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자나무는 이스라엘을 방문한 순례객들이 가장 보고 싶어하는 성지 식물 가운데 하나다. 그런데 막상 겨자나무를 보면 크게 실망한다고 한다. 겨자나무를 본 적이 없는 한국의 기독교도인들은 성경에서 읽은 겨자나무가 새가 깃들 수 있을 만큼 자라는 거목으로 생각한다. 겨자씨가 자라 나무가 된다는 표현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있으며, 누가복음에는 새들이 깃들 정도라고 표현되어 있어 제법 우람한 나무를 연상했을 것이다. 농촌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도시의 어린이들이 쌀이 쌀 나무에 맺히는 열매로 생각하는 것과 흡사하다.
*성경에서 겨자씨는 작지만 희망과 인내의 상징으로 표현되고 있다.
마태복음에서 겨자씨를 모든 씨보다 작은 것으로 비유하고 있다. 예수께서 살아계실 당시 유대인들은 작은 것을 설명할 때 겨자씨에 견주어 말하였는데, 예수님도 작고 초라한 겨자 씨앗을 자기 정원에 심어서 새들이 깃드는 큰 나무로 자라게 하겠다고 하셨다. 그리고 잡초처럼 버려진 인생, 사회에서 소외된 자들을 집중적으로 찾고 심방하셨다. 겨자씨 비유를 몸소 실천하신 것이다. 당시에 갈릴리 주민들은 로마의 압제를 받고 있었다. '이방의 갈릴리'라고 멸시받으면서 잡초처럼 눌러져 있었다.예수님은 이런 잡초의 씨앗을 자기 정원에 심어서 새들이 깃드는 큰 나무로 자라게 하겠다고 하셨다. 실제로 예수님을 따르던 열두 제자들이 수많은 새들이 깃드는 인류의 거목으로 자란 것을 보면 그 뜻이 분명해진다. 겨자 씨는 크기가 매우 작고, 확장성이 대단히 크기 때문에 ‘큰 발전의 가능성을 상징’ 하는 비유의 뜻으로 인용되고 있다.
*산을 옮길 만한 믿음에 비유되는 식물로 표현되고 있다.
성경에서 신앙인의 믿음에 대해서 겨자씨에 비유하였다. 제자들이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지 못하여 쩔쩔매고 있을 때에도 믿음의 능력과 위대성에 대해 제자들에게 언급할 때 겨자씨를 갖고 비유하였다.(마태복음 17장 20절) 씨앗은 생명과 생식을 상징한다. 성경에서 씨앗은 귀중함을 상징한다. 씨앗은 농업에 의존했던 고대사회에서 물물교환의 주요 수단이었고, 양식과 미래 곡물로서의 경제적 가치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씨앗이 싹을 틔우기 위해선 토양과 물, 정성어린 돌봄이 필요하다. 하나님 말씀이 우리 안에서 제대로 자라도록 하는 데도 마찬가지다. 씨앗은 죽어야 나무로 자랄 수 있고, 열매를 맺을 수 있다. 보잘 것 없고 자그마한 나무이지만, 그러한 나무들이 많이 있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더 살맛 나고 향기가 가득한 세상으로 변해 갈 것이다 .
성경에는 겨자를 나무라고 표현하고 있다. 중동지역에서는 3m 이상씩 자라 사람 키보다도 큰 것이 숲을 이루고 있는 곳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겨자는 1년생 초본이다.
일반적으로 겨자라고 하면 음식점에서 나오는 톡 쏘는 매운맛의 향신료를 상상한다. 겨자는 지중해 연안이 원산지로 재배식물 중에서 역사가 오래된 것 중 하나다. 겨자는 이집트의 파피루스 문서에 기록돼 있을 정도다. 겨자는 중요한 향신료일 뿐만 아니라, 고대 그리스나 로마시대부터 그 씨를 이용하는 약초로도 널리 알려졌다. 겨자가 잘못 사용된 경우도 있다. 1차 세계대전때에 독일군이 벨지움에 사용한 '겨자께스'(mustardgas)이다. 이것은 강렬한 자극성과 발포성(發泡性), 그리고 극심한 냄새를 갖은 독개스였다. 오늘날 말하는 생화학무기로 쓰여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