학교는 이사회와 후원회를 조직하고 전국교회의 원조와 총회 인준의 필요성을 역설하였습니다. 평양신학교가 북장로교, 남장로교, 캐나다장로회와 호주장로교선교회와 교류하였점을 상기하며 고려신학교의 선교회관계와 총회인준을 공식화 하였습니다. 그러나 한상동 목사는 신사참배를 가결한 총회의 인준 자체를 거부하였고, 선교회와의 교류 또한 독립선교회에 한정하여 관계를 설정하려 하였습니다. 박형룡 박사는 고려신학교가 장로교의 정통성을 계승하고 대표적인 장로회 총회신학교로 발전하기 위하여 부산에서 서울로 학교를 이전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한상동 목사는 평양신학교가 서울에 있지 않았지만 전국교회의 대표적인 신학교였으며 총회와의 결탁은 곧 신사참배를 허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강력하게 반대하였습니다. 두사람의 대립은 결국 1948년 4월, 박형룡 박사가 고려신학교 교장직을 사임하고 총회신학교로 이동해 가면서 일단락 되었습니다. 1945년 11월14일, 평북6개노회에서 박형룡 박사는 교회재건 기본원칙을 발표하면서 신사참배 참여자들에게 대하여 중징계를 선언하였습니다. 한상동 목사와 박형룡 목사의 한치의 양보없는 대립은 결국 박형룡 박사가 고려신학교를 떠나게 하는 계기가 되었고, 50%의 신학생 마져 그를 따라 장로회신학교로 옮겨갔습니다. 이로 인하여 1948년 9월21일, 부산 항서교회에서 개최된 임시노회는 박형룡 박사의 사임과 총회인준 거부와 메이첸파 선교사의 교수채용을 이유로 고려신학교 인준을 취소하는 사태가 발생하였습니다. 이에 한상동 목사와 고려신학교는 기존의 경남노회로부터 탈퇴하여 별도의 “경남법통노회”를 조직하고 고려신학교를 지속적으로 운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고려신학교에 대하여 부정적 입장을 가지고 있는 총회는 경남법통노회를 승인하지 않았고, 1951년 5월25일, 부산 중앙교회당에서 개최된 36회 총회에서 경남법통노회 12명의 총대는 총대자격을 박탈당하였습니다.
1952년 9월11일, 경남법통노회는 진주 성남교회에서 개최된 57회 노회에 목사총대 50명, 장로총대 37명이 참석하여 총회와의 결별을 선언하고 “예수교장로회총회 총노회”를 조직하였습니다. 독립의 길을 가는 고려파는 장로교회가 자유주의적이고 에큐메니컬하며 신사참배로 기독정신이 크게 훼손되었다고 보았습니다. 1952년 10월16일, 경남법통노회는 총노회 발회식을 거행하며 이약신 총노회장이 총회로부터의 독립과 아울러 분립을 선언하였습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총노회”라는 명칭의 새로운 고려파교단의 시작은 “진리수호”라는 가장 중요한 핵심원리로부터 “개혁주의 신학확립운동”을 목적으로 하였습니다. 1956년, 6개 노회가 총노회에 합류하였고, 346개 교회, 56명의 목사, 210명의 전도사가 고려파 교단에 소속되었습니다. 고려파의 독선이었을까요? 1960년 10월, 14년간 고려신학교 교수와 교장을 역임한 박윤선 박사마져 고려파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외부적인 이유는 박윤선 박사가 주일 귀국하는 선교사를 택시타고 배웅하는 문제로 발현되었으나 정치적 불협화음이 박윤선이라는 위대한 신학자까지 배척해 버리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한 고려파는 고신교단으로 발전하였고 40만명의 교세로 성장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