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의 본보기
베드로후서 2장 4-16절
말세의 특징이 무엇인지
베드로후서 3:3-5절에 보시면,
주님의 재림과 심판을
조롱하는 자들이 나타나서
만물이 조상대대로
그대로 있다고 합니다.
즉 종말이나 심판이 없다는 사상이
팽배한 것입니다.
그러면 언제부터
이런 말세가 된 것입니까?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부터 시작된
인간들의 사상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신다는 것을
일부러 잊어버리게 하는 것이
마귀의 전략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귀의 유혹은
이 세상이
결코 망하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위기는 오지만
그 위기를 기회로 삼아서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고
믿게 만드는 것입니다.
노아 홍수 이후에도
그들은 인간들로 하여금
바벨탑을 쌓게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을
정면으로 거부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탑을 쌓아
하늘까지 닿게 하여
어떤 홍수가 오더라도 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런 사고방식이
말세의 특징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하기를
간절히 사모하라고
증거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주님의 재림보다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영원할 것처럼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말세이고
노아 홍수 때에도 말세인 것입니다.
2:3절을 보시면
이런 세상에 대하여
하나님의 심판은 지체되지 않았고
잠들지 않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시대마다
계속된 하나님의 심판이 있었고
그런 심판들은
이 말세를 맞이한 우리에게
본보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본보기가
구약에서
수도 없이 많습니다.
출애굽의 과정에서도
하나님의 심판을 보게 되고,
광야에서도,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수많은 심판을 보게 됩니다.
그 중에 오늘 본문은
세 가지만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 4절에서
범죄한 천사에 대한 심판입니다.
천사란
하나님의 일을
시중들기 위하여 지음 받은
영적인 피조물입니다.
이 천사들이 어떻게 범죄 하였는지
유다서 1:6절보면
천사가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났다고
되어 있습니다.
범죄한 천사를
용서하지 않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 까지
지키게 하신 것입니다.
하늘에서 쫓겨난
범죄한 천사가 갇힌 곳이
이 지상이라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2절에 보시면
공중 권세 잡은 자,
곧 지금도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늘에서 쫓겨난 범죄한 천사들이
이 지상으로 쫓겨나
인간들을 유혹하여
자기편으로 삼아
하나님을
거역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2:7-9절에도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쌔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저희의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 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
하늘에서 내어 쫓긴 이 사단이
지상에서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
예수님을 유혹할 때에
자기에게 절하면
세상의 영광을 준다고 하였습니다.
이 유혹이 지금도 온 세상을
미혹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과 심판을
말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영원한 영광을 이야기 합니다.
통일교나 구원파나
여호와의 증인만이 아니라
오늘날 교회에서 선포되는
대부분의 메시지가
주님의 심판과 재림보다
세상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귀에서 속고 있는 것입니다.
4절,5절말씀을 보면
범죄한 천사에 대한 심판과
노아 홍수의 심판을 말합니다.
5절에서 옛 세상을
용서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다른 말로는
아까워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이지만
죄악이 가득한 세상을 보시고
한탄하시면서
쓸어버리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를 입은 노아는
그 당대에 의인이었습니다.
의롭게 살아서
은혜를 입은 것이 아니라
은혜를 입어서
의롭게 살았던 것입니다.
그 의롭게 산 것이 무엇인가
의를 전파한 것입니다.
노아가 어떻게 의를 전파한 것입니까?
120년 동안 배를 만드는 것이
의를 전파한 것입니다.
배를 만드는데
바닷가도 아닌 곳에
배를 만들고 있으니
왜 그러느냐고
물어 보았을 것입니다.
그때 노아의 대답은
하나님은 이 세상에
죄악이 가득하여서
물로 심판을 행하실 것이라고
대답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런 노아의 말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런 노아를
미치광이 취급을 하였을 것입니다.
이 노아때의 심판을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4:37-3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예수님의 재림도
노아의 홍수 때와 같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노아가 얼마나
외롭게 방주를 준비하였겠습니까?
방주를 만드는 것도
몇 년의 일이 아니라
120년을 만들고 있으니
사람들은
무슨 홍수가 난다는 말인가 하면서
아예 노아는
관심 밖의 사람이었습니다.
그 당시의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똑똑하고 착한 사람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노아의 가족 8명 외에는
단 한 사람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가정수 로는
단 한 가정입니다.
노아의 가정 외에는
세상에서 먹고 마시며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만
관심사일 뿐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중요한 관심사는
세상에서 어떻게 재미있고
행복하게 사는가에 있지
이 세상의 심판과 멸망에 대하여서는
관심 밖의 문제입니다.
이것이
경건치 못한 모습입니다.
결국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한 사람도 깨닫지 못한 것처럼
예수님 재림 하시는 것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누가
예수님이 다시 오시기를
간절히 사모하면서
깨어 기도하면서
기다리고 있습니까?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의를 전파하고 있습니까?
노아가 전한 의는
하나님께서 세상의 죄악에 대하여
심판하시는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전파할
의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세상에는 의가 없다고
알려야 합니다.
오직 의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만 주어지는
은혜의 선물임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율법 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이루신
그 의에 대하여
누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까?
교회를 다니고
예수의 이름을 부르지만
여전히 관심사는
그저 세상에서
먹고 마시고 사고팔며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에만
관심이 있다면
노아의 홍수 때와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믿고 사는 사람은
주님의 의를
전파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누가 관심을
가져주든지 아니든지 간에
그렇게 믿고 사는 것이
의를 전파하는 모습입니다.
첫째 범죄한 천사에 대한 심판입니다.
둘째 노아 홍수의 심판입니다.
셋째는 6-8절의
소돔과 고모라성의 심판입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셔서
재가 되게 하신 것은
후세에 경건치 아니한 자들에게
본을 삼기 위한 것입니다.
노아 홍수는
전 지구상에 다 덮친
심판입니다.
그러나 노아와 언약을 맺으실 때에
다시는 물로
심판을 하시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장차 어떻게
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소돔과 고모라성이
유황불에 살라진 것으로
본보기를 삼은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성은 어떤 곳입니까?
마치 에덴동산과 같이
살기 좋은 곳이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조카 롯의 종들 사이에서
싸움이 자주 일어났습니다.
짐승 떼들이 많아졌기에
함께 할 수가 없어서
조카에게 먼저 갈 곳을
선택하라고 하였을 때에
소돔과 고모라를 선택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반대로 척박한 곳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기 좋았던
소돔과 고모라성은
죄악이 가득한 곳이었습니다.
오늘날도
사람들이 바라는 것은
환경이 좋고 경제적으로 풍부하면
행복할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범죄한 인간이
어떤 환경에 처하더라도
개선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소돔과 고모라 성이 멸망할 때에
어떻게 롯이 구원을 받게 됩니까?
여기서의 의로운 행위란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하는
의로운 롯을
건졌다고 합니다.
롯이 소돔과 고모라에 비록 살지만
그 세상에
동화하지는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심판하기 위하여
천사가 소돔과 고모라를 방문할 때에
롯이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은
소돔과 고모라성의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지 못한 것입니다.
그들은 먹고 마시며
다른 색을 구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과 어울리지 못하니
혼자 외톨이가 되어서
성문 입구에 앉았다가
그 성에 들어오는 나그네를
자기 집으로 영접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이
그 사람을 이끌어내라고
우리가 상관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남색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롯은
그 의로운 심령을
상하였다고 합니다.
물론 이러한 롯이 구원받는 것도
또한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노아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듯이
롯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생각하셔서
구하여 내신 것입니다.
이런 은혜를 입은 롯의 모습은
그 소돔과 고모라를 떠나지는 못하였지만
근심을 하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세상이 이래서는 안 되는데,
죄악으로 가득하다는 것을 인하여
마음이 상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런 마음이 있습니까?
이 소돔과 고모라 같은 세상에서
이 세상이
심판을 받아야 마땅하는 생각을
가지고 사십니까?
눈에 보이는
세상의 헛된 영광만을 향하여
달려가는 것을 보고서
마음이 상하십니까?
아니면
나는 왜 이렇게 가난해서
저런 영광을 누리지 못하는가하면서
원망하고 살고 있습니까?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 세상을 향하여 달려가더라도
은혜를 입은 사람은
그런 세상을 보면서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도 이런 롯의 고통을
이해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아내도 딸들도 사위들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심지어 사위들은
장인의 말을
농담으로 여긴 것입니다.
노아 홍수의 심판이나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 이야기가
여러분은 어떻게 들리고 있습니까?
농담으로 들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말세의 특징인 것입니다.
이런 경건치 아니한 세상에 대하여
하나님은 심판을
지체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행하셔서
본보기를 삼으신 것입니다.
누가복음 17:28-33절엔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 오듯 하여 저희를 멸망시켰느니라
인자의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그 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 세간이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오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이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 것이니라
롯의 처를 기억하라
무릇 자기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주님의 심판이
지체되지 아니합니다.
살기 위하여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된
롯의 처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이 세상이
노아의 홍수 시대와 같고
소돔과 고모라의 시대와 같습니다.
누가 의를 전파합니까?
누기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합니까?
무엇으로 근심하고 있습니까?
무엇으로 마음이 상하십니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습니다.
이런 복이 주어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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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후서
심판의 본보기 베드로후서 2장 4-8절
햇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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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30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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