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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 弼세필16대]甲寅~
(增)증의 양자 아들로 字는 伯勳백훈 으로 자호로는 임헌이시다.
公은 기량이 넓고 神色신색이 엄숙하고 단정 했다 증직으로 일찌기 병조참의가 되고 또 음덕으로 충순위 승의부위가 되어 甲午년에 병과급제하고 茂戌년에 영시가 되어 있을때 公에게는
좋은 (馬)말 한필이 있었다 이를 두고 재상 尹元衡윤원형이 공이 가지고 있는 말이 탐이나자
그말을 내게 주면 높은벼슬을 주겠노라 하니 公이 화색이 변하여 윤원형에게 꾸짖기를 대장부가 일을행함에 마땅히 靑天白日같이해야 함이기를 내어찌 말을 뇌물하여 벼슬을 하리""하고는 칼로 그말의 목을 베어버리고 낙향하여 山壽산수로 늙으니 자호를 (林軒)임헌으로 이름 했다. 조정의 부름을 받고 경상좌도 병마 절도사로 영천에 재직할시에 우리 영일정씨 족보를 판액하여 영천 임고서원에 보장했으나 임진왜란때 화재로 손실되었다.
公께서 일평생을 포은선조의 뜻과 갇이 굳건한 밝은 선비의 정신으로 살다가 73세의 수로 돌아가시니 왕의 제문에"말하기를"짐이 공손히 생각건대 포은은 고려가 망하니 절개를 지켜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公또한 짐이 여러번 벼슬을 내려 시험하여 평가함이 公의 명성과 공적이 이미 드러났도다 내 그대를 가상히 여겨 반별이 높은 벼슬을 그대에게 변경의 중직을 특별히 주니 공은 알겠는고....했다. 또한 중신들의 제문에도"..문충공의 후손에 재상의 반렬에 저 누구가 있는고 운운하니 그 시기의 융성 함과 은사를 포숭하는 법은 가히 공의 영혼에 밤이 새도록 울었도다"...했다.
임헌공의 배위는 강양이씨 참봉 호의 따님이시고 1남2녀를 두었다 아들은 萬齡만령 이다.
*임헌공 와룡정*
[禮 棨예개 15대]1523~1586[형양공파]
자는 정직.으로 참봉 강의 아들로 증직이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이다.
[宜 藩의번 17대]1560~1592*형양공파*
자는 위보요 호는 백암으로 호수공 세아의 장남으로 태어나 학문에 힘쓰고 효행이 지극했다.
책을 읽고 학문에만 열중한 나머지 백암공께서 하루는 마당에 있는 소를 보고 종에게 저 소는 누구의 소냐고 하문하니 종이 말하기를 도련님 당연히 우리 소입니다 하였다 한다. 1585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문과장원하여 성균관 생원되고 성품이 효성이 지극하며 지조와 절제가 있었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생 안번과 뜻을 함께하여 부공의 명을 받아 격문을 지어 의병군을 모집하여 벗들과 힘을 다하여 부공을따라 영천 복성을 하고 이어 문천 회맹에 참가하여 경주 전투에 나아가 아버지가 왜적들의 가운데에 빠지자 겹겹이 에워싸인 적진 속으로 들어가 용감무상히 싸우다 벗들과 종노 억수와 함께 전사 하셨다.[자세한 설명은 시총에 따로 실었다]
사후에 병조좌랑에 추증되고 이어 좌승지.이조참판에 추증하여 왕이 명하여 충효의 정려를 내려 "충효각"이 세워 졌다.
백암공이 후사가 없이 전사 하시자 부공의 명으로 막내동생 수번의 둘째아들 호례가 양자되었다.[참고문헌=최벽남일기.김치원일록.등등에 실려있다.]
*해수석으로 만든 백암공의 묘비
[自 源자원 9대][감무공파]
경상도사를 거처 장례원 판결사를 지냈다.
[自 洋자양 9대][감무공파]
1444년 형조좌랑 1457년 원종공신에 책록되고 강릉 대도호 부사.중추부 첨지사를 거처 이조참의에 이르렀다.
[自 濟자제 9대][감무공파]
시호는 威襄위양으로 전주부윤에 오르고 숭록대부가 되고 후에는.의정부 우찬성.의금부 판사
에 추증 되었다.
[自 淑자숙 9대][감무공파]
송강 철의 아버지 유침의 조부 이시고 벼슬은 김제군수를 역임하고 증손 철의 推恩추은 으로 이조판서.지의 정부사에 추증 되었다.
[滋 자]1515~1547[감무공파]
자는 敏古민고.호는 淸士청사로 송강 철의 백형으로.1540년 진사로서 식년문과에 병과급제
1544년 정언이 되고 1545년 이조정랑으로 을사사화때 大尹대윤 윤임의 처남이라 하여 소윤에 의해 광양으로 유배되고 다시 경원으로 이배 도중에 죽었다.
[安 藩안번 17대]1574~1630[형양공파]
호수공의 셋째아들로 노항에서 태어났으며 자는 영보로 임란때 부공과 백형을 따라 영천성 전투 경주성 전투 화왕산 전투에 참가하여 많은 전공을 세우고 부공과 함께 팔공산.문천.화왕산.회맹에 참가 하고 전공의 공상은 부공 호수공의 뜻에따라 받지않고 1605년 무과에 응시하여 장원하여 용양위부사과 포이포만호를 역임하고 있었으나 상부의 부정부폐의 부당함과 동생 수번(호군공)이 임금에게 직간하다 유배길에 오르니 벼슬을 버리고 영천 북 대전리로 이거하여 살다가 돌아가니 장지는 처음 하천에 묘셨다가 후에 아들 양산군수 호인과 호문께서 울산 덕하리에 화산권씨와 함폄이장하고 묘비문은 대군사부 쌍봉 극후가 지었다.
[守 藩수번 17대]1580~1621[형양공파]
자는 정보이고 호수공 세아의 넷째아들로 임진란이 일어나자 백형 의번과 중형 안번이 의병에 출전하자 둘째형 유번과 함께 어머니를 모시고 기룡산에 들어가 가족을 보호했고 1603년 무과에 장원하여 내금위장을 역임.난공2등에 책록되고 1605년 감포만호.재포만호.무의만호를 거처 유배되어 풀려나 충좌위후부장.용양위부사과를 거처 롤도만호.부호군에 올라 신무기를 만들고 신병법을 보급하여 연마하게 하니 왕이 크게 기뻐하여 내금위장 종2품에 승진.하여 순찰사의 청에 의해 전국 병영을 사열하며 순시중에 남방 병비를 보강하고 경상좌도 병영에서
병으로 생을 마첬다.
[三 戒삼계 ]1556~1622
자는 덕신으로 망모당 삼외의 동생으로 임란시 형 삼외와 의병을 모아 문천회맹에 참가하고
영천복성전.창암전투.뒤이어 팔공산.화왕산회맹에 참가하여 많은 전공을 세우고 전란 평정후
에는 학문에만 전렴하였다.[선무원종공신에 녹훈 되었다.]
[억 17대]?
자는 태로.호는 완계이며 어모장군 설천공 경희의 장남으로 전력부위 겸 사복을 지냈고 公의 효행이 지극했는데 어머님이 실신하시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짜내어 어머님을 공양하여 살아나시어 어머님께서 한겨울에 잉어가 먹고싶다 하시니 公께서 한겨울에 모든물이 깡깡얼어 있어 밤새도록 걱정하여 기도하며 날이새자 연못에 나가보니 크다란 잉어 한마리가 얼음을 뚤고 뛰어올라 와 어머님께 공양했다 전하고 公이 임종시에 동생 (岑)잠에게 일어기를 너는 내가 없으도 어머님께 하는것을 나와 갔으니라 하고 눈을 감았다 한다.
자서로는 세효록과 감물록이 있으며 1614년 효자정려가 내려 정려각이 있다.
비문은 족손 지수 규양이 짓고 정려각 기문은 양산 이매가 지었다.
*岑잠=1535~1623 억의 동생 자는 주로 호는 매헌이며 진력부위를 지냈다.
[應 瑞응서 17대]?
평구도 찰방 차성의 증손으로 자는 군길이요.호는 학남이시다 1559년 정시무과 급재하여 훈련원 정 이되었고 임진왜란 당시 영천복성시 권응수 휘하의 선봉장으로 성벽을 비호같이 뛰어넘어 적군에 좌충우돌하여 닥치는 대로 참하고 명원루로 도망하는 적을 화공으로 섬멸시킨 용사였다.
연이어 경주전투.의흥.소계.의성.안동.비안등 전투에서 많은공을 세웠고 전란후에 선무원종2등훈에 봉작되었고. 영천 삼창 백의사에 제향되었다.
[碩 男석남 17대]1561~1592
참봉 강의 증손자로 字는 대경.호는 충효재 어려서 부터 효행과 학행이 남달랐으므로 아버지 승윤이 돌아 가시자 여묘살이를 마쳤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에 참가하여 많은 전공을 세우나 경주전투에서 의진들과 함께 힘써싸우다 전사 하셨고 후사없이 돌아가시니 족자 嗣明사명을 양자 들였다.
저서로는 충현록이 있고 비명은 정재 류치명이 지었다.
[應 聖응성 18대]1563~1644(1파)
조선의 무신.첨지중추부사 담의 셋째아들로 1583년 무과급제한 뒤1588년 병조판서 李山海 이산해에게 발탁되어 수문장이 되고 1592년 임란때 청하현감으로 왜군과 싸워 전공을 세웠다.
1601년 성주목사.다음해에 전라우도 수군절도사를 거처 지중추부사.도총관.포도대장을 겸임 했었다 1630년 전라도 병마절도사 1632년 지중추 부사 1636년 병자호란때에 (2파의 요산공 호례)와 함께 왕을 남한산성으로 모셔 보필했다.
이후 80세의 노령으로 은퇴하여 노인직으로 숭정대부에 올라 우의정에 추증됬다.
[信 道신도 17대]1581~1681]
참판 희윤의 아들로 자는 돈부이고 忠충을 겸비한 장군이다
타고난 성품이 영민하고 굳굳하며 도량이 넓고 원대하여 바람을 쫓고 구름을 능가하는 무술의 기품이 있어 활을 쏘아 백보 밖에 있는 버들잎을 뚫는 재주를 가졌다한다.
1618년 무과에 합격하여 무술에 힘써 입신출세 하여 동지중추부사에 올랐으나 광해군이 인목대비 김씨를 폐모로 정하자 公은 의리에 맞지 않는 일이라고 하여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와 학문에 더욱 연마하고 인조반정이 일어난 뒤 조정의 부름을 받고.오위도총부 부총관에 올라 병자호란이 일어나 남한산성 동문을 지키며 적과 사생결단을 지어며 싸우고 왕을 위급함에 구출하나 최명길 좌상이 오랑케와 강화조약을 논의 한다는 말을 듣고 울분을 참지못해 어찌할줄 몰랐다다 한다 그러나 인조대왕은 전세는 뒷전 치더라도 그 충성된 마음과 노고를 가상히 여겨 호종공신으로 1등공신훈을 내리고 가선계제에 올려 동지중추부사에 발탁하고 父.祖.증조부.3대에 증직을 내렸다.
公께서 1643년 5월17일 장연부사 임기 도중에 득병하여 향수63세 일기로 마치시니 인조대왕께서 심히 슬퍼하시며 부의를 후이 내려 예모를 갖추게 하고 예관 곽홍지를 부러 친히 제문을 내려 조의한 글에는"숭정16년 계미9월 임진朔 초4일 전 부사 정신도의 영전에 유제 하노라.
짐이 생각컨데 靈령은 씩씩한 자질과 굳센 무인으로서 가성을 떨어뜨리지 않았고 항상 다섯 무리를 거느렸도다.일찌기 과거에 올라 임금을 섬김에 어두운때를 만나 재주를 버렸으니 경은 참으로 불후 하였도다.~끝자락에는~지난날 공로를 살피니 나의 회포가 슬프도다 관에 祠사 하여 제사를 이루게 하니 이뜻을 령은 알아 주겠는가? 했고.......또 세자사부 대암 최동집공이 만사와 제문을 지어 公의 영전에와 이러기를......"산머리에 우뚝 나선 곰과 표범같은 자질로서 요즘 보기 드문 웅건한 기상과 절개는 뭇 사람의 추앙을 받았도다.~.......끝자락에...
이름이 구천에 통달하니 사랑과 은해가 두터웠고 벼슬은 2품의 영화를 누렸으니 藩離번이를
진달 하였도다 영화로운 제물이 (하늘)임금으로부터 내리니 황천길이 고쳐지는 듯 하건마는
한스럽도다.선비와 백성들의 슬픈 한을 맺었도다 글을 봉하여 다시 아득한 공의 지난 일들을 엮어 보내니 심상한 사사로운 인정을 위함이 아니로세." 했으니 정공의 위상이 과히 알아듣겠다.
[亨 道형도 17대]1585~1649
참판 희윤의 아들 字.태부.무과급제.병자호란 호종1등공신 진도군수를 역임함...
[就 道취도 17대]1596~1660
字;정보.호는 금오. 형도의 동생 1620무과..병자호란 호종1등공신...
[良 弼양필 17대]1579~1661
*창대 대임의 장남 字;자경.1605년 정시무과..선무랑 여절교위 주부.
[四 象사상17대]1563~1623
*자는 여섭.호;우헌.삼변의 아들로 지산선생 조호익이 문하생 여헌 장현광 문하에 종유해
입암정사에서 강마하고 여헌 선생이 도우로 하였다.
입암서원에 배향되고 자서로는 우헌실기가 있다.
*여헌 장현광. 우헌 정사상.정사진 형제를 모신 입암서원
[삼변.삼서.삼고.삼효.삼외.16대;사물.사악.사진.사명17대]
5파 문비의 후손으로 임란의병 참가 문천.팔공산.화왕산 회맹에 참가하고 조선의 문신들 이시다.
[四 勿사물 17대]1574~1649
참판 삼외의 장남으로 자;역현.호;곤봉이며 정구.장현광의 문인이며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흥해에서 아버지를따라 의병에 참가하여 군량미를 수합하고 왜적과 싸우며 많은 전공을
세우고 화왕산 회맹등 참가했다. 1613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벼슬에는 뜻이 없었고 오직 경주에 내려와 동생 극후와 함께 덕연정을 짖고 학문에만 힘써다.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다시 의병을 일어켜 상경하다 화친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해산하였다.전란을 겪은 뒤 학궁이 무너지고 기강이 해이하여지자 향리의 유생들과 규합해 학궁을 세워 사풍을 일으켜 민심을 바로잡은 인물로 학행으로 계공랑 사도시 직장에 증직 되었다.
저서로는 곤봉집.도통지.진방명현록 등이 있고 8대조 공조판서 광후의 비문을 짓기도 했다.
[克 後극후 17대]1577~1658
조선의 학자로 곤봉공 사물의 동생으로 字;효익.호;쌍봉이다.
여헌 장현광 한강 정구의 문인.1634년 핫행으로 천거받아 동몽교관으로 임명되나 불응하나 곳 바로 참릉참봉이되고.또 다시 대군사부가 되었으나 수개월 후 노환으로 물러나 형 곤봉공과 덕연정에서 일평생 학문에만 열중하다 별세했다.
*수재정*경주 안강 하곡리
[好 仁호인 18代]1597~1655
*진주목사 양계공 호인의 정자(양계정자)
호수공 세아의 손자이자 용양위 만호 안번의 장남으로.字는 자견이요 號는 양계이다.
5세때 이미 할아버지 호수공에게 글을 배워 문장이 범상치 안아 조부 호수공께서 명하시어 진외숙 이신 손모당(손처눌)에게 나아가 글을 배우니 영특하여 한자를 가리키면 둘의 이치를 깨닫고 발문하니 손선생께서 매우 좋아하셨다한다 뒤이어 여헌 장현광에게 나아가 문사를 더욱 넓이고 문장과 (才行)재행이 탁월하였다.
1618년 진사시에 합격하나 당시 광해군의 시끄러운 정치에 마음을 두지않다가 1627년 식년문과 병과로 급제하니 성균관에 들어가 벼슬하고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영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종제 호의.호신등을 대리고 관군을 도우고 상경도중에 화친햇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통곡하며 인조임금을 호위하고 있던 동생 호례에게 편지를 보내 원통해 했다는 기록이 양계문집에 있다.
이어 여러고을의 수령으로 임명되어 동래.를 거처 양산군수로 임기수행시 향서당을 열어 노소와 함께 글을 읽게 하는등 백성들에게 선정을 배푸니 公이 떠난후 군민들이 선정비를 세워 公의 공로를 보답했다.이 선정비는 지금도 양산향교에 보관되어 있다.
언이어 함안군수를 거처 진주목사에 부임되니 백성들이 임진왜란이후라 글은 멀리하고 말따기와 활쏘기에만 놀아나니 공이 여기에 진주향교를 지어 글 공부를 선도하니 왕께서 친히 속옷 한벌응 하사 하셨다.또한 진주목사때 잠시 한양 궁궐에 들어가 있을때 1파의 종질 대사성
휘;유성공이 公에게 우리 영일정씨의 족보를 편액을 부탁 받고 공은 흥쾌이 뜻을 받아 진주관아에서 己丑譜를 만들고 20살이나 위인 왕자사부 쌍봉 극후에게 검정하게 하니 이모두가 이루어졌다.기축보에 두분의 사실기록과 당부의 글이 실려있다.
진주에서 임기를 마치고 벼슬을 사양하니 주군께서 허락하지 않아 또다시 남원도호부사로 명 받아 남원에 내려가니 백성들의 생활이 나테하여 글 공부를 명하여 엄히 다스리니 선비들이 존경하여 봤들었다 이때에 공이 병이들어 벼슬을 사양하니 받아들이지 않아 어쩔수없이 수행하시다 병고로 남원관사에서 별세하시니 공의 애상에 많은 선비들과 벼슬아치가 만사와 제문을 지어와 통곡하고 남원에서는 남원군민들이 다시 함안경계선에는 함안군민들이 서로 다투어 공의 상여를 맞겟다고 다투어 예를 다했다 다시 양산으로 들어 설때도 갔았다 이리하여 울산 선영이 가까운 곳에 장사를 했다가 1년이 안되어 공의 장남 시행은 상중에 돌아가시고 공의 차자와 삼자 (시연.시간)께서 공이 돌아가시고 10년만에 손씨가 돌아가시니 함께 함폄하여 영천 서파에 영원히 안장 했다.
공이 살아계실때 지산선생님의 행장을 짓고.또 손모당 선생님의 행록과 비문을 지었고.또다시 여헌 장현광이 돌아가시자 문인들의 주축이 되시어 제문과 행장을 지어 스승의 가는길에 예의를 다하셨다.
공이 돌아 가시자 청호서원의 문인들의 주관으로 청호서원에 배향되어 매년 손모당과 함께 향사를 지낸다.
(대구시 황금동) *청호서원*
[維 城유성 20代]1596~1664(1파)
*조선의 문신으로 字는 德基덕기.號는 陶村도촌. 시호는 忠貞충정.포은선생의 후손으로 박사 謹근의 아들로 강화에서 출생 하여 10세 때부터 외조부 黃致敬황치경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1627년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검열.춘추관 기사관.주서.필선.수찬.집의등을 거치고 1644년 황해도 관찰사가 되고 또 승지.전라도 관찰사.1649년 평안도 관찰사.뒤이어 대사간.대사성.도승지.동지경연사.호조.예조.이조.형조판서를 거처1659년 우의정으로 고부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조판서 송시열이 경성판관 홍여하의 상소로 사직하게 되자 그 부당성을 지적해서 송시열의 사직을 만류했고 대사성 서필원의 이조참의 취임을 반대해 사임하게 했다.
뒤이어 사간원이 서필원을 적극적으로 논구하자 公은 사의를 표명하고 영중추로 청나라에 다녀와 행판 중추부사로 재직중에 사망했다.
일평생을 가훈을 淸貧청빈 으로 삼고살았다 하며 생전에 임란시에 살아진 족보를 만들기위해 2파 족祖 펄인 진주목사 양계 好仁께 간청하여 현재의 기축보가 현존하게 했다.
[師 道사도17대]1583~1615
복재공 담의 아들로 선무랑 을 지냈다.
[憲 道헌도 17대]1576~1667
자는 준가요 호는 가정으로 주포공 종윤의 아들로 어려서 부터 특이한 재주가 뛰어나 한강 정구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수직으로 중추부사에 올랐다.
[好 禮호례 18대]1604~1672
자는 자립.호는 요산이며 내금위장 호군공 수번의 둘째아들로 백부 호조참판 백암공 의번께서 임진왜란때 경주전투에서 후사가 없이 돌아가시자 조부 호수공의 명으로 양자로 갔다.
손모당 문하생으로 1636년 무과급제하여 병자호란시에는 어가를 모시고 남한산성에 들어가
성을 지키고 아버지 백암공이 왜놈에게 죽었다하여 평생을 왜구의 물건을 쓰지않았다고 한다
1659년 해남현감이 되고 청직하고 염개하였으며 임기를 마치고 돌아 갈때는 행낭속에 치자나무 한 화분만이 있을뿐이니 해남고을 백성들은 공의 덕을 기리기위해 청덕비가 세워져 현재도 있다한다.
이러한 공의 청백함을 어사 남구만이 장계를 올려 포상과 승차.가 되었고 잠시 고향 영천 대전동에 있을때 농사철에 답에 물이없는것을 보고 영천군수에게 도움받아 영천북 일명 대내실 못을 만드니 당시 고을 사람들이 모두 公을 높이 칭송하고 좋아했다하고 한다.
[好 問호문 18대]1605~1650
자는 자유이고 호는 어봉이며 만호 안번의 둘째아들로 형 好仁을 따라 손모당 여헌 문하에서
수학하고 종사랑을 지내고 벼슬에는 뜻이 없어 형 호인은 벼슬하여 관에 나갈때 형이 말하기를 나는 벼슬을하니 식구의 굼주림이 없을 터 너는 고향에서 부모님을 공양하며 조용히 문학에만 열중하라 하시고 기름진 많은 농토와 힘세고 젊은 노비들을 형으로 부터 받고 형은 늙은 종과 치솔들 대리고 관아로 나가니 형의 뜻에 따라 힘써 부모님을 공양하며 학문에만 열중하다 고향 대전동에서 형 호인 보다 5년앞서 일찍돌아 가셨다.[양게문집에 실려있다.]
*어봉공 호문의 정자(어봉정자)
[好 義호의 18대]1602~1655
호군공 수번의 장남으로 자;자방.호;명계이다 서강 전삼성에게 배우고 公의 용모가 준수하고 성격이 호매하여 서강은 당대의 문장가 칭송받고 문학.경사를 비롯해 훈도를 받아 20년 동안 향해.한성시에 무려18차에 합격했으나 복시에는 불리한 후로 과거에는 폐하니 뜻을 접고 자호를 명계라 하고 집 옆에 연못을 파고 연을 심으며 정자를 짓고 독서와 시 을 지어며 살았다 천성이 강개하고 기절이 있어 정의감이 강하여 대의.명분을 지켜 굽히지 않았으며 병자호란때는 동생 호신과 함께 종형 호인을 따라 창의하여 조령까지 올라가나 화친이 성립되니 분통을 품고 돌아왔다.
유고로는 동생 삼휴정 호신과 합편하여 [상화집]에 수록하여 [명고일고]가 있다.
[好 信호신 18대]1605~1649
자;덕기요 호;삼휴로 내금위장 수번의 아들로 형 호의를 따라 서강 전삼성의 문인으로 경사와 백가에 능통했다.병자호란때 종형 호인을 따라 의병에도 참가했고 이후 詩시에는 이괄의 반란사건과 병자호란을 소재로한 작품이 많이 있고 時事歎시사탄.江都失守강도실수.잡저에는 몽유동해록.삼휴일고가 있다.
*삼휴정*
*삼휴공 묘소
[嗣 明사명 18대]1602~1643
*생부는 의와 충을 겸비한 장연부사 오위도총부 부총관을 역임한 신도의 장남으로 태어나 임진왜란 의병 경주서천 전투에서 후사가 없이 순국하신 충효재 석남의 양자로 들어가신 분으로 자;선여.로 어릴때 부터 생가와 양가에 구별 없이 양모친이신 숙인 이씨에게 더욱 효성이 지극 하여 이웃사람에게 칭찬이 자자했고 동생 승명을 대리고 모당 손처눌 선생에게 글을 배워 족형 호인과 함께 이름을 떨쳤다.
公은 남쪽에선 왜구가 북쪽에선 오랑케가 침입하여 국방의 어지러움을 피부로 느끼게 되자 문과만이 승상하고 무과는 업신여겼으나 公은 나라의 후일이 염려 되어 사대부 자제들에게 문무과를 겸수 하도록 권장했고 본인이 스스로 큰 뜻을 품고 무과에 급제하여 통훈대부에 이르고 이어 장연 현감에 부임하니 전란후의 백성들이 고초를 격자 公은 애석하게 생각하여 정성을 다해 백성들을 따듯이 보살피니 살기 좋은 고장으로 변모했다.
이러한 공로의 백성으로 부터 칭송하는 소리가 자자하니 감사와 어사의 장계서에 관서 제일이라고 왕에게 올리니 ''왕이 공의 치덕을 찬하는 유서에''"이제 본도 암행어사 장계를 보니 너가 명민하고 재주가 있어 스스로 받드는 데는 극히 간소하고 백성의 정이 사랑하고 추대 하니 극히 가상할 만한지라 짐이 그대에게 이에 안팎 옷 한벌을 내리니 너가 받을지어라"
하고 비단 옷을 내려 포상했다. 임기가 끝이나 돌아가는 길에 고을 사람들이 몰려와서 길을 막고 울먹이며 사또께서는 자식과 같은 저희들을 두고 어디로 가시렵니까? 하며 수레바퀴를 붙들고 못가게 하니 公이 차마 인정을 뿌리치지 못해 발길을 돌려 관문밖에 이르러 손수 나무 한 구루를 심어주고는"나를 보듯 잘 가꾸어 달라"고 위로하자 떠나는 사또도 보내는 고을 사람도 아쉬워 흘리는 눈물이 뜨거웠다 전하고 심어 놓은 나무가 무럭무럭 자란것은 물론이요 후일 公의 동생 승명이 도사 벼슬에 올랐을때 이곳을 지나며 형의 청덕비를 보고 감회 깊은 詩한 귀절에 "우리 형이 지성을 다하여 다스린 터라 돌을 새겨 쓸 필요는 또 무엇이 겠는가?"했다 公이 지나는 고을 마다 칭송이 자자 하였으나 명은 짧은지라 公의 생부를 두고 앞서 42세 라는 젊은 나이에 생을 마치니 덕망이 높은 선비들과 백성들의 슬픔이 이루 말할수 없었다 한다.
公의 무덤은 달성군 가창면 옥녀봉 이라 한다. [여기를 지나는 족 후손들 까지도 公의 무덤이 여기에 있으니 업을 할지어다....]
[時 衍시연 19대]1632~1687
字는 달중이요 호는 학암이며 양계공 호인의 둘째 아들로 길암 이현일의 문인이며 문사에는 부족함이 없었으나 과거에는 뜻이 없어 대전동 양계의 (鶴)학바위 아래 봉래정을 짓고 성리에 잠심하여 박학독행 하였고 조카 생원(석주)와 함계(석달) 등과 손자 만양과 규양 등을 훈육 하시며 향리의 교육 풍토를 쇄신하며 학규를 제정해 실시하기도 했으며 관리들의 작폐를 견제하고 불우한 이웃을 구제하는 등의 골자로 한 지방 자치규약을 실시해 향촌의 풍속을 선도 했다.公은 일 평생을 향리의 군자들을 즐겨 영재들을 기르고 도의를 강마하여 문하에 명석 한 이들이 많았으며 제현들이 公을 대단히 신임하여 따랐다 한다.
저서로는 학암집등이 있다.
*학암공 시연의 묘*
[時 간 19대]1635~1690
학암공 시연의 동생으로 호는 취성당 이다 백형 시행은 (好仁)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너무나 슬퍼한 나머지 음식을 먹지못하며 슬프만 하다가 상중에 일찍 돌아가가시고 중형 시연을 따라공부에만 열중하여 생원이 되었으나 벼슬에는 뜻이 없었으며 오직 학문과 어머님 공양과 조카들의 공부를 가르키시고 중형 학암이 병이들자 스스로 친히 멀리까지 걸음하여 약을 구해 직접 약을 달려 올렸고 집안일들을 돌보는데 조금도 소홀하지 아니했다 한다.
평생을 고향과 구산에 오가며 경전과 사서들을 섭렵하며 만년에 신천으로 은거하면서 취성당을 지어 후학을 장려하여 교육에만 힘쓰다 임종시에는 아들들을 불러 모아놓고 너희들의 살미에 인과 지를 다할지다 하시고 생을 마쳤다.저서로는 취성당일고가 남아 있다.
*취성당*
[時 昌시창 19대]1634~1680
자;덕순.어봉 호문의 아들로 일찌기 어려서 아버지를 일었지만 힘을 다해 어머님을 공양하며 힘써 학문과 무술에 연마하여 (현종12년) 1671년 무과에 급제해 훈련원 주부가 되고 뒤이어 만호를 지내며 벼슬의 높낮음을 빙자하거나 허뜨러짐이 없었다 그러나 公도 (壽)수는 부공을 따라 46세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치고 묘는 부공 아래 청통면 보성리에 있고 인암 권상규가 비문을 지었다.
[克 讓극양 19대]1632~1690
훈련원정 응서의 손자로 字는 여겸이요 호;계암이다.
公의 자태와 성품이 사물의 이치에 훤히 밝았고 문장이 넉넉하여 타인에 빠짐이 없었었으며 벼슬은 성현 찰방을 지냈고 묘는 영천 고향 땅 화남면 안천리이다.
[時 橋시교 19대]1635~1665
호수 세아의 증손으로 성품과 자질이 맑고 순수하며 두텁게 배우고 힘써 행하다 은거하면서 학문을 연마하니 사람들은 [영남의 좋은 선비''라.]하였다 직급은 음직으로 종사랑을 재수 받았으며 30세 일기로 별세햇다.
[時 諶시심 19대]1641~1690
현감 요산공 호례의 아들로 자;노경으로.풍모와 거둥이 비범하고 단정하고 아름다운 턱 수염이 무릎을 지났다 하고 1661년 무과에 올라 벼슬은 충무위 대호군에 이르렀으며 전주영장을 역임했다.
묘는 영천시 자양면 신방리 운주산으로 신방제가 있다.
*영장공 시심의 묘*
*여기가 영장공(令將公) 시심(時諶)의 묘지이다.
영장공 時諶은 요산공 휘 호례의 3남으로 현종2년 1661년 무과에 급제하여 충무위대호군.전주영장을 역임했다.
*여기 운주산에 영장공의 묘자리 이야기*
이곳에 묘터를 잡은 동기는 영장공이 살았을시에 영장공과 아주 친하게 지낸 친구 崔氏가
풍수인인데 영장공이 최씨에게 말하기를...자네는 산에도 많이 다니니 이 지역에서 제일 좋은 묘터는 자네가 하고 그다음으로 좋은 명당자리 한곳을 추천해 달라...고 하자.
崔氏가 웃으며 말하기를...제일좋은 명당을 하나 봐둔곳이 있기는 한데 내가 묻히기엔 좀 어려워 자네에게 추천함세...하며 그자리에 영장공을 직접 데리고 가서 보여주니...
이자리를 직접본 영장공이 말하기를...이 좋은 자리를 자네가 하지 어째서 나한테 주는냐고 묻자...
최씨가 말하기를... 이곳은 그냥 시신을 묻어서는 명당이 될수없고 송진을 바닥에 깔고 시신을 묻어야만 명당이 되니...나 역시 이 자리가 욕심은 있으나 사는게 가난하니 어려워 이자리의 주인은 바로 자네라네...하고 말했다 한다.
그리하여 영장공이 별세하자 영장공의 동생 휘(시걸)이 33세때요 (시진)이 26세 영장공의 아들 함계공(석달)은 30세요 큰집 장조카인 (석명)이 39세때라 모두 모여 의논하여 풍수인 崔氏의 말데로 ... 기계.청송지역에서 송진을 가져오는 자에게는 송진냥 만큼 소금을 주리라고 소문을 내어 송진 1가마니를 모아 넣고 묘를 썼다고 전해온다.
[時 羽시우 19대]1630~1699
자는 수경.삼휴 호신의 장남으로 천자가 헌헌장부 상으로 기품도 磊落뇌락 하여 곧고 맑았으며.부공에게 수학하여 문과 덕이 조성 하였다 20살의 젊은 나이에[ 외간喪 내간喪]을 당하여
예 제는 부족함이 없었고 喪服상복 을 벗자 평소에 말하기를 "다시는 임란과 같은 왜침을 받지 않아야 한다하고. 강토수호에 중점을 두어야 되며.문화나 학문도 국가가 온전한 연후에 논할 문제라 하시며. 임진왜란을 겪은 것이 어제와 같은데 아직도 그 偏僻편벽 된 사고를 廢폐
하지 못하니 안타까울 따름이라 하셨다. 다시말해"[남인이니 서인이니 하는 조정의 당파싸움을 두고 하는말...] 1676년 무과급제해 내.외 여러직을 거쳐서 용양위 부사과로 재직 하실때
당시의 권문 세족들의 횡포를 보자...지금 내가 양친의 구몰하신 후이니 부모봉양을 위함도 아닌것을 관도에 더 연연할 필요하랴.하시고는 그날로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두분의 숙부님을 더불어 학문을 토론할 천고를 벗 삼아 후학을 가리키며 일평생 유유자적하게 지내시다
향수 70으로 생을 다하니 公을 하절 묘원에 영구히 모셨다.
[斗 亨두형 18대]?
조선의 문신으로 자는 天章천장.호;(樂全堂)낙전당으로 포은 몽주의 후손 참봉 忠元충원의 아들로 1544년 생원으로 별시문과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을 거치어 승지가 되고 효행으로 旌問 정문이 세워졌다.
[齊 斗제두 ]1649~1736
자는 사앙.호는 霞谷하곡. 시호는 文康문강으로 진사.昌창의 아들로 한양 출신이다.
1668년 별시문과 초시에 급제하나 사화의 혼란을 통탄해 벼슬을 단념하고는 학문을 닦았다.
영의정 김수항의 추천으로 사포서 별제에 임명되 바로 사퇴.1684년 공조좌랑을 잠시 지내고 사직했다. 그후에도 학행과 덕행으로 명성을 떨쳐 중신들의 천거로 무려 30회나 요직에 임명되어도 대부분 거절하고 숙종때도 사도시 주부.호조참의.회양부사.한성부윤.경종때도 대사헌.이조참판.성균관 좨주.영조때에도 우찬성.원자 보양관을 모두 잠시 동안만 지냈을뿐 公의 전 생애을 학문 연구에만 바친 선비의 대두였다.
[澔호]1648~1736[감무공파]
좌의정 철의 현손으로 감찰 경연의 아들로 자는 중순이고 호;장맘.시호가 文敬문경이다 송시열의 문인으로.1682년 생원이 되고 1684년 정시문과 병과급제.검열.정언이 되어 1689년 기사환국으로 파직 당해 경성에 유배.1694년 서인이 기용될때 풀려나 지평이 도고 이어 수찬. 교리.집의.사간.거쳐 동래부사에 취임해 12만냥의 新銀신은을 취급 부주위로 파직.이듬해에 다시기용되 광주 부윤.동지승지.대사성.함경도 관찰사등을 지나 도승지.부제학을 지냈다.
1713년 대사성시에 스승 송시열의 廟庭묘정配享배향을 건의하고 2년뒤 부제학으로 兪契유계의 遺著유저[家禮源流]가례원류의 발문에 소론의 尹拯윤증이 스승 송시열을 등지고 당쟁을 조장했다는 내용을 섰다가 파직되고 이 사건으로 노론.소론의 당쟁이 격화 되었으나 노론이 승리함으로 대사헌이 되고 이해 尹宣擧윤선거의 문집[노서유고]가 간행됨에 효종을 불손한 내용으로 썼다 하여 훼판 윤선거 부자의 관작도 추탈케 했다.
1717년숙종43년 세자;경종의 대리청정을 건의하여 소론의 반대를 물리치고 이를 시행케 하고 이조판서에 승진.실록청 총재관에 올라 숙종실록 편찬에 참여하다가 신임사화로 파직 강진에 유배됬다가.소론.노론의 시끄러운 당쟁속에 또다시 노론의 재집권하자 풀려 우의정에 특진하고 신임사화로 賜死사사 된 노론 대신들을 신원을 여러번 상소하여 이루고 좌의정.영의정까지 올랐다.
송시열의 문하의 뛰어난 학자로 일생을 노론의 선봉으로 활약했고 시문과 글씨에 능통했으며 사후에는 충주 누암서원에 제향됬다.
嗣周사주(희손의 4세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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仁獻인헌 仁恕인서
[大 容대용 17대]1568~? [大榮]대영 [大有]대 : :...........
大臨대임 대영 대용 대유
*자는 德器덕기. 호는 竹軒죽헌으로 통정대부 인서의 둘째아들로 연일 대잠동에서 출생하여
형.대영과 아우 대유와 함께 백부 인헌을 따라 영일에서 임란창의 하여 문천회맹에 참가하여
경주방어를 위하여 금오산.남천.서천.형산강등 여러 전역에 참전해 적을 겪파했다.
영천복성과 정유재란때 화왕산회맹에 참가하여 전공을 세운 기록이 회맹록에 실려있으나 그후에 형.대영과 대용의 卒졸에 대한기록은 (나 원보가 아직 찿지못했고 족보에는 막내 (대유)만이 통정대부 인서의 후사를 이어가고 있는 것으로 보아 2분 이하는 무후로 보인다.)
*이 기록은 경주 임란의사.창의록에 기록으로 기술한다.
[世 復세복 19대]1650~1740
자는 여형.호는 만은이니 창대공 대임의 증손자로 수직으로 가선대부 용양위 부호군에 증직이 내려졌고 남성제 설단에 많은 업적을 남기신 분이다.
[碩 胄석주 20대]1642~1690
양계 호인의 손자로 자는 원직이요.호는 양곡으로 중조이신 학암 시연과 숙조이신 취성당 시연에게 글을 배워 1672년성균관 생원을 지냈고 10대조 사정공 위와 9대조 생원 문예 선조님의 묘갈고증을 지어 비를 세웠고 저서로는 양곡시고를 남겼다.
[碩 達석달 20대]1660~1720
자는 가행 호는 함계이며 충무위 대호군 시심의 장남으로 종조부 학암 시연에게 글을 읶혀 학암공의 명으로 갈암 이현일에 나가 종유하며 독학역행 하고 덕을 감추며 벼슬을 하지 않고 사문의 흥기를 본인의 소임으로 삼았다 가례혹문을 짓고 문집이 있으며 살던 마을에 함계정사가 있고 조카 지수공 규양이 행장을 짓고 해좌 정범조가 비문을 지었다.
[碩 耉석구 20대]1645~1707
양게 호인의 둘째 손자로 일찍 아버지를 여이고 형 석주와 동생 석우와 함께 중조부 학암공에게 공부하여 음직으로 통덕랑을 지내며 힘써 학문을 연구하여 天問천문에 능통하시어 후사 10대 이상의 앞날을 예견하셨다 전하며 일생을 선비들과 벗으로 시문을 지어며 살아가니 선비들이 추중하였다하고 특히 아들 종양에게 명하여 영천북 삼귀동에 있는 삼귀못을 만들어 대전뜰의 흉년을 막았다한다.
[碩 玄석현 20대]1656~1730
삼휴 호신의 손자로 자는 지원.호는 오회당으로 숙부 무재송 시찬 문하에 수업하며 경전에 달통했으며 만년에는 先廟선묘 中門外에 一堂을 別構별구하여 五懷堂오회당이라 현판을 걸어 시경에 있는 형제간에 힘을써 孔懷공회의 뜻이라 하고 남성제 설단을 의논하여 횡계정사 훈.지수와 더불어 巡相순상 홍만조에게 정문해 관문을 받아 1719년 병와 이형상과 매조 손덕승을 作伴작반하여 자양구미촌에 종유.다시 원각을 방문하고 입암서원을 역방하며 회화록을 남기니 이어 멀지않아 만은공등이 설단을 하게 되었다.
[석조.석승.사건.효세.석림. 20대]
*모두 호수 세아의 후손으로 조선의 선비로 학자이다.
[萬 陽만양 21대]1664~1730
양계 호인의 증손자로 자는 개춘과.경순이고 호는 훈수로 안동 임하 천전리 외가집에서 양곡 석주의 장남으로 태어났다.어릴때 부터 빈약한 주위 사람들이라도 남을 조롱하거나 하대하는 법이없어니 모두들 德器덕기 있는 아이로 칭찬이 자자했다.
훈수선생은 중조부이신 학암 시연에게 7살 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해 公이 12살 부터는 한번 읽은 것은 절대 잊지 않았다하며 글공부를 잘익히니 조부께서 사랑을 아끼지 않으셨다한다.
29세가 되던해에 (모자산)현 보현산과 정각산 암자에서 공부를 하다가 본가인 대전동에 잠시 들였는데 야밤에 수백명의 도독패 거리가 몰려와 난리통을 치는통에도 초불아래에서 공부만 하고있는 주인에게 두목은 칼을 목에 대고 너는 내가 두렵지도 않는냐고 하니 公은 너히들이 굼주려 배를 채우기 위해 식양을 가지려 왔으면 가져갈 일이로다..하고는 태연히 책을 읽으니 도둑들은 탐복하고 진정한 선비라 하여 모두 놓아두고 달아났다한다.
이후 공은 국가 발전의 열쇠는 휼륭한 인재와 백성들의 단합에 달려있는 것이라 하고 1716년 봄에는 옥간정을.가을에는 진수재를(현재는 없으짐) 횡계동에 짓고 삭강을 시작하니 향내의 제자들이 100여명에 이르고 제자중에서 영달된 분이 매산.중기.참의 /조현명 영의정/.정간.승지/이유.판서/신준.참판/등의 명현을 길러내니 교육의 전당으로 전국에 이름을 떨첬다.
1724년 훈수공이 참봉에 뒤이어 익위사 세마.등으로 나라에서 부르나 모두 나가지 아니했고 오직 후학 양성에만 힘써며 안으로는 동생 규양(지수공)과 함께 시조공 설단을 뜻 모아 발안하니 집안사람 모두가 적극 동참하여 지금의 오천에 남성제가 현존 하여 전국에서 후손들이 모여 중시조공 형양공을 모시고 있다.
훈수공께서 임종시에 이르기를 "치상에 명정에 비단을 쓰지말며 ''徵士塤搜 鄭公之柩.징사훈수 정공지구" 라 쓰라 하시고 돌아가시니 공 또한 청빈함이 짐작되며 사후에 문인 방백 조현명이 왕을 아련하여 스승의 증직을 청하니 왕은 합당하다 하고 훈수선생에게 사헌부 지평을 내렸다.
저서로는 훈지록.곤지록.이기집설.가례차의.개장비요.대학보유.상지록.모현록.치도의설.계몽해의.외국지.산거일기/등 10여종 백수십권을 남겼다.
[葵 陽 규양 21대]1667~1732
훈수.만양의 동생으로 호;지수로 형 훈수를 따라 후생들을 가리키는데 형재분이 함께 하시고장사랑 현능참봉을 지냈다.
저서로도 형과 함께 훈지록등 많은 서술책을 남겼다.
*옥간정 외부*
[夢 陽 몽양 21대]1679~1745
지수공의 동생으로 자는 헌길.호;오졸재 젊은 시절에는 백형 훈수 중형 지수는 학문에 전렴을 다할때 公은 집안 살림을 맏아 했고 형님들이 돌아 가시자 公 또한 학문에 열중하여 후학에 힘쓰며 살았다.
오졸재 선생 문집이 있고 이문집은 대채적으로 시문집 이다.
*고모헌*
[燮 陽 섭양 21대]1686~1731
어봉공 호문의 증손자로 자는 화언. 종형인 훈지수 문하에서 수학하여 재주와 그릇이 남달랐으며 경전의 뜻을 강명하여 자주 "나의 時心시심을 일어킨다"는 찬사를 받으며 일평생을 횡계서당에서 후배들을 강마했다.
첫댓글 정성스럽게 편집한 자료 잘 봤읍니다
참으로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귀중한 자료 잘보았구요
많은 참고가 되었습니다, 단양우씨 집의공파 28세손 우왕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