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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죄의 결과는? (2) (롬 5:12-21)
인생을 고해와 같다고 말합니다. 그 인생이 기껏해야 70~80년이란 짧은 한 생명을 삽니다. 그것도 허다한 문제를 안고 고통 속에서 허덕이다가 끝을 보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생을 논하는 지혜 자들이 많은 연구를 거듭해왔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인생이 무엇인가?'를 확실히 증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가령 '인생이 어디서 왔는가? 왜 사람은 죄인인가? 죽음은 어디서 왔는가? 구원에 길은 어디에 있는가?' 지금도 이 질문에 대하여 명쾌한 대답을 못합니다.
그들은 종교나 철학의 지혜를 가지고도 풀지 못합니다. 정치와 군사의 힘으로도 해결하지 못합니다. 과학이나 경제가 제 아무리 발전해도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자세하게 가르쳐 줍니다. 히11:3절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딤전2:4절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고 진리를 알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진리(말씀)을 통해서 말씀의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요8:32절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진리를 알면 그 진리가 우리를 자유하게 합니다. 진리를 바로 배우십시오. 진리 위에 바로 서십시오. 그러면 그 진리가 우리의 모든 불안에서 자유하게 하고, 우리의 모든 의심에서 자유하게 합니다.
오늘 본문은 죄의 시작과 죄의 결과에 대한 내용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체결된 '행위 계약과 은혜 계약'의 원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즉 아담은 전 인류의 대표로써 하나님과 맺은 행위 계약에 실패하여 범죄 했기 때문에 전 인류가 아담 안에서 타락하여 하나님 앞에 죄인된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12절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여기 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아담입니다. 하나님은 에덴을 창조하시고 모든 것을 다 아담에게 주셨습니다. 그런데 단 하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따먹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창2;17절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따먹는 것은 행위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이것을 '지키느냐, 거역하느냐'를 보십니다. 이 계획은 인생의 행위가 영생의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는 말은 그 열매 속에 독약이 들어있어 죽는 다는 말이 아닙니다. 순종하지 아니하면 벌을 받아 죽는 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의 근본은 불순종입니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사실 죄는 하와가 먼저 지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계명을 받은 사람은 아담입니다. 그러니까 계약의 상대가 아담입니다. 이것을 대표자의 원리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대표자의 사상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한 가정의 잘못은 가장인 남편의 책임이요, 한 회사의 잘잘못의 책임은 사장이 집니다.
여기서 바울이 "아담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고 말하지 않고,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고 말한 것은 한 사람, 곧 아담이 모든 사람을 대표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아담의 이름을 쓰지 않고, "한 사람"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한 사람 아담이 모든 인류를 대표한다면,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를 대표하고 있습니다.
80년대에 한참 시끄러웠던 강남의 명문교인 상문고 내신 성적 조작사건에 아버지가 고급 공무원인데 대기 발령 받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의 어머니가 돈을 주고 조작했는데 책임은 아버지가 진 것입니다. 이것이 대표자의 원리입니다.
나라 안에 부서도 부하들의 잘못된 행위의 책임은 그 상관에게 주는 것입니다. 정치권에서도 하급 공무원이 큰 범죄를 저지르면 직속상관이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합니다. 예로 지금 한참 시끄러운 도청 문제도 그 당시 대통령이 뒤집어씁니다.
본문의 한사람이란 말은 굉장히 중요한 진리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한 사람쯤이야? 이렇게 생각하고 범죄 합니다.
▶수7장에서 아간이라는 부하 한사람이 하나님 앞에 범죄 함으로 큰 여리고 성을 무너뜨렸던 이스라엘의 영광이 조그만 한 아이 성에서 크게 패망한 사건입니다. 결국 아간은 그의 죄의 대가로 아골 골짜기에서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요나 한 사람이 하나님을 거역한 죄 때문에 그가 탄 배에 모든 사람이 풍랑을 만나 재물을 다 잃었고, 파선의 위기를 맞았습니다.
▶애굽의 강팍한 왕 바로 한 사람으로 인해 온 애굽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장자의 죽음을 맛보게 된 것입니다.
인류의 타락은 인류의 대표자인 아담의 범죄의 결과입니다. 죄는 아담이 지었지만 아담의 혈통을 받은 자는 모두 죄인이 되었습니다. 이 사상은 사과나무에 사과가 열리고, 대나무 뿌리에 대나무가 나오듯이 죄 성을 가진 아담의 후예들이 그 죄의 뿌리를 안고 태어난다는 원리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원죄'라고 합니다.
시51:5절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모든 인류에게 사망이 왔습니다.
여기에서 사망은 무엇을 말하는가?
①하나님과의 단절(영혼의 죽음); 사실 인간은 하나님의 영으로 지음 받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참된 생명은 하나님과 교통할 때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첫 번째 사망은 영적인 죽음을 의미합니다.
②육체의 죽음; 창3:19절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③지옥의 형벌로 영원한 죽음이 옵니다; 본문의 가장 가까운 뜻은 하나님과 영혼의 단절이며 지옥의 형벌로 떨어지는 것은 사망으로 가는 것입니다. 롬6:23절에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은 영생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그 죄가 모든 인류에게 전가되었고, 또 부패성이 아담의 모든 후손에게 유전되었음을 말하는데 그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전가설, 유전설'이라고 합니다.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이르렀느니라'는 헬라어로 '통과하다. 퍼져 가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1절의 결론은 한사람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①세상에 죄가 들어왔습니다.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가 오염되었음을 가리킴이며 죄의 세력이 이 세상에 지배하고 있음을 가리킵니다.
②사망이 왔습니다.
③사망의 종이 되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아담 한 사람의 죄의 결과는 온 인류가 하나님의 정죄를 받고 심판과 저주 아래 있음을 말해줍니다.
이 상태는 그 아무도 어떤 방법으로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선처를 배 푸시지 않으면 인생은 저주 속에 살다가 심판 받아야 할 운명인 것입니다.
▶13절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있기 전에 죄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역사적으로 얼마든지 입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가인을 벌하셨습니다. 왜 벌하셨습니까?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죽이는 죄를 범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노아 시대에 인류를 홍수로 심판하셨습니다. 무엇 때문에? 죄악이 관영 했기 때문입니다. 또 왜 바벨탑이 무너졌습니까? 왜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당했습니까? 인간들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이 모든 사건은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인간들에게 율법을 주시기 이전이었습니다. 이로 보건대 율법이 있기 전에도 이 세상에는 죄가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면 율법이 있기 전과 율법이 있고 난 뒤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왜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율법을 주셨습니까? 사도 바울은 이미 롬3:20절에서 율법의 역할을 우리들에게 밝혀주었습니다.
율법은 우리들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율법이 하는 역할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율법이 있기 전에는 죄를 짓고도 죄의식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않았다는 뜻은?
①죄를 짓고도 죄 인줄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②범죄하고도 죄책감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롬7:7절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 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③법적으로 책망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롬7:9절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14절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율법이 있기 전을 가리킵니다.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 하나님의 계명을 받고 지은 죄를 가리킵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계명을 분명히 받고도 범죄 했습니다.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즉, 율법이 없을 때에는 아담처럼 계명을 받고 범죄 한 것이 아니고 율법이 있기 전이므로 율법을 잘 모르고 범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 위에서 사망이 왕 노릇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은 아담의 죄가 전가되었다는 사실과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을 쉽게 표현하면 '몰라서 지은 죄는 죄가 아니냐?'는 질문에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분명히 죄입니다. 가령 독약이 든 병이 있는데 아무 표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누가 그 약을 모르고 먹었다고 칩시다. 어떻게 되겠습니까? 독약인지 모르고 먹었지만 분명한 것은 그 사람은 죽는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이것이 독약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도 그 약을 먹고 죽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알고 먹어서 죽은 것이나 모르고 먹어서 죽은 것이나 다 죽는다는 것입니다. 죄도 이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는 짖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 노릇하였다" 즉 대표자 사상을 생각해 보면 쉽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 천황이 항복을 선언할 때, 혼자만 항복한 게 아닙니다. 전 일본 국민의 대표로 항복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세 이전의 율법을 모르는 자들은 사망의 길로 갔다는 것입니다.
▶14절하반 절에 중요한 내용이 나옵니다.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여기서 표상의 '표'는 대표가 된다는 말이고, '상'은 상징이 된다는 말로 '모형, 상징'이라는 뜻입니다. 어떤 실체를 보여주는 하나의 좋은 본보기요, 모형이 된다는 것입니다. 아담은 표상입니다. 그렇다면 실체는 누구입니까? "오실 자" 즉 저 높고 높은 하늘의 별을 넘어서 이 낮고 낮은 땅 위에 죄 범한 우리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오신 하나님의 아들,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아담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하나의 모형입니다. 아담에게서 볼 수 있는 원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도 그대로 적용이 된다는 것입니다. 무슨 원리입니까? 대표의 원리입니다. 아담이 모든 인간을 대표하듯이 예수 그리스도도 그 안에서 거듭난 모든 사람들의 대표가 된다는 것입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인류가 죽은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이 새 생명을 얻게 됩니다.
지금 바울이 장황하게 인류의 원죄에 대해서 설명한 이유는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대표를 볼 수가 있습니다. 한쪽은 아담입니다. 또 한쪽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인정하든지 인정하지 않든지 간에 이 두 대표 가운데 어느 한쪽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를 연결하는 고리는 "말미암아"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과 연결되어 있습니까? "한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아"에 아직도 연결되어 있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에 연결이 되어 있습니까? 간단한 것 같지만 그 결과는 너무나도 엄청난 차이가 납니다. 한쪽은 영원한 사망입니다. 그러나 한쪽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길은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에 연결되는 것입니다.
백두산의 천지에는 두 개의 강이 흘러내리고 있습니다. 하나는 서쪽으로 흘러내리는 압록강입니다. 황해로 연결이 됩니다. 또 하나는 오른쪽으로 흘러내립니다. 두만강입니다. 동해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은 조금만 왼쪽으로 기울면 압록강을 따라서 황해로 빠져버립니다. 그러나 조금만 반대로 오른쪽으로 기울면 두만강을 통해 동해로 빠지게 됩니다. 처음은 똑같이 시작했지만 가는 방향이 서로 달랐기 때문에 종착역은 엄청나게 차이가 나고 만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어느 '말미암아'에 연결이 되어 있느냐에 따라서 인생의 종착역도 엄청나게 차이가 납니다. 한쪽은 사망이고, 한쪽은 생명입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길 수 있는 길은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가능한 것입니다.
▶15-19절까지는 은혜 계약을 말하고 있습니다.
15절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
여기 은사란 '선물'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아담의 범죄와 같지 안다는 뜻입니다.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죄의 '전가성, 유전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여기서는 한 사람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말하고 있습니다. 앞에는 아담 한 사람이 죄로 인해 죽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는 많은 사람을 살려내게 됩니다.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말미암아!"
▶한 사람의 의인이 얼마나 귀합니까? 창19장에 의인 한 사람이 없어 소돔과 고모라 성이 유황불에 망했습니다. 바로의 신하 보디발 장군은 요셉 한 사람으로 인하여 그 가정이 복을 받았고, 요셉 한 사람으로 인하여 애굽의 흉년을 잘 넘길 수가 있었고, 요셉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그 가족 70명이 기근 가운데서 생명을 건져 이스라엘의 굳건한 국권을 이루어 놓았습니다.
한 사람의 바울, 베드로가 없었던 들 오늘의 기독교는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한 사람의 종교 개혁가 루터나 칼빈 목사가 없었다면 오늘날 개신교가 어떻게 존재하고 있었겠습니까?
황무지 땅 덴마크는 오늘과 같이 낙원으로 만든 것은 '구룬드비' 목사 한 사람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지도자를 잘 만나야 합니다.
제5공화국에 전두환 대통령을 보십시오, 지도자 한 사람의 부덕으로 5공 시절의 전체가 국민의 증오와 심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북의 김일성과 김정일 부자를 보십시오. 그 한사람의 독재가 2000천만 내 동포가 노예처럼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한사람 아담으로 인하여 죄가 들어오고, 사망이 오고, 불화가 왔지만 아담의 표상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의로 인하여 이 세상에 생명이, 평화가, 축복이 오고 능력이 왔습니다.
▶16절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예수 그리스도의 은사는 아담의 범죄와 또 다른 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아담의 범죄와 은사의 결과는 정반대입니다
처음 아담에 대한 인류의 정죄함과 마지막 아담에 의한 인류의 구원을 비교하여 설명하는 구절입니다. 또 이 선물은 '믿음으로 얻은 구원'을 말합니다.
"의롭다 하심에 이르렀느니라" 억만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완전히 한꺼번에 죄가 사해집니다. 곧 '칭의'입니다. 의롭다 하심이 없이는 구원도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이것이 무슨 행위로 된 것도 아니고, 돈으로 산 것도 아니고, 값없이 믿기만 하면 받는 선물이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구원은 돈으로 사지 못합니다. 믿기만 하면 "의롭게 하심에 이르렀느니라" 앞 절에서는 "넘쳤느니라"가 됩니다.
▶17절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 하리로다"
여기서 말하는 한 사람은 물론 아담입니다. 아담이 죄를 지었습니다. 그 결과 사망이 왕 노릇하고 사망이 우리를 지배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왕 노릇하였은즉"이란 말의 시제가 과거입니까? 현재입니까? 과거입니다. 이미 지나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더 이상 사망에 매여서 종노릇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사망은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이제는 우리의 신분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바뀌었습니까?
하반부에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리로다." 누가 왕 노릇한다고 했습니까? 예수 믿어 구원받은 저와 여러분들이 왕 노릇하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과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는 사망의 종노릇을 했지만, 이제는 우리의 신분이 달라져 세세무궁토록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하게 되었습니다.
▶스코틀랜드의 순교사에 한 성도가 핍박자의 손에 잡혔습니다. 핍박자들은 그를 나무 위에 매달고는 그를 불태우기 위해서 나무 위에 불을 던졌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순교자는 하늘을 우러러 감사의 기도를 올렸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제가 가는 걸음을 복되게 하기 위해서 저들로 하여금 장미 꽃송이들을 던져주게 하시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순교자의 눈에는 자기를 죽이기 위해서 던지는 장작들이 장미 꽃송이로 보였던 것입니다. 불길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순교자는 하늘을 우러러 또 이와 같은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저로 하여금 빨리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 수 있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여러분!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사망에 매여서 종노릇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망이 우리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사망을 향하여 호통을 칠 수가 있습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더 이상 사망은 우리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이제 우리는 사망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사망을 향하여 담대하게 호통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왕 노릇'한다는 말은 '강한 세력과 지배력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옛날 왕의 한 말이면 날아가는 새도 떨어졌습니다.
우리가 죄의 종노릇 할 때에는 죄의 세력이 너무 강해서 죄를 끊어버리고 싶어도 끊어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왜? 죄의 권세가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노름하는 사람 보십시오. 노름에 미치면 마누라도 팔아먹는다고 합니다. 술꾼을 보십시오. 딱 끊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또 마시고 연발 실수합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한잔, 두잔, 이것이 나중에는 말술이 됩니다.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되듯이 말입니다. 죄도 처음에는 작은 것부터 시작하지만 죄가 죄를 낳고 나중에는 죄의 세력에 끌려서 죄에 삼키우고 죄의 종노릇하다가 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는 은혜와 생명이 왕 노릇합니다. 그 세력이 죄의 세력보다 강하기 때문에 죄의 사망의 세력을 물리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을 다 이기었느니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긴 것이 아니라 우리 주님이 이겨놓으신 것입니다. 믿기만 하고 달려가면 주님 앞에서 생명의 왕 노릇을 할 수 있습니다.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고, 모든 약한 자들을 고치시는 권세를 받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에 동안 발걸음 닫는 곳마다 생명의 구세주로서 그의 사역을 다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예수 안에 있는 우리는 은혜의 선물을 넘치게 받아 믿음으로 왕 노릇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왕이란 지배하고 다스리는 자입니다. 전에는 마귀의 지배를 받아 우리의 육신이 병들어 아팠지만 이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 얻은 복 받은 자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마다 왕권을 쥔 자처럼 단호하게 명하고 꾸짖어야 합니다. "가난아 물러가라! 병마야 떠나거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왕 노릇 하는 자입니다.
▶18절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다섯 문장입니다. ⑴"한 범죄로" ⑵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⑶"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⑷"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⑸"생명에 이르렀느니라"입니다.
▶한 사람 아담이 범죄 했습니다. 그 결과 모든 인류가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행동이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이 의롭다 하심을 받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우리에게 말하는 의도는 '아담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과거에는 죄인이 되었지만,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모두가 의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또 '아담의 범죄로 인해서 우리가 과거에는 죽었지만,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생명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19절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똑같은 내용을 바울은 19절에서 조금 달리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과거에는 죄인이 되었으나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소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명심하고 넘어가야 할 것은 '우리는 범죄의 본질과 의의 본질'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먼저 아담의 범죄의 본질은 본문에서 불순종이라고 설명합니다.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본질은 본문은 순종이라고 설명합니다.
아담은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했지만 그러나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의 삶 자체가 순종이었습니다. 바울은 빌2:6-8절에서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의 본체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를 낮추셨습니다. 우리와 똑같은 인간의 모양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어디 그것뿐입니까? 종처럼 우리를 섬기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우리들은 예수님의 순종의 정신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20절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 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 말씀을 잘못 깨닫다가는 더욱 죄에 빠질 염려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여기에 오해하여 죄를 많이 짓는 곳에 은혜가 넘친다고 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죄를 깨달을수록' 내가 죄인인 것을 깨달을수록 "아~ 하나님의 은혜가 이토록 놀랍구나! 나같이 형편없는 자에게 생명을 주시다니! 나 같은 죄인 때문에 예수께서 십자가에 다시다니! 깨닫는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친다"는 뜻인 줄 압니다.
여러분! 죄를 많이 깨닫는 자가 더 많은 은혜 가운데 거하게 됩니다. 죄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감사하지 못합니다. 왜? 아무리 예수의 은혜가 크고 귀하지만 자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감옥에 있는 죄수들에게 특사를 베풀어 모두 출감시킨다고 할 때, 몇 십 년이나, 무기수, 사형수 같은 사람의 감사와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클 것입니다. 그러나 출감을 몇 일 앞둔 사람들에게는 그리 큰 은혜가 되지 않습니다.
눅7;41절 이하에 보면, 빚진 자의 비유에서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탕감해준 사건'이 나옵니다. 둘 다 탕감해 주었는데 누가 더 은혜를 받은 잡니까? 물론 오백 데나리온을 탕감 받은 자입니다. 우리의 주홍 같은 붉은 죄가 주의 보혈로 씻음 받아 새 사람이 되어 하나님 앞에 인정받게 되었다는 사실이 큰 은혜의 축복입니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주인공의 이름은 크리스천입니다. 크리스천이 시온 성을 바라보면서 순례의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도중에 어떤 집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 집주인의 이름은 해설자입니다. 해설자가 크리스천을 반갑게 맞이하고 크리스천을 어떤 객실로 안내했습니다. 그런데 그 객실은 한 번도 소제를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방안에 얼마나 먼지가 많이 쌓여 있었겠습니까? 해설자가 크리스천에게 말했습니다.
"지금부터 내가 당신에게 아주 유익한 것을 한 가지 보여드리겠습니다." 해설자는 하인을 불렀습니다. 그리고는 하인에게 방안에 쌓여 있는 먼지를 털게 했습니다. 하인이 먼지를 털기 시작했습니다. 엄청나게 많은 먼지가 일어났습니다. 질식해서 죽을 것 같았습니다. 잠시 뒤에 해설자가 옆에 있는 소녀에게 물을 가져와서 뿌리라고 했습니다. 소녀가 물을 가지고 와서 뿌리기 시작하니까 잔뜩 일어났던 먼지가 가라앉기 시작했습니다. 잠시 뒤에 방이 깨끗하게 소제가 되었습니다.
주인공 크리스천이 해설자에게 물었습니다.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해설자가 이렇게 풀이를 해 주었습니다.
"이 방은 인간의 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방에 잔뜩 쌓인 먼지는 인간의 몸을 더럽히고 있는 죄와 부패입니다. 이것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온 것입니다. 먼지를 털기 시작했던 하인은 율법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물을 갖다 뿌린 소녀는 복음을 상징합니다. 처음에 하인이 먼지를 털기 시작했을 때 먼지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많이 일어났지요? 율법의 역할이 바로 그와 같습니다. 그러나 소녀가 물을 뿌리기 시작했을 때, 비로소 먼지가 가라앉고 깨끗하게 소제되었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의한 복음만이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에게 율법을 주셨습니까?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죄를 깨달아야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죄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알 때, 우리에게는 복음이 필요하다는 사실도 절실하게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 그 자체가 우리 죄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합니다. 율법은 절망에서 소망으로 인도하는 하나의 안내자입니다.
▶21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죄 문제를 해결하기 이전에, 다시 말해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기 이전에 그 때는 죄가 우리를 지배했고, 우리는 죄의 지배 아래 놓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죄는 사망의 권세를 휘두릅니다.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한 것같이"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사망의 권세를 휘두르면서 우리를 괴롭혔습니다. 영을 죽이고, 마음을 죽이고, 몸을 죽이고, 생명을 죽이고, 모든 사람에게 사망을 자져다 줍니다. 죄는 사망 안에서 왕 노릇하여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다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죄의 나라에 절망의 나라에 살지 않습니다. 죄가 더한 곳에 무엇이 더욱 넘쳤다고 했습니까?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우리는 은혜의 나라, 소망의 나라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한다고 했습니다. 더 이상 죄가 우리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더욱 넘치는 은혜가 우리를 사로잡고 있습니다. 여러분, 은혜가 무엇입니까? 쉬운 말로 표현해 보면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는 무엇과 더불어 역사 한다고 했는가?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여." 혼자 역사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의로 말미암아 역사 한다고 했습니다. 의와 더불어서 역사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실족할 수 있습니다. 범죄할 수 있습니다.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 때마다 사탄은 옆에서 우리를 송사 합니다. 괴롭습니다. 그러나 그 때는 더욱 넘치는 은혜가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우리의 모든 죄를 덮어주는 것입니다. 요일1;7절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우리의 모든 죄를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깨끗하게 씻어주시고 덮어주시는 것입니다.
어디 그것뿐입니까? 오늘 본문 마지막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영원한 생명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영원한 생명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고전15;55절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우리는 더 이상 사망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미 영원한 생명이 주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