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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청준 작가의 <벌레이야기>와 이창동 감독의 <밀양>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다. 영화을 보고 받은 인상이 강해서 그런지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위주로 진행되었다. 소설과 영화 사이에서 소설을 원작으로하는 영화가 소설이 미처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이미지와 운동으로 표현하는 것이라면, <밀양>은 <벌레 이야기>의 어떤 순간들을 포착하고 있는지, <벌레이야기>가 미처 말하지 못한 어떤 부분들을 드러내고 있는지 주목해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 바탕으로 삼아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1. 우선 왜 <벌레 이야기인가?>에 대한 이야기 : 벌레는 무엇인가? 그것은 누구인가? 아니면 무엇인가? 벌레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해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으나 그 실체가 모호하다. 마치 이 이야기의 배경으로 짙게 끼여 있는 안개처럼 부유하지만 실체는 모호한 어떤 것.. 무엇이라 이미지화할 수도, 개념화할 수도 없는 무엇... 그러나 느닷없이 출현하여 우리를 놀라게 하고, 혐오스럽게 하는 그 무엇.. 벌레에 대해 하나는 시대적 배경- 1985년, 전두환 독재 정권, 1981 이윤상군 납치 살해 사건 등-과 연결하여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 그 자체라는 해석. 이 해석은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가졌던, 거대한 권력의 폭압과 부정의 앞에 벌레처럼 숨어야 하고, 두려워해야 하고, 그런 자신을 죄의식에 사로잡혀 혐오해야 하는 그 심리, 그 존재적 상실, 절망에 대한 표현이라고 보는 해석.. 정말 그렇다. 우리는 너무나 거대한 폭압적인 상황 아래서 그것에 굴종하며 살아야 하는 자신에 대해 절망하며 자신을 혐오할 수 밖에 없는 소시민이지 않은가? 마치 신에 의해 용서받았으며, 피해자인 너도 신의 은총으로 용서받기를 기도하겠다는 그 가해자의 평온하고 무구한 어떤 양심의 가책도 느껴지지 않는 표정에서 아내가 받은 절망, 그 무기력이말로 어떤 거대한 힘 앞에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자신에 대한 혐오, 그 벌레로서의 감정이 아닌가?
그런데 벌레를 거대한 힘 앞에 절망하고 좌절하며 자신을 혐오하는 감정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부족하지 않은가? 이 소설에서 벌레는 어쩌면 저 끊임없이 반복되는 김집사의 발언이 아닌가? 그건 대타자인 신, 아버지, 어떤 절대권력자가 쏟아내는 언어가 아닌가? 끊임없이 반복되는 정언명령(~해야 한다라는 형식), 그 지루한 동어반복- 신의 섭리, 은총, 신에 의한 구원이라는,- 가치전도 -독재자는 용서할 수 없는 폭력과 부정의 위에서 폭력없는 사회, 정의사회 구현을 외친다. 신은 용서와 은총, 구원을 위해 희생양-알암이의 죽음, 아내의 고통-이 필요하다. 그것도 필연적으로, 그게 신의 섭리다. 그것이 대타자의 언어다. 그건 그야말로 내용없는 형식이고, 기의(記意)없는 기표(記表)다. 대타자의 언어는 그것의 형식에서 필연적으로 혐오스럽다. 그들의 언어는 우리를 지루하게 하고, 혐오스럽게 하고, 피하고 싶게 만든다. 그러나 그것은 그 형식과 기표로서의 성격으로 인해 끊임없이 출몰할 수 밖에 없다. 작가는 김집사의 발언을 통해 그 시대를 지배하던 그 끔찍한 관념과 언어를 벌레로 표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러므로 이 소설의 시점이 남편의 시점이라는 것을 벌레에 대한 이 두가지의 해석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2. 벌레를 바라보는 남편의 시점 : 아이의 납치와 살해에 대한 전말이 아니라 아픔과 저주를 각오하고서라도' 해야 하는 증언으로서의 기록, 1인칭 관찰자 시점. 이 끔찍한 사건에 대해 남편은 왜 이렇게 객관적인 태도를 취하려 할까? 자신의 아이와 아내가 겪은 고통과 죽음에 대한 기록이 이렇게, 마치 타인인처럼 서술한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아내가 겪는 압도적인 고통과 절망에 대해 마치 제 3자인 것처럼 서술하는 남편의 태도가 불편하지 않은가? 자신도 그 사건에 대한 당사지임에도 불구하고 과연 이런 태도는 무엇을 드러나게 하는가?
작가는 남편의 이런 시점을 통해 그 시대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무거운 공기와 같은, 그래서 벗어날래야 벗어날 수 없는, 혐오스럽고 절망스러운 벌레와 같은 그 대타자-신, 아버지, 무엇보다도 독재자의 동어반복과 함께 그 무겁고 혐오스러우며 절망적인 공기에 억눌려 신음하고 고통스러워하는 벌레와 같은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 벌레와 같은 공기속에서 벌레와 같은 삶을 절망적으로 몸부림치다 결국 자살에 이른 아내를 동일한 처지인 남편은 감정의 동일시, 전지적 관찰자 시점, 그 신의 시점으로 도저히 다가설 수 없었던 것은 아닐까? 그렇게 한다는 것은 인간적 한계 속에서 신을 저주하며 자살에 이른 아내에 대한 또 다른 폭력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남편)은 '아픔과 저주를 각오하고'서라도 죽음을 증언하고 기록해야 한다. 섭리와 구원, 은총, 용서... 이 모든 초월적 지대에 도달할 수 없는 인간의 절망을 신의 관점, 전지적 관점으로 서술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닐까? 자신(남편)이 곧 벌레이며, 벌레와 같은 공기속에 질식할 듯 살아야 했지만 (1인칭), 벌레와도 같은 혐오스런 시대의 관찰자, '아픔과 저주를 각오하며' 고통스럽게 증언해야 하는자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3. 벌레-되기 : <벌레 이야기>를 읽으면서 카프카의 <변신>이 떠오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 카프카의 <변신>은 그레고르 잠자의 벌레되기에 대한 기록.. 그레고르 잠자는 갑충(甲蟲)이 되어 대타자-아버지, 가족, 가부장, 자본주의의 명령에서 탈주하는데 성공한다. 대타자는 끊임없이 자본, 가부장, 아버지, 가족의 명령에 복종하길을 요구하지만 그레고르는 어느날 아침 - 어떤 이유도, 필연성도 없이, 아무런 동기도 없이, 이 모든 명령에서 벗어나 갑충이 된다. 갑충 앞에서 대타자의 명령은 그 포획의 지점을 잃어버린다. 물론 결론적으로 고레고르의 벌레 되기는 좌초하고 말지만, 문제는 되기(Be-ing)다. 되기(여성-되기, 동물-되기, --되기)는 코드화를 벗어나 탈코드화이고, 영토를 벗어난 탈영토화이며 그것은 무엇보다 도주선을 그리는 일이다. (들뢰즈) 우리는 얼마나 정교한 코드속에서 - 교사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철저하게 코드화된 존재가 아닌가. 당신에게는 선생님 티가 나요.. 인간에게 철저하게 코드화된 동물로서의 개- 행위하고 말하는 존재인가? 고레고르의 갑충되기는 일견 성공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레고르는 곤충이 되지만, 이는 단지 그의 아버지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가 찾을 수 없었던 출구를 찾아내기 위한 것이고, 지배인, 상업, 관료들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고, 윙윙거리는 소리말고는 목소리가 어떤 소리도 내지 않는 그런 영역에 도달하기 위한 것이다. <자네 저 말하는 소리를 들었나? 그건 동물이 소리였어라고 지배인이 외쳤다.> "(들뢰즈/카프카, 소수적인 문학을 위하여>
벌레-되기는 코드화된 대타자의 목소리에서 벗어나 벌레의 소리로 윙윙거리는 것이다. <벌레 이야기>의 아내는 벌레의 소리를 획득하지 못했다. 신에 대한 그 저주에 가까운 목소리는 결국 신의 목소리로 덧칠되어 있다. "하느님은 아무것도 몰라요....하느님이 그토록 전지전능하신 분이라면,, 하느님이 정말 모든 것을 아신다면...하느님은 그놈과 한패거리와 다를 게 무어예요. 그 사람(범인)은 이미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를 받고 있는데.. 나는 새삼스레 그를 용서할 수도 없었고.. " 이 언어는 신의 의지에 철저하게 붙박힌 언어가 아닌가? 그녀(아내)는 신을 저주하는 그 순간에도 신에게 철저하게 붙박힌 존재가 아닌가? 그녀에게 그 혐오스럽고 절망적이며 동어반복적인 신의 명령으로부터 도주할 수 있는 힘과 역량이 없었다. 그러니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신에 구속된 저주, 복수의 정념뿐이었고 그 저주 복수의 정념이 표적을 잃어버릴 때 자살은 필연적이었다. 그녀의 자살은 어쩌면 벌레-되기에 실패한 필연적인 결과가 아닐까?
4. 구원, ~되기 : 신애는 도망치고 싶었다. 자신을 배반한 남편으로부터, 자신의 흉터가 된 그 규정할 수 없는 어느 순간으로부터-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신애의 중얼거림을 다시 떠올려보자. 그리하여 자신이 도달한 곳이 곧 비밀의 햇볕으로 자신을 철저하게 지워버리는 곳이어야 한다. 하지만 신애의 오인은 파탄을 잉태한다. 탈주는 도망이 아니다. 그것은 단절이고, 접속이며, 탈코드화이고, 탈영토화다.(들뢰즈) 그러나 신애는 밀양이라는 곳에서 재영토화되고 재코드화된다.- 신애는 밀양에서 주류의 가치에 편승하며 그것과 접속하려 한다. 홈패인 공간(가부장적 질서, 아버지의 폭력, 남편의 바람)에서 빠져 나온-이것은 도피이고, 도망이지 탈주가 아니다.- 신애에게는 아직 ~~되기의 역량과 힘이 없다. 웅변 학원 원장(박도섭)에 의한 아들의 납치와 살해는 탈영토화, 탈코드화에 실패한 신애에 대한 어떤 상징이다. 신애가 박도섭을 용서하겠다는 순간에도 신애는 여전히 사로잡힌 존재였으나, 면회 이후 그녀의 기절이, 그 졸도의 순간이 그녀를 깨어나게 했다. 이후 전개되는 신과의 거래, 그리고 그 무서운 중얼거림의 순간이야말로 신애가 도주를 시작한 지점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신애의 광기, 정신 병원에의 감금은 어쩌면 도주, ~되기의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밀양>은 어쩌면 <벌레 이야기>에서 아내의 자살로 인해 멈추어 버린-좌초된 도주하기의 선분을 찾아서 접속시키기 위해 필요했던 영화가 아닐까? 온통, 벌레, 벌레, 벌레처럼 혐오스럽고 절망적이며 억압적인 시대에 멈추어버린 도주선을 찾아 이어보려는 운동으로서의 영화...
<밀양>의 마지막 장면을 다시 떠올려 보자. 거울-신애의 얼굴-머리카락-콘크리트 바닥에 고인 물에 비친 한줌의 햇볕, 이 이미지와 운동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구원의 가능성을 말하고 있는 걸까? 우리는 그렇게 해석하고 싶다. 그러나 그렇게 섣부르게 해석하지는 말자, 여기에 이르기 위해 우리는 몇가지 우회로가 필요하다. 먼저 머리카락. 자칫하면 가해자의 딸에게 내맡긴 신애의 머리카락은 구원의 코드가 될뻔하지 않았던가라는 질문? 이로 인해 우리는 쉽게 신애가 가해자를 용서하였다는 오인에 빠질 수 있었다. <아 신이여, 당신의 가여운 딸을 용서하고자 하나이다...> 하지만, 신애는 이 순간, 이 초월의 순간에서 탈주한다. 신은 이 순간 너무나 깊은 배신감으로 아주 크고 긴 한숨을 내쉬었겠지만 그 순간이야말로 도주의 순간이다. 이제 신애는 어찌면 영정과 같은 모습으로 거울앞에 선다. 그리고 스스로 머리카락을 자른다.
도주란 멀리 떠남이 아니다. 그것은 출구를 찾는 것이며, 도망은 더욱 더 아니다. "탈주가 긍정되는 것은 역으로 앉은 자리에서 하는 탈주, 강렬도적인 탈주로서이다.'<들뢰즈/카프카, 소수적인 문학을 위하여> 이렇게 해석할 때 거울을 들어주는 종찬이라는 존재가 가지고 있는 힘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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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밀양>은 <벌레 이야기>의 어떤 부분을 이어가고 싶어했던가? <벌레 이야기>가 감추어두었던 이야기의 탈주선으로서의 영화라는 관점에서 적어 보았다. 샘들도 자신만의 이야기를 남기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