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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권 선생이 생전에 북을 치던 모습이다. |
광주국악원을 운영했던 청암선생은 64년부터 정광수명창의 고수로 명동 국립극장무대에 서는등 중앙무대에서 활동에도 나섰다.
청암선생은 청암판소리고법보전회를 만들어 후진양성에 앞장섰다.
청암선생은 박시양, 송종호, 김명식씨등의 이수자를 두었고
관내 전수자들은 윤성렬, 고일석, 김현주등이 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59호 판소리고법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광주국악사의 전개와 명고 김성권의 역할
- 8.15 해방 이후를 중심으로 -
이명진* ~논문 전개~
<차례>
1. 머리말
2. 해방 이후 광주국악사의 전개와 김성권의 역할
3. 맺음말
1. 머리말
광주는 전남지역의 중심도시로써 많은 명인·명창들이 국악을 전승시키
고, 공부하였던 국악의 성지였다. 일제강점기 때 예기양성소로 유명했던
광주권번은 국악 교육의 중심이었고, 해방 후에도 호남국악학원, 전남민속
예술학원, 전남국악원, 광주(시립)국악원 등 여러 단체들을 통해 국악 교육
의 맥이 이어져 왔다. 이들 단체를 중심으로 광주에서는 많은 명인·명창
들이 배출되었으며, 지금도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또 일제강점기에 구
성된 김창환협률사는 남도지방 창극 형성의 첫 출발이었으며, 해방 후에도
*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
24 판소리연구 제31집
광주성악연구회, 국극협단을 비롯한 여러 개의 협률사가 존속됨으로써 광
주국악사의 지속에 큰 역할을 했다.
이렇듯 국악 교육과 창극단체의 활동이 활발했던 해방 이후의 광주는
수많은 명인·명창들이 찾아든 곳이기도 하다. 해방 직후 먹고살기가 어려
웠던 예술인들은 생계유지를 위해 큰 도시인 광주로 모여들 수밖에 없었
다. 당시 광주에는 부유한 풍류객이 많았고, 이들은 판소리를 즐기며 후원
도 아끼지 않았다. 1950년경 중앙에서 판소리가 경쟁력을 잃었을 때에도
광주에는 무수한 풍류객이 있었고, 넥타이를 두른 사람치고 중모리 장단
못 치는 사람이 없었을 정도였다고 하니, 당시의 문화 수준을 짐작해 볼
수 있다.1)
한편 광주판소리2)는 박동실의 월북으로 인해 크게 흔들렸고, 심지어 ‘김
채만-박동실’로 이어지는 판소리는 절멸의 위기에 봉착하기도 했다. 결과
적으로 그 소리를 이어가는 명창도 한애순과 정순임밖에 없다. 그나마 정
순임도 광주가 아닌 경주에서 활동하고 있으니, 실질적인 광주판소리의 소
리 맥은 한애순밖에 남지 않은 셈이다. 하지만 해방이후 지역을 중심으로
꿋꿋하게 활동한 명인·명창들로 인해, 오늘날 광주에는 보성소리, 동초제,
동편제 등 여러 유파들이 아우러져 광주지역의 개성 있는 판소리사를 써내
려가고 있다.
본고에서 논의하고자 하는 명고 김성권은(1926~2008) 광주국악사의 가
장 굴곡적인 시기부터 광주를 무대로 하여 평생을 활동한 명인이다. 게다
가 그의 집안은 광주판소리의 초석을 이루는 역할을 했다. 그의 종조부인
김채만은 광주 속골에 거주했던 명창으로 박동실, 성원목, 박종원, 공창식,
한성태 등 내로라하는 제자들을 길러냈다. 그의 부친 역시 소리꾼으로 활
동하며, 협률사를 조직해 창극의 발전에 힘썼던 인물이다. 이런 가족사로
1) 조상현(남, 1939년생) 광주 YWCA 강습 중 회고담(2009.07.27)
2) 필자는 이미 광주판소리에 대한 개념을 언급한 바 있다.<이명진, 「명창 공대일의 삶과
예술세계」, 실천민속학연구 , 실천민속학회, 2010, 265쪽.>
광주국악사의 전개와 명고 김성권의 역할 25
인해 김성권은 어린 시절부터 오랫동안 판소리와 고법을 몸에 익힌 전문적
인 소리꾼이자 고수이며, 1991년에는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인정되었
다. 하지만 아쉽게도 김성권의 기록이나 발자취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이는 중앙이 아닌 지방에서 활동하는 인물이 가지는 약점이기도 하다. 게
다가 김성권 자신도 크게 자기를 부각시키는 인물이 아니었다.
필자는 본고를 통해 김성권이 광주국악계에서 어떤 역할을 했었는가에
대해 주목하고자 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광주지역의 국악사가 어떻게 전개
되어 왔는가에 대한 논의도 제대로 이루어진 바 없다. 따라서 광주국악사
의 전개 양상을 살펴보면서, 그 속에서 김성권이 어떤 구심점 역할을 했었
는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김성권의 활동시기가 해방 이후이므로 그 부분에 초점을 맞추고자
하였으며, 해방이후의 광주국악사를 1기(해방~1950년대), 2기(1960년~1985
년), 3기(1986년~2009)로 나누어 보았다. 1기는 명인·명창들이 광주를 구
심점으로 모여들어 다양한 예술 활동을 시작하였던 시기, 2기는 전국적인
국악계의 위기 상황과는 달리 광주지역 국악 사설학원의 융성으로 많은
명인·명창들이 배출되었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3기는 전라남도립국악
원, 광주시립국극단 창립 등 정부기관의 개입과 지원 등으로 나름의 안정
기라고 볼 수 있으나, 한편으로는 지역의 많은 명인·명창들이 상경하는
시기로 광주국악계가 위축되기 시작한 시점으로도 볼 수 있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광주국악사의 전개에 발맞추어 해당 시기별 김성권의 생애사적 변
화, 국악사에서의 역할과 위상 등에 주목하였다.
26 판소리연구 제31집
2. 해방 이후 광주국악사의 전개와 김성권의 역할
1) 1기(해방~1950년대):광주판소리의 맥을 잇다
해방 이후 뿔뿔이 흩어졌던 명창들을 불러 모으는 구심점 역할을 했던
곳은 광주권번이다. 광주권번은 호남지역의 대표적인 권번이었고, 일제강
점기 때부터 광주 지역의 명인·명창을 키워낸 중요한 판소리 교육기관이
었다. 광주권번에는 한때 동기(童妓)만 70여 명, 국악교육을 이수한 기생이
120여 명에 달할 만큼 많은 국악인을 양성한 곳이다.3) 1920년 남문 밖 예기
조합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열었고, 4년 뒤 북문 밖에 형성된 예기조합과
합쳐져 광주권번이 되었다. 광주권번은 교육기관으로 학예부를 만들어서
입학금 50원, 월사금으로 5원을 받았다. 8~20세의 학생을 받았으며, 권번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학부형의 보증이 반드시 있어야 했다. 학예부에서는
약 3년간의 교육을 받는데, 성적이 우수한 경우 조기 졸업도 가능했으며
표창도 했다. 졸업 후에는 졸업증서까지 수여할 정도로 체계적인 교육시스
템이 갖추어져 있었다.4) 광주권번은 함동정월, 한애순, 박송희, 김채옥, 안
채봉, 한승호 등 유명한 명인·명창들을 많이 배출했다. 또한 많은 명인들
이 선생으로 활동하였는데, 임방울, 이매방·정광수·박동실·송만갑·정
응민·오수암 등이 소리선생, 가야금, 거문고 선생으로는 박석기, 무용선
생으로는 이대조·조앵무 등이 활동하였다.
해방 직후 광주에서는 박동실의 주도하에 광주성악연구회가 발족했다.
3) 지형원, 「남도국악을 살리자」, 월간 예향 102(3월호), 광주일보사, 1993, 124쪽. 지형원
은 이 글의 집필 당시 광주일보 월간국 차장으로 재직하였다.
4) 해방이 되자 기쁨에 들뜬 모든 국악인들은 광주권번을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이들은 뜻
을 모아 10월 26일 광주극장에서 해방 기념 전남국악경창대회를 실시하였고, 행사 마지
막에는 참여한 모든 명창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해방가>를 불렀다. 이때 <해방가>는
박동실이 작사·작곡하였다고 한다.<KBS광주 라디오, 추석특집 광주권번 제1부(2007.
09.20)>
광주국악사의 전개와 명고 김성권의 역할 27
광복 후 재건된 창극단은 광주성악연구회가 최초였다. 박동실을 중심으로
공대일·오태석·조몽실·조상선·조동선·공기남·주광득·한승호·한
갑득·박후성·한일섭·안채봉·한애순·김경애·공옥진 등이 활동하였
다. 첫 공연으로 1945년 10월 15일 광주극장에서 박황이 각색한 <대흥보
전>을 공연하였다. 하지만 광주성악연구회는 1946년 서울에서 창악인들의
모임이 활성화되면서 자동 해산된다. 이 시기 서울에서는 전국에 흩어졌던
창악인들이 모여 국극협회가 구성되었다. 그러나 서울의 국극협회도 얼마
안 가 해산되었고, 국극협회가 해산되자 박후성이 단원을 데리고 광주로
내려와 국극협단을 창단해 창극 활동을 지속하였다. 이 단체의 단원은 박
후성, 성원목, 조몽실, 조농선, 김재봉, 주광득, 김득수, 양상식, 김막동, 신
봉학, 서정길, 한일섭, 정달용, 허희, 박초향, 김덕희, 강산홍, 박홍도, 박채
선, 남연화, 박진숙, 오정숙, 성창순, 박봉선 등 50여 명으로 신진을 많이
기용하였다.5)
광주지역의 창극 활동은 1900년대부터 시작되어 그 유래가 깊다. 우리나
라의 최초 극장이었던 협률사가 1906년 일제에 의해 해체·폐쇄 되자 그
책임을 맡고 있던 김창환과 가용환은 실의에 빠져 낙향하게 된다. 곧 김창
환은 정학진·유성준·김정길 등 전라도 출신의 명인·명창 50여 명을 규
합하여 김창환협률사를 조직하였다. 이렇게 조직된 김창환협률사는 김창
환이 대표를 맡고 개작과 윤색에 강용환, 연기는 김채만이 주축이 되어 활
동하였다. 이들은 주로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포장을 치고 판소리와
창극을 공연했다. 1909년 가을에는 <춘향전>을 개작한 <어사와 초동>을
공연했다. 이때 김창환이 경비를 대고 총 지휘를 맡았으며, 강용환이 조연
출 역할을 하고, 김채만·유성준·정학진·안영환·김정길이 중심배역을
맡았다. 가설무대는 광주천변(현 양림교 부근)에 설치되었다.6)
5) 국립중앙극장, 세계화시대의 창극 , 연극과 인간, 2002, 57쪽.
6) 박규상, 광주연극사 , 문학들, 2009, 21쪽.
28 판소리연구 제31집
하지만 곧 한일합방이 되자 일제는 일시 협률사를 해체했고, 당시 존속
했던 김창환협률사, 송만갑협률사도 해체되어 침체기에 들어갔다. 그러다
가 1912년 광주지역의 큰 명창 김채만이 사망한다. 김채만이 죽자 그의 죽
음을 슬퍼하던 문도들이 뭉쳐 광주협률사를 조직했고, 1920년 광주협률사
가 해체된 이후에도 다양한 협률사들이 조직되었다. 1920~30년대는 협률
사 공연의 전성기였다고 할 만한데, 이 시절 특히 이화중선을 중심으로 한
협률사가 대단한 인기가 있어 돈을 가마니로 담아 쓸어간다고 할 정도였다
고 한다.7) 특히 임방울 같이 창극에 별다른 소질도 없고 관심도 없던 소리
꾼이 택한 활동방식도 바로 이 협률사 공연이었다고 한다. 또한 대부분의
소리꾼들이 협률사 공연을 보고 그 멋에 반하여 소리꾼의 길로 들어선 때
도 이 무렵이었다.8) 이 외에도 김동욱과 박선행이 이끈 협률사도 있었다는
것이 김성권의 증언9)으로 확인되는데, 박선행은 김동욱의 외삼촌이고, 김
동욱은 김성권의 부친이다.
하지만 해방기에 활약했던 박동실, 조상선, 정남희, 안기옥 등이 월북하
면서 창극계가 흔들리기 시작하였고, 특히 광주지역의 판소리는 크게 위축
되었다. 하지만 광주의 판소리는 그대로 사그라지기보다 사설 국악 교육학
원 설립이라는 교육·학습 형태로 전환되었다.
1950년에 이르면 광주에는 다양한 국악(판소리) 교육기관이 창립된다.
특히 1951년 창립된 광주국악원은 그 동안 뿔뿔이 흩어졌던 국악인들을
모여들게 하는 계기가 된다. 이곳에서는 판소리, 춤, 악기 등을 가르쳤다.
광주국악원에는 광주권번에서 활동했던 명인·명창들이 대거 수용되었고,
해방 직후 광주권번의 구심점 역할을 계승하였다. 이 때문인지 광주국악원
7) 최동현, 판소리 길라잡이 , 민속원, 2009, 132쪽.
8) 최동현, 위의 책, 132쪽.
9) 국립문화재연구소 ‘무형문화재종합조사’ 김성권 대담 기록(1996.04.23/미발간 자료). 김
동욱은 1903년 생으로 1943년 사망하였다. 그의 활동시기를 고려해볼 때 1930~40년 초
까지 협률사를 이끌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광주국악사의 전개와 명고 김성권의 역할 29
을 광주권번의 후신이라고 말한다. 광주 유지들에 의해 설립된 광주국악원
은 사회단체로 유일하게 등록된 곳이기도 했다. 당시 광주국악원 설립에
후원한 유지들로 최준기(崔駿基)·지정선(池正宣)·백남기(白南紀)·최경
식(崔炅植) 등이있다. 이 중 최준기는 초대 국악원장을 지냈고, 2대는 최한
영(崔漢泳), 3대 박인천(朴仁天), 4대 김상일(金相一)이 역임했다.10)
또 한국전쟁 바로 직전에 세워진 ‘전남민속예술학원’과 1950년 초 세워진
‘호남국악학원’, ‘전남국악학원’이 유명했다. 이 외에 1956년 김명환이 고법
연구소를 차려 고법을 가르쳤다.
전남민속예술학원은 정응원(趙應源)이 창립하였고, 정광수(1909.07.28~
2003.11.2)가 소리선생을 맡았다. 정광수는 전통성 있는 고제소리를 하는
명창이었다고 평가된다. 그는 김창환, 김봉학, 유성준, 정응민에게 소리를
사사하였고, 1964년 <춘향가>와 <수궁가>로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보유자로 인정되었다. 고전에 정통하며, 정연한 판소리 이론을 가지고 있
어 신재효, 김연수 등과 함께 판소리 이론가로서 명성도 높다. 1967년부터
는 김성권이 판소리 및 고법강사로 활동하였다.11) 전남민속예술학원은 세
학원 중 가장 오래 지속되었고, 1976년 폐쇄되었다.
호남국악학원은 1955년부터 공대일이 소리 선생을 맡았다. 공대일은 특
히 판소리 기초를 잘 가르쳤다고 하며, 이 시기 정광수보다 훨씬 유명한
인물이었다. 그러다 보니 광주 및 인근 지역 출신이라면, 그에게 소리를
배우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이다. 성창순(중요무형문화재)12)·송순섭
(중요무형문화재)13)·김성권(중요무형문화재)14)·장영찬·박초선·한갑
10) 광주시사편찬위원회, 광주시사사 3, 1982, 598쪽.
11) 지정조사보고서에 의하면 1967년 광주 호남예술학원 판소리 및 고법 강사로 활동하였
던 약력이 소개되는데, 당시 호남국악학원, 전남민속에술학원과 이름이 유사하다. 그
중 1967년에는 이미 호남국악학원이 폐쇄되었기 때문에 전남민속예술학원으로 추정된
다.<문화재관리국, 무형문화재 약보고서 합본 58 , 1990년 조사. 560쪽.>
12) 성창순은 20세 무렵 창극단체가 해산되자 광주에 있으면서 공대일에게 <심청가>를 배
웠다.<국립문화재연구소, 판소리유파 , 1992, 60쪽.>
30 판소리연구 제31집
수·방성춘15)(광주광역시무형문화재)·김향순(전라남도무형문화재)·최
연자(광주시립국극단)·이영애(광주시립국극단) 등이 공대일에 의해 기초
를 닦았다. 뿐만 아니라 많은 여성들이 공대일을 찾아와 소리를 배우고
갔는데, 1950년 후반만 해도 60명이 훨씬 넘는 학생들이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인원수는 근처에서 정광수가 소리 선생을 했던 전남민속예술학원
의 학생 수를 훨씬 웃돈 것이었다.16) 호남국악학원은 1960년 폐쇄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시기 공대일이 전남민속예술학원으로 옮기는 것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남국악학원에 있던 박학주는 고법을 가르쳤다. 박춘성의 증언에 의하
면 박학주는 단가도 잘 불렀고, 시조도 하였다고 한다. 또 북도 잘 쳤다.
하지만 아쉽게도 전문적인 소리도 아니었고, 북도 일종의 ‘한량북’이었다고
한다.17)
중요 남성명창의 월북을 비롯해 여성명창들이 점차 많아지게 되자 곧
여성국극단의 득세를 가져오게 되었다.18) 여성국극단의 시작은 1948년 결
성된 여성국악동호회이다. 여성국악동호회는 당시 국악계의 여류 중진들
이 대거 참여하였다. 1951년 여성국악동호회에서 나온 임춘앵의 주도로 여
성국악단이 조직된다. 임유앵·김경애·박초월·한애순·김진진·김경
수·조영숙 등이 창단 멤버로 참여했고, 이 단체는 나중에 ‘임춘앵과 그
13) 송순섭은 22세 때 광주로 올라와 광주공원 근처에 있던 호남국악원에서 제자들을 가르
치던 공대일 명창에게 <흥보가>를 배우면서 처음 소리길에 입문했다.<이명진, 「판소리
명창 송순섭론」, 전남문화 17, 전국문화원연합회 전라남도지회, 2004, 111~112쪽.>
14) 김성권(1929-2008)은 29세 때 광주 호남국악원에서 공대일, 성원목에게 소리와 고법을
배웠다.<국립문화재연구소, 판소리유파 , 139쪽.>
15) 방성춘(1948~ , 본명; 방야순)은 20세 무렵에 광주에서 공대일에게 3년간 <춘향가> 초
경이경에서 끝까지, 그리고 <흥보가> 몇 대목을 배웠다.<국립문화재연구소, 위의 책,
145쪽.>
16) 이명진, 「명창 공대일의 삶과 예술세계」, 263쪽·279쪽.
17) 전 정(남, 1946년생) 전화인터뷰(2010.08.10). 약 30여 년 전 박춘성에게서 직접 들은
이야기라고 한다.
18) 백현미, 한국 창극사 연구 , 태학사, 1997. 342쪽.
광주국악사의 전개와 명고 김성권의 역할 31
일행’이란 명칭으로 개칭하여 활동한다. 이 외에도 여러 단체가 있었다.
여성국극단이 많은 활동을 하던 시기, 광주는 극장이 매우 성행했다.
1950년대 중반부터 1960년 초까지 광주극장, 동방극장을 비롯해 약 8개의
극장이 존재했다. 이는 광주지역에서 많은 협률사가 활동했던 것이 극장의
활성화로 이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극장의 발달은 공연 단체를 유입하는 통로가 되었다. 국극, 악극, 가극
등을 공연하는 외부 지역의 많은 단체들이 광주를 찾았는데, 1952년부터
1961년까지 이와 관련된 단체들의 공연이 93건에 이른다.19) 특히 1950년
중반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여성국극단은 광주의 극장가를 통해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그 중에서도 임춘앵, 조금앵 등이 활동했던 국극단이 가장 인
기 있었다. 1950년대 중후반으로 들어서면서 여성국극단인 ‘임춘앵과 그
일행’의 작품이 무대에 자주 오른다. 보통의 악극 입장료가 150~200환을
받았을 때 최고 300환을 받았던 ‘임춘앵과 그 일행’은 김진진이 출연하는
‘여성국극단 진경’과 함께 광주극장 무대에 오른 악극단 중에서 가장 많은
인기를 누렸다.20)
이런 인기를 실감하듯 당시 광주에서는 여성국극단에 들어가기 위해 소
리를 배우는 여성들이 많았다.
그때 호남국악원에서 공대일 선생이 가르칠 때 5-60명 됐거든요. 처
녀들이. 여성국극단 임춘앵이나 조금앵씨가 한번 다녀가면 100명 쯤 되
요. 여학생들이 여성국극단 간다고. 그 때 당시 임춘앵 인기는 말로 다
할 수가 없어.21)
여성국극단은 외국영화 배급과 국산영화 제작이 일시 중단되었던 한국
19) 위경혜, 광주의 극장 문화사 , 다지리, 2005, 127~137쪽.
20) 위경혜, 위의 책, 111~112쪽.
21) 조상현, 광주 YWCA 강습 중 회고담(2009.07.27)
32 판소리연구 제31집
전쟁 이후 대표적인 대중극 극단으로 존재했다. 1956년 당시 전국적으로
600여 명의 창극인이 활동하였으며, 창극의 관객 동원수가 신극이나 악극,
영화에 비해서도 높이 나타난다.22)
이렇듯 해방 이후 광주권번을 중심으로 한 명인·명창의 유입은 광주의
국악을 활성화시키는 역할을 했다. 반면 박동실로 인해 광주판소리가 위축
되는 위기의 시점도 있었다. 김성권 역시 이런 굴곡진 해방기에 광주로
찾아든 국악인 중의 하나다.
김성권은 1926년생으로 그가 가장 활발하게 활동했던 시기를 예상해 보
면 1946(20세)~1981년(55세)이다. 김성권이 광주에서 거주하기 시작한 것
은 1955년경이며, 광주지역 국악계의 흐름이 다양하게 변모되는 시기이기
도 하다. 다시 말해, 광주의 국악사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에 활동한 김성권
은 광주지역의 판소리를 논하고자 할 때 절대 빠질 수 없는 인물인 것이다.
김성권의 집안은 종조부인 ‘광주 속골 명창 김채만’으로부터 이어져 오는
판소리 명문가이다. 김채만은 이날치의 문하에서 소리를 배웠고, 1902년에
는 김창환의 권유로 상경해 어전에서까지 소리23)를 한 당대 최고의 명창이
었다. 부친 김동욱은 완도에서 태어나 강진에서 자랐으며 정정렬에게 판소
리를 배웠다.24) 집안 재산이 넉넉했는지 협률사를 꾸려서 공연활동을 많이
다녔다고 하며, 40세에 요절하였다.25)
김성권은 강진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13세 때부터 3년간 부
친인 김동욱에게 <춘향가> 중 이별가 대목을 배웠다. 또한 이 시기 김채만
22) 백현미, 한국 창극사 연구 , 342쪽.
23) 이국자, 「속 판소리 맥따라(김채만 편)」, (월간) 예향 47(8월호), 광주일보사, 1988,
233쪽.
24) 국립문화재연구소, 판소리 유파 , 139쪽. 책의 내용에는 정정렬과 김채만에게 소리를
배웠다고 기록되어있으나, 실재 당시 조사된 녹음된 자료에는 부친이 김채만에게 소리
를 배웠는지에 대한 내력은 알지 못한다고 하였다.<국립문화재연구소 ‘무형문화재종합
조사(판소리 유파)’ 김성권 대담 기록(1990.10)>
25) 국립문화재연구소 ‘무형문화재종합조사’ 김성권 대담 기록(1996.04.23/미발간 자료).
광주국악사의 전개와 명고 김성권의 역할 33
의 수행고수로 있었던 박선행에게 고법의 기초를 배우는데, 박선행은 김동
욱의 외삼촌이 된다. 부친이 협률사를 꾸렸을 때 집에 명인·명창들이 모
여 한두 달 연습하고 공연을 떠나곤 했는데, 어린 김성권의 눈에 이들의
연습이 재미있어 보였다고 한다. 하지만 따로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어
옆에서 눈으로 구경하며 어설픈 북을 연습하다가 박선행의 눈에 띄어 3년
간 고법을 사사받았다.
하지만 부친은 김성권이 소리를 배우고 북을 치는 것에 반대했다.26) 그
때문에 일본에 있는 외삼촌에게 보내졌는데, 약 16~7세경이다. 김성권은
일본에서 학교를 다니다가 해방이 된 이후에야 돌아왔다. 해방되기 전 부
친이 이미 돌아가셨기 때문에 이후에는 거리낌 없이 본격적으로 판소리
공부를 시작하였다.
20세 되던 해(1946년) 보성에서 정응민에게 2년간 <심청가>를 사사받았
다.27) 또한 정응민의 아들 정권진과 함께 지내며 그에게 소리를 배우기도
하였다. 같은 시기에 정응민 밑에서 김연수와 박기채가 공부하고 있었는
데, 김성권은 이들과 함께 소리를 배우기도 하고 그들의 소리에 맞춰 북을
쳐 주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김명환도 이때 정응민 밑에서 수련하고
있었는데, 김성권은 김명환과 함께 고법에 대해 서로 의견을 나누었고, 영
향도 많이 받았다고 한다.28)
이후 군대에서 7년간을 보냈고, 다시 돌아와 공부를 시작한 것이 1955년
이다. 이때부터 김성권은 광주에서 평생을 보내게 된다. 전남민속예술학원
26) “그러니까 북치는 것을 13살때부터 시작을 했었는데 아버지가 절대로 반대를 해. 나는
해도 너는 하지 말라고 말여. 내가 3대 독자였으니까 그럴만도 하셨것는디 아버지 무서
워서 못하겠어. 그런데 아버지가 가만히 지켜보니까 만류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겠거
든. 그래서 아버지가 꾀를 낸 것이 일본에 내 외삼촌한테 보내버린거야. 그때 외삼촌은
일본사람으로 귀화를 해서 계시는디 북 못치게 할라고 보내버린 것이지.<강진문화원,
강진문화한마당 , 2003, 9~10쪽.>
27) 전 정(남, 1946년생)은 김성권이 <심청가>가 외에 <춘향가>도 배웠었다고 증언 하였
다.<자택인터뷰(2010.08.01)>
28) 국립문화재연구소 ‘무형문화재종합조사’ 김성권 대담 기록(1996.04.23/미발간 자료).
34 판소리연구 제31집
에서 정광수에게 소리를 배우면서 고수로 수행하기도 하고, 같은 시기 호
남국악원에서 공대일, 성원목에게도 고법을 배웠다. 특히 성원목에게는 5
년 동안 사사 받았다. 그런데 공대일과 성원목이 고법보다 소리가 훨씬
뛰어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고법보다는 소리를 중점적으로 배웠을 것이
라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송순섭은 이들이 고법에 뛰어났음을 증언하고
있다.
내가 처음에 광주에 와서 공대일 선생님이랑 공부를 헐 때 귀동냥으
로 들었는디, 여느 소리꾼이 박봉술 선생을 자기 집에다가 독선생으로
모셔다놓고 그런디, 선생들이 모두 거기를 갔다와. 공대일 선생도 그렇
지. 늘 거기를 다녀오셔. 광주에서 북 잘 치는 사람들이 다 거기를 가서
소리를 듣고 와.
이때 북 잘 치는 사람들 중에는 성원목, 백낙인, 김명환도 함께 속해 있
었다.29) 특히 정광수가 무형문화재 보유자가 되었을 때는 서울에서도 활동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었는데, 더러는 김성권의 북 솜씨를 칭찬하였다고
한다.30)
초기에 판소리를 배우다가 고법으로 돌아서게 된 것은 목의 성량이 뛰어
나지 못했기 때문이며, 특히 남자는 소리만 해서는 먹고살기 힘들다고 여
긴 까닭이기도 했다. 당시에는 소리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고수는 귀했던
때이고, 게다가 주위에서 북 솜씨가 좋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게 되니 자연
스럽게 고수로 마음을 굳히게 된 것이다.31)
이렇듯 김성권은 부친의 반대에도 굴복하지 않고, 국악에 대한 열성을
불태워 집안 대대로 이어온 예술가 집안의 피를 근·현대로 지속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이는 또한 김성권을 중심으로 한 광주판소리의 지속을 예
29) 이명진, 「판소리 명창 송순섭론」, 전남문화 17, 2004, 111쪽.
30) 강진문화원, 강진문화한마당 , 12쪽.
31) 국립문화재연구소 ‘무형문화재종합조사’ 김성권 대담 기록(1996.04.23/미발간 자료).
광주국악사의 전개와 명고 김성권의 역할 35
고하는 것이기도 하다.
2) 2기(1960년~1985년):광주고법을 정립하다
1960년대 들어서면 여성국극은 급속히 쇠퇴한다. 여성국극 쇠퇴의 내적
인 요인은 레퍼토리의 진부함과 창자의 부족 등으로 볼 수 있고, 외적인
요인으로는 연극, 영화 사업의 발달이라고 할 수 있다. 1956년 국산 영화
보호 육성을 위하여 입장세 면세 조치를 하는 등 국가적인 지원에 힘입어
국산영화 붐이 형성되면서 여성국극은 점차 도태되어 갔다. 또한 연극계
전반의 재정비 현상과도 무관하지 않다. 1950년대 후반에 신춘문예를 통해
신인들이 등장하고 기성작가들이 단막극을 지상에 발표하는 등 창작극 공
연의 터전이 마련되고, 1962년 드라마센터의 개관, 국립극장의 재발족, 극
단 등이 의 창단되면서 연극이 전문화 되었다.32) 특히 같은 해 사단법인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의 창립은 연극의 부흥을 가속화 시켰다.33)
광주도 예외는 아니었다. 1962년 2월 예총산하 「연극협회 광주지부」가 발
족되어, 광주지역 연극의 부흥을 가져왔다. 뿐만 아니라, 1960년대 광주지
역의 영화 사업 역시 붐을 일으켰다. 1969년 정초에 광주의 15개 극장에
몰린 관객이 10만으로 집계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상황을 짐작해볼 수 있
다.34)
하지만 연극의 득세에도 불구하고 광주의 국악은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여성국극단이 활성화 되었을 때도 그 이면에서 광주의 국악은 전통적인
방법으로 그 명맥을 유지해 오고 있었다. 이를 증명하듯 1960년 초에도 협
률사와 유사한 공연형태가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위 협률사라고
일컫는 국극단, 악극단이 극장에서 점차 사라져 갈 때, 광주에서는 극장이
32) 백현미, 한국 창극사 연구 , 343~344쪽.
33) 박규상, 광주연극사 , 81쪽.
34) 위경혜, 광주의 극장 문화사 , 112쪽.
36 판소리연구 제31집
아닌 노상으로 무대를 옮겼다. 광주 천변 쪽에는 천막을 친 공연무대가
크게 들어섰고, 그곳에서는 수시로 판소리 공연이 펼쳐졌다. 구경꾼은 인
산인해를 이루었고, 광주에 거주했던 소리꾼치고 그곳에 오르지 않은 사람
이 없었다. 조상현은 이를 일러 일명 ‘나일론극장’35)이라고 칭하였다. 조상
현도 나일론극장에서 소리를 한 인물이다. 먹고살기 어려운 소리꾼들은
나일론극장에서 공연하며 생계를 꾸렸다. 조상현은 당시 무대에서 소리를
하고 있었던 홍갑수의 권유로 나일론극장에 섰다고 한다. 공연 중간에는
약도 팔았다. 원래는 약을 파는 것이 주요 목적이었는데, 사람들을 끌어들
여 약을 팔기 위해서는 볼거리가 필요했다. 이 때문에 약장수들은 소리꾼
을 불러 놓고 무료공연을 하며 구경꾼들을 모았다. 하지만 사람들은 약
구입 보다는 명창들의 소리를 듣기 위해 모여들었다고 한다.36) 광주지역에
아무리 소리꾼이 많았더라도 순식간에 소리꾼을 끌어 모으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다. 다시 말해 국극단, 악극단이 활동했던 1950년대에도 노천에
천막을 치고 공연을 하는 형식의 협률사가 지속적으로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1970년 중후반에도 광주에는 여전히 국악교육원이 활성화되었다. 당시
광주에는 ‘남도국악학원, 광주국악원, 서강정악학원, 춘광국악원, 금호국악
원’ 등 사설학원이 있었다.
남도국악학원에서는 공대일(판소리), 차금순(무용), 이영애(기악)가 선
생으로 있었다. 광주국악원은 시조를 중심으로 가르쳤고, 당시 원장은 이
상술이다. 1973년부터 김성권이 판소리 및 고법 강사로 활동한 바 있다.
서강국악학원은 채정희(무용)와 송명숙(가야금)이 학생들을 가르쳤다. 춘
광국악원은 주로 무용 교육이 중심이었고, 금호국악원에서는 1978년 김성
권이 판소리 및 고법 강사로 활동하였다.37)
35) 필자가 조상현 명창에게 판소리를 배울 때, 나일론극장에 대해 회상하는 이야기를 자주
접한 바 있다.
36) 전정(남, 1946년생) 자택인터뷰(2010.08.01)
광주국악사의 전개와 명고 김성권의 역할 37
광주국악원은 1974년 6월 광주시립으로 승격되어 광주지역 국악인들의
집합 장소, 후진양성 기관으로서의 역할을 하게 된다. 광주시립국악원 설
립에는 박인천(朴仁天)을 비롯한 지역 유지들의 역할이 컸다. 특히 국악을
좋아했던 박인천은 시립국악원의 운영비 일부를 보조했다. 광주시립국악
원 초창기 정광수·박춘성이 소리를 가르치고, 초대 원장을 지낸 안치선이
시조를 가르쳤다. 이 시기 창을 배우는 사람이 백 여 명이나 될 정도로
열기가 대단했다. 당시 국악을 배울 만한 교육기관이 없는데다 이름 있는
선생들이 모여 있어 국악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 시립국악원을 찾았
고 한때나마 국악을 공부했던 사람들도 이곳을 찾아 함께 공부했던 사람들
의 안부를 확인하는 등 국악인 연락처로서의 역할도 톡톡히 했다.38) 그러
나 시립국악원도 광주시의 지원 부족, 광주시립국극단 창단, 전남대학교
예술대, 광주예고 설립 등으로 인해 1989년 폐쇄된다. 당시까지만 해도 광
주의 유일한 관립 교육기관의 폐지는 곧 국악인들의 반발을 샀고, 국악인
들이 모금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광주시립국악원이 해체된 지 만 2년을 맞아 광주에 시립국악원이 부
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국악인들 사이에 높게 일고 있다. 광주시립국
악원이 해체된 것은 지난 87년 12월 31일. 70년에 개인이 설립, 운영해
오던 국악원이 광주시에 기증된 것은 74년이었다. 그 뒤 광주시가 시립
국악원으로서 국악인의 양성을 도맡아 14년을 계속 운영해 왔으나 87
년에 시립국악원이 안고 있는 몇 가지 문제점을 들어 일방적으로 폐쇄
해 버린 것. 당시 정모문화계장은 「국악원이 수강생이 적고 국악원자체
내에서 불협화음이 일고 있어 폐쇄한다」고 폐쇄 이유를 밝혔다. …[중
략]… 그러나 일부 국악인들은 「드러난 몇 가지 문제점들을 개선하려는
37) 국립문화재연구소 ‘무형문화재종합조사’ 공대일 대담 기록(1976.04/미발간 자료) / 김성
권 관련내용은 무형문화재조사보고서 참조<문화재관리국, 무형문화재 약보고서 합본
58 , 560쪽.>
38) 지형원, 「남도국악을 살리자」, 124쪽.
38 판소리연구 제31집
노력대신 관립 교육기관을 폐쇄해버린 처사는 국악발전을 위해 옳지 못
한 일」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39)
그러나 시립국악원은 지금까지도 다시 설립되지 못하고 있으며, 간혹
시립국악원을 부활시키자는 의견만 한 번씩 제기되고 있을 뿐이다.
한편, 1981년 전남에서는 유일하게 대학기관에 국악과가 설치되었다. 전
남대학교 예술대학에 설치된 국악과는 김영재(거문고), 정권진(창악), 성창
순(창악), 백대웅(국악이론) 등의 교수진으로 출발하였다. 이렇게 정식적으
로 대학기관에 국악과가 설치됨으로써 광주지역에서는 국악을 전공으로
하는 후진 양성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이렇듯 아직은 전통국악이 지속되고 있을 때 김성권은 스승의 길로 접어
든다. 1960년 청암고법연구소를 열고 판소리와 고법을 가르치며 제자들을
키우기 시작한다. 1967년에는 광주호남예술학원에서 판소리와 고법 강사,
1973년에는 광주국악원에서 판소리 및 고법 강사, 1978년 광주금호국악원
에서 판소리 및 고법 강사를 하면서 많은 제자들을 육성했다. 특히 호남예
술학원과 광주국악원은 이 시기 광주지역에서는 내로라하는 명인·명창들
이 모여 교육열을 불태웠던 곳이다. 이는 김성권의 고법이 그만큼 뛰어났
음을 대변해 준다. 김성권에게는 많은 제자가 있다. 박시양, 김대규, 윤진
철, 이명식, 김재일, 이복수, 정덕채, 임영일, 최덕임, 김성식, 박봉서, 이희
옥, 이원우, 조기만, 송종호 등이 현재 조교 및 이수자로 활동하고 있다.
이 중 윤진철은 현재 고법이 아닌 판소리 명창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5월
광주> 등의 창작판소리도 활발하게 추진하고 있는 신진이다. 또 박시양과
임영일은 광주지역 소리꾼들이 자주 찾는 대표적인 고수로 활발하게 활동
을 하고 있다.
김성권의 사승관계를 살펴보면 중요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근·
현대로 이어지는 고법의 연결고리이자 고제 고법의 마지막 전승인이라는
39) 무등일보(1989.12.27)
광주국악사의 전개와 명고 김성권의 역할 39
점이다. 박선행에게 고법을 배울 때까지만 해도 지금과 같은 고법의 기본
장단은 없었다. 박의 개념도 없었고 그저 노래에 따라 북을 때렸다. 게다가
또드락 없이 치면서, 북을 때리는 것보다 북을 들었다 놓았다 하며 추임새
를 더 많이 사용하였다. 또 노래를 풀면 손도 풀어내는, 즉 노래에 따라
자유로운 고법을 구사했다고 한다.40) 이후 김성권은 공대일, 성원목에게
북을 배우고, 김명환과 교류하며 체계적인 고법을 습득했을 것이다. 특히
김명환은 1956년에 광주에 고법연구소를 차리고 명창 정광수, 공대일, 안
채봉, 한애순과 교류를 트고 자신의 고법 세계를 넓혔다. 그리고 1968년
광주를 떠나 서울에서 고법연구소를 열었다. 김명환의 제자들은 그의 북을
일러 ‘창자가 뱉어내는 모든 소리를 질서 정연하게 엮어냈으며, 그의 추임
새 새김은 생사맥(生死脈)을 눌러 트듯 명쾌했다’고 평가한다.41) 고법의 장
단을 질서 정연하게 엮어내며 고법에 새 지평을 연 것이다.
이런 환경에서 고법을 배운 김성권은 ‘배운 것은 모두 사용한다’는 철학
을 가지고 있었다. 다시 말해 박선행, 공대일, 성원목, 김명환 등에게서 배
운 것들을 연주할 때 적시적소에 잘 사용한다는 것이다. 이런 그의 철학은
제자 교육에 잘 드러나고 있다.
가락 하나 가르쳐 달라고 해도, 가락이 없다고 합니다. “가락을 연구
해서 쌓는 것도 좋지만, 느닷없이 나오는 것이지 만들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나도 무엇을 쳤는지 모른다.”라고 말합니다. 동영상을 보여 드
리면 “내가 저렇게도 쳤는갑다.”하십니다. “순간에 영이 치는 것이지 내
가 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가락이라는 것이 생각나지 않는다. 다만
나만 치는 것은 나한테 배워야 제자라고 할 수 있으니, 그것은 배워라”
하고 가르쳐 주시기는 하는데, 한두 개 넣는 것만 가르쳐 주셨습니다.
“공연 같은 거 보고 남의 것을 배껴 와서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 거
지, 선생이 이렇게, 저렇게 가르쳐 주면 발전이 없다. 나에게 배운 사람
40) 국립문화재연구소 ‘무형문화재종합조사(판소리 유파)’ 김성권 대담 기록(1990.10)
41) 광주일보(1993.07.27)
40 판소리연구 제31집
이라도 제각기 다르게 칠 줄 알아야 하지, 전부 똑 같으면 그게 뭐냐.”
심지어는 선생님에게 배운 것을 열심히 치는데 “그 전에 배운 것도 있
고, 김동현에게 배운 것도 있는데 왜 내게 배운 것만 하려고 하냐. 전에
배운 것도 다 쳐야지.”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42)
김성권의 이러한 지도 때문인지 실제 김성권에게 배운 제자들은 전부
다르게 치는 것이 특징이라고 한다. 이렇듯 김성권은 꿋꿋하게 자신의 고
제 판소리(고법)관을 관철해 온 인물이다. 그의 정신적인 철학과 정직하고
순수했던 사고방식은 제자들에게도 이어져 광주지역 고법의 한 유파를 이
루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3) 3기(1986년~2009년):광주국악계의 거목으로 뿌리내리다.
1988년 말 광주지역의 국악인들이 모여 공식적인 기구인 광주국악협회
를 창단하였고, 1986년에는 전라남도립남도국악단, 1989년에는 광주시립
국극단이 설립되어 광주국악의 발전에 희망의 조짐을 보였다. 하지만 곧
이들 조직은 문제점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끊임없는 불협화음을 야기했다.
국악협회는 발족을 한 뒤 크게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던 것으로 보이
며,43) 1990년대에는 광주·전남국악협회가 비전문적인 국악동호인들의 친
목 위주의 운영으로 바뀌게 되어 전문적인 활동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
다.44)
42) 박시양(전수교육조교), 고법연구소 인터뷰(2010.08.03)
43) 88년 말에 발족된 광주국악협회는 발족 3년째를 맞고 있으나 뚜렷한 자체 행사나 국악
사업을 제대로 벌여나가지 못해 국악 관계자들을 안타깝게 했다. 창립 임원진이 마찰을
빚어 2대 회장에 崔錫坤씨가 선임됐으나 국악인들의 규합과 국악 활성화, 국악인들의
지위향상 등에 큰 진전을 보지 못했다. 이 같은 원인은 임원진의 경험 부족 외에도 재
원빈약 때문인 것으로 분석돼 광주지역의 국악발전을 위해선 정책적인 배려가 뒤따라
야 할 것이라는 결론을 낳았다.<무등일보(1990.12.14)>
44) 현재의 국악협회는 젊은 국악인들이 거의 참여하고 있지 않은데다 회원 대부분이 전문
광주국악사의 전개와 명고 김성권의 역할 41
광주시립국극단도 잦은 불협화음으로 시끄러운 초창기를 맞이하게 된
다. 광주는 여러 지역에서 모여든 국악인들이 집대성되었기 때문에 다양한
유파가 존재하고 있으며, 대학이나 예고 등을 통해 성장한 신진 인력도 많
이 배출되기 시작했다. 특히 광주판소리라고 일컫는 ‘김채만-박동실-한애
순’로 이어져 오는 소리는 이 시기가 되어 전승 위기에 처하게 된다. 이렇듯
구심점이 사라진 광주지역의 소리판에서 소리꾼들을 하나의 단체에 모았
을 때 겪어야 하는 진통은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유파 간의 갈등,
신구의 갈등은 이 시기 광주지역 국악계의 가장 큰 골칫거리였다.
게다가 광주시립국극단은 광주시립국악원을 폐쇄시키고 생성된 단체
다. 그렇기 때문에 그 시작부터 문젯거리가 많았다. 1988년 7월 시에서 계
획하고 내무부의 승인까지 받아 놓은 상태에서도 무려 10여개월간 혼미만
을 거듭했고, 1989년 4월 창단45)을 하겠다고 했다가 5월로 밀리는 등 우여
곡절을 겪었다. 당시의 신문기사에서는 인적자원구성과 국극단의 성격문
제가 주된 원인이었고, 그 이면에 해체된 시립극단과의 갈등, 국악인과 행
정당국과의 이견차도 심각하게 작용했던 것으로 알려졌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인적자원의 측면에서도 활동 중인 국악인이 20여 명이 넘고, 전남대
에서 해마다 15명씩 배출되는 인원을 안고 가려고 했을 때 인원이 너무
많다는 것, 그리고 활동 중인 국악인들 중 몇 명을 제외하고는 수준이 의심
스럽고 대학을 졸업한 학생들은 기량 면에서 떨어진다는 것 등이 당시의
목소리다. 거기에 더해서 1986년에 창단된 전남도립국악단과의 성격이 비
슷하다는 것과 예산 부족도 한 몫 하였던 것 같다.46) 1년 후, 시립국극단은
가가 아닌 국악동호인들로 채워져 이들에게 국악의 활성화를 기대할 수는 없는 입장.
특히 광주 국악협은 시·도 분리 이후 지금까지 표류하고 있는 상태이며, 전남 국악협
도 회원들의 기량을 향상시키고 국악의 활성화를 기한다는 차원이 아닌 친목 위주의
운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지형원, 「남도국악을 살리자」, 128쪽.>
45) 동아일보(1989.03.16)
46) 연극인들은 시립극단 해체당시 약속했던 연극인 참 약속을 지키라는 것이고, 시측은 약
속이 아닌 고려였다며 객원출연만을 보장하겠다는 것이었다. 또 국악인과 시당국의 이
42 판소리연구 제31집
또 한 번의 회오리가 몰아친다. 창단 1년 만에 기성국악인 6명이 사표를
낸 것이다. 이때의 주원인이 바로 기성·신진의 대립, 계보 간의 갈등이었
다. 신문 기사를 살펴보면, 기성국악인들과 대학을 갓 졸업한 국악인들과
의 대립이 있었고, 기성국악인들의 재임용을 위한 오디션 과정에서 펼쳐진
상임연출자와의 갈등이 있었다. 단원들끼리의 불화는 나름대로의 계보나
바디를 갖고 있는 국악인들의 특수성으로 보지만 지역 국악의 진흥을 위해
서는 꼭 극복해야 할 병폐임을 지적, 기성국악인들과 대학국악과나 국악고
등학교를 나온 신진 국악인들 간의 세대 차이 극복도 중요한 과제 등이
중요한 내용으로 다루어지고 있다.47)
전라남도립남도국악단은 1986년 8월 9일 남도국악 보존·전승이라는 취
지로 창단되어 그동안 기악·창악·무용 등 3개 분야에서 1,168회(2009년
까지)의 공연을 가졌다. 김성권도 남도국악단 창단과 함께 고수로 재직하
였다. 김성권은 지정고수로 9년간(1994.04.30 퇴임)활동한다. 김성권이 국
악단을 그만두기까지는 약 230회의 공연이 있었으며, 이 중 창악과 관련된
공연에는 김성권이 빠질 수 없었을 것이므로 많은 공연을 했음을 알 수
있다. 남도국악단은 운영부분에 있어서 도(道廳)와 단원 간의 갈등이 잦았
던 것 같은데, 1988년 이후부터 전임단장이 없었던 관계로 둘 사이의 중재
역할이 제대로 되지 않았고, 결국엔 1990년에 이르러 갈등이 표면화되고
말았다. 단원 32명이 집단으로 사표를 냈고, 도는 강력 대응으로 남은 단원
까지 해직시키는 극한 상황까지 갔다. 1991년 전임단장으로 조통달이 임명
되어 중간역할을 잘 소화해냈고, 결국 단원들의 공무원 7급대우, 정년 58세
까지 연장하는 선에서 일단락되었다.48) 2010년 현재 64명의 인원이 활동
중이다.
견차이로는 국악인의 욕심과 시당국의 조정이 팽팽히 맞선 걸로 얘기됐다.<광주일보
(1989.03.21)>
47) 무등일보(1990.07.10)
48) 광주일보(1990.12.20), 무등일보(1991.04.17)
광주국악사의 전개와 명고 김성권의 역할 43
이렇듯 잦은 문젯거리가 자주 발생하다 보니, 1989년 즈음 광주는 판소
리 전승 소리꾼이 절멸 위기에 처했다는 기사가 날 정도로 위화감을 느껴
야 했다. 이제 막 생겨난 국악단체들은 문제들로 시끄러웠고, 광주지역에
있는 국악인들을 모두 수용할 만큼 많은 인력을 뽑을 역량도 되지 않았다.
게다가 지역에서 활동하는 무형문화재들은 모두 노익장이었고, 그 다음 세
대의 최고 명창이라 일컫는 조상현, 성창순 등은 이미 서울에 터를 잡은
지 오래였다.49) 또한 이 시기 전남대학 국악과에서 배출되는 신진 인력은
갈 곳이 마땅치 않아서 전공을 살리지 못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40여
명의 졸업생 중 전공을 살린 사람은 5명뿐이었다는 것은 그때의 상황을
여실히 보여준다. 결국 그들은 생계를 위해 서울로 떠나는 길을 택할 수밖
에 없었다. 이런 현황이 비단 소리뿐이겠는가.
하지만 이런 상황에 관계없이 김성권의 교육과 연주활동은 광주에서 지
속적으로 이루어졌다. 김성권의 능력이라면 분명 서울에서도 얼마든지 통
했을 것이다. 김성권은 큰 명창들의 고수로 많은 활동을 했기 때문이다.
박봉술, 김소희, 박초월, 박녹주 등 당시에는 내로라하는 대명창들도 광주
에서는 김성권을 찾았다. 광주하면 고수 김성권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 것
은 광주에 그만한 실력을 지닌 고수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특히 김소희는 김성권의 고법을 인정한 인물로 김성권의 무형문화재 지
정에 큰 역할을 했다.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던 김명환(78년 지정), 김
득수(85년 지정), 김동준(89년 지정)이 차례로 모두 타계하고 국가지정 고
수 자리가 공석이 되었을 때, 문화재전문위원에게 광주에 김성권이라는 명
고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 것이 바로 김소희다. 이에 문화재전문위원들은
김성권의 사승관계, 활동, 고법에 대한 다양한 조사를 실시한 후, 기능보유
49) 이 지역의 판소리 인간문화재는 공대일(77), 한애순(66), 박춘성(70) 등 3명. 이 중 공대
일은 고령과 병으로 전혀 소리를 못하고 있다. 이 지역 출신으로 국가지정 판소리 인간
문화재 후보인 조상현씨(50), 성창순(56)씨가 전남대 강사로 활약하고는 있으나 이들은
이미 오래전에 서울로 떠났다.<전남매일신문(1989.01.25)>
44 판소리연구 제31집
자로 지정하기에 적격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또한 안숙선이 김성권의 북에
소리를 하고 나서 스승 김소희에게 배운 대로의 소리를 하였다는 말50)을
했다는 뒷이야기는 그만큼 김소희 소리에 맞추어 북을 많이 쳤다는 사실을
대변해 준다.
이렇듯 실력을 인정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김성권은 중앙으로 나가지 않
고, 광주에서 꿋꿋하게 제자를 양성하며 일생을 마감했다. 그가 물질(돈)에
욕심이 없었던 까닭이기도 했고, 1960년부터 자신에게 북을 배워 온 제자
사랑도 매우 각별했기 때문이다. 실제 그는 생계에 크게 얽매이지 않는
삶은 살았다. “북 치고 다니는 사람 주머니에 돈 있을 날 없고, 그러나 지
먹을 막걸리 값 떨어질 날도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또 제자들에
게 레슨비를 받지도 않았다. 국가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라고 매달 들어오는
돈이 있다는 이유였다. 제자들과 함께 술을 마실 때에도 슈퍼를 활용했고,
술값은 반드시 자신의 몫이었다.51) 이렇듯 인간적이고 정직한 그의 성품은
향후 광주지역의 소리판을 이끌어 갈 많은 제자들을 키워냈고, 광주판소리
사의 전개 역시 더욱 견고하게 다져지게 되었다. 1994년 도립국악원을 그
만둔 후에도 그는 죽음의 문턱 마지막까지 자신의 철학과 정신을 제자들에
게 전하고자 하였다.52)
김성권과 같은 철학과 의지를 지닌 여러 국악인로 인해 광주국악계의
각 단체는 점차 튼튼하게 뿌리를 내렸다. 지금은 국악협회, 시립국극단,
도립국악단 모두 광주국악의 뿌리를 지켜가고 있는 큰 기둥이 되었다. 또
한 최근 광주지역 국악계는 새로운 날개를 펼쳤다. 광주문화예술회관이
설립되면서 문화예술의 선도적인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고, 그 뒤를 이어
광주빛고을전수관이 설립되어 국악 공연이 활성화되고 있다. 또한 임방울
50) 박시양, 고법연구소 인터뷰(2010.08.03)
51) 박시양, 고법연구소 인터뷰(2010.08.03)
52) 전수교육소의 명칭은 ‘소리마당 → 청암 판소리 고법 동호회 → 청암 판소리 고법 연구
소(자택)’ 등으로 변화되었다.<박시양, 전화 인터뷰(2010.08.16)>
광주국악사의 전개와 명고 김성권의 역할 45
국악진흥재단은 임방울국악제를 내세워 광주판소리의 부흥에 힘쓰고 있으
며, 광주국악대전은 판소리분야에 대통령상을 유치했다. 광주국악협회도
과거와는 달리 공연활동을 폄으로써 점진적으로 국악의 활성화에 일조를
하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지방무형문화재 지정에 대한 관심도 높아져
국악인의 보호·전승에도 힘쓰고 있다.
이런 대규모 단체의 활성화도 주목할 거리이지만 소규모의 동호회 활동
도 눈여겨볼 만하다. 1988년 비전문 판소리인이 뜻을 모아 만든 ‘울림창악
연구회’는 광주 임동에 연습장을 확보하고, 학생, 일반인, 사업가, 노동자,
주부 등 50여 명이 모여 판소리를 연구하고, 학습하였다.53) 이를 필두로
많은 동호회가 형성되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곳으로는 ‘광주창우회(조상
현 보성소리)’, ‘무진율방(귀명창 동호회/대표 박시양)’ 등이 있다.
3. 맺음말
본 고에서는 교육과 공연 단체를 중심으로 해방 이후 광주국악계의 전개
를 살피고, 그 중 광주판소리를 중심으로 김성권의 역할을 조명하고자 하
였다. 해방 이후 광주는 교육과 창극(국극) 공연이 매우 활성화 되었던 곳
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월북 명창들로 인해 숨죽이고 살아야했던 암흑기를
견뎌내기도 했다. 이런 역동적인 굴곡을 지니고 있는 이 시기는 광주국악
사를 다룰 때 반드시 짚어야 할 중요한 부분이다.
이런 광주국악사의 전개 속에서 김성권이 이룩했던 성과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집안 대대로 광주판소리 전승 계보를 지속적으로
이어갈 수 있는 구심점 역할을 했다는 것, 둘째, 김성권류의 판에 박히지
않는 고제 고법을 통해 광주고법을 정립했다는 것, 셋째, 광주지역의 고수
53) 한국일보(1989.03.03)
46 판소리연구 제31집
로서 꿋꿋하게 지역을 수호하는 거목이었다는 것이다.
사실 김성권이 살아온 내력을 살펴보면 당시의 시대와는 다르게 큰 굴곡
이나 위화감은 없었다. 집안 내력에서부터 이미 그에게 예술의 재능을 주
었고, 정응민, 박선행, 성원목, 정광수 등의 큰 스승을 만나 교육을 받고
수행고수로서 활동한 것도 그렇다. 또 광주지역의 유명 국악학원에서는
스승으로서 자신의 제자도 길러냈다. 어디 그 뿐인가?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자마자 도립국악원이 생겨 자신의 능력을 십분 발휘할 수 있는 장을
열어 주었다. 생각해보면, 이렇게 시대가 만들어 주는 분위기에 잘 짜인
듯이 들어맞는 인물도 드물다. 하지만 이런 기회를 얻었던 것도 ‘광주’라는
지역을 사랑하며, 수시로 자신의 실력을 갈고 닦았던 노력이 있었기에 가
능했던 것이다.
광주국악사의 전개와 명고 김성권의 역할 47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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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등일보(1989.12.27), 무등일보(1990.07.10), 무등일보(1990.12.14), 무등일보(1991.
04.17)
전남매일신문(1989.01.25)
한국일보(1989.03.03)
48 판소리연구 제31집
<국문초록>
광주는 해방이후 국악교육과 창극단체의 활동이 매우 활발했던 지역으
로 수많은 명인·명창들이 찾아든 곳이다. 당시 광주에는 부유한 풍류객이
많았고, 이들은 판소리를 즐기며 후원도 아끼지 않았다. 1950년 경 중앙에
서 판소리가 경쟁력을 잃었을 때에도 광주에는 무수한 풍류객이 있었다.
한편 광주판소리는 박동실의 월북으로 인해 크게 흔들렸고, 심지어 ‘김
채만-박동실’로 이어지는 판소리는 절멸의 위기에 봉착하기도 했다. 하지
만 해방이후 지역을 중심으로 꿋꿋하게 활동한 명인·명창들로 인해, 오늘
날 광주에는 보성소리, 동초제, 동편제 등 여러 유파들이 아우러져 광주지
역의 개성 있는 판소리사를 써내려가고 있다.
본고에서 논의한 명고 김성권은(1926~2008) 광주국악사의 가장 굴곡적
인 시기부터 광주를 무대로 하여 평생을 활동한 명인이다. 게다가 그의
집안은 광주판소리의 초석을 이루는 역할을 했다. 그의 종조부인 김채만은
광주 속골에 거주했던 명창으로 박동실, 성원목, 박종원, 공창식, 한성태
등 내로라하는 제자들을 길러냈다. 그의 부친 역시 소리꾼으로 활동하며,
협률사를 조직해 창극의 발전에 힘썼던 인물이다. 이런 가족사로 인해 김
성권은 어린 시절부터 오랫동안 판소리와 고법을 몸에 익힌 전문적인 소리
꾼이자 고수이며, 1991년에는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인정되었다. 하지
만 아쉽게도 김성권의 기록이나 발자취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이는 중
앙이 아닌 지방에서 활동하는 인물이 가지는 약점이기도 하다.
본고에서는 해방이후 광주를 중심으로 펼쳐졌던 국악사를 정리하고 그
전개양상 속에서 김성권이 어떤 구심점 역할을 수행했는가를 살펴보고자
하였다. 특히 해방이후의 광주국악사를 1기(해방~1950년대), 2기(1960
년~1985년), 3기(1986년~2009)로 나누고, 해당 시기별 김성권의 생애사적
변화, 국악사적 역할과 위상 등을 주목하였다.
이를 통해 보았을 때 광주국악사의 전개 속에서 김성권이 이룩했던 성과
광주국악사의 전개와 명고 김성권의 역할 49
는 첫째, 집안 대대로 광주판소리 전승계보를 지속적으로 이어갈 수 있는
구심점으로서의 역할, 둘째, 김성권류의 판에 박히지 않는 고제 고법을 통
해 광주고법을 정립, 셋째, 광주지역의 고수로써 꿋꿋하게 지역을 수호하
는 거목이었다는 점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 주제어:판소리, 김성권, 광주판소리, 국악사
50 판소리연구 제31집
<Abstract>
A Role of Kim Sung-Gwon in the History of
Korean Traditional Music(Gukak) in Gwangju
-Focused on the Postcolonial Period-
Lee, Myeongjin
Gwangju in South Korea was where Korean traditional music had been
educated and its traditional opera companies had actively given their performances
since Korea was freed from the rule of Japanese imperialism, and thus many
masters flocked there. In those days there lived many men of taste in
Gwangju, who were wealthy and enjoyed their traditional music and was
dedicated to supporting it. In the 1950s the traditional music lost competitiveness,
but in Gwangju there were many men of taste.
Meanwhile, the traditional music in Gwangju(Gwangju-Pansori) suffered
greatly with Park Dong-Sil’s defecting to North Korea. As Gwangju-Pansori
had passed down to Kim Chae-Man and Park Dong-Sil, his defection drove
it into a crisis of disappearance. But fortunately, many masters have upheld
it since Korea was liberated from Japanese colonial rule. As a result, in
Gwangju various schools such as Boseong-Sori, Dongchoje, Dongpyeonje
and others have retained the history of Gwangju-Pansori.
This study is focused on Kim Sung-Gwon(1926–2008), a master of Pansori
who engaged in his activities with Gwangju as his stage from when Gwangju
-Pansori was gulped down by the angry waves. In addition, it is within
bounds to say that his family laid in the foundation of Gwangju-Pansori.
His great-uncle Kim Chae-Man, was a master of Pansori who lived in Sokgol
광주국악사의 전개와 명고 김성권의 역할 51
in Gwangju and turned out the renowned such as Park Dong-Sil, Seong
Won-Mok, Gong Chang-Sik, Han Sung-Tae and others. Moreover, his father
was a renowned singer and contributed to the development of Korean
traditional opera by establishing an organization, HyeopRyulSa. Thanks to the
family, Kim Sung-Gwon naturally came across how to sing the traditional
songs and to play the drum from childhood, and as a result became a
professional singer and drummer. In particular, he was appointed to be a
human cultural asset in 1991. But regrettably, records fail to show the course
of his life, which was an insuperable disadvantage of rural artists.
This study is to arrange the postcolonial history of Korean traditional music
in and around Gwangju, as well as to inquire into the historical activities
of Kim Sung-Gwon. Hereat the postcolonial history of Korean traditional
music was divided into three phases, i.e., phase I (independence – the
1950s), phase II (1960–1985) and phase III (1986–2009). This study looked
into the activities of Kim Sung-Gwon as to changes in his life, role and status
in the history of Korean traditional music.
The results of this study showed that in the history of traditional music
in Gwangju, Kim Sung-Gwon achieved the followings:
First, he was the pivotal figure in passing down Gwangju-Pansori for
generations.
Second, he did not stick to his own style but came up with Gwangju
Drumming on the basis of old-fashioned drumming.
Third, he performed a role of a great drummer in Gwangju and upheld
local art.
* Key words:Pansori, Kim Sung-Gwon, Gwangju-Pansori, History of
Gukak
52 판소리연구 제31집
* 이 논문은 2011년 2월 28일 투고 완료되어 3월 10일 심사완료하고
3월 12일 게재를 확정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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