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방글라데시 선교
(1) 기본현황
① 국명 : 방글라데시 인민공화국(People'S Republic Of Bangladesh)
② 인구 : 166,368,149명(2018추계)
③ 종교 : 이슬람교(86.6%), 힌두교(12.1%), 불교(1%), 기독교(0.4%)
④ 민족 : 뱅골족(98%)
⑤ 특징 : 세계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높은 나라중 하나로서 전체 노동력의 60%가 농업에 종사
뱅골의 땅이라는 의미의 방글라데시 국민은 뱅골어를 쓰는 뱅골인으로 83%이상이 스스로 이슬람교도라고 자신합니다. 그 외에 16%정도가 힌두교도이며 남동부의 치타공 구릉지대에는 불교도인 차크마족, 마르마족, 트리푸라족(티프라), 음로족 부족들이 있습니다. 방글라데시는 출생률과 사망률과 연간 인구성장률 모두가 높은 나라입니다. 평균수명은 남녀 모두 약 51세로 후진적입니다. 전인구의 1/5만이 최대도시 다카(수도)와 치타공과 쿨나 등 도시지역에서 생활합니다.
방글라데시는 중앙집권공화제로 전체 노동력의 3/5이 농업에 종사합니다. 방글라데시의 1인당 GNP는 세계 최저 수준으로 매우 어려운 환경에 있습니다. 전국토의 1O%만 도로포장이 되어 있고 해외원조에 의존도가 매우 높아 세계은행과 미국의 지원으로 경제가 움직이고 있습니다. 방글라데시는 남북한 동시 수교국으로 한반도 문제에 대하여 중립을 지키고 있습니다. 방글라데시의 문맹률은 75%에 달하고 기독교 박해가 심하여 전 인구의 0.5%에 해당하는 80만명이 신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전체 인구의 80%가 기본적인 식량공급에 시달리고 있으며 유아 사망률 또한 13.5%에 이르고 있습니다. 1988년, 이슬람교를 국가종교로 지정하였고 기독교 선교는 더욱더 어려운 상황에 있습니다.
(2) 역사
BC 4세기경, 뱅골은 인도 마우리아 제국(BC.325∼185)에 속했으며 이때 불교가 전래되었습니다. 4세기에는 인도 북동부 마가다 지역에 자리잡은 굽타 왕조로 넘어갔으며 750∼1200년에는 토착 뱅골 왕조인 팔라 왕조와 세나 왕조의 지배를 받는 등 언제나 독립의 기회가 없었습니다. 힌두 왕조인 굽타 왕조를 제외한 오랜동안 불교국의 통치를 받았으나 10세기까지 힌두교가 절대적인 지역이었습니다. 10세기 말, 이슬람교도들이 인도 북부로 침략하고 1206년, 슬라브와 맘루크 왕조가 수립되었습니다. 1338년, 뱅골은 술탄 왕조에서 분리 독립하였으나 1576년, 무굴제국에게 정복되었습니다. 1651년, 영국 동인도회사가 뱅골에 공장이 설됩되었고, 뱅골의 태수(nawab)를 굴복시키고 친 영국의 후계자를 왕으로 세웠습니다. 영국정책에 반대하는 힌두교도들과 이슬람교도가 분열하고 1905년, 이슬람교도가 지배하는 동뱅골이 창궐되었습니다. 1947년, 영국이 인도에서 철수하면서 동뱅골은 파키스탄에 흡수되었습니다. 뱅골인의 동파키스탄과 파키스탄 정부간의 전쟁으로 인도가 전쟁에 참여하고 1971년 12월16일, 방글라데시는 독립국이 되었습니다. 정치적 불안정으로 초대 대통령 세이크 무지부르 라만이 1975년 암살당하고, 후계자 지아 울라만도 1981년 암살 당하였습니다. 1982년, 군사투데타로 호사인 모하마드 에르샤드가 진압후 1984년 대통령에 취임했으나 1990년, 권좌에서 내려와야 했습니다.
(3) 뱅갈족의 이슬람화
모계혈통으로는 인도의 지배계급인 브라만이며, 부계혈통으로도 원주민 가운데 최상급인 수드라임에도 어느곳에서도 인정받지 못하는 뱅갈인들은 언제나 패배자의 위치에 있었습니다. 뱅갈인의 이슬람화는 타지역의 전쟁에서 패전한 부산물이 아니라 이슬람선교사들에 의해 전파되었습니다. 언제나 불평등의 콤플렉스에 갇혀 있던 뱅갈인들에게 이슬람은 알라 앞에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가르침에 스스로 빗장을 열고 받아 들인 것입니다. 초기 수천에서 수만명씩 집단개종한 뱅갈족은 이슬람선교 50년만에 전체인구의 60%가 이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평등을 원하였던 뱅갈족의 염원과 달리 이슬람 역시 상류층의 아쉬랍, 평민층의 아즈람, 천민계급의 아르찰 등 3가지 계급이 존재하였습니다. 현재는 전 인구의 86.6%가 이슬람교로 국가종교가 되었습니다.
(4) 기독교 선교와 교회상황
방글라데시는 인도령에 있을 때부터 선교가 시작되어 교육선교에 많은 투자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열매가 지지부진한 나라입니다. 침례교 선교사 윌리엄 케리가 선교를 시작하여 오랜 역사임에도 불구하고 정체성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방글라데시의 기독교 선교는 포르투갈 식민지시대의 동인도회사와 관련한 선교로 시작되어, 동파키스탄 시대에도 계속되었으며, 1972년, 파키스탄으로부터 독립한 이후의 선교시대와 1982년, 이슬람국교화 이후까지 이르렀습니다.
1517년, 포르투갈 상선은 치타공에 교부보를 마련하고 포르투갈인을 대상으로 하는 교회가 설립되었습니다. 로마카톨릭은 포르투갈 식민지 내에서 예수회와 어거스틴 수도회, 도미니크 수도회의 선교사들이 성당을 설립하였습니다. 1600년, 방글라데시에 최초의 교회를 설립하고 포르투갈 남자들이 뱅갈 여성과 결혼하여 출산한 자녀들은 로마카톨릭 신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라칸 지방에서 포르투갈 상인들과 원주민이 충돌하여 로마카톨릭은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666년, 뱅갈지역에 33,000명의 신자가 있었습니다. 선교회간의 구역문제로 불협화음이 발생하자 원주민 개종자들이 정령신앙으로 회귀하고 18세기, 뱅갈지역이 영국의 식민지가 되면서 다시 로마카톨릭 교회가 선교를 계승하였습니다.
기독교 최초의 선교사 윌리엄 케리는 인도에서 세람폴대학을 설립하였고 방글라데시에서 뱅갈어 성경을 번역하였습니다. 현재 침례교 선교부 소속의 방글라데시 침례교 연합교회가 방글라데시에서 가장 큰 교회로 알려져 있습니다. 케리는 다나즈부르에서 인디고 식물을 재배하는 포르투갈 상인으로부터 방글라데시에 관한 정보를 듣고 1794년 선교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최초의 교회는 포르투갈 상인들과 영어권 사람들로서 원주민 선교에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1799년, 포르투갈관리와 동인도회사의 선교사 거부로 세람폴로 돌아간 케리는 제소레, 치타공, 다카, 발리살 등으로 선교를 확대하였습니다. 방글라데시 지도자 소디는 초기 침례교 선교사들의 어려움에 대하여 유럽선교사들의 선교와 돈의 결합이 원인이라고 하였습니다. 즉, 원주민들이 선교사들을 통하여 유럽회사에 취업을 하고 신앙을 개종하지만 유럽회사가 떠나면 신앙까지 중단하는 사례가 반복되었습니다. 또한 식민지 선교로 인하여 민족적 거부감이 있었습니다. 침례교 선교부는 180년 동안 방글라데시에서 선교와 교회 개척을 지속적으로 하여 성과를 이루었으며 현재도 침례교회가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19세기에 들어서 영국선교회와 미국과 유럽 선교회가 방글라데시 선교에 참여하였습니다. 방글라데시 선교 또한 말레이시아와 인도처럼 힌두교의 하층민과 소수부족민들의 집단개종이 특징이었습니다. 기독교는 사회복지와 교육, 문화, 의료선교를 통하여 소외계층 집단들을 수용하였습니다. 방글라데시의 문맹률은 75%에 달하고 기독교 신자들은 80%가 글을 몰랐습니다. 1971년, 방글라데시가 파키스탄으로부터 독립하고 교회도 일시적으로 성장하는 듯 하였지만 1980년대 이슬람정책의 강화로 기독교 선교사의 비자를 제한하고 금요일과 토요일을 휴무로 정하고 일요일은 평일로 전환하는 압력을 시작하였습니다. 모든 선교사들을 보사부에 등록하게 하여 통제하고 1988년, 방글라데시는 이슬람을 국교로 정하였습니다. 1987년까지 방글라데시 신학교에는 신학자가 없었고, 목회학 박사도 1명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방글라데시 교회는 인종교회로 분리합니다.
피터맥니(Peter McNeese)는 방글라데시 교회를 다양한 인종을 가진 영어권 단일언어라는 공통점을 가진 “다인종 영어권 교회”, 다양한 인종을 가진 뱅갈어권 단일언어와 계층간 소외를 가진 “다인종 뱅갈어 교회”, 여러 부족이 하나의 언어권으로 모인 “다인종 부족교회”, 뱅갈인 중심의 나마수드라 계급으로 하층민 집단개종을 통해 조직된 “단일인종 뱅갈리교회”, 한 개의 부족에 한 개의 교회가 설립되는 가로침례교단과 같은 “단일부족 중심의 교회”로 분류합니다. 로마카톨릭 교회는 포르투갈인과 초기 개종자들의 후예들로서 힌두교 하층민 신자들과 부족인, 영국화된 신자들, 이슬람에서 개종한 신자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5) 방글라데시 선교전략
동남아시아 선교국의 특징은 하층민의 집단개종에 있습니다. 방글라데시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이슬람교에서 나마수드라인은 천민계층으로 전인구의 40%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가로족은 부족의 70%가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방글라데시 선교전략의 특징은 사회봉사와 개발과 교육선교입니다. 방글라데시 개발협회를 설립하여 사회사업, 교육사업, 의료사업, 농촌개발사업 등 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사업을 지원하고 도움을 주면서 선교가 용이하게 되는 점입니다. 방글라데시에서 좌절과 절망에 빠진 청년에 대한 희망사업은 아무것도 해 준 것이 없는 이슬람교로부터 등을 돌리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방글라데시 선교전략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핵심선교는 한국내에 있는 방글라데시 근로자 선교에 있습니다. 현재 국내 취업중인 방글라데시 청년은 7천명이며 그 가운데 2천명은 연수생입니다. 불법체류중인 5천명에 대하여 교회가 구제사업과 희망사업을 전개하여 기독교화 하는 작업은 방글라데시 국내에서 보다 훨씬 더 효과적입니다. 방글라데시 선교에 있어서 중요한 포인트는 난민선교입니다. 방글라데시 현지출입국 사무소에는 자국으로 송환되지 못한 파키스탄, 미얀마 등 각국 난민들이 비참한 상태로 놓여 있습니다. 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선교작업은 이들에게 마지막 희망이 될 정도로 중요한 선교역할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신학교 지원과 지도자 양성입니다. 선교사들은 신학교를 독자적으로 운영하고 졸업생들을 교회개척으로 연결합니다. 이보다 현지 교회와 연합하여 신학교 설립과 교수진과 신학도서의 후원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이러한 다양한 경로를 통한 방글라데시 선교의 실현으로 0.4%에 지나지 않는 복음화가 1%에 이르고 10%까지 성장하는 견인차 역할을 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