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집 | 문예바다 신인상 수상 작가들 |
도서관 지구대 외 1편
박경서
달팽이는 조용히 골목을 건너
귀에 사는 하얀 잔상을 따라간다
애틋하게는 말고
그럼에도 다정히 신경 쓰이는
걸을 때 뒤꿈치 들 것
책장 넘길 때 살살
입술이 혀를 감싸는 소리 주의
키보드는 키스킨 사용
견딜 수 없는 조용은 화가 나서
소리를 먹고 토하는 백색소음 사이에 살지
그녀와 이별할 때마다
통장 잔고가 낱 전으로 찍히는 듯한
나만 모르는 내 뒷담화 같은 소리들
달팽이가 소리를 주워 모아
귓바퀴에 산으로 쌓는다
그러니까 산은 소리들이 쌓인 봉우리인 것
팥빙수를 씹다가 문득 바라본 산봉우리
하얗게 지우고 싶은 건 뒷목의 무리수지
소리와 긴장이 만나면
심장은 비트 있는 나팔수
38페이지부터 고원은 분지로 들어가
내 귀를 데려갈 바람이 없다
닮은 풍경들은 닳아서
소리를 죽이고
불면의 양식
유리창 끝에 매달린 눈썹달이
밤을 뒤진다
초침이 어둠을 돌다가 방향을 잃었다
낮 동안 주고받은 말들
어둠을 거름 삼아 무성해지는데
채근이 나를 환하고 둥근 무대로 몰아낸다
칭찬을 가장한 압력
면목을 추궁하는 뒤통수의 얼굴들이
화살이 되어 머무는 신전
모서리 없는 벽
한 손에 비망록을 든,
모르페우스의 표정이 채찍보다 험악하다
어서 빨리 말을 보여 줘
숫자와 공식으로 실적을 증명해
? !는 삭제해!
시침을 감아 올린 거실 창이
딱새 몇 마리 세다 꾸벅거린다
불면은 내일을 미루는 양식이야
하얘진 하현달을 먼동에 띄우고 있다
― Note
새벽에 깨어 전등을 켜려고 벽을 짚었는데 손이 스위치에 닿지 않는다. 어슴푸레한 빛이 있어 대충 스위치의 위치를 아는데 벽을 더듬어도 손이 가닿지 않는다. 온전히 캄캄한 것보다 명도가 낮은 어둠에서 느끼는 오싹함, 조금 두려웠지만 의연한 척 누군가를 부른다.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뭐지? 분명 꿈은 아닌데. 자주 이런 꿈을 꾸었지만 지금은 그때와는 달라. 두 다리와 두 팔 이렇게 움직이잖아. 다시 불러 보자. 새벽이니 큰 소리 아니어도 이 집 안 누구에게라도 내 목소리가 닿겠지.’ 다시 소리를 내 본다. 입술이 겨우 들썩이지만 여전히 소리는 나지 않는다. 3평의 좁은 공간이 어둠 속에서는 숨을 곳 없는 거대한 들판처럼 휑하다. 밧줄 없이도 꽁꽁 묶인 듯 숨 막힌다. ‘이젠 울어야겠어. 가끔은 고함보다는 눈물이 더 임팩트 있잖아. 이런 젠장, 울음소리도 안 나오네.’ 온 힘을 다해 목울대를 쥐어짜지만 비명처럼 겨우 삐져나오는 소리 ‘끅끅’ 그마저도 가슴 안으로 반향된다. 철저하게 어둠 속에 낙오된 것 같다. ‘차라리 꿈이면 좋겠어, 꿈은 시간이 지나면 깨어나기라도 하지.’ 간절함의 끝에는 바람보다 흐느낌이 먼저 흐른다. ‘흑흑흑’ 그런데 익숙한 냄새가 느껴진다. 감지 않은 것 같았던 눈이 떠지고 어둠의 색이 달라져 있다. 슬픔은 여전히 남은 듯 가슴에 두 손이 모아져 있다. 나는 또 현실이라는 꿈에 도착했고 내 시는 꿈의 방편이다.
박경서 | 2019년 『문예바다』 신인상 시 당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