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설(雜說)
원길(原吉) 이준경(李浚慶)은 정승이 되었을 때 체모를 엄격히 지켰다. 아무리 선(善)을 좋아하고 선비를 장려하는 것이 급하더라도, 일찍이 비굴하게 체모를 손상시키는 일은 하지 않았다. 징사(徵士) 조식(曺植)이 조정에 들어올 때에도 다만 친구 간의 정리로 문자를 전할 뿐이었다. 징사가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을 때, 일부러 그를 찾아가 고별하면서 말하기를,
“공(公)은 어찌하여 정승의 지위를 가지고 고고하게 자처하기만 하고, 끝내 한번도 친히 찾아주지 않는 것인가?”
하니, 이원길이 대답하기를,
“조가(朝家)에 체모라는 것이 있어서 내가 감히 손상시킬 수 없었네.”
하여, 서로 한바탕 웃고 헤어졌다.
퇴계(退溪)가 서울에 들어왔을 때 경사대부(卿士大夫)들이 조석으로 그 문간에서 기다리면서 다투어 만나기를 청하니, 퇴계가 일일이 다 접견하느라 조금도 쉴 틈이 없었다. 그리하여 맨 나중에 정승 이원길을 찾아보았는데, 이 정승이 말하기를,
“공이 서울에 들어온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 어찌하여 진작 찾아오지 않았소?”
하였다. 퇴계가 접견하느라 한가한 때가 없었다고 대답하니, 이 정승이 얼굴을 찡그리며 말하기를,
“지난 기묘년(1519, 중종14)에도 사습(士習)이 이러하였는데, 그중에는 또한 실상은 변변찮으면서 명성만 그럴듯한 사람도 없지 않아 끝내 화를 초래하는 사단이 있었소. 조정암(趙靜菴) 같은 분 이외에는 나는 인정하지 않소.”
하였다.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과 정황(丁璜)은 뜻을 같이하는 막역한 친구 사이였다. 당시 재상으로서 선을 좋아한다고 일컬어지던 자로는 유인숙(柳仁淑)과 정순붕(鄭順朋)을 으뜸으로 삼았다. 유인숙은 의관이나 음식을 한결같이 재상에 걸맞게 자처하였고, 정순붕은 초립(草笠)과 허름한 의복으로 검소하게 지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그들 사이에 우열을 두었다. 소재와 정공(丁公)이 함께 정 재상의 집을 찾아뵙기로 약속하고 먼저 그런 뜻을 통지하였다. 그날 마침 다른 일 때문에 자연 한밤중에 가게 되었는데, 정 재상은 등불을 밝히고 기다리다가 정복(正服)을 하고 맞아들였다. 정공이 물러 나와 소재에게 이르기를,
“이분이 보이신 모습은 매우 부자연스럽소.”
하였다.
평상시 조서(詔書)가 올 적이면 본국에서는 으레 조서를 두고 가기를 청하는 절차가 있는데, 전하께서 몸소 중국 사신 앞에서 조서를 두고 가라고 간청한다. 정묘년(1567, 명종22)에 중국 사신 허국(許國)과 위시량(魏時亮)이 명 목종(明穆宗)의 등극 조서를 반포하러 왔는데, 가산(嘉山)에 당도하여 명묘(明廟)께서 뜻하지 않게 승하하였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허국과 위시량은 즉시 노상에서 조서를 두고 가는 절차를 간략히 마련하는데, 금상(今上)께서 바야흐로 권서(權署) 중에 있어서 대신으로 하여금 군신들을 인솔하고 가서 두고 가기를 청하였으니 변례(變禮)였다. 만력(萬曆) 원년에 중국 사신 한세능(韓世能)과 진삼모(陳三謨)가 왔을 때 본국에서는 당초 권서할 때 변례를 쓴 까닭을 자세히 살피지 못하고 한결같이 정묘년에 조서를 두고 가던 의절대로 의주(儀註)를 만들어 보냈고, 한세능과 진삼모 또한 본말을 알지 못하고 변례를 답습하여 행하였으니, 지극히 온당치 못하다. 이 사정을 후일 예관(禮官)은 알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당릉군(唐陵君) 홍순언(洪純彦)이 생존시에 매번 나에게 말했었다.
을사년(1545, 명종 즉위년) 7월, 인묘(仁廟 인종(仁宗) )께서 아직 빈소(殯所)에 계실 때에 여러 신하들이 빈청(賓廳)에 모였는데, 모두들 윤원로(尹元老)를 죽이되 먼저 시행하고 뒤에 알리려고 하여, 재상들로 하여금 차례로 정승의 앞에 나아가 그 가부를 말하게 하였다. 이원길(李原吉)이 우윤(右尹)으로서 앞으로 나아가 말하기를,
“지금은 전일과 다르고 대왕대비(大王大妃 문정왕후(文定王后) )께서 위에 계시는데, 어찌 여쭈지 아니하고 마음대로 그의 동기를 죽일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그가 문을 나갈 때에 규암(圭庵) 송인수(宋麟壽)가 얼굴에 노기를 띠고 불러 이르기를,
“원길의 이 의논을 나는 취하지 않겠소.”
하였다. 원길이 오래지 않아 평안 감사로 나가고 시사가 점차 변하여 사림의 화가 오랫동안 끊이지 아니하였는데, 윤원형은 원길이 구원해 준 것을 고맙게 여겨 그를 끌어들여 정경(正卿)에 앉혔다. 이것은 바로 여러 신하들이 한갓 전일의 대윤(大尹)과 소윤(小尹)에 대한 사정(邪正)의 설에만 현혹되고 변통해서 잘 처리할 줄을 알지 못하여 끝내 어육의 화를 초래하였던 것이니, 애석하도다.
정묘년(1567, 명종22) 5월, 공의전(恭懿殿)이 위독하자, 명묘께서 승정원에 명하여 복제(服制)를 고찰하여 보고하라고 하였다. 당시에 퇴계가 서울에 있었는데 말하기를,
“예(禮)에는 형수와 시숙 사이에는 복이 없으니, 상께서는 복을 입지 않는 것이 타당합니다.”
하므로, 사람들이 감히 어기지 못하였다. 그런데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이 원접사(遠接使)의 종사관으로 따라갔다가 뒤에 서울에 돌아와 말하기를,
“인종(仁宗)께서 일국의 임금이셨으므로 금상께서 자연히 계체지복(繼體之服)을 입으셨는데, 어찌하여 형수와 시숙 간의 예를 원용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퇴계가 듣고 생각한 끝에 말하기를,
“명언(明彦)의 말이 옳습니다. 창졸간에 잘못 대답하였으니, 내가 죄인을 면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이 말은 온 조정이 다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정축년(1577, 선조10) 11월 국상(國喪) 때에는 비록 한두 사람의 이의가 있었으나 계체지복으로 정하니, 상하에 논란이 없었다. 고봉의 정밀한 조예와 퇴계의 승복하는 의리에 온 나라가 의지하였으니, 그 혜택이 넓다고 하겠다.
기고봉(奇高峯)은 항상 말하기를,
“화숙(和叔) 박순(朴淳)은 일을 처리하는 것이 소활하여 법을 신중하게 지키는 뜻이 전혀 없으니, 염려스럽다.”
하였다. 박공이 일찍이 6품에 적합한 사람 약간 명을 뽑는 일로 삼공(三公)에게 가서 품의하자 다들 좋다고 한 적이 있었는데, 고봉이 제일 나중에 와서 자기의 뜻을 말하기를,
“제 생각에 이는 말세의 호사(好事)이고 전조(銓曹)의 의견이 이러하니 누가 감히 어기겠습니까만 한탄스러운 것은 공이 조종(祖宗)이 법을 만든 본뜻을 통찰하지 못하고 이와 같이 지나치게 높은 일을 하였으므로 반드시 후폐가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경연(慶延)과 같은 효성스러운 행실로도 성종 때에 오히려 참봉을 제수하였다가 오랜 뒤에 출륙(出六)하였고, 조효직(趙孝直 조광조(趙光祖) )의 학문으로도 중종 때에 또한 초입사(初入仕)를 제수하였다가 여러 사람들의 의논이 일치된 다음에야 6품을 제수하였으니, 조종조에서 사람을 경솔하게 쓰지 않은 데에는 틀림없이 깊은 뜻이 있을 것입니다. 또 취재(取才)를 거치지 않은 사람은 등용해서는 안 됩니다. 이 사람 중에 간혹 훌륭하여 쓸 만한 사람이 있더라도 차라리 한두 사람을 잃을지언정 법전을 폐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고봉의 온 집안이 호현방(好賢坊) 골목에 있었는데, 항상 봄철이면 종을 보내어 용문산(龍門山)의 나물을 뜯어다가 뜰에서 건조시켜 겨울을 날 용도로 삼았다. 이는 곧 《시경》에서 이른 바 “내게 모아둔 맛난 나물이 있나니, 이것으로 겨울을 난다네.”라는 뜻이니, 그가 향리에서 어떻게 생활하는지 알 만하다. 일찍이 우엉 나물을 삶아서 나에게 보내면서 편지에 이르기를, “이는 초야에 있는 사람이 맛나게 여기는 것이오나 사대부들도 알지 않으면 안 되오.” 하였다.
[주1] 징사(徵士) : 학행이 높으면서 임금의 부름을 받고도 나아가 벼슬하지 않는 선비를 이른다. 징군(徵君)이라고도 한다.
[주2] 권서(權署) : 권서국사(權署國事)의 준말로, 아직 중국으로부터 왕으로 인정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임시로 국사를 맡아 다스린다는 뜻이다.
[주3] 만력(萬曆) 원년 : 이는 저자가 즉위년을 계산에 넣지 않고 쓴 것으로 실제로는 융경(隆慶) 6년(1572, 선조5)이다.
[주4] 한세능(韓世能)과 진삼모(陳三謨) : 원문은 ‘韓王’으로 되어 있는데, 실록(實錄)에 근거하여 ‘王’은 진삼모로 번역하였다. 《宣祖實錄 5年 11月 1日》
[주5] 공의전(恭懿殿) : 인종(仁宗)의 비 박씨이다.
[주6] 계체지복(繼體之服) : 왕위를 정통으로 계승한 자가 선왕(先王)을 위해 입는 상복으로, 참최(斬衰) 삼년복(三年服)을 입는다.
[주7] 경연(慶延) : 청주(淸州) 사람으로 천성적으로 효성이 지극하여, 한겨울에 병든 아버지를 위해 물에 들어가서 잉어를 잡아다 올렸고, 부모의 상례 때는 묘 앞에 여막을 짓고 전후 6년 동안이나 시묘살이를 하였는데, 성종이 그 소문을 듣고 남부 참봉(南部參奉)을 제수하였다.
雜說
李原吉爲相。矜持體貌。雖急於好善奬士。未嘗卑屈虧損。當徵士曺植之入朝也。只以故奮之情。文字相通而已。及徵士還鄕。委往告別。且曰。公何以相位自高。終不親爲一見耶。李曰。朝家體貌有在。吾不敢自貶也。相與一笑而罷。
退溪入來時。卿士大夫朝夕候其門。爭相現謁。退溪一皆接見。小無閑歇。最後。往見李相原吉。李相曰。公之入城已久。何不早爲相見耶。退溪答以接遇無閑之事。李相顰蹙曰。往在己卯。士習如是。其間亦有羊質虎皮。終有媒禍之端。如趙靜菴外。吾不取也云。
盧蘇齋與丁璜。爲同志莫逆之交。當時宰相稱好善者。以柳仁淑,鄭順朋爲首。柳則冠服飮食。一以宰相自處。鄭草笠惡衣。儉素自持。故人有優劣於其間。蘇齋與丁公。約共拜於鄭家。先通其意。其日。適以他事。自至夜分往。則鄭明燈待之。正服延入。丁公退謂蘇齋曰。此人情事。殊非自然云。
常時詔書之來也。本國例有留詔節次。殿下親於天使前懇留矣。丁卯年。許,魏天使。頒隆慶登極詔而來。行到嘉山。聞明廟不意薨逝。許,魏卽於路上。草 出留詔一節。以今上方在權署之中。令大臣率群臣請留。爲變禮也。及萬曆元年韓王天使之來也。本國初不詳權署時禮變之由。一以丁卯年留詔儀節。爲儀註送之。韓王亦不知源委。因襲變禮而行之。極爲未安。此事。後日禮官。不可不知。唐陵君洪純彦。生時每爲余言之。
乙巳七月。仁廟在殯。諸臣會于賓廳。皆欲殺尹元老。先行後聞。令宰相次次詣政承前。言其可否。李原吉以右尹。就前言曰。今時異於前日。大王大妃在上。豈可不稟而擅殺其同氣乎云。出戶時。宋圭庵麟壽怒形於色。招而語之曰。原吉此議。吾所不取也。李相未久。出爲平安監司。時事漸變。士林之禍。久而不絶。尹元衡德原吉之救。引而置諸正卿。此乃諸臣徒惑於前日大小尹邪正之說。而不知通變而善處之。卒取魚肉之禍。惜哉。
丁卯年五月恭懿殿未寧。明廟令政院考服制以聞。時退溪在京。以爲在禮嫂叔無服。自上合無服。衆莫敢違。奇高峯以遠接從事。追後入城曰。仁廟君臨一國。今上自有繼體之服。豈可援嫂叔之禮乎。退溪聞而思之曰。明彦之言是也。倉卒失對。吾不免罪人云。此言朝廷皆已知之。故丁丑年十一月國喪。雖有一二異議。定爲繼體之服。上下無間。高峯之精詣。退溪
之服義。一國賴之。其利博哉。
奇高峯常言。朴和叔處事疏闊。殊無持重守文之意。可慮。嘗以拈出六品可當人若干。往稟于三公。皆以爲可。最後來言其意。吾以爲此乃末世好事。銓曹之意如此。誰敢有違。恨公未能洞察祖宗立法規模。爲此過高之擧必有後獘。以慶延孝成之行。成宗朝。尙除參奉。久後出六品。以趙孝直學問。中宗朝。亦除初入仕。衆論歸一。乃爲六品。祖宗朝不輕用人。必有深意。且無取才者不可用。間有高蹈可用之人。而寧失一二人。不可廢法典云。
高峯盡室在好賢坊洞。當於春時。送奴取龍門山蔬葉。乾燥于庭。以爲過冬之用。乃詩所謂我有旨蓄之意。其於鄕居。可知。嘗以牛旁菜煑熟。送於我。寄簡云。此野人之味。士大夫不可不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