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얄타 리바디아 궁전(Livadia palace)1 인구약10만의 소도시인 얄타는 1945년 2월 연합국 진영의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 영국의 처칠 수상, 소련의 스탈린이 만나 얄타회담을 했던 곳이다. 얄타회담에서 연합국 수뇌들은 전쟁이 끝난 후의 독일의 분할통치, 독일 이외의 유럽나라의 처리문제, 소련의 대일본전 참여 그리고 전쟁이 끝난 후의 국제연합의 창설방안 등을 협의 하였다. 리바디아 궁전은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인 니콜라이 2세가 1911년에 그의 여름별장으로 지은 것이다. 소비에트 시절에는 스탈린의 다처(별장)로 사용되었고, 독일군 점령기간 중에는 독일군의 병원으로 쓰였다. 1974년 박물관으로 개조되어 공개되었는데 1층은 얄타회담과 관련된 자료가 전시, 2층에는 비운의 니콜라이 2세의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리바디아 궁전에서 열린 얄타회담은 또한 남북분단을 결정지은 비운의 장소이기도 하다. 
리바디아 궁전(얄타회담 장소)2 
리바디아 궁전(얄타회담 사진)3 
리바디아 궁전(얄타회담의 주역 영국수상 처어칠, 미국대통령 루즈벨트, 소련의 스탈린)4 
리바디아 궁전에서 인증샷5 화이트홀로 당시회담을 할 때의 세사람의 명패가 남아있다. 그리고 둥근테이블은 실무자 없이 정상들만 회의를 한 곳이라고 한다. 
리바디아 궁전(박물관)6 
리바디아 궁전 박물관(니콜라이 2세 사진)7 
리바디아 궁전 박물관(니콜라이 2세 가족사진)8 니콜라이 2세(1868년-1918년)의 아들 알렉세이가 혈우병을 앓았다. 라스푸틴이 알렉세이의 혈우병을 고쳐서 황후는 그를 너무 신임한 나머지 중요한 국사에 참여했다고 한다. 그는 잘못된 결정도 많이해서 러시아에서는 그를 요승이라고 부른다. 라스푸틴(1869년-1916년)은 러시아말로 방탕한 사람 이라는 뜻이며 화술로 황후를 손에 넣은 뒤 황제마져 장악해 못된짓을 한 간신배이다. 
리바디아 궁전 박물관(그림)9 
리바디아 궁전 박물관(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르 황후사진)10 
리바디아 궁전 박물관(니콜라이 2세사진)11 
리바디아 궁전 박물관(황제 책상)12 
리바디아 궁전 박물관(수도꼭지)13 
리바디아 궁전 박물관(성가.성경)14 
리바디아 궁전 박물관에서 인솔자, 현지가이드와 인증샷15 
리바디아 궁전 박물관(식탁.Cutty-shark1869)16 
리바디아 궁전(외관)17 
리바디아 궁전(견학온 학생)18 
리바디아 궁전(외관)19 
리바디아 궁전(관광객)20 
블루베리21 
흑해와 사이프러스나무22 
얄타 제비둥지 성23 Swallow’s Nest Castle 즉 우리말로 하면 제비둥지 성이라고 부른다. 16c말에 지어진 성으로 가파른 절벽에 놓여졌기 때문에 이곳 크림반도 남쪽 해안의 상징이 되었다고 한다. 제비둥지 성은 원래 16c초 사랑의 성으로 나무별장으로 시작되었다. 오로라 절벽의 첫변째 건물은 러시아 장군에 의해 건립되었다. 제비둥지 성의 전설은 중세로 거슬러 올라간다. 16c 유명한 러시아 장군은 전쟁에서 아름다운 여성포로를 잡아왔다. 그 장군은 그 여성포로를 사랑했다고 한다. 장군은 자신의 로맨틱한 사랑의 명예를 오직 그녀를 위해 바다가 보이는 아름다운 별장을 지었다. 장군이 다시 전쟁터에 갔다왔을 때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녀는 터키 밀수꾼과 도망을 갔거나 바다에 빠져죽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고 한다. 1911년 독일의 귀족 Baron von Steingel가 기름으로 부를 축적하여 이 목재별장을 구입하여 1년만에 현재의 제비둥지 성을 지었다고 한다. 1914년 그는 레스토랑으로 사용할려는 이탈리아인에게 건물을 팔았다고 한다. 그후 지진으로 많이 파괴된 절벽과 성곽복원은 1968년에 시작했고 1975년 이탈리아 레스토랑을 건물내에 운영하고 있고 관광명소로 거듭났다. 
제비둥지 성24 
제비둥지 성 근방(전망대)25 
제비둥지 성 근방 전망대에서 인증샷26 
제비둥지 성 근방 전망대에서 인증샷27 
얄타의 작은 기념품 가게28 
심페로폴 기차역 주변풍경29 
심페로폴 기차역(시간표)30 
심페로폴 기차역31 이곳 심페로폴 역에서 기차를 타고 밤새 달려 새벽에 오데사에 도착하게 된다. (2012.07.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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