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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월간 웹진 『비평공간』 2호
'시한부' (백은별 저 / 바른북스) 토론
2025년 2월 5일 발행 / 출판놀이
이재복 : 참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가능하면 화면을 켜고 얼굴 보면서 토론하면 좋겠습니다. 요즘 독감 때문에 힘든 분들도 계신데요. 목소리라도 참여해 주시고요.
오늘도 아이들 삶을 두고 이런저런 상당히 많은 얘기를 해야 될 것 같아요. 특히 작가들한테는 <시한부>가 상당히 의미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청소년이 쓴 작품이라 우리가 문학적인 완결성을 가지고 왈가왈부하면서 논할 것까지는 없겠지만요. 청소년이 쓴 작품이라서 요즘 청소년들의 삶을 생생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저도 요즘 청소년들이 이런 삶을 살고 있구나, 놀랍기도 했고요.
청소년들이 갖고 있는 내면의 불안이나 우울, 이런 걸 주제로 했는데요. 작품이 결코 가볍지 않은데도 베스트셀러가 돼서 많은 대중들한테 읽힌다는 것 자체가 기이하기도 하고 그래요. 보통 청소년들이 읽는 작품일 때 이렇게 어두운 주제를 다루면 너무 무거워서 잘 안 읽는 경우가 많잖아요. <시한부>는 결코 가볍지 않고 되게 우울하고 어떻게 보면 어둡기까지 한 작품인데, 이런 작품을 청소년들이 많이 읽고 또 베스트셀러까지 된다는 것이 아주 특이한 현상 같습니다.
글을 쓰는 작가들은 토론해 봐야 될 지점이 상당히 많을 것 같고요. 역시 세상은 조금씩 알게 모르게 저 아래에서부터 변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내면 심리의 불안 같은 것들이 잠재돼 있다가 어느 시점에서 폭발하는 것을 우리는 하나의 현상이라고 얘기하지 않습니까? <시한부>는 지금 어린이, 청소년들의 삶이 어떻게 변해가고 있는지 그 징후라고 할까? 그 변화 과정이라고 할까? 그런 것을 상당히 잘 보여주는 작품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오늘 『비평공간』 두 번째 자리인데요. 여기는 일방적으로 누가 강의하는 자리가 아니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적극적으로 토론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아동, 청소년 문학판에는 늘 비평이 부재하다는 얘기가 있어왔는데 『비평공간』이 그런 비평 부재의 현상을 넘어보려는 새로운 시도이기도 하거든요. 여러분들의 참여가 아동문학판에 변화를 만들어내는 거지요. 오늘 적극적으로 참여해 주시기 바랍니다.
장가영 씨한테 이런 걸 한번 여쭤보고 싶어요. 작품에 대한 평가를 다 떠나서 청소년이 쓴 이 <시한부> 작품을 읽으셨을 때 직감으로 딱 떠오른 느낌이 있으셨습니까?
장가영: 저는 주인공의 자아가 너무 크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친구의 자살이 있기는 했지만 그 이후에 이렇다 할 큰 이야기가 펼쳐지는 게 아니고, 계속 자기가 죽을 날을 기다리면서 마음의 얘기를 하잖아요. 직감적으로 든 생각은 자아가 너무 비대하다는 것이었어요.
본인이 청소년기의 한 가운데에 있기 때문에 그렇게 쓴 건가 싶고요. 성인이라면 뭔가 거리 두기가 되었을 것 같은데, 이 글에서는 거리두기가 안 됐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게 장점인지 단점인지는 사실 잘 모르겠어요. 아, 너무 뜨겁다, 그런 느낌이에요. 그 모든 감정 소용돌이 한가운데 있는 느낌이 확실히 들었던 것 같아요.
이재복: 느낌이 참 좋네요. 청소년이 소설 형식으로 쓴 글쓰기인데, 작가인 우리 입장에서는 이 청소년의 글쓰기가 가감 없이 자기 삶을 증언하는 느낌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자기 자신의 삶을 거리 두기해서 객관적으로 묘사한다기보다는 자기 내면에 비치는, 자기 가슴에 떠오르는, 자기 삶을 지배하는 여러 가지 어떤 심리적인 감정의 소용돌이를 그냥 토해내듯이 증언하는 느낌이 들죠. 작가들은 요즘 청소년들의 감성이라든가 심리적인 불안이 어떤 방향을 향해 가고 있는지 느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 면에서 오히려 작가들이 너무 한가하게 아이들을 보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요즘 아이들은 저렇게 내면 깊이 들어가서 심리적인 불안이나 아픔을 직면하고 있는데, 작가들은 거리 두기를 한다면서 현실과 동떨어진 아이들을 그려내고 있는 게 아닐까? 뭐, 이런 반성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고요.
뒤로 가면서 세부적으로 살펴볼 부분이 많겠지만 일단 큰 틀에서 소감을 나눠봅시다. 이봉열 씨는 어떻습니까? 읽고 나서 직감으로 어떤 생각이 드셨어요?
이봉열: 저는 저자가 15살이라는 걸 알고 읽었는데, 작품을 읽다가 저자가 중학생이라는 것을 잊었어요. 당연히 성인작가가 썼을 거라는 생각으로 읽었는데, 중간에 자꾸 툭툭 막히는 게 있더라고요.
두 가지가 막혔어요. 주인공 수아가 죽음에 집착하는 모습에 감정이입이 됐던 것 같아요. 그래서 너무 힘들더라고요. 죽음에 대해서 애착하는 느낌이 들었어요. 이건 집착이 아니라 애착이다, 그런 느낌. 그래서 힘들어서 중간에 한숨 좀 돌리고 읽어야 되겠다, 하면서 두어 번 끊어서 읽었어요.
또 하나는 문장이 매끄럽지 않은 부분들이 있더라고요. 이게 베스트셀러라고 하는데 문장이 탁탁 걸리는 부분들이 있는 거예요. 일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쓰기는 했는데, 어떤 부분에선 일인칭이 아닌 객관적인 입장에서 쓰는 느낌이 드는 부분들도 있고요. 그래서 작품의 끝 무렵쯤에 이게 뭐지 싶어서, 작가소개를 다시 읽어봤어요. 그때 확 와 닿더라고요.
“아, 15살! 그러면 엄청 잘 쓴 거지.”
죽음에 대해 주인공이 집착하는 건 요 또래의 아이들이면 그럴 수 있겠다, 제가 보지 못하는, 제가 그들 속에 있지 못하는 것들을 이렇게 얘기하고 있어서 공감하지 못했나 보다. 그런 생각을 했어요.
이재복: 그렇죠. 말씀하신 것처럼 어른의 시각에서 봤을 때는 주인공 유수아라든가 윤서가 죽음에 대해 과도하게 집착한다는 느낌이 들기도 해요.
근대교육을 받고 살아온 기성 어른들 입장에서는 “이거 뭐 얘네들이 고생을 못해 봐서 이러나. 낭만 아니야, 사치 아니야, 애들이 왜 이래.” 이런 식의 느낌을 가질 수도 있지요. 그런데 아이들이 죽음이라고 하는 문제에 대해서 저렇게 깊이 있게 자기 삶의 문제로 가져올 수밖에 없는 이유가 거꾸로 그러한 현실 때문이 아닌가. 현실이 아이들을 그렇게 몰아가는 건 아닌가. 그렇다면 현실의 어떤 문제 때문에 이러한 상황이 벌어지는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몇몇 특수한 아이들의 얘기가 아니고 상당히 보편적인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저도 이 작품을 어떤 관점에서 봐라보아야 할까, 하는 생각으로 사회학자들이 아동, 청소년에 대해 연구한 자료들을 찾아보았는데요. 제일 기본적인 문제 제기가 이거였던 것 같아요. 2010년 이후에 태어난 아이들은 인터넷 기반 아동기를 보낸 최초의 세대인데, 그전 세대들하고는 상당히 많은 부분이 다르다는 거예요. 이 세대가 나타나면서 우울증, 불안증, 이런 정신적으로 불안한 아이들이 기하급수적으로 엄청나게 증가하는 현상이 나타났다는 건데요.
인터넷 기반 아동기를 보내는 아이들이 왜 이렇게 정신적으로 불안한가, 불안이 갑자기 증가한 이유를 두고 사회학자들이 깊은 연구를 하고 있더라고요. 사회학자들은 보편적인, 통계적인 현상을 두고 원인을 분석해 가잖아요. 작가들이 보는 시각이랑 좀 다른데 우리가 참고해야 할 지점이 상당히 많은 것 같아요.
2010년부터 왜 아이들이 정신적으로 불안이 더 심해졌는가? 특히 여자아이들이요. 여기 <시한부>에 등장하는 아이들도 대부분 여자 아이들이잖아요. 통계적으로 여자 아이들이 훨씬 더 불안증과 우울증에 심하게 시달린다고 하거든요. 왜 그럴까, 그런 부분에 대해서 상당히 많은 문제를 제기하고 또 연구를 하고 있더라고요.
저는 사회학 책 읽는 것보다 <시한부>를 읽으면서 오히려 사회학자들의 이론에 대해 더 잘 이해하게 되었거든요. 아이들이 그것을 몸으로 증명하고 있는 것 같아서요. <시한부>를 읽으면서 긍정적인 의미로든 부정적인 의미로든 진짜 새로운 아이들이 지금 태어나서 살고 있구나, 근데 글을 쓴다는 성인들은 옛날 고정관념 같은 아동관에 갇혀 있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어서 반성을 하면서 작품을 읽었습니다.
『비평공간』에서도 이 책을 문학적인 면에서 따지는 것보다 하나의 현상으로 깊이 있게 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시한부>가 어떤 문학 작품보다도 우리한테 지금 가장 절실하게 토론 대상이 되어야 할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여러분들이 이 작품의 의미에 대해서 조금 더 많은 얘기를 좀 나눠봐야 되지 않을까 싶어요.
장가영: 제가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이질감 같은 게, 할머니가 보면 사투리를 쓰더라고요. 제가 예전에 그런 글을 읽었는데요. 할머니, 할아버지나 경비원들이 근거 없는 사투리를 쓰는 것은 계층에 대한 편견이라고요. 그런 부분이 거슬리더라고요.
그리고 중학교 여자 아이가 써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구원자 같은 느낌의 남자 아이가 나오는 부분이라든가 자꾸 의미를 두려고 멋지게 쓰려고 하는 표현들이 너무 눈에 뜨였어요. 기성작가들을 따라하려고 그런 건지 아니면 자기가 읽었던 책처럼 쓰려다보니까 그런 건지 모르겠는데, 저는 중학교 2학년 작가라 생각이 톡톡 튈 줄 알았는데, 기성 작가들의 영향을 받은 듯한 것들을 보면서, 이 10대 작가가 쓴 작품이 과연 진짜 10대를 반영하고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흉내 내기 같은 느낌으로 글을 쓴 건 아닌가 하는.
이재복: 재미있는 토론이네요. 지금 장가영 씨가 제기한 문제에 대해 의견을 나눠주실까요?
이봉열: 저는 조금 다른 생각을 갖고 있어요. 제가 아까 전체 소감을 얘기할 때 말씀드렸는데요. 작품을 읽으면서 두 개가 걸리는 부분이 있었는데, 작가가 15살 중학생인 것을 깨닫고 달라졌다고요. “아, 이 정도면 너무 훌륭하다.” 문체 부분에서 걸렸던 부분들 포함해서 “아, 너무 대단하다. 너무 훌륭하다.” 그렇게 생각이 바뀌었거든요.
이 아이들이 저와 나이 차이는 굉장히 많이 나는데, 아이들의 고민이 저는 확 와 닿더라고요. 전폭적으로 믿음이 간다고 해야 할까. 청소년들의 자살률이 높잖아요. 아이들이 죽음에 집착을 넘어서 애착한 것 같다고 말씀 드렸는데, 정말 그렇겠다고 생각했어요.
작품 속에서 상담사하고 얘기할 때였는데요. 수아가 윤서가 죽음을 선택한 게 아니고 다른 사람, 그러니까 세상이 윤서를 옥상에서 밀어버린 거지, 그런 투로 이야기를 한 부분이 있거든요. 그때 제가 상담사였다면 어땠을까? 저도 어른이니까요. 윤서의 죽음과 또 수아가 죽으려고 하는 상황에서 나의 책임은 없나?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무얼까? 갑자기 반성 모드가 되더라고요. 제 주변에 이런 친구가 없어서, 기사로만 청소년 자살률이 1위이니 청소년의 불안이니 청소년들이 정신과 치료를 많이 받고 있다는 것은 알고는 있었지만 그렇게 와 닿지 않았거든요.
상담사도 결국은 도움을 못 줬잖아요. 저는 상담사가 굉장히 답답했어요. 도식적인 얘기만 해서 상담을 제대로 알고 하는 건가 싶다가도 어쩌면 이게 현실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학교의 상담사들이나 정신과에서 상담하는 모습들이 이 모습이 아닐까. 그래서 어른들이 해 줄 수 있는 것이 더 없는 게 아니었나, 의심이 들고 그랬어요.
이재복: 우리는 이 작품을 통해서 그런 공감도 하고 상당히 많은 걸 느끼게 되는 것 같습니다.
장가영 씨가 제기하신 문제가 10대라면 톡톡 튀어야 될 것 같은데 얘는 왜 그렇지 않냐는 거지요. 근데 뭐 10대라고 해서 물론 톡톡 튀는 애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애들도 있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10대라고 해서 규정된 게 있는 것 같지는 않고요. 10대 모든 아이들의 공통된 하나의 성격이어야 할 이유도 없는 것 같아요. 이런 아이도 있다. 10대에 톡톡 튀는 아이들도 있을 테고 또 톡톡 튀는 아이가 어려운 환경에 처했을 때는 심각한 쪽으로 내려갈 수도 있다. 10대라 그래도 심리적인 폭이 넓은 거지, 고정된 하나의 층으로 규정된 것은 없지 않을까 싶어요.
그 문제는 그 정도로 생각해도 좋을 것 같은데, 남자 아이가 구원자로 느껴지는 설정에 대해서는 좀 더 깊이 있는 토론이 돼야 할 것 같습니다.
또 이봉열 씨 말씀 중에 “윤서라는 아이가 죽음을 선택하는 것을 어떻게 봐야 하나, 세상이 이 아이로 하여금 죽음을 선택하게 만든 거다.” 물론 일반화시키면 얼마든지 그렇게 얘기할 수 있는데, 글을 쓰는 우리는 이 한 인물을 좀 더 다층으로 봐야 되기 때문에, 일반적인 정의보다는 윤서라는 아이의 내면 캐릭터라든가 윤서라는 인물에게 죽음은 어떤 의미인가, 깊이 있게 들여다보면 좋을 것 같아요.
지금 이 두 문제에 대해서 의견이 있으면 말씀 주시죠. 이경원 씨는 어때요?
이경원: 저는 지난번에 저희가 토론을 했던 <죽이고 싶은 아이>하고 비교를 좀 해봤는데요. 어른 작가 입장에서 소설을 구성하고 썼을 때는, 곤란에 처한 아이가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설정 하에서 어른이 도움을 주는 구도를 쓰고 싶어 하는 것 같아요. 근데 <시한부>를 보니까 주인공이나 주인공 친구를 둘러싼 모든 어른들은 사실은 공감을 크게 해주지 않거나 아니면 정말 필요로 하는 지점에 있어서 마음을 크게 열지 않는 식으로 관계를 형성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더라고요. 그래서 아, 이게 아이들의 눈을 통해서 바라보는 어른들의 모습일 수 있겠구나는 생각을 했고요.
사실 이게 소재가 굉장히 세거든요. 한 아이는 부모가 아동 살해 후 자살을 하려다가 실패해서 살아난 아이예요. 조손부모 아래서 성장을 했는데 결국은 세상하고 화해를 할 수 없어서 극단적인 선택을 했는데, 하필이면 자기가 정말 친하게 지내던 친구한테 그 모습을 보여준 거잖아요.
주인공 입장에서는 자기가 정말 친하게 지냈던 아이가 눈앞에서 자살하는 모습을 보는 설정으로 시작된 것이어서 소재 자체가 굉장히 세다고 생각을 했어요. 만약에 다른 각도에서 다룬다고 한다면 조금 더 이야기하고 싶어지는 지점들이 굉장히 많을 것 같은데, 여기에서 주로 이야기가 되는 것들은 처음에 말씀해 주신 것처럼, “그렇기 때문에 나는 죽을 수밖에 없다,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 그 ‘시한부’로 설정이 되어 있어요. 이런 지점들이 굉장히 색다르다고 생각을 하면서 봤습니다.
이재복: 이경원 씨 말씀 중에 인상 깊은 부분이 있는데요. “어른이었다면 구원자를 설정해 놓고 이 아이들을 다 구하게 만드는 쪽으로 갔을 거다. 그런데 청소년이 썼기 때문에 이 작품에는 그런 게 없다.” 이 지점에서 배울 점이 많은 것 같아요.
섣부른 구원자를 등장시켜서 아이들한테 정신적인 위안을 줬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아이들을 피상적으로 보는 것이 아닌가. 아이들이 처한 상황이라든가 내적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고 관념적인 사유만 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반성을 하게 되거든요.
윤서라는 아이는 아동 살해 후 자살에서 살아남았잖아요. 저는 이 청소년 작가가 상당히 정신적으로 깊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게 현실을 왜곡시키지 않은 점이었어요. 보통 이런 쪽에 연구하는 사람들을 보면 아동 살해 후 자살에서 살아남은 아이들이 받는 가장 큰 고통 중의 하나가 생존에 대한 죄책감이라고 하잖아요. “아, 엄마 아빠는 세상을 떠나고 나만 살아남았구나. 아, 내가 지켜주지 못했구나.”라는 그 생존 후 죄책감이 엄청나게 크다고 해요.
제가 볼 때 윤서는 작품 속에서 가장 강력한 캐릭터인데, 어른작가였다면 섣불리 윤서한테 동정이라든가 연민을 발휘해서 이 아이를 어떻게 하든지 살려놓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전혀 그런 모습이 없어요. 자살을 하는 과정도 가감 없이 아주 간략하게, 냉정하게 처리하면서 넘어가지요. 상당히 충격적일 정도로 죽음을 서술하는데, 저는 오히려 윤서라는 아이를 더 진실하게 묘사한 게 아닌가 생각하거든요.
아동 살해 후 자살에서 살아남은 아이들이 엄청난 죄책감을 갖는 것처럼, 부모가 이혼을 했다든가 가정에 어떤 위기가 왔을 때도 아이들이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죄책감이라고 그러거든요. 이게 엄청난 트라우마가 되고, 아픔이 되는 건데요. 내가 볼 때는 <시한부> 작가는 그 어느 기성 작가보다도 청소년의 현실을 증언하듯 진정성 있게 드러낸 것 같아요.
기성작가라면 윤서라는 캐릭터를 그리기 힘들지 않았을까. 대안을 제시하는 것도 작가적 사명감이겠죠. 작가정신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거예요. 그 갈등은 이해되는데, 상당히 어려운 문제를 청소년 작가들은 지금 하고 있는 거지요.
<시한부>가 많은 아이들한테 읽히고 전파된다는 것이 기성 작가들이 고민을 해야 할 지점인 것 같아요. “어디까지 써야 하고 어떻게 현실을 묘사해야 되나?” 이 점은 정말 상당히 중요한 토론 문제인데, 어른들이 너무 아이들의 삶을 자기 관념 안에서 왜곡시킨 게 아닌가, 깊이 이해하려고 하지 않은 게 아닌가, 이런 생각이 많이 들거든요. 윤서의 죽음에 대해서 상당히 많은 토론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네요.
전진영 씨는 작품은 안 읽으셨다고 했는데, 아이들을 만나시니까, 혹시 요즘 아이들이 실제 이런 우울을 많이 겪습니까?
전진영: 요즘은 애들을 못 만나고 있고요. 재작년에 중1 딸을 둔 엄마랑 친하게 지낸 적이 있어요. 딸이 학교생활을 어려워해서 저한테 아는 정신과 의사를 추천해줬으면 했던 적이 있어요. 많은 중학생들이 위센터 같은 데보다 전문적인 의사 선생님을 만나고 싶어 한다는 이야기는 주변에서 접하고 있습니다.
그 친구가 지금 중2거든요, 이제 중3이 되네요. 저는 이 책을 펴놓고 작가 소개를 안 읽고 앞부분만 몇 장 읽었거든요. 저는 정말 기성 작가라고 생각했지 중학생이라고 생각을 못 했어요. 들어와서 깜짝 놀랐어요. “어머, 중학생이 쓴 거라고?” 작가 소개를 전혀 안 읽고 바로 그냥 본문으로 들어가서 읽는데 자꾸 죽음에 대한 얘기 나와서 피했던 것 같아요.
여러분들 얘기를 들으면서 내가 왜 이 책을 못 읽었을까? 생각을 했거든요. 가장 큰 건 “재미가 없다.”였어요. 왜 재미가 없었지? 생각을 하니까 아까 이봉열 선생님이 말씀 주셨던 것처럼 문장이 막히는 부분들이 있었던 것 같아요. “나도 그랬나 보구나.” 이봉열 선생님 얘기를 들으면서 내가 읽지 못한 것에 대한 면죄부를 받은 듯한 느낌이 들었고요.
그리고 앞서 이야기되었던 것처럼 10대의 글이 톡톡 튀는 부분이 있으면 솔직히 참 좋잖아요. 그런 것 없이 너무 죽음에 대해서 깊이 생각한 것 같다는 말씀을 하셨는데요. 혹시 청소년 시기에 자살에 대해서 생각해 보신 적 없으세요?
저는 고등학교 때 심각하게 생각했던 적이 있거든요. 내가 왜 이 세상이 존재하고, 내가 이 세상이 왜 있고, 내가 이 세상에서 없어져도 지구는 잘 돌아갈 텐데, 내가 왜 존재하지? 이런 생각을 많이 했던 적이 있었어요. 공부도 못하는 것 같고, 잘하는 것도 없는 것 같고, 이런 내가 왜 있지? 나 죽어도 아무 상관없는 거 아니야? 이러면서 자살을 생각했어요.
그런데 막상 시도를 해보려고 하니까 너무 큰 고통을 제가 견뎌야 되는 거예요. 되게 무섭더라고요. 그걸 견디면서까지 내가 과연 죽을 용기가 있을까? 그런 생각을 했는데요. 결정적으로 자살하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던 건, “잘난 거 하나도 없는데 네가 왜 부모보다 먼저 죽어서 부모님 가슴에 대못을 박냐.” 이거였거든요.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했던 저의 10대가 여러분들 얘기를 들으면서 떠올랐고요.
제가 이 작품이 힘들고 재미없다고 느꼈던 이유를 장가영 선생님이랑 이봉열 선생님 얘기를 들으면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꼭 읽어봐야겠는 생각을 했어요.
이재복: 김진영 씨는 아이들을 만나고 있는 걸로 알고 있어서 제가 이런 질문을 드리고 싶어요. 이 작품이 청소년 작가가 쓴 거라서 문장이 잘 안 읽힌다. 그러니까 일반 어른들이 쓴 문학 작품의 문장보다는 쉽게 읽히지 않고 좀 덜컹거린다고 해야 될까요? 너무 비약이 심하다고 할까? 그런 느낌이 들어서 읽기가 좀 어렵다는 이야기가 나왔잖아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어른들은 그렇게 느끼지만 아이들은 이 작품을 좋아한다는 거지요. 다름이 있는 건데요. 김진영 씨는 작가이면서 또 아이들도 만나고 있으니까 양쪽의 입장을 잘 느끼실 것 같아요. 이 작품에 작동하는 문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김진영: 중학교 학생들하고 이 책을 읽었는데요. 아이들이 “생각만큼 재밌지 않았어요.” 이렇게 얘기를 하더라고요. 그래도 좋았던 것은 아이들의 언어가 살아있고, 욕하는 것도 그대로 나오잖아요. 그런 부분은 좋아하더라고요. 그런데 내용은 솔직히 너무 다가오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많았어요.
“실제 요즘 아이들하고는 다르게 기성 작가들이 쓴 책을 많이 읽은 아이가 쓴 책이다.”하면서 아이들이 우리도 다 이런 식으로 책을 쓸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그렇게도 이야기를 했고요. 저도 마찬가지로 이 책을 읽으면서 기성 작가들의 책을 정말 많이 읽고 썼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제가 생각할 때는 작가가 가볍지 않다, 정말 많은 생각을 하고 소설을 썼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첫 번째는 자살이라는 키워드로 윤서, 수아가 연결이 되잖아요. 보통 자살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게 우울 때문에 시작이 되는데, 이 우울이 가장 큰 게 가까운 사람의 자살이거든요. 그것을 이 작가가 포착을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요. 무엇보다 이 작품이 아이들의 삶을 정말 잘 보여줬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자해를 보여준 부분이요. 자살은 특별하다고 하더라도, 자해에 대한 생각이나 자해를 하는 것은 아이들 사이에서 너무 많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자해가 점점 심해지면 결국은 자살로 가니까요. 그래서 작가가 자해에 대한 얘기도 다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저는 성민이를 구원자라고 생각하지 않았거든요. 책을 읽다 보면 성민이가 수아를 살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성민이 시점으로 서술되는 부분을 읽으면 성민이도 그때 죽으려고 했거든요. 자기가 죽으려고 하는 데, 죽으려고 하는 수아를 살리기 위해서 죽지 않은 거예요.
뿐만 아니라, 죽으려고 하고 자해를 하고 자살을 하려는 아이들을 도와주는 사람은 옆에 있는 청소년들이었다는 거지요. 어른들이 아니고요. 저는 성민이가 수아를 살리고 수아가 성민이를 살렸다고 생각해요. 주현이가 윤서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찾아왔던 것도 역시 수아를 살리는 데 도움이 되었고요.
이재복: 2010년대 이후 인터넷 기반 아동기를 거친 아이들은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어떤 뇌의 새로운 경로가 만들어진 아이들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이해하기는 상당히 힘들겠지요. <시한부> 정도의 글을 쓸 수 있는 아이는 청소년들 중에서 상위 1%도 채 되지 않을지도 몰라요. 글쓰기 재능의 면에서는 그렇겠지요. 그렇지만 아이들 내면의 보편적인 현상 또한 잘 드러내고 있거든요.
본인이 본인을 모르잖아요. 요즘 애들이 자기 자신을 객관화시키는 건 아니거든요. 작품은 자기도 모르는 자신의 내면을 재발견하게 만드는 힘이 있지 않습니까? 이 작품에서는 주인공도 그렇고 자해하는 아이들이 많이 나오는데요. 이런 쪽으로 연구하는 사람들은 보통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 같습니다.
자기한테 다가오는 심리적인 고통은 보이지가 않잖아요. 도대체 고통의 근원을 알 수가 없어요. 그런데 이 고통을 내가 해결하기도 힘들고 통제하기도 힘들어요. 온갖 불안이 몰려오는데 할 수 있는 게 없는 거예요. 그래서 아이들이 그 고통을 외부로 드러내서 확인해 보는 행위가 자해라고 하더라고요. 신체에다 고통을 외연화시켜서 타인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행위이기도 하다. 자해하는 아이들은 삶의 욕구로 충만한 아이들이지 자살로 가는 아이들은 아니다. 물론 상태가 심각해져서 자살로 가는 아이들도 있겠지만요.
자해는 자신의 아픔을 어떻게 해서든 구체적인 형태로 드러내는 삶의 욕구로, 자해는 고통의 장소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절실하게 살려는 욕망의 장소이기도 하다고 합니다.
기성 작가들이 자해하는 아이를 그릴 때 절실함이 부족한 이유를 생각해 보았는데요. <시한부>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자해를 그냥 몸 자체로 인식하는 것 같거든요. 자해와 자신의 몸이 분리가 안 되고 하나가 된 애들이기 때문에 가식 없이 하는 느낌이에요.
기성작가들이 자해가 가지고 있는 어떤 이중적인 감성, 감정, 이런 것들을 어떻게 표현해야 되나. 캐릭터를 어떻게 설정해서 스토리텔링 해 나가야 되나, 그런 부분을 <시한부>를 통해 오히려 배워야 할 것 같아요. 배울 수 있지 않을까 싶고요. 자해는 나쁜 것이다, 그렇게 이분법적으로 생각하는 단순 사유에서 벗어나야 상당히 복합적인 인물을 발견하고 재구성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청소년 작가가 몸으로 증언하고 있는 이 작품을 통해서 우리는 심화시켜 나가야 될 주제들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인터넷 기반으로 살아가고 있는 어린이, 청소년이라고 하는 존재가 왜 저렇게 자해라든가 죽음이라든가 이런 것에 집착을 보이는가? <시한부>는 이러한 문제를 문학적인 언어로 표현하고 있어서 상당히 많은 문제를 던져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까 장가영 씨가 하신 말씀 중에 재미있는 토론 문제가 있었는데 깊이 있게 다루지 않은 것 같아서요. 다시 짚어보지요.
여자아이가 주인공인데 남자아이를 구원자로 설정한 것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김진영 씨가 어느 정도 말씀을 해주셨는데요. 꼭 페미니즘이니 이런 시각에서 보지 않더라도요. 이성애자건 동성애자건 간에 다른 어떤 상대를 원하고 갈망하는 게 있기 마련이고요.
작품 속 수아를 이성애자라고 생각할 때, 이성애자인 여자아이가 남자 아이를 사랑의 대상으로 끌어들여서 스토리를 전개해 가고 있지요. 이 작품이 과연 남자를 구원자로, 진짜 백마 탄 왕자처럼 그렇게 본 걸까요? 아니면 대중성이라는 것을 생각하며 읽히게끔 하기 위해 이런 사랑의 문제를 작품 속에 끌어들인 걸까요? 10대 청소년 작가가 남자하고의 로맨스랄까, 에로티즘이랄까, 이런 걸 작품 속에 넣은 걸 어떻게 봐야 할까요? 어려운 문제인 것 같아요.
아까 장가영 씨는 어떻게 보신다고 그랬죠? 더 보태실 말씀이 있으셔도 좋고요.
장가영: 김진영 선생님 하신 말씀에도 공감이 가는데요. 사실 남자아이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주인공이 다니는 학교가 여중인지 공학인지도 모를 정도로 여자 아이들만의 이야기로 서술이 되었던 것 같은데요. 그러다가 성민이가 등장했는데, 성민이에 대한 설명도 진짜 잘생기고, 인기 많고, 아역 배우 준비하고 그렇잖아요. 저는 성민이 가지고 있는 서사 자체가 새롭지 않았거든요. 새로운 느낌이 전혀 없고 쉽게 쓰인 장치처럼 느껴졌어요.
10대 소녀들이 심사위원이 돼서 뽑는 공모전 있잖아요. 그런 공모전에서 소녀들이 고르는 작품이 항상 우리가 비판하는 그런 여자 캐릭터가 등장하는 작품이라고 하더라고요. 그것이 소녀들의 특성인지 아니면 기존에 가지고 있던 판타지 때문인지, 판타지는 소녀의 것이 아닐 수도 있잖아요. 주입된 판타지일 수도 있고요. 남자 주인공의 등장이 너무 화려하고 이런 게 너무 올드하다. 그런 느낌이 있었습니다.
이재복: 설정이 좀 그렇게 느껴지기도 하지요. 그런데 저는 이 작가가 결코 단순한 아이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예를 들어 226쪽에 보면 이 청소년 작가가 결코 단순하지 않아요. 이 작품이 흥미로운 게 다중의 일인칭 고백 시점으로 쓰였잖아요. 그러니까 똑같은 상황을 겪는데, 그 상황을 겪은 아이들이 자기 자신이 본 관점에서 상황을 다시 재구성해서 얘기하지 않습니까?
다중 관점으로 쓴 일인칭 화자 시점의 작법을 구사하는 것을 보면 진짜 작품을 많이 보고 문학을 좋아하는 아이인 건 분명하지요. 이런 건 일반 작가들도 구사하기 힘들어요. 되게 진부하게 느껴지고, 똑같은 걸 되풀이하냐, 그러면서 작위적인 느낌이 들거든요. 똑같은 하나의 상황을 겪은 걸 다중의 관점에서 쓰는 일이 성공하기가 쉽지 않은 거지요.
주인공 유수아 일인칭 시점이 물론 다수를 차지하지만, 윤서하고 성민이가 1인칭 화자로 등장할 때 장난이 아닌 것 같이 느껴져요. 인물이 내면의 진정성 같은 것을 막 토해 낸다는 느낌이 들거든요.
성민이가 전학을 와서 유수아한테 접근을 해서 친구가 되고 싶어 하는 장면이 나오지 않습니까? 그 장면을 유수아 1인칭 화자 시점으로 봤을 때는 “아, 쟤 뭐야. 왜 나한테 와서 밑도 끝도 없이 구원하려고 그래?” 그러면서 성민이를 배척하고 그러잖아요. 그런데 성민이 1인칭 화자 시점에서 이런 얘기가 나와요. 제가 한번 읽어볼게요. 유수아가 하는 얘기예요.
“우리 반 아무한테나 내가 어떤 애냐고 물어봐. 그러고도 나랑 친구 하고 싶을지.”
유수아가 이러니까 성민이 시점에서 이런 서술 장면이 나와요.
그 말을 끝으로 자리를 박차고 나간 그 애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이나 바라보았다.
순식간에 학교에 온 애들이 날 둘러쌌다. 내 눈 끝을 따라가던 친구들이 유수아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붙어 다니던 단짝 친구가 황윤서였나. 자살을 해서 애가 미쳤다나 뭐라나.
썩 듣기 좋은 얘기는 아니었다, 황윤서라는 친구의 장례식장에서 그 애 할머니 옷자락을 잡고 미친 듯이 울었다고 한다. 든 생각은 하나뿐이다. ‘영웅이 될 수 있을까.’
그러니까 성민이는 자기가 과연 영웅이 될 수 있을까? 이렇게 생각했다는 거예요.
내가 저 애를 구원해 주면 내 삶이 조금 더 빛나지 않을까.
우리가 생각하듯이 낭만성에만 사로잡혀서 그러는 게 아니에요. 성민이는 내가 저 아이를 구원해 주면 내 삶이 조금 더 빛나지 않을까? 내 삶에 대한 회의를 조금 덜 느껴도 되는 거 아닐까? 생각하는 거예요.
성민이 이 아이도 지금 공황장애 오고, 배우가 되는데 실패해서 완전히 망가져가지고 전학을 왔어요. 본인도 현재 말이 아닌 상태인데, 한심하다고 생각하는 저 아이, 유수아를 하나의 먹잇감 비슷하게 느끼면서 영웅서사를 쓰려고 하는 거지요.
영웅 서사를 한 번 쓰면 내가 우쭐하면서 삶에 대한 회의를 덜 느껴도 되는 게 아니냐. 그럼 나도 날 사랑하게 되려나. 내가 유수아한테 접근한 건 쟤를 위해서가 아니라는 거예요. 내가 나를 더 사랑할 수 있게 되려나, 하는 생각 때문에 간 거다. 우리들은 무슨 낭만 그런 것 아니다. 독자들, 당신들이 읽는 거랑 다를 수도 있다. 한술 더 뜨는 거지요.
다시 교실로 돌아와서 바로 엎드리는 유수아였다.
나는 아이들로 둘러싸인 책상에서 새 선생님이 들어오기까지 기다려 보았다. 아이들 앞에서 자기소개를 할 땐, 몰리는 시선에 내가 주인공이 된 것 같았다. 진심으로 웃었다. 고개를 돌리다 유수아와 눈이 마주쳤을 때도, 진심으로.
이 열다섯 살 먹은 청소년 작가가 구성하는 전략이 그냥 어른 작가들이 생각하는 단순한 무슨 백마 탄 왕자, 저는 그런 거 아니라고 느꼈거든요. 결코 그런 관점에서 본 것이 아니다. 상당히 날카롭고, 어른보다 훨씬 꼭대기에 올라가서 인물을 그려내고 있어요. 똑같은 장면을 유수아의 주관적 관점으로 봤을 때와 성민이라는 캐릭터를 등장시켜서 성민이의 주관적인 관점으로 봤을 때, 이 다중의 주관적인 일인칭 관점이 성공하려면, 서로 다른 관점에서 갈등이 드러나야 하지요.
이 청소년 작가처럼 날카롭게 포착을 해서 그려내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아요. 말하자면, 어떤 인물이 자신의 순수한 인간성을 포기하고 스스로 도덕적인 회색지대에 자기를 던져버리는 거잖아요. “나 그런 놈 아니야, 나 그렇게 깨끗한 놈 아니야.” 그런데 이것이 고백의 문체를 쓸 때 훨씬 더 강렬하게 다가오지요. 작가는 지금 성민이라는 아이를 통해서 순수한 인간이 어떻고, 순수한 사랑이 어떻고, 하는 것들을 다 던져 버리고 있어요. 성민의 입을 통해서 어떤 도덕성의 회색지대, 선악의 경계를 넘어서, “나도 남을 이용할 수 있는 놈이야. 연민 그런 거 없어.” 이렇게 고백하고 있는 거지요.
우리는 경계를 넘어서는 회색적인 인물에 매력을 느끼지요. 작가가 이런 면에서 결코 순진하지 않다. 이러한 장면을 구사하는 것을 보면 작가의 사유가 만만치 않다. 하나의 장면을 주관적 관점에서 다시 해석하는 것이 잘못하면 반복으로만 느껴지고 지루할 텐데 오히려 그 장면에서 작품이 빛나서 깜짝 놀랐어요.
이봉열: 수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엄마가 수아와 함께 정신 병원에 갔잖아요. 상담사하고 상담하는 것을 보면서 “아, 저게 수아에게 도움이 되는 상담일까?” 괴리감이 느껴지더라고요. 236쪽에 보면 성민이가 자기 얘기를 하거든요.
유수아를 도움으로써 나의 자존감이 올라간다는 것이 윤리적으로 맞는 말일까? 그게 내 안에서만 일어나는 갈등이라면 고민할 필요가 있는 걸까. 남에게 그렇게 보여도 결국 내가 날 좋아할 수 없다면 무슨 소용이지.
내가 소중하면, 나 자신을 좋아하게 되면, 자해라든지 자살 같은 건 절대로 할 수 없잖아요. 저는 성민이가 수아를 통해서 본인이 살려고 하는 의지가 느껴졌어요. 또 하나는 성민이라는 아이가 굉장히 성숙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성민이가 바닷가에 가서 수아한테 이야기 하는 장면에서요. “그냥 살면 돼. 오는 것은 그냥 받아들이고 보낼 것은 흘려보내고. 반짝반짝 빛날 때도 있고, 태풍이 오면 넘쳐흐르는 거고.” 이런 이야기를 하잖아요. 어떻게 보면 세상을 많이 산 사람들이 하는 말 같아요. “삶을 살아보니까 별거 아니더라. 그냥 흘러가는 대로 사는 거지. 그냥 살면 되지.” 이런 말이 이 나이 때 아이가 할 수 있는 얘기일까? 또 이것이 수아한테 도움이 되는 말일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지만 사실은 이게 맞는 얘기잖아요. 어떤 목적이 있어야 되고, 목표가 있어야 되고, 이런 것들 때문에 삶이 훨씬 더 힘들어지잖아요. 살다보면 삶이 살아지는 거지, 살아가는 건 아니라는 말도 있고요.
수아가 굉장히 짓눌려 있는 아이인데 또래 아이로부터 이런 말을 들으면서 가벼워질 수 있지 않을까? 성민이가 어떤 면에서는 가볍게 보이는데 어떤 면에서 철학적이고 깊이가 있어요. 상담사가 해주지 못하는 걸 이 아이가 지금 다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어쩌면 또래들끼리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을 전문가라고 하는 성인들이 이론을 가지고 접근하려고 하면 오류를 범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재복: 그렇지요. 심리학이나 사회학 이론, 철학들도 물론 훌륭한데 우리는 문학하는 사람들이니까 그러한 분야가 닿지 못할 감성의 영역을 담당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제는 아동 청소년 문학하는 사람들이 아이들한테 뭘 줘야겠다는 그런 것을 내세울 때는 확실히 지났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 같아요. 섣불리 아이들한테 교훈을 주겠다는 생각, 아이들을 성장시켜야한다는 생각은 내려놔야 될 것 같아요. 요즘 아이들이 이렇게 우울한 얘기를 자기 삶의 일부로 가져오고 읽어낼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할 것 같고요.
주제가 이어지기 때문에 하나 더 말씀드리면요. 성민이라는 캐릭터가 아주 중요한데요. 여자 아이들이 주인공인데 과연 남자 아이를 일방적으로 구원자로서만 그린 것인가? 하는 문제예요. 여자아이들의 사유가 너무 약한 게 아니냐. 작가는 성민이를 통해서 그런 한계를 넘어서려고 했던 것 같아요. 아까 이봉열 씨가 읽은 부분이 있지 않습니까.
분명 유수아와 친해지는 건 나를 사랑하기 위해서였다. 어느 순간부터 변질된 목표가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니까 시작은 이렇게 했지만, 올바름이라는 게 뭐냐, 인간이라는 게 뭐냐, 성찰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잖아요. 누군가에 의해서 성장 당하는 게 아니고, 스스로 경험을 통해서 성찰하는 내용을 고백의 형태로 보여주고 있어요. 237쪽에 이런 말이 나오는데요. 읽어 볼게요.
나보다 잘난 사람은 많다. 나도 누구보단 잘난 존재니 당연한 것이다. 이 이치를 머리로 알면서 가슴 깊이 새기질 못한다. 나보다 잘난 사람이 있다고 해서 내가 못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저 나로 남는 것인데 뭐가 그렇게 날 불안하고 죽고 싶게 만들었던 걸까? 언젠가 나를 그저 포용하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생길 것이다. 아무것도 묻지 않고 날 안아주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지칠 대로 지친 나에게 쉬어도 된다고 말해줄 사람이 있을 것이다. 우울에 익숙한 나를 행복에 젖게 해줄 사람. 내 속을 보고도 이해해 줄 사람. 다 생길 것이다. 원래 인생은 허울 좋은 약속과 희망에 의지해서 사는 것이 아닌가. 매일 그런 상상을 하며 잠이 들다 보면 언젠가는 가능해질 것이다.
글 쓰는 작가 입장에서 깊이 토론해 봤으면 좋겠어요. 연령대에 상관없이 어린 청소년이건 30살이건 40살, 50살이건, 60살이건, 내일 죽음을 앞두고 있는 사람이건 간에, 인간 존재의 본질이라는 게 어떻게 보면 절대 사랑을 베풀어 줄 대상을 갈망하는 거 아닌가?
이러한 갈망이라는 게 존재의 일부 아닌가? 그렇다면 과연 무조건적인 사랑을 추구하고 갈구하는 것을 작가들은 어떻게 봐야 되나? 절대적인 사랑을 추구하는 이 언어가 꼭 상대를 구원자로서만 인식하기 때문인가? 낭만성이라는 것이 갖고 있는 취약성과 가능성은 뭔가? 대중성은 뭔가? 그리고 일반 어른 작가들은 이 절대적인 사랑을 추구하는 모습을 그냥 낭만성이라고 치부하고, 그냥 하찮은 거라고 치부하고 버려야 되는 건가?
이 낭만적인 사랑을 어떻게 언어로 만들고 또 구상하고, 캐릭터로 발견할 수 있는가? 이런 여러 가지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 제가 볼 때 이 15살 청년은 꽤나 잘 그린 것 같아요. 진정성도 느껴지고 깊이도 있고요. 이 작품이 세세하게 뜯어보면 범상치 않은 지점들이 상당히 많은 것 같습니다.
강주영 씨께서 채팅방에 올려주신 말씀 읽어보겠습니다.
강주영: 생각해보니 저도 중, 고등학생 때 죽음에 대해 생각했던 것 같아요. 제 선배는 공부도 잘하고 가정환경도 평범하고 물질적으로 문제없었는데… 제가 생각하는 죽음이 아니라 존재 자체에 대한 죽음을 생각했어요.
이재복: 말씀처럼, 중고등학생 때 존재 자체에 대한 죽음을 생각하는 아이들도 상당히 많이 있지 않을까 싶어요. 이 죽음의 문제를 어떻게 봐야 되나, 하는 생각도 드네요.
여러분들 책을 읽으면서 감동적이었다 하는 부분 있으실까요? 장가영 씨 가슴에 와 닿았던 부분 있을까요?
장가영: 저는 책에서는 못 찾았고' 작가의 말'에서 있었어요.
이재복: 작가의 말도 좋죠.
장가영: ‘작가의 말’에서 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평범한 가정에서 잘 자란 아이도 우울증 앓을 수 있다는 얘기를 해주고 싶었다, 는 부분이 좋았어요.
사실 저는 작품에 공감을 잘 못 했거든요. 친구의 죽음이 있긴 했지만요. 수아가 자해를 하거나 죽으려고 했던 것은 윤서가 죽기 전부터 그랬거든요. 수아의 부모가 나쁜 부모도 아니어서 이렇게까지 죽음을 생각하는 게 공감이 안 됐어요. 아, 이거 너무 자의식이 강하고 무엇인가에 빠져 있는 것 같다.
보통 기성 작가들이라면 정서적으로 학대하는 엄마를 그린다거나 학교에서 심한 왕따를 당한다던가 하는 식으로 인물에게 고난을 주잖아요. 우울증을 앓는 인물을 그린다면 우울증을 앓을 수밖에 없는 환경을 몰아주잖아요. 그런데 되게 평범한 가정에서도 이럴 수 있다는 거예요. ‘작가의 말’을 읽으면서 제 생각이 깨졌어요.
이재복: 장가영 씨가 되게 중요한 말씀을 해 주셨어요.
이 작품에서 윤서 캐릭터는 어느 정도 이해가 되지요. 아동살해 후 자살의 생존자이기 때문에, 생존자가 갖고 있는 죄책감이라든가 그런 게 죽음의 강력한 동기가 된다고 느껴지는데요. 유수아는 ‘작가의 말’처럼 부모님의 사랑을 받으면서 평범한 가정에서 잘 자란 아이인데, 이 아이가 왜 저러느냐는 거예요.
인터넷 기반 아동기를 살아보지 못한 어른들 입장에서는 낭만처럼도 보이고요. 왜 저러는지 공감하기 어려운 캐릭터여서 사실 저도 작품을 읽으면서 이해하려고 많이 노력했거든요.
유수아라는 캐릭터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유수아라는 캐릭터에 공감 못하는 건 작가가 글을 잘못 썼다기보다는요. 전혀 다른 문화 환경에서 살아 온 나는 이 아이들을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하나, 생각을 많이 해봤습니다.
여러분들은 유수아 캐릭터에 진짜 공감할 수 있습니까?
이봉열: 저는 수아의 가정이 평범해 보였어요. 일반적으로 뭐 맞벌이 가정인데, 엄마가 공부에 대한 푸시도 거의 하지 않아요. 자녀가 원하는 것을 전폭적으로 다 지지해 줄 수 있는 환경에 있는 아이. 근데 정작 수아가 아프기 시작하면서부터 엄마가 정말 수아를 사랑했던 걸까? 피상적으로, 경제적으로 해줄 수 있는 것을 하는 것이 최고의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건 아닐까? 그런 의심이 들었어요.
그렇게 싫어하면서도 엄마가 원해서 정신과에 가서 치료 받는 것을 보면서, 수아가 훨씬 더 엄마를 생각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요. 엄마는 정작 수아를 위한다고 하지만 수아가 원하지 않는 방향을 고집하잖아요. ‘작가의 말’에서 그런 부분을 꼬집은 것 같아요. 평범한 가정이라고 이야기하지만 그게 우리 현실이라는 거지요. 가족 간의 사랑에 대해서 한번 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이경원: 아무래도 저는 어른이기 때문에 어른의 관점에서 생각을 정리할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엄마가 아이를 데리고 정신과에 가려고 하고 그다음에 약물 처방을 받으려고 하는데 아이가 거세게 반발을 했어요. 정리를 해보자면 또래 관계에서 자신의 평판에 대해 걱정하는 모습이었던 것 같은데, 딱 그 나이에서 받아들 수 있는 모습이라는 생각을 했거든요.
우울증이라고 하는 게 어떤 원인이 있어서 생기는 거라기보다 감기처럼 걸릴 수 있는 질환이니 병원에 가서 약물을 처방받고 나을 수 있게 노력을 하자는 식으로 요즘 인식이 많이 바뀌었잖아요. 그래서 저도 한번 덜컥거렸는데 ‘작가의 말’에서 평범하게 큰 아이도 우울증을 겪는다는 문구를 보고 생각을 해 보았는데요.
작가가 이야기하고 싶은 우울증이라고 하는 것은 질환이 아니라 그 나이 또래 아이들이 겪을 수 있는 사춘기 증세인 것 같아요. 병처럼 약으로 치료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라기보다는 관계나 공감의 측면에서, 다친 마음을 열어줬으면 하는 그런 욕구를 표현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라고 생각을 해봤습니다.
이재복: 저는 <시한부>에 등장하는 아이들을 이해하기가 힘들어서 사회학자들이 지금 세대를 연구한 책을 읽어 보았어요. 공부를 하게 만들어서 백은별 작가한테 감사한 마음이고요. 사회학자들이 하는 이야기 중에서 유수아 캐릭터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를 잠깐 해 드릴게요.
인터넷 기반으로 살아가는 청소년 아이들의 뇌에는 새로운 경로가 형성이 되는데, 그 새롭게 형성되는 경로의 본질 중에 하나는 여자 아이들이랑 남자 아이들이랑은 좀 다르다는 거예요. 남자 아이들은 직접적인 공격성이 강하다면 여자 아이들은 간접적인 공격성이 강하다고 해요.
여자아이들은 기본적으로 같이 융화해서 가는 것을 추구하지요. 융화성을 추구하니까 되게 관계적이 되는데, 여자 아이들이 상대에게 타격을 주는 방법, 그러니까 괴롭히는 방법의 핵심은 오히려 관계를 손상시키는 거라고 해요. 직접적으로 상대를 공격하기 보다는 관계의 사슬 어느 한 부분을 끊어서 손상시키는데, 그러한 방법 중에 대표적으로 소문 퍼뜨리기가 있습니다.
소문을 퍼뜨려서 친구들을 싹 돌아서게 만들어서, 친구로서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거예요. 남자아이들의 공격성과는 다르게 관계나 평판에 손상을 입히는 간접적인 방법으로 공격을 하는 건데요. 그런 식의 관점에서 보면 여자아이가 남자아이보다도 오히려 공격성이 더 높대요. 물론 청소년기라고 하는 특정한 시기에 두드러지는 현상이라고 하고요.
요즘 아이들은 사이버 상에서 자기 온라인 브랜드를 많이들 가지고 있잖아요. 2010년대 이후부터 사진으로 자기 얼굴 찍어서 올리고 하면서 여자아이들은 타인과 시각적인 비교를 많이 하게 되었는데요. 어떤 완벽주의 같은 것에 훨씬 더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었고요. 저는 이 작품을 통해 거꾸로 사회학자들의 이론서를 읽는 느낌도 들었어요.
아이들이 관계를 손상시키는 문제를 두고 싸우고 흩어졌다 헤어졌다 만났다 하는 과정이 되풀이되고 있어요. 그리고 평범한 가정에서 사는 아이가 왜 저런가 했더니, 유수아도 상당히 절실한 문제가 있었지요. 초딩 4학년 때 어른하고 사귄다는 소문이 난 거예요. 그 소문이 중학교 1학년까지 계속 따라다녀요. 수아는 친구 사회에서 완벽한 사회적 죽음을 당한 것이죠. 여자 아이들은 특히 관계성과 융화성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또래 집단에서 사회적 죽음을 당한거나 마찬가지로 고통을 느끼는 거예요.
우리 어른들은 그런 소문이 자해와 자살의 원인 제공이 되는 것이 공감하기 힘들지만 인터넷을 기반으로 살아가는 청소년들에게는 자기가 살고 있는 삶의 기반 전체가 무너지는 아픔이 아닐까? 어른의 시각에서는 유수아라는 인물이 가볍게 느껴지지만 이 청소년 작가는 실은 절실한 마음으로 유수아를 그린 것이 아닐까? 사실 저는 그렇게 이해해 보려 노력하고 있는 거예요.
솔직히 절실하게 공감은 안 되지만, 그럴 수도 있겠다. 요즘 아이들은 그것이 자기 삶의 기반 전체가 될 수도 있겠다. 저는 오히려 어른 작가들이 <시한부>에 나오는 등장인물에 대해 공감하기 어렵다면 그 거리감에 대해서 탐구해 봐야 된다는 생각이 들어요.
마지막으로 정리할 겸 이런 질문을 드리고 싶어요. 청소년에게 글쓰기, 청소년에게 문학 작품 쓰기란 어떤 의미가 있는 건가. 청소년들이 다양한 문화예술 행위를 즐기는데, 우리 글쓰는 사람 입장에서는 청소년들이 이런 문학 인생을 즐기면서 작가로도 많이 성장해 가길 응원하지 않습니까.
지금 인터넷 기반 아동기를 거치는 아이들이 책을 멀리한다는데, 과연 이 아이들에게 글쓰기는 어떤 의미가 있는 건가? 저는 그런 의미에서 <시한부>를 읽으면서 아, 글쓰기가 정말 힘이 세다. 글쓰기가 아이들한테 꼭 필요하겠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런 글쓰기 교육의 입장에서 <시한부>에서 느낀 점이 있다면 한 말씀씩 하면서 정리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물론 다른 이야기도 좋고, 미처 못 한 이야기가 있다면 해 주시고요.
김진영: 학생들과 <시한부> 토론을 했을 때 아이들이 이 작품이 와 닿지 않았던 이유가 주제 때문이었더라고요. <시한부>는 자살이라는 흔치않은 경험을 한 아이의 얘기여서 와 닿지 않았다고요. “그렇다면 너희들한테는 가장 와 닿는 얘기가 뭐야?” 물으니까 관계 얘길 하더라고요. 한 여학생이 “나랑 제일 친한 아이인데 오늘따라 눈빛이 왜 저러지?” 아주 예민해져서 하루 종일 그런 생각만 하는 게 요즘 아이들이라고요.
작가는 작품 속에서 큰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청소년 독자들은 소문을 퍼뜨리고 왕따를 시키고 하는, 친구들 사이에서의 관계가 더 다가왔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요즘 아이들한테 가장 큰 고민이 이거구나, 생각을 했고요. <체리새우 : 비밀글입니다> 이 책이 아이들한테 인기가 많은 이유도 아이들 간의 관계를 잘 다루었기 때문인 것 같아요. 그냥 또래들의 관계 이야기인데 이게 뭐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요즘 이런 작품들이 많이 나오지? 어른들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아이들은 이 부분이 가장 많이 와 닿는 거죠.
함께 토론했던 학생 중에, 정말 책을 좋아하는 아이가 있는데요. 책을 읽은 지 한참 돼서 기억이 잘 안 난대요. 그래도 생각나는 게 있으면 얘기해 보라고 했더니, 클로버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세 잎 클로버. 세 잎 클로버는 행복을 뜻하고 네 잎 클로버는 행운을 뜻하잖아요. 모든 세 잎 클로버 안에 행복이 다 있는데, 우리는 행운만 찾고 있다. 그러면서 이 책이 바로 그런 얘기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재복: 멋있는 얘기네요. 아이들의 느낌이 상당히 깊네요. 감동적이거나 인상 깊은 부분도 있으셨어요?
김진영: 작품을 읽으면서 아이들하고 어른하고의 대화가 마음에 와 닿았어요. 정말 사실적으로 잘 그린 것 같아요. 아이들이 부모에게 무조건 반항하는 게 아니라 생각을 하고 있구나. 어쩌면 깊게 이해를 하고 있구나, 그렇게 느꼈어요. 아무래도 제가 부모이다 보니까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아이가 써서 그런가? 확실히 좀 다른데.” 그런 느낌을 받았어요.
이봉열: 저는 이 책을 통해서 이 세대의 한 부분을 알 수 있어서 신선했어요.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제가 좀 더 관심을 갖고 탐구해 가야 할 그런 부분들이 있겠구나.
이 책을 읽고 나서 <당신의 삶은 충분히 의미 있다>라는 책을 읽었어요. 로고테라피에 대한 심리학 책인데, 고통과 죄책감, 피할 수 없는 고통과 피할 수 있는 고통, 신경증적 죄책감, 실질적인 죄책감, 이런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책인데요. 수아와 윤서를 두고 많은 생각을 하게 됐어요. 이 아이들이 충분히 도움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이 되었으면 좋겠다. 제가 이러한 아이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환경 속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이경원: 재미있는 작품이었고요. 그냥 후루룩 읽었던 것 같아요. 이런 기회가 아니면 접하지 못했을 책이었던 것 같은데, 좋은 기회에 잘 읽었고요. 다 읽고 나서 “아, 나는 이 책을 가지고 토론에 임하기에는 너무나 꼰대다.”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오늘 많이 들으려고 했거든요.
여러 지점들에서 생각이 많이 부딪치는데 사실 저는 자해계라고 하는 게 소화가 잘 안 돼요. 아이들이 자해를 하면서까지 다른 사람의 관심과 애정을 구하고 있다는 지점이 아직까지 좀 소화가 안 돼서 고민을 많이 해 보고 자료도 좀 찾아 봐야겠다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이재복: 그렇죠. 사실 우리는 그런 걸 해볼 생각도 못 해 본 사람들이지요. 자해는 그 아이들이 고통을 거꾸로 외면화시키는 행위, 밖으로 드러내는 행위인데요. 그렇다면 아이들이 거기서 벗어날 수 있는 통로는 뭘까요?
저는 아이들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거꾸로 글쓰기 교육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역발상을 해 보는 거예요. 요즘 아이들은 과거 아이들과는 다르게 훨씬 더 정신적으로 심리적으로 상처받기 쉽고, 여자아이건 남자아이건 관계에서 폭력에 노출되기 쉽고 사이버 공간에서 따돌림 당하기도 쉽고요. 온라인상에서 존재하는 나의 브랜드하고 현실의 나 사이의 이중성, 온라인의 내가 상처 받고, 악플 달리고 비판 받으면 현실의 나보다 더 흔들리고요.
다중의 관심에 목숨을 걸고 불안하게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학대받는 것과는 전혀 다른 개념의 전쟁터라고 할까? 정글과 같은 공간 속에 던져진 게 인터넷 기반 아동기일 수도 있다. 오히려 자해라든가 그런 걸 하는 애들은 훨씬 더 예민하게 감성과 감각이 각성돼 있는 애들이 아닐까, 깨어 있는 애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모르긴 몰라도 <시한부>를 쓴 작가도 자기 경험이 어느 정도는 있기 때문에 이 작품을 쓰지 않았을까 싶거든요.
긍정적으로 생각하면요. 요즘 아이들은 상처 받기 쉬운 또 하나의 나를 인터넷 공간에 드러내놓고 불안하게 살아가고 있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옛날 사람들과는 다르게 감정과 감성이 훨씬 더 풍부하고 예민하다는 거지요. 감성과 감정이 과도하게 각성된 아이들이고 또 그것을 강요받고 있다는 거예요.
문학성을 떠나서, 이 아이들이 자기 내면에 떠오르는 어두운 이미지에 단 한 번만이라도 글의 옷을 입히는 경험을 해 본다면, 아주 예민한 아이들이기 때문에 섬세한 감각의 문장을 구사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시한부>의 특징이라면 거대 서사가 없는 것이기도 하지요. 15살짜리 아이가 거대 서사 없이 자기 내면에 가라앉아 있는 어두운 이야기에 문장의 옷을 입힐 수 있다는 것은 재주라고도 볼 수 있지만 요즘 아이들은 저런 문장을 쓸 수 있구나, 저렇게 예민하게 감성이 과도할 정도로 각성돼 있는 상태의 아이들이라고도 생각해 볼 수 있어요.
허약하게만 볼 게 아니고,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이런 아이들이야말로 아주 좋은 문학예술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애들이 아닐까? 이 아이들이 어른 세계로 들어가는 데 있어서 문학이 참 좋은 안내자 역할을 해야 될 시기이다. 문학의 사명이 너무 중요한 시기라는 생각이 들어요. <시한부>를 읽으면서 나는 문학을 포기하면 안 되겠다. 더 열심히 문학을 해야 되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전진영 씨도 책은 못 읽으셨어도 전체적인 느낌 어떠셨어요?
전진영: 앞부분 진짜 몇 장만 읽었는데 여러분들 얘기 듣고 많이 도움이 됐어요. 감사드리고요. 인터넷 기반의 아동기를 보낸 요즘의 청소년이라는 걸 생각도 못했는데, 그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요즘 아이들을 바라봐야겠다는 시각을 갖게 돼서 좋고요. 요즘 애들이 책을 안 읽는다고 해도 읽는 아이들은 정말 많이 읽더라고요. 그래서 도서관에서 만난 아이들을 다른 데 도서관 행사에 가서 또 만나요.
백은별 작가도 책을 정말 많이 읽었을 것 같은데요. 아, 이제 정말 독서의 빈곤층과 부유층이 극도로 나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완전 심각해지겠다. 책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아이와 못 가진 아이, 그렇게 나눌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재복: 강주영 씨는 전체 소감을 글로 남기셨어요. 읽어 볼게요.
강주영 : 평범한 가정이라는 기준은 대타자의 설정 기준 아닐까요. 마치 아파트 특정 브랜드에 사는 것이 행복인 것 마냥… 삶이라는 기준은 대타자가 설정해놓은 기준이 아니라 내 기준을 찾아가는… 이 학생이 아주 생각이 빠른 청소년일까요? 아동 청소년 문학을 기성세대가 쓰는 시대에서 이제는 아동 청소년이 주체자가 되어서 이끌어나가는가, 놀랍게 다가오는 시간이었습니다.
이재복: 그렇죠. 이제는 정말 어른과 아이의 경계도 허물어지는구나. 어른들이 글을 쓰고 아이들은 독자라는 생각도 이제는 바뀌겠구나. 네, 이런 아이들이 백은별 작가 하나만이 아닐 것 같아요. 하나의 현상으로, 이제는 나이와 상관없이, 연령을 뛰어넘어서 그냥 작가로서 존중하고 대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비평공간』 두 번째 시간에 참여해 주신 여러분들 감사드립니다. 여러분들 말씀 들으면서 새로운 걸 많이 알게 됐고 또 느끼게 되었어요. 상당히 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눈 것 같습니다.
『비평공간』은 진정성과 지속성을 가지고 꾸준히 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두 달 후에 꼭 다시 뵙도록 하고요. 뭐든지 시작은 좀 어려울 수 있지만 여러분들이 같이 즐겨 주시면 좋겠습니다. 오늘 토론 내용은 정리해서 보내드릴 텐데요. 라이브에 참여해서 느꼈던 걸 생각하면서 글로 읽으면 훨씬 더 깊이 다가올 것 같습니다.
이제는 아동과 청소년, 어른의 경계가 무너지면서 똑같이 창작자의 입장에 서 있지요. 우리 나이 먹은 사람들이 이제는 어린 청소년 철학자들, 작가들하고 계급장 떼고 얘기해야 될 것 같아요. 나이의 계급장을 아직도 이마에 붙이고 글을 씁네 하는 사람들이 많을 수 있거든요. <시한부>는 그런 사람들을 각성시키는 작품이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 참여해 주신 여러분들 감사합니다. 다음에도 꼭 뵙도록 하고요. 수고하셨습니다.
(줌 토론일자 : 2025년 1월 16일 목요일 저녁 8-10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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