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자습 시간에 아이들과 마주하게 되면 나는 늘 답답한 기분을 지울 수 없다. 모처럼 주어진 자습시간이니 공부를 열심히 해서 모자라는 부분을 보충하는 기회로 활용하려니 생각하지만, 아이들은 그렇지 않다. 서로 웃고 떠들고, 아예 업드려 자는 아이들도 많다. 하긴 이런 점들이 아이들 편에 서면 이해 되지 못할 것도 아니다. 답답하고 지루한 수업 시간과, 학교 생활에서 가뭄에 콩나듯 맞는 자습이니 그때라도 숨 한 번 몰아쉬고 마음 편히 가지기에 적당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모자란 잠을 보충하기도 하고, 친구들과 서로의 속 얘기를 터놓고 싶은 것도 당연지사다. 그런데 어쩌다 무언가를 열심히 읽고 있는 아이들을 만나는 경우도 있다. 비록 교과서는 아니더라도 자신이 좋아하는 책을 열심히 읽고 있다는 태도만이라도 반가워 가까이 다가가 책을 들춰보려 하면, 그런 아이들은 얼른 책을 감추어 버리기 일쑤다. "무슨 책인데 감추니? 어디 한 번 보자." 내가 굳이 보자고 하면 아이들이 마지 못해 꺼내놓는 책은 대개가 무협지거나 무슨 환타지가 어떻고 하는 공상 소설이다. 마귀를 쫒아버린다는 이야기를 중언부언 늘어놓은 것도 있다. 여학생들이 보는 책들 중에는 하이틴 로맨스도 있다. 이런 책들은 대개 그 이야기 전개 방식이나 분위기가 일본에 근거를 두고 있는 통속적인 만화와 비슷하다. 황당한 이야기에 터무니 없는 줄거리, 비현실적인 소재와 등장 인물들은 읽는 사람의 생각을 현실로부터 공상으로 달음질치게 만든다. 현실에 뿌리 내리지 못한 공상이야말로 독자를 근거 없는 낙관이나 비관에 빠지게 만들기 십상이다. 이는 마치 달착지근한 사탕의 맛만 믿고 마구 사탕을 먹도록하여 결국에는 이가 다 썪어버리고 몸에 이상이 오게 만드는 것과 같다. 요즘 청소년들은 왜 그런 책들을 즐겨 읽는 것일까? 신세대를 이른바 비디오 세대, 영상 세대라고 한다. 태어나서부터 텔레비젼이나 컴퓨터, 비디오와 같은 수많은 영상 매체에 익숙해져 온 신세대의 삶은 "읽기" 보다 "보기"에 익숙하기 마련이다. 사실 영화와 같은 장르야말로 "보기"에 가장 적당하다. 그저 돈을 지불하고 표를 사서 앉아 있기만 하면, 화면 가득 배우가 등장하고, 배경이 아름답게 펼쳐지고, 이야기가 전개된다. 독자(관객)은 그저 앉아서 바라보고 있기만 하면 된다. 고민이라곤 어느 영화를 볼 것인가를 선택하는데서 그친다. 그러나 책은 다르다. 우선 영화보다도 훨씬 종류가 다양한 책 중에서 하나를 선택한다는 것도 고민이고, 돈을 지불하고 책을 산 뒤에도 자신의 노력을 들여 읽어야 한다. 지루하고 재미 없는 장면에서도 눈을 뗄 수가 없다. 영화처럼 감각적으로 영상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한참 읽다가 앞부분을 기억하지 못하면 되돌아가 다시 읽어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니 책은 "보는" 것이 아니라 "읽는" 것일 수밖에 없다. 요즘 영화나 연극 같은 갈래들도 "본다"고 하지 않고 "읽는다"고 한다. 특히 이들 갈래의 평을 쓰는 사람들 중에는 "영화 읽기"나 "연극 읽기"와 같은 용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보기"가 독자(관객)을 수동적 존재로 파악하는 용어라면, "읽기"는 독자(관객)의 능동성을 강조하는 말이다. 독자(관객)이 대상이 되는 문화적 갈래들에 대해 나름대로의 의미와 기준을 가지고 감상하고 평가하는 것이 바로 "읽기"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한 청소년들의 일반적 독서 경향(감각적이거나 통속적, 비현실적인 이야기)은 바로 "보기"가 중심인 세대의 특징이다. "보기"가 중심인 책들은 빠른 장면 전개와 감각적인 표현이 중심을 이룬다. 여기에 현실에 바탕을 두지 않은, 그야말로 공상적이거나 환상적인 이야기들이 덧붙여 진다. 반면 "읽기"가 중심인 책은 문학적 전통에 충실하다. 인물과 인물간의 관계나 이야기의 구성도 치밀하게 계산되어 있고, 개성적인 인물이 등장하며, 묘사나 전개 또한 상호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런 이야기들은 생각하지 않고는 읽기가 곤란하다. "읽기"란 "생각하기"를 전제로 한다. 생각은 인간의 삶을 창조적으로 만든다. 그래서 "보는" 책보다는 "읽는" 책이 더 좋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떤 책을 읽을 것인가? 이에 대한 대답은 이미 앞에서 다 밝혀 졌다. "보는" 책보다는 "읽는" 책이 좋다. 읽는다는 것은 자신의 판단과 생각으로 책을 본다는 말이다. 물론 재미 없는 책은 책에 대한 독자의 접근을 차단하므로 문제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재미를 그냥 말초적인 재미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말초적인 재미는 재미라기보다 흥미에 가깝다. 진정한 재미는 자신과의 공감을 형성하고, 그를 통해 우리의 삶을 한단계 높게 만들도록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자극적인 맛이 깊이있는 맛에 미치지 못하듯, 재미도 씹으면 씹을수록 깊이있는 맛이 드러나야 한다. 그러나 아직 책에 대해 익숙하지 못한 청소년들이 그런 깊이있는 맛을 지닌 책을 분별해 내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이미 청소년 시기를 거쳐 온 어른들이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좋은 책으로 선정해 놓은 것들을 참고하는 것이 좋다. 이른바 고전이나 명작이라고 하는 작품들이 그것이다. 믿을 만한 출판사에서 시리즈로 출간된 세계 문학 전집들을 찾아 보는 것이 좋다. 특히 토스토예프스키나 톨스토이 같은 작가들의 작품은 세계 문학사상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받는 만큼 찾아 읽어야 한다. 우리 문학으로는 현진건이나 염상섭, 김유정, 채만식의 작품들이 우선 읽기에 적당하다. 이들은 식민지 시대 비판적 사실주의의 대표적 작가로 손꼽힌다. 아울러 조명희나 이기영의 작품들도 카프 작품으로 읽어두는 것이 좋다. 시간이 된다면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으로부터 시작되는 대하소설의 세계에 빠져보는 것도 좋다. 황석영의 <장길산>, 박경리의 <토지>, 조정래의 <태백산맥>, <아리랑>이 대하소설의 줄기를 잇고 있다. 시는 가능하면 우리의 시사(詩史)를 총괄하고 있는 선집들을 찾아 개별 시인의 세계를 감상해 보는 것도 좋은 독서 방향이다.
어떻게 읽을까
자, 이제 좋은 책을 선택했다고 치자. 그러면 그 책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때로는 읽다가 재미 없다고 팽개쳐 버리기도 하고, 억지로 다 읽기는 하지만 너무 어려워 내용을 하나도 모르는 경우도 있다. 어떻게 읽느냐 하는 것은 문학 감상에 관한 문제다. 감상은 작품을 읽는 사람의 느낌과 관련이 있다. 그 느낌이 얼마나 객관적인가의 문제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작가가 의도한 바를 완전하게 독자가 읽어 낼 수는 없다. 작가가 작품을 생산해 내고, 독자가 그것을 읽는다는 것은 작가와 독자가 서로 대화를 나누는 것과 같다. 대화는 서로 상대의 마음을 읽어내고 이해하는 데서 시작한다. 그래서 작품을 읽을 때, 작가의 생각을 이해하는 열린 마음 자세를 갖는 것이 감상의 기본이 된다. 이제 작품은 어떤 방법으로 감상해야 할 것인지 알아보자. 작품의 올바른 이해를 위해 우리는 먼저 독자(감상자)와 대상(작품)의 관계에 대하여 알아볼 필요가 있다. 문학은 작가, 작품, 작품이 다루고 있는 세계(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독자인 우리들은 이와같은 것들을 읽고 감상하는 존재다. 가령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을 예로 들어보자. 이 작품을 쓴 홍명희라는 작가가 존재하고, 작품인 <임꺽정>이 있고, 그 내용은 조선시대 신분제 속에서 백정 계급을 중심으로 민중적 세계를 이룩하려는 싸움을 담아내고 있다. 홍명희는 "작가"이고, <임꺽정>은 "작품"이며, 백정 계급을 통해 민중적 세계를 이룩하려는 것은 "내용"이다. 우리가 <임꺽정>이라는 소설을 올바로 이해하고 감상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세 측면을 바로 살펴보아야 한다. 먼저 작가와 작품의 관계를 따져보자. 작가는 작품을 쓴 사람이다. 그러니 작품 속에는 작가의 생각이 담겨 있을 수밖에 없다. 작품에 담겨진 세계관이나 철학이 작가의 그것을 반영하는 것은 당연하다. <홍길동전>을 쓴 허균은 서자 출신이 아니다. 그러나 허균은 왜 서자 출신의 주인공인 홍길동을 내세웠을까? 허균의 스승은 손곡 이달이다. 허균은 스승인 이달의 문학과 사상에 큰 영향을 받았다. 그런 스승 이달이 바로 서자 출신이었던 것이다. 당나라 시인들에 필적할만큼 뛰어난 세명의 시인 중 하나(삼당시인)로 평가받았던 스승 이달의 사상적 영향 속에서 허균은 <홍길동전>이라는 적서차별의 내용을 담아낸 소설을 쓸 수 있었던 것이다. <임꺽정>도 마찬가지다. 벽초 홍명희는 충북 괴산의 명문 사대부 집안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한학에 뛰어난 재주를 보인 그는 신학문에도 열중하여 동경 유학까지 다녀왔다. 그의 부친은 경술 국치에 항의하여 목숨을 끊었으며, 부친의 삼년상을 마친 뒤 그는 독립 운동에 본격적으로 투신한다. 신간회 발기인으로 일하다 광주학생사건과 관련되어 옥에 갇혀 4년간 옥살이를 했다. 그는 특히 자신의 전 재산을 소작인들과 집안 하인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기도 한 사람이었다. 이와같은 그의 내력은 <임꺽정>이라는 소설 창작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계급의식의 초월이 조선시대 천민인 백정 출신 임꺽정을 긍정적 인물로 그릴 수 있었고, 신간회를 비롯하여 독립 운동을 했던 경험들이, 현실적 제약을 극복하는 또 다른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궁중비사 중심의 역사소설이 아닌 민중 중심의 역사 소설을 쓰게 한 것이다. 이처럼 작가의 의식과 작품의 관계를 따져보는 것도 작품 이해의 한 방법이다. 작가에 대한 이해야말로 작품의 이해에 접근하는 손쉬운 통로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문학 연구에서는 이와같은 연구 방법을 표현론, 혹은 역사.전기적 방법?繭箚? 한다. 다음은 작품과 그 작품이 창작된 당시의 상황을 연결시켜 감상하는 방법이 있다. 박지원의 <허생전(許生傳)>을 예로 들어보자. <허생전>은 십년을 기약하고 독서에만 전심하던 허생이 아내의 잔소리에 책읽기를 그만두고 당시 장안의 최고 부자였던 변씨에게 돈 만냥을 빌어 물건을 매점매석하여 큰 돈을 번다는 이야기다. 이 작품이 창작된 조선 후기는 신분제의 붕괴와 함께 도시가 이루어지고, 이에 따라 상업 자본이 형성되던 시기였다. <허생전>은 이런 시대적 상황 속에서 그 전까지는 천시받던 상업의 중요성(중상주의)을 소설을 통해 드러낸 작품이다. 어떤 문학 작품이든 그 작품이 창작된 시대의 상황을 반영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에서(이를 문학 연구로는 반영론이라고 한다) 본다면, 작품이 창작된 시대의 상황과 작품을 관련시켜 감상하는 것 또한 문학 이해의 한 통로가 될 것이다. 다음은 한 작품을 민족의 문학 전통과 관련시켜 이해하는 방법도 있다. 어느 시기에 창작된 문학 작품이든간에 모든 문학 작품은 전시대의 문학 전통을 이어받고 있고, 또 다른 시대의 문학 전통의 뿌리가 된다는 점에서 이러한 감상법 또한 의미있다. 김소월의 시가 그의 스승이었던 김억의 민요시에서 영향을 받았으며, 그 이전에 민족의 전통 운문이었던 민요의 형식과 표현법, 주제 형상화 방법 등을 이어받고 있다는 점을 이해한다면, 김소월의 시 이해에 보다 근접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의 감상법이 주로 작품과 그 작품의 외적 관계에 치중한 방법이었다면, 작품 자체만을 감상의 대상으로 삼는 방법도 있다. 작품은 그 자체로 독립되고 완전한 개체이며, 내적인 유기성을 지니고 있다는 전제에서 이 감상법은 출발한다. 문학 비평에서 신비평이라고 하는 방법이 바로 이것이다. 이 감상은 작품의 형식이나 구조, 작품에 쓰인 언어나 심상들이 내적으로 어떻게 연결되고 있으며,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작품 자체의 분석을 통해 이해해 내는 방법이다. 가령 박두진의 <해>를 예로 들어보자.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맑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 넘어 산 넘어서 어둠을 살라먹고, 산 넘어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먹고, 이글 이글 애띈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달밤이 싫여, 달밤이 싫여, 눈물 같은 골짜기에 달밤이 싫여, 아무도 없는 뜰에 달밤이 나는 싫여........,(이하 생략)
이 시는 반복을 주된 수사법으로 사용하고 있다. 반복은 강조를 위한 것이며, 그 강조는 해의 솟아오름을 열망하고 있다. 산문시의 형식이지만 운율은 이음보가 중첩된 사음보 형식이다. 이음보는 경쾌함을 의미한다. 그 경쾌함은 해의 솟아오름에 대한 열망의 표현이다. 마찬가지로 2연의 달밤이 싫다는 반복 역시 반복을 통해 어둠의 대표로 상징되는 달밤에 대한 거부를 강조한다. 어둠에 대한 거부와 해에 대한 열망을 이 시에서는 운율과 수사법을 통해 극대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작품에 쓰인 언어와 표현 방법 등을 통해 파악하고 이해하는 것도 작품 감상의 한 방법이다. 이런 감상법은 작품을 꼼꼼하고 치밀하게 읽는 데서 출발한다.
감상 방법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열린 마음
이상에서 우리는 작품을 읽는 방법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러나 이들 방법은 문학 연구를 원용한 감상방법의 일부분일 뿐이다. 이 밖에도 실제적으로 감상문을 쓰거나 독후감을 쓰는 것도 있고, 다른 친구들과 함께 읽고 토론해 보는 것도 작품 감상의 중요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어떤 문학 작품을 대했을 때, 제일 중요한 것은 어떤 방법으로 읽을 것인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작품에서 나와 공감을 나눌 수 있는 것들이 무엇인가를 찾는 것이다. 그 공감의 부분을 통해 작품 전체에 접근하는 통로가 열리게 될 것이고, 그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재미와 의미를 버무려 작품을 읽을 줄 아는 열린 마음을 지닐 수 있기 때문이다. 열린 마음이야말로 문학 작품을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읽게" 만드는 가장 훌륭한 독서의 도구다.
첫댓글 열린 마음은 안들어가는곳이 없네 가장 훌륭한 독서의 방법 , 알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