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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밀양박씨연안공파제주도종친회 원문보기 글쓴이: 朴興學
박사경(朴思敬, 1312(고려 忠宣王4년)~1404(조선 太宗4년) 공(公)의 휘(諱)는 사경(思敬)으로 규정공(糾正公)의 손자(孫子)요, 전리좌랑(典理佐郞) 문유(文有)의 맏아드님이다. 1312년(高麗 忠宣王4.壬子)에 태어나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벼슬이 전법판서(典法判書)겸 상장군(上將軍)에 올랐다. 고려사(高麗史)에 적기를, 공이 원경(元京)에 체류하고 있을 때에 충정왕(忠定王)이 훙서(薨逝) 후에 후사(後嗣)가 없음을 빌미로 친원파(親元派)들이 작당하여 왕을 북원 사람 독타불화(篤朶不花)를 추대하려는 음모를 알아차리고 크게 놀라 급히 귀국하여 명덕태후(明德太后)에게 직간(直諫)하고 신진사류(新進士類) 박상충(朴尙衷)등과 합세하여 백태후(白太后)를 도와 간신(奸臣)들을 척결할 것을 직접 간언(諫言)하여 친원파(親元派) 안사기(安邪琦)를 처단하고 강녕대군(江寧大君) 우(禑)를 새왕으로 추대하니 1351(辛卯) 12월의 거사로 이가 곧 공민왕(恭愍王)이다. 공께서는 이일로 추성익위공신(推誠翊衛功臣)에 책록(冊錄)되었다. 1404년(朝鮮 太宗4年)에 하세(下世)하시니 수(壽) 93세였다. 공의 묘소는 고양시 주교동 박재궁(朴齋宮)에 모시었고 제실은 추원재(追遠齋)라 한다. 배위 정경부인(貞敬夫人) 전주 이씨(全州李氏)의 묘소는 실전하여 1964년 5월에 상장군공 묘소 좌측에 설단(設壇)하고 두 분을 함께 제향을 받들고 있다. |
<경기도 고양시 원당 주교동 상장군 묘역 전경>
사진설명 : 제일 상단이 규정공과 동래정씨 제단 오른쪽에 보이는 제단비는 문유와 배위이고,
묘역 한 가운데가 상장군 묘, 오른쪽 제단비는 배위 정경부인 전주이씨 제단비임.
[두응촌 박제궁의 내력]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주교동 산 17번지 일대를 두응촌 묘역, 박제궁, 박릉골, 원당선영 등 대소 문중에서 여러 형태로 부르는데 이곳이 바로 상장군 묘역이다. 상장군 묘역에 대한 내력을 간략히 살펴보자면, 고려(高麗)의 추성익위공신(推誠翊威功臣)이신 전법판서 겸 상장군(典法判書兼將軍) 휘(諱) 사경(思敬)공께서 1404년(太宗4年 甲申)에 하세(下世)하시어 처음 분묘(墳墓)가 조성(造成) 된 이후에 1623년(光海15年)까지 200여 년간 밀양박씨 규정공파 누대(累代)의 열선조(列先祖)를 모신 박씨의 유서(由緖) 깊은 세천지지(世阡之地)이다.
주교리는 본래 고구려에서는 달을성현(達乙省縣)이라 하다가 신라에서 고봉현(高峰縣)으로, 고려에는 고봉(高峰)과 덕양(德陽)으로 나뉘어 불렸으나, 조선에 들어서면서 1394년(太祖3年) 처음으로 감무(監務)를 고봉(高峰)에 두어 3현(縣)을 다스렸으며 1403년(太宗3년) 고봉과 덕양을 합쳐 고양현(高陽縣)으로 개칭하고 1413년(太宗13年) 고양현(高陽縣)에 현감(縣監)을 두었다. 1471년(成宗2年)에 군(郡)으로 승격되어 고양군(高陽郡)이 되었고, 1755년(英祖31年)에는 원당면(元堂面)의 박재궁촌(朴齋宮村)과 주교촌(舟橋村)으로 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이작골, 왕좌산, 능골, 주막거리, 마상동, 박재궁, 골안을 합병하여 주교리(舟橋里)라 하였다. 예전에 조수(潮水)가 밀려들어서 한강의 물이 들어와 배를 이용한 마을이라 해서 오래전부터 배다리가 있었으므로 여기에서 유래(由來)되어 배다리 또는 주교리(舟橋里)라 하였다.
박재궁(朴齋宮)은 이작골(移齋谷: 이자동, 이재곡, 이재골) 북쪽에 있는 능골에 밀양박씨의 재궁(齋宮)이 있어 생긴 이름이다. 서기 1589년(宣祖22年)에 지사(地師) 이의신(李義信)이 이곳을 답사하여 쓴 답산기(踏山記)를 보면, 『고양 박판서 충원(朴判書 忠元)의 조상 묘(祖上墓)가 있는 산에 갔다. 처음의 분묘(墳墓)는 고려전법판서(高麗典法判書) 사경(思敬)이니 계좌정향(癸坐丁向)이요, 수파(水破)는 안쪽(內破)으로 정미(丁未) 사이에 숨어 있고 밖으로(外破)는 미곤(未坤) 사이에 있다. 이 산은 삼각산(三角山)에서 떨어져 가지가 된 외맥(枝外脈)이 서쪽으로 흘러 물결 모양(水形)의 평평한 산(平山)이 세 번 물러났다가 떨어져 희릉(禧陵)과 효릉(孝陵)을 맺어 놓았다. 또한, 물러났다가 떨어져 다시 일어나 교하(交河) 등지(等地)로 향(向)하다가 다시 일어나는 첫 번째로 가로지른 산봉우리와 팔뚝(臂)같은 맥이 정자(丁字)모양으로 남쪽으로 들어가 목형(木形)의 평평한 봉우리가 백수십보(百數十步) 밖으로 오른쪽 지맥(白虎支脈)이 뒤에서 동쪽으로 꺾이어 은미하게 두 봉우리를 만들어 맥이 들어오는 곳(入脈處)에는 기복(起伏)이 없고, 동쪽으로 봉우리가 일어나 조금 높아졌다가 혈이 들어오는 곳(入穴處)에서 남쪽으로 흘러 주원(主原)으로 들어와 가늘게 엎드려 한참 가다가 다시 일어나 봉우리를 만들고 평평한 등성이로 30~40보(步) 허술한 듯하다가 뚝 떨어져 혈처의 좌우(左右)에 희미한 가지(枝脈)사이에 점혈된 상장군의 묘가 가장 바르게 써졌으니 대지(大地)다. 한 자리는 그 아래 평평한 언덕이 보기 좋게 40~50보(步) 뻗혀 감산(坎山)의 정향(丁向)에 부제학(副提學)의 묘(墓)이다. 주원으로 들어와 혈처(穴處)를 에워싸고 있는 가운데 봉우리가 청룡 백호(靑龍 白虎)로 나뉘어 여러 언덕보다 높은데 백호(白虎)는 혈처보다 갑절이나 높고 에워싼 끝부분이 혈처의 앞을 지나지 아니하고 세 겹으로 에워싸고 있으며 바깥 날가지가 내백호(內白虎)보다 길게 머리를 들고 내백호를 품어 안은 모양이다. 내백호의 가운데에 남향으로 결혈(結穴)된 병파(丙破)에 중손(仲孫)의 자(子) 참의 미(叅議 楣)의 묘(墓)가 있는데 역시 쓸만하다. 두 겹 밖에 서쪽으로 흐르는 큰 산줄기가 멀리 뻗쳐 6~7리(里) 가운데 에워싸고 있는데 혈처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바깥 용(龍)은 바깥 맥(脈)이 물러나 끊어지지 않은 곳에 높은 산과 강과 육지를 가르는 등성이가 5리 사이에 에워싸고 있으며 그 끝은 두 겹 백호의 밖을 지나 비껴 안산(案山)이 되어 가로로 지나간다. 혈에서 십이 삼리 떨어져 수구(水口) 가운데 반듯하고 길게 잘린 산이 강 저편에 가로 막아서있고 행주의 홀로 선 높은 산이 강안에 있다. 부평(富平), 인천(仁川), 김포(金浦) 등 먼 산이 가로 늘어서 하늘 가운데로 귀인봉(貴人峯)이 정결하게 여러 산 가운데 우뚝 서서 밝게 정혈을 비추고 있으니 기이한 일이다. 수구에 큰 산이 하늘을 찌를 듯 치솟아 머리는 두개의 고기 전대같이 남쪽으로 있다. 법수(法數)에 따라 논한다면 이곳은 처음 볼 때 매우 웅장심대(雄壯甚大)하게 굽어 돌아서 허술한 것 같으나 자세히 보면 청룡 백호가 모두 혈을 싸고 있으며, 청룡 끝에서 백호 끝까지 서로 가까이 하고 있다. 여러 대(代)에 걸쳐 귀인 현관이 나온 것은 까닭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스러운 것은 전면이 조금 완만하고 굽은 것 같고 혈도가 조금 노출되어 있으나 왼쪽 어깨 쪽으로 조산인 삼각산의 여러 봉우리들은 참으로 기이한 현상이다. 이 세상에 이만한 땅을 가진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라 하였으니 상장군공께서 자애(慈愛)와 인의(仁義)로서 후손에게 음덕(蔭德)을 베푸신 복록(福祿)의 땅이 아니겠는가.
옛부터 우리 성손(姓孫)들은 경향각지(京鄕各地)에서 이곳 묘역(墓域)을 참배(參拜)하고 추원보본(追遠報本)의 효제의(孝悌儀)를 다지고 선대(先代)의 음덕(蔭德)을 흠숭(欽崇)하는데 힘쓰고 있는 것이다.
부제학공께서 이르시기를『吾知子孫이祖宗餘蔭하니必大見於世也(오지자손이조종여음하니필대견어세야니라)』하셨으니 즉 "나의 자손들이 어느 때인가 조종의 적선과 여음으로 세상에 크게 드러날 때가 있을 것을 나는 반드시 믿는다."하신 말씀과 같이 열선조(列先祖) 가운데에는 영의정, 판서, 대제학, 공신(功臣) 등 명공거경(名公巨卿)과 봉군(封君)이 여덟분, 시호(諡號) 받으신 네분을 위시하여 50여기의 분묘가 이곳 두응촌 언덕에 편안하게 잠들어 계신다.
이 곳 세장지(世葬地) 아래에는 일곱채의 재실(齋室)이 있는데, 규정공(糾正公) ·좌랑공(佐郞公)·상장군공(上將軍公)·부제학공(副提學公)·밀산군(密山君)·고려왕씨(高麗王氏)·존성재공(存誠齋公) 등의 묘제(墓祭)를 받드는 추원재(追遠齋)를 비롯하여, 오정공(吾亭公)의 영수재(永修齋), 낙촌공(駱村公)의 영모재(永慕齋), 해백공(海伯公)의 백당(栢堂), 별좌공(別坐公)의 경모재(敬慕齋), 송월당공(松月堂公)의 덕양재(德陽齋), 절도사공(節度使公)의 충절재(忠節齋)가 있다.
이 곳 박재궁촌(朴齋宮村)에 모셔 놓은 열선조의 묘(墓)와 단(壇)은 3곳으로 나뉘어져 있고 중앙의 상장군 묘역을 제1묘역, 좌측(白虎)의 존성재(存誠齋) 묘역을 제2묘역, 우측(靑龍)의 낙촌공(駱村公) 묘역을 제3묘역이라 칭한다. 제1묘역에는 규정공(糾正公) 단(壇)과 좌랑공(佐郞公) 단(壇)아래로 상장군공(上將軍公) 사경(思敬)의 묘(墓) · 간의공(諫議公) 사인(思仁)의 단(壇) · 군수공(郡守公) 사민(思敏)의 단(壇)이 있고, 그 아래로 간성공(杆城公) 지생의 단(壇) · 부제학공(副提學公) 강생(剛生)의 묘(墓) · 호군공(護軍公) 의문(疑問)의 묘(墓) · 밀산군(密山君) 절문(切問)의 묘(墓) · 밀산군(密山君) 배위(配位) 정경부인(貞敬夫人) 고려왕씨(高麗王氏)의 묘(墓) · 절도사공(節度使公) 대손(大孫)의 단(壇) · 시정공(寺正公) 빈(蘋)의 묘(墓) · 전한공(典翰公) 인원(仁元)의 묘(墓) · 부정공(副正公) 신원(愼元)의 묘(墓) · 참봉공(叅奉公) 구현(龜賢)의 묘(墓) · 지평공(持平公) 거현(擧賢)의 묘(墓) · 차탄공(槎灘公) 증현(曾賢)의 묘소가 있다. |
추원재 전경(追遠齋 全景)
<사진제공 : 밀원문화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