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한복음 5장 1-5절에 “유대인들의 명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으나. 히브리어로 ‘베데스다’라고 이름이 붙은 연못이 그 양의 것 곁에 있으며.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는 병든 자들, 눈먼 자, 절름발이가 드러누웠으니. 이는 천사가 시간을 따라 그 연못 안에 내려왔으며 물이 동요하였으므로 물의 동요 후 그 먼저 들어간 자는 병에 붙잡힌 바에서 건강하게 됨이나. 거기 38년을 그 연약 안에 가지는 어떤 사람이 있었고”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보통 갈릴리에 계셨는데, 유대인들의 명절이 되어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요 5:1). 예루살렘에 히브리어로 ‘베데스다’라고 이름이 붙은 연못이 있었습니다(요 5:2). 옆에 있는 행각들에 병든 자들, 눈먼 자, 절름발이가 드러누웠습니다. 그들은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며 드러누웠습니다(요 5:3). 그 연못에 가끔 가다가 천사가 내려와서 물을 움직였고, 제일 먼저 들어간 자는 건강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요 5:4). 거기 38년을 그 연약 때문에 드러누운 어떤 자가 있었습니다(요 5:5).
1. 예수님께서는 건강하게 되기에 원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요한복음 5장 6절에 “건강하게 되기에 원하시오?”라고 물으셨습니다.
드러누운 이를 보셨고 이미 많은 기간을 가지는 것을 아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당신은 건강하게 되기에 원하시오?”라고 물으셨습니다.
힘이 없는 사람이 예수님께 대답하였기를 “물이 어지럽힘을 받는 때에 나를 그 연못 안으로 던졌기 위하여 사람을 내가 가지지 않았으나 내가 오는 바 안에 다른 자가 나의 앞에 내려갑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물이 움직일 때까지 기다리실 필요가 없으신데, 예수님께서는 천사들의 주(主)시기에 천사들의 도움이 필요 없으십니다.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당신의 침대를 들어 올리고 돌아다니시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5:8).
요한복음 5장 9절에 “곧 그 사람이 건강하게 되고 그가 돌아다녔으나, 이 날 안에 안식일인지라”고 하였습니다.
그동안 움직일 힘도 없어서 누워 있던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자기 침대를 들어 올리고 돌아다녔습니다. 오늘날 흔히 치유 사역자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손O철 장로 같은 사람은 치유 집회에 휠체어 타고 온 사람에게 강당에 나오게 한 후에 믿음으로 일어나라고 말합니다.
그 사람은 아픔에도 불구하고 죽을힘을 다해서 안간힘으로 겨우 일어나면, 손O철 장로는 ‘아 하나님 고쳐 주셨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의 박수를 올려 드립시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휠체어 타고 온 사람은 집에 돌아갈 때에 타시 휠체어 타고 절망감 속에 돌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치유사역자들은 치료하기 전에 “믿음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명령하며 치유사역자들은 휠체어에 타고 온 사람을 향해 일어날 것을 명령합니다. 그가 다리에 없어서 일어나지 못하고 휠체어를 몸을 의지하고 왔습니다. 그런데도 치유사역자들은 병자들에게 믿음으로 일어나라고 명령합니다. 환자는 젖 먹던 힘까지 다하여 휠체어에서 일어나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그리하여 겨우 그의 무릎이 펴졌습니다. 그것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은 박수를 치며 걸으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 환자가 초인적인 의지력으로 한 두 걸음 옮기면 환호성과 함께 박수를 치면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고쳐주셨으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라고 말합니다. 그가 정말 고침 받은 것입니까? 그 순간이 지나면 겨우 일어났던 무릎이 그를 지탱하지 못하고 돌아가는 때에는 다시 휠체어에 아픈 몸을 싣고서 절망감에 싸여 돌아갑니다. 치유사역자들은 예수님과 반대로 행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다닐 수 있게 고치신 후에 다니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 병자는 먼저 고침을 받아 그 침대를 들어 올리고 다닐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순종할 수 있는 힘을 주시고서 순종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날 치유사역자들과는 정반대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먼저 일어날 수 있는 힘을 주시고 그 다음에 순종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먼저 일어나 자기 침대를 들어 올리고 돌아다닐 수 있는 힘을 주신 후에 “침대를 들어 올리고 돌아다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유대인들이 그 치료함을 받은 자에게 말하기를 “안식일에 침대를 들어 올렸기가 가능하지 않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지 못하는데 당신이 침대를 들어 올리고 돌아다니는 것은 하면 안 되는 일입니다.
그가 대답하였기를 “건강한 나를 만든 저 사람이 나에게 명령하였기를 ‘그 침대를 들어 올리고 돌아다니시오’라고 하였노라.”라고 하였습니다.
이것들 후에 예수께서 그를 성전 안에 만나시고 그에게 말씀하셨기를, “당신은 건강하게 되었으며, 어떤 더 나쁜 것이 당신에게 생기지 않도록 지금부터 죄를 범하지 않도록 하시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5:14).
그가 유대인들에게 건강하게 만든 사람이 ‘예수’라고 보고하였습니다.
이것 때문에 그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박해하였으니, 이것들을 안식일에 그가 행하셨기(was doing) 때문입니다(요 5:16).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대답하셨기를(answered) “나의 아버지께서 지금까지 일하시고 나도 일하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5:17).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말씀하시며 ‘하나님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하노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 때문에 더욱더 그를 그 유대인들이 죽이기에 찾았으니, 그가 그 안식일을 오직 깨뜨리지(was breaking) 아니하였으나 그가 자기 자신의 아버지로서 하나님을 이야기하여서(was calling) 하나님께 똑같은 그 자신을 만들고 있기 때문입니다(요 5:18).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자신을 동등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말을 신성모독(神聖冒瀆)으로 들었습니다.
2.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바들을 그 아들도 행하십니다.
요한복음 5장 19-23절에 “그 아들이 그 자신에서부터 행할 수 없으니 이는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바들을 이것들을 그 아들도 그렇게 행함이니. 이는 아버지께서 그 아들을 좋아하시고(loves), 모든 것과 이것들보다 더 큰일들을 보여주시니 기이히 여기기 위해서니. 이는 마치 그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키시고 생명을 주시는 것처럼 이런 방식에 그 아들 또한 그가 원하는 바들을 생명을 주는 것 때문이니. 그 아버지께서 판단하지 않으시나 모든 판단을 그 아들에게 주셨음이니. 모든 자들이 아버지를 존경하는 것에 따라 그 아들을 존경하기 위해서라 그 아들을 존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아버지를 존경하지 아니하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그 아들을 좋아하시고 모든 것과 더 큰일을 보여주십니다.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것을 그 아들도 그와 똑같이 행하십니다(요 5:19).
아버지 하나님께서 이 병자를 고치시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 병자를 고쳐 주신 것입니다.
그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키시고 생명을 주시는(give) 분이신데 그 아들도 그가 원하시는 자들에게 생명을 주시기 때문입니다(요 5:21). 천사들을 만드시고 하늘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땅에 기어 다니는 것과 사람을 만드시고 생명을 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는 분이시며(신 32:39), 그는 죽이시고 살리시며 내려가게 하시고 올라오게 하십니다(삼상 2:6). 하나님께서는 죽게도 하시고 살게도 하십니다(왕하 5:7).
사람의 생사존망(生死存亡)이 참되신 하나님께 달렸다는 말씀입니다. 생존(生存)과 사망(死亡)은 하나님의 손에 달렸습니다. 살고 죽고 존귀하고 멸망하는 것이 모두 하나님의 손에 달렸습니다.
구약성경은 죽이고 살리는 권위가 하나님께만 있다고 기록하였으므로 유대인들은 오직 하나님께서만이 사람을 살릴 수 있다고 믿은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원하는 사람들을 살리신다고 말씀하셨으며 그는 실제로 왕의 관리의 죽을병에 걸린 아들을 살리셨고(요 4:50-53), 뿐만 아니라 그는 또한 이미 죽은 나사로를 살리십니다(요 11:1~12:17).
이는 그 아버지께서 모든 판단을 그 아들에게 주셨음입니다(요 5:22). 재판관이신 아버지 하나님께서 심판권을 다 그 아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재판하시는 분으로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세상을 재판하시는 분께서 공의를 행하셔야 한다며 ‘의인들하고 악인들을 같이 멸망시키시면 되십니까?’라고 기도했습니다.
“재판”과 “심판”은 같은 말입니다. 이것은 판가름하는 것을 뜻합니다. 법원에서 일어나는 일을 “재판”이라고 말하고 경기장에서 일어나는 일은 “심판(審判)”이라고 말합니다. “판(審)”은 “판가름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축구 경기를 할 때에 심판은 선수들과 다른 색 옷을 입고 같이 뛰면서 선수들을 판단하고 선수들이 규칙에 어긋한 행동을 하면 카드를 꺼내서, 노란색 카드로 경고하든지 빨간색 카드로 경기장 밖으로 나가게 합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모든 심판권을 그 아들에게 맡겨 주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자들이 아버지를 존경하는 것에 따라 그 아들을 존경하며 그에 대한 태도가 그 아버지께 대한 태도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5:23).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그 자신을 그 아버지께 같은 자로 만드셨습니다. 이런 이유에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추구하였습니다(요 5:18).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같은 그 자신을 만들고 있기(making) 때문입니다.
3.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가집니다.
요한복음 5장 24-29절에 “나의 말을 듣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가지나 그 죽음에서 그 생명 안으로 옮긴 것을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라. 죽은 자들이 그 아들의 음성의 들을 시각이 오니 듣는 자들은 살 것이니. 이는 마치 그 아버지께서 생명을 그 자신 안에 가지시는 것과 같이, 이와 같이 또 그 아들에게 그가 생명을 그 자신 안에 가지게 주셨음이라. 그가 그에게 판단을 행하게 권위를 주셨으니 사람의 아들이기 때문이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안에 모든 자들이 그 음성의 들을 시점이 오고. 그 선한 것들을 행한 자들은 생명의 부활 안으로 나오겠으나 그 사악한 것들을 성취한 자들은 판단의 부활 안으로 그럴 것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가집니다. 그는 죽음에서 생명 안으로(into) 옮겼습니다(요 5:24). 진실로, 진실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say to).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보내신 그에게(him) 믿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has) 심판 안으로 오지 아니합니다.
“듣다”는 말은 다른 곳에서 그런 것처럼 믿음과 순종을 포함합니다.1) 단순히 귀로 듣는다는 뜻이 아니라 “순종하다”는 뜻이 포함된 것입니다. 듣는 것은 들은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과 하나님을 “믿는” 것은 같은 것입니다.2) 그냥 귀로만 듣는 것이 듣는 것이 아니라 듣고 믿는 것이 같은 것입니다.
“나 하나님 계신 것 믿어”, 이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 계신 것을 믿는 존재들이 있습니다. 귀신들은 하나님 계신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믿는다는 것은 그냥 하나님 계신 것을 아는 것이 믿는 것이 아닙니다. 믿는 것은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믿는다면 영생을 가집니다.3) “얻었다”고 번역되었는데 과거가 아니라 “가지다”는 현재입니다.
현재 시제는 크리스천들이 지금 영생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합니다.4)
유대교는 영생을 가지는 것을 미래에 이루어질 사건으로 생각한 반면, 예수님께서는 현재시제로 현재 가진(has) 영생을 말씀하신 것입니다.5)
성경에 하나님의 왕국이 가까이 왔다고도 하지만 임했다고도 합니다. 하나님의 왕국은 “이미” 왔지만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왕국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고 재림의 때에 완성될 것입니다. 영생도 마찬가지인데 영생은 미래의 일이 아니라 지금 가지는 것입니다.
영생을 언제 가지게 된 것입니까? 생명을 언제 가지게 된 것입니까? 요한복음 3장 16절에 그를 믿는 자는 영생을 가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믿는 자는 다시 태어났으므로 새로운 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믿는 자는 지금 영생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심판 안으로 오지(come into judgment) 아니하나, 사망에서 생명 안으로 옮겨갔습니다(has passed).
“심판”이라는 것은 넓은 의미의 심판이 있고 좁은 의미의 심판이 있고 여기서 말씀하신 심판은 좁은 의미의 심판입니다.
넓은 의미의 심판은 모든 자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을 뜻하고, 좁은 의미의 심판은 믿지 않은 자들이 받게 될 심판을 뜻합니다.
이 “심판”은 저주의 형벌로서 영원한 최후의 심판을 뜻한 것입니다.6) 이런 심판에 믿는 자는 오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는 이미 자기 안에 영생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저주의 형벌로서의 심판에 오지 않는다, 이르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습니다. 사람은 태어날 때에 영(spirit)이 죽은 상태로 태어납니다. 엄마 뱃속에서 태어날 때에 육체는 살아서 태어나지만 영(spirit)은 죽은 상태로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시 태어날 때에, 성령에서 태어날 때에, 새로운 생명을 받을 때에, 그때에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것입니다. 그래서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은 사망의 왕국에서 살고 있지만 거듭난 사람들은 생명의 왕국에서 삽니다. 거듭난 사람들은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고 생명의 왕국에서 살고, 거듭난 사람들은 이미 그 안에 지금 영생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죽은 자들이 아들의 음성의 들을 시각이 오니 듣는 자는 살 것입니다. 살게 될 것은 미래나, 영생을 가지는 것은 지금 이 순간입니다(요 5:24). 현재 듣고 믿어 영생을 가지는 자가 미래에 살 수 있게 됩니다(요 5:25). 진실로, 진실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때가 오고 지금인데 어떤 때입니까? 죽은 자들이 그 하나님의 아들의 그 목소리의 들을 때입니다. 그리고 듣는 자들은 살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는 바로 “지금”입니다. 이 음성을 들어야지만, 이 음성을 영(spirit)으로 들을 수 있어야만 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25절부터 현재에서 미래로 넘어가십니다.7)
본문에서 죽은 자들을 깨우는 음성은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입니다.8)
메시아 시대는 예수님의 오심과 함께 “지금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9)
예수님께서는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이 “살” 것을 말씀하셨습니다.10)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 예수님의 목소리를 들을 시각이 지금입니다.11)
죽은 자들이 예수님의 권능의 목소리를 들음으로 살아날 것입니다. “듣다”는 24절처럼 믿고 받아들이면서 듣는 것입니다. “살다”는 하나님의 교제 안에서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12)
산다는 말은 존재한다는 말하고는 똑같은 말이 아니라 다른 말입니다. 이 땅 위에 있는 모든 사람은 존재하고 있지만 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살아가는 자들이 살고 있는 것이며, 하나님 없이 마음대로 사는 자는 존재하는 것이지 사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온갖 자기 욕심대로, 탐욕대로 살고 있지,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살고 있지 않습니다.
이는 마치 그 아버지께서 생명을 그 자신 안에 가지시는 것처럼, 그가 아들에게도 생명을 그 자신 안에 가지기에 주셨음입니다(요 5:26).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에게 판단을 행하게 권위를 주셨는데(요 5:27), “인자(人子)”, 다시 말해 “사람의 아들”(Son of Man)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심판을 행하게 그 아버지 하나님께 권위를 받으신 것이며, 예수님께서는 심판권을 가지신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게 심판을 행하게 권위도 주셨습니다.13) 그 아버지께서는 모든 판단의 권위를 그 아들에게 주셨습니다(요 5:22). 그러므로 그 아버지께서는 직접 아무도 판단하지 아니하십니다.
이것이 그 판단(judgment)이니 그 빛(light)이 그 세상 안으로 왔으며 사람들이 그 암흑(darkness)을 그 빛보다 오히려 사랑한(loved) 것이니, 이는 그들의 행위(deed)들이 악하였기(were evil) 때문입니다(요 3:19).
어떤 사람이 있는데 옷에 똥도 묻고 더러운 것도 묻었는데 모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빛으로 나오는 때에, 더러운 모습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빛으로 나오지 않고 어둠 속에 머물러 있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어둠 속에서 행하는 일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 특별히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이 이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세리들은 회개하고 빛을 향해 왔는데, 바리새인들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인자(人子)”라는 표현은 예수님께서 그 자신을 가리키신 표현입니다. 따라서 “인자(人子)”, 즉 “사람의 아들”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단 7:13).
그가 인자(人子)시기 때문에 심판을 행할 수 있는 권위를 받으셨으며, 이 재판권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인자가 되신 예수님께 주신 권위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내용을 우리는 기이히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그 무덤 안에 모든 자들이 그의 음성의 듣게 될 시점이 옵니다(요 5:28).
모든 일에 예수님께서 개입되셨음을 놀랍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14)
죽음이 존재의 끝은 아닙니다. 무덤이 존재의 끝은 아닙니다. 죽음의 너머에 다른 세계가 있고, 아무도 그것을 피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 이후에 부활이 있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15) 부활의 때는 그 무덤 안에 모든 자들이 그의 음성을 듣게 될 시점입니다.
28절은 25절과 다르게 “지금이라”는 어구가 따라 나오지 않기 때문에, 완전히 미래에 관한 일입니다.16)
“그 무덤 속에 모든 자들”은 “육체적으로 죽은 자들”을 가리킵니다.17)
무덤 속에 있는 모든 자들이 예수님의 음성을 듣게 될 시점이 옵니다. 이것은 지금 오지 아니한 것으로 앞으로 미래(未來)에 있을 사건입니다.
사람의 삶에 본질적인 것은 다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이루어집니다. 태어나고 죽는 것이 그렇고, 죽고 난 후에 살아나는 것이 그렇습니다.18)
아들의 음성은 지금 능력으로 일하여 영적인 생명을 만들어 내고 있고 미래에는 능력으로 일하여 죽은 자들을 불러내게 될 것입니다.19)
선한 것들을 행한 자들은 생명(life)의 부활(復活) 안으로 나올 것이나 사악한 것들을 실행한 자들은 판단의 부활 안으로 그러합니다(요 5:29).
선한 것들을 행한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산 사람들입니다. 악한 것들을 실행한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사람들입니다.20)
그러면 예수님께서 지금 행위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씀하신 것입니까? 영생을 가지는 자는 예수님 믿는 모든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3:16).
이 말씀은 신자들의 믿음이 행하는 열매로 드러난다는 말씀입니다.21) 힘을 받고 움직인 병자처럼 먼저 선한 일을 행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다니엘 12:2올 연상하게 하는 말씀입니다.22)
다니엘 12장 2절은 ‘부활’을 말씀합니다. 부활은 두 가지 모습입니다. 이들은 영원한 생명에고 이들은 영원의 혐오에 치욕들입니다(단 12:2).
모든 사람은 부활할 때 몸을 가지고 부활할 것인데 그 몸은 다릅니다. 오른쪽에 있는 자들은 영광의 몸을 가지고 생명의 부활로 나올 것이지만 왼쪽에 있는 자들은 혐오의 몸을 가지고 심판의 부활로 나올 것입니다.
선한 것들을 행한 자들은 빛을 향하여 나아온 자들입니다(요 3:21). 악한 것들을 실행한 자들은 어둠을 더 사랑한 자들입니다(요 3:19).23)
살아 있는 동안에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살던 자들은 생명의 부활로 들어오라고 부르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것입니다.24)
주께서 생명의 부활뿐 아니라 또한 심판의 부활도 말씀하셨습니다. 심판의 부활은 불행과 고난과 큰 울부짖음으로 가득한 상태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심판은 결코 모순이 아니라는 것입니다.25) 사악한 것들을 실행한 자들은 심판의 부활에 나올 운명에 처하였습니다.
1) D. A. Carson, 『요한복음』, PNTC 주석, 박문재 옮김 (서울: 솔로몬, 2017), 462.
2) James Boice, 『요한복음 강해 Ⅱ』, 서문강 옮김 (파주: 쉴만한 물가, 2017), 86.
3) G. R. Beasley-Murray, 『요한복음』, WBC 성경주석 36, 이덕신 역 (서울: 솔로몬, 2001), 235.
4) Beasley-Murray, 『요한복음』, WBC 성경주석, 235.
5) Köstenberger, 『BECNT 요한복음』, 267.
6) Maier, 『요한복음』, 마이어 주석, 228.
7) Maier, 『요한복음』, 마이어 주석, 229.
8) Michaels, 『NICNT 요한복음』, 400.
9) Maier, 『요한복음』, 마이어 주석, 229.
10) Beasley-Murray, 『요한복음』, WBC 성경주석, 235.
11) Maier, 『요한복음』, 마이어 주석, 229.
12) Maier, 『요한복음』, 마이어 주석, 230.
13) Carson, 『요한복음』, PNTC 주석, 464.
14) Michaels, 『NICNT 요한복음』, 403.
15) Boice, 『요한복음 강해 Ⅱ』, 94-97.
16) Maier, 『요한복음』, 마이어 주석, 231.
17) Köstenberger, 『BECNT 요한복음』, 269.
18) Maier, 『요한복음』, 마이어 주석, 232.
19) Carson, 『요한복음』, PNTC 주석, 466.
20) 김서택, 『빛으로 오신 예수님』 (서울: 도서출판 솔로몬, 2014), 212.
21) 권해생, 『요한복음』,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총회 설립 60주년 기념 성경주석 (서울: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 총회출판국, 2021), 213.
22) Beale·Carson 편집, 『누가·요한복음』, 신약의 구약사용 주석, 554.
23) Carson, 『요한복음』, PNTC 주석, 466.
24) Beasley-Murray, 『요한복음』, WBC 성경주석, 236.
25) Boice, 『요한복음 강해 Ⅱ』, 98-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