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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9년(광해군 원년)에 마침내 창덕궁이 중건되었지만 공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광해군은 보충 공사를 재차 명하여 약 2년간 더 정릉동 행궁에 계속 머물렀다. 이후 창덕궁으로 옮겨갔지만 이후에도 다시 정릉동 행궁으로 돌아와 오랫동안 거처했다. 그 이유는 풍수지리적으로 불길하다는 이유로 창덕궁을 꺼렸기 때문인 듯하다. 광해군이 인경궁, 경희궁 등 여러 궁궐을 마구 건설한 것은 근본적으로 창덕궁에 거주하기 싫어서였다. 광해군은 마침내 정릉동 행궁에 경운궁(慶運宮)이라는 이름을 내려 정식으로 궁궐로 승격시켰으며, # 경운궁 확장 공사를 벌여 궁역 내에 여러 전각을 새로 지었다. 그러나 곧 인경궁에다 경덕궁(경희궁)까지 착공하자 물자가 부족해지면서 도리어 경운궁에 새로 짓던 전각들을 도로 해체하여 경덕궁(경희궁) 건설에 사용했다. 또한 소성대비(인목왕후)를 이곳으로 유폐했다.
이후 인조반정으로 정권을 잡은 인조가 이곳 경운궁 즉조당에서 즉위식을 거행했다. 이것은 인조의 본의가 아니라 철저히 타의(인목왕후)에 의한 것이었다. 인조반정으로 창덕궁이 거의 전소되었지만, 정전인 인정전과 그 주변 외전 일대만큼은 용하게도 피해를 입지 않았기 때문에 능양군은 정궁인 창덕궁에서 즉위식을 치러 정통성을 확보하길 원했다. 그런데 의외로 인목왕후가 "능양군이 직접 경운궁으로 올 것"을 명하면서 차기 왕과 기싸움을 벌였던 것이다. 조선에서 즉위 절차상 대비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다. 세자가 없는 경우에는 대비가 차기 왕을 지명할 수 있는 권한까지 가지고 있었다.[12] 게다가 능양군 측은 반정으로 정권을 찬탈한 상황이었던 만큼, 한시라도 빨리 즉위식을 올리는 것이 시급한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인조반정의 가장 큰 명분이 광해군의 폐모살제(인목왕후를 폐하고 영창대군을 죽인 죄)였던 만큼, 인조가 절대로 인목왕후를 무시할 수 없는 상황임을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결국 능양군(인조)은 경운궁까지 와서 인목왕후에게 엎드려 조아린 후에야 간신히 즉위식을 치를 수 있었다. 그러나 즉위식은 경운궁에서 치렀지만, 인조는 바로 경운궁을 떠나 화재로 폐허가 된 창덕궁으로 들어갔다.[13]
즉위한지 3달 후에 인조는 즉조당과 석어당 단 2채를 제외한 경운궁의 나머지 가옥과 대지를 모두 본 주인에게 돌려주었다.[14] 인조의 이러한 조치는 민생을 위한다는 명분이었지만, 실은 인목왕후에 대한 은밀한 견제가 아닐까 하는 추측도 해볼 수 있다. 명분 때문에 인목왕후 생전에는 내내 눈치를 보며 국법까지 무시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는 인조인데 왕 입장에서 그게 편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결국 인목왕후는 가렴주구의 상징으로 여겨 장기적으로 없애자는 신하들과 기왕 지어놓은 거 활용해 보려는 인조의 눈치싸움 현장인 인경궁으로 거처가 옮겨졌다. 물론 이러한 조치는 (표면적으로는) 인목왕후의 만수무강을 위한 것이었다.
인조의 조치를 통해 경운궁은 단 전각 2채[15] 만이 남아 정릉행궁 시절보다 더 조촐해졌다. 이후 경운궁은 이후 왕실에서 왕실 내 토지 및 재산 관리 역할을 하기 위한 별궁 명례궁을 설치한 정도를 빼고는 별다른 존재감 없이 아관파천이 일어날 때까지 약 274년간 역사에서 잊힌 궁궐이 되었다.
인조반정 이후 이곳은 오랫동안 버림받았다가 근 274년 후인 1897년(건양 2년) 고종이 아관파천 후 환궁할 때 경복궁이나 다른 궁궐들을 놔두고 경운궁에 거처하면서 대한제국 역사의 중심지로 재등장했다.
고종이 아관파천 이후 이어(移御)[16]할 당시 경운궁은 민간에는 그 이름조차 잊혔던 상태로, 당시 민간 서적인 《한경지략》에서는 '왕가의 작은 별궁인 명경궁(明慶宮)'으로 소개했다. 고종이 넓고 좋은 다른 궁궐들을 놔두고 원래 민가였으며 이제는 고작 건물 2채만이 남아 있던 버려진 좁은 별궁인 경운궁에 애착을 보인 것은, 다름이 아니라 러시아공사관, 미국공사관, 영국공사관 등과 거리가 가까웠기 때문이다.[17] 이 인근은 외국 공사관 밀집지역이었다. 미국, 영국, 러시아공사관 외에도 프랑스공사관, 독일영사관이[18] 근처에 있었다. 그래서 이 지역은 공사관 구역으로 불렸다. 또한 미국과 영국 선교사들을 비롯한 다른 외국인들까지 주로 이 일대에 머물렀기 때문에 한성 내의 서양이나 마찬가지인 곳이기도 했다. 청일전쟁 당시 일본군이 경복궁을 포위 점령했던 사건이나 을미사변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는 고종으로서는 외국 공사관에 둘려싸여서 어떤 나라, 특히 일본이 무력 도발을 할 수 없는 중요한 위치였던 경운궁은 특히 각별했다.
러시아공사관에서 머물면서 내외로 환궁 압력에 시달리던 고종은 1896년(건양 원년) 경운궁 개수를 명하여 환궁을 준비했다. 경운궁은 인조 원년인 1623년에 대거 축소되어 원래 민가였던 즉조당과 석어당 2채만 달랑 남아있던 상태였다. 당연히 정궁으로 쓰기에는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고종은 우선 침전인 함녕전과 서재인 보문각,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신 사성당(선원전) 등 당장 필요한 건물들을 급한 대로 지은 상태에서 1897년(건양 2년) 2월에 경운궁으로 환궁했다. 정전으로는 1902년(광무 6년)에 중화전이 완공될 때까지 5년간 즉조당을 활용했다.
고종은 경운궁을 황궁(정궁)으로 조성하기 위해 대대적인 공사를 이어나갔다. 겉으로는 옛 궁궐을 보수 · 중건한다고 했지만 원래 경운궁에 남아있던 전각이 2채 뿐이었기 때문에 말이 중건이지 그냥 궁궐 하나를 통째로 새로 짓는 것에 가까운 대공사였다. 특히 정전인 중화전은 창덕궁의 인정전을 본떠 지은 복층양식으로 단층인 창경궁의 명정전이나 경희궁의 숭정전과는 격이 달랐다.
중화전을 중심으로 전통적인 동양식 전각들을 세워가면서 동시에 서양식 건물인 돈덕전, 동양의 양식을 흉내낸 서구식 건물인 정관헌 등도 이 무렵에 지었다. 그리고 서양식 정전으로 활용할 목적의 석조전도 이때 착공했는데 워낙 큰 규모여서 그런지 경술국치 이후에 완공되었다.
당시 경운궁 공사를 위해 경복궁 전각들을 헐어다가 사용했다. 이 포스팅[19]에 따르면 당시 경복궁에서 경운궁으로 이건된 건축물들은 회안전, 문경전, 태원전 축대, 빈궁 생물방, 다경합, 만화당 등이었다고 한다. 이 중 만화당은 황제의 침전인 함녕전으로 개축되었다.
1902년(광무 6년) 경운궁 공사는 1차적으로 일단락되어 새로운 정전인 중화전을 비롯한 주요 전각들이 완공되었다.[20] 그때까지 5년 동안 경운궁의 정전은 즉조당이었다. 당시 사진들을 보면 1902년에 완성된 경운궁의 규모가 지금보다도 훨씬 컸음을 알 수 있다.
| 공사 중인 중층 중화전. 경운궁 확장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것을 보아 1902년 경에 촬영한 듯 하다. |
또한 새롭게 대한제국이 출범하는 시기였던 만큼 기존의 경복궁 중심으로 짜여진 도성을 경운궁의 대한문을 중심으로 뻗어나가는 방사상의 새로운 황도로 개편하려는 도시 계획도 있었다고 한다. 실제 지금의 세종대로도 이때 만들어진 것이다.
| 경희궁과 연결했던 운교# 돈의문에서 신문로 방향으로 촬영한 사진이다. |
그리고 경희궁과 연결하는 홍교도 건립했다. 사진에는 안 보이지만 왼쪽에 경희궁, 오른쪽에 경운궁이 있다. 어느 블로거가 정리한 홍교의 건립 시기와 건립 의도 이 포스팅에 따르면 홍교는 고종이 경희궁에서 열릴 관병식을 보기 위해 건립했으며 1902년(광무 6년) 8월에서 10월 사이에 세웠다고 한다.
| 동아시아 제후국[21] 궁궐관제인 3문 3조에 맞춰져 지었던 조원문. 대한문 바로 뒤에 있는 금천교 다음의 문으로 중화전 회랑 바로 바깥에 있었다. |
1904년(광무 8년) 2월 29일에 경운궁 화재 사건이 발생하여 서북쪽 권역을 제외한 궁궐 거의 전역이 전소되었다. 당시 궐내(闕內) 함녕전의 온돌 교체공사 도중에 바람을 타고 화재가 일어났던 것이다. 그 결과 중화전, 중화문을 비롯한 주요 목조 건물들이 대부분 소실되었다. 경복궁까지 헐어가며 애써 지은 궁궐이 2년 만에 다 불타버린 것이다. 원래 남아있던 2채인 즉조당과 석어당도 이때 소실 되었다.
화재 직후 고종은 황실 도서관 건물로 사용하던 ‘수옥헌(漱玉軒)'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후 경운궁 주요부를 완전히 복구하기까지 고종은 수옥헌을 침전 겸 편전(사무실)으로 사용했다.
대화재로 사실상 궁궐이 모두 소실되자 고종과 대한제국 정부는 황궁을 창덕궁으로 옮기는 방안도 유력하게 검토했다. 그러나 외국 공사관들과 가까운 경운궁에 강한 애착(집착)을 보인 고종은 결국 "비용이 많이 들더라도 경운궁을 재건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당시 창덕궁으로 궁을 옮기는 것에 대해 고종의 반응은 굉장히 신경질적이었던 듯하다. 윤치호는 자신의 일기에 이하영에게 들은, 궁궐 이어에 대한 고종의 반응을 적으며 경운궁에 유달리 집착하는 고종의 모습을 비판했다.
(전략) 이하영 대신이 말하기를, 황제가 궁궐을 다시 짓는 계획에 반대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목을 벨 것이라는 결단을 천명했다고 한다. 언젠가 이재완(李載完)[22]이 황제에게 동궐(창덕궁)로 옮기자고 제안한 적이 있다. 황제는 몹시 격노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지경이었다. 황제는 기를 죽이는 분개한 얼굴로 그 불운한 왕자를 쳐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죽거든 태자궁이나 데리고 가거라.” 구제불능이다. 절망적이다.
1905년(광무 9년)에 경운궁 수옥헌에서 일제의 강압과 을사오적의 매국 행위로 인해 을사늑약을 강제 체결당했다.
1906년(광무 10년) 경운궁 중건 공사가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재정 문제로 인해 규모는 1902년(광무 6년) 전성기 때보다 축소되었다. 특히 정전인 중화전은 단층으로 바뀌어 원래 복층 건물의 장엄함이 사라졌다.[23]
1907년(광무 11년) 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일제는 고종을 강제 퇴위시켰다. 이어서 순종이 돈덕전에서 즉위했다. 당시 고종 퇴위 반대 운동이 벌어진 곳도 이곳 대한문 앞과 종로 일대 등지였다.
순종은 한동안 중명전을 집무실로 사용했으나 넉 달 후 순종은 창덕궁으로 이어했다. 결국 정궁(황궁)[24]의 지위도 함께 옮겨갔다. 이후 중명전은 다시 태황제 고종의 집무실 및 접견실이 되었다.
이후 이완용은 궁내부대신 박영효가 양위작업을 제대로 진행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7월 21일 탄핵 하였고 그 작업을 자신의 이복형제인 이윤용에게 맡겼다. 이 이윤용이 다음날인 1907년(광무 11년) 8월 2일 올린 건의에 의해 경운궁의 이름이 덕수궁으로 변경되었다.
1910년(융희 4년) 8월 창덕궁 인정전에서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어 결국 대한제국은 멸망했고(경술국치), 고종은 태황제에서 이태왕(李太王)으로 격하당했다. 이후 그해 12월에 석조전이 착공 10년 만에 완공되었다. 사실 석조전은 고종이 경운궁으로 환궁하면서부터 정전으로 구상했던 건물이었으나, 결국 이 건물은 망국 이후에 완공되었다. 완공 후 고종 일가는 석조전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러나 고종은 석조전에 불편함을 느껴 1919년 1월 21일 붕어(崩御)할 때까지 함녕전에 주로 기거했다고 한다. 이후 석조전은 일본으로 강제 유학을 떠난 영친왕이 귀국했을 때 머무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들이 덕수궁의 전각들을 대거 철거하기 시작했다. 시작은 덕수궁에 거주했던 고종황제의 사후 벌어졌는데, 고종 독살설의 핵심으로도 거론되는 윤덕영이 멋대로 영성문 쪽 부지를 일본에 팔아넘겨 돈을 챙긴 것이다. 중화문과 중화전을 둘렀던 2칸 폭의 행각 역시 헐렸다. 이는 지금까지도 복원되지 못했다. 1930년대의 조선총독부에서 당시 경성에 기존의 공원으로도 수용할 인원이 많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덕수궁을 공원화할 때 석조전의 앞마당에 프랑스식 정원을 조성하려 했고, 이때 방해가 된 것이 중화전의 서쪽 행랑채였다. 또한 덕수궁 권역의 일부를 민간에 매각했다. 그렇게 덕수궁은 상당히 많이 훼손되었으며, 그 권역 역시 크게 줄었다.
8.15 광복 직후, 정부수립 이전 미군정기에는 덕수궁 석조전에서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려 신탁통치에 관한 문제를 의논을 했다.
6.25 전쟁이 일어난 1950년에는 덕수궁내 북한군이 주둔하여 미군의 포격으로 없어질 뻔한 일이 있었다. # 당시 인천 상륙 작전을 성공한 뒤, 서울로 빠르게 진격하던 미군은 남산과 덕수궁 일대를 사정거리에 두게 되었다. 이때 북한군이 덕수궁에 숨어들자 미군은 덕수궁을 포격해야 할 상황에 놓였다. 그러나 당시 미군 포병장교였던 제임스 해밀턴 딜 중위는 "한국의 문화유산인 덕수궁을 파괴하는 것은 양심에 걸린다"라고 고민하던 끝에 북한군이 덕수궁에서 빠져나가 을지로로 향할 때 포격을 개시했다. 만약 딜 중위가 곧바로 포격을 가했으면 덕수궁은 파괴되었을 것이기에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1996년 해밀턴에게 정식으로 감사패를 전달하여 감사의 뜻을 표했다.
그러나 전쟁 이후로도 덕수궁은 부분적으로 훼손당했다. 1960년대 초반 돌담이 헐리고 창살담으로 개조되었으며, 1970년대에 태평로가 확장되면서 대한문은 태평로 위에 섬처럼 고립되어 버렸고, 결국 나중에 보다 뒤 편으로 옮겨졌다.
| 1970년의 대한문 | 1911년의 덕수궁 권역 |
붉은색이 1911년의 덕수궁 권역이며, 노란색이 현재 덕수궁 영역이다. 대한문(大漢門)은 원래 지도의 붉은색에서 동하단의 끝에 있었다. 그리고 파란색은 구 주한미국대사관, 지금은 미국 대사관저인 하비브 하우스이고 녹색은 주한영국대사관의 영역으로 영국대사관과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이 세워져 있다.[25]
경운궁에서 덕수궁으로 궁호를 변경하게 된 경위에 대해 국가유산청의 국가문화유산포털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고종에게 왕위를 물려받은 순종이 창덕궁으로 옮겨가면서 고종에게 장수를 비는 뜻으로 ‘덕수’라는 궁호(공덕을 칭송하여 올리는 칭호)를 올린 것이 그대로 궁궐 이름이 되었다.
또 2009년 문화재청이[26] 발간한 《조선시대 궁궐 용어해설》 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전략) 궁호에 '수(壽)'가 포함된 것은 선왕의 장수를 기원하기 함이다. (중략) 이들 궁호는 건물이 남아있다고 해서 계속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상왕의 붕어와 동시에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고종의 경우도 순종에게 황제의 자리를 강제로 양위했기 때문에 서로 다른 궁을 사용하게 되었다. 이 때 순종은 태황제의 궁호로 '덕수(德壽)'를 택했고, 고종의 거처인 경운궁은 그 때부터 덕수궁이 된 것이다. (중략) 국민들은 나라를 뺏긴 국민으로서 조선의 마지막 왕이라고도 할 수 있는 고종에 대한 애틋함과 그리움을 표현하기 위해 계속 덕수궁이라는 궁호를 계속 사용한 것이다.
문화재청, 《조선시대 궁궐 용어해설》, 2009, p.311
그런데 순종실록을 보면 순종이 창덕궁으로 이어하기 전부터 쓰이고 있었고, 순종이 덕수를 지어올린 게 아니라 궁내부 대신 이윤용이 덕수로 정하였고 순종이 윤허하였다는 내용이 나온다.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 이윤용(李允用)이, ‘태황제궁의 호망단자(號望單子)를 덕수(德壽)로, 부(府)의 호망단자를 승녕(承寧)으로 의정(議定)하였습니다.’라고 상주(上奏)하니, 윤허하였다.
순종실록 1권, 순종 즉위년 8월 2일 양력 1번째기사 1907년 대한 광무(光武) 11년 궁내부에서 태황제궁의 칭호를 덕수로 하고 부의 칭호를 승녕으로 할 것을 아뢰다 #
그리고 8월 6일 신기선의 상소에서 덕수궁이 쓰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삼가 바라건대 이제부터 종묘의 축문에도 옛 규례를 준행하여 ‘신’ 자를 쓰고 폐하께서도 또한 태황제 앞에서 반드시 ‘신’이라고 일컬을 것이며, 이번 덕수궁(德壽宮)에 공손히 올리는 책문(冊文) 가운데서도 전례대로 ‘신’ 자를 쓰소서.
순종실록 1권, 순종 즉위년 8월 6일 양력 2번째기사 1907년 대한 융희(隆熙) 1년장례원 경 신기선이 관례에 대하여 상소를 올리다 #
덕수라 정한 궁내부 대신 이윤용이 어떤 인물인가를 살펴보면 이완용에 의해 궁내부 대신 자리에 오른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이복동생이 이완용으로 그 역시 매국행위로 등재된 친일반민족행위자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헤이그 특사를 보낸 고종의 퇴위 작업을 이완용에게 일임하였고 이완용 등은 고종에게 황태자에게 정사를 대리할 것을 건의하였다. 강압에 못 이긴 고종은 대리청정을 하게끔 하였으나 이완용은 대리를 황제 양위로 바꾸는 작업을 하였다. 실제 양위식에 고종도 순종도 당사자는 참여하지 않고 대리인 2명이 그 자리에 참석하는 희한한 즉위식 작업을 하였던 것이다.[27] 양위식은 고종 황제와 순종 황제가 직접하지 않고 두 명의 내관들이 대신 하였다.[28]
각 부문의 유사(有司)들은 자기 직책을 부지런히 수행해야 하겠으나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 박영효(朴泳孝), 시종원 경(侍從院卿) 이도재(李道宰), 전 홍문관 학사(前弘文館學士) 남정철(南廷哲)은 직책이 더욱 중요한데도 불구하고 거세게 직책을 회피하였으니 그 진상을 덮어둘 수 없습니다.
순종실록 1권, 순종 즉위년 7월 21일 양력 3번째기사 1907년 대한 광무(光武) 11년이완용, 조중응이 직책을 회피한 박영효, 이도재, 남정철 등을 탄핵하다 #
"평리원 재판장(平理院裁判長) 조민희(趙民熙)의 보고서를 받아보니, ‘피고 박영효(朴泳孝), 이도재(李道宰), 남정철(南廷哲)의 죄안을 심리한 결과 피고들은 모두 궁부(宮府)의 중임을 띠고서 황태자(皇太子)가 정사를 대리함을 진하(陳賀)하는 예식을 거행할 때 들어와 참가하지 않고 혹은 병을 핑계대기도 하고 혹은 통지를 받지 못하였다는 등의 말들로 공술하였습니다. 더없이 중대한 예식을 태연히 회피하였으니 처벌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피고들은 모두 《형법대전(刑法大全)》 제226조의 관리들이 임명받았거나 재임 기간에 일을 당하여 사고로 핑계대거나 병이 있다고 핑계하고 회피하는 자는 중한 법조문에 의하여 각각 태형(笞刑) 80대에 처한다는 율문을 적용할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평리원에서 원래 제기한 법조문에 의거하여 처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순종실록 1권, 순종 즉위년 8월 22일 양력 3번째기사 #
이완용은 대리작업을 회피한다는 이유로 박영효 등 궁내부 대신들을 탄핵하였고 그 자리에 자신의 이복서형인 이윤용을 앉혔다.[29]
'덕망 높이 오래오래 사시라'는 의미를 가진 덕수궁은 역사적으로 퇴위한 군주가 머무는 궁궐에 붙여지던 이름들 중 하나였다. 남송의 고종이 효종에게 양위한 후 머문 궁을 덕수궁이라고 했다.[30] 조선에서도 태조 이성계가 퇴위한 후 머문 궁의 이름이 덕수궁이었는데, 이때는 정종이 개성으로 환도하여 덕수궁 역시 거기에 있었으나, 태종 즉위 후 다시 한양으로 천도한 후 이 곳에서의 이성계의 거처도 덕수궁으로 불렸다. 이처럼 덕수궁은 퇴위한 상왕이 거처하는 궁궐을 지칭하는 보통명사였다. 상왕의 거처를 항상 덕수궁으로 부른 것은 아니다. 덕수궁 외에도 태종의 퇴위 후 거처인 '수강궁'이나 충렬왕이 충선왕에게 양위 후 머문 '덕자궁'(德慈宮)처럼 다른 명칭도 존재했다. 덕수궁이란 명칭은 이러한 몇 가지 명칭들 중 하나였던 것이다. 덕수궁 명칭은 퇴위한 군주가 머무는 동안 일시적으로 붙는 명칭에 가까우며, 해당 상왕(상황)이 사망하면 더 이상 덕수궁으로 불리지 않고 원래 궁 이름으로 환원되었다.
이처럼 이완용이 궁내부에 심은 친일파 이윤용의 의도 하에 고종퇴위작업의 일환으로 물러난 임금에게 부여하는 뜻의 보통명사인 덕수라 이름지은 것이다.[31]
덕수궁으로 변경된 이유가 이와 같기 때문에 경운궁으로 궁호를 환원해야 한다는 사회적 논의가 지속적으로 일었다.
2010년 문화재청은 사적 명칭 개선 대상에 덕수궁을 지정하였고 2011년 9월 덕수궁의 경운궁 명칭 변경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하여 총 3,008명 중 반대 914명 (30.4%) 찬성 2,015명 (67%) 기권 79명 (2.6%)의 여론결과를 얻었다. 그리고 12월 '경운궁' 환원에 대한 공청회가 개최되었다. # # #
공청회에서 나온 덕수궁 유지 측의 주된 입장은 "100여 년 이상 사용돼 이미 사회적으로 정착된 명칭이므로 이를 바꿀 경우 사회적 경제적 비용이 커서 혼란을 초래할 수 있으므로 현행대로 유지해야 한다" 였고, 경운궁 환원 측의 주된 입장은 "1611년부터 300여 년간 사용돼온 역사적인 명칭이며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겨갔다가 경운궁으로 돌아와서 대한제국을 선포한 이후에는 대한제국 황실의 명실상부한 법궁이었으나, 1907년 궁궐명칭이 덕수궁으로 개칭된 것은 일본 제국주의의 압력에 의해 고종이 황제위를 순종에게 양위한 뒤 이전 황제의 거처라는 의미를 갖는 것이므로 원 명칭으로 회복해야 한다"였다.
이후 문화재위원회 사적분과(위원장 노중국)는 2011년 12월 14일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린 회의에서 덕수궁 명칭 변경 문제를 심의에 부친 결과 경운궁으로 명칭을 변경해야 할 이유가 충분하지 못하고, 그에 대한 반대 의견도 많은 만큼 명칭 변경 안건 심의 자체를 '보류'하였다. #
문화재청의 보류 결정은 창경궁이 일제강점기를 거쳐 광복 이후 40여 년 동안 '창경원(昌慶苑)'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나 1986년 창경궁으로 환원해 복원된 것은 그럼 사회적 경제적 비용이 크고 혼란이 아니어서 환원한 것인지의 모순이 있다. #
게다가 태조의 상왕시절 붙였던 덕수는 태조 사후 원래 이름인 소어궁(所御宮)으로 환원되었다. 덕수궁이란 한시적인 기간에 한해 쓰인 보통명사이지 고유명사가 아니다. 이 같은 관례를 볼 때 덕수궁의 이름이 그 붙여진 과정도 문제가 있지만 문제가 전혀 없었다 하더라도 고종 사후에는 원래 이름인 경운궁으로 환원되는 것이 맞다. 보류 결정 이후로도 경운궁 환원 요구는 지속되고 있다. #
1980년대에 돌담을 복원하면서 덕수궁은 제 모습을 되찾기 시작했다. 1988년에 경희궁지를 발굴하는 것을 시작으로 1990년대에 창덕궁과 경복궁, 창경궁의 전각들이 차차 복원되기 시작했다. 2010년부터 덕수궁 또한 예전의 모습을 찾기 위해 공사에 들어갔다.
현재 창덕궁의 규장각 및 선원전 권역 복원, 인정전 내. 외 행각 복원 등은 완료되었다. 2016~ 2017년 사이의 3단계 작업에 중화전 행각 복원, 조원문 복원, 금천교 복원, 광명문 이건 등이 포함되었다. 언제 있지 모르는 4단계 복원에는 주한미국대사관 관저가 용산구로 이전하는 대로 선원전 및 덕수궁의 양관(洋館) 중 하나로 석조전과 함께 평면도가 남아 있는 돈덕전이 들어갈 예정이다.
현재까지 국가유산청은 덕수궁 복원 사업을 총 4단계에 걸쳐 수립해 놓았다. 1단계인 2010~2013년에 석조전 내부 복원, 덕홍전 주변 행각지 발굴 및 복원, 준명당 및 즉조당 보수공사 등이 진행되고 있으며 석조전의 경우 2014년 10월에 '대한제국역사관'이라는 타이틀로 복원이 완료되었다.
다만 덕수궁은 경희궁처럼 궁역의 대부분이 민간에 매입된 상태이다. 4단계 복원 사업 중 하나이자 양관 건물인 돈덕전의 경우 주한미국대사관 관저 동쪽 담장과 도로 사이에 위치하고 있어 돈덕전과 선원전 일원의 복원에 많은 차질이 우려된다. 물론 주한미국대사관 관저가 이전하는 대로 담장을 세우는 등 덕수궁의 궁역을 차례로 복원할 예정이지만 이미 중명전을 중심으로 한 옛 수옥헌 권역위에 세워진 예원학교와 선원전 권역 서편에 세워진 구세군 교회, 수학원이 있던 홍원 일원을 점유한 주한영국대사관과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과 합의를 봐야 하는 실정이다.
특히 정동 1-23에 위치한 구세군중앙회관은 덕수궁 옛 궁역 내 건축된 건물이나, 1926년 완공된 그 자체로 역사성을 가진 지정문화재이다. 만일 덕수궁 전역을 복원한다면 이 건물은 창경궁 대온실처럼 남겨 궁내 존치하거나 적절한 부지로 이전할 가능성이 높다. 과거 《덕수궁 배치도》와 현재를 비교하면 구세군회관 자리에도 덕수궁 전각이 있었던 것이 확인 가능하지만, 문화재를 복원하겠다고 기존의 문화재를 파괴하는 것은 비상식적이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궐내각사 터가 위치한 동쪽 궁역은 이미 세종대로와 서울광장 부지로 편입된 상황이라 교통 혼잡 등의 이유로 복원하지 못 할 가능성이 높다. 2014년에 수립된 도시계획에 따라 세종대로가 축소될 계획이기는 하나, 세종대로뿐만 아니라 서울광장 부지조차 옛 덕수궁 동쪽 궁역에 포함되기 때문에 차선 한 두 개를 줄여서 되는 문제가 아니라 아예 세종대로를 지금의 숭례문 방향이 아닌, 남산3호터널 방면으로 틀어 버려야 한다. 이처럼 현재 옛 덕수궁 궁역에 포함되는 주변 부지에는 근대 이래로 덕수궁의 역사에 필적할 만큼 가치 있는 문화재와 주요 시설이 들어서게 되면서 덕수궁의 완전 복원은 더욱 요원한 일이 되었다.
덕수궁의 복원이 힘든 데에는 석조전과 중화전, 준명당의 서쪽 행랑채, 담장 측면의 배치가 처음부터 어긋나 있다는 것도 한몫하고 있는데, 이는 훼손이나 복원 과정에서 어긋난 게 아니다. 아무리 덕수궁이 동서양의 건축이 한데 어우려져 있다는 평을 받지만 전각 배치가 어긋난 탓에 부조화스러운 일면이 있다.
이렇게 된 것은 중화전이 즉조당 등의 위치에 맞게 세워졌기 때문이었다. 고종이 경운궁으로 환궁할 때 중화전은 아직 세워지기 전이었다. 본디 석조전이 먼저 세워질 계획이었으나 전통 방식의 건축과 달리 기초 공사가 1년이 지나도록 계속 진행되었다. 이 때문에 법전의 필요성이 대두되자 고종의 지시로 결국 중화전이 석조전보다 빨리 세워졌다. 결국 중화전 서쪽 행랑채를 완전히 복원하려면 석조전의 정원을 밀어버리는 것 외엔 달리 대안이 없다.
그 외에도 복원해야 할 전각이나 양관들이 많지만, 양관들의 경우 현재까지 최소한 평면도가 온전하게 남아 있는 돈덕전과 제 위치를 고수 중인 정관헌, 석조전, 중명전과 달리 현존하지 않는 구성헌이나 환벽정(環碧亭) 등은 그 평면도 등이 아직도 발견되지 않아 복원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실제로 경복궁 내 서양식 건물인 관문각은 복원 자료가 없어 터만 남겨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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