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풍정기(淸風亭記)
지정(至正) 기축년(1349, 충정왕 1) 여름 4월에 내가 근친覲親하러 고향에 돌아가는 길에 낙생역樂生驛에 머물렀는데, 광주 목사廣州牧使 백군화보白君和父가 서한을 보내 초청하면서 말하기를 “관사 북쪽에 옛날 청풍정의 터가 있기에, 네 기둥을 세워서 집을 하나 지었는데, 실로 한 고을의 승경이라 할 만하다. 그대가 그 기문을 지어 주면 좋겠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때는 내가 가는 길이 바빠서 우선 회답하기를 “뒤에 서울에 갈 것이니, 그때 한번 가서 구경해 보고 기문을 지어도 늦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듬해에 광주에 갔더니 백군은 이미 부름을 받고서 조정에 돌아갔고, 이군(李君) 모(某)가 반년 전에 후임자로 와 있었다. 그 시절이 바야흐로 혹독하게 더운 때라서 기식(氣息)이 가늘게 이어지는 것이 실낱과도 같았다. 그래서 이른바 청풍정이라고 하는 곳에 올라가서 기둥에 기대어 옷깃을 풀어 헤쳤더니, 정신이 상쾌해지고 모발이 쭈뼛해지는 것이 마치 매미가 썩은 도랑 속에서 껍질을 벗고 진애(塵埃) 밖으로 빠져나온 것만 같았다.
이군이 술자리를 베풀고는 조용히 말하기를 “네 개의 기둥으로 세운 그 규모가 간단하기는 간단하나, 아침저녁으로 햇빛이 비치는가 하면 동쪽과 서쪽으로 빗발이 들이쳐서 이 자리를 찾는 손님들이 모두 아쉽게 여기곤 하였다. 그래서 내가 그 양쪽에다 처마를 잇대고 남쪽에 각각 다섯 자의 추녀를 달았으며 북쪽도 그렇게 하였더니, 조금 넓어지면서 깊숙한 맛이 우러났다. 이에 흙손질을 끝내고서 단청을 하려는 참에 그대가 마침맞게 찾아와 주었다. 그러니 술잔을 들어 낙성을 축하하고 연월을 기록하여 기념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라고 하였다.
기문을 써 주기로 한 것은 내가 이미 그 전에 백군에게 허락한 터였다. 그래서 정자가 무너져서 없어진 것이 몇 년이나 되었는지 물어보았더니 부로(父老) 중에도 아는 자가 있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지금 무너진 옛 정자를 다시 세운 것이야말로 정자를 새로 처음 세운 것과 같다고도 할 것이다. 그런데 《춘추(春秋)》의 경문(經文)에 ‘지었다〔作〕’라고 쓴 것 중에는 그렇게 지으면 안 되었다는 의미로 말한 경우도 있고1), 또 노(魯)나라 장부(長府)를 하필 새로 지어야 하느냐고 말한 그 속에도 성인(聖人)이 가르침을 내린 은미한 뜻이 들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2). 내가 광주 고을의 형세를 살펴보건대, 삼면이 모두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북쪽이 비록 광활하게 멀리까지 보이기는 하였으나 지세가 낮고 평평하였으므로, 공해(公廨)와 민가가 마치 우물 속에 들어 앉아 있는 것과 같았다. 그러니 빈객이 이곳에 와서 볼 적에 어찌 비루한 곳보다 괴롭게 느끼기야 하겠는가마는, 몇 걸음도 되지 않는 사이에 이런 상쾌한 정자가 있을 줄은 아예 생각하지도 못할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 정자를 지은 것은 성인이 볼 때에도 비난의 대상에 속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쓰게 된 것인데, 청풍이라고 이름 붙인 그 뜻에 대해서는 내가 정자에 처음 올라갔을 때에 그냥 토로해 본 느낌 속에 다 들어 있으니, 다시 췌언(贅言)을 하지 않으련다. 백군은 나와 동년(同年)이요, 이군은 나의 집우(執友)인데, 정사를 행하면서 모두 염근(廉勤)하다는 명성을 얻었다. 경인년(1350, 충정왕 2) 중하(仲夏)에 적다.
淸風亭記
至正己丑夏四月。覲省還鄕。行次樂生驛。廣牧白君和父走書而邀之。且曰。官舍之北。得古淸風亭基。作四柱屋。實一州之勝。請記之。余行忙姑復之。曰後當如京。可一至而寓目焉。爲記未晚也。明年至廣則白君已召還。而李君某代任半歲矣。時方酷熱。氣息如縷。乃登所謂淸風亭。倚柱而披襟。精神淸爽。毛髮蕭颯。如蟬蛻溷濁而出乎塵埃之外。李君置酒從容言曰。四柱之制。簡則簡矣。朝夕陽暉。東西雨脚。坐客病焉。余翼其兩旁。而作南榮各五尺。北亦如之。稍廣且深。旣圬而將丹碧之。而子適至。盍擧觴落之。而書歲月以志。余旣許白君矣。乃問亭之廢幾年。而父老無有知之者。則今之起廢實同於刱新。春秋書作。有謂不宜作者。又謂魯長府何必改作。聖人垂敎之意微矣。余觀廣之爲州。三面皆高山。北雖曠遠。地勢夷下。公廨民居。如在井底。賓客之來。寧病于卑陋。而不知跬步之間有此爽塏。則此亭之作。當不在貶例。余於是書。若夫淸風之義。白說盡之。余不復贅。白君同年。李君執友。爲政俱有廉勤聲。庚寅仲夏。記。
[주1] 춘추(春秋)의 …… 있고 :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장공(莊公) 29년에 “연구라는 마구간을 새로 지었다고 공자가 기록한 것은 때에 맞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新作延廏 書不時也〕”라고 하였고, 희공(僖公) 20년에 “새로 남문을 세웠다고 공자가 기록한 것은 때에 맞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新作南門 書不時也〕”라고 하였다. 또 정공(定公) 2년의 경문(經文)에 “치문과 양관을 새로 지었다.〔新作雉門及兩觀〕”라고 하였는데, 이에 대해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에서 “공자가 새로 지었다고 기록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크게 수축했기 때문이다. 옛 건물을 수축한 것은 기록하지 않는 법인데, 여기에서는 왜 기록하였는가. 비난하는 뜻을 보여 주기 위해서이다. 무엇을 비난한 것인가. 공실에 힘쓰지 않은 것을 비난한 것이다.〔其言新作之何 脩大也 脩舊不書 此何以書 譏 何譏爾 不務乎公室也〕”라고 하였다.
[주2] 노(魯)나라 …… 것이다 : 노나라 사람이 장부(長府)라는 창고를 만들자, 민자건(閔子騫)이 “옛것을 그대로 쓰면 어때서 하필 새로 지어야만 하는가.〔仍舊貫如之何 何必改作〕”라고 말하니, 공자가 “저 사람이 말을 하지 않을지언정, 말을 하면 꼭 도리에 맞게 한다.〔夫人不言 言必有中〕”라고 평한 말이 《논어(論語)》 선진(先進)에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