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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의 자유 찾아 방랑하는 침구사의 해외 유랑기
- 필리핀으로 떠나가는 한국 침구인 이국렬 선생의 침뜸 이력서 -
필자 이국렬(사단법인 허임기념사업회 국제침구협력단장)
1957년 강원도 횡성에서 태어났다. 80년 군 전역 후 81년부터 강원도청에서 근무했다. 평소 동양의학에 대한 관심이 많아 한의학 기본서인 동의보감, 방약합편, 본초강목 등을 즐겨 읽었다. 2009년 구당 김남수 선생이 운영하는 뜸사랑에서 1년 과정의 주말 교육을 받은 후 침뜸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침뜸 공부를 위해 2010년 외교부로 전출, 일본 고베총영사관에서 영사로 재직하며 주경야독으로 3년간 오사카의료기술전문대학 침구사학과를 졸업했다. 2014년 일본 후생노동성에서 시행하는 침구사면허시험에 합격했다.
2017년 퇴직 후 국내는 물론, 스페인, 미얀마, 독일, 필리핀 등 여러 곳을 전전하며 침뜸 봉사를 하였다. 2019년 침뜸의 자유를 찾아 스페인 타라고나에 정착하였으나 코로나 확산으로 2020년 3월 귀국하였다.
2021년 러시아지역의 초대를 받았으나 팬데믹의 지연과 전쟁 발발로 계획이 무산되었다. 2023년 1월 오랜 침구 낭인 생활을 끝내고 침뜸의 자유를 찾아 필리핀에 닻을 내렸다. 대체의학청에서 침구사 면허를 받았고 은퇴비자도 받았다. 2023년 4현재 노동허가 신청 중이며 침뜸의 자유, 직업의 자유,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며 살아갈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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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화 실감 50대에 침뜸과 인연
2007년, 나이 50에 접어드니 몸의 여기저기에 약간씩 트러블도 생기고 좀 더 건강에 신경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막연하나마 은퇴 후 인생 2막에 대한 밑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였다.
그즈음 우연히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침뜸을 가르치는 곳을 알 게 되었다. 당시에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구당 김남수 선생이 운영하는 청량리의 뜸사랑이었다. 평소에도 건강과 동양의학에 흥미와 관심이 많았기에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주말 과정에 등록했다.
그렇게 매주 토요일 새벽, 춘천역에서 주말 통학을 하며 침뜸과의 연이 시작되었다. 종일 수업을 하고 밤차로 내려 올 때면 피곤하기도 했지만 무언가 새로운 지식이 충만되는 느낌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렇게 몇 개월 열심히 공부하고 있을 때였다. 아마도 추위가 가시지 않은 초봄이었으니 3월쯤으로 기억된다. 하루는 퇴근 시간이 가까울 즈음 갑자기 눈이 아파 견딜 수가 없었다. 조금 일찍 운전하고 돌아가는데 웬일인지 모든 차량번호가 선명하게 세 자리로 보이는 것이었다. 마치 도깨비 장난으로 차번호를 모두 바꿔 놓은 듯했다. 문득 뇌 속의 시신경에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닌지 불안하기까지 했다. 초조한 마음으로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이 되니 다행히 통증은 잦아들었다. 자동차 넘버도 모두 네 자리로 돌아왔다.
안과에 들려 검진을 받아보니 안구건조증이 심하다고 했다. 처방해 준 점안액은 한두 방울 떨어트려도 잠시뿐 뻑뻑한 불쾌함은 가시질 않았다.
할 수 없이 탁상용 가습기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수시로 눈알을 식혀가며 지내고 있었다. 또한 피부가 건조해 저녁이면 온몸을 긁어 대고 발뒤꿈치도 갈라져 걸을 때도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그때그때 로숀을 바르며 임기응변으로 지내던 중 문득 학원에서 배운 기본 뜸을 떠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내가 혼자 할 수 있는 양팔과 다리 배 등 7곳에 뜸을 뜨기 시작했다.
뜸이 건강에 좋다니 어딘가 효과가 있겠지 하면서 두어달 쯤 지났을 때였다. 그런데 의식하지 못한 어느 순간 그 모든 증상이 하나둘 다 사라지고 만 것이었다. 참 신기한 일이었다.
그 일을 계기로 침뜸에 점점 더 빠져들며 가까운 지인에게는 교육을 권하기도 하고 더러는 치료를 해 주기도 하였다.
믿고 첫 침 맞아 주신 과장님
한번은 공부를 시작한 지 6개월도 채 안 됐을 무렵, 과장이 구부정한 모습으로 겨우 사무실로 걸어 들어왔다. 이야긴 즉 허리가 너무 아파 한잠도 못 잤는데 눕지도 엎드리지도 못하겠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1~2년에 한 번씩 허리에 탈이 나면 한동안 고생을 하고 또 병원에 입원도 했었다는 것이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던가. 예의 도전 정신을 발휘하여 침을 놓아주겠다니 답을 안 했다.
하기야 내가 돌팔이인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입장에서 자기의 아픈 몸을 덥석 맡길 수가 있겠는가. 그러다 오후쯤 슬그머니 침을 맞아 보겠다고 자청을 했다.
숙직실에 내려가 침대에 엎드리는데 한 참이나 걸릴 정도로 거동이 불편했다. 나는 정성을 다해 보고 배운 대로 허리와 무릎 등 몇 군데 요혈에 자침을 했다.
그렇게 20여 분이 흐른 뒤 발침했다. 엎드릴 때처럼 조심스럽게 일어나 허리를 돌려 본 그는 너무나 신기한 듯 내 눈을 바라보며 놀라워했다. 통증이 다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나 또한 그에 못지않게 기쁘기는 마찬가지였다.
원래 치료받은 후엔 술은 삼가야 하지만 그날 저녁 침 값으로 여러 병의 소주가 희생되었다. 그 일을 계기로 직장에서 꽤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뜸사랑은 1년의 교육과정을 마치면 정회원자격시험을 보는데 어찌나 철저하고 엄격한지 마치 공무원시험을 보는 것 같았다. 수준도 제법 높고 범위도 광범위해서 동기생 몇 명이 스터디그룹을 만들어 두어달씩 공부를 하기도 했다.
아마도 민간자격도 아닌 사설학원의 정회원시험을 그리 엄격히 관리하는 곳은 흔치 않을 것이다. 암튼 그렇게 침뜸과 연이 깊어지며 퇴직 후 인생 2막을 침뜸으로 열어보리라 다짐을 하게 되었다.
일본 영사관 근무 중 주경야독으로 침구사 면허 취득
2007년 뜸사랑의 1년 과정을 마친 후 머릿속에는 오직 침뜸만이 맴돌고 있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봉사도 하고 주변 지인들의 아픔도 보살펴주며 좀 더 침뜸공부를 하고픈 욕망을 억누르고 있었다.
그즈음 2010년 외교부와 시도 간 교환 근무제도가 생겼다. 때마침 승진이 코앞이었지만 침뜸공부를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내려놓기로 했다.
조건은 4~5급 중 1개 이상의 외국어가 가능한 사람이었다. 나는 요구조건을 충족할만한 어학 능력이 없었다. 98년 일본 돗토리현에 1년간 연수를 다녀온 경험이 있지만 이미 10년이 넘어 간단한 인사말도 어려운 실정이었다.
그러나 외교부에 근무하는 1년 안에 평가 기준을 충족하는 조건으로 전입이 결정되었다.
우선 언어가 발등에 불이었다. 새벽반, 점심반, 야간과정을 뛰어다니며 노력한 결과 10월초 외교부가 요구하는 시험성적을 제출할 수가 있었다.
일단 한고비는 넘겼지만 이런저런 걱정거리가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일본에 간다고 해도 침구대학 입학이 가능할지, 짧은 어학 실력으로 졸업은 할 수 있을지, 또 어렵다는 일본 면허시험에 합격할 수 있을지 하나같이 두렵고 높은 벽이었다.
그러나 한번 미치고 결정을 하고 나니 겁날 것이 없었다. 또 피할 수 없는 외길이기에 수단 방법을 가릴 수도 없었다. 오사카의 침구학교(오사카 의료기술전문대학) 교장 선생께 구구절절 편지를 쓰고 밤이면 입시공부를 해가며 어렵게 입학의 1차 관문은 넘었다.
그러나 수업시간에 강의는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한자를 어려움 없이 읽을 수 있으니 책을 보고 이해는 할 수 있었다. 결국 강의는 2학년 후반기가 되어서야 이해하게 되었다.
학비도 비싼데다 엔화 환율까지 14:1정도로 높던 시기라 3년 수업료만 5천만원쯤 되었다. 침구주권을 잃은 국민의 외화낭비라는 생각은 지울 수가 없었다.
3학년이 되면 학교의 모든 수업은 면허시험에 맞춰지고 매월 다양한 모의고사로 학생들을 긴장시킨다. 면허시험 합격률은 해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대략 70~80% 정도다. 3년이라는 시간과 비싼 학비의 가치를 보상받는 길이기에 다들 열심히 공부했다.
특이한 점은 실기시험을 먼저 본 후 필기시험을 본다. 실기는 4단계로 구분하여 이틀간 보고 필기는 14과목을 하루 동안 보는데 시험 전후 학교의 분위기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돈다.
그런데 이렇게 비싼 수업료와 시간을 투자해 배운 침구술이 뜸사랑의 그것과 별반 차이가 없어 허무하기도 했다.
세계 각국에서 침구사가 필요하다
일본 침구사들의 진로는 숫자만큼이나 다양하다. 현재 18만여 명이 등록되어 있는데 대개 종합병원이나 침구원, 재택근무를 하면서 거동불편자 방문치료에 종사하거나 JICA를 통한 해외파견도 많이 한다.
그중에서 가장 부러운 것은 유럽의 프로스포츠단 전속침구사나 세계적 크루즈 선사의 침구사로 일하는 것이다. 크루즈선 침구사는 대개 55세 정도로 나이 제한을 두고 있어 나로서는 이룰 수 없는 꿈이지만 영어만 뒷받침이 되면 최고의 직업이 아닐까 싶다.
몇 년 전 일본의 유명 침구잡지 [醫道의日本]에 의하면 크루즈선 침구사는 월 평균 400만 원 정도를 벌지만 능력에 따라서는 몇천만 원을 벌기도 한다고 한다.
현재 중국 침구사들은 정부의 강력한 뒷받침으로 세계 100여 개 나라에서 침술 활동을 주도한다. 일본 또한 국가의 브랜드 이미지를 무기 삼아 다양한 해외 활동을 하고 있다. 북한도 자국과 수교를 맺고 있는 일부 아프리카나 중남미 국가에 침구사를 파견하고 있다.
실은 한중일 3국이 모두 근대화 과정에서 서양문명을 맹종하며 잠시 침뜸을 도외시한 적도 있지만 중국과 일본은 복원되었다.
한국만 침구사를 배제하고 무시하고, 침뜸을 한약을 전문으로 하는 한의사의 영역에 포함시키며 침체의 길을 걷고 있다.
따라서 스페인 등 유럽이나 동남아 일부 국가에서 활약하는 많은 침구사들도 침은 한국에서 배웠지만 대부분 중국면허를 걸고 한다.
혹자는 우리나라는 이미 오랜 기간 교육받은 유능한 한의사가 포화 상태라고 한다. 그래서 환자도 없고 현재의 한의사도 생계가 어려운데 무슨 침구사냐고 반문한다. 인구 5천1백만인 우리나라 한의사는 2만3천인데 인구 1억2천인 일본의 침구사는 18만명이다.
사실 침구는 옛날부터 학보다는 술에 가까워 동네마다 침쟁이가 있었다. 독점하려니 온갖 미사여구를 붙여서 그렇지 침뜸은 그 어느 의술보다 안전하고 간편하며 치료효과가 좋다.
정책당국자들에게 호소한다. “침구사제도를 즉각 부활하라.”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교육과정을 설립하여 침구사를 배출하라.” 극소수 이익집단의 논리에 편승하여 대의를 그르치지 말라. 어떤 분야든 글로벌 경쟁력을 갖추고 무한경쟁에 대비하지 않으면 소멸되고 말 뿐이다. 국가의 장벽에 기대어 몇 년은 버틸 수 있을지언정 영원할 수는 없다.
한의사들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기회의 땅 동남아, 아프리카, 중남미, 아랍대륙은 포기할 것인가.
침구사는 인공지능시대에 수많은 일자리들이 사라지고 있지만 침구사는 세계 어디를 가도 대접받으며 일할 수 있는 최고의 전문직업이다. 국내의 밥그릇 싸움이 아닌 세계 각국에서 당당히 실력으로 겨룰 수 있도록 침구사의 바턴을 돌려주어야 한다. 그리하여 K-팝, K-푸드에 이어 K-침뜸으로 세계를 매료시켜보자.
침 한 쌈 쑥, 한 줌 들고 세상을 떠돌다
2017년 퇴직 후에는 여기저기 정기적인 봉사를 다니며 해외로 나갈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 때마침 허임기념사업회가 해외에서 침술원을 운영하거나 봉사하시는 선생님들을 초대하여 국제 세미나를 개최하였다.
여기에서 우리 재야 침구인들이 해외에서 다양한 형태로 활동한다는 것을 알게 되니 마음은 더욱 달아올랐다.
세미나가 끝나고 미얀마에서 몇 년째 봉사하는 정일교선생을 찾아뵈었다. 마침 고향이 강원도라 몇 번 만나 대화를 하며 금방 속내까지 털어놓는 사이가 되었다.
그런데 선생은 알면 알수록 새롭고 경외로운 분이라 자연스레 내 삶에 멘토 같은 관계로 발전하였다.
그렇게 선생과 연을 맺은지 두어달 만에 미얀마 양곤의 외곽에 자리한 따바와 명상센터 봉사에 합류하게 되었다.
한 달 일정이었다. 명상센터라고는 하지만 가난하고 돌 볼이 없는 가난한 중증환자 6백여 명도 함께 생활하는 열악한 의료사각지대였다.
우리는 그곳에서 하루 70여 명의 환자들을 치료했다. 아침에 봉사실에 나가면 30여 명의 환자들이 침대에 누워있거나 앉아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밤새 더위와 모기, 개 짖는 소리에 잠을 설치고 찌뿌둥한 몸으로 봉사실에 들어가면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선생님은 80이 다된 연세에 혼자서 수년째 그 일을 하고 계셨다. 그것도 통역비, 식비, 재료비 등 모든 경비도 자부담이니 어느 누구도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일이었다. 선생도 결국은 병고치는 재미로 그렇게 지낸다고 하셨다.
자연히 그곳에서는 주지 스님부터 환자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선생님을 존경하며 따르고 있었다. 한 달은 눈 깜빡할 사이에 지나갔지만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배울 수 있었다.
그간 한국의 뜸사랑과 일본 침구대학에서 나름의 이론교육을 마쳤고 어설프나마 이곳저곳에서 봉사를 통한 임상경험도 있었지만 그 곳은 전쟁터였다. 교범을 가지고 배운 총검술과 온갖 형태의 육박전은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정일교 선생은 그리 체계적인 이론공부를 한 분은 아니었다. 그러나 타고난 감각과 열정, 어머니의 마음으로 환자에게 쏟는 정성은 갸륵했다. 욕창 환자의 피고름을 닦아내고 치료 중 대소변을 지리는 환자에게도 언제나 웃는 얼굴로 다독이며 안아주고 나을 수 있다는 용기를 주었다.
그 때문일까 교통사고로 몇 개월째 감각이 없던 환자가 일어나고 업혀 온 중풍 환자가 몇 번의 치료 후 걸어나가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심지어 해외에서 봉사차 왔던 의대생이나 의사들이 선생의 침뜸을 접하고 귀국일정을 늦춰가며 침을 배우곤 했다. 그중 이스라엘에서 왔던 군의관 출신 여의사와 아르헨티나에서 온 여의사는 자기 나라에 초청을 하기까지 했다.
국제세미나 이후 해외 침구인들과 네트워크가 형성되면서 정보 교류도 활발히 전개되었다.
그때 스페인에서 발표자로 참석했던 박한성채 원장으로부터 정 선생님의 중풍치료법을 연구하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 나는 선생에게 독일까지 들러서 오자는 제안을 하자 뛸 듯이 기뻐했다. 정 선생은 30대 초반 독일 광부로 3년, 요트회사 용접기술자로 2년 등 5년의 애증을 간직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2018년 8월 하순 스페인 중부의 작은 도시 딸라바라시 외곽의 채나침술원을 방문했다. 큰 도시들과는 멀리 떨어진 외진 곳이지만 환자가 제법 많았다. 휴가철이라 환자가 많지 않다는데도 하루에 60여명은 되는 것 같았다.
그곳에서 열흘 동안 머물며 중풍치료와 박한성채씨가 애용하는 계족침과 간접구의 효과에 대해 많은 토론을 하기도 했다. 그는 20여 년 정도 되었다는데 환자도 많고 지역 신문에도 여러 차례 나올 정도로 성공적인 운영을 하고 있었다.
독일은 보훔지역에 있는 전 강원도민 회장 댁에서 신세를 지기로 했다. 그런데 한인회와 교회 등을 통해 무료 침뜸 봉사를 알렸는데 호응이 별반 높지 않다고 했다. 9월 초라 아직은 휴가시즌이니 만약 환자가 없으면 쉬다 가시라고 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첫날 대여섯 명 정도의 환자가 방문하였다.
치료의 일관성을 위해 정 선생님은 침을 놓고 나는 뜸을 떠 주었다. 그런데 다음날부터 환자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대부분 광부나 간호사로 갔다가 정착한 분들이었다.
마침 회장님 큰딸이 독일에서 신경외과 전문의인데 기초적인 침술 교육을 받았다며 동참을 했다. 독일 환자들은 교수보다 동양인인 자기에게 침을 맞기를 원한다며 우리에게 이것저것 많은 질문을 하기도 했다.
치료비는 한 푼도 받지 않는 순수 봉사였다. 그래도 나름대로 음식을 해 오거나 작은 선물을 들고 오기도 하였다. 하루는 광부간호사회관에서 정기 모임이 있는 날 봉사요청이 들어왔는데 환자는 10명 이내라고 하였다. 우리는 오전에 치료하고 오후에는 인근 관광지를 둘러 볼 계획이었다.
그런데 아침에 도착하자 침을 맞겠다고 등록한 사람이 30명이 넘는데 계속 줄을 서고 있었다. 참으로 난감했지만 점심도 거르며 40여명 치료로 마감을 하였다. 환자는 어디를 가나 넘쳐났다.
또 하나 기억에 남는 환자는 한국인 간호사와 결혼한 독일인이었다. 돌아오기 이틀 전 부인의 설득으로 억지로 온 케이스였다. 그는 철강기술자로 포항제철에서 기술고문으로도 오랫동안 근무했다고 한다.
건강했던 그가 7년 전 히말라야 등반 후 원인 모를 통증과 불면증으로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 병이 깊은 듯 표정도 어둡고 말이 별로 없었다. 정성스레 침과 뜸을 해주었는데 돌아가면서 몸이 한결 가벼워졌다며 인사를 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일찍 그 부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남편이 7년 만에 잠도 잘 자고 몸이 너무나 가볍다며 한 번만 더 치료받기를 간청했다.
다시 온 그의 얼굴은 다른 사람이 되어있었다. 그리고는 신뢰가 생긴 듯 여기저기 아픈 곳을 이야기했다. 그는 돌아가면서 회장님 사모님에게 한사코 100유로를 놓고 갔다고 했다. 참 세상은 넓고 환자는 많은데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렇게 독일에서의 10일을 꿈결처럼 보내고 돌아왔다.
스페인에선 침가방도 못 풀고 코로나 시국 맞아 귀국
그간 침뜸 순례와 해외 활동 중인 침구인들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알게 되었다. 이제 은퇴자의 여유를 향유하며 침뜸의 자유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떠나리라 생각을 했다.
그즈음 1년 전 스페인에서 은퇴비자를 받고 생활하는 지인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2019년 4월초 바르셀로나에서 송달용 스페인침구협회장이 오행체질식에 관한 세미나를 개최할 계획이다. 그리고 이때 스페인 전역에서 활동하는 한인 침구사들도 상당수 모일 예정이라는 것이었다.
스페인 침구사정을 한자리에서 모두 엿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허임기념사업회 손중양 이사장도 스페인 1세대 이민자들이 침구사로 정착해 성공한 사례들을 기록으로 남겨보자는 제안을 했다.
그렇게 3월 초에 한 달 일정으로 바르셀로나행 비행기에 올랐다. 세미나에는 휴일인데도 언 듯 보아 100여 명은 넘는 사람들이 모였다. 그중 한국인 침구사들은 10여 명 남짓 되는 것 같았다. 한 분씩 인사를 나눠보니 나름 지역에서 존경받는 명의로 상당한 부도 쌓고 여유로워 보였다. 전직도 다양했다.
태권도사범, 요리사, 선박수리공 등으로 활동하다 나이가 들자 새롭고 안정적인 직업을 찾은 것이었다. 특히 태권도 사범들은 대부분 운동하다 발목을 삐거나 허리를 다친 교육생들을 치료하다 소문이 나고 그대로 직업전환이 된 케이스였다. 나머지는 접하기 쉽고 안전한 수지침으로 시작하여 대다수가 지금도 수지침을 기본으로 하고 있었다. 스페인침구사협회에 등록하고 활동하는 한국인 침구사는 대략 100여 명쯤인데 전국에 300여 명은 족히 되리라 추정하고 있었다.
나는 그중 여섯 곳의 침술원을 방문하였다.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발렌시아, 알리칸테 등이었다. 속박되지 않은 자유로운 삶, 침뜸의 자유가 있는 그곳은 침쟁이라면 누구나 살고 싶은 곳이었다. 여행 중 이미 마음은 스페인에 있었다.
다시 돌아와 꿈에 그리던 침뜸의 자유를 만끽하리라 다짐하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거주비자가 관건이지만 실력만 있으면 최고의 직업이라는 말이 가슴을 뒤흔들었다. 그렇게 스페인의 침구 사정을 두루 살펴보고 머릿속에 온갖 상상을 하며 비행기에 올랐다.
대여섯 시간쯤 지나 대략 시베리아 상공을 지날 즈음 긴급한 기내방송이 내 귀를 자극했다.
지금 기내에 응급환자가 발생했는데 의료인 계시면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즉시 뛰어나가고 싶지만 무면허라는 자괴감에 가슴만 답답했다. 혹시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의 심정이 이랬을까 하며 눈을 감고 누웠다.
몇 분 후 또다시 애타게 호소하는 방송에 용기를 내어 지나가는 스튜어디스에게 물어보았다. 지금 환자의 상태와 내가 한국에서는 인정받지 못 하지만 일본 침구대학을 나온 침구사다. 긴급 상황이니 만약 보호자나 항공사에서 인정한다면 환자를 보고 싶다고 했다. 그는 두말할 필요도 없다며 도와달라고 했다.
통로에 누워있는 환자는 50대 남자였다. 가슴이 답답하고 호흡이 안된다는데 손발이 싸늘했다. 옆에서 안절부절 하는 부인에게 물어보니 평소 심장질환이나 고혈압은 없다고 했다. 현대의학을 하는 분들이야 인정은 커녕 질색하지만 늘 가지고 다니는 지갑 속의 란셋 침을 꺼내 손발가락 끝을 모두 땃다.
침구학에서 손발 끝은 정혈(井穴)이라고 하여 모든 장부의 경락이 시작되는 곳으로 구급혈에 쓰기 때문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어머니로부터 손끝 따는 것을 몸으로 익혀 즐겨 쓰고 있다. 게다가 일본에서 침구대학을 다닐 때 자락(刺絡)학회에서 별도로 공부도 했기에 확신이 있었다.
그렇게 손발 끝에서 서너 번씩 피를 낸 후 부인과 스튜어디스에게 손발을 주무르도록 했다. 대략 5분 정도 지나니 손발이 좀 따듯해졌고 경락이 풀리니 환자도 호흡이 좀 편하다고 했다.
나는 몇 군데 침을 놓고자 부인에게 동의를 구했다. 그녀는 이제 급한 불은 껐다는 듯 남편이 원래 침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아쉽기는 했지만 일단 환자도 안정을 찾은 것 같아 자리로 돌아왔다.
두어 시간 지나 물어보니 환자는 완전히 회복되어 자리로 돌아갔다고 했다. 그 환자나 부인은 침을 신뢰하지 않은 까닭인지 아무런 인사도 없었다. 하지만 귀국 후 항공사에서 감사의 인사와 답례라며 몇 천마일의 마일리지를 보내왔다.
돌아와서는 바로 스페인으로 떠날 준비를 했다. 원래 스페인에 이민이나 장기거주 비자를 받으려면 50만 유로 이상 투자가 조건이다. 그러나 나는 일정액의 연금을 조건으로 1년 장기 거주 비자를 받을 수 있었다. 1년이 지나면 2년 거주 비자를 받을 수 있다.
내 생각은 1년간 어학원에서 스페인어 공부를 하고 2년째 연장 비자와 침구원을 개원할 계획이었다.
여러 가지 서류를 구비하고 오랜 시간 기다림 끝에 2019년 8월 말 출국을 했다. 그 또한 확실한 정착지도 정하지 않은 채 조금은 무모한 출국이었다.
그나마 지난 4월 방문 했을 때 한인 민박집에서 침을 놔주며 알게 된 프리랜서와 연락이 닿은 것이 한 줄기 빛이었다.
도전하지 않고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다행이 그는 매사에 치밀하고 적극적이었다. 물론, 일정액의 일당을 계산해 주기는 했지만 침에도 관심이 많다 보니 자신의 일 처럼 나서주었다.
그렇게 짐을 푼 곳은 바르셀로나에서 지중해를 따라 한 시간 반쯤 떨어진 타라고나라는 도시였다. 인구는 15만 정도로 크지 않지만 로마시대 번성했던 고대도시로 원형극장과 수로교가 있는 아름다운 고도였다.
그곳은 한국인은 거의 없는 곳이었다.
호랑이를 잡으려 호랑이굴을 찾듯이 말을 배우려면 그들만의 세계로 들어가야 한다. 그렇게 집을 얻고 어학원에 등록하고 내가 선택한 고독한 길을 걷고 있었다.
역시 60이 넘은 나이에 외국어라니 쉽지 않았다. 기본적인 숫자와 요일, 날짜, 방향을 외우는 것조차 생각 같지 않았다.
그렇게 어렵게 6개월째 적응을 해 나갈 즈음 코로나가 발생했다. 환자는 급증하고 사망률도 높아지자 국제적 긴장도가 최고조로 달하고 있었다. 그곳 분위기도 점점 흉흉해졌다.
어학원이 휴교를 한다는 말도 돌고 더러는 길가는 나에게 소리를 지르는 사람도 있었다. 아침마다 카톡을 통해 뉴스를 접하는데 대한항공에서 스페인 운항을 멈춘다는 소식이었다.
말도 안 통하는 외국인으로서는 불안감이 말할 수 없었다. 며칠 후 아시아나 항공도 운항을 중단한다는 연락이 왔다. 내가 아시아나 고객이라 메일을 보낸 것 같았다.
천신만고 끝에 침의 자유를 찾아온 이곳을 떠나야 한단 말인가. 허탈하기도 하고 고민이 없을 수 없었다.
그즈음 한두 달 전부터 러시아 사할린의 손병덕 선생에게서 연락이 왔다. 선생은 그곳에서 30여 년 이상 농장운영과 무료침뜸 봉사로 잘 알려진 분인데 나도 몇 번 뵌 적이 있었다.
요지는 그곳에 침술클리닉도 다 완비돼 있으니 코로나만 끝나면 들어오라는 것이었다. 일본 침구대학을 나오고 라이센스도 있으니 그곳에서 합법적으로 일하는데 문제가 없다는 것이었다.
어찌 보면 코로나 때문에 답답하고 암울했던 내 마음을 위무해 준 한줄기 희망의 불빛이었다. 그렇게 좌절 속에서 새로운 꿈을 안고 부랴부랴 집을 정리하였다. 그렇게 2020년 3월9일 마지막 아시아나 항공기에 몸을 실었다.
그나마 코로나만 끝나면 사할린으로 떠날 수 있다는 생각에 다소나마 위안은 되었다.
그러나 여우 피하려다 호랑이만난다고 코로나는 끝나지도 않았는데 우크라이나 전쟁까지 발발하니 러시아를 향한 꿈도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침뜸의 자유만 있다면 어디라도 가리라
2020년 3월 서울로 돌아와 덧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8월 어느 날 허임기념사업회 이사 한 분이 침뜸 연구와 재야 침구인 사교의 장을 제공해 주었다.
그곳은 자연스레 해외에서 활동하다 귀국한 침구인은 물론, 국내 은둔 고수들이 토론과 친목을 도모하는 사랑방이 되었다. 그렇게 고수들의 경험을 공유하며 실력도 쌓고 더러는 지인들의 난치병을 치료로 시간을 보냈다. 그곳까지 온 환자들은 이미 전문의와 대학병원을 거쳐 유명 한의원까지 두루 섭렵한 환자들이다. 하나같이 치료가 어려운 노인들의 퇴행성 질환이나 자가면역 질환 같은 경우였다. 그래도 여럿이 공동으로 봉사하는 경우와는 달랐다. 혼자서 판단하고 치료하며 결과를 보게 되니 더 큰 열정을 쏟게 되고 살아있는 공부가 되었다. 쏟는 정성에 비해 효과가 미미하면 실망도 하고 때로는 깜짝 놀랄 경험을 하며 자신감도 쌓았다.
난치병이라는 38세 남자의 섬유근육통과 36세 여자의 루프스 환자 치료는 침뜸의 가능성을 다시 한번 확신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가장 큰 난제는 젊고 현대교육을 많이 받을수록 서양의학에 대한 믿음이 너무나 강고했다. 일단 치료를 하려면 먼저 마음의 문부터 열어야 한다. 그래야 몸도 경락도 풀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 타인의 권유에 의해 억지로 온 경우 어느 정도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하다. 약간의 침과 뜸으로 통증이 완화되고 몸이 가벼워지며 소화나 숙면에 변화를 느끼면 서서히 마음에 문을 연다. 환자의 건강상태나 병세, 나이 등 여러 가지 변수는 있지만 대부분 한 달 정도면 확실한 차도를 느끼고 3~4개월쯤 지나면 완치 단계로 호전된다. 그런데 문제는 좀 나은 듯싶으면 뜨겁고 흔적 남는 뜸보다 편하게 약에 의존하려고 해서 마무리를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 외에 십수년도 넘은 구안와사 후유증환자의 믿어지지 않는 빠른 회복, 요추염좌로 유명 대학병원과 통증의학과를 오랫동안 전전하던 92세 노인의 치료 후 주치의를 해달라며 부탁하던 일도 기분 좋은 추억이다.
그렇게 러시아 진출의 꿈을 간직한 채 2년여가 흐른 지난 2022년 연말 갑자기 필리핀에서 연락이 왔다.
오랫동안 침구원을 운영했고 예전부터 교유하며 잘 아는 분이었다. 본인은 이미 마닐라 중심가로 옮겼고 함께 근무하던 부원장도 다른 지역으로 진출 예정이라며 클락의 침구원 운영의사를 묻는 것이었다.
갑작스런 제안이긴 했지만 그곳은 두어 번 봉사를 나갔던 곳이라 그리 낯설지 않았다. 어차피 러시아 진출계획도 불투명 하던 터라 즉시 그러겠노라 대답을 했다.
누가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 온다고 했던가. 2019년 스페인 출국을 앞두고 있을 때 필리핀에서 함께 봉사했던 몇몇 동기들이 필리핀 대체의학청에 면허를 신청한다고 했다. 나는 어차피 스페인으로 갈 예정이라 생각이 없었다. 그러다 한편 생각해 보니 사람의 일이란 알 수 없는 일 함께 동참하기로 했다.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받아놓은 자격증이 이렇게 요긴하게 쓰일 줄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암튼 나는 그렇게 또 다시 침뜸의 자유를 찾아 금년 1월 필리핀에 도착했다. 합법적인 침구원 운영을 위해서는 세가지 조건을 갖춰야 한다. 공식적인 거주 비자와 침구사면허, 그리고 노동허가를 받아야 한다. 나는 현재 비자까지 받았으니 두 가지는 정리가 되었고 노동허가 절차를 밟고있는 중이다.
내가 자처한 일이기는 하지만 멀쩡한 내 나라를 놔두고 직업의 자유를 찾아 오늘도 방황하고 있다.
지금 나는 앞으로 근무할 침술원에서 분위기도 익히고 치료를 도와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침술의 재미란 돈을 많이 벌어서가 아니다.
다양한 환자들이 치료되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 마치 내 병이 낫는 기분이기 때문이다. 나는 골프를 안 하지만 오랫동안 유명의사와 병원을 전전하며 고생하던 환자가 한두 번 만에 호전되는 모습을 보면 마치 홀인원이라도 한 기분이다.
요즈음 드는 생각은 필리핀이야말로 침구사들이 인정받을 수 있는 진검승부의 장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한국에서 침뜸을 원하는 환자는 대부분 퇴행성이나 근골격계 질환자들이지만 여기는 각종 환자가 다 모여든다. 한마디로 수술 없는 종합병원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그것도 대부분 병원의 진단서나 X-레이, 검진결과서 등을 가지고 온다. 물론, 필리핀의 의료 환경도 열악하고 의료수가의 영향도 있겠지만 침구사에 대한 신뢰가 높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난 두어 달 동안 직간접적 경험을 통해 몇 번이나 가슴 뛰는 경험을 했다. 38세 무정자증 남자의 치료사례, 업혀오다시피 한 56세의 남성 중풍 환자가 몇 번의 치료 후에 걷는 사례, 오래전 운동을 하다 다친 발목 때문에 고생하다가 두 번 만에 완치가 되자 껑충껑충 뛰면서 코리아 넘버원을 외치던 독일인 등 짧지만 침구사로서 최고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아직 본격적인 시작도 못 했지만 세상 살아가면서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행복한가.
내가 그리는 꿈은 단순하다. 여기서 한 3년 현대의학으로 난치라는 자가 면역 질환이나 파킨슨병과 같은 몇 가지 질병에 대한 답을 얻어 보고자 한다. 그리고 영어 입이 트이면 침 가방 하나 메고 주유천하를 해보고 싶다.
나는 침은 현대판 여의주라고 생각한다. 단 몇 봉지의 침과 한줌의 쑥이면 어떠한 질병과도 맞설 수 있고 어디를 가도 환영받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라! 세상의 어떤 의술이 이렇게 간편하고 경제적이며 안전하단 말인가. 침뜸만 생각하면 늘 답답하고 부아가 치밀어 오른다. 법이니 원칙이니 국민건강과 행복이라는 말로 미화는 하지만 결국 전문가 의견이라는 포장으로 이익집단의 논리와 주장을 보호해 주는 것 아닌가. 역사도 승자의 기록일 뿐 올바른 기록이 아니지 않는가.
이제 희미하게나마 마지막으로 거는 기대는 헌법재판소에 계류 중인 침구사제도 양성화뿐이다. 2010년에는 5:4 판결로 이기고도 아무런 실익이 없었는데 이번에는 우리 손을 들어줄까. 간절히 기도하며 기다릴 뿐이다.
2023년 4월 19일
필리핀에서 이국렬
첫댓글 이국렬 선생님 안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