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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받은 달란트 (마 25:14-30)
* 지난 월요일 광주벧엘교회에서 열린 마을을 섬기는 시골 도시 교회 워크숍에 참가해 안석(광주), 이호군(해남) 등 후배 목사 등의 강의 들으며 많은 생각을 했다. 이렇게 어지러운 세태 속에서도 작은 교회를 섬기며 꿋꿋하게 살아가는 목사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재확인할 수 있었다.
* 여전히 시국은 어지럽다. 물러나라는 박근혜는 비서실장과 비서 몇 명 교체하고 총리까지 갈아치우면서 대통령 놀음을 계속하려나본데, 이미 지지율 5%라는 역대 최악의 상황에 직면해있기 때문에 그런 고집도 오래 가지는 못할 곳이다.
* 이럴 때일수록 나라를 위해, 민족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시기 바란다. 지금의 국난은 어쩌면 전화위복의 기회를 주려는 하늘의 뜻이기 때문에 이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깨어있는 시민, 깨어있는 신앙인들의 적극적인 기도와 참여가 절실하다고 믿는다.
* 학생의 날이었던 지난 3일에는 조례동 국민은행 앞에서 열린 순천촛불집회에 참가했다. 신비, 들판에서님도 참가하셨다는데 사람이 많아 만나지는 못했다. 집회에 참가하면서 중고생들이 많이 참가해 적극 발언하는 모습을 보면서 아직 이 나라에 희망이 남아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어제 서울에서 열린 백남기 농민 영결식과 2차범국민행동 촛불집회에도 중고생들의 참여도가 높았다고 한다. 마치 4.19혁명 때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지난 주말에 3~5만 정도 모여 광우병 사태 이후 최대 인파가 모였다고 하더니 어제는 서울에서만 20만이 넘게 모였다고 하니 급속히 이반되는 민심의 분출을 실감할 수 있었다.
* 사실 박근혜의 퇴진 요구는 부정선거 시비가 있던 집권 초는 물론 세월호 참사에 대한 비인간적이고 무책임한 대처 때부터 본격적으로 제기되었어야 했다. 그때 정신을 차리게 했었더라면 오늘날 이런 황당한 사태를 겪지 않아도 됐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그래도 지금이라도 박근혜 퇴진 요구가 본격적으로 제기되어 그나마 다행이라 여긴다.
* 오늘 말씀은 역시 잘 알려진 달란트 비유이다. 달란트는 아시는 대로 현대 영어이자 외래어인 탤런트의 어원이기도 하다. 그래서 흔히 재능이라 번역되거나 이해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보다 소명이라는 관점에 입각해 이해해볼 수도 있다고 생각된다.
* 본문에 따르면 어느 날 주인이 종들에게 각각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각각 주고 먼 길을 떠났다고 한다. 아시는 대로 한 달란트는 작은 액수가 아니다. 예수가 생존했던 1세기 당시의 기준으로 금 20.4kg에 해당하는 양으로 20만 달러(2억원)가 넘는 금액이다.
* 따라서 이런 엄청난 돈을 받은 종들은 노예가 아니다. 종이나 노예보다는 관리인이나 청지기에 가까울 것이다. 왜 이들이 각기 다른 액수의 달란트를 받았는지는 분명치 않다. 이는 사람마다 타고난 재능이 다르고 받은 소명이 다른 것을 의미하는 것일 수 있다
*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주인이 돌아와서 계산을 하는데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를 받았던 종은 열심히 일을 해서 받았던 돈의 갑절의 이윤을 남겨 주인 앞에 내놓았다. 그러자 주인은 기뻐서 “착하고 신실한 종아, 잘했다! 네가 적은 일에 신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많은 일을 네게 맡기겠다. 와서, 주인과 함께 기쁨을 누려라”(마25:21)라고 칭찬을 했다.
* 그러나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은 주인에 대한 두려운 마음을 갖고 있었던 까닭에, 그 돈을 활용하지 못하고 그대로 땅속에 묻었다가 주인이 돌아왔을 때 꺼내 놓았다. 주인은 그것을 보고 “악하고 게으른 종아, 너는, 내가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 알았다. 그렇다면, 너는 내 돈을 돈놀이하는 사람에게 맡겼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내가 와서, 내 돈에 이자를 붙여 받았을 것이다”(마25:26-28)라고 하며 심히 책망을 했다.
* 결국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은 그 돈마저 열 달란트 받은 사람에게 내어주고 문 밖으로 쫓겨나 이를 갈며 통곡했다는 것이 이 비유의 결론이다.
* 먼저 이 비유를 통해 일단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들을 몇 가지 간단히 살펴보겠다. 우리는 우리가 받은 달란트의 소중함을 깨달아야 한다. 주인은 능력에 따라 누군가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주었고, 누군가에게는 두 달란트나 한 달란트를 주었다.
* 인간의 판단으로는 한 달란트 받은 사람보다는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이 더 귀해 보이고,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자기보다 더 많은 달란트를 받은 사람을 부러워하면서 자기가 받은 달란트를 소홀히 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생각이다.
* 주인의 입장에서, 즉 하나님의 입방에서는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나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이나 똑같이 기회를 부여받은 것이고, 소명을 받은 것이다. 차이는 그 액수가 아니라, 즉 능력이나 기회나 소명의 크고 작음에 의해서가 아니라 다만 그 받은 달란트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다.
* 우리가 살아가면서 당하는 문제의 원인을 살펴보면, 남이 가진 것이 자기가 가진 것보다 좋고 귀하다는 비교의식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사람이 불행하게 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만족할 줄 모르는 마음 때문이며, 만족할 줄 모르는 이유는 남과 비교하는 마음 때문일 것이다.
* 남과 비교하는 마음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리 많은 재물 보화가 있어도, 아무리 높은 자리에 있어도, 결코 행복할 수 없는 법이다. 자기보다 다 많이 갖고, 더 높은 사람 지위에 있는 사람과 비교하며, 더 큰 욕심을 부리기 때문이다.
* 자기가 많은 것을 가졌다고 적은 것을 가진 사람에 대해 우월감을 갖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지만, 자기보다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을 부러워하는 것 또한 어리석은 감정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크던 작던 감사하게 여기며 살아가는 것이 성숙한 신앙인의 자세이다.
* 자기가 받은 은총, 받은 능력이 분명히 귀하고 아름다운 것임에도, 그 가치를 깨닫지 못하고, 덜 받은 것에 대해 불평하고 더 받기만을 바라는 것은 분명 올바르고 성숙한 신앙인의 자세가 아니다.
* 자기에게 허락된 가정, 자기에게 허락된 자식, 자기에게 허락된 아내와 남편, 그리고 직장 등을 소중히 여길 줄 모르는 사람은 한 달란트 받았던 종과 같이 실패하기가 쉽다. 자기 자식이 말 안 듣고 공부 못한다고 옆집 아이를 데려다 자기 자식으로 키울 수는 없다.
* 객관적으로 봤을 때 조금 부족해보여도 내 자식이고, 내 아내고 내 남편이기 때문에 감싸주고 이해하고 용서해줄 수 있어야지, 남의 자식, 남의 아내, 남의 남편하고 비교하면서 자신이 누릴 수 있는 행복을 스스로 저버리는 어리석음을 저지르는 사람은, 자신이 받은 달란트를 땅에 묻어 놓고 세월가기만을 기다리는 사람과 똑같은 것이다.
* 어떤 농부가 오랫동안 좋은 농장을 가꾸면서 행복하게 살아왔다. 그런데 하루는 갑자기 자기의 농장이 싫증이 나서 이것을 팔고 다른 환경의 새 농장을 사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부동산 중개소에 자기의 농장을 내놓았다. 자기 농장을 소개하는 광고를 낸 농부는, 부동산 중개소에 나온 여러 광고를 보면서 자기 맘에 드는 새로운 농장이 있나 찾아보았다.
* 마침내 마음에 드는 광고를 찾아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넓고 기름진 땅, 좋은 농가, 큰 곡식 창고, 이상적인 위치, 최신식 농기구를 갖춘 농장을 팝니다." 이 광고를 보고 농부는 "이 농장이야말로 바로 내가 원하는 농장이다"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농장의 위치가 어딘가를 살펴보았다. 그랬더니 그 농장은 바로 자기 농장을 광고한 것이었다. 그때야 농부는 자기 농장이 가장 이상적인 농장임을 깨닫고 자기 농장을 잘 가꾸면서 행복하게 살았다는 얘기이다.
* 마치 행복의 파랑새를 찾아 온 세상을 헤매다 돌아와서 보니 파랑새는 바로 자신의 집에 있었다는 소설처럼, 우리는 우리가 지금 갖고 누리고 있는 것들에 대한 가치를 온전히 깨닫고 그것에 감사하면서 살아야 할 줄로 믿는다. 우리 삶의 행복이나 질은,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것을 소유하고 누리고 있느냐에 달린 것이 아니라,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들에 대해 얼마나 감사하며 살아가느냐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 다음으로 우리가 받은 달란트를 우리의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은 주어진 것을 순종함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우리의 삶 가운데는 변경시킬 수 없는 상황이 분명히 존재한다. 우리의 키나 성별, 부모 형제 같은 것들이 그러하다.
* (물론 요즘은 하리수처럼 남자가 여자가 되기도 하고, 성형수술을 통해 부모로부터 받은 얼굴이나 체형을 바꾸기도 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지만...) 사람에 따라 자신의 조건에 대해 크건 작건 불만이 있을 수 있고, 불만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가운데 약간의 변화를 이뤄내기도 한다.
*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바꿀 수 없는 요소들이 우리 삶에는 얼마든지 존재하는 법이다. 그리고 그것이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교만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노력해서 다 되면 사람이 얼마나 교만해지겠나?)
* 유명한 기독교영성 전문가 필립 얀시는 흑인인권운동이 한창이던 1960년대에 애틀랜타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다. 그가 고등학교를 다니던 1960년대에는 남부를 제외한 미국 전역에서 남부사람들을 뒤떨어지고 무식한 인종차별주의자로 여기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그는 TV에서 남부인들이 등장하는 프로그램을 보거나, 린든 존슨(Lyndon Johnson) 대통령의 남부 발음을 들을 때마다 짜증이 났다고 합니다. 급기야 고향을 버리고 싶을 만큼 자신이 남부 사람이라는 사실을 혐오하게 되었다고 한다.
* 그래서 그는 남들이 구별하지 못할 정도로 자신의 남부 발음을 교정하기 시작했다. Southern accent를 버리고, 남부식 표현(Yes, ma'am. 이나 No, sir)들을 사용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또 시골티를 벗어버리기 위해 유명한 고전들을 읽기 시작했다. 심지어 필체까지 바꾸려고 글자 하나하나를 정성껏 연습해 이전보다 훨씬 더 보기 좋게 쓸 수 있게 되었다.
* 얼마의 세월이 흘러 그는 자신이 원하는 변화를 이뤄냈다. 사람들이 나중에 그가 남부출신이라는 걸 알고는 깜짝 놀랄 정도로, 그는 남부인들 고유의 억양과 문화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그의 성격까지 변해 이전의 쉽게 상처받던 성격을 버리고, 개방적이고 융통성 있는 성격을 갖게 되었다.
* 그러한 성격은 그가 선택한 기자생활에 유리하게 작용했고, 그는 마침내 자신이 혐오하던 과거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그는 자신이 의도적으로 형성한 현재의 모습 속에 중요한 것들이 빠져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가 새롭게 형성한 성격 안에는 하나님이 기쁘게 여기시는 성품들이 여전히 빠져있었던 것이다.
* 그때에서야 그는 자신의 발음을 고치고, 필체를 고치고, 말하는 방법을 고칠 수는 있어도, 근본적으로 자신의 성격과 인격을 고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젊었을 때보다 조금 더 인내할 수 있고 성격이 조금 부드러워지긴 했어도, 성령의 열매에 해당한다는 성품들(갈 5:22-23, 사랑, 희락, 화평, 인내,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과는 여전히 거리가 먼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필립 얀시는 아주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미 허락하신 것들(우리의 재능이나 성품)을 통해 당신의 일을 하시고자 한다는 사실이었다.
* 하나님께서는 지금 우리가 갖고 있지 않은 어떤 것(더 큰 능력이나 재능, 물질 등)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어떤 것(그것이 비록 한 달란트라 하더라도)을 통해 당신의 일을 하기를 원하신다는 말이다.
* 필립 얀시는 자신의 남부 사투리와 필체는 바꿀 수 있었지만 그 내면 속에서 바꾸지 못한 것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이 그를 버리시거나 포기하시지는 않고, 오히려 그가 현재 가지고 있는 재주와 성품을 귀히 써주신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깨달을 수 있는 사람만이 지금 자신이 받은 달란트가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것인가를 알 수가 있다.
* 마지막으로 우리가 받은 달란트를 잘 활용해야 한다.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은 이 달란트를 활용하지 못하고, 잃어버릴까 두려워하며 땅에다 파묻었다. 이 사람은 모험심도, 용기도 없었기에 아무런 시도도 해보지 않았던 것이다. 이처럼 일생 동안 자기의 달란트를 활용해 보려고 시도하지도 못하고, 그대로 땅에 파묻어 버리고는 잃어버릴까 그 주위를 맴돌면서 일생을 탕진하고 마는 사람들을 우리는 주위에서 많이 볼 수 있다.
* 타고난 재능이 있음에도, 더 큰 재능을 타고 나지 못한 것을 비관하며, 어리석은 판단과 감정에 의해 낭비해버리며 사는 사람들이 많다. 분명히 기억해야 할 사실은 재능이 없거나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슬프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받은 재능을 낭비함으로 자신과 세상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들 때문에 하나님이 슬퍼하신다는 사실이다.
* 따라서 우리는 재능의 크고 작음이 문제가 아니라, 받은 달란트를 올바르게 사용하려고 시도할 때에, 우리에게는 더 큰 기회와 축복이 주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기억하여야 한다.
* 미국의 유명한 로버트 슐러(Robert Schuller) 목사님이 부흥되지 못하는 2백 교회를 조사해 보았다. 그 중의 한 교회 목사님에게 물었다. "왜 이 교회가 부흥되지 못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러자 그 목사님은 "말도 마십시오. 우리 교회에서는 헌금이 많이 걷히지 않아 선교비도 없죠. 그리고 교회에 인재다운 인제가 없어 무슨 일을 벌일 수도 없죠. 그러니 이 교회가 부흥이 되겠습니까?"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 이 말을 들은 슐러 목사님은 단호하게 이렇게 대답하였다. "아닙니다. 이 교회는 돈이 없거나 인재가 없는 게 문제가 아니고, 바로 당신에게 아이디어(idea)가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또 한가지 중요한 것은 당신에게 모험심이 결핍되었기 때문에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 다시 말하면 주어진 달란트를 활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교회가 부흥되지 않는 것이라는 뜻이다. 우리 교회는 우리의 이웃을 섬기는 공동체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달란트가 주어졌다고 믿는다. 그 달란트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결정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 이 정도가 달란트 비유를 통해 우리가 생각해볼 수 있는 교훈들이다. 나는 이 비유가 조금 달랐다면 더 설득력이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봤다. 달란트를 많이 받은 사람들이 아무 이익도 남기지 못한 반면,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몇 배의 이익을 남겨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 종의 몫까지 받게 됐다거나,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 받은 달란트마저 잃어버려 빈손으로 주인에게 나왔다는 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됐다면 더 극적이고 설교하기도 편했을 것이다.
* 그럼에도 이 비유는 충분히 극적이다.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이 두 배의 이익을 남겨 칭찬받고 더 많은 일을 맡게 되는 것까지는 일반적인 흐름인데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그러지 못했고, 그로 인해 책망과 처벌을 받았다는 부분에서 극적인 반전과 함께 이 비유의 실질적인 교훈이 제시된다.
* 즉 달란트의 크고 작음, 남긴 이익의 크고 작음에 상관없이 자신이 받은 달란트-그것이 재능이 됐던, 기회가 됐던, 소명이 됐던 간에-를 낭비한 사람은 그 달란트를 활용할 기회를 박탈당한다는 것이다.
* 평소와 달리 어지러운 시국 속에서 달란트 비유를 묵상하다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박근혜 같은 정치인 역시 한 달란트 받은 사람과 같은 것 아닌가. 국민이 부여한 권력을 현명하게 행사해 훌륭한 업적을 남기지는 못할망정 현상유지라도 했었다면 칭찬은 못 들어도 지금처럼 욕을 먹지는 않았을 것이다.
* 길이 남을 업적은커녕 아무 비전이나 포부도 없이 대통령 놀음이나 하다 측근들에 의해 지금과 같이 국정이 농단 당하는 치욕스러운 상황을 초래했으니 이제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져야 마땅하다. 인간의 탈을 썼다면 수치스러운 것을 알아야 한다. 수치를 모르는 인간은 인간이 아니라 개, 돼지와 다를 바 없을 것이다.
* 국정원의 공작에 의해서건 일부 국민의 지지에 의해서건 대통령 자리에 올랐을 때 가장 수치스러웠던 것은 18년 동안 이 나라를 무력으로 지배했던 독재자의 딸이 다시 대통령이 됐다는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자신의 능력을 발휘해 대통령 노릇을 잘 했다면 그나마 그런 수치스러움이 조금은 수그러들 수 있었을 것이다.
* 그런데 독재자의 딸이 집권했다고 조롱하던 외신들이 이제는 샤머니즘 무당이 대한민국 대통령을 조정했다고 비아냥거리고 있다. 뉴욕 타임즈를 비롯한 해외 언론들은 “shaman fortuneteller”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이를 한국 언론이 무당으로 번역해 최순실을 무당으로 표현하니 무속인들이 들고 일어섰다고 한다.
* 최태민이 목사가 아니라 사이비 종교 교주였듯이, 최순실도 무당이 아니니 무속인의 명예를 더럽히지 말라는 것이다. 최순실 역시 제대로 된 무당이 아니라 사이비 무당이라는 말이다. 박근혜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그녀는 대통령이라는 호칭으로 불릴 자격이 눈꼽만큼도 없는 사이비 대통령일 뿐이다.
* 대통령이란 국민의 뜻에 의해 세워지고 국민의 뜻을 존중하며 국민을 위해 일하는 존재여야 한다. 그런데 박근혜는 자신을 지지한 일부 국민들의 뜻조차도 존중하지 않고 그들을 위해 일하지도 않았다. 어려울 때 자신을 도와준 소수의 측근들에 의해 놀아났고 자신의 의지보다는 그들의 의지에 의해 나라를 다스렸다.
*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 주인의 뜻을 곡해하고 그 달란트로 아무 일도 하지 않다가 결국 책망 받고 받은 달란트마저 빼앗긴 것처럼, 박근혜 역시 이제 그녀에게 주어진 모든 권력과 권한을 빼앗아야 한다. 스스로 물러나지 않겠다면 강제로 물러나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그 권력을 대통령 노릇 더 잘할 수 있는 다른 사람에게 위임해야 한다.
* 자신이 받은 달란트를 낭비하고 제 역할 못하는 사람은 대통령만이 아니다. 요즘 조금 반성하는 기미가 보이기는 하지만 사실 대부분의 언론도 박근혜 정권과 공범이다. 여당은 말할 것도 없고 야당도 마찬가지다. 지난 주 언급했지만 예언자이길 포기하고 정권과 결탁해 호의호식하려는 일부 종교인들 역시 제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 어떤 정치인들은 대통령이 하야하거나 탄핵되면 국정공백이 우려된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박근혜가 청와대에 있는 지금의 상황이 계속되는 것이 혼란스럽지, 박근혜가 물러난다고 더 혼란스러워지지는 않을 것이다. 박근혜가 청와대를 빨리 떠날수록 이 나라가 정상화될 기회도 그만큼 빨리 찾아올 것이다.
* 세월호 참사가 벌어지던 7시간의 골든타임 때도 대통령은 없었고, 메르스 사태 때도 대통령은 없었다. 대신 개성공단을 폐쇄하거나 국정화 교과서를 억지 추지하거나 불필요한 사드 배치를 강행하거나 하는 등 맥락도 없이 불쑥불쑥 들이대는 돌발적인 통치행위로 인해 국민을 분열시키고 혼란으로 몰고 갔을 뿐이다.
* 그런 의미에서 “이 쓸모없는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아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일이 있을 것이다”라는 주인의 책망이 박근혜에게 그대로 적용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런 어리석은 인간을 이 땅의 최고통수권자 자리에 올려놓은 불의하고 부정한 세력에게도 그대로 적용되기를 바란다.
* 이제 우리 자신을 돌아보기 바란다. 우리는 과연 우리가 받은 달란트를 잘 활용하며 살아왔는가? 주인은 멀리 떠나있는 동안에도 종들이 받은 달란트를 어떻게 사용할까를 지켜보고 있었을 것이다.
* 우리가 지금보다 더 고민하고 더 노력함으로 보다 하나님의 뜻에 근접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달란트를 지혜롭게 사용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세상을 이롭게 하고 우리 스스로를 가치 있게 만드는 가장 분명한 방법임을 기억하시기 바란다.
첫댓글 아 멘 아멘 ~
주일날 빠져서 공부하고 갑니다.
고맙습니다~
이번 주일에는 광양 망덕산으로 나들이 가니 꼭 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