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대밭에서 / 박재삼(1933-1997)
갈대밭에 오면
늘 인생의 변두리에 섰다는
느낌밖에는 없어라.
하늘 복판을 여전히
구름이 흐르고 새가 날지만
쓸쓸한 것은 밀리어
이 근처에만 치우쳐 있구나.
사랑이여
나는 왜 그 간단한 고백 하나
제대로 못하고
그대가 없는 지금에사
울먹이면서, 아, 흐느끼면서
누구도 듣지 못하고
알지 못할 소리로
몸째 징소리 같은 것을 뱉나니.
묵은 갈대가 한순간에 푹 쓰러지는 여름, 지난한 삶의 순환이 벌어지고 있다. 묵은 갈대는 하루가 다르게 보이지 않는다. 푸른 갈대가 돋아나기 시작하면서 폭양에 무릎 꿇고 스러지는 것들 사이로 다시 바람을 받아 낸다. 물결처럼 출렁이며 깊은 영혼의 소리를 내기 시작하였다.
대나무와 같은 마디가 있다고 갈(대)라는 이름을 받기도 했지만, 대금과 어울려 사람의 입술에 닿으면 기어이 일을 내고야 마는 성품이기도 한 것이 갈대다. 대금의 소리는 갈대 속에 있는 얇은 청(속껍질)을 청공에 붙여 소리를 떨게 하여 내는 것으로 심금을 울려놓고 만다.
시인에게 갈대밭은 “변두리”이거나 “쓸쓸한 것”이 밀려 치우친 곳이다. 그 갈대밭에 나가 속절없는 인연을 생각하며 외로이 “울먹이면서” 아니 “흐느끼면서” 고백하지 못한 사랑이 덧나 누구도 “알지 못할 소리”를 지르고 있다. 시인은 갈대밭에서 갈대의 소리를 들려주고자 함이 아니다.
“징소리 같은” 덩어리(“몸째”) 소리를 뱉어내기 좋은 곳, 쓸쓸함을 느끼기에 적당한 갈대밭에서 온 몸을 흔쾌하게 다 쏟아내기 위해 얼마나 담고 살아오느라 벼르고 있었던가. 불쑥불쑥 말하기보다 속을 쳐 부를 수 있는 순질한 사랑, 시인은 갈대밭에서 웅장하게 울려 퍼지는 소리로 갈대의 빈 마디를 채우고 있다. 진중한 사랑이 무엇인지 슬퍼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