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햇살이 쏟아졌다』
2차 쟁점 토론(오후), 녹취 정리 (2022.10.26. 목요일 저녁 7시-9시)
사회자 : 오전에 오고 갔던 이야기들도 기회가 닿을 때마다 제가 전달을 해 드릴 수도 있고요. 그런데 들은 생각이 좋은 작품은 단선적으로, 단편적으로 하나로 모아지는 게 아니고, 상당히 많은 이야기들이 오고가더라고요. 다양하게 해석이 되면서. 역시 작품이라는 게 참 대단하다 그런 생각을 많이 했거든요.
(생략. 참가자 인사 나눔).
우리 출판놀이 토론을 할 때에는 대개 작가분들이 들어오시니까. 좋은 작품은 다층의 성격을 가진 인물들이 그려지고 있더라고요. <목소리의 형태>에 등장하는 주인공들, 또 주변의 보조 인물들의 얽히고설키는 성격들이 상당히 복합적이어서 오전에도 상당히 다양한 토론들을 나누었고요. 단편적으로 하나로 모아지지 않는 다양한 토론을 나누었는데, 상당히 배울 점이 많은 것 같아요. 요즘엔 아동청소년문학도 복합적으로 양면성을 가진 아이들을 그려내기 때문에 단순하지 않죠. 『햇살이 쏟아졌다』도 약간의 그런 양면적인 성격을 가진 캐릭터가 있는데, <목소리의 형태>는 더 강하게 그런 이중적이고 복합적인 성격이 드러나는 것 같아요. 그래서 토론이 상당히 깊게 되었거든요. <목소리의 형태> 애니메이션을 토론해 보라고 1차 토론 때 제공해 준 참가자가 10분에서 20분 늦게 들어온다고 하셨어요. 이따가 들어오시면 더 재미난 토론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애니메이션을 직접 보지는 않으신 분들이 계셔서 그냥 제가 토론을 위해서 내용 같은 것을 조금 말씀을 드려보면.
(생략. <목소리의 형태> 내용 소개).
우리들은 글을 쓰는 사람들이니까, 현대적으로 봤을 때는 장애의 모습으로 온 아이가 일방적으로 폭력을 당하는 데도 완벽하게 수용을 하는 저런 비현실적인 주인공의 모습을 어떻게 감당해야 하나, 어떻게 봐야 하나. 왜 이 영화를 만드는 이들은 첨단의, 인권이 작동하는 시대에 폭력을 끝까지 수용하는 저런 아이 캐릭터를 만들었나. 우리는 여기에서 무얼 배워야 할까 오전에 이런 이야기들을 했죠.
(1차 토론 때 <목소리의 형태> 애니메이션 소개해 준 참가자 입장, 인사 나눔.)
여기 계신 분들 중에 <목소리의 형태>를 안 보신 분들이 몇 분 계셔서 지금 줄거리를 설명해 드리고 있었어요. (참가자가 <목소리의 형태>를 소개해 주어서, 『햇살이 쏟아졌다』 작품과 같이 토론을 해 보는 계기가 생겼다는 취지의 내용이 이어짐) 토론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어서, 지금 참여하셔도 돼요. 1차 토론에 나왔던 내용은 제가 녹취를 풀어서 (전달을 해 드렸고) 여러분 보셨죠? 사실, 출판놀이가 중요한 게 문학적인 담론을 만드는 행위라고 생각해요. 자본이라던가, 큰 출판 시스템으로 움직이는 게 아니니까요. 작품을 하나 만들면, 이 작품으로 파생할 수 있는 문학적 담론을 진정성 있게 많이 만들어서, 그 담론을 사람들과 공유하는 게 아마 출판놀이의 가장 큰 역할 중의 하나이고, 거기까지만 해도 우리 역할이 괜찮지 않을까. 그래서 이번에 이 창작실험을 계기로 해서 그런 담론을 만들어 가는 거예요. 사실. 『햇살이 쏟아졌다』 이 작품을 가지고 우리가 신인 작가 작품을 가지고 치열하게 비평을 해본다 하는 것 보다는, 문학적 담론의 중심에 설 수 있게 (해주려는 시도가) 신인 작가의 작품이지만, 신인 작가에게도 도움이 되고 여러 가지 의미가 되거든요.
(생략. 윤수란 작가의 작품 출간 진행 정도 안내).
자기 작품이 중심이 되어서 수많은 이야깃거리를 만들어 내고, 담론들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길게 봐서는 양민아 작가에게 가장 큰 선물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저희가 앞으로 1차, 2차, 3차, 4차 이런 식으로 출판놀이에서 내는 작품들을 가지고 담론을 계속 만들어갈 예정입니다. 여러분들 기대해 주시고, 토론을 하고 나면 저희가 녹취를 해서 최대한 (진행을)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전에 한 것도 궁금하시죠? 되게 열띤 토론을 했으니까 녹취한 것은 (풀어서) 여러분들에게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읽어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작품을 다 읽으신 분은 읽으신 분대로 토론을 하시고, 읽지 못하셨더라도 여러분들의 머릿속에는 자기 작품이 들어있으니까 그렇구나 이런 흐름이 있는 작품이구나. 내가 나중에라도 한번 보고 내 작품, 여러분들 머릿속에는 다 자기 캐릭터들이 들어있으시죠? 나는 이렇게 변주를 해야 하나. 요즘은 저런 문제가 있나 하는 것들을 생각하시면서 들으시면 좋을 것 같아요. <목소리의 형태>를 소개해 주신 참가자 선생님은 <목소리의 형태>를 보시면서 『햇살이 쏟아졌다』하고 비교하면서 얘기하셔도 좋고, <목소리의 형태> 이야기만 하셔도 좋고, 하시고 싶으신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하세요. 하시는 과정에서 줄거리라던가 궁금증이 있으면 제가 줄거리를 보충해드리면서 (진행)할 테니까 나름대로 편하게 말씀을 해 주세요. 먼저 한번 듣고 싶네요.
참가자 1(<목소리의 형태>를 소개해 주신 참가자 선생님, 이하 생략.) : 감사합니다. 사실 이 작품이 나왔을 때 보다가 안 봤어요. 너무 제가 상처가 커가지고.
사회자 : <목소리의 형태>가?
참가자 1 : 네. 보다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사회자 : 그러니까, 어떤 억압당하거나 왕따라던가 그런 피해 경험이 있어서죠.
참가자 1 : 네. 왜냐하면 이게 남녀공학이잖아요. 영화에서는 지금 작품에서는 남녀공학이 나오는지 제가 잘 모르겠는데. 이 애니메이션에서는 남녀공학이잖아요. 어, 왕따가 여자가 여자를 괴롭히는 경우도 있고, 남자가 여자애를 괴롭히는 경우도 (있고) 대개 다양한대. 애들이 가담하지 않은 (아이들은) 다 지켜봐요, 그 상황을. 그러면, 제가 경험담을 말씀드리면, 쟤는 나를 어떻게 하진 않았어, 하지만 걔는 나를 어떻게 볼 거야, (하고) 지레짐작을 하게 돼요. 그렇기 때문에 내가 걔를 좋아하게 되든, 그 애가 나를 좋아하게 되든 서로 자기방어가 날 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내가 당하는 꼴을 다 봤기 때문에. 그런 게 저는 좀 거슬렸어요. 그런 어떤 여과 과정 하나도 없이. 이 애니메이션에서 여자애가 남자애를 미워하는 모습이 잘 안 나와요. 너무 대인배라고 할 지라도 한두 번쯤은 농아지만 ‘너 나한테 왜 그랬어?’ 라던가, ‘너 때문에 힘들었어, 하지만 난 널 용서했어, (내지는) 이해했어.’ 이런 말이라도 나왔으면 그 남자애의 다음 행동이 교감이 갔을 거고. 제가 어제 새벽까지 다시 봤어요. 어떻게 보면 이게 작품 합평을 떠나서 제 개인 상처를 치료할 수 있는 좋은 시간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 마음을 부여잡고 (다시) 봤거든요.
그러니까 이 『햇살이 쏟아졌다』도 그렇고, <목소리의 형태>도 그렇고 결국은 가해자도 피해자일 수 있으니, 가해자의 삶도 있지 않겠느냐 한 번 기회를 주면 안 되겠냐 저는 이렇게 받아들였거든요. 네, 저는 그렇게 느껴졌어요. 여기 『햇살』의 현우도 알고 보면 엄마한테 학대를 당했어, 얘도 상처가 있는 아이야, 그렇게 뭐라고 하지 마, 알고 보면 얘도 아픈 아이였어. 이 <목소리의 형태>도 먼저 자기가 괴롭히긴 했지만 자기가 (한) 실수로 인해서 그게 그대로 오는 거잖아요. 그 아이가 초등학교 6학년 2학기인가, 6학년 1반인가 그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긴 세월 동안 상처를 안고 살잖아요. 그 마지막에 아이들의 자기의 실수를 용서받고 받아들이고 마지막에 울잖아요. 그게 그거죠. 이 아이가 드디어 자기가 실수를 했지만 자기가 감내를 하면서 그게 벗겨지는 거. 결국은 가해자한테 기회를 한 번 더 주면 어떻겠느냐, 저는 그렇게 받아들였거든요. 저는 그렇게 느껴졌어요.
사회자 : 아, 잠깐 줄거리를 중개해 드리면...
(생략. <목소리의 형태> 줄거리 소개).
가해자였던 이시다는 뭔가 죽음을 통과하면서 새로운 가해에 대한 어떤 속죄랄까, 그런 기회를 갖게 되니까 그런 관점에서 봤을 때 참가자 1 선생님은 이시다라는 저 아이. 그러니까 우리가 작품을 쓸 때, 어렸을 때 철모르고 했던 의도적으로 했던 어떤 가해의 경험이 있는 인간은 평생 그냥 가해자로만 살아야 하는 거냐. 이 가해의 경험이 있는 친구가 어떤 문학 작품 속에서 자기 인간성을 회복하는 방법은 뭐냐. 이 작품은 혹시 그런 걸 좀 탐구하려고 하는 게 아니냐. 지금 이런 말씀이신가요?
참가자 1 : 네. 맞아요. 저는 그렇게 느껴졌어요.
사회자 : 그렇죠, 그렇게 볼 수 있겠죠. 작가마다. 그런데 피해의 경험이 있는 입장에서 봤을 때는 그와 같은 작가의 시도가 별로 마음에 안 든다. 지금 그 말씀이신거죠?
참가자 1 : 아니오. 처음에는 마음에 안 들었어요. 이걸 처음에 접할 때는 마음에 안 들었어고, 어제 새벽에 볼 때도 시선이 거기로 가서 마음에 안 들었는데. 왜냐면 저는 아직 그 애들한테 사과를 받은 적이 없거든요. 얘처럼 찾아와서. 이 아이는, 주모자가 4명인가 3명인가 그랬지만 저는, 온 반 아이들이 다 저를 싫어했거든요. 한 번도 나한테 미안하다고 얘기한 애가 한 명도 없었어요. 그 상태로 애들과 헤어졌고 반이 올라갔는데, 그 트라우마가 그대로 올라오더라고요. 근데, 이 남자애가 그 뒤로 울면서 나 그때 철이 없었고, 몰라서 그렇게 했어. 그냥 네 목소리가 너무 듣기 싫었고, 불편하고 짜증 났어. 그래서 널 괴롭혔어. 미안해. 이렇게 절절하게 하진 않았지만 얘가 자기 실수의 무게를 견디면서 살아냈잖아요. 자살을 하면서까지. 그런 걸 보니까 어쩌면 나를 함부로 대했던 그 애들도 사실, 전 알고 있어요. 상담받기 전에도, 아니, 상담받았을 때도 그런 얘기를 하셨거든요. 아마 그 애들은 어디서 정서적이든 학대를 받고 왔는데, 풀 데가 없으니까 너한테 와서 그랬을 거다. 네가 이해해라. 불쌍하게 여기고 이해해 줘라. 그런 이야기를 들었었거든요. 전 화가 났죠. 왜 하필 나야. 왜 하필 나여야만 해. 내가 뭔 큰 죄를 지었길래 왜 내가 너희들의 분풀이 대상이 되어야만 해. 게네들한테도 이유가 있었겠죠. 여기 주인공처럼. 이유가 있었겠죠. 그래서 제가 제 자신을 위해서라도, 이렇게 반성하는 모습이 보이잖아요. 크게 와 닿거나 애절하게 감동이 오고 그렇지는 않지만, 반성하는 모습이 보이잖아요. 그리고 얘는 아이잖아요. 아이니까. 성인이 아니잖아요. 내가 그런 시선을 거둬야 하지 않겠나. 성찰을 스스로 했어요. 새벽 3시에.
사회자 : 다른 참가자분(참가자 2)이 너무 또 좋은 얘기를 하나 해 주셨는데, 제가 읽어볼게요. “저는 거미 엄마 등에 딱 붙어 있는 피르와 - 『햇살이 쏟아졌다』 보면은, 어릴 때부터 그쪽 이랑카 글로 가가지고 완전히 엄마와 딱 달라붙어 있는 아이 있잖습니까, 완전히 어린 유아적인 느낌으로 (이랑카에게) 붙어 있는, 그래서 어릴 때부터 가스라이팅 같은 환경 속에서 자란. 그렇죠, 엄마의 모성이라고 해서, 넌 나밖에 없어 해서 엄마한테 완벽하게 의존하게 만드는, 그런 것이 가스라이팅 하는 수준이죠. 자식도 나 없으면 넌 죽어 해 가지고 완벽하게 아이를 이제 이렇게 가스라이팅 시킬 정도로 자발적인 어떤 그런 걸 심어주지 않고, 그런 엄마들이 많죠. 그래서 - 가스라이팅 같은 환경 속에서 자란 자신을 인지하지 못하는 니시미야가 같이 느껴졌어요.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목소리의 형태>에서 니시미야라는 아이는 남한테 어떤 폭력이라던가 이런 거에 대해서 조금도 대항하지 않는 대항 능력이 없죠. (그래서) 혹시 이 아이가 가스라이팅 당한 환경, 그렇게 자란 아이일 수도 있지 않은가? 그래서 이 아이는 폭력을 행사하는데도 되게 의존적이어서 폭력하는 사람에게 대항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자기 자신에 대한 자존감이 완전히 바닥이어서.
오전에도 그런 토론을 많이 한 거예요. 그런데 이런 토론을 할 때 대전제는 피해와 가해라는 이분법적인 논리로 얘기할 때 피해자다움이라던가, 얘는 이래서 피해를 받았다던가, 이런 논리로 토론을 하자는 건 절대로 아니에요. 우리는 문학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한 개인의 내면에 들어 있는 다양한 이중성, 어떤 선악의 개념이 아니라, 다양한 캐릭터를 우리는 만들어내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분석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누가 옳다 잘했다 식으로 가면 안 되죠. 우리는 인제 작가적 입장에서 분석을 하는 거기 때문에. 그래서 참가자 2가 말씀을 하시는 게, 그래, 그러니까 니시미야가 잘못됐어, 그런 게 아니고 혹시 니시미야 같은 저런 캐릭터가 뒤에 가스라이팅을 시키는 엄마와 같은 더 큰 폭력의 부정적인 인물이 있기 때문에 니시미야도 하나의 어떤 피해자, 그러니까 이시다라고 하는 아이로부터만 오는 피해자라기보다는, 아이들끼리의 싸움이기 때문에, 니시미야의 배경이 되는 부모라던가, 그 어떤 어른들의 폭력이라던가, 우리가 니시미야를 부정적으로만 보는 게 아니라, 심층적으로 그 아이의 근원을 봐줘야 하지 않나, 그래야지 그게 니시미야한테도 아이가 또 회복할 수 있는 길이지 않나.
그러니까 참가자 2가 저렇게 말씀하신 것은, 제가 조금 덧붙여 말씀을 드리는 거지만, 우리들은 작가들이기 때문에 누가 가해자다 피해자다 단순 이분법이 아니고 니시미야 같은 캐릭터, 상당히 폭력이 들어오는 데도 완전히 무기력한 캐릭터 대항하지 못하는 겉으로 보면 대개 수용적인 인물로 그려지는데 혹시 이거는 이시다 같이 괴롭히는 아이한테 피해, 가해 1차원적으로 볼 수 있지만 뒷배경에는 더 큰 폭력의 근원이 있지 않겠나, 작가들은 그 양면성을 봐야 하는데, 그럼 그건 뭐냐, 이런 식으로 질문이 (되고) 그것이 피르를 볼 때에도 단순히 엄마니까 괜찮다 이렇게 넘어갈 게 아니고, 사실은 저게 가스라이팅 시킨 게 아니냐, 이랑카가. 오전에 토론을 할 때에도, 이랑카가 너무 착하다. 착해 보이고 그렇게 표독스럽지도 않고. 저게 오히려 건강한 건가. 애들이 다 여기가 좋은 곳인지 알고 있는데. 저게 역설적으로 엄마가 아이들을 따뜻하게 보호하고 있는 것 같은데, 저게 정말 긍정적인 거냐. 쟤네들이 가스라이팅 당한 거 아니냐. 한 명이라도 실종되어서 없어진 게 있어가지고 이랑카의 내면에, 배경에 음흉한 거라던가 미스터리라던가 이런 게 있어야지 오히려 그게 더 다양성이 있는 건데, 그냥 아이들이 똑같이 몰려와서 평온한 공간에서 지낸 것 같은 느낌이 든다면 저거는 작가가 더 예리하게 봐야 하지 않겠나, 이런 오전의 토론 중의 하나였어요. 사실 이게. 참가자 2가 말씀하신 거죠. 오전에도 그런 얘기를 했는데, 개인이, 참가자 1처럼, 직접 피해나, 왕따나 그런 트라우마가 있는 분들의 하는 말씀은 백프로 인정해야 한다. 그분에 대해서 우리가 뭐라고 하는 게 절대로 아니에요. 따지는 게 절대 아니고, 우리는 작가들이기 때문에 오히려 트라우마 정도의 피해를 가지신 분들도 근원적으로 나의 폭력은 어디에서부터 왔던 것인가, 그리고 이것을 치유하고 벗어나는 길은 단순히 직접적인 1차원적인 피해도 있지만, 이면에 더 큰 뭐가 있잖아요. 그런 거에 대한 종합적인 것을 고려해서 캐릭터, 문장이 나온다. 가해다, 피해다 가리는 게 아니고 복합적인 인물에 대한 성격 토론을 더 해야 한다. 이런 얘기를 조심스럽게 많이 한 거예요. 무슨 말씀을 드린 건지 이해하시죠, 여러분. 참가자 1 선생님께서도 이해하시죠?
참가자 1 : 제가 말씀을 더 못 드렸는데, 오전에 그 말씀이 맞아요. 왜냐면 왕따를 당한 애들의 심리는요, 내가 잘못했으니까가 더 많아요. 맞아요. 내가 잘못했으니까 이런 일 겪는다, 스스로 자책을 해요.
사회자 : 스스로 자책을 합니까?
참가자 1 : 네. 나한테 돌려요. 그래서 자해로 이어져요. 니시미야가 자살을 하려고 하잖아요. 걔도 화가 나는데, 자기로 인해 친구들이 싸우고, 벌 받고 이런 게 괴로운 거예요. 자기가 부당한 행동을 당하고 있지만 나로 인해서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게 싫은 거예요. 그래서 그 화살을 남한테 못 돌리고, 나한테 돌려요. 그게 자살로 이어져요. 그래서 아까 오전에 말씀하셨던 니시키야 쇼코의 이면성에 대해서 더 심층적으로 봐야 한다는 말씀에 공감을 해요. 저도 그랬으니까. 저도 그랬어요. 내가 당하면서도 내가 마음에 안 들었으니까 이런 일이 벌어졌겠지. 아, 저도 말을 못 했어요. 엄마한테도 말을 못 하고, 아빠한테도 못 하고, 선생님한테도 못 하고. 학원 가서도 얘기 못했어요. 저도, 안 하고 그냥 견디면 될 거야. 전 이랬거든요. 견디면 언젠가는 끝낼 거야. (견디면) 언젠가는 나한테 좋은 날이 올 거야. 견뎠어요. 아무 말 없이. 그랬더니, 아, 제 삼십 년 인생이 망가졌어요. 그 사건으로 인해서.
사회자 : 아, 그 사건으로 인해서? 아.
참가자 1 : 네, 망가졌어요. 저는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한번 그렇게 겪으면, 저는 무의식에 묻어뒀거든요. 나는 그런 거 당하지 않았어. 괜찮아. 잊고 살다가, 이게 확 오면 제가 감당하기 힘든 거예요. 그러듯이 그 아이의 내면에 대해서는 좀 더 저도 공감을 하고 이런 다양한 내면 갈등에 의해서 될 수 있다는 것을 봐야 한다는 것을 저는 공감을 해요.
사회자 : 사실은 1차 토론 때 참가자 1이 『햇살이 쏟아졌다』를 읽으면서도 그런 예전의 아픈 경험을 말씀하셔서 그러면서 이제 이 <목소리의 형태>도 이야기해줬고. 참가자 1이 작품을 쓰시는 작가이시기 때문에 이러한 토론에 같이 임한다는 자체가 본인을 위해서도 이미 벌써 상당히 건강하게 자기 자신의 그런 경험을 객관화시켜 볼 수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그래서 토론에 1차에 이어서, 2차에도 오신 거고요. 제일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문학을 한다는 게 결코 현실을 낭만적으로 합리화 시키는 게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햇살...』 같은 작품이라던가, <목소리의 형태> 같은 작품이 실제 장애를 가진 사람들, 아픔을 경험했던 사람들이 읽었을 때 거기에서 토론이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을 해요. 참가자 1과 같은 사람이 읽어서 거기서 생겨날 수 있는 문제에 대해서도 우리가 민감하게 같이 토론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 관문을 통과해야 하는데, 그래서 제가 참가자 1을 기다렸어요. 지금 오셔서 해 주시는 이야기가 단순 이분법적인 이야기가 절대로 아니고요. 참가자 2가 던져 준 질문이 오히려 더 그런 단순 이분법적인 피해냐, 가해냐를 넘어서 심층으로 들어갈 수 있는 통로를 열어 주는, 너무 중요한 질문이었던 것 같고요. 또 참가자 1이 본인의 경험을 오픈해서 말씀하시는 것도 작가들한테는 중요한 주제를 다룰 때 어떻게 배려를 해야 하고, 어떻게 탐구를 해 가야 되나. 오전에도 참가자 1의 말씀하고 비슷한, 날카로운 이야기를 했는데, 결국은 뭐냐면 누구한테 폭력을 당한다는 것, 니시미야가 이시다한테 폭력을 당했거든요. 아무리 헌신적이고 수용적인 인간이라도, 폭력으로 인해서 생기는 내면의 분노 에너지는 어딜 가지 않는다. 그 분노 에너지가 하늘로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누구한테 폭력을 당했을 때 그 폭력으로 인해서 생기는 분노와 기억 이미지 같은 것은 내면에 쌓여 있기 때문에 결국은 트라우마가 됐든, 분출을 해야 하는데, 니시미야 같은 아이는 폭력을 계속 내면화하고 그랬기 때문에 결국은 외부와 싸우거나 해서 폭력을 분출시키지 못하고, 자기가 자신을 공격한 게 자살 아니냐. 참가자 1이 얘기하셨던 것처럼 폭력을 당한 사람들이 자해를 하고 하는 것이 자기가 자기를 공격하는 건데, 좀 더 지나치면 자살로 가는 거겠죠. 그와 같은 행위의 분노는 없어지지 않는다.
작가들은 폭력이라던가 그런 문제가 있을 때 그 분노라던가 그런 에너지를 너무 단순하게 생각해서 사과 한마디 들으면 없어지는 걸로요. (그런데) 절대 그런 문제가 아니다 이게. 아주 심층적으로 분노라는 이미지는 내면화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이미지가 어떻게 표출되고, 어떻게 스토리에서 갈등으로 이어지느냐. 이게 사실은 (중요하다). <목소리의 형태>는 이따가 제가 여러 가지 다양한 관점에서 토론 나온 걸 설명드릴 텐데, 제일 핵심적인 토론 중의 하나가 뭐였었냐면, 니시미야가 자살을 하려고 하는 거였어요. 그니까 이시다라고 폭력을 행사했던 아이, 남자아이 그 아이가 회개를 했던 어쨌든 이 아이가 자살을 시도하면서 뭔가 새로운 아이로 탄생하고 싶어하는 건 논리적으로 이해가 됐는데 니시미야가 나중에 이시다랑 화해하면서 서로 러브라인이 형성되잖아요. 서로 좋아하는 감정으로, (관계가 계속) 악화되는 것도 아니고, 이시다는 계속 와서 내가 잘못했다, 철저하게 나는 네 편이고. 이런 이야기를 계속하는데. 결국은 서로 좋아하고, 자기도 좋아하고 말로도 표현하고 하는데. 자살을 하려고 죽어버리려고 해서, 그 장면이 너무 충격적이어서.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되느냐. 결국은 폭력을 당했던 사람은, 그 분노가 어디로 가는 게 아니다. 니시미야도 결국은 그렇게 표현한 게 아닐까. 그런 이야기도 했었는데, 그런데 그렇게만 보면 이 이야기가 너무 단선적이어서. 거기에는 다른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게 있지 않나. 그래서 토론을 많이 했어요. 그 문제가 <목소리의 형태> 핵심 중의 하나다. 이게 만화가 원작이라네요. 실제로 되게 탐구심이 있는 분이 계셔서, 그걸 다 받아서 보고 계셨다고. 오전에는 반밖에 못 읽어서, 말씀은 안 하셨는데 오전 끝나서 또 열심히 보셨대요. 니시미야가 왜 자살을 하려고 했을까, 이시다가 그렇게 헌신적으로 사과를 하고 새롭게 같이 출발을 하려고 하고, 조금도 폭력의 기운은 없이 헌신적인 자세를 보이는데. 그래서 호감을 느껴서 같이 사랑을 하려고 하고. 그런데 왜 얘가 자살을 하려고 했을까.
참가자 1 : 왜냐하면
사회자 : 네, 왜냐하면. 참가자 1의 이야기를 들어보죠.
참가자 1 : 왜냐하면, 제가 이렇게 공개를 해도 되는지 모르겠는데. 제가 학폭 경험도 있지만, 제가 태어날 때 좀 남다른 게 있었대요. 어머니 말씀이. 제가 모자라게 태어났어요, 약간. 그런 경험을 갖고 있는데. 이, 니시미야는 귀가 안 들리죠. 그리고 말이 좀 이상하고, 약간 좀, 무섭게 들리잖아요. 니시미야가 말도 잘 못하잖아요. 누군가를 좋아할 때 감정이 커질수록 내가 가지고 있는 단점이 커 보이는 거에요. 얘가 너무 좋아 죽겠는데.
사회자 : 아, 누군가를 좋아할 때? 아!
참가자 1 : 네, 나는 얘가 너무 좋아죽겠는데. 저는 이런 감정을 느꼈거든요. 나는 쟤가 너무너무 좋은데, 난 이미 이런 장애를 갖고 있는데. 마음은 점점 커지는데 난 초라해지고. 그럼 그 감정의 극을 조절할 수가 없죠. 사춘기 아이인데. 민감할 시기 아니에요. 내가 만약에 정상적인 아이로 태어났으면 나는 저 아이랑 거리낌 없이 손도 잡고, 수화로 대화하지 않아도. 장애인들은 그런 게 조금 있는 것 같아요. 제가 전철에서 장애인을 한 번 도와준 적이 있거든요. 22살에. 그분은 다리를 절었어요. 층계를 못 올라가더라고요. 그분을 전철 플랫폼부터 층계까지 도와드렸어요. 근데, 제 뒤에서 걷는 걸 보더라고요. 눈이 따라오시면서. 부러움의 시선인 거죠. 내가 갖고 있는 장애를 극복하고 싶지만 나는 저 다리를 가질 수 있지 않아. 그것처럼 이 니시미야도 같아요. 나는 어떻게든 긍정적으로 밝게 살 거야. 하지만 나는 내가 갖고 있는 장애는 남아 있어. 이건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좋아하는 남자애한테 쉽게 다가가지 못하고, 결국 좀 어두움이 있는데요. 이렇게 되면 내가 태어난 걸 원망하게 돼요. 엄마, 부모님한테 죄송한 말이지만 내가 태어난 걸 원망한다고요. 그럼 어떻게 하고 싶겠어요. 살고 싶지 않겠죠. 그러면 자살로 이어지는 거예요.
사회자 : 보통 단순한 논리로 생각하면 날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너무 행복해하고 그렇게 하는 것은 단선적인 생각인데, 작가들은 왜 보통 대중들이 생각할 수 있는 단선적인 생각 그 밑의 심층을 2프로 뒤집어서 보잖아요. 그게 작가들이지 않습니까.
지금 채팅창에도 참가자 2가 또 말씀해 주셨는데, 가해의 밑바닥은 감출 수 없는 수치심이라고 생각해요. 가해하는 사람은 타인의 자존감을 바닥으로 던져서 그걸 주워 먹고는 자신의 감출 수 없는 수치심을 우월감으로 감추고, 찬사와 복종이 가학과 피학의 관계로 가는 것이 아니냐. 아, 아주 참가자 2가 핵심적인 말씀을 너무 잘해주시네요. 우리들 작가들은 일반 대중들이 단순하게 느끼는 일반적인 감정을 당연히 이해해야 해요. 그리고 그 위에다가 2프로 그걸 뒤집어야 되거든요. 그 위에다가. 일반 대중들이 느끼는 단순한, 도덕화되고, 교양화된 학습화된 감정을 깔고 그 위에다가 그걸 약간 뒤집어서 질문을 던지는 게 작가인데, 그 2프로 내면의 심층을 보는 게 이제 쉽지 않은 거죠. 그걸 문장으로 (표현하고). 그래서 지금 이런 토론이 상당히 심도 있는, 깊이 있는 토론을 하는 거라고 나는 생각해요. 그래서 우리가 많은, 현란한 말을 하는 것보다도, 작가 입장에서, 아, 이게 깊이 들어가는 캐릭터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토론을 하는 거죠.)
참가자 1과 참가자 2의 말씀과, 이게 필담이네, 필담. 가만히 보니까. 참가자 2는 니시미야고, 참가자 1은 이야기를 해가지고 분위기가 뭔가 비슷한 느낌이 드는데. 어쨌든 니시미야 참가자 2의 필담이 이게 참, 의미가 있어요. 그래서 가해의 밑바닥은, 그렇죠. 가해나, 피해나, 우리가 교양화된 일반적인 걸 뛰어넘는 이런 돌출 행동은 우리 인간이 모두가 다 하지 않습니까. 모든 인간의 수치심이 있겠죠. 그 수치심은 가해로도 나타나고 또 대항하지 못하고 피해로도 나타날 수도 있다. 그런데 실제 가해자들은 어떻게 보면 실제론 밑바닥엔 수치심을 갖고 있어서, 타인의 자존감을 바닥으로 던져서 그걸 주워 먹어서 자신의 수치심을 우월감으로 바꾸려고 하는 그래서 가해를 하는 거다. 그러니까 이시다라고 하는 아이, 그 아이는 어떻게 보면 가해의 경험이 있을 때의 수치심과 또, 피해의 경험 그러니까 양쪽을 다 맛본, 그 아이는 가해자였던 기억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 아이가) 밉지만, 그 아이는 쓴맛 단맛을 다 본 아이일 수 있겠죠. 양쪽을 다 경험해 본 아이. 그래서 꼭 우리가 이시다라는 아이가 가지고 있는 양면성을 가해자라고만 낙인찍기는 좀 그렇다. 그래서 이 작품을 만든 이 작가도 가해하고 피해의 양면을 가진 면에서, 근데 사실 가해 피해의 성격은 수치심이라던가 똑같은 아이가 분열되어서 나타난 것일 수도 있다. <목소리의 형태>는 니시미야라는 캐릭터와 이시다의 양면을 지닌 캐릭터를 만들어 낸 것이다. 되게 복합적으로 문학적 캐릭터의 스토리 관계로 봤을 때는 잘 만들어진 거네요.
참가자 1 : 저 같은 경우에는, 참가자 2께서 하신 말씀을 들으니까 그게 생각이 나네요. 그럴듯한 이유를 대지만 애들이 니시미야를 괴롭히면서 어떤 쾌감을 느꼈을 거라고 생각해요. 왜냐면 이때 아이들은 권력의 맛을 알거든요.
사회자 : 권력의 맛을 안다.
참가자 1 : 네, 맛을 알아요. 자기보다 약한 친구를 밑에 두고 싶어 하면서 자기를 돋보이게 할 수 있는 그런 걸 할 줄 아는 아이들이 있어요. 제때도 그랬었고.
사회자 : 당연히 그렇죠. 고학년 정도만 되어도요.
참가자 1 : 그게 생각이 났고, 아유 힘들어요. 제가 청소년 심리학을 읽고 있는데, 거기에선 이렇게 이야기하더라고요. ‘사회적 기술이 발달한 아이일수록 주모자가 된다.’ 이 작품에서 놀랍게도 사회적 기술이 좋은 건 우에노인 것 같아요. 티 나게 참가하지는 않지만 할 건 다 하잖아요. 욕도 하고. 니시미야 엄마한테 이렇게 낳아서 키우지 말라고 이런 말도 하잖아요. 이시다가 솔직히 불쌍했어요. 어떻게든 인정했고, 그런데 그거 밝혔다는 이유로 오히려 왕따를 당하잖아요. 주변 애들이 더 나쁘다고 봐요. 자기 잘못을 인정 안 하잖아요. 덮어씌우잖아요. 아까 하신 말씀이 이시다뿐만 아니라 이시다와 어울려서 폭력에 같이 참가한 아이들이 일맥상통한다고 저는 생각해요.
사회자 : 우에노라는 아이. 이 아이가, 오전 토론에서는, 이시다 못지않게 니시미야를 끝까지 괴롭히는 아이거든요. 우에노라는 아이가 있어서 이 영화가 성공한 거고, 니시미야가 더 건강해질 수 있었다. 겉으로 봤을 때는 우에노가 끊임없이 니시미야를 괴롭힌 것 같지만 실제로는 우에노가 있어서 겉으로 보이는 피해와 가해 이전에 더 큰 심층의 관계가 밝혀진다는 이야기를 했었거든요.
이유에는, 이건 약간 제 생각도 있었는데, 이게 상당히 재밌는 관점 중의 하나였어요. 니시미야라고 하는 이 아이는 예를 들어서 이름이 서궁(西宮)이에요. 서는 서쪽 서자죠. 궁이라는 말이 별자리 궁자거든요. 우리는 한자 문화권이기 때문에 작품을 쓰다 보면 얘한테 이름을 부여하는 게 상당히 중요하죠. 작가들은 다. 상징성이 엄청 큰 거기 때문에. 그래서 이 <목소리의 형태>를 만든 사람들이 왜 이 여자애한테 서궁, 서쪽 별자리, 서쪽 궁전. 서쪽 별에서 온 사람으로 왜 이름을 정해줬을까. 어떻게 보면 지금 우리들이 얘기한 거는 이쪽 인간계. 그러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이 인간 세상에서 막 피해 입고 가해 받고, 그런 관계로 당연히 볼 수 있는데, 또 한편으로는 이 니시미야는 서쪽별에서 온 여신인데, 저 여성한테 덧씌어 놓았던 저 니시미야라고 하는 캐릭터. 그러니까 지금까지 신화가 만들어 놓은 여성의, 신화화 시킨 여성성에, 어떻게 보면 허울 좋다고도 볼 수도 있는데 모든 걸 수용하고, 목소리가 없는, 여성의 목소리를 빼앗아 버린, 그래서 이시다라고 하는 모든 폭력을 다 수용하고, 모든 걸 다 받아들여야 하고, 하는 그런 어떤 신화화된 여신이 지금 왔다. 근데 그러면 저 니시미야라고 하는 서쪽 별에서 온 여신한테 목소리도 빼앗고 또, 모든 폭력을 수용하게 만드는 저 니시미야라고 하는 여신의 캐릭터는 누가 만든 거냐? (마치) 가스라이팅 당한 것처럼. 그러면 니시미야라고 하는 여신의 캐릭터가 겉으로 보면 되게 희생적이고 헌신적인 것 같지만, 저 신화적 캐릭터가 혹시 남성 문화와 전통 가부장 이런 걸 추상화 시킨 신화의 개념이 아닌가? 그러면 저 니시미야라고 하는 저 아이, 여성 캐릭터, 지금 이 시대에는 저렇게 절대적으로 희생과 헌신으로 온, 극단적으로 목소리를 빼앗긴 저 니시미야의 여신 캐릭터에 대해서 어떻게 바라봐야 할 것이냐? 그리고 저 여신의 캐릭터에 대해서 끊임없이, 이시다라는 아이도 신화적이라고 봐야 하는 거예요. 뭐냐면은 끊임없이 저 여신을 괴롭힌 게 어떻게 보면 남성, 지금까지의 그런 현상. 그러니까 이시다는 단순한 개인이라기보다는 상당히 총체적인 쟤도 또 하나의 신화화된 남성성의 부정적인 면의 하나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우에노라는 아이는 엄청 건강한 아이이다. 거꾸로 보면은. 뭐냐면은 저 남성들이 만들어 놓은 저 여신의 신화성을 끊임없이 깨려고 하고, 끊임없이 괴롭혀서 인간 세상 속에서 저 여신이 인간화되는, 인간 세상에서 살기 위한 조건이 뭐냐,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아이죠. 완전히 새로운 각도에서도 양쪽을 다 토론한 거예요. 현실적인 관계에서 단순 피해와 가해의 입장에서 봤을 때 저 니시미야, 그것도 맞는 이야기이고. 맞고 틀리고의 이야기가 아니죠. 혹시 이 작가들이 이름을 그렇게 붙이고, 이시다(石田)도 일본어로 하면 돌 석자에, 밭 전자죠. 밭 전자가 농경 사회에서 밭을 의미하는 말인데, 사냥한다는 말도 있어요. 돌과 사냥, 이런 남성적인 것을 상징하기도 하고. 그런 쪽으로도 해석해 볼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다면 니시미야는 단순히 피해를 당한 여성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새로운 질문을 던진 거다. 니시미야가 자살을 하려는 의미는 뭘까? 피해를 받은 애가 자존감이 떨어져서, 자기 분노가 가해를 해서 떨어져 죽는 의미로 현실적으로 해석을 할 수도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니시미야가 자살을 하려고 하는 거는 ‘나, 이제 여신 그만할래. 너희들이 덧씌어 놓은 그런 여신 그만할래.’ 혹시 그렇게 해석할 수는 없을까 그런 질문을 또 했던 거거든요. 상당히 양면성이 있는 캐릭터이고, 우리가 토론을 하면서 (이걸 만든) 이 사람들이 나름대로 하나로 모아지지 않는 토론을 만들었어요. 니시미야의 자살 장면이 되게 충격적인데, 거기에 대한 해석이 이 작품에 단순하지 않은 사유를 필요로 하지 않을까?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는데요.
참가자 3 : 제가 영화를 보지 않아서 얘기를 많이 못 하고 있었는데, 다른 일정 때문에 나가봐야 해가지고.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 한마디만 드리고 나가려고 해요. 참가자 1, 2가 말씀하신 것처럼 피해를 받은 아이의 내적인 불행을 생각하게 되었거든요. 제가 아는 어떤 철학 선생님이 계신데, 그 분이 상담사 자격증이 있어서 지역 아이들을 상담을 하는데, 굉장히 부유하고 남 부럽지 않은 환경을 지녔지만 아버지한테 가정 폭력을 오랫동안 당한 아이였던 거예요. 이 아이는 겉으로 보기에는 훌륭하지만 속으로는 너무도 내적인 불행이 강해가지고 자기에게 오는 좋은 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인거에요. 이 아이가 대학생이 되어서 이 선생님하고 연락을 주고받으면서 상담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은 죽겠다고, 심각한 상태가 되어가지고 연락을 했던 거죠. 이 선생님이 나 만나고 죽으라고 급히 달려갔는데, 이 아이가 죽으려고 했던 이유를 보니까. 이 아이가 동아리에서 남자친구를 사귀었는데, 이 친구 못지않게 부유한 집안, 훤칠한 외모, 성격도 좋고. 부모님도 인품이 좋아서 되게 잘 자란 남자친구인거에요. 그런데 이 친구는 자기에 대한 불행감이 너무 높고 이미 자기가 너무나 나쁘기 때문에 그렇게 좋은 훌륭한 사람이 자기에게 호감을 갖는 것을 용납을 못 하고, 이것은 나에게 올 수 있는 행운이 아니다. 그게 너무 괴로웠던 거죠. 그래서 죽음을 결심할 정도로.
제가 영화를 보지 않아서 섣불리 말씀드릴 수 없지만. 니시미야가 자살을 시도한 것이, 이 아이가 전학을 온 거잖아요. 이 학교에서만 고통을 당했을 것인가. 그전에도 고통을 충분히 당했었을 것이고. 참가자 2가 가스라이팅 당한 아이로 이 아이를 보신 것처럼 자신의 내적인 만족감이나 자존감을 조금이라도 얻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이 아이의 내적인 불행이 너무나 커서 그런 고통이 끝나고 새로운 사랑의 도래를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였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심리학을 공부하신 분들이 많이들 얘기를 하시는데, 되게 어려운 이야기지만, 우울증을 앓던 분들이 생을 마감할 때 나에게 가장 행복한 순간에 생을 마감한다고. 그 이유는 내가 괴로운 마음으로 사는데 되게 기분 좋은 날, 그날을 내 마지막 기억으로 남기고 싶은 거죠. 일본 작품이기 때문에 어쩌면 이런 고민 없이 했을 수도 있다. 의미를 전달하고 그런 깊은 의미까지는 생각하지 않고 자극적이고 반전을 위한 반전을 만들기 위해 이런 결론을 낼 수 있지도 않았을까, 이런 생각도 들었어요. 제가 영화를 보지 않아서.
사회자 : 우리는 작가의 길을 걸으려고 하는 사람들이고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어떻게 다양한 캐릭터들을 만들고 우리가 보지 못했던 것들을 조금이라도 보게 하느냐. 다양한 관점을 질문을 던지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제는 아동문학이 그렇게 어리숙하게 단순한 시대가 아니에요. 불행한 사람은 죽는다 하는 너무나 단순한 일차원적인 스토리가 아니고, 참가자 3의 말씀대로 불행해서 죽는 사람도 다양한 방식의 죽음의 선택이 있다.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불행해서만 죽는 게 아니고, 슬픔이 극한에 달해 있는 사람은 조금이라도 기쁜 일이 생기면 그때 오히려 죽음을 선택하는 게 될 수도 있는 거다. 그래서 다양한 죽음에 대한 토론, 다양한 관점의 캐릭터들을 보여주지 않습니까?
아동청소년 문학에서 자해나 죽음이나, 어린아이들에게 상당히 센 문제. 그리고 폭력 같은 것도 지금은 다루어지고 있고요. 어른하고 문화 경계가 없어지는 시대이기 때문에 애들이 강력한 갈등의 환경 속에 던져진 거란 말이죠. 어른들이 겪는 복잡한 관계도 아이들도 똑같이 겪을 수밖에 없는 시대란 말이죠. 그런 면에서 봤을 때 지금 특히, 자해나 죽음의 근원, 이것이 어떤 폭력성과 관련이 되어 있나, 이런 것에 대한 토론은 되게 심도 있는 토론이 필요한 시대이고. 그렇기 때문에 <목소리의 형태>라던가 『햇살이 쏟아졌다』 라던가 이런 것들이 사실은 상당히 좀 토론이 진지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참가자 3과 채팅창으로 인사 나눔) 참가자 1이 모두에게. (채팅창의 문구 읽음) “저는 자기 비하가 심해서 자살하려고 했었는데, 반대의 생각을 가지고 계시다는 걸 알면서 제 감정을 들여다보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참가자 3에게 전달할게요. 참가자 1도 작가의 길을 걸으시는 분이잖아요. 폭력을 당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분노가 있으면서 트라우마가 있죠. 저도 관심이 있어서 트라우마 관련 책들을 읽어보니까 이성적인 의식이 개입하기 이전에 몸이 트라우마 상황 비슷한 게 벌어지면 이성보다 감성이 휩쓸려 가지고 몸이 정지되어서 생각을 할 수 없다, 지적인 직업을 가진 사람도 트라우마 상황과 비슷한 것에 얼어버린다는 거예요. 그것은 이성적인 논리의 문제가 아닌 것이 작동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러한 캐릭터를 글로 그려야 되는 게, 쉬운 일이 아니고, 일차원적으로 다룰 문제가 아니라서 이런 토론이 필요하죠. 참가자 1처럼 본인의 아픔 같은 거를 오픈하시고 글 쓰는 작가로 토론에 들어올 때 일차적으로 본인의 경험이 있으신 분이기 때문에, 오히려 이런 토론을 통해서 자기를 객관적으로 보고, 어떤 또 트라우마는 누구든지 있는 거니까 조금이라도 더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면 좋겠죠.
참가자 1 : 네, 그거 가지고 저는, 아까 말이 잘 안나와가지고 그랬는데요. 어쨌든 이번 토론은 제, 어릴 적 12살의 상처를 치유하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사회자 : 그러면 너무 감사하죠. 반대의 생각을 가지고 계신 분도 계시다는 것을 알고 내 감정을 들여다보는 게 도움이 됐다, 이건 표현이 문학적인 것 같아요. 자기한테만 갇혀 있다가 내가 내 감정을 들여다보는 데 새 잣대를 가지게 될 것 같다, 너무 좋네요. 참가자 3이 이 메시지를 읽으신 것 같아요. 잘됐어요. 토론 시간도 다 되어 가는데, 좋은 토론이 된 것 같아요.
핵심 중의 하나, 니시미야가 왜 자살을 하려고 하느냐, 그거에 대해서. 만화를 끝까지 읽으신 (오전) 참가자 4가 캡처를 해 가지고 고 부분을 찍어서 보내준 게 있었어요. 왜 자살을 하려고 했는가 만화 대사에서 나오는 부분을 읽어보니까, 이게 보통 만화 원작자가 이것을 그렸을 때가 고3 때래요. 2008년인가 그렇고. 영화는 그 이후에 만든 거랍니다. 고등학생이면 어른들의 교양화된 그런 기성의 것들을 뛰어넘으려고 했을 거예요. 만화에 니시미야가 죽으려고 하는 대사 중 섬찟섬찟한 게 나중에 둘이 관계가 좋아지면서도, 니시미야가 멘트 중에 “너 나랑 계속 만나면 너 불행해질 수 있어. 너는 나 만나면 네가 세워놨던 것이 다 붕괴되어 버려.” 애니메이션에서도 ‘내가 변해야 하는데, 나는 변화하기가 힘들어. 애초에 내가 널 사랑하려고 한 게 죽으려고 한 거야.’ 라고 죽음의 이유를 밝히는데, 내 개인적인 의견을 덧붙이면 아까 니시미야가 남자들이 만들어 놓은 수용의 여성성, 그런 신화로 왔기 때문에 남자들이 만들어 놓은 희생과 헌신의 신화된 캐릭터에 남자들이 걸려들면 남자도 불행해지는데. 니시미야가 인간 세상에 오려면 변해야 해, 라는 질문을 던진 게 우에노라고 봐요. 우에노는 선하지도 않고 욕망덩어리인 아이에요. 거꾸로 니시미야는 욕망이 거세된 아이인 거예요. 자기 욕망이 하나도 없는. 그러니까 우에노가 던지는 질문이 대관람차를 타고 돌면서 니시미야 너는 너를 사랑하는 애 같지가 않아, 네가 널 사랑하는 애라면 대항도 하고 싸우기도 하고, 네 욕망을 드러내야 하는데, 너는 네 욕망을 가지고 표현을 좀 해 봐. 목소리를 가져 봐. 누가 너를 그렇게 만든 거야, 라고 질문을 던지는 역할을. 겉으로는 가해자처럼 보이지만 기존의 사회가 선하다고 이름 붙이고 만들어 놓은 여신의 이미지에 대해 질문을 해 봐야 하지 않아? 옛날의 상징 아니야? 우에노라는 인물도 단순히 1차원적으로 보면 안 된다. 왜냐하면 여자 아이가 여자 아이한테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둘은 서로의 그림자가 아닌가. 니시미야의 그림자가 우에노다. 오히려 심하게 이야기하면 그림자가 없는 인간은 보통의 인간이 아니죠. 융이 말하는 통합된 인간이 되려면 우에노의 성격을 가져야만 니시미야가 이 땅에 와서 이시다를 사랑할 수 있다. 니시미야는 또 그걸 알고, 난 변하는 게 너무 힘들어. 날 누가 이렇게 만들었을까. 난 죽었다 태어나야 해. 그걸 고3 학생이 봤다고요. 철학적인 것을. 천재적인가? 좋은 작품은 다층으로 해석이 된다. 이 작품을 통해서도 절실하게 느꼈고. 그래서 『햇살이 쏟아졌다』와 비교하는 이야기도 했죠.
네, 참가자 5께서 (채팅창 읽음) “<목소리의 형태>를 보지는 못했습니다만 청소년들의 자살 행위는 스스로 견디기 힘들어서 선택하는 경우도 있지만 나를 괴롭히거나, 불행하게 만드는 사람들 – 친구, 가족에 대한 – 보복의 형태로 선택하기도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렇겠죠. 보복의 형태도, 하나의 형태겠죠. 자기를 죽임으로써 너, 평생 한 번 괴로워 봐라, 하는 고통을 주기 위해서. 많이들 이야기하죠. 저 얘기도 또 하나의 형태이겠지요.
<목소리의 형태>에서 니시미야가 죽으려고 하는 것은 저런 형태만은 아닌 것 같아요. 저런 형태로 자살하는 아이도 있지만 이 작품 속에서는, 혹시 그런 건 아닌지, 다 복합적으로 들어 있기 때문에, 생각을 한번 해봐야 하겠네요. 참가자 1께서 모두에게, (채팅창 읽음) “저도 우에노라는 여자아이 말은 이해가 가요. 나도 널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지만, 너도 날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잖아, 라는. 다만 요리조리 빠져나가려는 면은 얄미웠어요.” 그렇죠, 인간은 얄미운 점이 다 있죠.
참가자 1 : 제가 느꼈던 얄미움은 그런 얄미움이 아니라 가해를 같이하고 있는 입장에서 보면 피해자의 입장에서 동시에 두 가지를 느껴요. 나는 나를 막 대해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나는 힘이 없어. 내지는 쟤가 부러워요. 또 한 편 얄미워. 저는 그렇게 한꺼번에 세 가지의 감정을 느꼈어요. 저를 괴롭혔던 여자아이 중에 이렇게 사회 기술이 발달한 아이가 있었거든요. 사회 기술이 발달한 아이들이 이런 걸 잘해요. 왜냐하면 상황 판단이 빠르니까 어떻게 하면 자기한테 똥물 안 튀기면서 내가 원하는 걸 이룰지 알거든요. 그거는 교실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선생님 몰래 이루어져야 해요. 걸리면 혼나잖아요. 그래서 감추는 거예요. 어떻게, 사회적 기술로. 상황을 모면하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제가 이 우에노가 참 나쁘다고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저는 이 애니메이션도 그렇지만 여기 『햇살이 쏟아졌다』에서도 선생님이 그 현우의 사실을 모르잖아요. 이 애니메이션에서도 선생님은 아예 방관해 버리잖아요. 저는 그런 모습이 비교가 되면서, 차라리 선생님도 방관을 했으면 어땠을까 싶어요. 알면서도 모르는 척.
『햇살이 쏟아졌다』에서는 아예 모르지만 애니메이션에서는 알면서도 방관했잖아요. 저는 그런 게 좀 더 갈등을 유발하는 게 좀 더 오지 않았을까 싶어요. 또 제가 비교를 하다 보니까, 이 애니메이션도 그렇고 출판놀이 작품에서도 아버지의 부재, 아버지가 안 나와요. 한 가족 부모인데 둘 다 아버지에 대한 결핍이 있잖아요. 결핍이 있는 아이가, 또 다른 아이를 괴롭힌다는 거에 대해서 뭔가 생각해 볼 게 있지 않을까 싶었어요. 보통 다 가진 애들이 좀 더 우월감을 표현하기 위해서 그런 것 같다고 저는 느꼈거든요. 근데 둘 다 아버지가 없잖아요. 이것을 어떻게 봐야할까 싶더라고요. 아버지가 없는 분노를 표출한 건지, 애정에 대한 갈망이 있는 건지. 그런 생각이 저는 좀 들었어요. 어떻게 보시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그런 게 보여서 말씀을 좀 드려봤어요.
사회자 : 지금 <목소리...>도 그렇고 『햇살...』도 그렇고 아버지의 부재인데. 뭐 일부러 작가가 다양한 상상력을 불어넣기 위해서 안 그려줄 때도 있죠. 미스터리를 맞추게 하기 위해서 작가가 안 그려주는 경우도 있고. 그래야 더 많은 다양한 상상력으로 해석이 되니까요.
참가자 1 : 저는 그런 경우도 말씀드린 게 아니라 아이가 부모 중 하나가 없는 결핍에서 오는 분노나 좌절감이 있지 않겠는가 하는 의도로 말씀을 드린 거예요.
사회자 : 어려운 문제인 것 같아요. 신화나 민담에서도 아버지가 없고, 딸만 있는 집안, 아이와 엄마만 있는 집안. 그런 식으로 한 신화들이 많죠. 또 아들만 있는 집안도 있고. 어느 한 쪽이 없죠. 엄마의 부재나 아버지의 부재. 이런 거에서부터 출발하는 신화들이 많지 않습니까, 민담이나. <목소리의 형태>는 아버지의 부재죠. 양쪽 집안 다 아버지가 없어요. 니시미야한테도 아버지가 없고, 이시다도 아버지가 없어요. 그런데 엄마들은 또 아이들을 포기한 집안들이 아니고, 아이에 대해서 끝까지 책임지려고 하는 그런 이야기에요. (참가자 6의 참가 감사 글을 잠시 읽고, 이어서) 참가자 7께서 (채팅창 읽음) “우에노는 금기와 같은 존재일까요? 금기를 뛰어넘지 못하면 소금기둥이 되듯이요. 그러면 신화 속 현우는 우에노인가요?”
우에노라는 아이는, 그와 같은 금기를 뛰어넘지 못하는 일반 세상에서 뺀질뺀질하고, 아주 건방져 보이고, 부정적인 인물로 보이는데, 도덕 관념화된 우리 입장에서 보면요. 재해석해 보면 상당히 자기 욕망에 충실하고, 당당하고 오히려 정글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아이고. 내로남불하는 아이가 아니고, 시원하고 솔직하고 돌직구 같은, 관념이 만들어 놓은 아이하고는 완전히 다른 아이여서요. 여자아이 캐릭터인데, 여자아이한테 씌어져 있던 금기가 완전히 해체되고, 우에노가 니시미야를 공격하는 건 여자아이가 여자아이를 공격하는 건데, 니시미야는 욕망이 거세된 과거의 여인상이고, 우에노는 어떻게 보면 현대철학적인 인물일 수도 있어요. 지금은 자기 욕망을 가진 캐릭터를 중요하게 생각하게 됐죠. 금기를 뛰어넘어야지만 자기 주체가 살아나는데, 그런 면에서 현우라는 아이는 기존의 금기를 깨는, 현우만의 그런 건 과연 뭘까요?
오전 반에서 그런 현우만의 욕망은 드러내지 못했지 않나. 특히 이제 판타지 공간에서 현실 공간으로 나왔을 때 엄마하고의 대결, 여러 가지 면에서 현우가 우에노처럼 뭔가 모성이라고 하는 엄마하고의 대결 의식을 가진, 우에노처럼 뺀질이까지는 아니더라도 자기 욕망을 확 보여줘서 현우가 고정관념화된 전통적인 덧씌어진 부정적인 의미에서의 금기를 확 깨는 고정관념을 깨는, 그런 인물로 멘트가 좀 더 나왔으면 어땠을까, 그런 이야기를 오전에 하더라고요. 오전과 마찬가지로 저녁 토론에도 보신 분들이 던지는 날카로운 질문들이 있어서 재밌네요. 참가자 1께서 좋은 얘기도 해 주셔서, 현실적이고 관념적이지 않고, 토론이요.
참가자 1 : 제가 작품을 보고 현우 이야기 보고, 선생님 말씀도 들어보니까, 저는 어쨌든 피해자이잖아요. 피해자의 삶도 있지만 가해자, 저를 괴롭혔던 애들은 모르겠어요. 자살을 했든, 모르겠어요, 한 아이의 엄마가 됐든, 아빠가 됐든 저는 잘 모르지만. 삶이 연결망이 다 이어져 있을 거라고 생각이 들어요. 그 애니메이션 결말에서도 저는 솔직한 얘기로 어떻게 봤냐면, 이시다가 죄책감을 갖고 있지만 자기 죄책감이 100%라면 인간은 자기 고통이 먼저인 존재에요. 자기를 먼저 배려하지, 철저히 상대방을 위해서는 배려하지는 않는다고요. 그래서, 이시다의 감정, 자기 괴로움의 감정이 100%였다면, 니시미야를 괴롭힌 죄책감은 80%라고, 표현이 안 됐다고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결말에서 이시다가 친구들하고 우정의 화해를 하면서 부탁을 하잖아요. 정작 니시미야가 변두리에 있는 장식물처럼 연출이 돼서 기분이 나빴는데. 생각을 해 보면 피해자의 주인공이 니시미야가 아니다. 결론은 이거죠. 제가 관점을 너무 피해자한테만 봤던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제가. 새벽까지만 해도 어떻게 피해 입은 사람한테 이렇게 할 수 있냐, 오늘 새벽까지만 해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제 감정을 들여다보는데, 오늘 여기에서 선생님들께서 이런저런 이야기들도 많이 해 주셨고, 제가 아, 그렇게 봐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고. <목소리의 형태>를 곱씹어보니 알겠어요. 쇼야와 쇼코는 서로의 상처를 보듬는 치유 관계이고 화합이며, 쇼코는 쇼야의 구원자라는 걸. 저도 이제 살아야 하니까. 감정을 추스르고 나아가기 위해서는 정리하고 나아갈 필요가 있어서 제가. 쉽진 않아요. 이시다 아이가 연결된 삶의 연결망은 내가 못 봤다. 너무, 너 못된 아이야. 평생 나쁜 아이로 남아야 해. 어쩌면 제가 가지고 있는 제 개인의 감정일 수 있어요. 아, 예. 그걸 제가 깨는 계기가 돼서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사회자 : 아, 그렇군요. 그러니까, 지금 참가자 1께서 하시는 말씀이 너무 멋지다는 생각이 드는 게 뭐냐면은 본인의 경험도 100% 인정하고, 소중한 거고 그다음에 작가의 길을 걷는 사람은 다양한 캐릭터 연기를 해야 하는 사람이란 말이죠. 그러니까 다양한 관계망 속에서 또 봐야만 한단 말이죠. 그러니까 잘못하다가는 자기 개인의 감정만 100% 사로잡혀 있으면 다양한 연기를 할 때, 그 인간의 다양한 심층을 가져와서 관계를 엮고, 스토리를 짜고 해서 좀 더 다양한 캐릭터들하고 소통하는데, 아픔이 있지만은 아픔을 조금이라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눈을 기를 때 작품도 폭 넓어 질 수 있지 않나.
그런데 지금 참가자 1께서 1차 토론 때도 『햇살이 쏟아졌다』 가 가지고 있는 불편함에 대해서 많은 말씀 해주셨는데, 당연한 말씀이었고, <목소리의 형태> 같은 질문을 던져 주셨거든요 그래서, 제가 바로 봤어요. 바로 보고, 아, 이거 참 좋은 작품을 너무 어울리게 던져줬다. 그래서 토론할 문제가 너무 많다. 인터넷에 리뷰가 올라오는 건 단편적이에요. 우리가 이야기하는 토론 내용은 없고, 단편적인 것뿐인데, 우리의 토론은 깊이가 있는 것 같네요. 그리고 참가자 1처럼 개인 경험이 있는 분들이 같이 토론하면서 자기 자신의 내면을 새롭게 보고 그것이 앞으로 본인의 삶도 그렇고, 작가의 길을 걷는데, 이제는 좀 더 열린 캐릭터, 다양한 캐릭터, 다양한 심층의 언어, 다양한 양면선을 지닌 캐릭터들을 가지고 와서 막 좀 그릴 수 있으면은 어, 너무너무 좋겠다는 생각이 들고. 참가자 1께서 양민아 작가한테도 감사한 마음이 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참가자 1 : 제가 삼십 년간 피해왔는데, 이제, 드디어 직면하게 되네요. 제가 사실 상담도 받고 있어요. 상담도 받고 있고, 그전에는 내가 더는 이 상처에 갇혀 살면 안 되겠다 생각도 했고. 이 작품 『햇살이 쏟아졌다』가 나한테 불편한 건 어떻게 보면 극복해야 할 벽이기 때문에 내가 불편할 수 있다.
사회자 : (참여자 6의 채팅창 읽음) 문학이라는 것은 개인, 개인의 작은 경험을 아주 소중하게 존중하면서 다양한 인간들이 가질 수 있는 보편적 인간까지 나갈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그 보편화된 인간의 감성이라던가 거기로 나아가는데, 개인 개인 만의 개별화된 감정, 아픔을 무시하는 사람은 훈화하는 이야기나 쓸 수 있는 거죠.
참가자 1처럼 개인의 아픔, 당신만의 아픔인 거 아냐, 그게 아니죠. 거기서부터 우리가 탐구를 시작해서, 존재라는 거에 대해서까지 확장을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작가들은 개인, 개인의 아픔에 대해서 다 섬세하게 들어줄 줄 알고 반응할 줄 알고, 인물 인물들 사이에서 공통의 것들을 찾아낼 줄도 알고.
(생략, 토론을 정리하는 말. 양민아 작가에게 감사 인사 전하고, 토론자들끼리 서로 인사 나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