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령 백암정 복원과 퇴계이황선생의 발자취를 찾아.....
백암정과 덕곡서원 그리고 가례동천을 찾아서.....
새롭게 복원된 백암정의 모습
[명예기자 강진욱]의령군 가례면에 있는 백암정(白巖亭)은 조선 전기 유학자이며 시인이며 교육자인 예촌(禮村) 허원보(許元輔. 1455-1507년)가 창건하여, ‘白巖’(백암)이라는 현판을 걸었던 정자이다.
의령군에 살고 있는 김해 허씨(許氏)의 시조는 김수로왕의 황후 허황옥(許黃玉)이다. 경남 고성에 살고 있던 고려 말의 충신 호은(湖隱) 허기(許麒)의 증손자의 한 사람 허원보(許元輔. 1455-1507년)는 고성에서 혼인한 후 새살림을 의령현(현재 의령군) 가례(嘉禮. 현재 가례면)에서 꾸렸는데, 이것이 김해 허씨가 의령군에 살게 된 계기이다. 김해 허씨 종중에는 의령군 가례면에 있는 정자 ‘백암정’(白巖亭)은 허원보가 처음 지어, ‘백암’(白巖)이라고 현판을 걸었다고 전해 오는데, 이것은 여러 문헌에 비추어 틀림없다고 한다.
첫째 허원보는 20살에 사마시(생원시 및 진사시. *김해 허씨 세보에는 26살에 사마시 합격이라 함)에 합격하였으며, “일찍이 ‘가례’(嘉禮)의 산수를 몹시 사랑하여 작은 집을 지어놓고 ‘白巖’(백암)이라 현판을 걸고, 낚시질로 스스로 즐기고, 시를 읊어 풍류로 삼으면서, 세상의 명예와 이익과 어수선함과 화려함을 멀리했다.”(嘗酷愛嘉禮山水規置小屋而扁之曰白巖漁釣爲自娛嘯詠爲風流世之聲利紛華皆窅如也)라고 했다. 정자 백암(白巖)을 허원보가 처음 짓고 현판을 걸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김도화가 가승을 확인하여 묘비문을 썼으므로 내용이 옳다고 보아야 한다.
둘째, ‘김해 허씨 세보 권1’(3-4쪽. 1936년 발행)의 ‘허원보’(許元輔) 항목에 허원보는 “자는 몽득(夢得), 호는 예촌(禮村)이며, 성품이 온후하고 효와 우애에 힘썼다. 26살에 사마시에 합격했다. 고성에서 의령으로 이거하였으며, 가례(嘉禮)의 백암(白巖. 흰바위)과 산수를 사랑하여 정자를 지어 그 이름을 백암(白巖)이라 했다.”(字夢得 號禮村 景泰乙亥生 性本純厚躬行孝友 二十六中司馬 自固城移居宜寧 愛嘉禮白巖山水 規置一亭曰白巖)고 되어 있다. 백암정의 유래는 묘비에 실린 내용과 같다.
현재 ‘백암정’으로 불리는 정자는 창건 당시에는 ‘백암’(白巖)이라 불리었음을 알 수 있으며, 창건 시기는 허원보가 가례로 옮겨 살면서 바로 지었다면 1480년경으로서 2019년 현재로 보아 530여 년 전에 창건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허원보는 52살 되던 1507년에 별세하였는데, 2019년 현재로 보아 512년 전이다.
새롭게 복원된 백암정
15년 전 태풍 ‘매미’에 파손·붕괴된 백암정을 2억여 원을 들여 복원공사를 마무리 했다.
백암정 복원과 함께 백암정 탐방로가 조성되는데 마무리길 4KM숲길 코스를 신설하여 2020년에 완공 할 예정이다
의령군은 퇴계 이황 선생의 역사문화 흔적을 찾아가는 테마 숲길을 발굴하여 2019년 산림청 국비사업에 선정(총사업비 10억 원)되어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해당사업은 현재 의령읍 서동리 서산 일원에 추진 중인「의령백암정 복원공사」와 병행하여 전체구간 4km 내 탐방로 신설, 임도 개설, 편의시설 설치, 백암정 진입데크 설치 등을 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군은 기존 의령읍 하리에서 가례면 어은동마을을 연결하는 의령천변 산책로와 금회 사업구간을 연결하여 의령군민은 물론 외지인들이 찾는 명품 숲길로 조성할 계획이라고 한다.
백암정 정자는 오는 10월 공사를 완료할 계획이다. ‘ㅡ’자형 팔각지붕의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1칸인 붕괴 전 모습 그대로 복원이 되었다.붕괴 전 백암정은 1958년 지역유지 동갑들이 회갑연을 하지 않고 뜻을 세워 건립했다고 한다. 막새기와에는 단기 4291년 3월이라고 기록돼 있다.
이에 앞서 군은 지난 6월 백암정을 군 소유로 등기 완료했다. 그동안 백암정은 가례노인회 회원 명의로 관리되어 왔으나, 재정적 어려움으로 관리가 어려워져 건물이 파손된 상태로 방치되어 있고, 건립자 후손들이 복원하고자 뜻을 모았으나, 복원에 소요되는 사업비를 확보하지 못하여 추진이 중단됐었다.
자굴산 자락의 가례천모습
한편, 백암정은 조선 중기 성리학의 태두 퇴계 이황 선생이 내왕했던 것을 기리기 위해 지역 유생들에 의해 건립됐다. 재경 가례면향우인 허만길 문학박사는 2014년 글 ‘의령군 가례면 백암정의 유래와 가치’에서 “백암정은 오백 수십 년의 긴 역사를 지니고 있다는 점과 세월의 흐름이나 비바람으로 말미암아 건물이 낡거나 부서질 적마다 끊임없이 새로 짓거나 고치면서 오늘날까지 전해 왔다는 점에서 귀중한 유적의 가치를 지닌다. 백암정에서 역사적으로 유명한 정치인과 학자들이 정치와 학문을 토론하고 시와 풍류를 즐겼다는 점에서 역사적, 문화적 가치도 크게 지니고 있다”라고 했다.
의령군 하리에 위치한 덕곡서원모습
의령읍 덕실마을 하리에 위치한 덕곡서원은 퇴계 이황(1501∼1570)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 위패를 모신 서원이다.
이황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학자이다. 백운동서원을 ‘소수’라는 현판을 받아 사액서원으로 만들었다. 이 소수서원이 최초의 사액서원이다. 퇴계의 학문은 일대를 풍미하여 퇴계 학파를 형성해왔고, 일본 유학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덕곡서원은 효종 5년(1654)에 세웠고, 현종 원년(1660) 나라에서 ‘덕곡’이라는 현판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하지만 고종 8년(1871) 서원철폐령으로 목조건물 전부가 철거되었다. 그 후 고종 39년(1902) 유림들이 강당과 솟을대문을 복원하였고, 다시 1992년 사우각을 다시 지었다. 강당은 앞면 5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이 서원은 조선시대 성리학의 태두(泰斗)였던 퇴계 이황(退溪 李滉)선생(1501∼1570)을 향사(享祀)하기 위하여 건립되었다.
의령군 가례면 동네뒷편 자락에 위치한 가례동천
의령읍에서 대의 길로 오리정도 가면 가례복지회관 맞은편 은행나무 가로수 아래 ‘퇴계이황선생유허지 입구’라는 자연석비가 있다. 지시대로 골목길로 셋집 대문을 지나면 안내비가 나오고 좌로 고개를 돌리면, 마을로 내려와 멈춘 산줄기 끝자락에 비스듬한 검은 바위면에 ‘嘉禮洞天’이 있다.
바위벽은 가로 360㎝, 세로 240㎝이며 네 글자가 차지하는 크기는 가로 226㎝, 세로 30-45㎝이다. 우에서 좌로 배열하고, 가장 큰 ‘례’는 폭 33㎝, 세로 45㎝이다. 비바람에 ‘례’자와 ‘동’자, ‘동’자와 ‘천’ 사이에는 세로로 바위틈이 넓어지고, 세월의 무게로 음각이 마모되어 윤곽이 흐릿하다. 특히 ‘天’자는 식별이 어려운 상태이다.
퇴계 이황선생은 21세에 허씨 부인을 아내로 맞았는데, 부인을 항상 친구로 대하듯 하였다 한다. 처가는 칠곡면 도산마을로 초기에는 퇴계선생의 고향과 연관하여 小陶山으로 불렸다고 한다. 퇴계선생은 의령 처가에 자주 들러 지역 선비들과 교류를 하는 한편, 때때로 낚시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는데 그 산자락 바위에 ‘가례동천’이라는 친필 글씨를 남겼다.
수백년 세월이 지나면서 지금은 동네가 들어섰지만 아득한 그 옛날엔 낚시하던 그곳이 의령한우산과 자굴산에서 내려오는 큰 하천이였음을 짐작한다.
어떻게 보면 백암정의 복원으로 인해서 퇴계이황 선생의 흔적의 마지막 퍼즐이 맞춰진 셈이다.
아마도 내년 봄쯤이면 백암정 가는 숲속 거님길도 완공되리라 생각이 든다.
꼭 그때가 아니더라도 퇴계이황선생의 발자취를 거닐어 보는 건 어떨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