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씨족보 서奇氏族譜序
옛날 선왕의 세대에 천하를 다스리기 위해 백성들로 하여금 효(孝)ㆍ제(悌)ㆍ목(睦)ㆍ인(婣)의 기풍을 일으키도록 한 것은 종법(宗法)이 컸고, 전인(前人)의 성헌(成憲)을 밝게 드리워 후세인들에게 추사(趨舍)의 길을 헤매지 않도록 한 것은 사법(史法)이 엄중하였다.
족보(族譜)라는 것은 한 집안의 사사로운 것일 뿐이지만, 실상 이 두 가지 의미를 모두 갖추었다. 이 족보는 세교(世敎)와 관계되는 것으로 수보(修譜)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종법이라는 것은 마치 나무가 뿌리로부터 줄기로 통하고, 줄기로부터 가지로 통하는 것과 같이 안배하지 않아도 저절로 되는 것이요, 미루고 옮기고자 해도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다. 만일 국사라면 반신 반의(半信半疑)의 전한 것과 유현(幽顯)의 권력이 있다. 때문에 종법은 천연(天然)으로 정해지고, 사법은 인위(人爲)로 이루어져서 종족의 강조(綱條)는 찾기 쉽고 역사의 의례(義例)는 밝히기 어렵다. 하지만 족보가 국사에 비하여 또한 어려운 점이 있으니, 국사에는 좌우에서 기록한 것과 남북의 간통(簡通)이 있어서 내가 진실로 그 의미를 얻었다면 그 역사와 그 문장을 살펴 알 수 있다.
무릇 족보는 반드시 제가諸家의 첩록牒錄을 수합해야 하지만 인가人家에 있는 첩록은 대체로 다 쇠미(衰微)하다. 일세(一世)가 쌓여 수십 백 세대가 되고, 한 사람이 나뉘어 백 천만 사람이 된다. 또 족속(族屬)이 같은 점이 있어 그 일은 지극히 번잡하여 지극히 쇠미한 데에서 지극히 복잡한 데까지 통솔하여 조각조각을 모아 완성하기는 어렵다. 게다가 그 지예(支裔)는 모든 지역에 흩어져 있어서 퇴색되어 닳아 없어지는 근심이 생기고, 유풍(遺風)은 겨우 오세(五世)에 이르면 사사로움이 이기고 은혜가 가려지는 폐단이 일어난다. 그러니 영기(零記)와 쇄록(瑣錄)을 또 어찌 낱낱이 증거삼고 믿을 수 있겠는가. 때문에 나라의 역사는 오히려 쉽게 쓰지만, 족보의 역사를 만들기는 어렵다.
족속에 족보가 있게 된 것은 오래되었으나 우리나라보다 번성하지는 않았다. 비록 그 원류(源流)가 멀고 길지만 오직 우리 기씨(奇氏)를 미루어보자면, 근세에 또 지극히 쇄미(瑣尾)해져서 문헌이 있는 집은 거의 새벽별이 뜨는 것과도 같다. 대체로 원류가 길면 기록이 아득해지고, 문헌이 부족하면 상고(詳考)할 길은 없다. 그러므로 족보의 밝히기 어려움이 또한 우리 족보만한 것이 없다. 가만히 헤아려보니, 중엽의 성했을 때에는 마땅히 지금처럼 갑작스레 무너진 지경까지 이르지는 않았는데, 집안에 간직된 무진년(戊辰年)과 갑오년(甲午年)의 두 구보(舊譜)의 그 규모와 조례가 거의 논의해 볼만 한 데가 없지 않아 제종(諸宗)들이 안타깝게 여겼다. 갑오년으로부터 지금까지 흡사 일주갑(一周甲 60년)이 되었으니 수보의 일을 넓히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일을 착수한 지 여러 해가 지나 올 여름에 이르러 일이 이루어졌으니, 족대부(族大父) 상검씨(象儉氏)가 실상 그 일을 주관하였고, 정진(正鎭)의 고과(孤寡)로 교정의 대열에 잘못 놓이게 되었다.
무릇 수보하기가 쉽지 않고 우리의 족보를 만들기가 더욱 어려웠다면, 우리 족보를 어떻게 수보할 수 있었겠는가. 가만히 생각해보면, 족보가 국사만큼 어렵다고 하지만 국사의 어려움은 오직 군부(君父)를 높이는 의리에 밝은 사람이라면 고칠 수가 있고, 족보의 어려움은 오직 조종(祖宗)을 높이고 존중하는 의리에 밝은 사람이라면 고칠 수가 있다. 국사가 진실로 군부를 높이는 의리로 주장을 삼는다면 그 의례가 꼭 맞지 않는다 하더라도 거리가 멀지 않고, 족보가 진실로 조종을 높이고 존중하는 뜻으로 주장을 삼는다면 그 강조(綱條 벼리와 조목)가 꼭 맞지 않는다 하더라도 거리가 멀지 않다. 그러니 조종에 밝으면 곧, 국사에 밝을 수 있다.
무릇 이 족보는 널리 채집하고 뒤질 겨를이 없었다. 다만 이보(二譜)에 있는 것을 근거 삼았으니 무진년을 근본으로 그 비롯함을 바르게 하였고, 갑오년을 참고삼아 그 자상함을 이루었다. 그 인혁(因革)에서는 반드시 주석(註釋)의 기록을 두어 그 애매한 것에는 의심되는 대로 전하는 것을 부기하였으니 대체로 백세의 후인을 기다린다는 뜻이 있고, 감히 하루 동안의 간편한 편집으로 우리의 일이 이미 끝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무릇 이와 같은 것이 그 국사에 맞는지 맞지 않은지는 보는 사람이 반드시 분별함이 있어야 한다. 성계(姓系)의 근원과 세덕(世德)의 깊고 아름다운 덕은 구보의 서술에 대략 갖추어 여기서는 거듭 서술하지 않는다.
奇氏族譜序
昔先王之世。所以管攝天下。使民興於孝悌睦婣之風者。宗法爲大。昭垂前人成憲。使後世不迷於趨舍之塗者。史法爲嚴。族譜者一家之私耳。而實具此二義焉。此譜之所以關於世敎。而修譜之爲未易也。雖然宗法者。如木之自本而榦。自榦而支。有不待安排而然者。有欲推移而不可得者。若夫史則有疑信之傳。顯幽之權。故宗法定於天。史法成於人。宗之綱條易尋。史之義例難明也。抑譜之比國史。又有難焉。國史有左右之記南北之簡。我苟得其義焉。則其史其文。可按而知也。凡譜必合諸家牒錄。人家有牒。大抵皆微矣。至於一世之積。爲數十百世。一人之分。爲百千萬人。又有族之所同。其事極爲煩悉。以至微而御至悉。難乎湊成片段。况其支裔散在一域。漫漶磨滅之患生焉。遺澤僅及五世。私勝恩掩之弊起焉。零記瑣錄。又安得一一徵信乎。是故史於國尙易。史於譜爲難也。族之有譜尙矣。而莫盛於我東。雖其源流之遠而長。獨推吾奇氏。近世又極瑣尾。文獻之家。僅若晨星。夫源流長則記錄杳茫。文獻不足則稽考無因。故譜之難明。又莫如吾譜也。竊計中葉盛時。當不至如今沈湮。而家藏戊辰甲午二舊譜。其規模條例。胥或未免有可議。諸宗病焉。今距甲午。恰已一周甲。修譜之事。不可以曠也。經始有秊。至今秊夏。功告成。族大父象儉氏。實主其事。而正鎭之孤寡。謬居攷校之列焉。夫以修譜之未易。而吾譜爲尤難。則吾譜如何其可修也。竊以譜之難史也。史之難。惟明於尊君父之義者。可以修之。譜之難。惟明於尊祖重宗之義者。可以修之。史苟以尊君父之義爲主。則其義例雖不中不遠矣。譜苟以尊祖重宗之意爲主。則其綱條雖不中不遠矣。然則明乎宗。乃可以明乎史也。凡此譜未暇博採廣搜。只據見在二譜。本之戊辰以正其始。參之甲午以致其詳。其因革必有疏記。其迷茫附之傳疑。蓋有百世竢後人之意。而不敢以一日苟簡之編。爲吾事已了也。凡若此者其於史。中乎不中乎。覽者必有以辨之。若姓系之源委。世德之淵懿。舊譜之叙述畧備。此不重述焉。
[주1] 천하를 다스리기 위해 : 《이정유서(二程遺書)》 권6에 “천하의 인심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종족을 거두고 풍속을 후하게 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근본을 잊지 않게 하여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모름지기 계보를 밝히고 세족을 거두며 종자에 관한 법을 세워야 한다.[管攝天下人心, 收宗族、厚風俗, 使人不忘本, 須是明譜系、收世族, 立宗子法.]”라는 말이 있다.
[주2] 효(孝)ㆍ제(悌)ㆍ목(睦)ㆍ인(婣) : 효는 부모에 대한 효도요, 제는 형제에 대한 우애이며, 목은 구족(九族)과 화목하는 것이고, 인은 외척(外戚)과 화목하는 것이다. 《주례(周禮)》 〈지관사도(地官司徒) 대사도(大司徒)〉에 “향학의 삼물을 가지고 만민을 교화하고, 인재가 있으면 빈객의 예로 국학에 올려 보낸다. 첫째 교법은 육덕이니 지ㆍ인ㆍ성ㆍ의ㆍ충ㆍ화요, 둘째 교법은 육행이니 효ㆍ우ㆍ목ㆍ연ㆍ임ㆍ휼이며, 셋째 교법은 육예이니 예ㆍ악ㆍ사ㆍ어ㆍ서ㆍ수이다.[以鄕三物敎萬民, 而賓興之. 一曰六德, 知、仁、聖、義、忠、和, 二曰六行, 孝、友、睦、婣、任、恤, 三曰六藝, 禮、樂、射、御、書、數.]”라는 말이 나온다.
[주3] 종법(宗法) : 당내(堂內)나 문중과 같은 친족조직 및 제사의 계승과 종족의 결합을 위한 친족제도의 기본이 되는 법을 말한다.
[주4] 성헌(成憲) : 《서경》 〈열명 하(說命下)〉에 “선왕이 이루어 놓은 법을 준수하여 길이 잘못이 없게 하라.[監于先王成憲, 其永無愆.]”라는 말이 있다.
[주5] 추사(趨舍) : 나아감과 머무름을 말한다.
[주6] 사법(史法) : 사서(史書)를 쓰는 원칙을 말한다.
[주7] 첩록(牒錄) : 가첩(家牒)이라고도 한다. 한 집안의 혈통적 계통을 적은 보첩(譜牒)이다. 시조(始祖) 이하의 중조(中祖), 파조(派祖)를 거쳐 본인에 이르기까지 직계존속과 비속(卑屬)에 대한 세계(世系)를 체계적으로 기록하는데 모든 족보의 기본이 된다.
[주8] 지예(支裔) : 종가(宗家)에서 갈라져 나온 먼 후손을 말한다.
[주9] 일을 착수한 지 : 원문의 ‘경시(經始)’는 《시경》 〈영대(靈臺)〉에 “영대를 처음으로 경영하여, 이것을 헤아리고 도모하시니, 서민들이 와서 일하는지라, 하루가 못 되어 완성되었다. 경시하기를 급히 하지 말라고 하셨으나, 서민들은 아들이 아버지의 일에 달려오듯이 하였다.[經始靈臺, 經之營之, 庶民功之, 不日成之. 經始勿亟, 庶民子來.]”라는 말에서 유래하였다.
[주10] 고과(孤寡) : 원래는 아버지를 잃은 아들과 남편을 잃은 과부를 뜻하나 여기서는 ‘고루과문(孤陋寡聞)’의 의미로서 기정진이 스스로를 겸사(謙辭)한 말이다.
[주11] 인혁(因革) : 전승과 변혁을 말한다.
[주12] 의심되는 …… 것 : 원문의 ‘전의(傳疑)’는 확실하지 않은 사항은 확실하지 않은 대로 전해 준다는 뜻이다. 《춘추좌씨전》 환공(桓公) 5년에 “봄 정월 갑술, 기축에 진후 포가 죽었다.[春正月甲戌己丑, 陳侯鮑卒.]”라고 한 것에 대해 《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에 “포가 죽은 것을 어째서 두 개의 날짜로 기록한 것인가? 《춘추》의 의리는, 사건이 확실한 것은 확실한 대로 전하고 의심되는 것은 의심되는 대로 전하기 때문이다.[信以傳信, 疑以傳疑.]”라고 하였다.
출전 : 한국고전번역원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ㆍ조선대학교 고전연구원 박명희 김석태 안동교 (공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