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리를 지어 사는 동물의 경우 우두머리를 거역하면
혼란스러운 까닭에 벌이나 개미에게는 왕이 있고, 기러기에는 기러기 황제가 있으며, 말에게는 무리의 우두머리가 있고, 물고기에는 그 무리의 대장이
있다. 하물며 사람의 무리이겠는가.
물고기가 알을 낳을 때, 수컷이 먼저 자리를 잡고 정액을 쏟아 놓으면 암컷이 이어서 알을
쏟는다. 음양의 이치는 자연 부창부수(夫唱婦隨)한 뒤에 생육을 이룬다. 하물며 사람이겠는가.
물고기는 알을 낳아 돌이나 초목에
붙이는데, 반드시 햇볕을 쪼여 반 정도 혹은 전부 마른 뒤에야 새끼가 된다. 햇볕을 쪼이지 못한 것은 새끼가 되지 않는다. 물고기는 지극히
음(陰)한 사물이기 때문에 반드시 양기(陽氣)를 얻은 뒤에야 자란다. 가장 어리석은 하우(下愚)는 사람 중에서 순음(純陰)에 해당하는데도 도리어
양(陽)을 만나기를 싫어하니, 물고기의 지혜만도 못하다.
곤충 중에 물에서 변태하는 것은 모두 날아다닌다.
- 어룡(魚龍)도 나는 종류이다. - 음이 극에 이르면 양이 생긴다. 깊은 연못에 잠기고 진흙탕에 박혀
있을 때는 날개가 생겨 비상하리라는 것을 누가 알겠는가. 천풍(天風)을 타고 득의(得意)에 차서 공중으로 날아갈 때 역시 어찌 스스로 진흙탕
속에서 있었던 일을 알겠는가. 그 공중이 어찌 쾌활한 경계가 아니겠는가. 그렇지만 전신(前身)의 일을 염두에 둔다면 거미줄에 걸리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벌레의 수는 수만 가지인데, 각각 자기 때에 따라 산다. 날기도 하고, 울기도 하며, 뛰기도 하고, 헤엄치기도 하면서
각각 그때의 일을 마친다. 그것들이 있고 없고는 천지(天地)에 상관없지만, 천지는 아울러 받아들여 그것들을 존재하게 해 주니, 이것이 천지가
위대한 까닭이다. 사람이 만물의 영장이지만, 곤충과 마찬가지로 각각 그 때를 가지고 있다. 지위를 얻어 도를 실천하면 그것이 나는 것이고,
문장을 갖추어 언론이 좋으면 그것이 우는 것이며, 공적이나 이름이 영달하면 그것이 뛰는 것이고, 세상에서 물러나 멀리 숨어 사는 것은 헤엄치는
것이다. 날지도 울지도 뛰지도 헤엄치지도 않는다면, 지렁이나 지네, 땅강아지의 삶이니,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곤충은 모두 다섯 가지
색깔로 문채를 내지만, 이것은 그들 몸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태어나면서 반드시 갖추고 있는 것이니, 바탕이 있으면 반드시 문채가 있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다. 그러므로 성인은 문장으로 아름답게 꾸미면서도 사치스럽게는 하지 않는다. 짐승과 곤충의 소리 역시 문채이기 때문에
고저(高低)와 장단이 있어서 마치 사람이 노래를 부르는 것과 같다. 세상에 자신의 삶을 야(野
촌스럽고
거침)에 국한하면서 굳이 그 문채를 모두 없애려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는 이치에 통달하지 못한 것이다. 그렇지만 문채에 지나쳐서
바탕을 멸시한다면 바탕이 없어질 것이니 문채를 어디에 쓸 것인가.
학충(蠚虫
독을 쏘는
벌레)은
- 《본초(本草)》에는 그 집으로 인해 천장자(天漿子)라고 하였으며,
작옹(雀甕)이라고도 하였다. 사람을 쏘는 푸른색 벌레로, 속명(俗名)은 ‘쐐기(쏘약이)’이다.
- 8월이 되어 가을 기운이 이르면 울기 시작하는데, 그 소리는 ‘집지리〔執地里〕’라고 운다. 이를 어떤 농사꾼이 한문으로 번역하면
‘집을 짓는다는 뜻인 조옥(造屋)’이라고 하였는데, 가을이 되어 고치를 짓고 칩거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말은 사물과 함께 생겨나 형성되었으니
한어(漢語)와 다르다고 해서 굳이 바꾸려고 할 것은 없다.
예를 들어, 5월 초 매미가 울면서 ‘배창옷’이라고 하는데, 한문으로 번역하면
‘포창의(布氅衣)’라는 말로, 포창(布氅)을 입을 때 운다는 말이다. 8월 늦은 매미가 울면 ‘득을어음’이라고 하는데, 한문으로 번역하면
‘들어옴〔入〕’이라는 말로, 농민들이 추수할 때 운다는 뜻이다. 이런 종류가 대체로 많다.
꿀벌은 아침저녁으로 반드시 몇몇 벌이 문
좌우에 서서 날개를 떨어 긴 소리를 내는데 이는 군문(軍門)을 여닫는 것과 같다. 개미는 이웃 개미집을 침탈할 때면 반드시 먼저 수십 마리의
개미가 그곳의 허실(虛實)을 탐지하고 돌아가며, 그런 다음 마침내 대진(大陣)이 행군한다. 이는 군문의 정탐에 해당한다. 그 이치가 엄격하고
철저하여, 이를 아는 사람은 장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물 안 진흙 속에 마치 붉은 실처럼 작은 지렁이가 모여 서서 머리를
흔들고 있다가 사람이 휘저으면 바로 움츠리고 잠깐 사이에 다시 나타난다. 그들이 어지럽게 흔들 때에는 매우 득의양양하지만, 그렇다고 그것들이
어찌 고래가 춤추면 파도가 일며, 곤이(鯤鮞)가 변화하면 바다가 움직이는 것을 알겠는가. 이것이 대소(大小)의 구분이다.
메추라기는
진디등에를 속이고, 진디등에는
유수(濡需)를 속이며, 유수는 황설(黃
)을
- 좀 - 속인다. 모두 자기만 알고 다른 동물은 모르는 것들이다. 자기만 알고 다른
동물을 모르는 것들은 더 큰 존재들의 웃음거리가 될 뿐이다.
매미의 넓적다리에도 사마귀
-
진드기(진도) - 가 있다. 어떤 동물이든 그를 괴롭히는 것이 없겠는가. 매미는
사마귀가 있다고 해서 그 맑은 소리를 그만두지 않는다. 이것이 어찌
“성냄을 끊어 버리지는 못하나, 그 명예를 떨어뜨리지 않는다.〔不殄厥慍 不殞厥問〕”라는 경우가
아니겠는가. 매미도 나의 스승이다.
대합 껍질 안에는 녹두 크기만한 게가 들어 있다. 두 눈동자를 곧추세우고, 뱃속에는 자주색 알을
품었다. 이는 게가 눈 뜨고 살아 있는 사이에 자손이 살 계책을 세웠던 것이니, 어찌 평온을 유지하며 스스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저 게를
넘어선 사람은 예부터 지금까지 몇 사람뿐이었다. 누구는 “영웅호걸이면 쾌히 벗어날 수 있다.”라고 하는데, 그렇지 않다. 성인(聖人)만이 벗어날
수 있다. 그 아래로 주돈이(周敦頤)ㆍ이정(二程)ㆍ소옹(邵雍)ㆍ주자(朱子)가 벗어났을 뿐이다. 그 나머지는 아무리 빼어난 영웅호걸이라고 불렸어도
게가 대두(大豆) 크기만한 수준이었을 뿐이다. 신하로는 장량(張良)ㆍ제갈량(諸葛亮)ㆍ곽자의(郭子儀)가 벗어났다고 평할
만하다.
누에알은 극히 작지만 딱딱하다. 때가 되면 구멍이 저절로 열린다. 또한 촘촘하지만 구멍이 막히지 않는다. 실리(實理)는
망녕됨이 없으니, 지극히 정(精)하기 때문이다. 군자가 “정(精)함은 금석(金石)을 관통한다.”라고 했는데, 단순히 비유로 한 말이 아니라 그
이치가 정말 그러하다.
서캐는 처음 생겼을 때는 먼지 같지만, 주둥이와 발, 촉수와 눈이 모두 갖추어져 사람을 물 수도 있다.
이것이 조물주의 기교이며, 공정하고 사사로움이 없기 때문에 세밀함이 오묘한 경지에까지 들어갈 수 있다. 조물주가 사사로운 생각에 집착하고 있다면
어찌 이를 만들다가 실수하는 정도에만 그치겠는가.
벼룩과 이가 피부를 물어 가려우면 손가락이 절로 반응하여, 의식하지도 않은 채 한
손가락을 곧장 집어넣으면 반드시 잡고 실수가 없다. 간혹 마음에 화가 나거나 괴로워하여 꼭 잡아야겠다는 의식이 생기면 다섯 손가락을 모두 움직여
백 번 잡더라도 하나를 못 잡는다. 사사로운 의도를 가지고 계산하는 것이 이처럼 두렵다.
순(舜)이 마치 평생 그러할 것 같았다든가 임금이 되어서도 상관하지 않았던 일, 문왕(文王)이 천하의 3분의 2를 차지하고도 은나라를 섬겼던 일, 공자(孔子)가 떠나고 머물고, 오래하고 빨리 가고를 적절하게 했던 일은 가려우면 손가락이 절로 반응하여
한 손가락으로도 실수가 없었던 경우이다. 〈태서(泰誓)〉에
“때가 되었으니 놓쳐서는 안 된다.”라는 것은 다섯 손가락을 모두 움직이는 상황에 가깝다.
〈태서〉는 늦게 나왔으니, 이런 말은 결코 원래의 본문이 아닐 것이다.성인(聖人)보다 아래지만
하나라도 터득했던 경우가 있다.
장량(張良)이 패공(沛公 유방(劉邦))을 떠나서 적송자(赤松子)를 따르겠다고
했던 일, 제갈량(諸葛亮)이 유비가 세 번 방문하자 벼슬에 나아갔고, 여섯 번 출전했다가 죽었던 일, 곽자의(郭子儀)가 투구를 벗고 오랑캐 진영으로 갔으며 황제의 명이 있으면 와서 조회를 했던 일은 벼룩과
이를 잘 잡은 경우이다.
벼룩과 이는 단지 물고 빨기만 한다면 가려운 것이 그 얼마나 되겠는가. 그런데 이놈들의 성질은 때를 만나
기분이 들뜨면 진중하게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여기저기 함부로 뛰어다니며 슬금슬금 마구 기어 다닌다. 사람들로 하여금 음식을 먹을 때 짜증을
내고 저녁 내내 잠 못 들게 하는 것이 이것들이다. 사람으로서 이 두 벌레 같은 잗단 경거망동을 벗어날 수 있다면 군자의 무리일
것이다.
대저 고요함은 도(道)에 가깝다. 그렇지만 정(靜)이란, 쇠약하고 기가 죽어 어찌할 수 없이 멍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천만 명이라도 내가 가서 대적하겠다는 기상이 있고 마음이 안정되고 이치가 분명하여 고요한 상태이다.
소인은 마음이 불안정하고 이치가 불분명한 까닭에 경거망동하고 기력을 허비한다.
영(𧕍)은 일명 회(蛔)라고도 한다. 사람 뱃속에
있는 세 시(
)의
하나이다. 냄새가 나쁜 데서 태어나 냄새가 나쁜 데서 성장한다. 짙은 음기에 숨어 있고 천양(天陽)을 보지 않는다. 회(蚘)와는
- 촌백충(寸白虫)이다. - 친구뻘 되고, 정(虰)과
- 가는
지렁이이다. - 같은 무리이다. 사람이 맛있는 어육(魚肉)을 먹으면 그 기름진 맛을 만끽하고, 맵거나 짜고 신 음식을 먹으면 고개를
숙이고 입을 오므린다. 사군자(使君子
비위를 다스리는 약재)를 만나면 죽고, 얼마 있다가 어육을
만나면 다시 살아난다. 사람을 날로 초췌해지게 하면서 추한 것들이 더욱 번식시키고, 장부(臟腑)가 허냉(虛冷)해짐에 미쳐서는 더욱 흉한 짓을
저지른다. 필경 사람을 죽게 만들고 자기들도 모조리 죽는다. 처음에는 사람에게 기대어 살다가 끝내 사람을 죽이고 자신도 멸종하니, 음(陰)에
속하는 부류는 어찌 이를 통해 스스로 깨닫지 않는가.
벌레는 추한 종류이다. 순전히 음(陰)이기 때문에 새끼를 배고 기를 수 없다.
반드시 나비로 변해서 양(陽)을 받은 다음에야 알을 낳는다. 누에나비가 알을 퍼뜨린 뒤에 반드시 수컷 나비가 앉아야만 그 뒤에 성란(成卵)이
되고 망치지 않는다. 다른 곤충이 알을 낳을 때에도 응당 이와 같다. 소인은 군자를 제거하고 혼자만 살려고 하니, 어찌 지혜가 곤충만도 못한
경우가 아니겠는가. 군자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 어찌 생명을 낳고, 군자를 앉게 하지도 않았는데 어찌 생명을 완수할 수 있겠는가. 더러
나비로 변하면 득의에 차서 스스로 변화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더러 수컷 나비를 받아들여 앉게 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여 알을 망치게 되니,
슬프도다.
고치가 나비가 된 것을 잡아다 뜰 나무에 매어 놓으면, 며칠 되지 않아 수컷 나비가 날아와 함께 교미하여 알을 낳는데,
지극한 정(精)이 서로 감응한 것이다.
부암(傅巖)에서 제방을 쌓고 있다가 꿈에 들어가거나, 위수(渭水)에서 낚시를 하다가 재상에 천거되었던 이야기는 같은 이치이다.
오징어〔烏鰂魚〕가
뱃속에 먹물을 담고 있는 것은 먹물을 뿜어 자기를 숨기려는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그 먹물을 믿고 물에 떠서 먹물을 토해 내면 까마귀는 그
먹물을 보고 오징어를 낚아챈다. 스스로 작은 꾀를 믿다가는 스스로 낭패를 보기 딱 알맞다. 또 까마귀가 먹물을 뿜는 오징어를 잡았을 때 다리가
긴 오징어가
- 오징어 중에서 다리가 긴 것을 남(纜)이라고 부른다. - 까마귀 발을 휘감아
물에 빠트리면 까마귀는 죽는다. 까마귀가 낚아채는 능력을 믿는 것이나, 오징어가 먹물을 믿는 것이나, 어리석기는
한가지이다.
개어(魪魚)는
- 가오리(介五里) - 형체가 넓고 평평하며 비늘이
없고 미끈미끈해서 그물로 잡을 수가 없다. 그런데 꼬리 끝에 화살 같은 것이 달려 있어서 모두 낚시 미늘이 된다. 그것으로 사람을 찔러 자기를
지키려는 작전이지만, 미늘이 그물에 얽히면 풀 수가 없어서 사람에게 잡힌다. 화살 같은 꼬리로 자신을 지키는 것은 본시 안 될 것이 없으나,
미늘이 없는 화살이라면 자신을 지킬 뿐 어찌 그물에 얽히겠는가. 기필코 사람을 해치기 위해 미늘을 만들었다가 도리어 자신이 걸리는 것이다.
사람이 가오리의 미늘 같은 것을 만들지 않을 수만 있어도 도(道)에 가까울 것이다.
사어(鯋魚
상어)라는 물고기도 그물로 잡을 수 없다. 그런데 그 이빨이 모두 미늘 같아서 그물에 걸린다. 만일 당초
이빨이 있는 것이 단지 자기가 먹기 위해서일 뿐이라면 어찌 자기에게 스스로 화가 되겠는가.
준치가 가시가 많은 것은 스스로 그 살을
단단하게 하려는 것이다. 사람들은 가시가 많은 것을 한탄하는데, 그것이 과연 준치의 죄란 말인가. 관장(官長)이 백성을 긁어 먹다가, 백성들이
더러 뻗대며 먹을 것을 내놓지 않으면 백성들에게 가시가 많다고 한탄하는데, 그것이 과연 백성들의 죄란 말인가.
항우(項羽)가 외황(外黃)을 정벌했을 때 외황 사람들이 순순히 항복하지 않자 항우는 화가 나서 묻어 버리려고
했다. 외황은 당시 큰 준치였던 셈이다.
물고기를 잡아먹어서는 안 된다면, 성인(聖人)이 굳이 그물 짜는 법을
가르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큰 것이 작은 것을 잡아먹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그렇지만 지혜가 없는 것은 의당 먹히게 마련이고, 지혜가
있는 것은 먹히지 않는다. 걸(桀)과 주(紂)가 탕(湯)과 무왕(武王)에게 먹혔으니, 걸과 주도 물고기일 뿐이다. 그러니 사람으로서 먹히는
존재가 되지 않는 경우가 본디 드물다.
하후(夏后 공갑(孔甲))는 절인 용(龍)을 먹었는데, 용이 사람들에게
길들어졌다면 역시 매우 지혜가 없었던 경우이다. 용이 먹히는 것도 당연하지 않겠는가.
전국(戰國) 시대에 서로 잡아먹은
것은 지혜 없는 자들이 지혜 없는 자들을 잡아먹은 경우이다. 그저 힘으로 잡아먹었으니, 이는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은 격이다. 결국 모두
진(秦)나라에게 잡아먹히게 되었으나, 진나라도 지혜가 없어 유계(劉季
유방(劉邦)의 자)에게
잡아먹혔다. 남곤(南衮)의 경우는 금수와 같은 마음으로 조 문정(趙文正
조광조(趙光祖))을
잡아먹었으니 이는 천지의 변고였다.
살무사는 사람을 죽이는 독을 품고 있으니, 자신을 온전히 할 수 있는 계책이라고 할 만하다.
그렇지만 사람이 살무사에게 죽는 경우는 거의 없고, 반면 살무사는 매번 사람들에게 죽는다. 또 살무사가 죽으면 듣는 사람은 서로 축하하며
통쾌하다고 한다. 마치 사람이 죽음을 면하고 통쾌하다고 하는 것과 거의 가깝다. 큰 것은 백화사(白花蛇
살무사의
일종)나 오공(蜈蚣
왕지네) 같은 종류이고, 작은 것은 마두(麻蠧)나 송충이처럼 보기
싫은 종류도 있다. 오색이 알록달록하여 봐줄 만하지만, 독기는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로 무섭다. 어린아이같이 물정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놀라
달아나고 가까이 가려고 하지 않는다.
산골짜기에 기암괴석이 있어도 음산하고 요사스러운 기운이 사람을 엄습하면 그 아래에는 반드시 여우굴이
있다. 이렇게 실제로 속에 가지고 있으면 반드시 밖으로 모습이 드러난다. 사람 중에도 독기로 남을 쏘고 요사스런 기운이 남에게 미치는 자들이
있는데, 아무리 말을 잘하고 재주가 있어도 가까이해서는 안 된다.
“솔개가 날고 물고기가 뛴다.〔鳶飛魚躍〕”라는 말은 시인(詩人)의 감흥이 일어난 것인데,
《중용(中庸)》에서 인용하여 옛사람이 이미 그 의미를 모두 설명했기 때문에 굳이 다시 제기할 필요는 없다. 다만, 솔개가 날며 득의에 찼을 때와
물고기가 뛰며 스스로 즐길 때를 보면 우리 사람들의 마음이 넓어지고 뜻이 맞아 신우(神宇
정신)도
편안해져서 쾌활하게 만족한다. 몸이든 세상이든 둘 다 잊는 기상을 조용히 관조하고 즐기며 감상하면서 모르는 사이에 마음이 안정되고 정신이
왕성해진다. 다른 사물은 이런 데 비유할 것이 없고, 오직 햇기러기가 줄을 지어 울며 날아가는 것이 또한 사람들의 세상살이에 대한 상념을 모두
잊게 만든다.
곤충류의 형체는 모두 음수(陰數)에 상응하고 양수(陽數)는 극히 적기 때문에, 곤충은 모두 우매하고 천한 동물이
된다.
쉬파리는 사사건건 증오스럽다. 지금 당장 멸종한다고 해도 누가 다시 애석해할 것인가. 그렇지만 여전히 생명이 태어나는 이치가
있어, 음식이 썩으면 구더기가 생겨 쉬파리 종자가 멸종하지 않는다. 그 절통함은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할 정도이다. 구양수(歐陽脩)의 부(賦)에
“이미 그때마다 씨를 무더기로 남겨 놓는다.〔已輒遺其種類〕”라고 했는데, 표현은 단순하지만 의미는
긴절하고, 말은 간략하지만 이치가 갖추어져 있어서 문장이 이런 수준에까지 이를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이(已) 자, 첩(輒) 자,
유(遺) 자, 기(其) 자, 종(種) 자, 류(類) 자가 글자마다 의미에 맞게 제대로 쓰였다. 쉬파리에게 주는
감결(甘結)이자
사형판결문이니, 고금의 작자들을 모두 모아 다시 짓게 하더라도 이 한 구절은 다시 가감할 수 없을 것이다. 절묘할 뿐이다.
7월이
넘어갈 무렵 누런색 작은 잠자리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렇지만 조금 서늘한 기운이 처음 생기고 오랜 장맛비가 걷혀 새로 쾌청해질 때 무리를
지어 날아다니면서 기뻐 춤추니 어느덧 초가을에 볼 수 있는 경치이다. 조물주가 사물을 활용할 때 각각 그 장점을 취하며 모두 다 갖추지는 않는
것이 또한 이와 같다. 이와 같이 만족스러울 때가 곧
“임금의 힘이 나에게 무슨 상관이겠는가.”라고 하는 기상이다. 날짐승이나 벌레들도 이렇게 알아서 울고
알아서 기뻐하는 것이 많으니, 사람도 사물을 본받아 그 실정을 깨닫는다면 또한 심성(心性)을 기를 수 있을 것이다.
물고기가 헤엄칠
때는 무리를 나누고 대오를 따로 하여 큰 것은 큰 것끼리 작은 것은 작은 것끼리 어울리고 서로 섞이는 법이 없다. 큰 물고기가 작은 물고기를
만나면 여유 있고 침착하게 서로 어울려서 마치 통솔해서 함께 가는 듯하다. 작은 물고기는 그렇지 않다. 큰 물고기를 만나면 그때마다 놀라서
옆으로 숨어 버리고, 차라리 혼자 다닐지언정 한순간도 같이 다니는 적은 없다. 이 어찌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아니겠는가.
내가 큰 물고기를
보았더니, 늘 깊은 여울이나 연못에 있고 가볍게 출입하지 않으며, 서둘러 먹이를 찾지 않는다. 마음에 내키면 뛰어오르지만 늘 고요하다. 그러므로
낚시나 그물이 화를 입힐 수 없고, 곤충이나 짐승이 해를 입힐 수 없다. 더러 지극히 신통하여 구름을 부르거나 비가 오게 하는 것도
있다.
작은 물고기는 가볍고 빠르며 제멋대로 군다. 들락날락하며 자리를 바꾸고 옮겨서 일정하게 사는 데가 없다. 먹이를 너무 급하게 찾고,
매번 낮은 여울이나 도랑을 좋아하며 밖으로 모습을 내보인다. 그러므로 낮에는 물총새가 습격하고, 밤에는 수달이 침학하며, 낚시나 그물의 먹잇감이
되고 재빨리 도망치지도 못한다. 연못을 막고 물을 퍼서 고기를 잡는 사람이라도 만나면 멸족(滅族)에까지 이르게 되니 진실로 딱한
노릇이다.
작은 물고기가 한창 대오를 따라 유유히 헤엄칠 때는 머리를 모으고 꼬리를 흔든다. 버드나무 꽃핀 물가에서 물결을 타고, 소나기
내리는 여울에서 흐름을 탄다. 뛰어서 풀벌레를 잡아먹고, 흐린 진흙탕 속에서 지렁이를 삼키니, 어찌 생계를 얻은 것이 아니겠는가. 끝내 고기
잡는 어구에 걸려 버들가지에 몸이 꿰이는 신세를 벗어나지 못해도, 그중에 어찌 크게 될 수 있는 씨가 없겠는가. 큰 데를 보고 잘못 놀라서
스스로 작은 데를 좋아하다가, 필경 작은 것 때문에 화를 입어도 깨닫지 못하니, 그것도 매우 사리에 어두운 것이다. 저 큰 물고기도 처음에는
작은 물고기에서 성장한 것이다. 그러니 물고기의 본성에도 무리를 초월하고 대오를 벗어나 일찌감치 큰 것을 배우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태어나서 다른 사물에게 바라거나 구하지 않는 것이 매미이다. 바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다른 사물과 경쟁하지 않는다. 긴
여름에 천시(天時)를 얻어 맑은 그늘을 선택하여 자기의 즐거움을 노래한다. 서늘한 바람이 이르면 변화에 따라 자연으로 돌아가니, 어찌 신선의
본성을 가진 존재가 아니겠는가. 어떤 사람은 “그 울음소리가 너무 시끄러워서 싫다. 소리가 없다면 좋겠다.”라고 말한다. 나는 이렇게
대답하겠다. “그대는 왜 매미소리를 싫어하는가. 소리를 내는 사물이라고 해서 그대가 정녕 다 싫어한단 말인가. 태반이 다른 사물을 해치는
소리이거나, 무엇인가를 구하는 소리로, 밤낮으로 그대의 귀를 시끄럽게 해도 싫어할 줄 모르고, 게다가 덩달아서 그 시끄러움을 부추긴다. 그런데
도리어 매미 소리가 싫다고 하는가.”
매미 중에는 처음부터 울지 못하는 것도 있다. 모습은 같지만 그 매미만 유독 소리가 없다. 잠잠하게
하루 종일 시원한 바람이 부는 푸른 그늘에서 무료히 죽기를 기다리니, 애당초 태어나지 않느니만 못하다. 그런 매미에 대해서는 딱히 할 말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