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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봄을! 제대로 된 겨울도 보기 전에 봄을 향한 마음은 자신 생애의 봄을 맞으려 지금은 육신을 고단하게 부리며 살아가는 머슴의 삶에 마음이 기울기 시작하면 서다. 봄내라는 단어는 늘 유혹의 단어였다. 낭만을 위한 목적으로 자신의 청춘을 옮겨가기 위하여 몸을 실었던 경춘선, 이 또한 실과 바늘의 관계가 만들어 낸 아름다운 겉옷처럼 마음에 봄 향기를 가득 채워 청춘에 기쁨을 넘치게 해 주던 곳이 바로 강촌이었다면 삶의 원형을 들여 볼 수 있도록 한 곳은 바로 금병산 자락 시루 마을이었다. 혹독한 엄동은 북쪽의 산을 타고 밀어닥치지만 봄은 훈풍을 타고 꽃 향기를 흩뿌리며 개천을 타고 마을로 다시 귀향한다. 연어가 새 생명을 잉태하기 위하여 물을 거슬러 오르듯 그렇게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가장 힘 있는 추억은 자신의 젊은 날 즉 청춘의 시절이다.
자연을 걷는 일, 그것은 창조성이 깊이 깃든 믿음의 너 럭에 머물며 속죄하고 보속 받는 일과 비루한 운명을 영광의 운명으로 바꿔 놓은 순교자 자취를 따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쇠약이 스미기 시작하면 그마저 어려워지는 것이 인간의 한계다. 삶의 운명에는 습작이 있을 수 없다. 단 한 번의 공연으로 막을 내려야 한다. 누구나 그 멋진 공연을 준비하기 위하여 들여다는 보는 것은 바로 육필로 써 내려간 원고의 뭉치를 잘 정리한 한 권의 소설책을 읽음므로서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우린 익히 알고 살아 왔다. 어쩌면 우리의 삶 자체가 한 개인의 소설로서 타인에게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 걸음 여행은 멋진 단어다!. 걸으며 여행을 즐긴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행복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이 시간에 삶을 관조하는 마음 행로의 시간을 더 병합해 보려는 의도가 바로 문학산책이다. 그러면서 첫 마음의 행로를 부활시켜 보려는 장소를 봄내 실레 마을로 정한 것이다. 우리들에게 무한한 청춘의 에너지를 주었던 경춘이란 단어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경(京)은 사람이 모이는 곳이지만 춘(春)은 봄빛 이슬을 가득히 머금고 봄 숲에 놓여 있는 봄샘과 같은 곳인데 특히 실레 마을은 봄빛이 겹치는 곳이다. 그것은 김유정의 소설 봄봄에서 알 수 있다.
서울과 춘천을 잇는 철마의 길 이름이 바로 경춘선이었다. 철마의 길 위에 놓여 있는 곳곳은 바로 청춘을 전시하던 곳이었다. 그런 곳엔 자신의 청춘이 숨겨져 있기 마련이다. 자신의 봄, 피안의 세계에 숨겨 놓은 것을 꺼내 보자는 의도였고, 노익의 심신에 봄을 불어넣어 보자는 기획이었다. 이러한 생각의 출발점으로 봄을 찾는 안내장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정찬주 님의 평론과 옛적 읽고 보았던작가의 책과 영화, 그리고 문학촌 설립 당시 습득한 여러 가지 자료를 기억하며 만들었다. 그 자료는 바로 아래와 같다. 그리고 작가의이름빌려 명명한 역에서 내리자 마자 문학소녀들에게 나눔해 주었다. 그리고 개인적인 사정으로 참가 못하신 소녀들의 마음에 담어 드리려고 게재하게 된 것이다.
NO. 1
김유정(金裕貞, 1908~1937)은 스물아홉 짧은 생애 동안 소설 30편, 수필 12편, 편지 · 일기 6편, 번역 소설 2편을 남긴 작가다. 1996년까지 나온 김유정 문학에 대한 연구 논문이 무려 360편에 이르는데, 이렇게 쏟아지는 연구 논문은 그의 문학사적 위치의 중요성을 말해주는 단적인 보기다. 1935년 『조선일보』와 『중외일보』의 신춘 문예 공모에 각각 「소낙비」와 「노다지」가 당선됨으로써 문학 지망생들의 부러움을 사며 문단에 나온 김유정은 등단하자마자 「금 따는 콩밭」 · 「떡」 · 「만무방」 · 「봄봄」 같은 걸작 단편을 잇달아 내놓아 다시 한 번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NO.2
1930년대에 빼어난 단편 소설을 잇달아 선보인 김유정
김유정은 1908년 1월 11일 일제 때의 행정 지명으로 강원도 춘천부 남내이작면 실레 마을이라는 곳에서 아버지 김춘식과 어머니 심씨 사이의 2남 6녀 중 일곱째이자 차남으로 태어난다. 이 무렵 나라 곳곳에서는 정미 7조약에 의한 일제의 군대 해산령에 맞서 의병 부대가 들고 일어난다. 김유정이 살던 실레 마을도 국적 토벌(國賊討伐) · 국모 보수(國母報讐) · 배양 척외(排洋斥倭)의 기치를 내걸고 서울로 진격하는 춘천 의병진의 후방 기지가 있던 곳이다. 어릴 적에 본 의병들의 모습은 뒷날 김유정의 작품에 등장하는 소작농 · 유랑민 · 노동자 · 실업자 · 거지에 이르는 다양하고 생생한 하층 계급 인물을 창조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1913년 김유정 일가는 현금과 토지 일부를 정리해 서울 종로구 운니동의 1백여 칸짜리 살림집으로 이사를 한다. 그런데 이사할 무렵부터 시름시름 앓던 어머니가 갖은 약을 다 써도 일어나지 못하고 이듬해 숨을 거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3년 뒤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 아직 부모의 보살핌이 필요한 나이에 김유정은 고아가 된다. 실질적인 가장이 된 그의 형 유근은 운니동의 집을 처분하고 관철동으로 이사를 한다. 어린 유정은 저녁마다 근처의 우미관에서 들려오는 나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죽은 어머니를 그리워한다.
형 유근은 선대에 악착같이 모은 재산을 주색 잡기로 탕진하는 데 바빠 어린 동생의 허전한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다. 유정은 제 책상 위에 놓인 어머니의 사진을 뚫어지게 들여다보곤 하며 소년기를 보낸다. 휘문고보 시절, 그는 친구인 안회남에게 어머니의 사진을 보여주고는 “내 어머님은 미인이다!” 하고 자랑을 하기도 한다. 어머니에 대한 그의 남다른 그리움은 연희전문 시절까지 이어져 연상의 여인 박녹주에 대한 짝사랑으로 나타난다.
1929년 연희전문학교에 갓 들어간 김유정은 명월관 기생이자 남도창을 하는 박녹주에게 막무가내로 연애 편지를 보낸다. 비누와 수건을 손에 들고 목욕탕에서 나오는 박녹주의 모습을 보고 첫눈에 반한 그는 검은 휘장으로 들창을 가린 어두운 방에서 날마다 한 통씩 편지를 써서 부친다. 그러나 박녹주는 연하의 김유정을 얕잡아본 것인지 그가 보낸 편지를 읽지도 않고 찢어버리곤 한다. 편지 공세가 그치지 않자 하루는 박녹주가 찬모를 시켜 김유정을 부른다.
“당신이 김유정이오?”
“그렇습니다.”
“어쩌려고 나에게 그런 편지를 했소.”
“어쩌려고가 무슨 말이오. 편지를 받아보지 않았소?”
훤칠한 키에 잘생긴 김유정은 스스럼없이 응수한다. 그는 사랑한 뒤에 어쩔 생각이냐는 박녹주의 물음에 “결혼하는 겁니다.” 하고 대꾸한다. 박녹주가 “남편이 있는 몸”이라고 타일러도 소용이 없다. 쫓겨나다시피 박녹주의 집에서 물러나온 김유정은 좀처럼 포기를 하지 않는다. 그는 노골적인 협박과 호소가 범벅이 된 편지를 다시 쓴다.
“당신이 무슨 상감이나 된 듯이 그렇게 고고한 척하는 거요. 보료 위에 버티고 앉아서 나를 마치 어린애 취급한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분하오. 그러나 나는 끝까지 당신을 사랑할 것이오. 당신이 이 사랑을 버린다면 내 손에 죽을 줄 아시오.” “엊저녁에는 네가 천향원으로 간 것을 보고 문앞에서 기다렸으나 나오지 않았다. 만일 그 때 너를 만났다면 나는 너를 죽였을 것이다. 그러나 좋아하지 마라. 단 며칠 목숨이 연장될 따름이니까······.” 혈서로 된 이런 편지를 받고 박녹주는 온 몸에 소름이 끼친다. 그래서 외출도 되도록 삼가고 더러 밖에 나갈 때는 휘장을 내린 인력거를 타고 남바위를 얼굴까지 푹 내려써서 알아보지 못하게 한다. 이윽고 연희전문 학생과 기생 박녹주 사이의 염문은 장안에 파다하게 퍼진다. 그러나 혈서도, 애원도, 협박도 효과가 없어 김유정의 짝사랑은 무참히 밟히고 만다.
No3
이처럼 짝사랑에 따른 좌절을 겪은 데 이어, 형 유근이 술과 여자에 빠져 가산을 탕진한 여파로 김유정은 1930년 학교를 중퇴한다. 혜화동 언저리의 허름한 방에서 지내다가 늑막염에 걸려 고생하던 그는 1931년 고향인 실레 마을로 내려간다. 고향에서 그는 요양에만 매달리지 않고 틈틈이 장만한 나무로 야학당을 지어 글 모르는 이들을 모아 가르친다. 1932년에는 충청도 지방의 금광을 비롯해 곳곳을 떠도는데, 그는 이렇게 떠돌이 생활을 하며 많은 것을 체험하게 된다. 특히 짚으로 꼬아 만든 주머니 속에 술병을 넣어 들고 다니며 농부나 광부에게 술을 파는 ‘들병이’들을 만난 일은 나중에 그의 창작 생활에 귀중한 자산이 된다.
1932년 김유정은 다시 실레 마을로 가서 본격적인 계몽 운동에 나선다. 이 무렵은 1920년대에 산발적으로 이루어지던 브나로드, 곧 농촌 계몽 운동이 조직화되어 펼쳐지던 시기다. 그도 고향에서 야학당을 열어 아이들을 가르칠 때 브나로드 운동 팸플릿을 교재로 쓴다. 그는 또 학생들과 마을 청년들을 모아 농우회를 조직하고, 이를 발전시켜 정식으로 간이 학교 인가를 받아 금병의숙(錦屛義塾)을 설립한다. 그러나 형의 음주벽과 가족에 대한 횡포가 갈수록 심해지자 1933년부터는 서울로 와서 조카, 형수와 함께 창신동 · 신당동 · 효제동 등을 전전하며 셋방살이를 한다. 김유정은 이 무렵부터 글쓰기에 매달리는데, 1933년 1월 13일 「산골 나그네」를 탈고한 데 이어 8월 6일에는 「총각과 맹꽁이」를 탈고한다. 그는 당시 ‘개벽사’에 다니던 안회남에게 「산골 나그네」를 보내고, 이 작품은 『제일선』에 발표된다.
그는 밤마다 식은땀으로 흥건히 젖은 채 깨어나 소설을 쓴다. 시립 위생병원에서 진단을 받아보니 병명은 폐결핵······. 결핵균의 침식에 의해 이미 쇠약해진 몸으로 그는 어두운 운명의 그림자를 떨쳐버리려고 필사적으로 투쟁한다. 1933년 발족된 ‘구인회’에 들어가면서 그의 창작 활동은 더욱 불붙기 시작한다. 그는 구인회의 회지 『시와 소설』에 「두꺼비」, 『개벽』 3월호에 「금 따는 콩밭」, 『중앙일보』에 「떡」, 『조선일보』에 「만무방」, 『조광』 12월호에 「봄봄」 등을 잇달아 발표한다. 그러다가 1935년 『조선일보』 신춘 문예에 「소낙비」, 『중외일보』 신춘 문예에 「노다지」가 동시에 당선되는 것이다.
어찌 보면 김유정에게 소설은 일종의 도피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미 형 유근이 그 많던 선대의 가산을 거의 다 날린 뒤여서 그에게 돌아올 몫은 남아 있지 않았다. 어른이 되어서도 독립할 수 없는 비참한 처지, 암울한 시대 상황, 정신적 고립감,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쓰라린 기억, 그리고 폐결핵 선고······. 소설 쓰기는 이 모든 시름과 고뇌, 우울과 절망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한 몸짓이었다. 구인회 시절에 김유정은 삶과 죽음에 걸쳐 각별한 관계를 맺게 되는 이상과 만난다. 두 사람은 집안 형편이 비슷하고 문학관도 웬만큼 통하는 사이였으나, 특히 같이 폐결핵을 앓으면서 더욱 가까이 묶인다.
“각혈이 여전하십니까?”
No4
“네, 그저 그날이 그날 같습니다.”
“치질이 여전하십니까?” “네, 그저 그날이 그날 같습니다.”
“유정! 유정만 싫지 않다면 나는 오늘 밤으로 치러버릴 작정입니다. 일개 요물에 부상당해 죽는 것이 아니라 27세를 일기로 불우한 천재가 되기 위해 죽는 것입니다!” 1936년 가을, 이렇게 은밀하게 찬란한 동반 자살을 모의하던 두 사람은 1년도 채 지나기 전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세상을 버리게 된다.
1936년 김유정은 만성적인 늑막염과 치질, 폐결핵으로 말미암아 정릉 언저리의 암자에서 휴양을 한다. 휴양중에도 글쓰기는 이어져 같은 해 『사해공론』에 「산골 나그네」, 『여성』에 「옥토끼」 · 「슬픈 이야기」, 『조광』에 「동백꽃」 · 「야앵(夜櫻)」을 발표한다. 그는 이듬해인 1937년 초까지 글쓰기를 멈추지 않아 『조광』에 「따라지」 · 「정분」, 『여성』에 「땡볕」 · 「총각과 맹꽁이」 등을 발표한다. 그러나 가난 때문에 약을 제대로 쓰지 못해 김유정의 건강은 날로 악화된다. 암자에서 내려온 그는 병든 몸으로 다시 효제동 셋방과 매형의 집 등을 전전한다. 나중에는 고통이 너무 심한 나머지 아편까지 쓰지만 1937년 3월 29일, 김유정은 다섯째누이의 집이 있던 경기도 광주에서 스물아홉 나이로 삶을 마감한다. 20여 일 뒤 멀리 도쿄에 있던 이상도 끝내 김유정의 뒤를 따른다.
No5
「소낙비」와 「만무방」 그리고 「봄봄」
흔히 한국 단편 문학의 결정체로 일컬어지는 김유정의 작품들은 카프의 해체 등으로 말미암은 문단 전반의 침체 분위기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다. 즉, 김유정의 단편들은 풍자와 아이러니 수법을 사용해 하고 싶은 말을 하면서도 검열에 걸리지 않을 수 있는 돌파구를 모색함과 아울러 이전 좌익계 소설들에서는 맛볼 수 없던 재미도 만만치 않아 우리 소설계에 새로운 방향과 가능성을 제시하게 되는 것이다.
1935년 『조선일보』 신춘 문예에 당선된 「소낙비」는 1930년대 식민지 농촌의 극심한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주 기본적인 도덕이나 윤리마저 팽개치는 농민들의 체념적 생존 양식을 희화화해 보여준 작품이다.
가난한 농부 춘호는 도시로 나가고 싶은 마음에 노름판에서 돈을 따서 자금을 마련할 궁리를 하지만 노름 밑천 2원이 없어 실행에 옮기지 못한다. 춘호는 열아홉 살 된 아내를 때리며 화풀이를 하고, 이에 견디다 못한 춘호의 아내는 돈을 구하기 위해 집을 뛰쳐나간다. 마침 소나기가 내리고 춘호의 아내는 쇠돌 엄마네 집을 지나치다가 그 집으로 들어가는 이 주사를 보게 된다. 이 주사는 마을의 소문난 부자로 쇠돌 엄마는 그에게 몸을 준 대가로 비교적 넉넉하게 산다. 잠시 밖에서 서성이던 춘호의 아내는 용기를 내어 쇠돌 엄마네 집으로 들어간다. 춘호의 아내는 혼자 있던 이 주사와 정을 통한 뒤 이튿날 2원을 받기로 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다음날 춘호는 아내가 이 주사에게 가는 것을 알면서도, 곱게 차리고 집을 나서는 아내를 들뜬 마음으로 지켜본다.
이처럼 가난과 연관된 비정상적인 남녀 관계는 김유정 소설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소낙비」를 비롯한 그의 많은 소설 속에는 남편의 병이나 노름 밑천, 빚, 생계 때문에 단돈 몇 푼에 몸을 팔거나 술집 작부 또는 들병이로 나서는 아내, 그리고 아내의 매춘을 뻔히 알면서도 분노나 죄책감 없이 묵인하는 남편이 수두룩하게 나온다. 작가는 소설 속에서 작중 인물들의 옳고 그름을 판가름하거나 단죄하지 않고 다만 이들의 행태를 유머, 아이러니, 풍자, 해학적 수법을 사용해 그려나갈 뿐이다. 그러나 웃음을 불러일으키는 그 이면에는 늘 짙은 우수가 깔려 있는 것 또한 김유정 소설의 특징이다.
김유정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만무방」 역시 농민들이 가난 때문에 겪는 사건을 담아낸 단편 소설이다.
부지런한 농사꾼인 응오는 가을걷이를 해봐야 지주와 빚쟁이에게 모조리 빼앗길 것이 뻔하다는 생각에 벼를 베지 않는다. 한편, 그의 형 응칠은 밤마다 조금씩 벼를 도둑맞자 자신이 도둑으로 몰릴 수 있다는 생각에 밤새 논에 나가 벼를 지킨다. 마침내 응칠은 벼를 훔쳐간 장본인이 바로 그 벼의 주인이라고 할 수 있는 동생 응오임을 알게 된다. 기가 막혀 서 있던 응칠은 빈한한 삶을 개탄하며 아우에게 아예 도둑질로 나서자고 제안하지만 응오는 이를 거절한다. 응칠은 동생 응오를 때려누인 뒤 업고 간다.
「만무방」은 아무리 땀 흘려 일해도 결국 ‘제 살 깎아먹기’가 되기 일쑤이던 1930년대 우리 농촌의 단면을 예리하게 포착한 작품이다. “염치없고 막 되어먹은 잡놈의 무리”라는 뜻을 가진 ‘만무방’ 같은 뻔뻔함과 천연덕스러움은 김유정의 다른 소설들에서도 도둑질, 도박, 매춘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비윤리적인 삶의 형태로 줄곧 나타난다.
김유정이 내놓은 또 하나의 걸작 단편 「봄봄」은 지주의 대리격인 마름이 가난과 데릴사위 풍속을 이용해 순진한 농촌 청년을 기만하는 과정을 역시 풍자적 수법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화자인 주인공 ‘나’는 점순네 데릴사위로 들어가 그 집에서 3년 반 동안이나 뼈빠지게 일하지만, 마름인 점순 아버지는 심술궂게도 성혼시킬 생각은 하지 않고 계속 일만 부려먹는다. 참다 못한 ‘나’는 그 동안 일해준 대가를 요구하며 점순네에서 나가려고 한다. 그러나 장인 자리인 점순 아버지는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나’는 곧 점순이 부추기는 바람에 대판 싸움을 벌이는데, 이를 지켜보던 점순은 오히려 “이 망할 게 아버지 죽이네!” 하며 제 아비의 편을 든다. 한참 곤욕을 치른 뒤에야 가을에 혼례를 시켜준다는 약조를 하면서도 점순 아버지는 얼른 콩밭에나 가보라며 또 ‘나’에게 일을 시킨다.
No7.
김유정의 문학은 자신이 속해 있던, 모더니즘의 한 기류를 보여주던 구인회의 도시적 특성과 멀찍이 떨어져 있다. 그는 1936년에 “새로운 문학은 무엇을 목표로 할 것인가?”라고 묻는 한 잡지의 설문에 “이 시대의 풍상을 족히 그리되 혈맥이 통하야 제물로는 능히 기동할 수 있는 그런 성격을 천착하는 곳에 우리의 숙제가 놓여 있는 듯하오니 우선 무엇보다도 우리의 정조와 교배할지니”라고 답한 바 있다. 그가 “이 시대의 풍상”으로 주목한 것은 가난의 문제와 유랑의 문제다. 그는 일제의 수탈과 억압 때문에 가난의 사슬에 묶여 신음하는 민중과, 어느 한 곳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이리저리 떠도는 인간 유형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낸다. 작가 김유정은 특유의 토속적이고 질퍽한 어휘, 유머와 풍자적 수법 등으로 지극히 평범한 일상사를 소설 속에서 새로운 형태로 살아나게 해 우리 문학에 ‘혈맥’이 통하게 한다. 그가 거둔 이와 같은 문학적 성과는 구인회를 또다른 각도에서 빛나게 한다.
김유정의 진면목은 그가 살아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죽은 뒤에도 한동안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다. 재주깨나 있는 풍자 또는 해학 작가 정도로 가볍게 취급되곤 하던 김유정은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야 작품의 재조명과 함께 우리 소설 문학사에서 확고한 자리를 차지한다.
일곱 페이지에 달하는 간추린 설명서를 인쇄를 끝낸 후 등 짐을 걸멌다. 그리고 한 번의 환승의 경험을 통해 약속 장소로 가기 위한 마지막 계단에 올라 섰다. 누군가 멀리서 손 짓을 한다. 실체는 뿌였다. 시력이 문제를 일으킨 것이다. 다가 가보니 모니카 자매님! 이외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던지 말은 어디가세요? 였다. 웃으며 오늘 행사 참석이란다. 내심 걱정거리가 생겼다. 어쩌지! 준비한 것은 모두 네 개씩인데.. 휘리릭 순가 결심이 모든 것을 진정시켜 주었다. 나의 것을 포기하면 된다. 잠시 후 약속된 인원이 모두 모였다. 상층으로 자리를 옮겨 열차를 기다린 후 곧이어 도착한 올랐다. 자리가 부족하였다. 그러나 경험상 걱정할 일이 아니다. 위성도시의 확장으로 자리 순환이 빠르다. 사릉역에 도착하기 전 다들 자신의 자리를 찾아 앉아 갈 수 있었다. 그리고 가는내내 천진한 모습의 아이가 즐거움을 주었다. 그리고 1시간 10분 후 우리의 목적지인 김유정 역에 내릴 수 있었다.
실레 마을 김유정 문학촌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
1. 김유정 역에서 내리면서 실레 마을을 바라보고 좌측으로 폐선철로 길과 철마, 간이역으로 가는 길.
2, 간이역 큰 도로를 건너 언덕 길을 올라가면 김유정 생가 초가 집이 나온다. 생가 안 마당에는 봄봄, 동백꽃 소설의 주인공들을 묘사한 모형물 서 있고 작가의 동상도 서있다.
3. 생가 옆에는 커다란 기와 집 건물로 김유정 문학 기념관이 있다. 관 안에는 작가의 작품설명과 함께 함게 활동한 당시의 작가들 면모와 당시 발행된 책들이 전시되어 있다.
4. 생가 앞 공터에는 야외 공연장이 설치 되어 있고 그 앞에 김유정 이야기 집이 설치되어 있어 작가의 면면을 살필 수 있고 작품의 세계도 디지털화 되어 있어 청각 시각을 이용하여 익힐 수 있으며 작가의 책을 잠시 앉아 읽을 수 있는 독서실도 준비되어 있으며 작품의 내용을 한 눈에 확인 할 수 있는 극장이 설치되어 있어 봄봄과 동백꽃의 작품 세계로 몰입 할 수 있다.
5, 이야기 집, 옆으로 매점과 식당(만 동절기 3개월은 휴업) 있고 체험관과 공방, 사무실이 차례로 초가형태로 이어져 있으며 넓은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다. 여기가지가 문학촌 가옥과 문학시설이며
금병산 기슭과 마을 길을 응용하여 작품의 성격과 연결하여 작품의 테마길을 만들어 놓았다. 테마 길은 모두 16개의 길로서 동쪽에서 시작하여 서쪽으로 끝날 수도 있고 반대 방향으로 걸으며 작품의 세계를 반추할 수 있으나 문학촌에서 권장하는 길 탐방 순서는 다음과 같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넘어오는 방법으로써
1, 들병이 넘던 길 2. 금병산 아기장수 전설,3.산국농장 금병도원길, 4.점순이가 나를 꼬시던 동백숲길 5. 덕돌이가 장가가던 6. 복만이가 계약서 쓰고 7. 춘호처가 맨발로 8. 도련님이 이쁜이와 9. 산신각 가는 10. 응칠이가 송이 11.응오가 자기 논 12. 근식이가 자기 집 13. 금병의 의숙 느티나무 14. 장인 입에서 15. 김유정이 코다리찌게 16. 맹꽁이 우는
금병산 등산로 - 봄.봄길, 동백 꽃길, 산골나그네 길, 만부방 길, 금따는 콩밭길 로서 김유정의 소설 제목을 붙여 놓았다.
테마 산행 코스로서 어느 코스든 3시간이면 충분하다.
이 모든 것을 합하여 실레 마을 이야기라 부르는 것이다.
한국에서 유일무일한 작가의 이름으로 만들진 김유정 역, 너무 고래등이다. 좀 더 소박한 모습으로 실레마을을 대변했더라면 하는 이쉬움이 든다. 정겹기 보다는 위압적이고. 허세가 너무 심했다. 그래도 작가의 이름을 빌려 역 이름을 짓기까지 많은 진통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기에 이해하는 마음을 풍기며 함께한 자매님들을 파인더에 붙잡기 시작하였다. 아~~ 곱다! 착각은 자유다, 내가 곱게 느긴 것은 하늘이지 자매님들은 아닌데.. 이렇게 시작을 장난스럽게 한 죄를 나는 나중에 독박으로 쓰게 된다. 이 이야기는 별도의 사설로 엮을 것이다.
이 위치는 폐선된 원래의 기찻길이었다. 이 길을 따라 동쪽으로 걸어 나가면 원래의 역이 나오고 당시 다니던 철마가 그대로 서 있고 카페와 책방으로 이용되고 있다. 그리고 작은 설명목을 기찻길에 세워 놓아 오류를 잡아 준다. 유정의 단편소설 책화보에 실려 있는 동백꽃, 그 꽃들은 남쪽 바다 해안가나 도서지방에 피는 동백 기름을 만드는 동백꽃이다. 육지에서 가장 위도가 놓은 꽃에 피는 지방은 충남 서천이 유일하다 ( 동안 기후 변화로 더 이상 올라 왔는지 모르겠으나) 봄내 산골에서 동백꽃은 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이 지방에서 동백은 산촌에서 피는 최초로 봄을 일리는 생강나무 노오란 꽃을 동백이라 불렀던 것이다. 이 오류를 잡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세워 놓은 것이다. 유정역에서 내린 일행을 폐선 안으로 유도해 나갔다.
사라진 철 길~~~ 추억이다.
흰 개와 단장에 의지하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조형물, 그리고 두 개의 틀! 하나는 정직하고 그 앞에 서있는 것은 불균형이다. 그리고 오늘도 기다립니다. 어제도 그랬던 것처럼 이란 글이 적혀 있다. 기다림은 늘 양면의시작으로 부터 진행되기 마련이다. 몇시에 올것인가? 올 것인가 오지 않을 것인가? 어떤 모습으로 다가 올 것인가? 기다림 자체는 의문형이다. 오는 사람도 기다리는 사람의 마음처럼 한 마음이라면 좋으련만 그렇지 않은 것이 사람들이 살아가는 구석이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것은 기다리는 사람의 마음이다. 어쩌면 우리들의 삶 자체가 불안을 이겨내야 안정화 되어 가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실패와 성공은 참 모든 것을 극명하게 대비시켜 준다.
기울어진 문을 넘어서야 비로서 반듯한 문을 들어설 수 있다.
영원한 평행선!
철로는 자동차와 달리 만날 수 없다 그러나 교차점은 있지만 그것은 새로운 길의 시작이지 만남이 목적은 아니다. 열차와 그 선로에 서서 느끼는 무한대, 그것은 바로 돌아 오지 않는다는 무언의 약속이 우리를 즐겁게 하는 것이다. 삶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난다는 자유로움, 여행의 주인공인 에드랑제처럼 여행의 공간을 떠도는 자유로움의 전사~~~ 그 꿈이 담겨 있는 열차와 그 위를 달리는 선로는 자유의 의지다. 그래서 그 앞에 서면 행복한 것이다.
로맨틱 춘천이라는 영어단어가 낮설지 않다. (계속)~~ 잠시 쉬고....
열차문고, 시간이 허락한다면 한 권 정도의 책을 읽고 싶었다. 그러나 우리에겐 일정이 잡혀 있다. 훗날 발걸음이 허락하여 다시 오는날, 봄 빛이 가득한 날을 잡아 열차 차창밖에 앉아 봄날과 관련된 유정의 소설과 봄 내음이 가득한 시집을 펼쳐 놓고 보고 있는 자신을 상상해 보면 연출된 사진을 찍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홍익회 소속 아저씨가 이끌고 다니던 열자 안 작은 수레와 외침소리기 추억으로 떠 올랐다. 오징어~~ 땅콩~ 삶은 달걀, 시원한 사이다~ 있습니다.
여객전무의 검표와 신호수의 깃발, 청깃발과 홍깃발의 수신호 차이는 극명하게 갈린다.
그리고 봄날 창가에서의 독서 삼매경을 흉내며 보내다
밖으로 나왔다. 독서의 모습은 언제 어디서 보아도 맑은 모습이다. 깨닫기 위하여는 익혀야 하고 익힘은 실천해야 한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죽은 마음이다. 정의로움은 바로 고귀한 생명을 지키려는 자유로운 행동이 수반되어야 한다.
밖으로 나오자 새벽에 내린 눈을 만지며 장난 놀고 있는 오누이를 발견하였다. 오빠는 장갑을 낀 손으로 눈사람을 만들고 누이는 맨손으로 만지려니 시렵다 대비되는 모습에 눈길이 가 살짝 누름 단추를 눌러본 결과다. 엄마, 아빠는 폐역사 안으로 들어 가 과거의 역사 모습을 보고 있는 중이었다.
전형적인 시골역
업무에 사용하던 집기류, 정감이 묻어났다. 아나로그 감성이 새삼 나를 휘감는다. 단순함 그리고 정직함 그리고 그런 생활철학 안에서 함께를 소중하게 여기고 살았던 분들이 바로 우리들 부모님이셨고 우리 또한 그러한 배움으로 어린시절을 보낸 사람들이다. 빠름은 따라가지 못하면 잡혀 먹히고 마는 것이 그 속성이다. 그리고 흔적조차 남기지 않아 제대로된 추억마저도 없게된다. 상실의 시대가 바로 디지털 시대다. 바로 재생할 수 있으니 근본의 소중함도 아까움도 없다. 중하게 다루다 어디라도 망가지면 고쳐서 다시 사용하고 애지중지 하지만 지금은 무제한 소비중심사회다.
참 아쉬운 마음으로 문학소녀들을 폐 역사곁에 다시 세우고 사진을 찍으며 옛적 사용하던 필름카메라 누름 소리가 그리웠다. 그리고 필름을 감기위하여 손으로 돌렸던 레바의 감촉이 그리웠다. 그리고 길을 건너 골목길을 올라 돌아 나가며 김유정의 생가 울타리를 끼고 돌아 나갔다. 생가 탐방은 점심 식사 후로 밀었다. 생가 정문에서 동북 방향으로 열린 길을 걸어 올라가면 금병산 정상으로 갈 수 있는 길이 나오고 그 길 초입에 우거진 숲 사이로 고개를 넘어 가는 길이 있다. 그 길이 바로 인제, 홍천, 원주로 가는 길이었다. 들병이들이 실레마을을 넘나들던 언덕마루였다. 그 언더을 오르기 전 얕으막한 산허리를 끼고 있는 식당 이름은 시루다. 이 지형이 시루같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 음의 변화의 과정을 거져 지금은 실레마을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이 시루식당에서 출발하여 금병산 기슭에 소설줄거리 따라 둘레 길을 만들어 놓았다. 어디를 가던 3시간 정도 소비하면 다 걸을 수 있는 길이다. 중리 1리에서 시루식당 방향으로 걸을 수도 있고 시루식당 부근에서 출발하여 중1리로 내려설 수도 있는데 거리는 양쪽같다. 시루식당으로 가 남쪽 방향으로 난 방을 차지하고 모여 앉았다. 점심 메뉴로 선택한 코다리는 김유정 영향이었다. 실레마을로 낙향한 후 자주 찾아가서 밥을 먹던 골목식당 주메뉴가 바로 코다리었다.
산촌에서의 점심 한끼, 그리고 코다리 찜과 여러 반찬들 영향과 김유정 덕분에 아낌없이 수저를 부산스럽게 만들어 주었다. 식사를 물리고 다시 오던 길을 되짚어 김유정 생가를 찾았다.
유정의 윗대에선 만석은 아니지만 6000천 석 규모의 부농이었다. 그 힘으로 한양에 집을 마련하고 자식들을 키우며 교육을 시키지만 유정은 어린나이에 어머니를 잃고 몇년 사이 아버지까지 잃는다. 그가 태어난 집은 ㅁ자 형태의 초가였다. 윗 대에선 금광을 경영하여 큰 돈을 벌었다고 한다.( 부를 이룬 일에 대하여 여러가지 설이 존재한다. 문중에서는 부마로서 사패를 많이 받았다고 이야기하고 이 집안에 대하여 내력을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은 금과 관련된 이야기를 주장하기도 한다.) 이러한 영향으로 아이들이 커가자 대원군 사저가 있던 운현동 뒤 운니동에 아흔 아홉칸의 기와 집을 짓는다. (이러한 영향으로 유정은 근처 재동초등학교를 졸업하게 되고 녹주와도 마주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지만 유정에겐 혼란을 부추긴다)그리고 아이들을 한양으로 올려 보내 공부하도록 하지만 양친께서 일찍 타계하여 그 꿈은 일찍 무너지기 시작한다. 유정의 형에 나쁜 행실로 다 말아 먹는다. 관철동으로 옮겨 줄여가 살다 이마저 잃어버리고 형은 처자식을 버리고 혼자 실레 마을로 먼저 돌아와 버린다, 유정은 이때부터 어려운 시절을 경험하게 된다. 병적으로 옥주에게 집착했던 이유, 그리고 누이들에게 빌붙어 살아야 했던 환경, 학비의 어려움으로 휴퇴학과 복학을 반복했던 암울함은 결국 유정을 살레 마을로 돌아오게 만든다.
그리고 흡사 녹주에게 버림 받은 자신의 처지를 원망하듯 자신의 작품 곳곳에 옥주의 신분이었던 기생을 등장시켜 분풀이를 해놓는다. 옥주로서는 안타까운 일이다. 마음을 줘 본적이 없었던 그로서는 삶의 봉변이었다.
대청 마루에 걸터 앉아 잠시 쉬다
밖으로 다시 나와 뒤곁으로 돌아 앙증맡은 굴뚝 구경을 하고 장독대로 가 봄봄 소설의 주인공인 박봉출, 점순이, 머슴을 세워 놓은 곁으로 가 소설의 주인공이 되어 보았다. 점순이의 키는 크는 키가 아니었다. 기다리다 지친 머슴은 장인에게 대든다. 장모님은 키가커서 점순이를 쑥~낳았냐고 따지다 돌아가겠다고 세경을 돌려 달라 때를 부리기도 한다.
집 기둥에 도끼로 키재는 표시로 자국을 만들어 놓고 점순이를 그 앞에 세워 점순이의 키를 늘 확인하지만 점순이의 키는 늘 앉은뱅이다. 새참을 머리에 이고 나타나는 점순이만 보면 기겁을 하고 달려 가 말리는 머슴의 행동은 늘 소설속에서 짠하게 다가 온다.
점순이 키를 훌쩍 넘서는 문학소녀들의 모습을 확인하려 슬쩍 점순이 뒤에 세우고 촬칵 촬칵 하였는데, 합격이다.
볕은 봄빛이었다. 참 따뜻하였다. 밖 대청마루에 걸터 앉으면 실레마을 문학촌 중심이 한 눈에 들어 왔다.
2번으로 계속.
첫댓글 겨울을 보내려면....
아직도. 여러날이 남았건만
번개로. 김유정 실레마을 문학촌을 찾아....떠나는 마음은 벌써 봄기운으로 가득 하였다....^
우리의 마음을 알아주기라도 하듯 따스하고. 청명한 파란하늘
봄이~성큼 다가온듯~^^
작가의. 삶과 모습을 떠올리면서
애달프고 애틋한.마음에....
예쁜 카페에서 문학박사님의 이야기와 짙은 커피향이 함께 어우러지니.....^
삶의 질이 한층더..Upgrade
된 느낌!!
감사한 하루였습니다~🌹
혼란을 제공한 죄로~~ 답글도 우물쭈물~~~ 하하하 단 수고하셨다는 이야기는 빠트리지 않겠습니다. 늘 감사합니다. 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