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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동서원 사실〔易東書院事實〕
우리나라 서원의 설치는 오늘날에 가장 성행하니 장차 서원이 있지 않은 고을이 없게 될 것이다. 도처에 모두 그렇게 되어 혹은 한 고을에 몇 개의 서원을 세우게 될 것이니, 이는 일을 좋아하여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부득이한 바가 있다.
우리 고을은 문사(文士)1)를 숭상하고 산천이 수려하지만 유독 서원이 없는데, 무슨 까닭인가? 선정(先正) 좨주(祭酒) 우탁(禹倬)2)은 고려 말에 유림(儒林)의 풍도와 절조의 종주(宗主)로서 이 고을에 살았었다. 그 분이 평생에 한 일을 상고해보면 임금의 나쁜 행실을 곧게 간언하여 임금이 방종(放縱)하지 못하게 하였고3), 무당(巫當)의 신당(神堂)을 부수어 사술(邪術)이 통하지 못하게 하였다4). 그의 맑은 기풍(氣風)과 굳센 절의는 이미 완악한 사람들에게 염치(廉恥)를 알게 하였고5) 나약한 자들에게 뜻을 세우게 하였으며, 더욱 역학(易學)에 열정을 쏟아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이ㆍ락(伊洛)의 물줄기6)를 거슬러 올라가서 복희(伏羲)와 공자(孔子)의 도를 들을 수 있게 하였다. 선생이 서거(逝去)한 때로부터 지금 200여 년이 지났지만 고을 사람들이 아득히 회상하고 우러러 사모함을 스스로 그만두지 못하는 것은 가을 하늘에 한 마리의 독수리7)일 뿐만 아니라 단산(丹山)의 고고(孤高)한 봉황8)과 같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참으로 “백세의 위에서 떨쳐 일어남에 이를 듣고 흥기하지 않는 자가 없다.9)”라고 이를 만한데도, 그 사당을 지금까지 세우지 못하였으니 이 또한 우리 고을의 한 가지 크게 잘못된 일이다. 간간이 고을의 여러 벗들과 말이 여기에 미쳐서는 일찍이 분개하며 탄식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무오년(1558, 명종13) 중춘(仲春) 보름에 부포(浮浦)10)에 사는 금난수(琴蘭秀)11)가 나의 서재(書齋)12)에 와서 잠을 잔 뒤에 오담(鰲潭)의 승경에 대해 말하기를 “이곳은 사당을 세우고 서원을 지어 학문하고 정양(靜養)할 만한 곳이다.13)”라고 하였다. 그다음 날 금군(琴君)과 함께 그곳에 가서 유람하고 두루 살펴보며 그 지세(地勢)의 내력을 다 관찰하였다. 산은 청량산(淸凉山)에서 한 줄기가 서남으로 뻗어내려 오면서 높고 낮음을 이루다가 갑자기 우뚝 솟구쳤다가 이곳에 이르러 다하였다. 영지산(靈芝山)이 북쪽에 우뚝하고 파둔산(破鈍山)이 남쪽에 웅장하고 부용산(芙蓉山)이 서쪽에 수려하고 취병산(翠屛山)이 동쪽에 솟아있어 사방을 돌아보면 구름 낀 산들이 겹겹이 고리처럼 둘러싸고 있다. 앞에는 큰 시냇물이 흐르고 있는데, 이 시내가 바로 분천(汾川)이다. 태백산에서 아래로 흘러 내려 청량산을 지나 수백 리를 내달리다가 여기에 이르러 굽이쳐 소(沼)를 이루었다. 맑고 깊으며 옥빛처럼 푸르러 마치 신령(神靈)한 동물(動物)이 그 속에 살고 있는 것 같은데, 바로 이른바 오담(鰲潭)이다. 오담 가에는 또 누른 띠풀이 수십 경(頃)이 있어 경작하여 농사를 지을 만하였다. 둘이 서로 기뻐하며 말하기를 “우리 고을에 서원 짓는 일을 그만둔다면 모르되 짓는다고 한다면 반드시 이 자리에 지어야 한다.”라고 하였다.
날이 밝은 다음 날에 퇴계에 가서 선생을 찾아뵙고 이 일을 아뢰었다. 며칠 뒤에 선생이 편지를 보내 이르기를 “우리 고을의 선정(先正)으로 우 좨주(禹祭酒) 같은 풍모와 절의를 지닌 분이 동방의 고금에 어찌 많겠는가? 학교를 세우고 현인을 제사하는 것이 이미 세상에 시작되었는데도 우리 고을만 빠졌으니, 이는 우리들의 부끄러움이다. 다만 그대들은 힘이 없어서 주창하여 서원을 짓기가 어렵고, 나 같은 사람 또한 유력자(有力者)가 아닌 데다가 바야흐로 시기를 받아 위태로운 즈음에 처하여 이같이 세속을 놀라게 할 일을 창도할 용기를 내기가 어렵다. 가령 돌아보지 않고 일을 한다고 하더라도 본현(本縣 예안현)의 힘으로는 미칠 수 없고, 또 지난날에 얼굴을 맞대고 의논한 바와 같이 지금 만약 이 기회를 잃어버린다면 후세에 또한 다시는 여기에 생각이 미치는 사람이 없어서 아마도 마침내 천고의 한이 될까 두려우니 크게 탄식할 만하다. 그러나 이미 좋은 곳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생각을 금할 수 없어서 가까운 시일에 짬을 내어 한 번 가겠으니, 그때가 되면 서로 알려서 모여 살펴보고 만약 그곳이 참으로 서원을 세우기에 합당하다면 천천히 다시 상의해 보는 것이 어떻겠는가? 옛말에 이르기를 ‘뜻이 있으면 마침내 이루어진다.[有志竟成]’라고 하였으니, 지금 어찌 이 일만 그러하지 않겠는가?”14)라고 하였다.
이어 4월 8일에 선생이 인편으로 편지를 보내어 이르기를 “전일의 약속을 실천하려고 한다.”라고 하기에 바로 금군(琴君)과 함께 오담(鰲潭)에서 기다렸다. 저물녘에 선생이 계상(溪上)으로부터 와서 오담 가를 지팡이 짚고 소요하며 말하기를 “가히 서원을 세울 만한 곳이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즉시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은 바로 선생의 편지에서 말한 바 ‘사세와 재력이 미치지 못하니 우선 그 가능한 기회를 기다리자.’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6년 뒤인 계해년(1563, 명종18) 봄에 포산(苞山)의 곽황(郭趪)15) 공(公)이 이 고을에 현감(縣監)으로 부임하였다. 이 고을은 본래 십실(十室)의 작은 현(縣)으로 토지가 척박하고 백성들이 빈곤한데도 부역(賦役)이 많아서 전후로 부임한 현감들이 모두 이 일을 어렵게 여겼다. 공은 이에 조용히 진정(鎭定)시키고 너그럽게 어루만져 무릇 백성들에게 이로운 일들을 하지 않는 것이 없었고 백성들에게 해로운 것을 제거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화려함을 버리고 실질을 취하며, 자기에게는 검약하고 백성에게는 넉넉하게 하며, 굶주린 사람들을 먹여주고 추운 사람들에게 옷을 주고 고생하는 사람들을 편하게 해주자 온 경내가 기뻐하며 서로 경축하며 말하기를 “훌륭한 원님을 얻었다.”라고 하였다.
3년이 지난 을축년(1565, 명종20)에 고을이 크게 다스려져서 관청의 저장(貯藏)과 백성들의 비축(備蓄)이 늘어나 상하 모두가 풍족하게 되자 흩어져 떠돌고 도망한 백성들이 사방에서 돌아와 생업을 즐기고 일을 흥겹게 하였다. 공이 이에 민력을 쓸 만하다고 여겼다. 이에 병인년(1566, 명종21) 봄에 목재를 베고 기와를 구워 관사(官舍)를 수리하고, 또 남은 기와 9천 장을 기부하여 여러 생원(生員)에게 부탁하여 주관하게 하니, 이에 다시 모의하여 사당과 서원을 짓기로 하였다.
오내[烏川]에 사는 김부필(金富弼)16), 금응협(琴應夾)17) 등이 힘써 이 논의에 찬동하자 온 고을의 인사들이 모두 성대한 일이라 여기고 재력(財力)을 내어 그 공사를 돕고자 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에 김군(金君) 등이 동지들과 함께 선생에게 아뢰고 온 고을의 장로들을 초청하여 모아 그 일을 의논하여 결정하였다.
여러 사부(士夫) 집안의 자제(子弟) 중에서 글을 배울 만한 나이가 된 자에게 그 빈부에 따라 고하를 정하여 재력을 차등하여 출연하도록 하니, 대략 160여 가구에서 곡물 170여 석(石)을 얻었고, 김부필(金富弼) 군이 낸 곡물(穀物)은 다른 사람들의 몇 배가 되어 더욱 성의를 더하였다. 본래 비축하였던 곡물 70여 석을 합하여 그 비용의 재원으로 하여 그해에 기와를 굽고 그해 가을에 재목(材木)을 구해 모았다. 이 일을 담당한 사람은 김부필(金富弼), 금보(琴)18), 금응상(琴應商)19), 우극창(禹克昌)20), 금응협(琴應夾), 금난수(琴蘭秀) 등이 가까이 거주하며 공사의 감독을 가장 부지런히 하였고, 나도 여기에 참여하였다.
현감이 이에 처음부터 끝까지 크게 힘을 써서 일을 감독하는 관리(官吏)와 일을 하는 인부를 모두 관아에서 보내 주었고, 경내(境內) 여러 사찰의 중들도 당번을 나누어 와서 일하게 하였다. 또 목수 중에 실력이 있는 자를 선발하여 백운지(白雲池)21)에 보내니, 서원을 짓는 근본이 이에 정해졌다. 또 창고에 있는 쓰고 남은 곡물 40석과 지포(紙布) 15필을 내주어 그 비용에 충당케 하였으며, 안동 부사(安東府使) 윤복(尹復)22) 공(公)이 또한 곡물 10석과 큰 목재 10여 조(條)를 보내 쓰게 하니 이에 온 경내의 사람들이 멀고 가깝고 크고 작음을 가리지 않고 바람에 휩쓸리듯 감히 뒤로 회피하는 이가 없었다.
이는 비록 한 고을의 사람들이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한 것이라고 하나 현감의 힘이 아니었다면 진실로 이러한 큰일을 이룰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앞서 말한 오담(鰲潭)은 비록 서원을 지을 만한 땅은 있을지라도 적합한지를 다투는 자들이 오히려 마땅치 않다고 여겨 혹자는 전현(前賢 우탁)이 살던 곳에 지어야 마땅하다고 하고 혹자는 마땅히 풍수의 이점을 살펴야 한다고 하여 마침내 퇴계 선생의 말씀에 따라 결정하였다.
금년[1567] 봄에 공사를 시작할 때 앞의 여러분과 온계(溫溪)의 이녕(李寗)23), 오내[烏川]의 김부의(金富儀)와 김부륜(金富倫), 부포(浮浦)의 신흡(申洽)24), 손흥효(孫興孝)25), 지사마(池沙麻), 우치무(禹致武), 월천(月川)의 채운경(蔡雲慶)26) 등이 당번을 나누어 서로 교대하면서 닷새를 기한으로 혹은 유숙하면서 감독하였다. 그밖에 분천(汾川)의 이숙량(李叔樑)27), 서촌(西村)의 유빈(柳贇)28) 등도 때때로 와서 감독하였다. 무릇 일을 감독한 사람들은 부지런하고 게을리 함과 많이 하고 적게 함의 차이는 있다.
관리는 그 직분을 다하고, 장인(匠人)들은 기교를 다하여 새벽부터 밤까지 힘을 다하여 감히 게으름을 피우는 자가 없어서 이해 여름 4월에 당(堂)이 완성되었다. 앞줄의 여섯 칸[楹]을 명교당(明敎堂)이라 하고, 동서로 각각 온돌방(溫突房)이 있어 동쪽은 정일재(精一齊)라 하고 서쪽은 직방재(直方齋)라 하였다. 직방재의 북쪽 장서각(藏書閣)을 광명실(光明室)이라 하고, 당(堂)의 뒤 조금 동쪽에 사묘(祠廟) 세 칸을 지어 상현사(尙賢祠)라 하였다. 앞줄의 동서 양재(兩齋)는 각 세 칸으로 하여 동쪽을 사물재(四勿齋), 서쪽을 삼성재(三省齋)라 하고, 그 남쪽에 대문을 세워 입도문(入道門)이라 하였다. 서재(西齋)의 서쪽에 주방과 창고를 세우고 전체를 이름하여 역동서원(易東書院)이라 하였는데, 모두 퇴계 선생이 이름을 정하였다. ‘역동(易東)’이라 이름을 붙인 이유는 정관(丁寬)의 고사에서 “《주역》이 이미 동으로 가버렸다.29)”라고 한 말에서 취하였으니, 《역전(易傳)》을 참고하고 연구한 것은 진실로 좨주(祭酒) 우선생의 사업이었다.
이해(1567) 겨울에 현감 곽후(郭侯)가 남쪽으로 돌아가게 되자 이에 현감을 당(堂)으로 청하여 술자리를 베풀었다. 그는 조치한 모든 일에서 방법을 곡진하게 하지 않음이 없었는데, 경내에 있는 사찰의 전답 중에서 놀고먹는 무리들이 오랫동안 무단으로 점유한 것을 색출(索出)하여 역동서원에 귀속시킨 것이 이백여 부(負)30)나 되었다.
이에 김부필(金富弼), 이완(李完), 금응협(琴應夾), 김부륜(金富倫), 김부의(金富儀), 금보(琴輔)31) 등도 각각 헌납한 것이 있다. 토지를 출연함에 많고 적음의 차이가 있다. 재물이 풍족하지만 전답이 적어서 곡물로 대납한 사람은 박사희(朴士熹)32) 군(君)과 김생명(金生溟)33) 군(君)이다. 또한 많고 적음, 먼저하고 뒤에 한 차등이 있다.
또한 토지와 노비를 바쳐 부역 면제를 바란 사람이 몇 명 있었는데, 현감이 또한 그들의 뜻에 따라 허락하였다. 또 서원(書員)34) 한 사람과 한량(閑良) 여섯 사람을 서원에 소속시켜 서주(書廚)36)와 전곡(錢穀)37) 등의 임무와 사환(使喚)의 노역을 맡게 하되 별도로 기록하여 서원 안에 갖추어 두도록 하였다. 현감이 떠날 때 또 남아있던 포백(布帛) 25필과 곡물 70석을 내주니 무릇 전후에 걸쳐 내준 포목(布木)이 40필과 곡물이 110석이었다. 아! 현감은 이 일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그 마음을 다하였으니 다시 남은 것이 없다고 할 수 있다.
대개 인물의 융성하고 쇠퇴함과 지기(地氣)의 쇠하고 왕성함은 그 사이에 하늘의 운수에 달려 있지 않음이 없다. 생각하건대 좨주 선생은 빼어나고 우뚝한 자질로 쇠하고 어지러운 세상을 만나 때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서 재주를 거두고 감추어서 두문불출하고 생각에 잠겨 저 용문(龍門)38)의 남은 운치를 이으셨지만 후세에 민몰되어 들을 수 없게 된 지 오래이다. 그래서 점필재(佔畢齋)는 시를 지어 이르기를,
고려의 운세가 오백 년을 내려왔는데 麗運涵儲五百年
의외에도 말세에 이런 현인 있었네 不圖衰叔有斯賢
대궐에서 도끼 쥔 건 참으로 당개였고39) 彤庭持斧眞唐介
초가에서 경전 연구한 건 정현40)과 같았네 白屋窮經似鄭玄
향리에선 몇 명이나 덕행을 사모하나 鄕里幾人懷舊德
자손들은 오늘날에 황전에서 세금 내네 子孫今日稅荒田
아, 나는 일찍 희안의 뜻41)을 품었기에 嗟余早抱希顔志
홀로 큰 띠 떨치며 한바탕 탄식하네42) 獨拂儒紳一悵然 라고 하였으니 지금에 있어서도 알 수 있다.
다행히 지금 어진 임금이 위에 계셔 문운(文運)이 크게 번창하고, 우리 고을은 어진 현감을 얻어 온 고을의 의논이 합치되고 전에 하지 못한 서원을 건립함에 세상에 드문 길지(吉地)를 얻었다. 수백 년 동안 민멸되었던 선생의 자취가 오늘날에 드러나게 되었으니 이것이 어찌 하늘의 운수가 아니겠는가? 우리 좨주의 후손들 중에서 이 고을에 사는 사람과 다른 고을에 흩어져 사는 이가 한 둘이 아니다.
비록 후손들이 매우 쇠잔하고 곤궁하다고 할지라도 어찌 이 일로 인하여 혹 선조의 유풍(遺風)에 감동받고 선조의 유훈(遺訓)에 감복(感服)하여 분연히 일어나 일을 이루는 사람이 있지 않겠는가? 무릇 이 한 고을부터 원근의 선비에 이르기까지 여기에서 놀고 여기에서 배우며 그 덕을 흠모하는 나머지에 체득한 사람이 있어 날로 새로워지고 달로 성대해질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배움이 넓어지고 물음이 자세하고 생각이 신중하고 분별이 명백하고 절차탁마(切磋琢磨)하여 행실을 돈독하게 하는 실질을 다하게 되고, 이로 말미암아 주공(周公)과 공자(孔子)의 도를 들어도 좋고, 이로 말미암아 복희씨(伏羲氏)와 문왕(文王)의 마음을 살펴도 좋을 것이다.
게다가 이 오담(鰲潭) 땅은 거친 억새와 덩굴 풀에 뒤덮였던 곳으로 호미와 쟁기와 낫을 들고 왕래한 지 몇 년인지 모르겠으나 무오년(1558, 명종13)에 찾아가서 살펴본 뒤로부터 지금에 이르렀고, 또 십 년이 지나서 서원이 완공되었으니 이 또한 하늘의 운수(運數)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일의 전말(顚末)에 대해 그 사실을 적어 후세에 전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장차 뒷날 서원에 와서 배우며 성현(聖賢)의 도를 구하고 좨주(祭酒)의 유풍(遺風)을 듣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선생의 말로써 본보기 삼기를 원하고, 바라건대 선생께서는 후학들을 밝혀주고 이끌어주기를 원한다. 정묘년(1567, 명종22) 겨울 끝자락에 조목(趙穆)이 감히 향인들의 뜻을 모아 퇴계서당(退溪書堂) 아래에서 기록하여 올리다.
易東書院事實
吾東書院之作。於今爲盛。將無邑不有。在處皆然。至或以一州之地。而立數書院者。是非好事而然也。誠有所不得已者存焉。以吾鄕文雅之尙。山川之秀。而獨闕焉。豈理也哉。而況先正禹祭酒倬。當麗季。以儒林風節之宗。實居斯土。考其平生所爲。觸拂君慝。使不得肆。擊碎淫祠。使不得逞。其淸風勁節。旣足以廉頑立懦。而尤留情於易學。使東人得泝伊洛之餘波。與聞羲孔之道。則自先生沒。至于今二百有餘年。鄕人所以遐想景慕而不自己者。非直秋天之一鶚。有若丹山之孤鳳。眞可謂奮乎百世之上。聞者莫不興起也。而其廟貌至今未立。是亦吾鄕之一大欠典也。間與鄕中諸友語及于玆。未嘗不慨然興歎。歲在戊午仲春之望。浮浦琴蘭秀來宿寒齋。遂道鰲潭之勝曰。此處可以立廟置院。爲藏修游息之所。厥明。與琴君往遊其地。徘佪瞻眺。以窮其面勢之所在。山自淸凉一枝西南來。逶迤起伏。振迅騰踔者至此而盡。靈芝峙于北。破鈍雄于南。芙蓉秀乎西。翠屛聳乎東。四顧雲山。合沓環擁。而前臨大川。川卽汾川。下流出乎太白。經于淸凉。崩奔數百里。至此匯而爲淵。澄深瑩碧。若有神物居于其中。卽所謂鰲潭也。潭上又有黃茅地數十頃。可以耕而食焉。相與懽喜曰。吾鄕書院之作。不爲則已。爲則必於斯。旣明之明日。拜先生于退溪。以是白焉。數日。先生貽書曰。吾鄕先正。如禹祭酒風節。東方古今。豈可多得。立學祠賢。旣昉於世。而吾鄕獨闕。此吾輩之恥也。但公等無力。難於倡作。如某亦非有力。而方處猜危之際。難勇於倡此駭俗事。假使不顧而爲之。本縣事力之不逮。又如前日面論者。今若失此幾會。後世亦不復有人慮及於此。恐遂成千古之恨也。可爲浩歎。然旣聞有佳處。懷不能禁。近當乘便一往。臨時相報會尋。若彼處誠合置院。徐徐更商議看。如何。古稱有志竟成。今何爲獨不然。迺四月八日。先生伻來書。諭以欲踐前約。卽與琴君。候于潭上。薄晩。先生自溪上戾止。杖屨逍遙其上曰。可以堂也。然而未克就志者。卽以如先生書中所云。事力之不逮耳。而姑待其可乘之機。後六年癸亥春。苞山郭公趪。來臨是邑。邑本十室小縣。地瘠而民貧。賦役多端。前後來官者。皆以爲難。公於是靜而鎭之。寬以撫之。凡有利於民者。靡不爲之。有害於民者。無不除之。去華而就實。約己而裕民。飢者以養。寒者以衣。勞者以逸。闔境懽然相慶曰得侯。越三年乙丑。一邑大治。公藏私蓄。上下與足。而流逋四歸。樂生興事。公於是。視民力之可用。迺於丙寅春。伐材陶瓦。以治官舍。而又推其餘瓦九千張。以付諸生員使主之。於是更相與謀立祠院。烏川金富弼,琴應夾等力贊斯議。一邑人士。咸以爲盛事。莫不欲出財力以助其役。於是金君等。與同志稟于先生。請會一邑長老。以議定其事。凡士夫家其子弟可齒於學者。視其豐瘠而低昂之。以爲出財力之差。則凡百六十餘家。得穀百七十餘石。而金君富弼所出穀物。視他人倍蓰而尤致意焉。合元來爲蓄穀七十餘石。以資其用。是年陶瓦。其秋鳩材。掌事者金富弼,琴輔,琴應商,禹克昌,琴應夾。琴蘭秀以居近監役最勤。而穆亦與焉。侯於是。大致其力。自始至終。凡董役之吏。執役之夫。皆官所予。而使境內諸寺僧人分番來役。又擇匠店之有實者。以白雲地歸焉。作院根本。於此定矣。又出倉中耗餘穀四十石。作紙布十五疋以助其費。安東府伯尹公復亦輸送。穀十石。大木十餘條以資之。於是闔境之人。無遠邇。無大小。靡然風動而莫敢後焉。是雖一邑之人。齊心幷力。而微侯之力。則固莫得以成此一段大事矣。然向所謂鰲潭者。雖有其地。而爭之者猶听听焉。或以爲宜就前賢所居。或以爲當看風水之利。卒以先生之語定焉。而今年春。始敦匠事。向之諸公及溫溪李寗,烏川金富儀,金富倫,浮浦申洽,孫興孝,池沙麻禹致武,月川蔡雲慶等。分番相適。五日爲限。或留宿而監董焉。其他如汾川李叔樑,西村柳贇等。亦時來監。凡監役人。以勤慢多小爲次。 吏竭其職。工殫其巧。晨夜展力。罔敢或怠。是夏四月堂成。前列六楹曰明敎堂。東西各有溫房。東曰精一齋。西曰直方齋。直方之北藏書閣曰光明室。堂後少東立祠廟三間曰尙賢祠。前列東西二齋各三間。東四勿。西三省。其南立大門曰入道。西齋之西立廚庫。總名之曰易東書院。皆先生所定也。曰易東云者。蓋取丁寬易已東矣之語。而參究易傳。實祭酒先生事業也。是冬。侯將南歸。於是邀侯于堂而觴之。凡于措置等事。無不曲盡其方。境內寺社田畓。久爲游手之徒所占。刷出而歸之院者二百餘負。於是金富弼,李完,琴應夾,金富倫,金富儀,琴輔等。各有所納。以出地多小爲次 其有豐於財而嗇於田。則以穀石代納者。若朴君士熹,金君生溟也。亦以多少。先後。 亦有願納土田臧獲。而祈免役者數人。侯亦從而許之。又除書員一人。閑良六人以屬院。俾掌書廚錢穀之任。趨走使喚之役。而別爲謄錄。使藏院中。臨行又有前件餘布二十五疋穀七十石以付之。凡前後所給。木四十疋。穀百十石。噫。侯之於此。可謂終始竭盡其心。而無復餘蘊矣。大抵人物隆替。地氣衰旺。莫不有數存乎其間。惟祭酒先生。以挺特之資。値衰亂之世。不得有爲於時。卷而懷之。杜門潛思。以續夫龍門之餘韻。而其後世。泯泯無聞焉久矣。故佔畢齋有詩云。麗運涵儲五百年。不圖衰叔有斯賢。彤庭持斧眞唐介。白屋窮經似鄭玄。鄕里幾人懷舊德。子孫今日稅荒田。嗟余早抱希顔志。獨拂儒紳一悵然。則其在于今可知矣。幸今聖明當宁。文運大昌。而我邑得賢侯。一鄕議克合。擧無前之盛典。得鮮有之吉地。使數百年泯滅之迹。得顯于今時。則玆豈非數也歟。而吾祭酒之後裔居于是土及散處旁邑者。非一二數。雖曰衰微零替之甚。然安知不有因是擧。而或能感遺風服前訓。而奮厲興起。以至有成者乎。而凡自一鄕以及遠近之士。游於斯學於斯。而有得於景仰之餘者。日新月盛。由是學之博而問之審。思之愼而辨之明。切之磋之。琢之磨之。以求盡乎篤行之實。則由是得聞周孔之道。可也。由是得見羲文之心。亦可也。況玆鰲潭之地。荒茅蔓草之所蒙翳。鋤耰銍艾之所往復。不知其歲年。而自戊午探討之後至于今。又復十年而堂成。則玆亦不可不謂之數也。事之顚末。不可不記其實。以傳于後。且後之來學院中。而欲求聖賢之道。聞祭酒之風者。必願得先生語以爲矜式。幸先生有以發揮而精迪之。丁卯冬末。趙穆敢採鄕人之意。錄上于退溪書堂下。
[주1] 문사(文士) : 원문의 ‘문아(文雅)’는 문재(文才), 문사(文士)를 뜻한다.
[주2] 좨주(祭酒) 우탁(禹倬) : 1265~1342. 본관은 단양(丹陽), 자는 천장(天章)ㆍ탁보(卓甫), 호는 백운(白雲)ㆍ단암(丹巖)이다. 성균관 좨주를 지내서 ‘우 좨주’라 하였고, 세상에서 ‘역동선생(易東先生)’이라 일컬었다.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 예안(禮安)에 은거하면서 후진 교육에 전념하였다. 이황(李滉)의 발의로 1570년(선조3) 예안에 역동서원(易東書院)이 창건되어 1683년에 사액되었다. 1871년(고종8)에 훼철되었다가 1969년 11월 안동대학교 교정으로 이건하여 복원하였다.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주3] 임금의 …… 하였고 : 충선왕(忠宣王)이 부왕(父王) 충렬왕(忠烈王)의 후궁인 숙창원비(淑昌院妃)와 사통(私通)하자 백의(白衣) 차림에 도끼를 들고 거적자리를 짊어진 채 대궐로 들어가 극간(極諫)한 것을 두고 이른 말이다.
[주4] 무당(巫當)의 …… 하였다 : 우탁(禹倬)이 영해 사록(寧海司錄)이 되었을 적에 영해의 백성들이 팔령(八鈴)이라는 신사(神祠)를 두고 그 영험을 믿고 팔령신(八鈴神)에게 재물을 바쳐 극진히 제사 지내는 폐해가 막심하자 팔령신을 요괴로 단정하고서 신사를 과감히 철폐한 것을 두고 이른 말이다.
[주5] 완악한 …… 하였으며 : 원문의 ‘염완입나(廉頑立懦)’는 맹자가 “백이(伯夷)의 풍도를 들은 자는, 완악한 지아비는 청렴해지고 나약한 지아비는 입지(立志)하게 된다.[聞伯夷之風者, 頑夫廉, 懦夫有立志.]”라고 한 말을 축약한 것이다. 《孟子 萬章下》
[주6] 이ㆍ락(伊洛)의 물줄기 : 이락은 이수(伊水)와 낙수(洛水)를 지칭하는데, 명도(明道) 정호(程顥)와 이천(伊川) 정이(程頤)가 이 부근에 살았으므로 이 분들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정호(程顥)와 정이(程頤)가 강학하던 이천(伊川)과 낙양(洛陽)을 가리킨다. 여기에서는 정자(程子)의 학통을 이어받은 주자(朱子)를 포함한 정주학(程朱學)의 연원(淵源)을 의미한다.
[주7] 가을 …… 독수리 : 원문의 ‘악(鶚)’은 독수리로, 재망(才望)이 출중한 사람을 비유한다. 두보(杜甫)는 〈봉증엄팔각로(奉贈嚴八閣老)〉 시에서 “교룡은 운우를 얻은 듯하고, 독수리는 가을 하늘에 있는 듯하네.[蛟龍得雲雨, 鵰鶚在秋天.]”라고 하였다.
[주8] 단산(丹山)의 고고한 봉황 : 단산은 봉황이 산다는 전설적인 산 이름으로, 단혈(丹穴)이라고도 한다. 《산해경(山海經)》 〈남산경(南山經)〉에 “단혈의 산에……새가 사는데, 그 모양은 닭과 같고 오색 무늬가 있으니, 이름을 봉황이라고 한다.[丹穴之山……有鳥焉 其狀如雞 五采而文 名曰鳳皇]”라고 하였다.
[주9] 백세(百世)의 …… 없다 : 《맹자》 〈진심 하(盡心下)〉에 “백세 위에서 떨쳐 일어남에 백세 아래에서 이를 듣고 흥기하지 않는 자가 없으니, 성인이 아니라면 이렇게 만들 수 있겠는가? 더군다나 직접 배운 제자의 경우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奮乎百世之上, 百世之下, 聞者莫不興起也, 非聖人而能若是乎? 而況於親炙之者乎?]”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10] 부포(浮浦) : 부포는 옛 예안현(禮安縣)에 속했던 역원(驛院)인 부라원(浮羅院)이 있어서 ‘부라리’로 불리던 곳인데, 진성 이씨ㆍ봉화 금씨ㆍ횡성 조씨 등이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다. 특히 봉화 금씨 성재(惺齋) 금난수(琴蘭秀)의 종택이 있으며, 대대로 문장이 끊이지 않고 전해온 마을이다. 현재는 안동댐 건설로 수몰되었다.
[주11] 금난수(琴蘭秀) : 1530~1604. 본관은 봉화(奉化), 자는 문원(聞遠), 호는 성재(惺齋) 또는 고산주인(孤山主人)이다. 처음 청계(靑溪) 김진(金璡)에게 글을 배웠고, 뒤에 처남인 조목(趙穆)의 소개로 이황(李滉)의 문하에 들어가서 수학하였다. 1561년(명종16) 생원시에 합격하여, 제릉 참봉(齊陵參奉)ㆍ장흥고 직장(長興庫直長)ㆍ장례원 사평(掌隷院司評)이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향병(鄕兵)을 이끌고 전투에 참여하였다. 선무 원종공(宣武原從功)으로 좌승지에 추증되고 동계사(東溪祠)에 봉안되었다. 저서로 《성재집(惺齋集)》이 있다.
[주12] 서재(書齋) : 부용정사(芙蓉精舍)의 부속 건물인 정관재(靜觀齋)와 수약재(守約齋)를 가리킨다.
[주13] 학문하고 …… 곳이다 : 원문의 ‘장수유식(藏修游息)’은 《예기》 〈학기(學記)〉에 “군자는 학문할 적에 장하고 수하고 식하고 유한다.[君子之於學也, 藏焉, 修焉, 息焉, 遊焉.]”라고 하였는데, 그 주소에 “장은 마음에 항시 학업을 생각함이고, 수는 수습(修習)을 폐하지 않음이고, 유는 일없이 한가하게 노닐 때에도 마음이 학문에 있음이고, 식은 일을 하다 쉴 때에도 마음이 학문에 있음을 이른 것이니, 군자가 학문에 있어서 잠시도 변함없이 공부함을 말한다.”라고 하였다.
[주14] 우리 …… 않겠는가 : 이황이 조목에게 보낸 이 편지는 《퇴계집》 권23에 〈여조사경(與趙士敬)〉이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주15] 곽황(郭趪) : 1530~1569.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경정(景靜), 호는 탁청헌(濯淸軒)이다. 1556년에 등과(登科)하여 예조 정랑(禮曹正郞)을 거쳐 예안 현감(禮安縣監), 함양 군수(咸陽郡守)를 역임하였다. 현풍 이양서원(尼陽書院)에 배향되었다.
[주16] 김부필(金富弼) : 1516~1577.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언우(彦遇), 호는 후조당(後凋堂)이다. 1537년(중종32)에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 전심(專心)하였다. 저서에 《후조당유고(後凋堂遺稿)》가 있다.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주17] 금응협(琴應夾) : 1526~1596. 본관은 봉화(奉化), 자는 협지(夾之), 호는 일휴당(日休堂)이다.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충신독경(忠信篤敬)과 궁행실천(躬行實踐)에 힘썼다. 특히 《심경(心經)》과 《근사록(近思錄)》 공부를 중시하였으며, 저서로는 《일휴집(日休集)》이 있다.
[주18] 금보(琴輔) : 1521~1584. 본관은 봉화(奉化), 자는 사임(士任), 호는 매헌(梅軒)ㆍ백률당(柏栗堂)이다.
[주19] 금응상(琴應商) : 1512~1576. 본관은 봉화(奉化), 자는 경흡(景翕) 호는 정성재(定省齋)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과거 공부를 포기하고 학문연구에 잠심하였으며, 효성으로 부모를 봉양하였다.
[주20] 우극창(禹克昌) : 본관은 단양(丹陽)이고 우탁의 후손이다. 아버지는 우벽(禹壁)이다.
[주21] 백운지(白雲池) : 경상북도 안동군 도산면 단천리에 있는 연못이다. 원문에는 백운지(白雲地)로 되어 있으나 《퇴계선생문집고증권지팔(退溪先生文集攷證卷之八)》 〈여조사경금문원(與趙士敬琴聞遠)〉에 근거하여 판각의 오류로 여겨 수정하였다.
[주22] 윤복(尹復) : 1512~1577. 본관은 해남(海南). 자는 원례(元禮), 호는 석문(石門) 또는 행당(杏堂)이다. 1534년에 생원이 되고, 1538년에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부안 현감, 전라 도사, 낙안 군수, 한산 군수ㆍ광주 목사(光州牧使)ㆍ선공감 부정(繕工監副正) 등을 역임하고, 1565년 안동 대도호부사로 부임하였는데, 예안에 거주하던 이황(李滉)과 교유하였다. 1573년 승정원 좌ㆍ우부승지를 거쳐 충청도 관찰사를 지냈다. 저서로 《행당선생유고》가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주23] 이녕(李寗) : 1527~1588. 본관은 진성(眞城), 자는 노경(魯卿), 호는 만랑(漫浪)이다. 온계(溫溪) 이해(李瀣)의 둘째 아들로 숙부(叔父) 퇴계(退溪)에게 수학하여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고 1580년에는 군위 현감으로 승진되어 4년 만에 어떤 연유로 파면되었다가 1584년에 다시 지례 현감이 되었다. 공은 두 고을의 현감이 되었어도 청렴과 신중으로 처신하여 관직에서 물러난 후에는 양식이 없어 이웃에게 양식을 빌려서 끼니를 때우는 일이 허다하였다고 한다. 퇴계(退溪)로부터 특별한 총애로 요도(要道)의 방법 등 23번의 편지를 받아 도산전서(陶山全書)에 남겼으며 매죽유헌(梅竹幽軒)의 호(號)와 자경잠(自警箴)을 수사(手寫)하여 학문에 힘쓰도록 하였다.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의 묘갈명(墓碣銘)에 “전래(傳來)된 덕행(德行)으로 정훈(庭訓)을 입어 한 가정에 참교육이 있다.”라고 하였다. 유고(遺稿)가 전한다.
[주24] 신흡(申洽) : 생몰년 미상. 자는 이호(而浩), 호는 석계(石溪)이다. 거주지는 청송(靑松)이다. 조목(趙穆)과 교유하였고, 문학으로 참봉(參奉)을 제수 받았다. 임진왜란에 화왕산 의진(義陣)에 참여하여 전공을 세웠다는 사실이 《동고록(同苦錄)》에 기재되어 있다.
[주25] 손흥효(孫興孝) : 1541~1629.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행원(行源), 호는 나계(羅溪)이다. 거주는 상주(尙州) 율리(栗里)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고, 음사(蔭仕)로 참봉(參奉)을 지냈다. 의병을 창의하여 화왕산성을 지켰다.
[주26] 채운경(蔡雲慶) : 생몰 미상. 본관은 평강(平康), 자는 응휴(應休)이다. 이황(李滉)의 숙부(叔父)인 이우(李堣)의 사위이다. 아버지 생원 채승선(蔡承先)과 아들 채간(蔡衎)과 함께 글씨와 그림에 뛰어났다.
[주27] 이숙량(李叔樑) : 1519~1592.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대용(大用), 호는 매암(梅巖)이다. 아버지는 호조 참판 이현보(李賢輔)이며, 어머니는 충순위(忠順衛) 권효성(權孝誠)의 딸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문장은 청려전아(淸麗典雅)하고 필법은 절묘하였다고 한다. 1543년(중종38)에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과업(科業)에는 뜻을 두지 않고 성리학의 연구에만 치중하였는데, 후일 천거에 의하여 왕자사부(王子師傅)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임진왜란 때에는 격문을 지어 의병의 궐기를 촉구하기도 하였으나 난중에 죽었다. 대구의 연경서원(硏經書院)에 제향되었다.
[주28] 유빈(柳贇) : 1520~1591. 본관은 풍산(豐山), 자는 미숙(美叔), 호는 권옹(倦翁)이다. 아버지는 승훈랑 유공지(柳公智)이고, 어머니는 영양 김씨(英陽金氏)로 봉사 김승조(金承祖)의 딸이다. 1554년(명종9)에 생원 초시, 1561년 진사 초시에 합격하였으나 천거하는 사람이 없어 벼슬에 뜻을 두지 아니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재종질인 유성룡(柳成龍)은 유빈이 지은 《역도(易圖)》의 발문과 이재교(李在敎)가 찬한 유빈의 행장에서 역학에 깊은 조예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정치학에도 일가견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저서로는 《권옹선생문집(倦翁先生文集)》이 있으며, 마곡정사(磨谷精舍)에 제향되었다.
[주29] 정관(丁寬)의 …… 가버렸다 : 한(漢)나라 때 역학자(易學者)인 정관(丁寬)이 전하(田何)에게 주역을 배워 학문이 성취된 후에 동(東)으로 돌아가자, 이때 전하가 “주역이 동으로 가버렸다.[易以東矣]”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30] 부(負) : 삼국 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농지의 면적을 나타내는 단위이다. 시대별로 면적의 차이가 있다. 1444년(세종26) 양전법 개정 이후에 각 등전척(等田尺)으로 사방 10척의 정사각형 면적을 1부로 삼았고, 대한제국 때인 1902년(광무6)부터는 100㎡를 1부로 제정하였다.
[주31] 금보(琴輔) : 1521(중종 16)~1584(선조 17). 본관은 봉화(奉化), 자는 사임(士任), 호는 매헌(梅軒) 또는 백률당(柏栗堂)이다. 아버지는 금원수(琴元壽)이고 이황의 문인이다. 봉화와 안동에서 살았다. 1546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으나, 이때 인종이 죽고 간당들의 화가 일어나자 대과에 응시할 뜻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그 뒤 성리학에 뜻을 두고 이황(李滉)에게 수학하였다. 남계(南溪)에 한서암(寒栖菴)을 짓고 주서(朱書)를 읽으면서 사서 공부의 보조 자료로 삼았다. 글씨에도 뛰어나 이숙량(李叔樑)ㆍ오수영(吳守盈)과 더불어 선성삼절(宣城三絶)이라 불렸다. 저서로는 《사서질의(四書質疑)》ㆍ《심근강의(心近講義)》ㆍ《가선휘편(嘉善彙編)》ㆍ《사례정변(四禮正變)》ㆍ《사례기문(四禮記文)》 등이 있었으나 병화에 모두 소실되었고, 다만 《매헌집》 1질만 전한다.
[주32] 박사희(朴士熹) : 1508~1588.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덕명(德明), 호는 묵재(默齋)이다. 훈도(訓導) 박형(朴馨)의 아들이다. 효성이 극진하였으며, 반룡산(盤龍山) 아래에 우거하며 반계(盤溪)라 자호하고, 성리학에 침잠, 실천궁행에 힘썼다. 그 뒤 이황이 도산(陶山)에서 도학을 강론한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가 그의 제자가 되었다. 이황이 그를 높게 평가하여 ‘優游厭飫沈潛默識(우유염어침잠묵지)’라는 글과 함께 묵재(默齋)라는 호를 주었다. 1539년(중종34) 충청도 향시에 합격하고, 1551년(명종6) 경상도 향시에 합격하였으나 정시(庭試)에 낙방하였다. 학행으로 의흥 훈도(義興訓導)가 되었다. 마곡정사(磨谷精舍)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는 《묵재일고》 2권이 있다.
[주33] 김생명(金生溟) : 1504~1577.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사호(士浩), 호는 눌재(訥齋)이다. 1534년에 진사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유학한 뒤 이황의 문하에 들어갔다. 학행으로 추천되어 경산 훈도와 참봉에 제수되었다. 퇴계 선생이 독실한 뜻과 성실한 노력을 칭찬하였다.
[주34] 서원(書員) : 조선 시대에 각 관청에서 사환잡역(使喚雜役) 및 문서, 회계, 공사전달(公事傳達) 등을 맡았던 향리(鄕吏)를 가리킨다.[주-D035] 한량(閑良) : 무관(武官)이 될 수 있는 가문의 출신자로 아직 무과에 합격하지 못한 자를 이른다.
[주36] 서주(書廚) : 책을 넣어 두는 궤를 이르는 말인데, 여기서는 서원의 모든 서적을 말한다.
[주37] 전곡(錢穀) : 돈과 곡식을 이르는 말인데, 전하여 재정(財政)을 말한다.
[주38] 용문(龍門)의 남은 운치 : 송나라 유학자 이천(伊川) 정이(程頤)가 만년에 용문 남쪽에 은거하였다. 여기서는 우탁(禹倬)이 만년에 은거하여 학덕(學德)을 쌓았다는 뜻으로 쓴 것이다.
[주39] 대궐에서 …… 당개(唐介)였고 : 도끼를 손에 쥐는 것은 곧 죽기를 각오하고 임금에게 극간(極諫)하는 일이다. 우탁은 충선왕이 숙창원비와 사통하자 백의를 입고 도끼를 들고 가서 대궐 앞에 거적을 깔고 충선왕의 잘못을 직언하였다. 당개는 송(宋)나라 때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로서 임금을 극간하고 부정한 관원들을 마구 탄핵했던 직신이었다.
[주40] 정현(鄭玄) : 후한(後漢) 때의 경학자(經學者)로서 경학에 널리 통하여 한대(漢代)의 경학을 집대성하였다. 여기서는 우탁이 경전을 연구한 것, 특히 두문불출하며 《주역》을 연구한 뒤 그 이치를 회통한 일을 가리킨다.
[주41] 희안(希顔)의 뜻 : 공자의 제자인 안회(顔回)와 같은 사람이 되고자 희망하는 뜻을 말한 것이다.
[주42] 고려의 …… 탄식하네 : 이 시는 김종직의 문집인 《점필재집》 시집 권3에 제목이 〈과예안유회우간의탁(過禮安有懷禹諫議倬)〉으로 실려 있으며, ‘구덕(舊德)’이 ‘소절(素節)’, ‘포(抱)’가 ‘부(負)’로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