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에 관한 시 모음2
봄비 안도현
봄비는
왕벚나무 가지에 자꾸 입을 갖다댄다
왕벚나무 가지 속에 숨은
꽃망울을 빨아내려고
봄비 이동순
겨우내
햇볕 한 모금 들지 않던
뒤꼍 추녀 밑 마늘광 위으로
봄비는 나리어
얼굴에 까만 먼지 쓰고
눈감고 누워 세월 모르고 살아온
저 잔설을 일깨운다
잔설은
투덜거리며 일어나
때묻은 이불 개켜 옆구리에 끼더니
슬쩍 어디론가 사라진다
잔설이 떠나고 없는
추녀 밑 깨진 기왓장 틈으로
종일 빗물이 스민다
봄비 이수복(1924 - 1986) 전남 함평
이 비 그치면
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
서러운 풀밭이 짙어오것다
푸르른 보리밭길
맑은 하늘에
종달새만 무어라고 지껄이것다
이 비 그치면
시새워 벙글어질 고운 풀밭 속
처녀애들 짝하여 새로이 서고
입 안에 타오르는
향연과 같이
땅에선 또 아지랑이 타오르것다
게이샤의 추억
봄비 이재무
봄비의 혀가
초록의 몸에 불을 지른다
보라, 젖을 수록
깊게 불타는 초록의 환희
봄비의 혀가
아직, 잠에 혼곤한
초록을 충동질한다
빗속을 걷는
젊은 여인의 등허리에
허연 김 솟아오른다
사랑의 모든 기억을 데리고 강가로 가다오
그리하여 거기 하류의 겸손 앞에 무릎 꿇고 두 손 모으게 해다오
살 속에 박힌 추억이 떨고 있다
어떤 개인 날 등 보이며 떠나는 과거의 옷자락이
보일 때까지 봄비여
내 낡은 신발이 남긴 죄의 발자국 지워다오
나를 살다간 이여, 그러면 안녕
그대 위해 쓴 눈물 대신 묘목을 심는다
이 나무가 곧게 자라서
세상 속으로
그늘을 드리우고 가지마다 그리움의
이파리 파랗게 반짝이고
한 가지에서 또 한 가지에로
새들이 넘나들며 울고
벌레들 불러들여 집과 밥을 베풀고
꾸중 들어 저녁밥 거른 아이의 쉼터가 되고
내 생의 사잇길 봄비에 지는 꽃잎으로
봄비는, 이 하염없는 추회
둥근 열매로 익어간다면
나를 떠나간 이여,그러면 그대는 이미
내 안에 돌아와 웃고 있는 것이다
늦도록 봄비 싸돌아 다닌 뒤
내 뜰로 돌아와 내 오랜 기다림의 묘목 심는다
봄비 이춘오
말라버린 나무는 모두 죽은 줄 알았다
겨우내 숨 죽인 몸짓
삶을 상실한 줄 알았다
가지를 꺾는다, 가지는 허연 속살을 보인다
흰피를 흘린다
죽은 줄 알았던 것들은
찬 바람 속에서도 살아 있었다
봄비에 속살을 내보인 가지끝
처녀젖멍우러럼 튀어오른 새순을 본다
아! 아직 삶이 남아 있구나
그렇게 뻗대며 살아 있구나
봄비 장석남(1965 - ) 경기도 덕적
풀린
봄
물결이여 내 고요 위에
봄비는 내려와
둥글게 둥그렇게
서로서로 몸을 감고 죽는다
둥그런, 둥그런 물의 棺들
물 위로 물 속의 푸른 어둠이 솟아올라와
둥근 그 소리에까지도 푸른 어둠이 스민다
풀린
봄
물결이여
네 몸 위에 받는 봄비는
먼데 골짜기까지도 봄이게 하며 몸을 터서 죽는다
아 너와 내가 잠들었던
이 한 덩어리 기슭의 바위에도 봄비는 와서
둥글게 둥그렇게
앉음새를 고쳐준다
봄비는 와서 둥글게 동그랗게 앉음새를 고쳐준다
봄비 장옥관(1955 - ) 구미 .계명대 교수
한 올 한 올 매화 꽃가지
붉은 색실이 풀리고 있다
흥얼흥얼 수로를 따라 흘러드는
눈 희미한 콧노래
어머니, 아득한 그곳에서 재봉틀 돌리시는지
한 땀 한 땀
흰개미들 내려와 풍경을 꿰매고 있다
낡은 영화 필름처럼
느리게 느리게 재봉틀이 돌아간다
어머니 노루발 지나간 바느질 자국에
다시는 몸 아픈 날들 오지 않으리라
모든 안팎이 사라지리라
<달과 뱀과 짧은 이야기> 랜덤하우스.
봄비 장인성
네가 오는구나
손에 든 초록 보따리
그게 전부 가난이라 해도
반길 수 밖에 없는
허기진 새벽
누이야
네 들고 온 가난을 풀어보아라
무슨 풀씨이든
이 나라 들판에 뿌려놓으면
빈 곳이야 넉넉히 가리지 않겠느냐
봄비 정진규
실눈을 뜨고 반쯤 잠든
나른한 슬픔에게
떠나버린지 너무나 오랜
그 여자의 알 수 없는 향기에게
삼 년째 내 방에 걸려 있는
복역 중인 내 친구
때묻은 그의 모자에게
잉크가 나오지 않는 만년필에게
값싼 볼펜에게
미구에 가득히 비어버릴 나의 지갑에게
몇 평 나의 땅 문서에게
여린 나뭇잎들 몰래 핥고 지나가는
바람의 쓸쓸한 탐욕에게
방안 가득 엎질러진 꿈
꿈을 혼자서 쓸어담고 있는
낡은 나의 언어에게
자꾸 엎질기만 하는 넘치게만 하는
나의 언어에게
새 바구니 하날 다시 줍시오
십년 넘게 주문해도 주시지 않는
인색한 나의 하느님에게
오, 나의 모든 슬품들에게
나를 버리라고 떠나가라고
봄비!
하루 종일 속삭인다
믿을 게 없다고 기다려야 소용없다고
함께 살자고 책임지겠다고
봄비!
하루 종일 속삭이다
봄비 정한용
강을 건너자 비가 가늘어졌다
산발치에 닿아선 하늘까지 맑아졌다
땅은 이미 충분히 젖어
검고 부드럽게 나무 뿌리에 담았던 향을 풀어냈다
포클레인이 모래흙 한 무더기
내 키만큼 쌓아놓은 뒤였다
새로 파낸 沙土는 새 봄비를 맞아 빛이 더 맑았다
이미 마음을 궁글렸으니
세상 전부가 함께 묻힌다 한들 이상할 게 없었다
흙을 가리고 방향을 잡아 자리를 정한 다음
조용히 내려 놓았다
내 귀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평온한 세계로 들고 있었다
구름 걷히고 햇살 퍼지면서 흙내음 진한 달구노래 들렸는지
어머니는 하나님을 믿었으니
그후 어찌 되었는지는 잘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포르릉 산새가 날아간 것인지
산역을 마친 이들이 햇무덤에서 내려오고 나서야
나는 문득 손이 텅 비었다는 것을
상처가 아리다는 걸 느꼈다
봄비 걷히고
내 알몸 위로 울음이 쏟아졌다
<흰꽃> 문학동네.2006년
봄비 주용일(1964 - ) 충북 영동
밤새 누에 뽕잎 갉아먹는 소리
자다 깨어 간지러운 귀를 판다
세상 잘못 살아온 나를
어디 멀리 있는 이가 욕을 하는지
귓속 간지러움 밤새 그치지 않는다
잎에서 잎맥으로 잎줄기로 옮겨가며
점, 점, 점, 사나워지는 누에들의
뽕잎 갉아먹는 소리
내 귓속 간지러움도 달팽이관을 따라
점점 깊은 곳으로 몰려간다
세상 함부로 살아온 나를
이제는 가까이 있는 누가 욕을 하는지
뽕잎 갉아먹는 소리 갈수록 거칠어지고
자다 깨어 죄 지은 사람처럼
무릎 꿇고 앉아 간지러운 귀를 판다
<꽃과 함께 식사> 고요아침.2006년
봄비 허난설헌(1563 - 1589) 강릉
보슬보슬 봄비는 못에 내리고
찬바람이 장막 속 숨어 들을제
뜬시름 못내이겨 병풍 기대니
송이송이 살구꽃 담장 위에 지네
봄비는 보슬보슬 찬바람 숨어들제
뜬지름 못내이겨 병풍을 기대서니
담장 위에 살구꽃지며 갈 길 몰라 하더라
봄비 황동규
조그만 소리들이 자란다
누군가 계기를 한금 올리자
머뭇머뭇대던 는개 속이 환해진다
나의 무엇이 따뜻한지
땅이 속삭일 때다
는개 ㅡ 안개보다 조금 굵고 이슬비보다 가는 비
봄비는 가슴에 내리고 목필균
그대가 보낸 편지로
겨우내 마른 가슴이 젖어든다
봉긋이 피어오르던 꽃눈 속에
눈물이 스며들어, 아픈 사랑도
아름답다는 것을 보여주리라
아무 것도 적혀있지 않은
겨울 일기장 덮으며
흥건하게 적신 목련나무
환하게 꽃등 켜라고
온종일 봄비가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