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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2장 1-4절. 마음을 같이 하고 한 마음을 품으라
1. 바울 사도가 본문의 말씀을 기록할 때, 심정을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바울 사도는 복음을 전하다가 로마 감옥에 죄수로 갇혀서 고생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개인적으로는 어서 험악한 세상을 떠나서 평안한 천국에 들어가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빌립보 성도들을 생각할 때는, 비록 험악한 세상이더라도 좀 더 남아서,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주고 주고 싶었습니다.
2. 바울 사도는 빌립보 교회가 선교헌금을 여러 차례 보내주었기 때문에, 빌립보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4장 1절에서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불렀습니다.
3. 그러나, 이렇게 사랑하는 빌립보 교회에도 문제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성도들 사이에 사랑의 교제가 부족한 점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빌립보서 2장 4절에서,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고 부탁했습니다.
4. 오늘은 사랑의 친교에 대한 권면의 말씀을 순서대로 살펴보겠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는 사랑과 위로와 권면과 서로 불쌍히 여김이 있는 곳입니다.
1절.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New American Standard Bible: Therefore if there is any encouragement in Christ, if there is any consolation of love, if there is any fellowship of the Spirit, if any affection and compassion,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Εἴ τις οὖν παράκλησις ἐν Χριστῷ,
if (there is) any therefore encouragement in Christ
‘권면’이라는 단어(παράκλησις)는 권면이라기보다는 ‘도움을 주기 위해 부른 것’(calling to one's aid), ‘격려, 위로’(encouragement, comfort)를 가리킵니다.
사랑의 무슨 위로나
εἴ τι παραμύθιον ἀγάπης,
if any comfort of love
직역하면 ‘만일 어떤 사랑의 위로가 있다면’란 뜻입니다.
즉 ‘무슨’이란 단어는 ‘사랑의 위로’를 수식하는 말입니다.
성령의 무슨 교제나
εἴ τις κοινωνία Πνεύματος,
if any fellowship of Spirit
직역하면 “무슨 ‘성령의 교제’가 있다면”이란 뜻입니다.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εἴ τις σπλάγχνα καὶ οἰκτιρμοί,
if any affections and compassions
직역하면 ‘무슨 긍휼들과 자비들이 있다면’이란 뜻입니다.
1. 빌립보서 1장이 서론격이라면 2장부터는 본론에 해당합니다.
바울 사도가 갈라디아서에서는 강한 책망조로 말했고, 고린도전후서에서는 강압적인 어조로 말했지만, 빌립보서에서는 사랑이 넘치는 설득조의 어조로 말하고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의 유일한 단점은 두 여전도회 회장인 유오디아와 순두게가 싸우는 문제였습니다.
물론 이 싸움도 바울을 돕기 위한 견해의 차이였습니다.
2. 바울 사도는 앞장에서 자신의 로마 투옥이 복음 전도의 진보가 되었음을 말했고, 성도들은 구원받은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해야 하고, 복음 전도를 위해서 서로 협력해야 할 것을 말했습니다.
빌립보서 1:12.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빌립보서 1:27.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그래서 초두에 ‘그러므로’란 ‘복음 신앙을 위해서 협력하기 위해서는’이란 뜻입니다.
이처럼 성도들이 싸우지 않고 복음 신앙을 위해서 협력하기 위해서는 본 절에 기록된 네 가지 은혜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① 그리스도 안에서 격려(παράκλησις: encouragement)를 받아야 하고
② 사랑의 위로(παραμύθιον ἀγάπης: comfort of love)를 받아야 하고
③ 성령의 교통함(κοινωνία Πνεύματος: fellowship of Spirit)이 있어야 하고
④ 긍휼과 자비(σπλάγχνα καὶ οἰκτιρμοί: affections and compassions)가 가득 차야 한다는 것입니다.
2. ‘격려’(παράκλησις: encouragement)라는 단어는 ‘곁으로 부른다’는 뜻에서 나온 말이고, 위로자 보혜사 성령님(παράκλητος)을 가리키는 말로도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약한 성도에 대해서는 야단치는 것보다 사랑으로 위로하고 격려해주어야 합니다.
‘위로’ (παραμύθιον)라는 말도 곁에서 말로 간곡히 위로해주는 것(comfort, consolation)을 가리킵니다.
‘성령의 교제’(κοινωνία Πνεύματος: fellowship of Spirit)란 인간적인 교제가 교회 안에서 파벌을 일으키지만, 성령님이 교통하시는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교제는 서로 분쟁을 없애고, 성령의 열매인 사랑(갈라디아서 5:22)이 가득한 모임이 됩니다.
‘긍휼’(σπλάγχνα)이란 원래 내장(inward parts (heart, liver, lungs, etc.)을 가리키는 말인데, 온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자비’(οἰκτιρμοί)란 약자에 대한 동정심(pity, compassion)을 가리킵니다.
이런 네 가지 은혜들을 받아야 교회 안에서 분열과 다툼이 종식될 수 있습니다.
3. 바울 사도는 권면하기를 약한 자들을 안위해주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주라고 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4.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주며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
위로’ (παραμύθιον)라는 말도 곁에서 말로 간곡히 위로해주는 것을 가리키는데, 마치 보아스가 말로 룻을 위로해주고, 물질로 위로해준 것과 같습니다.
룻기 2:13. 룻이 이르되, 내 주여. 내가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나는 당신의 하녀 중의 하나와도 같지 못하오나 당신이 이 하녀를 위로하시고 마음을 기쁘게 하는 말씀을 하셨나이다 하니라.
‘성령의 교제’(κοινωνία Πνεύματος: fellowship of Spirit)란 관사가 없으므로, 단순히 ‘영적 교제’라고 번역할 수 있으나, 문맥상 성령의 교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관사가 없이 성령님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갈라디아서 5:16, 18, 25.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Πνεύματ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너희가 만일 성령(Πνεύματ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만일 우리가 성령으로(Πνεύματι)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긍휼’(σπλάγχνα)은 온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을 가리키고, ‘자비’(οἰκτιρμοί)란 약자에 대한 동정심(pity, compassion)을 가리기키 때문에, 성령님께서 긍휼과 자비의 마음을 주셔야 안에서 분열과 다툼이 종식될 수 있습니다.
4. ‘그리스도 안에’라는 말은 교회의 특성이 예수 믿는 성도들의 모임이라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 용서와 사랑, 긍휼과 자비를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모이는 교회는 용서와 사랑, 긍휼과 자비가 충만한 곳이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1) 그런데, 빌립보 교회는 하나님과 주의 종에게는 어느 교회보다도 뛰어나게 잘하면서도, 성도들 상호간에는 사랑과 친교가 부족한 교회였습니다.
그 단적인 예로, 교회의 가장 뛰어난 두 지도자인 유오디아와 순두게가 서로 싸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4장 2절에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빌립보서 2장 2절에는,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으라”고 했습니다.
(2) 이처럼, 두 지도자가 마음이 하나가 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교회가 사랑이 없고 썰렁하며, 친교가 없고 각각 자기밖에 모르는 교회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2장 3절에는,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다른 사람을 낫게 여기라”고 했습니다.
5.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는 “사랑의 위로”가 있는 곳입니다.
“위로”란 원래 괴로움을 잊게 해준다는 뜻이 있습니다.
이처럼 위로하는 사람은 주님의 위로를 자신이 먼저 체험한 사람이어야 위로를 할 수 있습니다.
상대방의 마음을 체감하지 못하고, “마음 크게 먹고 다 잊어버려라”고 해보았자 안 됩니다.
실제로 자신이 그 문제로 깊은 상처를 받았으나, 주님의 사랑을 통해서 위로를 체험한 사람만이, 그 고통을 공감하고 위로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1장 4절에는 “우리가 받은 그 위로로써 성도를 위로케 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우리를 위로하실 수 있는 것은 히브리서 4장 15절에 말씀한 대로, 예수님이 실제로 인간의 괴로움을 체험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위로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 성도님들은 서로 사랑하고 위로하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6. 교회는 성령의 교제나 긍휼과 자비가 있는 곳입니다.
빌립보서 1:1.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고통과 괴로움 속에서 살아가는 인생에게는 성령님 안에서 성도간에 교제가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에서 상처받은 사람이 성도의 교제를 통해서 성령님의 위로를 경험하는 곳입니다.
저는 신앙생활을 해오면서, 정말 교회의 성도간 교제를 통해서 많은 위로를 체험했습니다.
어떤 때는 세상에서 상처받고 심사가 불편해서 교회에 갑니다.
그러나, 교회에 가서 예배드리고, 성도들과 친교하면, 한 번도 실망 않고 언제나 위로와 평화를 체험하곤 했습니다.
이처럼 교회에서 성도의 교제를 통해서 위로를 받는 것은 교회에는 성령의 위로와, 항상 수용적이고, 용서와 사랑이 깃들고, 서로 짐을 져주려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간단한 음식들을 서로 준비해서 나누어 먹으면서 서로 친교할 때, 사랑과 위로를 얻습니다.
(2) 교회에서 그리스도인의 교제는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자비를 베푸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긍휼히 여기고 자비를 베푸는 데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에베소서 2:4.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도다.
야고보서 5:11.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히브리서 4:16.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7. 하나님은 자비의 아버지십니다.
고린도후서 1:3.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라.
디도서 3:4.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내실 때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이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도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비하심 같이 우리도 이웃에 대해서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6장 36절에는,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같이 너희도 자비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연약한 성도에게 주님의 심정으로 불쌍히 여기고 감싸주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의 교통으로 친교하는 교회는 먼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마음 가득히 받고서, 성도들끼리 서로 친교를 나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배를 통해서 주님의 사랑과 위로를 가득히 받으시고, 예배 후에는 식사를 같이 하면서, 아름다운 친교를 나누시기를 바랍니다!
교회는 한 마음과 한 뜻으로 사랑하는 곳입니다.
2절.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New American Standard Bible: make my joy complete by being of the same mind, maintaining the same love, united in spirit, intent on one purpose.
마음을 같이하여
πληρώσατέ μου τὴν χαρὰν ἵνα τὸ αὐτὸ φρονῆτε,
fulfill my the joy so that the same you may be minded
직역하면 ‘동일하게 너희가 생각하도록 하여, 내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는 뜻입니다.
한글성경에는 ‘내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가 4절에 나와 있습니다.
‘너희가 생각하도록 하여’(φρονῆτε)는 현재 가정법 동사이고, 원형(φρονέω)은 ‘이해하다, 생각하다, 판단하다’(have understanding, think, judge)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충만하게 하라’(πληρώσατέ)는 부정과거 명령형 동사로서(fulfill) ‘완전히 충만하게 하라’는 뜻입니다.
같은 사랑을 가지고
τὴν αὐτὴν ἀγάπην ἔχοντες,
the same love having
‘가지고’(ἔχοντες)는 현재분사로서(having) ‘늘 가지고’란 뜻입니다.
뜻을 합하며
σύνψυχοι,
united in soul
이 낱말은 형용사로서 ‘함께’(σύν)란 전치사와 ‘영혼’(ψυχή)이라는 명사가 합쳐진 것입니다.
한 마음을 품어
τὸ ἓν φρονοῦντες,
the same thing minding
직역하면 ‘같은 것을 생각하면서’란 뜻입니다.
‘생각하면서’(φρονοῦντες)는 현재분사로서(minding) 언제나 생각하는 것을 뜻하고, 원형(φρονέω)은 ‘이해하다, 생각하다, 판단하다’(have understanding, think, judge)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1. 본 절은 마음의 일치를 교훈하고 있습니다.
‘마음을 같이 하라’고 말씀합니다.
‘같은 사랑을 가지라’는 것은 따뜻한 마음, 정적인 요소를 강조한 것입니다.
‘뜻을 합하라’고 말씀한 것은 의지적인 면을 강조한 것입니다.
유오디아와 순두게가 자기의 교권을 생각하지 말고, 불신자에 대한 복음 전도와 바울의 선교사역을 돕겠다는 뜻에서 의지적으로 일치단결하라는 말씀입니다.
마지막 ‘한 마음을 품으라’는 것은 첫째 교훈을 반복하면서 강조한 것입니다.
현재분사는 ‘늘 한 마음을 품으라’는 것입니다.
2. 그러나 바울 사도는 긍적적인 분열과 편당을 절대 금지한 것은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 올바른 다툼과 편당이 있어야 옳은 것을 찾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교회에 이런 다툼과 편당이 있을 때, 바울은 이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해서 올바른 것을 추구해 나갈 때 필연적으로 다툼과 편당이 생겨야 한다고 인정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1:18-19. 첫째는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 대강 믿노니, 너희 중에 편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
3. 교회 성도들은 먼저 마음을 같이 하여야 합니다.
“마음을 같이 하여”란 말씀은 주님을 마음에 모심으로 한 마음이 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즉, 자신을 버리고, 오직 주님을 마음에 모시고 섬기면, 자연스럽게 한 마음이 됩니다.
인간적인 사리사욕이 앞장서면 한 마음이 되지 못하고 싸웁니다.
그러므로, 에베소서 4장 2절에는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과 서로 용납하고 사랑함으로써,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4. 올바른 친교가 이루어지려면 같은 사랑을 가져야 합니다.
교인들끼리 같은 사랑을 갖는 방법은 오직 주님만을 사랑하는 데서 같은 사랑을 가질 수 있습니다.
각자가 개인의 명예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한 마음이 될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을 위하는 생각이 가장 중요시 될 때, 한 마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는 예수님만을 모시고, 친교하는 교회 되기를 축원합니다!
5. 올바른 친교가 이루어지려면, 뜻을 합해야 합니다.
주님을 위해 살고 주님을 위해 죽고자 하는 목적이 같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군사들은 나라를 위하여, 또는 지휘관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려는 숭고한 뜻에서 하나가 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는 주님을 위해서 살고 주님을 위해서 죽고자 하는 뜻에서 하나가 되어 있습니다.
6. 올바른 친교가 이루어지려면, 한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한 마음이 된 교회는 에베소서 4장 4-6절에서 말씀한 대로, 구원의 주님도 하나이시고, 성령님도 한 분이시고, 교회도 한 몸으로서, 그리스도인들이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있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4장 3절에는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도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시기를 바랍니다!
교회에서 아름다운 친교가 이루어지려면, 자기를 높이려는 마음을 버리고, 순수한 마음과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존중해야 합니다.
3절.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New American Standard Bible: Do nothing from selfishness or empty conceit, but with humility of mind regard one another as more important than yourselves;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μηδὲν κατ’ ἐριθείαν μηδὲ κατὰ κενοδοξίαν,
nothing according to self-interest or according to vain conceit
동사가 없으나 좋은 번역입니다.
‘허영’(κενοδοξία: vain-glory)이란 단어는 ‘비어있는(κενός) 영광( δόξα)’이란 뜻으로서 한글번역을 잘 된 번역입니다.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ἀλλὰ τῇ ταπεινοφροσύνῃ ἀλλήλους ἡγούμενοι ὑπερέχοντας ἑαυτῶν,
but in the humility one another be esteeming surpassing themselves
직역하면 ‘오직 겸손히 각각 서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란 뜻입니다.
‘낫게’(ὑπερέχοντας)는 현재분사로서(surpassing) 계속 낫게 여기는 것을 뜻하고, 원형(ὑπερέχω)은 ‘넘어로’(ὑπέρ)란 전치사와 ‘가지다’(έχω)란 동사의 합성어입니다.
‘여기고’(ἡγούμενοι)는 현재분사로서(be esteeming) 계속 여기고 평가하는 것을 가리키고, 원형(ἡγέομαι)은 ‘인도한다, 생각한다, 간주한다’(lead, think, suppose, consider)는 뜻입니다.
1. ‘다툼’과 ‘허영’은 교회가 하나 되는 일에 방해물들입니다.
‘겸손’과 ‘상호 존경’은 교회를 결속시켜주는 요소들입니다.
잘 아시는 대로 어거스틴은 첫째도 겸손, 둘째도 겸손, 셋째도 겸손이라고 했습니다.
‘다툼’(ἐριθεία)이란 단어는 원래 봉사의 개념이 없이 오직 이익과 권력만 추구하는 이기적인 야망(selfish ambition)을 가리키는데, 특히 정치적인 관료가 부정한 방법으로 개인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self seeking pursuit of political office by unfair means)
반대로 ‘겸손’(ταπεινοφροσύνη: humility)이란 ‘인간적인 자존심을 낮추는 것’(lowliness of human pride), ‘마음을 낮추는 것’( lowliness of mind)을 가리킵니다.
2. 세상 명예와 권세와 물질은 병들었을 때나 임종할 때는 허무한 것임을 알게 됩니다.
오직 주님이 기뻐하실 일과 선한 일은 임종을 앞둘 때에도 참된 위로가 됩니다.
디모데전서 6:17-19.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이룩하려면 적극적으로 겸손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겸손은 자신이 부족한 줄 알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아는 것입니다.
오직 성공적인 삶이 자기의 능력에 있지 않고 하나님께만 있음을 진심으로 아는 데서 옵니다.
당시 로마 시대에는 ‘겸손’이 미덕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노예 근성이나 비겁한 굴종이라고 천시되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윤리에서는 겸손이란 하나님의 은혜를 얻는 고귀한 미덕으로 존중되었습니다.
베드로전서 5장 5절에는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도 수건을 허리에 동이시고, 지극히 겸손하게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요한복음 13:14-15.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
‘남을 낫게 여기라’는 것은 남의 장점을 보고, 존중히 여기라는 뜻입니다.
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라
‘아무 일’이라고 하신 것은 빌립보 교회에서 선교 사업이라는 선한 일을 할 때, 서로 다툰 것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빌립보 교회에는 두 여성 지도자가 있었습니다.
한 분은 유오디아였고, 다른 한 분은 순두게였습니다.
그런데, 이 두 여성 지도자들이 바울 사도를 돕는 선한 사업을 하면서 서로 다투었습니다.
다투게 된 원인은 빌립보 교회에서 로마 감옥에 있는 바울 사도에게 에바브로디도라는 남자 성도(원래는 노예 출신 성도)를 파송한 것 때문이었습니다.
유오디아(연령이 높은 여전도 회장)는 에바브로디도(나이가 든 성도)를 파송하자고 했고, 순두게(나이가 젊은 여전도회 회장)는 그 사람을 파송하지 말고 젊은 사람을 파송하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에바브로디도가 로마 감옥에서 바울 사도를 시중들기는커녕 병이 들어서, 오히려 바울에게 짐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순두게가 유오디아에게 “거 보라고, 에바브라디도는 내가 안 된다고 했지 않느냐?”고 하면서, 다툼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비록 선한 사업을 위해서라도 아무 일에든지 다투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4장 2절에,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선한 일을 하더라도 서로 다투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4. 허영으로 하지 말라
여기서 허영으로 주의 일을 한다는 것은 교회에서 무슨 일을 할 때, 자신의 이름을 내는 일을 가리킵니다.
유오디아와 순두게가 이런 허영심으로 일을 하기 때문에 다툼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정말 마을을 쏟아야 할 것은 에바브로디도가 병들었으니, 바울 사도가 얼마나 더 힘들었을까 하고 염려하고 기도해야 하는데, 기도는 않고 서로 책임 전가만 하고, 싸움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에서 일할 때, 개인의 명예를 위해서 일하지 말고, 오직 주님의 일이 잘되기를 위해서 일하시기 바랍니다!
바울처럼 나는 죽든지 살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기를 바라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5.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
유오디아는 연세가 많은 지도자였고, 순두게는 젊은 지도자였습니다.
그런데, 유오디아는 자기가 더 나이와 경험이 많다고 순두게를 무시했습니다.
그리고, 순두게는 자기가 더 젊고 참신하고, 힘차게 일도 잘한다고 하면서, 유오디아를 무시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 사도는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권면합니다.
‘겸손’이라는 것은 자신의 장점뿐만 아니라 단점을 인정하고, 상대방의 단점만이 아니라 장점도 인정해주는 것입니다.
반대로 교만이란 자신의 장점만 인정하고, 상대방에게서는 단점만 보는 것을 가리킵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누구나 장점과 단점이 다 있습니다.
또한, 장점이 뒤집어보면, 단점이 되는 것이고, 단점도 뒤집어보면 장점이 되는 것입니다.
예컨대, 명랑한 것을 방정맞다고 할 수 있고, 쑥맥이 같은 사람도 젊잖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뚱뚱한 사람도 품위가 있다고 할 수 있고, 날씬한 사람도 체모가 없다고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말수가 적은 사람을 말할 줄도 모른다고 할 수 있고, 젊잖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교회에서 일할 때는 서로 상대방의 장점을 바라보면서, 서로 존경하시기 바랍니다!
올바른 친교를 하려면, 자기 일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일을 돌봐줄 수 있어야 합니다.
4절.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do not merely look out for your own personal interests, but also for the interests of others.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μὴ τὰ ἑαυτῶν ἕκαστοι σκοποῦντες,
not the things of themselves each considering
직역하면 ‘각자가 자기의 일들을 돌아볼 뿐만 아니라, 각자가 다른 사람들의 이들을 (돌아보라)’는 뜻입니다.
‘돌아볼’(σκοποῦντες)은 현재분사인데(considering), 여기서는 명령형(돌아보라)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원형(σκοπέω)은 ‘바라보다, 관찰하다, 주의깊게 바라보다’(look at, contemplate, regard attentively)란 뜻인데, 본 절에서는 남의 사정을 주의깊게 관찰해서 돌봐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ἀλλὰ καὶ τὰ ἑτέρων ἕκαστοι.
but also the things of others each
직역하면 ‘또한 각자가 다른 사람들의 일들을 (돌아보라)’는 뜻입니다.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는 말씀은 원문에 2절 초두에 나와 있습니다.
1. ‘자기의 일을 돌아본다’는 것은 자기 가정의 영적인 일과 육신의 건강과 물질적 지원을 돌보는 것을 가리킵니다.
물론 자기 내외와 자녀들 그리고 손자 손녀들과 사위 며느리들까지돌보는 것을 가리킵니다.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본다’는 것은 교회에서 자기가 소속된 구역 식구들이나 기타 소속된 단체원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심방하고, 애경사를 돌아보는 것을 가리킬 뿐만 아니라, 가까운 친척들을 돌아보는 일까지를 가리킵니다.
물론 여기서 더 나아가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선교단체나 고아원이나 노인들이나 외국인들까지 돌아볼 수 있다면, 더욱 좋은 일입니다.
2.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뿐더러
먼저 자기 일을 잘하면서, 다른 사람의 일까지 돌볼 수 있어야 합니다.
(1) 교회에서 일을 잘하는 사람은 먼저 자기의 맡은 일에 충성된 사람이어야 합니다.
자기 가정 일을 잘하지 못하는 사람이 큰 가정인 교회의 일을 잘할 수 없습니다.
자기 사업도 잘못하는 사람이 무료 봉사 사업인 교회의 일을 잘할 수 없습니다.
자기 부서의 일을 잘하지 못한 사람이 다른 부서의 일을 간섭할 수 없습니다.
학생들이 자기 학교 공부를 착실히 하지 못하는 사람이 교회에서 열심히 일한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조롱을 받습니다.
(2) 자기 맡은 일을 잘하는 사람은 교회의 일도 잘합니다.
가정 살림을 잘하는 사람이 교회 일도 잘합니다.
사업과 직장 생활을 잘하는 사람이 교회 일도 잘합니다.
학교 공부를 잘하는 사람이 교회 일을 맡겨주면 잘합니다.
그래서, 디모데전서 3장 5절에,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아보리요”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먼저 자기 일을 성실히 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또한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라
(1) 하나님의 자녀들이 자기 가정과 사업만 잘하고, 교회에서 봉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아직 구원의 은혜와 사랑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구원의 은혜에 감격하는 성도는 봉사의 삶을 살고자 합니다.
은혜에 대한 감격이 터질 것 같아서, 봉사와 사랑을 실천하지 않으면, 괴롭고 행복감을 잃어버립니다.
(2) ‘주는 삶’은 ‘받는 삶’보다 더욱 행복합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20장 35절에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주님도 누가복음 6장 38절에서 “주라 그리하면 흔들고 넘치도록 하여 안겨주리라”고 하셨습니다.
시편 112편 5절에도 “은혜를 베풀며 꾸어주는 자가 잘 된다”고 했습니다.
(3) 세상 사람들은 이기적인 목적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행복감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원래 사랑의 하나님이셔서, 죄인이고 원수된 인간을 사랑하고 용서하시는,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장 사랑하는 독생자 예수님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예수님도 섬기고 목숨까지 주는 삶을 사셨습니다.
마태복음 20장 28절과 마가복음 10장 45절에서, “주님은 세상에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려고 오셨다”고 했습니다.
(4)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에게서 참된 사랑과 용서와 거저 베푸는 은혜를 알게 되었습니다.
요한일서 4장 10절.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먼저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봉사의 기관인 교회를 주셔서 봉사하면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다른 사람의 일을 돌아보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체험하고서, 여러분도 감격 속에서 용서와 사랑과 봉사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4.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원래 원문에 이 문구는 2절 초두에 나와 있으나, 한글 번역에는 4절에 넣었습니다.
자녀가 싸우면, 부모의 마음이 아픕니다.
이처럼, 바울의 마음은 빌립보 성도들이 자기를 위해서 헌금과 사람을 보내준 것은 감사하지만, 자기 때문에 두 여성 지도자들이 싸우는 것을 마음 아파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권면한 것처럼, 한 마음과 한 뜻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고, 서로 돌아봄으로써, 바울 사도의 마음을 기쁘게 해달라고 간청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성도들끼리 서로 사랑하면서 화목하는 것을 더 기쁘게 여기십니다.
그러므로, 새해에는 서로 사랑하고, 아름답게 친교하는 우리 교회 되기를 축원합니다!
이제 매주마다 권사님들과 집사님들이 해주시는 점심을 맛있게 드시고, 오후에는 좋은 친교의 시간들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친교를 통해서, 성도들 간의 친목과 사랑이 더욱 두터워지기를 바랍니다!
나아가서, 교회 나오시기가 서먹하신 불신가족들도 이 친교 모임을 통해서 교회에 나오시고, 신앙을 갖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