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교시-실패사례 분석5
시작은 모두 어렵다(Aller Anfang ist schwer)
사례 하나, 귀농 3년만에 두 손을 든 농대 졸업생
98년 겨울, 곡절 많았던 첫농사를 마치고 겨울이 주는 한가로움을 만끽하고 있을 때 멀리사는 귀농 동료 한 사람이 이웃 마을에 비슷한 시기에 귀농한 사람을 데려왔습니다. 서로 통성명을 하고 그이의 표정을 보니 별로 밝지않아 보였습니다. 사연을 들어본즉 그해 생강을 수천평이나 심었다가 큰 실패를 봤다는 겁니다. 저희도 같은 해 3백평을 심었는데 씨앗값만 55만원이 들었으니 그이는 무척 많이 들었을 겁니다. 게다가 생강은 거름요구량이 큰 작물인지라 거름값에 인건비, 제초비 등을 생각만하니 아찔했습니다.
한동안 이야기해본 결과 그이는 귀농 첫해부터 고랭지 채소 재배처럼 투기에 가까운 농사를 선택했더군요. 투기성 농사를 짓는 농부의 마음가짐은 통상의 농부들과는 달리 ‘한 번만 맞아줘라!’겠지요. 더욱이 논 3천평을 밭으로 만들어 총 5천여평에 단일 작목을 심었다니 ‘소량다품종, 자급후 잉여농산물 판매’라는 소박한 농사를 선택한 우리에게는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었습니다. 아마도 우리와는 달리 그이는 농과대학 출신이었으니 나름 자신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밭으로 만든 논을 어렵더라도 다시 논으로 돌리고 처음 몇년간은 우리와 비슷한 농사를 권했으나 별로 수긍하는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다음해 동료로부터 그이가 양배추를 같은 면적에 심었다가 폭락하는 바람에 견디지 못하고 탈농했다는 가슴 아픈 소식을 들었습니다. 아버지가 안계신 고향마을에 어머니가 지켜온 땅에서 처절하게 실패한 농사, 그이도 그이지만 그이 어머니의 마음이 어땠을 지를 떠올리면 지금도 마음이 아려옵니다. 그이의 실패 원인은 무엇일까요? 다들 짐작하시겠지요?
사례 둘, 실패의 지름길, 귀농 직후 대형농기계 구입
저와 비슷한 시기에 귀농한 이들중 영농 첫해부터 귀농자금 등으로 트랙터와 콤바인 등 대형 농기계를 구입하였다가 1~2년내 영농을 중단하거나 사전지식이 없이 중고농기계를 구입하여 운용하다가 잦은 고장으로 과다한 수리비를 지급하는 사례도 몇 번 보았습니다. 더욱이 한 친구는 함께 귀농한 동료의 명의를 빌어 구입한 뒤 기계 대금을 갚지않고 탈농하여 지금은 같은 마을에 살게 된 동료가 대신 빚을 갚고 수년간 마음 고생을 한 예도 보았습니다.
농기계는 차량과는 달리 작동부위가 많고 논밭 등 험지에서 작업하므로 보다 세밀하고 꼼꼼하게 접근해야 합니다. 트랙터나 콤바인 같은 대형농기계는 고가인데다 조작에 익숙하지않을 경우 고장이나 사고로 이어져 인적, 경제적 손실이 발생할 소지가 큰 기계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영농규모와 농업의 지속성 여부를 면밀히 따져봐서 구입에 신중을 기하여야 합니다. 경작농지나 경영규모가 크지 않다면 귀농 3년 이내에는 경운기나 관리기 등의 소형 농기계를 직접 운전하거나 농기계 사용료를 품앗이로 갚는 방법 등도 권장할만합니다.
제 경우는 귀농후 5년간은 경운기와 관리기만으로 논밭을 경운하였습니다. 경작규모가 거의 7천여평에 달할 때에야 43마력 중고 트랙터를 구입했습니다. 그것도 홍성에서 천안까지 21번 국도상에 있는 모든 농기계 수리 · 매매센터를 뒤져서 가격대비 최고의 성능을 가진 트랙터를 사왔습니다. 농가 부채의 많은 부분이 농기계 구입과 유지비지만 아직도 많은 농민들이 너무도 쉽게 기계를 구입하고 또 방치하는 편입니다.
당시 저는 트랙터, 콤바인, 관리기, 이앙기, 경운기등 5대 농기계를 모두 보유하고 있었지만 전체 구입비용은 1천 2백만원으로 40마력대 중고 트랙터 한 대 값에 불과했습니다. 귀농 후배와 공동구입한 이앙기를 빼놓고는 전부 중고를 구입했지만 경운기는 한 달, 관리기는 한 번도 쓰지않은 것을 절반 이하값에 살 수 있었지요. 농기계 구입전에 사전 준비를 철저히 한 까닭입니다. 덧붙여, 차는 눈비를 맞혀도 트랙터, 콤바인 등 농기계는 눈비를 맞히지 않고 농기계고(庫)에 고이 모셔 둡니다. 농기계는 작동 부위가 노출된 곳이 많아 방치해두면 수명이 급격히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사례 셋, 사사건건 지역과 충돌하던 어떤 도시인
99년 이른 봄에 어느 귀농인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로드니킹 사건으로 촉발된 LA 흑인 폭동의 여파로 재산상의 피해는 물론 심신이 쇠약해진 상태에서 귀국한 뒤에 아는 이에게 재차 사기를 당한 뒤 단신 귀농한 경우였습니다. 사정이 워낙 딱했기에 일주일간 함께 하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당시 이 친구는 몇몇 귀농 동료와 품앗이로 일을 했는데 나중에 동료, 지역민과 큰 갈등을 일으켰습니다. 이유인즉 자신이 도와준 만큼 갚지 않았다는 겁니다. 얼마나 험악하게 행동했는지 저는 그때의 일을 일컬어 ‘로터베이터 김 사건’이라 부릅니다.
그뒤에도 그이는 비슷한 행보로 마을과 지역에서 유명인(?)이 되었습니다. 이를테면 지역 농협에서 도시의 기준으로 일처리를 요구하며 자신의 권리를 강도 높게 주장하는 것입니다. 저도 도시에서는 프로소비자(pro-sumer)를 자처하며 '소비자는 봉이다' 라는 책도 썼지만, 시골에는 시골 특유의 법clr이 있음을 알아채고 그 흐름에 맞추었습니다. 시골은 철저히 관계중심의 사회입니다. 그이는 시골사회에 녹아들기도 전에 다른 방식을 요구했고, 그게 먹혀들지 않고 곳곳에서 막히고 부딪치자 급기야 떠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도시에서 누리던 즐거움, 특권, 혜택, 습성을 도시락(都市樂)이라고 규정하여 '도시락을 버리면 시골살이가 편안하다'는 이야기를 자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