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에서 가장 오래 되고 가장 긴 그리고 아름다운 돌다리 살곶이다리이다.
1967년 12월 15일에 사적 제 160호로 지정되었다.옛날 수표교,창덕궁 금천교와 더불어 서울에서 손꼽히는 3개 돌다리 중 하나 이다.
살곶이는 조선시대에 강원도와 경상도 지방에서 도성인 한양으로 들어오는 아주 중요한 관문이다.
이곳은 동으로는 강원도 강릉(江陵)으로 가는 길이 있고, 동남쪽으로는 송파(松坡)에서 광주(廣州)·이천(利川)을 거쳐 충주(忠州)와 죽령을 넘어 영남으로 이어지고, 남쪽으로는 성수동 한강변에 이르는 교통상 중요 선상에 놓여있다. 또한 이곳은 넓고 풀과 버들이
무성하여 조선 초부터 나라의 말을 먹이는 마장(馬場) 또는 군대의 열무장(閱武場)으로 사용되었던 곳이기도 했다.
살곶이다리 현장에는 이 다리의 역사와 개요를 설몀하는 설명문이 있다.그 내용은 아주 간략하다.
세종 때 왕의 행차가 빈번하여 다리를 놓는 것이 시급함을 느끼게 되었다.
"상왕이 영의정 유정현과 박자청에게 명하여 살곶이 내[箭串川]에 다리 놓는 일을
몸소 감독하게 하였다."-조선왕조실록 세종 2년(1420) 5월 6일 기사에서-
세종 2년(1420) 5월 영의정 유정현과 공조판서 박자청에게 공사를 명하여 공사가 시작된다.
상왕인 태종의 명으로 다리의 공사가 시작된 것이다. 처음에는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세종이 대소신료를 거느리고 낙천정을 찾아 태종을 배알했다.태종은 이렇게 명한다.
“살곶이 돌다리는 대신들의 의논을 따라 역사를 시작한 지 이미 여러 날이 되었다.
쉽게 되지 않으리라 생각은 하였으나 이제 곧 장마철이 다가오니 공사를 중단하도록 하라.”
영의정 유정현이 이렇게 아뢰었다.
“다리의 기초 공사가 반쯤 되었으니 이미 된 곳은 근일 중에 마치고
시작하지 아니한 곳은 가을 되기를 기다려 역사를 마치게 할까 하나이다.”
태종은 다시 엄명을 내린다.
“일하는 사람들이 비록 농사꾼은 아니라 하더라도 삼복고열(三伏苦熱)에 사람에게 일을 시키는 것은 마땅치 않다.
예전에는 백성을 부리는데도 때를 가리었다. 하물며 장맛비 오기 전에 반드시 역사를 마칠 수도 없는 것이니
마땅히 역사를 정지하고 가을되기를 기다리게 하라.”
당시의 토목 기술 자재 공급이 쉬운 일이 아닌데다가 삼복 더위에 장마가 오기 전에
완성해야 한다는 계절 탓도 있어서 공사를 추진하는데 여러가지 어려움이 따랐다.
태종의 특명으로 공사는 착수한지 20여일 만에 기초 부분만 완성된 채 중단된다.
세종실록 8권, 세종 2년 5월 25일 임진 2번째기사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상왕이 살곶이의 다리 놓는 군사들을 놓아 보내게 하여, 다리는 마침내 이루지 못하였다."
이 길을 자주 이용하는 백성들 때문에 다시 만들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성종 6년(1475)에 중단된 다리공사를 시작하여 성종 14년(1483)에 완성되었다.
"성종이 살곶이다리의 공사를 진행할 당시 자금과 인력의 부족으로 난관에 부딪혔을 때
어느 이름 모를 승려가 인원을 동원하여 많은 돌을 채벌해서 다리는 만들었는데, 그 길이가 300여 보를 넘고
안전하기가 집 안에 있는 것과 같아서 행인이 지날 때 마치 평지를 밟는 것과 같아서 왕이 '제반교(濟盤橋)'라고 이름 지었다."
-성현(成俔)의 『용재총화』 제9권에서
성종 14년에 이르러 스님들의 노력으로 1만개의 돌을 날라 300여보에 달하는 긴 다리를 놓는데 성공한 것이다.
‘경성부사(京城府史)’에는 살곶이다리를 실측한 결과 다리의 폭이 20척(6m), 길이가 258척(78m)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경성부사는 또 교각을 횡렬 4열 종렬 22열을 배치하고 3장의 장대를 건너지른 뒤에 다시 동틀돌을 놓아 청판돌을 받게
되어 있으며 좌우의 교안을 장대석으로 쌓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대원군이 집정했던 고종 초년에 이 다리 폭은 겨우 3척 남짓으로 줄어 버렸다.
대원군이 경복궁을 짓고 또 서양 함대가 한강을 거슬러 오지 못하게 강바닥에다가 석성을 쌓는 작업을 병행하면서
전국의 석재를 징발했다.그때 이 다리의 10,000석이나 되는 석재가 징발되었기에 초라한 다리가 되고 말았다고 전한다.
살곶이다리는 장석판교(長石板橋) 중 가장 큰 규모의 다리이다.
대청마루를 깔듯 세 줄의 판석을 빈틈없이 깔았다.실측한 결과 폭이 6m, 길이는 76m의 다리였다.
좌우의 다리 끝에 돌난간은 없다. 다리의 형태가 종횡(縱橫)으로 곡면을 이루어 조화롭고 면밀하게 구축되어 있다.
그 위에 마루처럼 판석을 세 줄로 덮어 깔았다. 교각 위에 하천방향으로 멍에돌을 3개 연이어 걸치고 멍에돌 위에
귀틀돌을 가로 걸쳐 놓은 구조로 되어있다.
오래된 판석은 끌로 다듬어 부드러운 곡선의 미를 뽐내고 있다.새로 끼어 넣은 판석은 기계로 자른 탓에 날카롭다.
판석과 판석 사이에는 못을 막지도 않았다.원래 시멘트도 바르지 않았다.그저 돌과 돌을 자연스럽게 맞춘 '그랭이'법이다.
'그랭이법'은 곳곳에서 볼 수 있다.돌기둥 위를 3장의 장대석을 건너지를 때도 '그랭이법'을 사용했다.
그 위에 다시 귀틀돌을 놓아 청판돌을 받게 한 구조 역시 '그랭이법'이다.이용한다. '그랭이법'은 고구려 장수왕 때 등장한다.
우리나라 전통의 토목기술 '그랭이법'은 멕시코 시티에 한옥을 지을 때 사용해 그 명성을 세계에 알렸다.
다른 구조물은 멕시코의 강력한 지진 앞에 모두 무너졌다.그러나 '그랭이법'으로 지은 한옥은 끄떡없이 그 자태를 지켰기에.
다리 형태가 가로 세로로 곡면을 이루어 잘 조화되어 있고 면밀하게 구축되어 있다.
각부의 석재가 장대하고 수수하여 호쾌한 느낌을 준다. 다리 아래에서 보면 돌기둥과 종량, 횡량은
마치 씨름꾼의 팔 다리가 연상될 정도로 힘이 넘치는 느낌을 준다.
이 다리는 동대문과 광희문(일명 수구문)을 나와 이 다리를 건너면 광나루로 빠져 강원도로 송파로 건너
충주로 나가는 통로였다. 여기서 남쪽으로 가서 배를 타면 또한 태종과 순조의 능인 헌릉 인릉으로 가는 길이다.
삼성동에 성종과 중종이 모셔진 선릉·정릉에 이르게 되어 국왕이 수시로 참배하는 길이다.
또 봉은사로도 통하게 되어있다. 주변의 기름진 벌판인 뚝섬은 조선 초기부터 나라의 말을 기르는 목장과 군대의
열무장(閱武場)이 있어 임금이 때때로 군사훈련을 참관하기 위해 이 다리를 건넜다고 한다.
대한제국의 순종황제의 국장 행렬이 금곡 유릉으로 향할 때에 이 다리를 건너기도 하였다.
1913년 일본인들은 다리 윗면을 콘크리트로 보수 하였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때 다리 일부가 물에 떠내려간 채 방치되었다.
그 후 1938년 5월에 이 다리 옆에 성동교가 가설되자 이 다리는 방치된 채 최근까지 내려오게 되었다.
1972년에 서울시가 무너진 다리를 원래의 모습대로 복원하는 과정에서 하천의 폭이 원래보다 넓어져 있었기 때문에
다리 동쪽에 27m 정도의 콘크리트 교량을 잇대어 증설함으로써 원래의 모양과는 다소 차이가 나게 되었다.
조선 전기에 만들어진 다리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다리다
살곶이 다리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돌 기둥이다.돌기둥은 흐르는 강물의 저항을 줄이기 위해 마름모꼴로 다듬었다.
64개의 돌기둥이 둔중하고 정감이 간다. 교각은 4개씩 열을 이루고 있다.다리의 안정을 위해 교각 중에서 가운데 두 줄의 교각을
바깥보다 15∼40cm 가량 낮게 하여 다리의 중량을 안쪽으로 모이게 하였다.그리고 부드러운 곡선을 연출했다.
물살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 위해 돌기둥에 무수한 흠집을 새겨 놓았다. 조상들의 친환경 지혜가 놀랍고 또 과학정신이
돋보인다.
교각의 간격은 3~4미터 정도이다. 돌기둥 위를 장대석을 건너지른 다음 다시 그 위에 귀틀돌을 놓았다.
그렇게 청판돌을 받게 한 구조다.각부의 석재가 장대하고 수수하여 호쾌한 느낌을 준다,다리 아래서 보면 돌기둥과
장대석 귀틀돌들이 마치 씨름꾼의 몸과 같이 힘이 넘치는 느낌을 준다.'
기둥돌 아래에는 받침돌이 네모난 주춧돌을 지탱하고 있다.주춧돌 사이에는 포석을 깔아 기초를 단단히 하였다.
살곶이다리는 왕십리와 뚝섬 사이 중랑천을 가로 지르는 돌다리이다.
상왕 태종이 낙천정으로 자신을 찾아오는 세종을 위해 만들라고 해서 지은 살곶이다리이다.
아들 세종을 지극히 사랑한 태종의 부성(父性)을 느끼게 하고 아들 세종의 효심도 읽히게 하는 그 다리다.
조선 최고의 건축가 박자청이 상왕 태종의 어명을 받아 정성을 다해 설계 시공한 명품 돌다리다.
태종이 극진히 사랑한 박자청이다.
박자청은 태종이라면 무슨 일이라도 기꺼이 앞장 서서 해낸 인물이다.
석조예술의 꽃이라고 격찬하는 창덕궁 금천교도 그의 작품이다.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 석물도 박자청의 솜씨다.
그토록 자신을 아껴주던 태종이 승하하자 헌릉을 능역공사에 헌신한다.
헌릉의 석물은 그의 마지막 명품이다.
세월은 참으로 많이 흘렀다.
살곶이다리는 그토록 많은 세월 속에 그 자리를 지켰다.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의 장례행렬을 몸으로 지탱하면서 그 비극을 지켜본 돌다리이다.
살곶이다리는 조선 초기 석조예술의 장인 박자청의 손길을 담고 있는 조선에서 가장 오래되고(最古)
가장 긴(最長)의 참으로 아름다운 돌다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