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현 스님의 출가 은사 전계(傳戒)노스님
출가, 오로지 나무아미타불 육자홍명만 계속해서 염불하라
1920년, 스님은 20세가 되자 모친을 떠나서 동백산(桐柏山) 태백정(太白頂) 운대사(雲台寺)에서 전계(傳戒)노스님을 은사로 출가하게 됩니다.
인함스님: 해현스님께서 젊으셨을 때 이곳에서 전계스님한테 머리 깎고 출가하셨습니다.
인지스님: 은사스님(해현스님)의 은사스님께서는 그 당시 이 절을 떠나 북경 광제사 선방에서 12년 동안 나오시지 않고 수행하시고 나서 동백산으로 돌아오셨다고 합니다. 절 주위에 풀이 많이 우거져 있었는데, 그 당시 아픈 사람이 있으면 스님께서는 주위에 있는 풀을 한 움큼 주면서 집에 가져가서 달여 먹으라고 하셨는데 어떤 병이라도 효험을 보았다고 합니다. ‘어떤 병이든 집어주는 풀이 다 약이 된 거지요.’
노스님께서는 직접 해현스님을 삭발시켜주시고 해현이라고 법명을 주셨습니다. 해현스님은 23살에 호북성 영보사에서 구족계를 받으셨습니다. 전계노스님은 본래 임제종 백운파 법맥을 받은 고승이시지만 해현스님에게 참선좌선을 가르치신 적이 없고 경전을 가르치거나 설법을 하신적도 없으시며 오로지 나무아미타불 육자홍명만 계속해서 염불하라고 당부하셨다고 합니다.
해현스님은 동백산 보화사(普化寺), 운대사(雲台寺), 탑원사(塔院寺) 등에 거쳐서 주석하시면서 황폐지를 14군데나 개간하셨습니다.
인함스님: ‘그 당시 이곳을 개간하셨는데 여기 전체를 개간해서 경작지로 만드셨어요.’
1966년, 문화대혁명이 시작되면서 홍위병들이 절에 난입하여 경전을 불사르고 불상을 깨부수고 스님들을 강제로 환속시켰습니다. 홍위병들이 전계노스님의 묘탑을 헤쳐서 뒤졌지만, 속이 빈 것을 보고 그냥 가버렸습니다.
인함스님: ‘탑원사에서 홍위병들이 줄곧 노스님의 유골을 찾으려고 했지만 찾아내지 못했어요. 노스님은 이런 법난을 미리 알고 계셨던 겁니다.’
해현스님은 나중에 묘탑바닥에 깔린 석판 밑에서 은사스님의 유골을 찾고 나서 전계노스님께서 깨달으신 고승이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답니다. 은사스님께서는 일찍이 이런 법난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아시고 유골을 묘탑바닥의 아래에 숨기도록 하신 것입니다. 홍위병들의 위협을 받는 고난 속에서도 해현스님은 스승의 유골을 보존해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991년 해현노스님은 제자들을 직접 이끌고 스승을 위해서 동백산 도화동 옆에 새롭게 탑을 세우고 다시금 안장하였습니다.
해현스님은 문화혁명기간에 산 아래에 있는 마을에서 생산대장역할을 배당받았습니다. 그 당시는 염불이 허용이 되지 않았기에 스님은 묵묵히 마음으로 염불하였고 절을 하는 것도 허용되지 않아서 밤에 몰래 절을 하셨습니다. 가마솥으로 모두 같이 끼니를 때워야 해서 비린 냄새가 나는 음식이 담겼을 때는 솥 옆에 둔 채소로 연명했습니다. 그런 가운데도 스님은 줄곧 승가의 모습을 대중들에게 보여주었다고 하니 정말 쉽지 않은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인강스님: ‘생산대에서 일을 하셨어도 환속하신 게 아니었어요.’
나중에 상황이 좀 진정되자 스님은 다시 절로 돌아가셨지만 식량 배급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인강스님: 전부 황폐한 벌판이라서 땅을 파서 토란이나 고구마를 좀 심어서 그것을 먹고, 혹시 절을 찾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그것이라도 먹으라고 내놓기도 했지요.
한해, 한해를 어렵게 몇 년간 보냈지만 절에는 향을 피우러 오는 사람이 전혀 없으니 들어오는 수입이 전혀 없었습니다. 해현스님 혼자서 힘들게 일하면서 늙고 허약한 다섯 분의 노스님이 한 분 한 분 입적하실 때까지 모시고 사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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