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은 높은 산이 없으면서도 많은 물이 흘러 넓은 평야를 지닌 곳이다. 따라서 금강을 끼고 옛 포구가 형성됐으며, 내륙으로는 아늑한 평야를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돼 웅포, 성당, 금마, 왕궁, 여산, 용안 등이 그곳이다. 이들은 예외 없이 농사를 주업으로 살아왔는데, 힘든 일을 하면서 시름을 달래고 흥을 돋우는 방법으로 노동요를 불렀다.
노동요는 길쌈을 하면서, 김을 매면서, 땅을 파면서, 모를 내면서, 보리를 타작하면서, 콩을 수확하면서 부르는 등 농업 전반에 걸쳐 적용됐다. 특히 지게를 지고 등짐을 져 나르면서 지게목발을 두드리는 노동요는 전국적으로 익산에서만 전해오고 있어 귀중한 유산으로 남아 있다.
다른 지방에서는 지게를 지고 율동을 하거나 지게와 관련된 노동요를 별도로 부르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지게를 통한 율동과 노래가 함께 어우러지는 것은 익산목발노래 뿐인 것이다. 이런 점을 들어 전라북도에서는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1호’로 1973년 6월 30일에 지정하기도 했다.
지난달 30일로 40주년이 되는 날이었지만 조용하게 지나 '익산목발노래'가 무엇이고 보존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조현숙(67세) 보존회장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조현숙 회장은 "특정한 여러 사람이 모여야만 형성되는 다른 문화재와 달리 익산목발노래는 노래를 부르는 사람과 받고 매기는 사람만 있으면 가능하다"며 "원래 목발노래는 초동이 짐을 지고 내려오다가 혹은 동료를 만나 같이 쉬면서 부르던 노래이기 때문에 특정 인원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특히 "익산목발노래는 익산 북부권에 널리 퍼져 있었으나, 삼기에 거주하던 주민들이 재현을 한 후 문화재로 지정을 받았기에 일반인에게는 삼기목발노래로 불리던 때도 있었지만 정식명칭은 익산을 대표하는 노동요라 해 익산목발노래로 불려지고 있다"고 밝혔다.
현재 익산목발노래는 집단가무악으로 창자 1명과 받고 매기는 사람 30명, 그리고 율동을 선도하는 풍물단 3명, 소품 3명으로 모두 37명이면 가능하다. 그러나 실제로는 역할이 다양하지 않아 20명 이내의 소규모로도 충분하다는 장점이 있다.
목발노래에서 불리는 곡은 모두 9곡으로 처음에 나오는 새타령을 비롯해 육자백이, 자진육자백이, 흥타령, 등짐노래, 목발노래, 작대기타령, 둥당기타령이 있고, 마지막으로 상사소리로 이어진다.
그러나 곡조 역시 상황에 맞춰 줄이거나 생략할 수 있는 부분들이 많이 있다. 특히 요즘처럼 농촌인구의 감소와 노동인력의 고령화로 인해 절대인원이 부족한 경우에는 별도의 프로그램을 만들기도 한다는 것.
조 회장은 "1973년 6월 30일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받은 후 많은 활동을 통해 각광을 받았으나, 예능보유자가 사망한 이후 2005년 6월 12일 문화재에서 해제되는 슬픔도 겪었다"며 "그러다가 뜻있는 회원들의 노력으로 2009년 3월에 문화재 재지정준비위원회가 결성, 전주세계소리축제 및 지평선축제 등에서 시연하는 한편, 언론 등을 통해 소개되는 등 재기를 위한 몸부림을 펼친 결과로 2012년 4월 27일 재지정 받는 쾌거를 이뤄 내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러한 아픔을 겪은 익산목발노래의 소중한 문화를 살리고 이어가기 위해 조 회장은 자신의 사비를 털어 약 4년 전부터 운영하고 있다.
현재 보존회사무실은 함라에 두고 있는데, 이는 목발노래가 함라를 중심으로 재현됐다는 점이 가장 큰 요인이다. 무엇보다도 옛 회원들을 규합하고 수없이 많은 연습하는 과정에 소요되는 모든 비용을 넉넉하지 못한 함라출신의 조 회장이 개인 집을 팔아 충당한 것이다.
그런데 현 사무실과 연습실은 말 그대로 귀신(?)이 나올 지경이다. 많은 비로 인해 연습실의 천장이 젖었고 건물 마저 너무나 낡아 젊은 전수생들이 찾았다가 이내 돌아가는 모습도 지켜봐야 했다는 조 회장.
2~3년 전까지만 해도 전국에 있는 대학교 대학생들이 이곳을 찾아 익산목발노래를 전수받겠다고 다녀간 흔적들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사무실 입구에 있었던 빛바랜 사진을 보니, 1994년에도 대학생들이 찾아와 공부한 흔적도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조 회장은 더 나은 조건과 전국유일의 익산 문화를 살리고 더 많은 후학들을 키워내고자 인근에 1782㎡의 부지를 구입했으나 건물을 지을 자금이 마련되지 않아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
조 회장은 "제가 올해 67세로 그 어떤 부귀나 영화를 누리겠는가?"라며 "함라에서 태어나 전국유일 익산의 문화인 익산목발노래를 후손들에게 전하고자 또한 우리의 문화를 지켜 명맥을 이어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쏟아 붓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그만큼 가치가 있고 우리 문화를 소중하게 여길 줄 아는 학생들에게 더 좋은 환경에서 연습할 수 있는 전수관을 지을 수만 있다면 1782㎡의 부지 중 1108㎡를 기부할 것이다"고 말했다.
조 회장은 현 교육에 대해 안타까움을 드러내기도 했다. "국악에서 농요가 차지하는 비중이 미미한 것은 차치하고라도 소프라노보다 높은 음을 내야 하는 곡은 일반인이 범접하기 어려운 장애물이지만 그보다 더 힘든 것은 부모나 학생들이 농요를 잘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점으로 심지어 학교에서조차 성적위주의 교육편성에 의해 민요를 멀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익산목발노래보존회에서는 이에 굴하지 않고 지난해 8월 11일 제1회 전국학생 농요부르기대회를 개최해 농요에 대한 거부감을 깨트리는 한편, 익산과 목발노래를 홍보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특히 이 행사를 위해 기관으로부터 단 한 푼의 지원도 받지 않고 순수하게 보존회의 힘만으로 개최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한다고 해도 전혀 아깝지 않다.
올해 역시 오는 20일(토) 전주 전통문화관에서 오전 10시부터 제2회 대회를 개최한다. 특히 시민과 민요의 만남이라는 컨셉을 추가해 국악과 현대악의 조화, 국악인이 아닌 일반 학생들의 민요에 대한 도전 등 여러 순서를 마련 중에 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의 결실이 더욱 빛을 낼 수 있는 것은 익산목발노래의 교육장(전수관)이 건립되는 것이다. 현재 사용 중인 사무실과 연습장은 조 회장이 개인적으로 임차한 건물이기에 임차료는 물론 일반관리비와 사용료 그리고 수리비까지 직접 해결하는 실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다 좋은 시설의 청사진을 그리며 전수관 건립용 부지를 이미 확보해 놓기도 했다.
이런 현실을 모르는 전국의 대학생들이 전수를 받고자 해마다 찾아오고는 있지만 열악한 환경을 보고 그냥 돌아가고 있는 점은 안타까운 일이다. 아직도 기관에서는 예산 부족으로 난색을 표하고 있어 쉽지는 않다. 그렇다고 우리 문화도 같이 쉬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문화가 없는 민족, 문화가 사라진 나라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특히 전국 어디에도 없는 익산만이 가지고 있는 소중하고 가치있는 이 문화가 이어질 수 있도록 많은 관심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