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마가복음 1장 14-15절
제목 : 하나님 나라
1. 맨날 하나님 나라 운동을 한다는 말하는 단체의 한 멤버가 리더에게 물었다. “하나님 나라, 하나님 나라, 그러는데 하나님 나라가 뭐예요?” “???”
15절은 마가복음의 요체이고, 핵심이고 요약이다. 그렇다면 복음은 무엇이고, 하나님 나라는 또 어떤 곳인가?
2. 14절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예수의 첫 사역의 시공간적 배경을 보여준다. 시기적으로는 요한이 체포된 후이고, 지역은 갈릴리이다.
1) 갈릴리는 예수가 태어났을 때, 베들레헴 인근의 영유아를 학살한 헤롯왕의 아들 헤롯(헤롯 안티파스라고 한다.)이 다스리는 곳이다. 그는 침례자 요한을 목 베어 죽인다. 요한마저 그렇게 허망하게 죽이는 자이니 일개 백성이야 오죽하겠는가. 이스라엘 전체에서 소외되고 수탈당하는 지역이었다. 변방이고 변두리가 갈릴리다.
2) 요한의 체포는 예수의 사역과 관련해서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하나는 광야 시험을 통과하고 공적으로 나서기까지의 시간적 공백이 있었다는 것이다. 예수는 때를 기다렸다. 마오쩌뚱이 말한 것처럼 장강의 뒷물이 앞물을 밀고 가는 법이라지만, 예수는 밀어내지 않는다. 준비하고 기다렸다. 다른 하나는 요한이 혹시 기다리던 메시야가 아닐까, 기대하던 백성들의 실망하던 시기이었다. 요한도 아니었구나. 그럼 또 누구를 기다리나?
3) 그러므로 “때가 찼다”는 말은 한 시대가 저물고 새 시대가 도래한다는 선포이다. 여기서 옛 시대는 여러 의미가 있다. 소극적으로 말하면, 단순하게는 요한의 시대가 가고 있다는 것이고, 가짜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스리던 시대는 끝났다는 것이다. 적극적으로 말하면 이제 나의 시대가 되었다는 것이고, 곧 보겠지만 하나님이 왕이 되어 다스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왔다는 말이다.
4) 예수는 공생애 기간 내내 가짜 하나님의 아들들, 가짜 나라들과 싸우셨다. 죽기까지 싸웠다. 죽도록 싸웠다. 그러다가 죽었고 다시 사셨다. 그러나 침례자 요한과 같이 하나님 나라의 동역자와 선구자에게는 예의를 갖추었다. 무례하지 않았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니 너는 얼른 뒤로 물러서라, 또는 언제 비켜주나, 라고 하지 않았다. 광야의 시기를 거치고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기까지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셨는지, 언급이 없으므로 추측해야 한다면, 그는 여전히 또 다른 광야에서 준비하고 있었을 것이다. 누구와 싸우는지 구분하지 못하고, 넓게 보면 동지인데, 사소한 것들을 침소봉대해서 갈라서서 마치 적과 싸우듯 다툰다. 하나님의 아들은 그러지 않았다. 사람의 아들 또한 그래야 하지 않는가.
3. 하나님의 나라
1) 서두의 말로 돌아가 보자.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가? 마가복음도 대답 못한 그 리더와 다르지 않다. 그냥 하나님 나라가 왔다고 했을 뿐 당최 그 내용에 대해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2) 하나님의 나라 또는 영어로 하나님의 왕국(Kingdom of God)이라는 단어를 살펴보면 된다. 하나님이 왕이 되어 다스리는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없다. 그런 나라에 관한 소식이 복음이고,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이 왕 노릇하며 다스리는 나라는 슬픈 소식인 것이다.
3) 이는 자신을 왕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이들에게는 경천동지할 말이다. 내가 왕인데, 누가 왕이라고? 내가 다스리는 경내에 어떤 놈이 왕을 자처해? 삼족이 아니라 구족을 멸할 놈이다. 그러니까 왕국인 곳에 왕국을 선언한 것은 반역이고 모반이다. 국가반란죄에 해당한다. <<보완설명>>
4) 그러면 두 왕국들, 즉 크게는 가이사(Caesar)의 제국과 그리스도(Christ)의 왕국, 작게는 헤롯의 나라와 예수의 나라는 적대적인가?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젤롯당이나 스파르타쿠스처럼 반란을 선동하거나 주동하지 않았다. 폭력으로 다스리는 나라를 폭력으로 뒤엎는 것은 지배자의 시각으로 보면 다른 왕조가 들어서는 것이겠지만, 백성의 입장에서는 그 놈이 그 놈이다. 조금 덜 하냐, 더 하냐, 일 뿐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런 나라가 아니다. 그 왕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나라를 세우고, 다스린다. 하나님 나라의 구체적 모습은 앞으로 마가복음 전체에 걸쳐서 드러날 테니, 하나님이 왕이 되어 다스리는 나라이고, 그것은 세상의 나라와 모순과 긴장을 유발한다는 정도로만 이해하자.
4.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1) 그러나 우리가 이 본문에서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하나 있다. 회개와 믿음이다. 회개는 앞서 말한 대로 삶의 방향을 전환하는 것이다. 더 이상 이렇게 살지 않을래, 이다. 한번은 대구에서 강연을 마치고 부산으로 돌아오는데 실수로 반대편인 대전과 서울 방향 기차를 탔다. 승무원에게 부탁을 하니 김천구미역에 내려서 부산행 기차를 타라는 한다. 회개란 이런 것이다. 가던 방향이 잘못되었으니 돌아서서 가려던 방향으로 가는 것이다.
개인적 차원으로 말한다면, 내가 왕이 되고, 돈을 섬기고, 그것도 왕국이랍시고 지키기 위해 누군가를 울게 만드는 방식에서 돌아서라는 것이다. 국가적으로 말한다면,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서 공의와 공평으로 다스리는 곳인데, 공의가 아니라 특정 지배 집단의 이익을 마치 국가 전체의 이익인양 호도하며 관철시키는 나라, 가진 자나 못 가진 자나 두루두루 사람답게 살게 하지 않고 가진 자는 더 가지고 없는 자는 있는 것도 빼앗기며 살게 하는 국정 운영 방식을 바꾸라는 것이다.
2) 그러면 믿음은 무엇인가? 이신칭의인가? 예수가 주와 구세주라는 것을 인정한다며 말 몇 마디 따라하는 것인가? 거짓 왕과 거짓 나라의 백성으로 살았던 것에서 돌아섰다면, 새 나라의 백성답게 신실하게 살라는 말이 나와야 맞다. 문자적으로 본다면, 다른 것을 믿지 않겠다는 것이고, 다른 것을 믿고 살지 않겠다는 말이다. 능동적으로는 하나님께서 내 모든 삶의 왕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그분의 다스림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앞으로 변함없이 그렇게 살겠다는 뜻이다.
3) 바로 이 점이 예수의 운동이 지닌 급진성이다. 지금 너의 삶을 뜯어고치지 않는다면, 그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없다. 내가 하는 말과 생각이 내가 아니다. 지금처럼 살다가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에게 죽도록 충성하다가 복된 삶이 아니라 남을 아프게 하고 결국 자신을 아프게 하는 삶으로 끝날 것이다. 어떻게 살 것인지, 어떻게 사는 것이 참 다운 삶인지, 예수님은 도전하고 초대하신다. 서두르거나 재촉하지 않지만, 아직 시간은 있지만, 언제까지나 기회가 있는 것은 아니다. 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까.
5. 가까이 왔다.
1) 가까이 왔다는 단어를 두고 모던한 서구신학자들이 현재이냐 미래이냐를 두고 갑론을박한 것은 어찌 보면 한심하기 그지없는 쓸데없는 짓이다. 지하철에서 안내방송이 들린다. “곧 00행 지하철이 들어옵니다. 안전선 안으로 물러서 주세요.” 이걸 두고 미래냐 현재냐를 논하는 것 자체가 그 지하철을 탈 생각이 없는 거다. 탈거냐 말거냐가 중요한 것이지 이미 왔느냐 아니면 아직 오지 안았느냐는 하나님 나라의 실체에 대한 의도적 또는 무의식적 회피에 다름 아니다.
2) 양용의교수의 말을 요약해서 옮기면, 이렇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 와 있다. 그리고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는 역동적 실체이다.
3) 마가복음 전체가, 그리고 예수의 삶 전부가 하나님 나라이거늘, 고대 교부인 오리겐이 말했듯이, 예수 자신이 친히 하나님 나라이거늘, 왔느냐 아직 오지 않았느냐는 마가복음이 전하는 하나님 나라의 긴급성과 급진성을 오해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4) 우리 또한 마찬가지다. 하나님 나라는 지금 여기에 있다. 일차적으로는 예수에게서, 이차적으로는 제자 공동체에 현존한다. 제자 공동체 이야기는 다음 본문의 주제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 초점은 예수 자신이다. 하늘이 갈라지며 예수라는 한 인격체로 이 땅에 임한 하나님의 나라를 따라 나설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단해야 할 ‘때’가 지금 이 때다.
6. 지금 우리의 질문은 하나님 나라를 살 것이냐 말 것이냐, 이다. 하나님에게 충성을 다하며 살 것인지, 내 이익과 이데올로기에 충성하며 살 것인지? 하나님의 국가에 속해 살 것인지, 물리적이고 생물학적으로 속한 국가에 우선권을 두고 살 것인지. 한 시대가 저물고 새 시대가 왔다. 예수의 이야기를 보고, 그 이야기를 살 것인지를 결단해야 할 때다.
첫댓글 4번,1)7째 줄, 기차를 타라는 한다?? 오타인 듯^^
<스크로테이프의 편지> 6장에 현재의 고난은 피하고 미래의 어떤 두려움에 매달리는 인간의 어리석음에 대해 재밌게 써있어요. 하나님 나라는 먼 하늘나라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이곳에 오는 것이라고도 <아나뱁티스트 성서해석학> 에 적혀있기도 했구요.
(아~ 나 좀 유식해진 듯^^)
5번 1)에 사부님이 적으신 것처럼 현재냐 미래냐 따지는 바보 짓 말고 예수의 이야기를 살아란 거지요.
나는 이게 사는 게 사는 거 맞는지?? ㅜㅜ
2015년에도 하나님 나라가 저의 삶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로고스 교회와 글쓰기, 고전반, 북토크 모두 화이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