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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헌서 서 湛軒書序
담헌서(湛軒書)는 홍대용(洪大容) 덕보(德保) 선생이 지은 것이다. 본래 15책으로 나누어 놓은 것을 이제 그 편(編)을 약간 합쳐서 7책으로 하고, 책 이름과 편차의 순서는 모두 목록과 같이 하였다.
대개 학술(學術)은 인류생활과의 관계가 큰바, 일의 잘됨과 잘못됨이 여기에서 말미암는다. 혹 그 근본을 조심스럽게 지키면, 덕을 바르게[正德] 하고, 사용을 편리하게[利用] 하고, 민생을 살기 좋게[厚生] 할 수 있다. 혹 이와 반대로 하면, 백 가지 법도가 곧음[貞]을 잃게 되며, 이것이 오래 가고 깊어져 마음에 중독되면 습관이 천성처럼 되어버려 어찌 할 수 없게 된다.
이 두 가지로써 우리 근세(近世)에 비추어 보면, 그 말미암은 바를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그 당시에 논의(論議)로써 서로 치는 사람이 있었고, 세리(勢利)로써 서로 해치는 사람도 있었는데, 이들은 서로 더불어 어울리면서도 마치 물과 불 같고 얼음과 숯 같아서 서로 용납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 《춘추(春秋)》를 내세우는 데 이르러는, 근본과 말단, 남과 나의 큰 구분에 어두웠던 것은 피차(彼此) 간에 차이가 없었다. 그것은 어째서인가? 그 마음에 중독된 것이 같았기 때문이다.
그 폐단이 극도에 이르게 되자, 분명하게 아는 한두 선비들이 느낀 바가 있어 민중을 도울 수 있는 학문을 하면서 퇴폐된 풍조를 막으려 하였다. 그러나 이는 마치 동쪽이 희미하게 밝아져 고하(高下)와 통색(通塞)이 약간 분별되는 듯하나, 아직도 오랜 동안 어두웠던 뒤를 이었기 때문에 밝음이 어둠에 꺾이어서 분별은 하되 완전히 분별할 수 없는 것과 같았다. 그러므로 비록 통달한 사람이 많이 나와 경세(經世)의 실마리를 거의 다시 풀어나갈 듯하였으나, 마침내 곧바로 《춘추(春秋)》에 나아가 근본과 말단, 남과 나의 분별(分別)을 바로잡은 사람이 없었다. 이 어찌 밝음이 체(體)가 되는 데에는 부족했던 것이 아니겠는가? 먼동이 트기 시작하였으나 광명이 두루 퍼지지 못한 바가 있었던 것이다.
지금 선생의 글 중에 가장 중요한 것으로는 〈주해수용(籌解需用)〉이란 것이 있고 〈임하경륜(林下經綸)〉이란 것이 있는데, 혹은 기하(幾何)와 산수(算數)에 정통하고, 혹은 정치와 법률에 공을 들인 것으로, 모두 백성들을 돕는 학문이다. 또 〈의산문답(毉山問答)〉이란 것이 있는데, 이는 오로지 근본과 말단을 찾아 밝히고 남과 나를 분석해 놓는 것으로, 당시에 있어서는 보기 드문 것이었다. 아아! 그러니 어찌 걸출한 선비가 아니겠는가?
선생은 온 세상 사람들이 서로 휩쓸려서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은, 그 근원이 학술(學術)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학술을 함에 있어서 근본을 잃어버려, 남과 내가 무엇인지도 몰라 허(虛)가 위(僞)를 만들어내고 위가 허를 조장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진실한 마음이나 진실한 정사는 가망이 없게 되었다고 여기었다. 이에 ‘동해허자(東海虛子)’와 ‘의산실옹(毉山實翁)’이란 가공인물을 내세워 서로 문답을 전개했는데, 가장 먼저 허(虛)와 실(實)에 대해 논하면서 ‘도술(道術)이 천하를 현혹시키고 혼란시켰다.’고 말하였고, 또 그 뜻을 부연하여 논하기를, ‘공자가 돌아가신 뒤에 제자(諸子)가 어지럽혔고, 주자 문하(朱子門下)의 끝에는 제유(諸儒)가 어지럽혔다. 그 업(業)을 숭상하되 그 참을 망각해 버리고, 그 말을 익히되 그 뜻을 잃었다. 정학(正學)을 붙든다는 것이 실은 자랑하려는 마음 때문이었고, 사설(邪說)을 배척한다는 것이 실은 이기려는 마음 때문이었으며, 세상을 구출한다는 인(仁)은 실은 권력 욕심 때문이었고, 몸을 보존한다는 명철(明哲)은 실은 이기심(利己心) 때문이었다. 이에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날로 허(虛)로만 치닫게 되었다.’고 하였다. -〈의산문답〉 중에 나오는 말이다.
그러나 《춘추(春秋)》의 설(說)에 대해서는, 스스로 생각하기를, ‘사람들의 마음이 이에 중독된 지 오래이므로, 말로써 풀어줄 수는 없다.’고 여겼다. 이에 갑작스럽게 발설하지 아니하고는, 짐짓 천문(天文)에 대한 새 학설을 인용하여 땅의 둥긂과 지구가 회전함에서부터 여러 성계(星界)의 가볍고 무거움과 더디고 빠른 차이, 거리의 멀고 가까움과 그것들의 지구와의 관계에 이르기까지를 논하였다. 또 일식(日蝕)이나 월식(月蝕)이 치란(治亂)과는 상관이 없음을 밝히고, 성신(星辰)의 분야(分野)에 대한 설은 더욱더 근거가 없는 웃음거리임을 밝혔다. 그리고는 이를 인하여 풍운(風雲), 우설(雨雪), 상박(霜雹), 뇌정(雷霆), 홍훈(虹暈)이 있게 되는 까닭 및 조수(潮水)의 짬과 땅의 지진이 모두 까닭이 있음을 말하였다. 또 오행(五行)의 수(數)가 본래 정론(定論)이 있는 것이 아니라, 술가(術家)들이 하도(河圖)와 낙서(洛書)를 조술(祖述)하면서 역(易)의 괘상(卦象)에 견강부회(牽强附會)하고, 생극(生克)이니 비복(飛伏)이니 하는 데에 천착(穿鑿)하여 지루하고 복잡하게 해, 끝내는 그 증험이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에 대해 하나하나 눈앞에 보이는 사실을 들어 설명하고 증명하되, 흑백(黑白)을 나누듯이 분명하게 해, 낡은 것에 고착(固著)된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잘못된 바를 알도록 하였다.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날카롭게 깨우쳐 주어 굳게 굳어있는 사람들의 마음속으로 파고 들어가게 하였다. 그리고는 끝으로 《춘추(春秋)》에 내외(內外)의 구별을 두게 된 까닭에 대해 분명하게 말하기를, “공자는 주(周) 나라 사람이요, 춘추(春秋)는 주 나라 글이니, 공자가 그 자신을 안[內]이라 하고 남을 밖[外]이라고 할 것은 당연한 일이다. 만약 공자가 구이(九夷)의 사람이었다면 그 존왕양이(尊王攘夷)하는 의리에 있어서 당연히 역외춘추(域外春秋)로 되었을 것이다.” 하였다. 이른바〈의산문답〉이란 것이 바로 이것이다.
나 인보(寅普)는 이 글을 읽을 적마다 일찍이 개연(慨然)한 마음으로 선생의 사람됨을 사모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이는 고심을 하면서 바로잡고 빠져 나오려고 한 것이 당시에 있어서 보기 드문 일일 뿐 아니라, 진실로 선생의 학설을 말미암아서 유(類)에 따라 미루어 나아가면, 정덕(正德)과 이용(利用)과 후생(厚生)이 다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어서였다. 그런데 아깝게도 선생의 뒤를 이은 사람이 적었다.
선생은 영조(英祖)와 정조(正祖) 연간의 사람으로서 -영조 계해년(1743, 영조19)에 출생하여 정조 계묘년(1783, 정조7)에 죽었다.- 이재(頤齋) 황윤석(黃胤錫)과 함께 미호(渼湖) 문경공(文敬公) 김원행(金元行)을 스승으로 섬기었다. 이때 성호(星湖) 이익(李瀷)이 아직 생존하고 있어 자손과 문하의 제자들은 대부분 실(實)을 숭상하고 용(用)을 힘썼으므로, 많은 신진(新進)들이 의귀(依歸)하였다. 이에 비록 문호(門戶)는 서로 통하지 않았으나, 성기(聲氣)는 서로 통하였다. 같은 사람끼리 서로 호응하는 법이다. 그러므로 선생이 친하게 지낸 사람은 연암(燕岩) 박지원(朴趾源)과 초정(楚亭) 박제가(朴齊家)였는데, 이들은 모두 다 일찍이 《성호사설(星湖僿說)》을 읽었고, 모두 석치(石癡) 정철조(鄭喆祚)와 친하게 지낸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초정은 또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과 친하게 지냈다. 여기에서 선생의 학문이 안으로는 실로 성호에게 영향을 받았으며, 위로는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에까지 거슬러 올라갔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춘추(春秋)》를 밝게 분별함에 이르러서는, 선생의 원대한 포부와 굳은 의지가 유독 뛰어났음을 인정해야 한다. 가령 시작을 열기는 어렵고 단서를 부연해 나가는 일은 힘을 쓰기가 쉬운 법이라고 하더라도, 역시 하늘이 그런 일을 할 사람을 내어 근원을 맑히고 흐름을 소통시켜 놓은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한때의 통달한 재주와 식견을 가진 이들이 모두 이에 대해서는 내버려두었는데도 선생의 말이 여기에까지 이르렀겠는가?
선생의 글을 살펴보면, 이 세 가지 저작 이외의 경우에는 종종 이상에 말한 바와 서로 모순되는 것이 있으며, 또한 그 학문의 유래를 깊이 숨기고 있는 것이 있는데, 이는 얼핏 보면 거의 알 수 없다. 이것은 다른 까닭이 아니라, 자신은 이치에 대해 환하게 아는데 상대방은 의혹된 것을 굳게 지킬 경우, 덮어 가려서 피해를 피하지 않을 수 없어서였던 것이다. 연암(燕巖)의 경우에도 보면, 〈호질(虎叱)〉을 지어 유자(儒者)의 폐단을 풍자하였지만, 겉에 내거는 작품은 혹 일반 대중을 따라 그대로 쏠려가기도 하였다. 그러니 어찌 저것이 진짜이고 이것은 속이는 것이 아니겠는가. 선생도 또한 어찌 이와 다르겠는가. 아는 사람은 여기에서 선생이 시대를 잘못 만난 것을 애달프게 여길 것이다. 그리고 또 이와 같은 불우한 때에도 오히려 기구(崎嶇)하게나마 스스로 뜻을 드러내어 사람들이 그 일에 미혹되지 않기를 바란 것을 보고는, 더욱더 선생을 존경하게 될 것이다.
이재(頤齊) 황윤석(黃胤錫)의 〈역산(曆算)〉도 역시 석치(石癡) 정철조(鄭喆祚)로부터 전해진 것이다. 그런데도 감히 그 일을 말하여 세상에 드러내지 못하였다. 이것은 선생의 일과 대개 비슷하다. 이로써 보면 근고(近古) 이래 2, 3백 년 동안에 선비로서 독창적인 밝은 식견을 품고 있으면서도 숨어 살다가 세상을 떠난 사람을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하물며 준수한 인재들이 제거되고 밝은 빛이 가라앉은 뒤에 있어서겠는가?
선생은 일찍이 숙부를 따라 연경(燕京)에 가서 육비(陸飛)ㆍ엄성(嚴誠)ㆍ반정균(潘庭均)과 사귀었는데, 그 일은 모두 선생이 지은 〈연기(燕記)〉, 〈필담(筆譚)〉및 〈척독(尺牘)〉에 실려 있다. 이 세 사람은 선생과 생사 간에 서로 잊지 못하는 사이가 되었다. 선생이 돌아가시자 연암이 지(誌)를 지으며 이 일을 크게 일컬었다. 그러나 선생이 어떤 분인가. 연암이 어찌 이 사실을 들어서 선생의 훌륭함을 드러내려 하였겠는가. 이는 단지 세 사람이 선생을 알아준 것에 느낌이 있어, 그 말을 지나치게 크게 하여, 선생이 우리나라에서 인정을 받지 못한 것을 깊이 슬퍼한 것이다.
선생의 천문(天文)과 산학(算學)의 깊은 경지에 대해서는 참으로 더 이상 말할 것이 없다. 연암은 또 선생에 대해서 나라의 세정(稅政)을 맡길 수 있고, 외국에 사신으로 보낼 수 있는 분임을 칭찬하였다. 그리고 〈임하경륜(林下經綸)〉에서 말한 사민(四民)을 평등하게 하고, 국민에게 모두 병역을 부과하고, 놀고먹는 사람을 없애고, 성을 쌓는 법을 고칠 것 등은 모두가 변동할 수 없는 주장이며, 그 ‘임금이 재상을 선택하고, 재상 이하는 각각 그 휘하 사람들을 가려 뽑게 한다.’고 논한 설은 거의 근세의 책임내각제도(責任內閣制度)와 합치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다산(茶山)에 비교해 볼 때 그 규모의 크기와 내용의 정밀함이 뒤떨어진다. 그러니 선생을 알고자 하는 사람은 마땅히 그 근본과 말단 및 다른 사람과 자신을 구별한 데에서 찾아보아야 한다. 그럴 경우 선생이 선생이 된 까닭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후학 동래(東萊) 정인보(鄭寅普)는 삼가 적는다.
湛軒書序[鄭寅普]
湛軒書者。洪先生大容字德保之所著也。舊分册十五。今稍幷其編爲七册。篇名及類次之第。具如目錄。夫學術之於人群大矣。善敗由之。或愼守其本。以正德利厚。或反焉。致百度失貞。久且深。中於人心。習以若性而不可如何。以是二者而鏡之於吾近古之世。其所由者可知已。故當其時。論議以相伐者則有人矣。勢利以相殘者則有人矣。與接爲構。若水火氷炭之不相入。而至其表臬春秋。眛本剽人己之大分。則無彼此焉。何也。以其中於心者同也。至弊之極而一二明智之士感焉。治佐民之學。以遏頹風。譬若東方微曙。高下通塞稍分。然以其猶承於積晦之後。明爲所攝。分焉而未盡。故雖通人輩出。經世之緖。幾得復振。而卒未有直就春秋而正本剽人己之分者。豈其明不足於體哉。夷之初朝而照有所未周也。今先生之書。其最要者。有曰籌解需用。有曰林下經綸。或精幾何算數。或劬心政法。皆佐民之學。而又有曰毉山問答。則專以覈本剽而析人己。在當時所僅見者。嗚呼。豈非豪傑之士哉。先生知世之靡靡而至於此。其源在於學術。遺根棄柢。不知人己之爲誰孰。而虛起僞僞導虛。於是焉實心實政。不可望矣。乃擬爲東海虛子與毉山之實翁相問答。而首論虛實。謂道術之惑亂天下。且敷申其意。以爲孔子之喪。諸子亂之。朱門之末。諸儒汩之。崇其業而忘其眞。習其言而失其意。正學之扶。實由矜心。邪說之斥。實由勝心。救世之仁。實由權心。保身之哲。實由利心。天下滔滔。日趨於虛。毉山問答語。 然於春秋之說。則自念人之中於心也久。非言語所能祛解。故不遽發焉。而故引天文新學。論地員地轉。至諸星界輕重鈍疾之別。相距之遠近與其對於地者。明日月之蝕。非治亂之所係。星辰分野之說。尤無據可笑。因及風雲雨雪霜雹雷霆虹暈之所以然。海之鹹。地之有震。皆有由五行之數。原非定論。術家祖之河洛。以傅會易象。以穿鑿生克飛伏。支離繚繞。卒無其驗。而一一擧現前目證之實。若別白黑。使膠舊者知所自失。然後始乃奏之以摩厲。以入人心癥結之間。而末質言春秋內外之故曰。孔子周人也。春秋者周書也。宜其自內而外人。若使孔子而九夷。則其尊攘之義。自當有域外春秋。所謂毉山問答者是也。寅普每讀之。未嘗不慨然慕鄕其爲人。蓋其苦心矯拔。不獨當時所僅見而已。苟由先生之說。而觸類以達。則正德利厚。皆不外是。惜乎其少繼也。先生英正間人。英祖癸亥生正祖癸卯卒。 與黃頤齋胤錫。俱師事渼湖金文敬。而是時。星湖猶未沒。子孫門弟多崇寔致用。爲新進所依歸。雖門戶有閡。聲氣互流。同焉者應。故先生所善朴燕巖趾源,朴楚亭齊家。皆夙籀星湖僿說。而皆善鄭石癡喆祚。楚亭又善茶山。知先生之學。內實漸漬星湖。以上溯磻溪。然至明辨春秋。則歸先生弘毅獨絶。藉云開始之難。而衍緖者易爲力。亦天生夫人。以澂源疏流。不然。何一時通才達識。於此猶姑舍旃。而先生言之至此也。顧先生之書。此三著之外。則往往與此所云者相齟齬。又深諱其學所自來。驟見之。殆不可辨。此無他故。吾之燭於理者深。而人之守於惑者堅。不能不有萆焉以違於害。觀燕巖。亦爲虎叱以譏儒弊。而其表揭之作。或隨衆爲弟靡。庸非彼爲眞而此爲詭歟。先生何以異此。知者於此而哀其遇。又見以如此之遇。而猶崎嶇自達。蘄民不迷其事。愈可敬也。頤齋曆算。亦傳自石癡。然不敢述其事以公世。與先生略相似。由此言之。近古二三百年之間。士之懷獨見之明。而隱泯而沒世者。可勝言哉。况於材俊芟夷精色遂沉之後哉。先生嘗隨其叔父使燕。交陸飛,嚴誠,潘庭筠。事具先生燕記及筆譚尺牘。三人於先生。死生不相忘。先生沒。燕巖爲誌。盛稱此事。然先生何等人。燕巖豈必以此重先生哉。特有槩於三人者之猶知先生。而偏宕其辭。以深悲先生之不見知於域中也。先生天算之邃。固無俟言矣。燕巖又稱其可使掌邦賦。使絶域。而視林下經綸。平四民。兵全國。禁遊手。改城法。皆不可易。其論君擇相。相以下各擇其屬。幾合於近世責任內閣之制。然此視茶山。猶遜其閎而精。欲知先生者。當於其本剽人己之辨而求之。則先生之所以爲先生者見矣。後學東萊鄭寅普。謹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