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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業 Karman) : 몸과 입과 뜻으로 짓는 소행. 산스크리트로 카르만이라 한다. 본디 크르(kr;행하다)라는 동사에서 만들어진 명사로 행위를 가리킨다. 하나의 행위는 원인이 없으면 일어나지 않으며, 일단 일어난 행위는 반드시 어떠한 결과를 남기고, 다시 그 결과는 다음 행위에 크게 영향을 미친다. 그 원인․행위․결과․영향을 총칭해서 업이라고 한다. 그것은 처음에 윤회사상과 함께 인도철학의 초기 우파니샤드사상에서 발생하였는데, 뒤에 불교에 도입되어 인간의 행위를 규제하고 또 살아 있는 모든 중생에게 윤회의 축이 되는 중요한 용어가 되었다. 즉 선인선과(善因善果)․악인악과(惡因惡果) 또한 선인낙과(善因樂果)․악인고과(惡因苦果)의 계열은 업으로 지탱하고, 인격의 향상은 물론 깨달음도 업이 인도한다고 여겨지고 있으며, 나아가 업이 미치는 범위는 더 한층 확대되어 전생에서 내세에까지 연장되었다. 확실히 행위 그 자체는 무상하며 영속하는 일은 있을 수 없으나, 일단 행한 행위는 취소할 수가 없으며 여기에 일종의 <비연속의 연속>이 있는데 그것을 업이 짊어진다고 해서 <불실법(不失法)>이라는 용어로 쓰이는 예도 있다. 또한 불교에서는 신(身)․구(口)․의(意)를 3업(三業)이라고 하여, 신체와 말과 마음은 언제나 일치해서 행위로 나타난다고 하였다. 또 초기의 불교는 업을 오로지 개인의 행위에 직결시켰는데, 일마 뒤에는 사회적으로 확대되어 많은 개인이 공유하는 업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이것을 공업(共業)이라고 하고, 개인 한 사람의 것은 불공업(不共業)이라고 한다. 또 3업은 여러 갈래로 나누어져 대단히 복잡한데, 불교 교리의 진전이나 확립과 더불어 업의 분석이 활발히 행해져서 그것에 기초를 둔 정밀한 업설(業說)이 불교 철학의 중심문제 가운데 하나를 차지하고 있다.] |
《십이지장경》
우리의 삶은 올바른 진리의 길에 들어설 줄 모르고 감정과 욕망에 이끌려 마치 뱀의 꼬리가 앞장을 서서 길을 가려는 것과 같이 가시덩쿨에 들어가고 불 속에도 들어가고 결국에는 낭떨어지에 떨어지게 되는 격입니다. 즉, 우리들이 불타는 집과도 같은 이 세상을 윤회하는 것은 끝없는 세상에 대한 탐욕을 져버리지 못한 탓입니다.
부처님께서 어느날 숲 속에 있는 한 나무 아래에서 좌선을 하고 계셨다. 이 때 젊은이들이 숲 속에서 여기저기 무엇인가를 찾아 다니고 있었다. 나무 아래 조용히 앉아 있는 부처님을 보고 그들이 다급하게 물었다. '한 여자가 도망가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까'
사연인 즉 그들은 이 지역에 사는 지체 있는 집안의 자제들인데, 오십 명이 저마다 자기 아내를 데리고 숲에 놀이를 왔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의 미혼자만은 기생을 데리고 왔었는데, 모두 노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는 동안 그 기생은 여러 사람의 옷과 값진 물건을 가지고 달아나 버렸다. 그래서 그 연인을 찾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이와 같은 사정을 듣고 부처님은 그들에게 물으셨다. '젊은이들이여, 달아난 여인을 찾는 것과 자기 자신을 찾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 놀이에만 팔려 자기 자신을 잊어 버리고 여인을 찾아 헤매던 그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제 정신으로 돌아왔다. '자기 자신을 찾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 '그럼 다들 거기 앉아라. 내가 이제 그대들을 위해 자기 자신을 찾는 법을 가르쳐 주겠다.' 이리하여 그 젊은이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모두 부처님 제자가 되었다.
《사분율 제32권》
이 젊은이들은 자신이 더 중요함을 깨달아 출가했지만, 어리석은 사람들은 탐욕의 세계로 달려가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항상 탐욕을 버리라고 설하시며, 부처님께서도 '왕자의 지위를 문틈에 비치는 먼지처럼 보고, 금이나 옥 따위의 보배를 깨어진 기왓장처럼 보며, 비단 옷을 헌 누더기 같이 보고, 삼천대천세계를 한 알의 겨자씨처럼 보아《사십이장경》' 궁궐을 버리고 출가하여 위대한 깨달음을 얻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부처님께서 세속의 탐욕을 벗어났음을 몸소 보여주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늘 당신은 '길을 가리키는 사람'이라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은 만나는 사람마다 괴로움에서 벗어나 지혜와 평화의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즉 부처님께서는 우리에게 깨달음과 깨달음으로 가는 길을 몸소 가시며 가르침을 주신 것입니다. 그렇지만 깨달음을 이루고, 못이루고는 우리에게 달린 것입니다.
고려시대 야운스님은 당신의 수행을 살피는 글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사람이 부처님 법안에서 도를 이루었는데, 그대는 어찌하여 아직도 고해에서 헤매고 있는가.
그대는 시작 없는 옛적부터 이 생에 이르도록 깨달음을 등지고 속진에 묻혀 어리석은 생각에 빠져 있구나.
항상 악업을 지어 삼악도에 떨어지고 착한 일을 하지 않으니 생사의 바다에 빠진 것이 아닌가.
《자경문》
{진리를 향해 정진하는 삶}
게으름이란 모든 허물의 바탕이다. 집에 있는 이가 게으르면 의식(衣食)이 부족하고, 사업이 쇠퇴할 것이요, 출가한 이가 게으르면 생사의 고통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모든 일은 정진에 의하여 일어나나니, 집에 있는 이가 정진하면 의식이 풍족해 지고 사업이 번창할 것이요, 출가한 이가 정진하면, 법을 모두 성취하여 마침내는 부처님의 경지에 이르나니, 모두가 정진에 의해 이루어지느니라.≪보살본행경≫
일상적인 삶을 살면서 불교를 알고자 마음을 냈다면, 그 순간부터 자른 믿음을 가지고 사는 참다운 불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불교를 믿고자 하는 발심(마음을 냄)도 중요하지만 그 발심한 마음으로 생활 속에서 정진해 나가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일 것입니다.
생활 속 정진을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할 것입니다. ≪대승기신론≫에는 믿음을 네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믿음은 근본이니, 진여(眞如)의 법을 즐기어 생각하는 것이며,
둘째는 부처님께 한량없는 공덕이 있음을 믿음이니, 항상 가까이 모시고 섬기기를 생각하는 것이며,
셋째는 부처님의 법에 큰 이익이 있음을 믿음이니, 항상 모든 바라밀을 닦으려고 생각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스님들은 나와 남을 이롭게 하는 행을 바르게 닦는다는 것을 믿음이니, 모든 수행자들을 가까이 섬기면서 올바른 행을 배울 것을 항상 생각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부처님(佛)과 부처님의 가르침(法), 부처님을 따르는 제자(僧)에 귀의하여 올바른 믿음으로 항상 정진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원효스님은 ≪발심수행장≫에서 마음을 내어 부처님께 귀의한 이들에게 이렇게 당부하고 계십니다.
오늘이라 할 때 벌써 늦은 것이니 아침부터 서둘러야 할 것이다…..시간이 지나가 어느새 하루가 흐르고 한 달이 되며, 한 달 두 달 문득 한 해가 되고, 한 해 두 해가 바뀌어 어느덧 죽음에 이르게 된다. 부서진 수레는 구르지 못하고 늙은 사람은 닦을 수 없다. 누워서 게으름만 피우고, 앉으면 생각만 어지러워진다. 몇 생을 닦지 않고 세월만 보냈으며, 그 수많은 생을 헛되이 살았으면서도 한평생을 닦지 않았는가. 이 몸은 끝내 죽고야 말 것인데 다음 생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어찌 급하고 급하지 않은가.
바른 믿음의 정진은 생활 속의 수행과도 같습니다. 불교의 수행은 하심(下心, 자신을 낮추는)의 공부입니다. 자신의 마음 속에 찌들어 있는 탐냄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업, 더러운 때를 닦아 내고 맑은 성품을 발견하여 깨달음을 이루는 데는 첫째도 둘째도 나를 낮추고 남을 공경하는 마음공부가 제일이라고 합니다. 진정으로 자신을 맞출 수 있을 때 남을 받아들일 수 있고 자신의 마음을 부처님의 법으로 가득채울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른 믿음으로 바른 수행을 한다고 하더라도 하루하루 반성하는 자세가 필요할 것입니다.
매 순간 욕망이 싹트고 주위 사람들에게 화를 내기도 하고, 순간적으로 판단을 잘못하여 잘못을 저지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 때마다 우리는 부처님의 법을 따르는 불자임을 잊지 말고 하루하루 삶을 돌이켜 보고 반성하는 일이 필요할 것입니다.
≪대승기신론≫에서 '처음 공부하는 보살이 비록 신심은 두터우나 전생부터의 무거운 죄와 나쁜 업장이 많으므로 때로 삿된 마왕에게 홀리기도 하고, 세상 일에 끄달리기도 하고, 가지가지 병고에 시달리기도 하여 재난이 한 두 가지가 아니어서 불자들이 자칫 착한 법을 닦는 일을 멈추게 되나니, 반드시 밤낮으로 부처님께 예배하여 성심으로 참회하며 권청하고 수희(隨喜)하며 보리에 회향하기를 늘 쉬지 아니하면, 나쁜 업장이 차츰 소멸하고 선근이 늘어나리라.'고 하였습니다.
참회(懺悔)는 수행의 중요한 길이라고 합니다. '참(懺)'이란 지나간 허물을 뉘우침입니다. 전에 지은 악업인 어리석고 교만하고 허황하고 시기, 질투하는 죄를 다 뉘우쳐 다시 그런 악업을 짓지 않도록 하는 것이며, '회(悔)'란 다음에 지을 죄를 미리 깨닫고 아주 끊어 다시는 짓지 않겠다는 결심입니다.
사람에게 허물이란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허물이 있다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참회하여, 허물을 스스로 고쳐 새롭게 하면 그 죄업은 날로 없어지고 그리하여 마침내는 도(道)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불교를 믿고자 하는 첫 마음을 간직하고 변함없이 정진해 가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시간이 흐르면 생각이 많아져서 정말로 괜찮은가에 대한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지기도 합니다. 부처님이 죽림정사에 계실 때의 일입니다. 소오나비구는 영축산에서 쉬지 않고 선정을 닦다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부처님의 제자로서 정진하는 성문 중에 나도 들어간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번뇌를 다 끊지 못했다. 애를 써도 이루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집으로 돌아가서 보시를 행하면서 복을 짓는 것이 낫지 않을까?'
부처님은 이런 소오나의 마음을 보시고는 한 비구에게 소오나를 불러오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소오나, 너는 세속에서 거문고를 잘 탔다지?' '네 그랬습니다.' '네가 거문고를 탈 때 만약 그 줄을 너무 조이면 어떻더냐?' '소리가 잘 나지 않습니다.' '줄을 너무 늦추었을 때는 어떻더냐?' '그 때도 잘 나지 않습니다. 줄을 너무 늦추거나 조이지 않고 알맞게 잘 고루어야만 맑고 미묘한 소리가 납니다.' '그렇다. 너의 공부도 그와 같다. 정진을 할 때 너무 조급히 하면 들뜨게 되고 너무 느리게 하면 게으르게 된다. 그러므로 알맞게 하여 집착하지 말고 방일하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 이야기는 ≪잡아함경≫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 후 소오나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거문고를 타는 비유를 생각하면서 부지런히 정진하여 오래지 않아 아라한(阿羅漢)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소오나와 같은 생각을 하게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생활 속에서 정진해 나갈 때 조급한 마음을 버리고 쉼없이 바른 믿음으로 정진하면 비록 힘들고 어렵기는 하겠지만 작고 작은 선업이 쌓여 마침내는 깨달음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불교적인 삶}
자기 완성만이 아니라 나와 남이 함께 깨달아 이 세상을 불국정토로 만드는 것이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이는 바른 믿음과 생활 속의 바른 행을 중요시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불자로서 지켜야 할 실천덕목으로 오계(五戒)를 말씀하셨습니다.
산 목숨을 죽이지 말라(不殺生)
주지 않는 것을 갖지 말라(不偸盜)
삿된 음행을 하지 말라(不邪淫)
거짓말을 하지 말라(不妄語)
음주를 하지 말라(不飮酒)
오계는 모든 악 가운데서도 가장 대표적인 다섯 가지 악업을 짓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지 말라'는 것은 금지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계는 오히려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실천이 전제되어 있는 것입니다. '산 목숨을 죽이지 말라'는 경우 모든 생명은 불성을 가진 고귀한 존재이니 본래 이 '산 목숨을 죽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옛날 자비심이 지극한 왕이 매에게 쫓겨 피해온 비둘기 대신 자신의 살점을 뜯어 주었다는 자비심이야 말로 '산 목숨을 죽이지 말라'는 실천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동의 사회 생활을 하는 우리들이 악을 범하지 않고 선을 실천함으로써, 서로를 존중하고 아끼며 평화롭게 살아가는 삶의 터전을 이룩하려는 것이 이 오계의 목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도 계를 스승으로 삼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가장 안온한 공덕이 계에 머물고 있기 때문에, 청정한 계를 가지면 괴로움을 없애는 지혜와 선정의 온갖 공덕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계의 가르침을 자신의 삶에 실천하도록 해야 합니다. 즉 일상적인 삶 하나하나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행하여 다른 사람과 더불어 이 세상을 살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반가운 이, 그리운 이를 만나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예(禮)로써 그 뜻을 표합니다. 불교에서는 스님 또는 법우를 만나게 되면 합장으로 예를 표합니다. 열 손가락을 가지런하게 하고 양 손바닥을 맞대어 흩어진 마음과 생각을 집중합니다.
이렇게 다소곳이 고개 숙여 합장하는 마음이 바로 믿음의 출발입니다. 큰 절이 아니더라도 합장은 나의 마음을 뜻하며, 더 나아가 너와 나의 마음이 하나의 진리 위에 서로 만났음을 뜻하는 동시에 존경과 진실과 자비의 마음을 뜻합니다. 그리고 절을 하고 합장을 하는 의식 속에는 자신을 낮추고 덕 높은 스님, 부처님께 귀의한다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또한 수행의 방법으로 매일 백 팔배를 하면, 항상 교만심을 버리고 하심(下心)을 하여 남에게 성내지 않고 좋은 태도를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공양 전후에 언제나 합장하며 '이 음식에 깃들인 모든 이의 공덕을 생각하며 감사히 먹겠습니다.'라고 읊조릴 때 자신을 있게 해 준 모든 이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므로 다른 사람에게 해로운 일을 한다는 것은 어려워 질 것입니다.
그리고 불공(佛供)을 할 때도 부처님을 따르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불공을 올림은 일체 중생을 고통으로부터 구제하시고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시며 열반의 길로 인도하시는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마음의 표시입니다. 또한 부처님께 공양을 올린다는 것은 모든 중생에게 회향한다는 뜻도 담겨 있기에 모든 중생의 은혜를 갚는 일이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 우리의 이웃에게 따뜻한 마음씨를 베품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기에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것과 다름이 없으며 이 세상을 더욱 맑고 청정하게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 앞에서 발원을 할 때도 자신의 욕망과 이익을 성취하기 위한 것보다는 모든 중생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하여야 합니다. 아울러 모든 번뇌를 여의고 하루 빨리 부처님의 법을 익혀 깨닫도록 발원함이 참다운 불자의 발원입니다. '언제 어느 곳에서든 고통과 괴로움에 빠진 중생이 나를 부를 때는 반드시 그곳에 가서 구해내리라.'는 관세음보살의 발원과 지옥에 있는 중생들을 모두 구하기 전에는 결코 성불하지 않겠다는 지장보살의 발원이야말로 참다운 발원인 것입니다. 현실에서 중생의 아픔을 함께 하며, 고통을 덜어 주고자 커다란 원을 세우고 자신을 아끼지 않고 실행해 가는 것이 참다운 불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처럼 불자의 수행은 작은 일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만나는 이에게 머리를 숙이고 합장하는 모습, 공양을 하면서 이웃을 생각하고, 불공이나 발원을 하면서도 자신보다는 더불어 사는 세상을 생각하는, 주위 사람을 부처님이나 스님들을 공경하듯 하는, 이한 자세가 마음에서 우러나와 행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나 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들도 더불어 이런 자세를 간직할 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화합의 정신이 실현되는 것입니다. 이런 자세로 가족끼리 사랑하고 화목을 이루며 넓게는 이웃과 더불어 생각하며 살아갈 때, 마른 풀이 수미산 같이 쌓여 있더라도 겨자씨 만한 불똥 하나로 다 태울 수 있듯이 우리들의 조그마한 신행의 촛불이 온갖 더러움을 태우고 불국정토의 세계를 이 땅에 구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과 부처님의 깨달음
{부처님의 생애}
불교(佛敎)는 '부처님(佛)의 가르침(敎)'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누구나 깨달음을 통해 부처님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이란 불타(Buddha, 佛陀) 즉, 깨달은 사람(覺者)을 말합니다. 우리는 모두 부처님이 될 수 있는 소질과 성품이 있는데 이를 불성(佛性)이라고 합니다.
저마다 불성을 가지고 있는 우리는 부처님의 생애를 알고 부처님의 삶대로 살아가는 것 깨달음을 이룰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생애는 한 인간이 진리를 깨쳐 부처님이 되는 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생애를 배우는 것은 불교에 입문하고 나서 불교 교조의 삶을 알아야 한다는 당위로써라기 보다 부처님이 된 그 삶을 따르려고 하는 것입니다.
중생이 부처님이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부터 부처님과 같이 되고자 노력을 한다면 언젠가는 부처님이 될 것입니다. 불교를 믿고 행한다는 것은 결국 부처님을 닮아 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지금으로부터 약 2600년 전 인도 북지역에 위치한 카필라(kapila)국 사캬(Sakya, 석가釋迦)족의 정반왕과 왕비 마야부인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성(姓)은 고타마(Gotama, 최상의 소라는 뜻)였고, 출가하기 전의 이름은 싯달타(Siddhartha)였습니다. 고타마 싯달타가 출가 수행하여 깨달음을 얻어 부처님이 되자 사람들은 그를 석가모니(Sakyamuni) 즉 석가족 출신의 성자라고 불렀습니다.
발심과 서원-깨달음의 씨앗을 뿌리다
아주 오래 전 수메다라는 한 수행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수메다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7대조부터 내려오는 막대한 재산을 사람들에게 남김없이 보시한 후 출가하여 히말라야에 들어가 수행자가 되었습니다. 그 때 연등(燃燈)이라는 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셨습니다. 수도인 디파바티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연등부처님을 공양하고자 온갖 향과 꽃, 훌륭한 음식을 준비하고 연등부처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침 공양물을 구하기 위해 그곳에 들른 수메다는 연등부처님께서 세상에 출현하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기쁜 마음이 되었습니다. 수메다는 '나는 여기에 깨달음의 씨앗을 뿌려야겠다.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생각한 수메다는 부처님께 바칠 공양준비를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디파바티의 모든 공양물은 왕의 지시로 부처님께 바쳐져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때마침 아름다운 일곱 송이의 꽃을 들고 가는 여인을 수메다는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그녀에게 다가가 꽃을 팔 것을 간청하였습니다. 그녀는 꽃을 팔지 않을 마음으로 자신이 들고 있는 꽃 한송이는 1백냥이며, 또한 자신과 결혼을 약속한다면 꽃을 팔겠다고 말했습니다.수메다는 처음에는 거절하였으나 꽃을 부처님께 바칠 숭고한 마음으로 그녀의 조건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수메다의 진지한 마음에 감탄하여 나머지 꽃마저 부처님께 공양하라며 주었습니다.
수메다는 그 꽃을 연등부처님에게 바쳤습니다. 연등부처님께서는 중생들을 가르치고, 젊은 수행자 수메다에게 기쁨을 주기 위하여 대중이 바친 꽃을 허공에 떠 있게 하는 기적을 보이셨습니다.
연등부처님과 제자들이 지나는 길에 진흙웅덩이가 있었습니다. 수메다는 연등부처님께서 발을 더럽히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 진흙웅덩이 위에 머리를 풀고 엎드렸습니다. 진흙 바닥에 엎드린 채 수메다는 생각했습니다. 아! 나도 언젠가는 지금의 세존이신 연등부처님 같이 완전한 인격자가 되어지기를…. 세존이신 연등부처님께서 지금하셨듯이, 나도 이 최고 법의 수레를 돌릴 수 있게 하여 주소서! 오직 세상에 대한 연민의 정에서 많은 이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할 수 있고 또한 무수한 생명들의 이익과 행복이 될 수 있는 연등부처님과 같은 생명이 되게 하소서라고…
이 광경을 본 연등부처님은 제자와 대중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견디기 힘든 고행을 하고 있는 이 수행자를 보라. 그는 지금으로부터 무량겁이 지난 후에 세상에 출현하여 부처님이 될 것이니라.' 연등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천인(天人)과 인간들은 크게 기뻐하며 이렇게 외쳤습니다. '수행자 수메다는 분명 부처님이 될 씨앗이요, 부처님이 될 싹이로다.'
모든 이가 지나간 뒤 엎드려 있던 수메다는 몸을 일으켜 앉아 스스로 생각했습니다. '내가 지금껏 쌓아 온 수행을 생각해 보자.' 그 때 1만 큰 세계가 진동하였고 그 진동에 놀란 사람들에게 연등부처님은 수메다가 부처님이 되기 위한 근본적인 덕목을 사유하고 있는 이유로 대지와 1만 큰 세계가 진동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큰 소리로 '당신은 기필코 부처님이 되실 것이옵니다. 흔들림 없이 정진하여 주소서. 멈추시거나 물러나서는 안 되나이다. 저희들도 또한 당신이 기필코 깨닫게 될 것임을 잘 알고 있나이다.'라고 외쳤습니다.
수메다는 모든 부처님이 이루신 깨달음의 근본덕목인
모든 것을 베푸는 보시(布施),
계율을 지키는 지계(持戒),
번뇌의 속박을 떠나는 출리(出離),
존재의 실상을 깨닫는 지혜(智慧),
끊임없이 노력하는 정진(精進),
욕됨을 참는 인욕(忍辱),
거짓 없는 진실(眞實),
굳게 뜻을 다지는 결정(決定),
살아 있는 것에 대해 사랑을 행하는 자비(慈悲),
공평하여 치우침이 없는 사(捨)
등의 10바라밀의 수행을 남김없이 생각해 후 10만 아승지겁을 지내면서 10바라밀의 수행을 닦아 스물 네 분의 부처님으로부터 수기를 받은 뒤 도솔천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 때 그의 이름은 호명보살이었습니다.
탄생 이전의 수행(도솔래의상 兜率來衣相)-도솔천에서 씨앗을 뿌리다
호명보살이 도솔천에 머물고 계실 때 모든 하늘 세계의 천인(天人)들이 보살의 처소에 모여들었습니다. 그들은 호명보살께 '존귀하신 스승이시여, 당신이 10바라밀을 행(行)하심은 제석천이나 마왕, 범천, 전륜왕의 영광을 위해 이룬 것이 아니옵고, 오직 세상의 중생들을 제도하고자 일체지(一切智)를 추구함으로써 이루신 것이나이다. 스승이시여, 바야흐로 부처님이 되기 위한 때가 왔나이다. 존귀하신 스승이시여, 부처님이 될 때이나이다.' 라고 간청했습니다.
호명보살은 천인들의 간청을 받아 들여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해 자신이 태어날 지방, 가계(家系)와 생모에 대해 살핀 뒤 석가족(기원전 6세기 지금의 인도와 네팔의 국경에 가까운 히말라야 기슭에 석가족이라는 왕족이 통치하는 조그만 왕국이 있었습니다. 그 왕국의 이름은 카필라국이었습니다. 이 왕국의 수도는 가비라바스투라였고 그 주변에는 조그만 도시와 촌락이 밀집해 있었습니다. 왕국의 남쪽에는 코살라국이 있었고 더 남쪽에는 마가다국이 있었습니다. 이 부근이 지금의 인도에서 '비할주라지길' 부근에 해당합니다.)의 마을에 있는 마야부인의 태중에 드시리라고 결정하셨습니다. 그 후 바로 깊은 선정 속에서 마야부인의 태로 들어가셨습니다. 정반왕과 결혼한 지 20년이 넘도록 자식이 없던 마야부인은 그 때 흰 코끼리가 오른쪽 옆구리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태자를 잉태하게 되었습니다.
{부처님의 생애}
아기 부처님의 탄생과 유년 시절(비람강생상, 毘藍降生相)-세상에 태어나시다
모든 백성의 기대 속에 왕비의 산달이 다가왔습니다. 마야부인은 해산 일이 다가오자 인도의 관습에 따라 친정인 데바다하로 향하였습니다. 친정으로 가는 도중 룸비니 동산에 이르렀을 때 였습니다. 동산에는 아름다운 사리나무 꽃들이 만개해 있었고, 왕비는 상서로운 사리나무 숲을 걷고 싶은 마음이 들어 꽃으로 가득한 숲길을 거닐었습니다. 왕비가 손을 뻗어 사리나무 가지를 잡으려는 순간 갑자기 산기를 느꼈습니다. 일행은 급히 처소를 마련하였으나 마야부인 나뭇가지를 붙잡고 선 채로 아무런 고통 없이 아들를 낳았습니다.
부처님은 태어나자마자 동서남북으로 일곱 걸음을 걸으면서 한 손으로 하늘을, 또 한 손으로는 땅을 가리키며 사자후를 토하셨습니다.
'하늘 위와 하늘 아래 오직 나 홀로 존귀하도다. 모든 세상이 고통에 잠겼있으니 내 마땅히 이를 편안케 하리라.(天上天下 唯我獨尊 三界皆苦 我當安之)'
태자의 발자국마다 연꽃이 피어나고 아홉 마리 용이 나타나 오색의 감로수로 태자의 몸을 씻어 주었습니다. 땅이 은은히 진동하는 가운데 하늘에서는 꽃비가 내리고 천신들이 내려와 차례로 예배 드리며 이 세상에 가장 존귀한 분의 탄생을 축복하였습니다.
태자가 태어난 지 닷새가 되자 히말라야로부터 아시타 선인이 내려와 태자를 뵙자고 하였습니다. 태자의 얼굴을 본 아시타 선인은 슬피 울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불길하게 생각한 정반왕이 연유를 묻자 아시타 선인이 대답하기를 '왕자는 출가하면 부처님이 될 것이요, 왕위를 계승하면 전륜성왕이 될 것인데, 자신이 늙어 부처님의 출현을 뵐 수 없는 것이 한스러워 눈물을 흘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한편 아들 싯달타 태자를 얻은 기쁨도 잠시 마야부인은 태자를 나은 지 7일만에 마야부인은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싯달타 태자는 이모를 새어머니로 하여 자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시타 선인의 예언에 따라 아들이 출가할 지 모른다는 생각에 정반왕은 태자가 성문 밖으로 나가는 것을 막고 호화로운 궁전을 지어 향락 속에 자라나게 했습니다.싯달타 태자는 왕궁의 풍요로움 속에서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7세가 되자 태자는 학문과 무예를 익히기 시작하여 곧 모든 학문과 무예에 통달하여 더 이상 그를 가르칠 수 있는 스승은 없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정반왕은 그를 극진히 생각하여 계절에 따라 생활할 수 있도록 궁전을 세 곳이나 지어 주는 등 온갖 호사 속에 태자를 성장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도성 밖으로의 출입만은 언제나 금지시켰습니다. 그것은 태자가 현실의 고통을 모르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문유관상(四門遊觀相)-세상을 두루 살피다
태자가 12세 되던 해 어느 봄날, 태자는 부왕과 함께 농경제의 파종식에 참가하였습니다.
그 때 태자는 농부들의 마르고 고단한 모습과 쟁기를 끄는 소들이 채찍에 맞아 피를 흘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한 쟁기가 지나간 뒤 뒤집혀진 흙 사이로 기어 나온 벌레들을 잡아 먹기 위해 날아든 새들을 보며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약육강식의 피비린내 나는 세상을 직접 목격한 것이었습니다. 이에 싯달타 태자는 염부나무 밑에서 그 고통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찾기 위해 깊은 명상에 잠겼습니다. 이 때 태자는 초선(初禪)의 경지에 든 것입니다. 태자가 자비심으로 세상을 고통 속에서 구원할 수 있는 길을 찾아 선정에 들었을 때, 이를 지켜 본 정반왕은 오히려 태자를 세상과 더욱 멀어지게 해야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태자의 세상에 대한 고뇌는 더욱 깊어 갔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생생한 삶의 실상과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성년이 된 어느 봄날 정반왕 모르게 성문 밖을 나섰다가 동문, 서문, 남문에서 각각 늙고, 병들고, 죽은 사람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후 태자는 생명을 가진 어떤 것도 이 생노병사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번민하던 싯달타 태자가 북문에서 만난 사람은 출가수행자였습니다. 출가수행자를 본 싯달타 태자는 출가수행만이 이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임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사문유관이라고 합니다.
사문유관이란 네 곳에 성문에 나가 세상의 현실을 보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왕궁의 영화와 권세, 향락과 사치 그리고 어떤 학문과 종교에서도 생로병사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찾지 못했던 싯달타 태자는 출가 수행자에게서 그 길을 찾았던 것입니다.
유성출가상(踰城出家相)-출가하시다
나는 하늘에 태어나기를 원치 않는다.
많은 중생이 삶과 죽음의 고통 속에 있지 아니한가
나는 이를 구제하기 위하여 집을 나가는 것이니
위 없는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결코 돌아오지 않으리라≪오분율≫
수행자를 만난 후 진리의 길로 나아가기로 결심한 태자는 모든 사람들이 잠든 밤에 백마를 타고 왕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왕의 자리도 버리고 사랑하는 아내 야수다라와 아들 라훌라 마저 뒤로 한 채 깨달음의 길로 나아간 이 날 태자의 나이 29세 되던 해 음력 2월 8일이었습니다.
애마 칸타카를 타고 마부를 따라 성을 나온 싯달타 태자는 보검을 빼들어 스스로의 머리와 수염을 깎은 뒤, 과거의 모든 부처님 앞에 일체의 번뇌를 끊고 진리를 깨닫겠다고 굳게 서원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비단 옷을 거지의 누더기 옷과 바꿔 입었습니다.
수행자가 된 싯달타 태자는 인도 남쪽의 신흥국가인 마가다국으로 향하였습니다. 그곳에는 훌륭한 종교가들이 모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당시 높은 명성을 얻고 있었던 알라라 칼마라 문하에서 그가 가르치는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을 배웠는데 곧 스승의 경지를 도달해 버렸습니다. 싯달타는 스승에게서 배운 선정을 통해서는 생사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 곁을 떠나 독자적인 수행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설산수도상(雪山修道相)-깨달음을 향해 정진하시다
설산수도는 깨달음을 향해 끊임없이 정진하는 것을 말합니다. 싯달타는 여러 스스에게서 가르침을 받았으나 곧 스승의 경지에 도달하여 더 이상 가르침을 받을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수행자들이 그러하듯이 고행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싯달타의 고행은 다른 누구도 흉내낼 수 없을 정도로 치열한 것이었습니다. 부처님의 일생의 찬탄한 ≪불소행찬≫에는 그 고행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나는 실로 고행자 중의 최고의 고행자였다. 남들이 받치는 음식도 받지 않았으며 풀과 떨어진 과일만 주어 먹었다. 나는 무덤사이에서 시체와 해골과 함께 지냈다. 그 때 목동들은 내게로 와서 침을 뱉고 오줌을 누기도 했으며, 귀에 나무 꼬챙이를 쑤셔 넣기도 했다. 내 목에는 여러 해 동안 때가 끼어 저절로 살가죽을 이루었으며 머리는 길어 새가 찾아 들었다.…….나는 하루를 대추 한 알로 보냈으며, 멥쌀 한 알을 먹고도 지냈으며 하루에 한 끼, 사흘에 한 끼, 이윽고 이레에 한 끼를 먹고 보름에 한 끼를 먹었다. 그래서 내 몸은 무척 수척해졌다. 내 볼기는 마치 낙타의 발 같았고 내 갈비뼈는 마치 오래 묵은 집의 서까래 같았다. 내 뱃가죽은 등뼈에 들러 붙었기 때문에 일어서려고 하면 머리를 쳐 박고 넘어졌다. 살갗은 오이가 말라 비틀어진 것 같았고, 손바닥으로 몸을 만지면 몸의 털이 뽑혀 나갔다. 이를 보고 사람들은 말했다. "아 싯달타 태자는 이미 목숨을 마쳤구나. 이제 목숨을 다 할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부처님은 그 누구도 행할 수 없는 고행을 하였습니다. 그런 수행을 하면서 부처님은 과거와 미래의 어떤 수행자도 자신과 같은 고행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할 만큼 고행에 몰입하였습니다. 당시 인도의 사람들을 고행을 함으로써 욕망을 억제하고 정신 생활의 향상을 가져올 수 있고, 그런 고행을 한 사람은 신비하고도 초인간적인 힘을 가지게 된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6년에 걸친 극심한 고행을 통해서도 깨달을 수 없었습니다. 육체를 학대하는 것이 진정한 깨달음의 길이 아니라고 생각한 부처님은 고행을 포기하면서 수행자가 피해야 할 두 가지 극단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는 관능이 이끄는 대로 애욕에 탐닉하여 욕망과 쾌락에 빠지는 것으로 이 어리석음은 평범한 사람들이 찬탄하는 것이며 수행자의 숭고한 목적과는 다른 것이고,
두 번째는 자신의 육체를 스스로 괴롭히는 것에 열중하여 고행에 빠지는 것으로 이것은 목적수단이 서로 바뀌어 이것 또한 수행자의 숭고한 목적에 맞지 않으므로 이 두 가지의 극단을 버리고 중도의 길을 찾았던 것입니다.
중도는 양 극단에서 벗어나려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양극단을 적당히 절충하는 것이 아니라 중(中:바를 중)이란 곧 바름이다라고 하였듯이 중도란 정도(正道)의 다른 말인 것입니다. 쾌락과 고행의 가운데가 아니라 진실로 바른 길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고행의 포기는 출가 수행자들이 가지고 있던 사상이나 관습까지 버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동시에 다른 수행자들로부터의 비난을 감수해야 하는 결정이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과 함께 수행하던 다섯 사람은 부처님이 타락하였다고 비난하며 떠나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아무 주저 없이 고행을 포기했습니다. 이것은 깨달음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그 어떤 것이라도 매달릴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부귀와 영화가 보장된 가정을 떠났으며, 행복과 안락이 보장 된 가정을 떠났으며, 모두가 믿는 당시의 사상을 포기했습니다. 이러한 부처님의 모습은 세상 전부가 외면하더라고 참된 것이라면 주저 없이 결단을 내리는 참된 수행자의 모습이었습니다.
수하항마상(樹下降魔相)-마왕을 항복시키다
수행자 싯달타는 고행을 포기한 뒤 수자타가 올리는 우유죽 공양을 받아 기운을 회복하고 목동 스바스티카가 바친 부드럽고 향가로운 풀을 보리수 아래에 깔고 그 위에 앉아서 굳은 다짐을 하였습니다. "내 여기서 위 없는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면 차라리 이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마침내 이 자리에서 일어서지 않으리라"는 말은 ≪ 수행본기경 ≫에 전하고 있는 말로 부처님의 깨달음을 향한 굳은 의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금강석 보다 굳센 의지 때문인지 부처님은 그 자리에서 깨달음을 이루셨고, 깨달으신 그 자리는 훗날 금강보좌(金剛寶座)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싯달타가 선정에 들어 깨달음을 얻으려고 할 때 중생을 욕망에 사로잡히게 하고 세상을 어둡게 만드는 마왕 파순은 다급해 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마왕 파순은 사문 고타마 싯달타가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이루면 일체 중생을 제도할 것이라는 것과 그 깨달음이 자신의 능력을 초월하는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깨닫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깨달음을 방해하기 위해 먼저 자신의 세 딸을 보내 싯달타를 유혹하였으나 싯달타는 수미산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너희들의 몸은 비록 아름답지만 모든 악이 가득해 견고하지 않고 부정이 흘러 생로병사가 항상 따른다. 손에는 팔찌, 귀에는 귀걸이를 흔들면서 교태 섞인 웃음으로 탐욕의 화살을 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그대들의 욕망을 독약으로 안다. 칼날에 발린 꿀은 혀를 상하게 하고 사악한 욕정은 독사의 머리와 같으니 내 이미 모든 유혹을 뛰어 넘었다. 너희들은 모두 본래의 모습을 드러내고 물러가거라.』라고 고타마 싯달타가 말하자 마왕의 세 딸들은 모두 추한 노파로 변해 탄식하며 물러갔습니다. 그러자 마왕은 화가 나서 수행자 싯달타를 향해서 태풍, 폭우를 보내고 창칼, 불화살, 돌을 던지며 악귀를 동원하여 수행을 방해하였지만, 그것들은 부처님 앞에서는 꽃으로 변할 뿐이었습니다.
유혹과 폭력으로도 수행을 막지 못했던 마왕은 직접 싯달타 앞에 나타나 전륜성왕의 지위가 보장되어 있으니 세간을 다스리는 왕이 되어 오감의 쾌락이 주는 미묘한 맛을 마음껏 즐기며, 싯달타가 추구하는 깨달음은 얻을 수 없고 피로만이 더 할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마왕이 말하자 수행자 싯달타는 마왕을 향해
『게으른 자의 무리여, 사악한 자여,
그대가 여기 온 목적은 무엇인가?
그대가 말하는 그 좋은 공덕이란
그것이 아무리 좋다 하더라도
나에게는 더 이상 쓸모가 없다.
그런것은 그런 것을 구하는
사람들에게 가서 말해 주어라.
……………
나는 이렇게 극심한 고통을 묵묵히 감수하고 있다.
그러므로 내 마음은 어떤 욕망에도 끌려가지 않는다.
보라, 내 존재의 이 순수를.
그대의 제1 군대는 욕망이며
제2군대는 혐오이며
제3군대는 기갈이며
제4군대는 집착이다.
그리고 기대의 제5군대는 피로와 수면이며
제6군대는 공포심이요
제7군대는 의혹이며
제8군대는 위선과 고집,
그리고 그릇된 방법으로 얻은 이익과 명성이며
자신을 칭찬하고 남을 경멸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대의 전 병력이며 검은 마군이다.
그러므로 용감한 자가 아니면 너를 이겨낼 수 없으리
그러나 용감한 사람은 그대의 공격을 이렇게 잘 막아 내고 있다.
………………
악마여, 사람들도 저 신들마저도
그대의 군대를 격파할 수 없지만
그러나 나는 지혜의 힘으로
그대의 군대를 쳐부수리라.
굽지 않은 질 그릇을 돌로 쳐 깨뜨리듯이』
≪숫타니파타≫
또한 부처님은 머나먼 과거세월부터 한량없는 세월 동안 선근공덕을 쌓아 왔기 때문에 악마의 군대를 물리치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마왕에게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마왕은 누가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는지 말해보라고 외쳤습니다. 부처님은 오른손을 내밀어 땅을 가리키며 『이 땅은 능히 일체의 물건을 내어 차별이 없이 평등한 행을 하도다. 원컨대 지금 진실을 말하라』라고 하자, 땅을 지키고 있던 땅의 신이 『가장 큰 대장부시여, 내 당신을 증명하리다. 제가 아나이다.』하고 외치자 대지와 삼천대천세계의 국토는 크게 진동하였고, 마왕은 이 우렁찬 소리에 혼비백산하여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수행자 고타마 싯달타는 마왕의 항복을 받았고 아무런 방해 없이 깊은 선정에 들 수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절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신 불상을 보면 왼손은 가부좌한 발 위에 올려 놓고 오른손은 무릎에서 아래로 땅을 향하는 항마촉지인의 모습을 취하고 있는데, 이것은 부처님께서 마왕에게 항복을 받으신 장면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수행에 아무런 장애도 없어지게 되고 깨달음을 가로막던 마왕도 사라진 후 수행자 앞에는 세상의 이치가 확연하게 드러나 보였습니다. 그 이치는 『모든 것이 의지하여 일어나고, 이것이 있기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명하기에 저것도 멸하는 것이다』라는 연기(緣起)의 진리였습니다. 부처님의 깨달음은 바로 연기의 진리였던 것입니다.
수행자 고타마가 마지막까지 버리지 못했던 세간(세상)에 대한 애착을 보여 주는 것이 깨달음을 방해한 악마의 모습입니다. 가장 먼저 끊을 수 있었던 육체의 욕망(색욕,色慾)이며, 이것은 마왕의 세 딸들의 이름이 은애(恩愛), 상락(常樂), 대락(大樂)이라는 것에서 육체적 욕망을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왕의 공격은 제8군대로 표현된 욕망, 혐오, 기갈, 집착 등 온갖 마음 속의 번뇌를 뜻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마왕이 말한 전륜성왕의 자리는 권력에 대한 욕망을 말하며 이것은 색욕이나 공포보다도 더 질기고 뿌리가 깊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권력에 대한 욕망은 한 개인 뿐만 아니라 그의 가정 사회, 국가, 민족, 세계를 파멸로 몰아 가는 제일 무서운 욕망을 말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마왕의 항복을 받은 후에 "세상에선 무기를 써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나 나는 중생을 평등하게 여기는 까닭에 무기를 사용하지 않고 평등한 행과 인자한 마음으로 악마를 물리쳤나니"라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수행본기경≫에 나오는 말입니다.
이 세가지 욕망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육체적, 제도적, 정진적 속박에서 벗어난 것이며, 마왕의 온갖 유혹과 위협에도 그것을 극복하는 것은 불퇴전의 수행자세를 말하는 것입니다.
성도(成道)라는 것은 불도를 완성했다는 뜻으로 수행자 고타마 싯달타가 붓다가야의 보리수 아래서 깨달음을 얻어 부처님이 되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때가 부처님의 나이 35세 되던 해 음력 12월 8일이었고 사실상 불교가 시작된 역사적인 날로 성도절(成道節)이라고 합니다.
녹원전법상(鹿苑轉法相)-진리를 설하시다
초전법륜(初轉法輪)란 것은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루고 나서 처음으로 법의 수레바퀴를 굴렸다는 것으로 녹야원에서 다섯 비구에게 설법하신 것을 말합니다.
부처님은 깨달고 난 후 한동안 보리수 나무 아래 머물며 삼매에 들어 있었습니다. 삼매에 든 부처님은 당신이 깨달은 내용이 매우 심오하고 난해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더라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걱정하며 설하기를 주저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 최고의 신인 범천이 하늘에서 내려와 부처님께 귀의하고 중생을 위해 설하여 주실 것을 세 번이나 간청하였습니다.
그 당시 부처님의 심정을 전하는 ≪상응부경전≫에는
『고생 끝에 겨우 얻은 이것을 또 남들에게 어떻게 설해야 하는가? 오! 탐욕과 노여움에 불타는 사람들에게 이 법을 알리기란 쉽지 않아라』
탐욕에 허덕이는 중생들을 지혜의 길로 이끌기 위해 부처님은 법의 수레바퀴를 굴리기로 결정하고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감로의 문은 열렸다. 귀 있는 자는 들어라. 낡은 믿음을 버려라" 이렇게 결심한 부처님은 자신의 깨달음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으로 알라라 칼라마와 웃다카 라마풋다를 생각하였지만 이미 그들이 세상을 떠난 것을 알고, 전에 설산에서 함께 수행하던 다섯 수행자를 찾아 녹야원으로 갔습니다.
다섯 수행자는 부처님이 고행을 포기하자 타락한 사문이라 비난한 이들이지만, 부처님은 그들을 향해 당신의 깨달음을 전하였습니다. 최초로 설한 것은 중도, 사성제, 팔정도의 가르침이었습니다. 설법과 대화, 토론을 통해 맨 처음으로 교진여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게 되었고 그 나머지 수행자도 모두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는데 이 제자들이 최초의 비구인 것입니다.
초전법륜이 있은 후 부처님께서는 야사를 비롯한 60명의 젊은이들에게 법을 설하여 그들의 제자로 삼았습니다. 이런 사건들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해 들은 사람들은 부처님과 다섯 비구를 아라한(阿羅漢, 존경을 받을 만한 사람)이라 부르게 되었고, 이들은 함께 다니면서 많은 출가 수행자들과 재가신도들을 받아 들이게 되었습니다.
부처님은 이들에게 각 지방으로 가서 진리의 가르침을 전할 것을 권유하면서『비구들이여, 자! 전도를 떠나라.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안락과 행복을 위하여. 세상을 불쌍히 여기고 인천(人天, 하늘과 땅 모든 것들)의 이익과 안락을 위하여, 두 사람이 한 길을 가지 말라. 비구들이여!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으며, 조리와 표현을 갖춘 법(진리)를 설하라. 사람 중에는 마음의 더러움이 적은 이도 있거니와 법을 듣지 못하면 그들도 악에 떨어지고 말리라. 들으면 법을 깨달을 것이 아닌가.비구들이여! 나 또한 법을 설하기 위해 우루벨라로 가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의 전도 선언 입니다.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후에 이타(利他,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의 대승불교가 일어나게 된 근본취지도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이 전도 선언은 불교의 참뜻이 스스로의 해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이익과 행복에 있음을 알리고 있으며, 이러한 적극적인 자세가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의 불교가 자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당시 인도에는 많은 사상가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불교가 그들의 사상을 압도할 수 있었던 것은 가르침 뿐만 아니라 그 가르침을 실천하려는 적극적인 노력으로 그 빛을 발할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깨달음으로 타인과 함께 하려는 노력이 부처님의 전도 선언에서 나타나고 있으며 그들을 떠나 보내기 전에 하신 다음과 같은 당부는 깨달음의 실천적인 자세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수행자들이여, 출가한 사람으로서 법을 펼 때, 남의 존경을 받겠다는 생각을 내서는 안된다. 남을 도울 줄 모르고 법에 의하여 먹고 살려고 하는 자는 '법을 먹는 아귀'와 같은 자다. 또 너희가 전하는 법을 듣고 사람들은 기뻐할 것이다. 그럴 때 너희들은 교만해지기 쉽다. 사람들이 법을 듣고 기뻐하는 것을 보고 자기의 공덕처럼 생각하면 그는 벌써 법을 먹고 사는 아귀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법을 갉아 먹고 사는 아귀가 되지 않도록 항상 겸손해야 한다』.
부처님이 최초의 설법을 하시고 승단이 만들어졌던 당시에 부처님과 제자들은 아무 곳이나 적당한 장소를 발견하면 나무 밑이나 동굴, 계곡 등 바깥에서 기거하였습니다. 안주할 수 있는 집을 갖지 않는 것이 출가 수행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재산을 가진 사람들이 부처님의 교단에 공원 등의 토지와 비와 이슬을 피할 수 있는 집 등을 기증하게 되었습니다.
부처님은 우르벨라로 가서 당시 가장 이름 있는 종교가였던 가섭 삼형제를 교화하여 가섭 삼형제와 그들의 제자 1,000명을 부처님의 제자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왕사성의 종교가를 모두 교화한 이 사건은 국왕과 백성을 모두 놀라게 하였고, 국왕인 빔비사라 왕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들게 되었습니다. 특히 빔비사라 왕은 부처님이 우기(雨期) 동안 머무르시며 가르침을 펴실 수 있는 사원을 기증하였는데 바로 이것이 최초의 사원인 죽림정사입니다.
최초의 우기를 베나레스에서 지낸 후 빔비사라왕이 기증한 죽림정사에서 우기를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라자가하의 유복한 상인이 부처님과 그의 제자들이 기거할 수 있는 승원을 기증하겠다고 부처님의 동의를 구하였습니다. 상인은 단 하루 동안 '죽림공원'에 집을 지었고 그 다음날 부처님과 제자들을 공양에 초대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날 정식으로 집을 승단에 기증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날 상인의 누이 동생의 남편인 수닷타가 일 때문에 라자가하에 왔다가 상인의 집에 들렀습니다. 부처님과 제자들을 모실 준비로 매우 분주한 상인의 집에서는 아무도 수닷타를 맞이 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수닷타가 이에 불만을 품고 있을 때 상인이 부처님과 제자들을 모실 준비의 지시를 끝내고 수닷타에게 다가와 그 이유를 설명하였습니다.
수닷타는 호기심이 생겨 그 다음날 아침 부처님을 만나기 위해 죽림정사를 찾아 갔습니다. 부처님은 밖에서 산책 중이셨는데 수닷타를 보신 부처님은 수닷타의 이름을 친히 부르셨습니다. 이에 감격한 수닷타는 기쁜 마음으로 부처님 발 밑에 엎드려 가르침을 받고 재가신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수닷타는 자신의 마을에서 다음 우기를 보내시라고 청하였습니다.
수닷타는 자신의 마을인 사밧데이로 돌아와 부처님과 제자들이 머무실 수 있는 장소를 찾았습니다. 그 이상적인 장소를 찾았으나 그 장소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은 제다왕자였습니다. 제다 왕자는 자신의 공원에 금화로 융단을 깔아 놓은 것처럼 해 놓으면 공원을 수닷타에게 팔겠다고 하였습니다. 수닷타는 자신의 하인들을 시켜 공원을 금화로 깔았으나 문 가까이에 조그만 공간이 남았습니다. 이에 수닷타는 다시 하인을 시켜 작은 공간에 깔 수 있는 금화를 가져 오게 하였고, 제다 왕자는 자신의 계약 조건이 잘못 되었음을 깨닫고 나머지 토지를 기증하였습니다.
그 후 왕자는 그 곳에 벗꽃 문을 만들게 하였고 수닷타는 부처님과 제자들이 머물 수 있도록 건물과 그 이외의 시설물들을 세웠습니다. 이곳을 젯다바나 승원, 즉 기원정사라고 하였고 그 후에 이곳이 부처님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10대 제자의 한 분인 사리불과 목련건이 제자 250인과 함께 부처님의 제자가 된 것과 마하가섭이 부처님의 제자가 된 것도 이 무렵이었습니다. 왕사성의 죽림정사는 사위성의 기원정사와 함께 전도의 양대 거점이 되었습니다.
부처님은 성도하신지 몇 년 후에 고향인 카필라국에 가서 부왕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을 교화하고 역시 10대 제자의 하나인 아난과 라훌라, 아니룻다, 우바리 등의 제자를 출가시켰습니다.
쌍림열반상(雙林涅槃相)-육신을 버리고 열반에 드시다
부처님은 깨달으신 후부터 입명하실 때까지 45년 동안 중인도 지방을 유랑하면서 사람들에게 법을 설했습니다. 부처님은 수행자와 재가자, 귀족과 평민, 노예를 차별하지 않고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대하셨습니다. 진리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하고 깨달음에는 가난하거나 부자거나 귀하거나 천하거나 하는 빈부귀천이 없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수레바퀴를 굴리신 지 45년 부처님께서는 항상 중생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러나 80세가 되신 해에 아난존자에게 "나는 이미 모든 법을 설했고 비밀은 없으며 이제 가죽 끈에 매어 간신히 움직이고 있는 낡은 수레와 같다. 너희들은 다른 것에 의지하지 말고 자신을 의지처로 삼고, 법을 등불로 삼아 정진하라."고 이르셨습니다. 이것이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의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생애 마지막 전법을 길을 떠나 쿠시나가라의 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에 드셨습니다. 부처님은 열반에 드시기 전 제자들에게 의심 나는 것이 있는가를 세 번이나 물으신 후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당부를 하셨습니다.
"모든 것이 변하니 부지런히 정진하라"
길에서 나서 길에서 살다 길에서 가시니 이 날이 음력 2월 15일 열반절(涅槃節)입니다. 열반이란 산스크리트어 니르바나(Nirvana)에서 온 말로 '불어 끈다'는 뜻입니다. 욕망과 번뇌의 불을 끄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제자 중 지혜 제일이라 불리는 사리불은 열반이란 탐욕과 성냄, 그리고 어리석음을 영원히 없애 모든 번뇌를 소멸시킨 것이며, 열반에 이르는 방법은 바로 팔정도(八正道)라고 하였습니다.
부처님은 깨달음을 이루신 그 순간부터 열반에 드신 것이지만 중생을 위해 그 깨달음을 설하고 가신 것입니다. 세상의 인연으로 생긴 것은 반드시 소멸하는 데 부처님은 이 무상(無常)의 진리를 스스로 따르셨습니다. 원래 부처님은 업(業)의 굴레에 매인 몸이 아니었습니다.
깨달으신 부처님은 영원히 태어난다거나 죽은 일은 없습니다. 부처님은 『나의 육신은 설사 죽더라도 제자들이 법과 계율을 잘 지키고 행하면 나의 법신(法身)은 영원히 상주하여 멸하지 않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결국 부처님의 생애는 누구든지 부처님의 말씀대로 믿고 행(行)하면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을 몸소 보이신 길입니다. 이는 모든 중생이 지닌 불성으로 가능하며 열반은 그 최고의 경지를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깨달음}
연기법(緣起法)은 내가 만든 것도 아니며 다른 사람이 만든 것도 아니다.
연기법은 여래(如來)가 출현하든지 안하든지 항상 존재하는 법칙이다. 여래는 이 법칙을 깨달아 해탈을 성취했고, 중생을 위해 여러 가지 법문으로 분별하여 설하였느니라.
《잡아함경(雜阿含經)》
연기-불교의 세계관
일구월심 사유하던 성자에게
모든 존재가 밝혀진 그 날
그의 의혹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연기의 도리를 깨달았으므로 ≪자설경≫
싯달타 수행자는 진리를 깨달아 부처님이 되었습니다. 그 깨달은 진리가 바로 연기(緣起)입니다. 연기란 모든 것은 원인이 있으며 원인으로 생겨나고 원인이 사라지면 소멸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것을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此有故彼有)
이것이 태어남으로 저것이 태어난다 (此生故彼生)
이것이 없기 때문에 저것이 없고 (此無故彼無)
이것이 사라짐으로 저것이 사라진다 (此滅故彼滅)
연기는 인과법, 인연법, 인생연멸의 법칙이라고도 불립니다. 부처님은 이 연기의 법칙이 당신이 만든 것도 아니며,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든 나오지 않든 간에 진리로서 변함없는 것으로 당신은 다만 이 진리를 깨달았을 뿐이라고 하셨습니다. 연기의 법은 세계와 인간에 대한 불변의 진리라는 것을 강조하고 계신 것입니다.
아함의 경전에는 『연기를 보는 자 법을 보고, 법을 보는 자는 연기를 본다. 그리고 연기를 보는 자는 부처님을 본다』고 하였는데 부처님은 연기를 법이나 부처님과 동일하게 간주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모든 존재는 원인에 의해 생겨나고 원인에 의해 사라질 때 소멸하며, 세상 모든 것은 변하여 영원한 것이 없으니 부지런히 정진하여 이 연기의 이치를 깨쳐야 합니다.
삼법인(三法印)-존재의 실상
우주 만유를 관통하는 법칙이 연기라고 한다면 존재의 실상을 나타내는 것이 바로 삼법인(三法印)입니다.
삼법인(三法印)이란 세 가지 진실한 가르침이란 뜻으로, 도장 인(印)자를 쓴 것은 도장이 언제 어디서나 같듯이 부처님의 가르침도 언제 어디서나 같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삼법인은 불교의 인감도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삼법인은
모든 것이 변한다는 제행무상(諸行無常),
모든 변하는 것에는 자아라는 실체가 없다는 제법무아(諸法無我),
모든 변하는 것은 괴로움을 낳는다는 일체개고(一切皆苦) 세 가지를 말하며,
일체개고 대신
모든 괴로움을 없앤 열반적정(涅槃寂靜)을 넣기도 하는데 이 네 가지를 모두 합해 사법인(四法印)이라고도 합니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은 세상의 모든 것이 변한다는 뜻입니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 볼 때 드러나는 존재의 속성은 바로 모든 것이 변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천년, 만년 살 것처럼 생각합니다. 권력과 명예, 재산도 언제나 있을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위에서 죽음을 경험하거나 권력을 가진 사람과 재산이 많은 사람의 몰락을 경험하면서 모든 것이 변한다는 평범한 진리 앞에 설 때 겸허하게 마음을 비우게 됩니다. 그리고 차분히 모든 사물을 살피면 지금까지 자신을 유지해 온 생각이 헛된 욕망에 사로잡힌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잘못된 생각이 바로 전도몽상(顚倒夢想)입니다. 사물이 무상(無常)하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영원한 것으로만 보는 생각들을 버릴 때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고, 그 속에서 바르게 사는 길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제법무아(諸法無我)는 모든 변하는 것에 자아의 실체(實體)가 없다는 무아(無我)의 가르침입니다. 모든 것은 항상 변하며 이것은 그 조건에 의한 것입니다. 즉 인연에 따라 생긴 것은 인연이 다하면 흩어지기 때문에 고정불변하는 것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무아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자기 중심적인 사고와 아집이 허망한 것임을 가르칩니다. 자신을 포함한 어떤 존재도 영원한 것이 없기에 생각과 사물 역시 그러합니다. 아집과 소유욕을 없애면 인연으로 형성된 존재의 실상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과 사물이 어우러져 더불어 살아가는 삼라만상의 세계를 깨닫게 되면 인류의 화합과 평화가 앞당겨질 수 있을 것입니다.
일체개고(一切皆苦)는 모든 변하는 것이 괴로움이라는 가르침입니다. 즉 무상(無常)하기 때문에 고(苦)라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희로애락(喜怒愛樂)이 있어 괴로움만이 있는 것이 아닌데 왜 고통(苦)이라고 하는가? 그것은 기쁨과 즐거움은 일시적인 것임에도 여기에 집착하여 고통을 낳는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변하여 고정불변하는 실체가 없습니다. 기쁨과 즐거움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언제나 자기 중심적인 습성에 길들여져 있어서 기쁨과 즐거움을 지속하려고 별별수단을 다 부리지만, 그런 것은 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인간이 이루지 못하는 이러한 욕망을 아시고 일체가 괴로움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때문에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불자가 욕망의 불을 끄고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되면 모든 고통은 사라지고 마음의 평안을 구할 수 있습니다.
열반적정(涅槃寂靜)입니다. 열반은 진리의 구현입니다. 무상과 무아의 진리를 완전히 구현하여 모든 번뇌와 고통의 불을 끈 상태가 바로 열반인 것입니다. 열반은 모든 번뇌와 욕망, 대립과 고통이 사라진 고요한 평화의 상태입니다.
불자들은 삼법인의 가르침을 자신의 생활 속에서 구현하여 최상의 평화와 자유인 열반을 향해 부지런히 정진해야 할 것입니다.
사성제와 팔정도-괴로움의 해방
연기와 삼법인을 통해 세상의 본래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다면 더 나아가 현실의 고통에서 벗어나 진리를 구현하는 수행의 길을 가르쳐 주는 길이 바로 사성제입니다. 사성제는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라는 뜻으로 부처님이 녹야원에서 다섯 비구에서 행한 최최의 설법입니다. 사성제는 부처님께서 듣는 사람이 이해하기 쉽도록 연기의 진리를 현실에 맞게 응용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네 가지 진리가 있다. 무엇을 네 가지라 말하는가? 이른바 괴로움의 진리, 괴로움이 일어나는 원인에 대한 진리,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진리,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한 진리이다. ≪잡아함경≫
사성제란 괴로움(苦)과 괴로움의 원인(集)과 괴로움의 소멸(滅)과 소멸방법(道)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이를 줄여 고․집․멸․도의 사성제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네 가지는 서로 서로 원인과 결과를 이루며 현실세계와 이상세계의 대비를 이루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인간은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고통 속에 있습니다. 인간의 현실은 이 네 가지 고통 이외에도 여러 고통이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과 모든 존재의 현실입니다.
고통이 일어나는 원인은 집착에서 비롯됩니다. 무상한 세계에서 영원한 것을 찾고 자기 것이 본래 없는데도 헛되이 집착함으로 말미암아 고통을 낳는 것입니다. 이를 설명한 것이 집성제입니다.
이 세상에 고통이 있다면 고통 없는 세계도 있고 거기에 이르는 길도 있을 것입니다. 고통이 사라진 해탈, 열반의 세계가 있음을 가르치는 것이 바로 멸성제 입니다.
해탈, 열반에 이르는 길은 무엇인가? 여덟 가지 길이 있으니 바로 도성제인 팔정도(八正道)입니다. 팔정도란 "여덟 가지 바른 수행의 길"이란 뜻입니다.
정견(正見)은 바른 견해로 편견 없이 있는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이를 여실지견(如實知見)이라고 부릅니다. 먼저 바로 보는 것이 바른 삶의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정사유(正思惟)는 바른 생각으로, 바른 견해를 가짐으로 하여 바른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고 이치에 맞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정어(正語)는 바른 말입니다. 말은 자기의 생각과 의견을 표현하는 수단입니다. 거짓말,남을 이간 시키는 말이나 욕과 비방하는 말은 그 사람의 비뚤어진 생각과 시각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항상 바른 생각과 말을 하여 구업(口業, 입으로 짓는 업)을 짓지 말고 상대방을 존중하는 부드러운 말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정업(正業)은 바른 행동입니다. 일체의 모든 행동을 바르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른 생각과 바른 말에서 더 나아가 이치에 맞는 행동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명(正命)은 바른 생활입니다. 옳은 일에 종사하고 몸과 마음과 말, 즉 신구의(身口意) 삼업을 청정히 하면서 바로 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바른 직업관을 가지고 자신의 일에 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정진(正精進)은 깨달음을 향한 부단한 노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옳은 일에는 물러섬 없이 밀고 나가는 정열과 용기를 뜻하기도 합니다.
정념(正念)은 바른 생각을 말합니다. 몸과 말과 뜻이 바르면 생각이 바로 서는 것은 바로 그 이치입니다.
정정(正定)은 바른 수행입니다. 번뇌, 망상에서 바른 견해나 행동이 나올 수 없습니다. 마음과 몸을 편안하게 하고 바른 수행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성제와 팔정도는 고통의 세계를 벗어나는 방법을 제시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참된 불자라면 항상 이것을 생각하고 잘 익혀 생활에서 실천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업과 인과-불자의 가치관
부처님 당시에는 많은 사상가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여섯 명의 외도가 유명합니다. 이들은 대개 운명론을 주장하거나 쾌락과 향락을 쫓아 마음대로 살라고 가르쳤습니다. 부처님은 이 주장을 비판하시고 이들의 가르침이 초래할 윤리적 폐해를 경계하셨습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인과의 법칙은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결과가 따른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어떤 행위도 반드시 결과를 낳습니다. 착한 일을 하면 좋은 결과가 따르고, 악한 일을 하면 나쁜 결과가 나타납니다. 이를 "선인선과(善人善果) 악인악과(惡人惡果)"의 인과응보(因果應報)라고 합니다.
또한 그 결과를 낳는 근원적인 행동을 업(業)이라고 합니다. 업은 산스크리트어 까르마(karma)에서 나온 말로 "의도를 가진 행동"을 말합니다. 부처님은 절대자의 섭리나 정해진 운명을 부정하고, 모든 것은 인간의 의지와 행동에 따라 성립한다고 설하셨습니다. 즉 스스로의 의지나 행동으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할 수 있으며, 삶의 모든 결과는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의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주어진 것처럼 보이는 출생계급이나 삶의 조건도 사실은 모두 자신의 업에 의한 과보인 것입니다. 만일 악한 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가 당장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도 언젠가는 그 악업의 과보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 사람의 지금 모습을 보면 전생을 알 수 있고, 그 사람의 현재 행동을 보면 내세를 알 수 있다고 ≪삼세인과경≫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고통스러운 과보를 초래하는 악업의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미혹(迷惑)입니다. 번뇌에 물들어 진리에 어둡고 마음이 흐려져 악업을 짓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과보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혹(惑)-업(業)-고(苦)의 삼도(三道)라고 부릅니다. 반대로 진리와 깨달음을 지향하는 마음은 선업을 낳고 그 결과 선한 과보를 받게 됩니다. '진리와 깨달음을 지향하는 마음'을 보리심(菩提心)이라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업은 어쩔 수 없이 받게 된다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자신의 주체적인 의지와 행동으로 삶을 변화시켜 나가는 긍정적인 지향과 원리를 담고 있습니다. 수행의 길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생이나 과거에 길들여진 나쁜 습성과 잘못된 행동을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진정으로 참회하고 바르게 수행하면 깨달음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몸과 말과 뜻으로 짓는 업의 과보는 엄청난 것이어서 한치의 오차도 없습니다. 이것을 인과율(因果律)이라고 합니다. 악업을 많이 지을수록 삶은 구속되고 고통스러워집니다. 그러나 선업을 쌓을수록 인생은 자유로우며 깨달음으로 나아갈 때 장애가 없어집니다. 즉, 자신을 구속하는 것도, 자신을 자유스럽게 하는 것도 모두 자기 자신입니다. 악행을 멀리하고 선행을 닦으며 또한 수행에 정진함으로써 중생의 마음 자리에서 벗어나 깨달음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불교의 역사}
근본 교리라고 하는 것은 원시불교의 교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원시불교는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부터 불교가 20부파로 분열하기 시작할 때까지의 불교를 말합니다. 불교의 초기에 교리가 아직 다양하게 전개, 정리되지 않았던 때의 불교를 말하는 것으로 아쇼카왕 시대까지의 불교를 말하며, 초기불교라고도 합니다.
불교는 근본불교시대를 지나 소승, 대승으로 나뉘어지고 이것이 중국으로 전해졌으며 우리 나라에도 고구려 소수림왕 때 공식적으로 불교가 들어와 우리 민족만의 불교역사를 전개하게 되었습니다
원시불교(原始佛敎)
맨 처음 시작된 불교라는 뜻에서 원시불교라고도 하고 근본불교 또는 초기불교라고도 합니다.
시기적으로 보면 원시불교는 부처님의 생존시로부터 입멸 후 100년 내지 200년까지의 기간에 해당됩니다. 부처님이 교화활동에 전념한 약 50년을 포함하면 150년 내지 250년 동안 지속되었던 불교를 가리키며, 통상 아쇼카왕시대까지를 가리킵니다. 교단적으로 보면 교단내에 확연한 분열이 없고 부처님에 대한 생생한 기억이 어느 정도 남아 있는 기간입니다. 이 시기를 근본불교와 좁은 의미의 원시불교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이 때 근본불교는 부처님 자신과 그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의 불교를 가리키며, 이후의 불교를 좁은 의미의 원시불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넓은 의미로서 통상 원시불교라 할 때는 이 둘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의 불교교단은 후대와 같은 분파와 분열이 없이 아직 통일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이 시대에 가장 중요한 일은 불교교설의 골격이라고 할 수 있는 삼장 중에서 경장(經藏)과 율장(律藏)의 원형이 성립되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현재 전해지고 있는 경전과 율장 그대로가 이 시대의 것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이 시대의 경장과 율장은 현존하지 않고, 현존하는 것들은 각 부파에 의해 개별적으로 전해진 것입니다. 그러나 현존하는 남방불교의 빨리어 문헌이나 중국에서 한역된 것들을 비교하여 공통된 것들을 추출함으로써 이 당시의 교리나 실천내용을 고찰할 수 있습니다.
이 원시불교의 특징은 불가사의 하거나 초자연적인 신앙을 배제하고, 현실을 직시하고 실천함으로써 현실의 여러 문제를 해결하려는 현실해결주의를 기본입장으로 하였다는 점입니다. 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지적인 측면에서는 합리성과 객관성, 정의적으로는 윤리성과 인간성, 대사회적으로는 세계성과 보편성, 개방성을 추구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입장은 원시불교의 기본 교리를 통해서 여실히 알 수 있습니다.
원시불교의 기본교리란 바로 불교의 기본교리이기도 한데 그 내용은 연기와 중도, 삼법인 또는 사법인, 사성제와 팔정도, 십이인연 등이며 또 비구와 비구니에 대해 각각 정한 계율의 규정입니다. 그러나 현재 전해지고 있는 경전들 속에 있는 이러한 교리에 대한 설명이 원시불교의 본래 입장을 그로 반영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현존하는 경전들은 부파불교의 출가자 중심주의의 입장에서 교리를 해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불설의 거의 그대로 받들고 교단의 결속도 단단하여 점차 교세를 넓혀 중인도 일대에서 활약하게 되었으나 그 가운데서 보수와 진보의 두 파가 갈려 불교의 다음 시대인 부파불교 시대로 옮겨가게 되었습니다.
소승불교
소승불교를 부파불교 혹은 아비달마 불교라고 합니다. 승(乘)은 싣고 운반한다는 뜻으로 소승이란 일체 중생이 모두 부처가 되기에는 너무 작고 보잘 것 없는 수레라는 뜻으로 대승과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소승은 아라한과 벽지불을 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부처님은 깨달으시고 난 후 45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미혹함에 빠져 있는 중생들을 위하여 깨달음의 길을 열어 보이셨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이 열어 보이신 많은 내용의 교설들은 부처님 당시에는 문자나 글로 옮겨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후 부처님의 말씀을 일정한 형태로 만들어 후대에 전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당시에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글(문자)로 적어 놓는다는 것이 아니라 말을 통하여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마하가섭은 500인의 아라한을 마가다국의 왕사성에 소집하여 부처님의 교법과 계율을 수집하여 편성하였는데 이것을 제1 결집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하여 결집된 경과 율은 화합된 교단에 의해 잘 지켜지고 있었으나 약 100년쯤 지나서는 부처님의 가르침과 수용에 대해 다른 견해를 가진 비구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급격한 사회의 변화는 종래의 엄격한 계율에 의해 생활하는 수행자의 생활을 어렵게 만들었고, 불교의 사상 또한 새로운 사회에 적응할 필요성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불교교단 내에서도 진보파와 보수파의 대립이 심화되었으며, 보수적인 장로(長老, thera)들은 제 2결집을 행하여 진보적인 사상을 배격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불교교단은 보수적인 상좌부와 진보적인 대승부로 나누어지게 되었습니다.
그 뒤 대중부에서는 다시 8파로 나누어 지고, 상좌부에서도 11파로 나뉘어져 B.C 1세기 경에는 20부파가 생겨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시대를 부파불교(部派佛敎, 불멸 후100여년~B.C 1세기 경)라고 말하고 그 이전을 원시불교 시대라고 합니다.
아비달마 교학은 부파불교 시대에 있어서 각 부파는 불교의 법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에 착수하게 되었는데, 이것을 아비달마(阿毘達磨, abhidarma) 교학이라고 하는 것이며, 법(法, dharma)에 대한(abhi-) 연구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연구는 부처님이 살아 계신 당시에도 부분적으로 행하여 지고 있었지만, 각 부파의 성립으로 이러한 연구는 더욱 특색 있게 되었습니다. 각 부파는 자신들의 연구한 결과를 결집하여 간직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것을 아비달마 문헌 또는 논(論)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모든 부파는 자신들만의 독특한 아비달마 문헌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들의 경전은 예전부터 있었던 경(經)과 율(律)에 논(論)이 하나 더 보태어져 삼장(三藏)이 성립되기에 이른 것입니다. 이런 삼장의 완성은 부파불교 시대에 가장 큰 업적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 많았던 부파 불교의 삼장은 거의 사라지고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와 남방(南方) 상좌부(上座部)의 것만 전하고 있습니다. 이 중에서 상좌부의 삼장은 팔리어로 기록되어 이것을 파리삼장(巴利三藏)이라고 하고, 설일체유부의 삼장은 현재 범어로 된원래의 경전은 없고 한역(漢譯)으로 된 것만 남아 있습니다.
대승불교(大乘佛敎)-대승/대승불교의 성립/대승불교의 특징
부처님이 설하신 내용을 담은 것이 근본교설 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후 부처님의 말씀을 풀이 하는데 있어서 다른 의견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현상을 막기 위하여 부처님의 말씀을 정리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으며, 결집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이 때의 결집에서는 경과 율이 정리되었다고 합니다.
이 결집에서 중요한 것은 아직 부처님의 교설이 문자화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함(阿含)의 교설이라고 합니다. 불교교단은 부처님의 열반에 드신 후 100년간은 다 함께 화합하여 아무런 동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100년쯤(B.C 4세기) 되어서는 계율과 교리에 대하여 다른 견해가 생겨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발생한 것이 상좌부와 진보적인 대중부로의 분열입니다. 이것을 근본 이부(根本二部)의 분열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분열이 일어나자 다시 새로운 분열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B.C 1세기 경에는 총 20부파가 형성되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대를 부파불교의 시대라고 부르고, 그 이전의 시대를 원시불교 시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부파불교 시대의 각 부파는 아함(부처님의 근본 교설)의 교법에 대하여 전문적인 연구를 행하였습니다. 부처님은 사람들의 근기(根器: 사람들 각자가 가진 성품에 따라 법을 받아 들이는 것이 다르다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어떤 것을 이해할 때도 개인에 따라 그 차이가 나타남을 말하는 것입니다.)를 살펴 보아 그에게 알맞은 설법을 하였기 때문에 그 근기가 다른 사람들이 보았을 때는 많은 단편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부처님의 법을 체계화 해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이러한 생각을 말해 주는 것이 아비달마 교학이었습니다.
부파불교의 이러한 아비달마 교학은 부처님의 근본 교설(아함)을 체계화 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부처님의 교설을 아함에 한정시키고 어려운 해석으로 부처님이 설하신 법을 더욱 이해하기 어렵고 무의미한 불교로 만들어 갔습니다,
부파불교에서는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을 무위열반에 있는 것으로 이해하였고, 이상적인 인간상은 그러한 열반을 얻는 아라한(阿羅漢)으로 인식하였습니다. 이러한 부파불교의 인간상과 수행상은 전문적으로 수행을 하는 출가한 승려들이 아니고서는 제대로 행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또한 출가한 승려들로부터의 구원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재가 신도들은 부처님의 유골을 모신 불탑(佛塔)을 중심으로 모여 부처님에 대한 동경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출가자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본으로 하여 교단을 지켜 온 것과는 반대로, 불탑을 지켜온 재가 신도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의 내용보다도 과거에 생존해 있던 부처님에 대한 동경이 바로 신앙의 원천이 되었을 것으로 많은 학자들은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동경이나 찬양이 부처님을 점차 초인화 하고 신격화 하면서 새로운 종교 운동이 일어 났는데 이것이 바로 대승불교인 것입니다.
부파불교가 어려운 수행과 이해하기 어려운 교리로 대중으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을 때 다른 한편에서는 부처님이 말씀하신 진정한 뜻을 찾으려는 움직임이 일어 나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대승불교운동이라고 하는데, 재가신도의 적극적인 참여와 진보적인 출가인들이 그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열반을 추구하는 아라한의 길을 '소승불교(小乘佛敎)'라고 비판하고, 깨달음을 추구하면서 중생을 제도하는 자리이타(自利利他, 자신만을 위하여 수행을 하는 것은 자리(自利)이고, 다른 사람의 이익을 위하여 행동하는 것을 이타(利他)라고 합니다. 이것은 자신만이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남도 함께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게 하는 것이며, 자리이타를 완전하고 원만하게 수행한 사람을 부처라고 하는 것입니다.)적인 보살(菩薩, bodhisattva)을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대승불교가 일어나면서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열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불(成佛)에 있게 되는 것이며, 이것이야 말로 석가모니 부처님이 설하신 불교의 진정한 뜻이라고 보았습니다. 이렇게 일어난 대승불교는 일반 재가 신도들을 포함하는 사상으로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받았으며, 중국을 거쳐 우리 나라에 전해진 것도 바로 대승불교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부처님의 이러한 사상을 담은 교설을 편찬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대승경전으로서 B.C 1세기 경부터 이러한 문헌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초기 대승경전으로 중요하게 여겨졌던 것들은 반야경, 법화경, 십지경, 무량수경, 유마경 등 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결집이 누구에 의해 이루어 졌는지는 확실하게 알 수 없는데 대승경전의 결집에 대한 문헌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승(大乘)
대승은 범어 마하야나(mahayana)의 번역으로 마하연나(摩訶衍那), 마하연(摩訶衍)이라고 음역하며, 상연(上衍), 상승(上乘)이라고도 합니다. 승(乘)은 타는 것이란 뜻으로 미혹의 차안(此岸)으로부터 깨달음의 피안(彼岸)에 이르는 교법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대승이란 '큰 수레'라는 뜻으로 수레라는 말은 교리를 비유한 것이라고 합니다.
대승불교의 성립
부처님이 열반하신 지 약 100년(혹은 200년) 후 불교교단은 시대 상황과 사회상의 변화에 따라 계율과 교리의 이해와 실천을 두고 처음으로 분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러한 분열은 시간이 흐를수록 계속되어 20여 개 이상의 교단으로 분열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부파불교였습니다.
처음에는 시대적 상황과 사회적 환경의 변화에 따른 계율과 교리의 해석과 그 실천의 견해 차이로 분열된 각 부파들은 결과적으로 자신이 속해 있는 자파(自派)의 당위성과 우월성을 내세우고 확립하기 위해 나름대로 교리에 대한 해석과 철학적 체계를 세워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긍정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불교 교리의 체계적인 정리와 사상적 논리를 발전시킨 면도 있으나, 반대로 불교를 철학화 시키고 형이상학화 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이는 결국 불교의 종교적인 측면에 있어서 대중에게 쉽게 접근하고 대중들을 신앙적으로 이끌어 가는 대중의 종교가 아닌 하나의 전문화 된 불교로 만들어 세상과 단절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승려 자신들도 철저한 계율관에 입각하여 지계(持戒)를 통한 개인의 해탈만을 위하여 산야(山野)에 은둔하여 수행함으로써 대중의 구원을 외면하고 종교적인 사회적 실천을 외면하였습니다. 그래서 일반 재가불자와 일부 진보적인 승려들의 분열된 교단에 대한 불만과 외면은 점점 확산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일반 재가불자와 일부 진보적인 승려들이 분열된 교단에 대해 품은 불만은 결과적으로 부파불교의 폐단을 치유하고 부처님이 살아 계신 당시처럼 불교를 대중들에게 다가가게 하는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 대승의 운동은 부처님이 살아 계신 당시로 돌아가서 불교를 대중들에게 쉽게 전하고, 중생구원을 적극적으로 실천하고자 하는 운동으로 발전하였는데 이것은 대승불교를 성립시킨 운동이었던 것입니다.
대승불교의 특징
대승불교는 부파불교의 전문화된 학문으로부터 실천적인 신앙으로 돌아 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대승불교는 하나의 운동으로 출발하였기 때문에, 교단으로서 독자적인 율장도 없고 그 모습도 명확하지 않습니다.
대승불교는 불탑을 중심으로 모여 부처님의 덕을 찬양하고 안심입명(安心立命)하기를 염원했던 재가 신도들을 그 모체로 하고, 그들에게 부처님의 생애를 이야기해 주었던 법사의 일부를 지도자로 하여 일어났던 것이라고 합니다.
그 운동의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던 법사들은 새로운 경전을 만들게 되었는데, 이 초기의 대승경전을 통하여 대승불교의 성격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초기의 대승경전은 불탑의 숭배를 설하고, 부처님 앞에서 참회하고 예배하기를 권하며, 보시 등의 이타행(남을 이롭게 하는 행동)을 설하고 있습니다.
대승불교의 특징은 몇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자리(自利)와 이타(利他)를 함께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전의 부파불교는 타인의 구제보다 자기 자신의 구제에 더욱 관심을 가졌던데 반하여 대승불교는 타인을 위한 행동이 바로 자신을 위한 수행의 완성이 된다는 교리를 위주로 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재가와 출가를 함께하고 있습니다. 부파불교가 출가주의의 불교인데 반하여 대승불교는 재가자를 배제하지 않고 재가와 출가자 사이의 구별을 두고 있지 않습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대승이라고 한 것입니다. 승(乘)이란 '실어 나른다'라는 것을 뜻하고, 대승이란 크다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대승과 비교하여 소승은 출가하여 엄격한 수행을 하지 않으면 해탈을 얻을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어 재가를 배제하였으므로 소승이라고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출가한 사람과 재가에 관계없이 이상적인 인간상을 추구하게 되는데, 이상적인 인간상이 보살인 것입니다.
셋째 믿음(信)과 실천(行)을 주요하게 여기는 것이 바로 대승불교 입니다. 쉬운 길은 이행도(易行道)를 통하여 현명한 사람이든 어리석은 사람이든, 선한 사람이든 악한 사람이든 모두 구제하려는 폭 넓은 입장을 취하고 있으며, 데바닷타의 반역이라고 알려진 사건도 대승불교에서는 데바닷타도 구제를 받을 수 있다는 입장을 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넷째 부처님의 구제력을 중시하여 초인으로서의 부처님에 대한 많은 이론이 생겨났습니다. 이를 불신론(佛身論)이라고 합니다.
다섯째 모든 사람이 보살이 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보살은 부처님에 대한 신앙을 기초로 하여 자기가 보살이라는 신념을 갖는 것입니다. 대승의 보살은 부처님과 똑같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이므로, 이는 누구나가 부처님과 같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보살은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서원과 깨달음의 결과를 중생들에게 돌리는 회향(廻向, 자기가 닦은 선근공덕을 다른 중생이나 또는 자기의 불과에 돌리는 것을 말함)과 자비에 바탕을 둔 실천 덕목인 육바라밀을 중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중국불교(中國佛敎)
불교는 인도에서 탄생하여 동방의 여러 나라로 전파되어 갔습니다. 인도 최초의 통일국가를 이룩한 아쇼카왕은 전쟁에 염증을 느껴 불교에 귀의하고 포교를 위해 많은 사람들을 전세계로 보내 불교의 세계 종교화를 이룩하였습니다. 우리 나라와 중국, 일본을 비롯하여 스리랑카, 태국, 미얀마는 물론 이란과 그리스, 러시아까지도 불교를 전하기 위한 사람들이 파견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특히 중국은 인류 문명의 발생지 가운데 하나로 주변 나라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었는데 불교 사상과 자신의 전통사상과 문화를 융합, 수용하면서 한국과 일본에도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불교가 중국에 처음 전래된 것은 불기 611(서기67)년, 후한시대(後漢時代) 대월지국으로부터 가섭마등과 축법란에 의해 전해졌다고 합니다. 당시 중국인들은 불교의 가르침을 노자, 장자와 같은 성격의 사상으로 이해하였는데 이를 격의불교(格義佛敎)라고 합니다. 격의(格義)란 다른 사상의 개념을 빌어 풀이하는 것으로 반야 또는 공의 진리를 노장사상을 매개로 이해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격의불교는 언어의 장벽으로 불교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에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점차 시간이 흘러 불교경전이 중국어로 번역이 되고 사상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자 점차 독자적인 사상체계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과정들은 대개 경전의 번역과정에서 나왔습니다. 이미 초기부터 안세고, 지루가참과 같은 역경승(경전을 번역하는 스님)들이 있었지만 중국불교의 한 획을 그은 인물이 구마라집(鳩摩羅什, 344-413)이었습니다. 그는 수 많은 대승경전과 율장, 논서를 번역하였는데 그의 번역은 정확성과 문장의 미려함, 그리고 번역 자체가 불교를 강술하는 성격을 띠어 중국불교의 일대 전기를 마련하였습니다. 구마라집에 의해 중국인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올바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으며, 격의불교를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구마라집 이후 경전번역의 가장 큰 성과는 삼장법사 현장(玄獎, 600-664)에 의해 이루어 졌습니다. 그는 17년에 걸친 구법(求法)여행 끝에 인도로부터 범어(梵語)경전 657부를 가지고 돌아와 무려 75부 1,335권의 경전을 번역하였습니다. 그의 번역은 구마라집의 번역과 비교하여 신역(新譯)이라고 합니다.
중국불교의 또 다른 특징은 교상판석(敎相判釋)입니다. 인도에서는 근본불교시대를 거쳐 소승과 대승불교라는 불교의 역사를 거쳐왔습니다. 그러나 중국에 불교가 전래된 시기는 인도에서 대승불교가 흥하던 때였습니다. 그리고 번역을 하는 과정에서 대승경전과 소승경전의 구분 없이 번역이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중국인들은 소승을 비판하는 대승경전 가운데 어느 것을 기준으로 체계를 세워야 하는가에 혼란스러워 했습니다. 또한 천차만별의 중생을 위해 다양하게 설해진 방대한 경전을 일정한 기준에 따라 정리하고 체계화할 필요성이 제기되기도 하였습니다. 중국에서는 각자 판단의 기준에 따라 부처님의 교설을 통일, 정리하여 이해하려는 경향이 일어났는데 이것을 교상판석(敎相判釋)이라고 하고 줄여서 교판(敎判)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기준에 따라 새로운 종지(宗旨, 한 종교 한 종파의 핵심적인 교의나 종취를 말하는 것임)가 성립되고 이것이 발전하여 각각의 종(宗)을 형성하게 되었는데 13개 종파가 생겨나 교판에 따른 종파의 형성으로 중국불교사의 특징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대표적인 종파로는 구마라집의 제자 길장에 의해 확립된 삼론종(三論宗)과 천태 지의에 의한 천태종(天台宗), 현장법사 제자들이 세운 법상종(法相宗), 지엄의 화엄종(華嚴宗) 및 담란의 정토종(淨土宗) 등이 있습니다.
이 가운데 선종(禪宗)은 불교의 가장 중국적인 성립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보리 달마대사를 개조(開祖)로 하여 2조 혜가대사, 3조 승찬대사, 4조 도신대사, 5조 홍인대사로 이어지다가 6조에 와서 남종의 혜능대사와 북종의 신수대사로 나뉘어진 선종은 부처님의 깨달음에 직접 대면하려는 직관직각(直觀直覺)의 방식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선종은 당대의 교학이 문자에 얽매여 있는 현실을 비판하고 참선 수행을 통해 부처님의 깨달음으로 바로 나아가는 접근법을 제시하였습니다. 혜능대사는 이를 가르켜 '가르침 외에 별도로 전한 교의이며 따로 문자를 세우지 않는다.(敎外別傳 不立文字)'고 하였습니다. 문자에 의하지 않고 곧바로 진심(眞心)에 계합하기에 직지인심(直指人心)이라 하였고, 견성성불(見性成佛)을 목표로 하였습니다.
선종의 성립은 중국에서 불교가 이루어 낸 또 하나의 발전이었습니다. 복잡한 교학 연구와 현학으로 인해 부처님의 참 뜻인 성불에서 멀어진 풍토를 일거에 혁신하고 성불을 지향하는 불교, 새로운 불교로 자리매김 한 것입니다. 복잡한 교학 공부를 거치지 않고도 참선을 통해 깨달을 수 있다는 자각은 모든 이들에게 깨달음의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이와 같이 선종은 역동적인 가르침이었습니다.
한국불교
우리 나라에 불교가 처음으로 전해졌다는 공식적인 기록은 고구려 소수림왕(불기 915, 서기 372)이 중국의 전진왕으로부터 불상을 받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 이전에 인도 출신인 가야국의 수로왕비 허씨가 인도로부터 불교를 직접 가져왔다는 학설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소수림왕 이전에 이미 불교가 우리 나라에 뿌리 내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고구려가 받아 들인 시기의 불교는 중국의 격의불교였습니다. 이후 인도의 중관사상을 계승한 삼론종에 대한 연구가 발달하였고 유식학과 중국의 천태종, 열반종이 유입되어 교학의 발전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고구려 말기에는 도교가 성행하고 불교는 정치적 세력 투쟁에 휘말려 제 역할을 하지 못한 채 고구려의 패망을 맞았습니다.
백제는 불기 928년(서기 384) 침류왕 때 동진의 마라난타에 의해 불교가 전래되었습니다. 백제불교의 특징은 율종 중심의 교학에 있는데 그 밖에도 열반종, 삼론종, 성실종 등의 연구도 활발하여 교학에서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특히 백제는 일본에 불교와 선진문물을 전해줌으로써 일본 고대사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신라에는 고구려 묵호자에 의해 불기 961년(서기 417)에 불교가 전래되었으나, 불기 1071년(서기527) 이차돈의 순교로 불교가 승인되었습니다. 신라불교의 고승대덕들은 ≪삼국유사≫ 등의 기록을 통해 그 행적이 전해지는데 원광-안한-자장-보덕-낭지-혜숙-혜공-대안-원효-의상-태현스님 등으로 이어지는 일대 사상가들이 배출되면서 7~8세기에 화려한 황금기를 맞이하였습니다. 원광법사는 삼국통일의 원동력이 된 화랑도에 세속오계를 주어 정신적인 방향을 제시하였습니다. 또한 원효, 의상 스님이 이루어낸 눈부신 교학 연구의 성과와 인재 양상은 중국에 까지 큰 영향을 주었고, 한국불교 발전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신라인들은 특히 삼국 통일을 전후하여 '신라 땅이 바로 불국토'라는 신념으로 가득차게 되었는데 이를 불국토사상(佛國土思想)이라고 하며 호국불교사상이라고도 합니다. 신라인들의 불교를 매개로 한 정신적인 통일과 힘의 결집이 작은 나라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루게 되는 배경이 되었습니다. 신라인들의 이런 사상이 투영된 것으로 용화향도(龍華香徒)라 불렀던 화랑과 불국사, 석굴암, 경주 남산 등의 불교성지가 있습니다. 용화향도(龍華香徒)란 '미래불인 미륵부처님이 오시는 용화세계(龍華世界)를 여는 무리'라는 뜻으로 신라의 땅에 미래불의 국토인 용화세계를 건설하겠다는 신념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신라인들이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낸 문화적 걸작은 불교에 대한 깊은 믿음에서 우러 나온 것이었으며, 그것은 백제와 고구려의 문화적 발전을 포괄한 삼국의 성취였습니다.
삼국시대에 전래된 불교는 각 나라와 지역마다 독특한 특성을 지닌 채 발전하면하면서 우리의 전통 사상과 문화로 깊이 뿌리내렸습니다. 불교는 특유의 사상적 포괄성으로 민속 신앙을 흡수하여 우리 민족의 전통 사상과 문화로 자리 잡았습니다. 특히 원효, 의상, 원광 같은 고승들의 정신적인 역할은 삼국통일의 원동력이 되었고, 교학에 대한 독창적인 연구성과는 불교 뿐만 아니라 한국 사상사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통일신라 말부터 일어나기 시작한 선종의 흐름을 계승하여 신라 말에 개산한 일곱 산과 고려 초의 두 산을 합쳐 구산선문(九山禪門)이 된 것은 고려 초의 일입니다. 고려시대에 선종의 구산(九山)과 교종의 다섯 가르침을 합하여 오교구산(五敎九山)이 성립된 것입니다. 오교구산이란 5개의 교학과 9개의 선종 종파를 말하는 것으로 선종과 교종이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다양한 모습을 띤 것은 신라가 망해가던 시기에 각 지역의 호족세력의 출현과도 연관이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호족의 실력자들은 자신의 세력을 도모하기 위하여 불교의 정신적인 지도자들을 모셨기 때문입니다.
고려시대 불교는 삼국시대에 이어 국교(國敎)의 지위를 확립하여 국가적인 지원 아래 막대한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최고의 경전으로 받드는 고려대장경을 조판하였고 세계 최고의 인쇄술을 발전시키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도선국사의 영향으로 전국 방방곡곡에 사찰과 탑이 세워졌습니다. 당시에는 건축술도 뛰어나 우리 나라 최고의 목조건축물로 꼽히는 봉정사 극락전과 부석사 무량수전도 이 때에 지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이와 함께 불화(佛畵)가 발전하여 세계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되는 많은 작품을 남기고 있습니다.
고려시대 불교는 정치와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국왕들은 대대로 당대의 고승(高僧)을 국사(國師)로 모셔 정신적인 지도를 받았습니다. 왕실의 후원으로 사찰이 방대한 토지를 소유하게 되고, 스님들이 높은 권세를 누리게 되어 그 폐단도 적지 않았습니다. 뜻 있는 스님들 사이에 권세를 멀리하고 수행자의 본분으로 돌아 가자는 운동이 일어났는데 보조스님의 정혜결사, 요세스님의 백련결사가 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 불교는 숭유배불정책으로 인해 억압과 수난을 당했습니다. 조선은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정하고 불교사상의 영향력을 의도적으로 비하하였습니다. 고려시대 큰 규모로 성장하였던 사찰의 토지를 몰수하고 스님들을 백정과 같은 팔천민의 하나로 신분을 낮추었으며, 서울 도성 출입을 금지시켰습니다. 뿐만 아니라 셀 수 없이 많았던 사찰을 몇 십 개만 남기고 강제로 폐찰하였으며, 각기 특성을 지니고 성장하던 각 종파(宗派)도 선종과 교종의 양종으로 통합하는 등 불교를 탄압하였습니다.
그러나 불교는 혹독한 배불정책에도 불구하고 산중으로 깊이 들어가 명맥을 이어 나갔습니다. 유교가 정치적인 지배권을 행사하였지만, 왕족과 양반가의 부녀자들은 대대로 믿어 온 불교를 배척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태조와 세종, 세조, 정조 등은 매우 독실한 불교신자였으며 직접 간접적으로 불교의 발전에 기여하였습니다. 세종은 훈민정음을 창시하면서 한문으로 된 불교경전을 백성들이 쉽게 알 수 있도록 한글로 번역하게 하기도 했습니다.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 때에는 서산, 사명대사가 구국을 위해 승병을 조직하고 전쟁에 나아가 큰 공을 세우기도 하였습니다. 수 많은 스님들이 흘린 피로 인하여 불교에 대한 탄압은 수그러 드는 듯 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다시 혹독한 탄압이 계속되기도 하였습니다.
조선 후기로 접어 들면서 유교질서가 한계를 드러내고 조세제도의 문란으로 백성들의 삶이 어렵게 되자 사찰도 여러 가지 시련을 겪게 되었습니다. 특히 개혁적인 스님들은 유교지배 아래의 조선을 혁신하고자 백성들과 함께 여러 활동에 참여하게 되었고, 각종 민란에 스님들의 참여도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19세기 빈발하는 봉건체제에 대한 민중들의 봉기와 밖에서 밀려 오는 서양열강의 침략 속에서 불교사상으로 조선을 개혁하고자 이동인스님, 유대치, 김옥균, 박영호 거사 등이 개화당을 결성하여 서기 1884년 정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여 희생되기도 하였습니다.
일본제국주의의 침략 아래 놓여 있던 20세기 전반은 한국불교에도 암울한 시기였습니다. 국가의 강력한 통제 아래 다양한 종파로 나뉘어 있던 일본불교는 정부의 후원 아래 경쟁적으로 우리 나라에 들어와 포교 활동과 동시에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이것은 서양 제국주의자들이 침략에 앞서 선교사를 파견하여 식민지배의 정보 탐색과 지배 이념 창출에 앞장섰던 것과 유사한 것입니다.
1911년 조선총독부가 제정하여 시행한 <사찰령>은 조선불교를 식민 통치 아래 놓이게 한 법이었으며, 일본에 대한 예속을 촉진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일제는 사찰령과 여러 조치를 통해 조선불교의 훌륭한 전통을 유린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승려의 결혼을 허가한 것이었습니다. 일본불교는 오래 전부터 승려의 결혼을 허가하고 있었는데 조선불교의 청정비구와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이리하여 일제시대에 우리 나라 스님들이 대부분 결혼을 하여 가족을 거느리게 되었는데 이것은 부처님의 근본정신과도 다른 것이었으며, 조선불교의 전통과도 다른 것이었습니다.
한편 식민지 시대에 불가피하게 일본에 협력하면서도 조선불교의 전통을 지켜 나가기 위해 본사 주지스님들을 중심으로 1941년 조선불교조계종을 결성하여 총독부의 법인 인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백용성, 한용운, 박한영 등 적지 않은 스님들과 재가불자들이 일제의 식민지배에 끝까지 저항하며 조선불교청년회, 만당 등을 중심으로 민족 독립운동을 벌였고, 일제의 불교정책을 거부하던 청정 비구승들도 선학원을 결성하여 자주적인 활동 거점을 유지하면서 조선불교의 전통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1945년 해방과 더불어 한국불교에는 필연적으로 일제불교의 청산과 교단의 정화가 과제로 제기되었습니다. 해방의 혼돈기에 불교개혁과 교단혁신을 위한 여러 단체가 조직되어 활동하였으나 좌우이념 대립의 와중에 휩싸여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습니다. 전쟁 직후 일제시대에 합법화되었던 스님의 결혼제도에 반대하면서 교단의 정화를 요청한 청정비구들의 운동이 시작되면서 한바탕 홍역을 치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이 몇 차례에 걸친 정화지지 유시문을 발표하여 정화운동이 본격화되었습니다. 여러 차례의 혼돈 끝에 정화운동은 성과를 보여 조계종은 청정비구 중심의 출가승려로 재편되고 여기에 반대한 스님들은 독립하여 창종하였습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한국불교는 여러 종단으로 나뉘어졌으나 오늘날 불교계 각 종단의 협력기구인 <한국불교종단협의회>를 구성하고 전불교도의 뜻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한국불교의 장자 종단인 대한불교조계종은 1960-70년대 정화운동의 후유증으로 심각한 분란이 있었으나 1970년대 후반 뜻 있는 불자들의 노력으로 포교, 역경, 도제양성이라는 종단의 3대 과업이 정립되었고, 이를 중심으로 대중불교운동과 민중불교활동이 전개되어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습니다. 『종헌(宗憲)』과 『종법(宗法)』등 제도개혁을 단행하고 총무원과 더불어 도제양성과 포교를 전담하는 기구로 <교육원>과 <포교원>을 독립시켜 종단 활성화의 기틀을 마련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남과 북으로 분열되어 대립하고 있으며, 급격한 산업화, 도시화, 서양화로 정신적인 혼돈과 물질지향적인 가치관의 팽배, 민족문화 경시 풍조 등이 만연하고 있습니다. 또한 산업문명의 부산물인 환경오염은 매우 심각하여 전세계적 차원에서 새로운 문명에 대한 갈망이 높아 가고 있습니다.
이 어려운 시대에 한국불교는 민족통일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야 하며, 인간의 욕망을 절제하고 자연환경을 살리는 새롭고 건강한 문명 창조의 사상적 밑거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물질과 경쟁 위주의 사회에서 지나치거나 상처 입은 많은 대중들을 동체대비(同體大悲)의 사상으로 포용하고 모두가 더불어 자유롭고 편안하게 살 수 있는 불국토를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이 모든 과제가 불교를 믿고 수행하는 불자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공부하고 믿으며 실행해 나간다면 언젠가 찬란한 불국토가 우리 앞에 열리게 될 것입니다.
불교의 수행법
{참선이란}
'불교의 수행법'하면 누구나 참선을 떠올립니다. 참선은 익숙하면서도 왠지 어렵게 느껴집니다. 참선이란 참(參)은 생각함을 뜻하고, 선(禪)은 산스크리트어 디야나(dhyana)를 음사하면서 나온 말인데 그 뜻 역시 '사유함'입니다. 그래서 옛 문헌에서는 사유수(思惟修)로 번역하였습니다. 따라서, 참선이란 '깊이 사유함'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참선의 종류에는 여러 가지가 전해집니다.
태국, 스리랑카, 미얀마 등 동남 아시아의 남방 불교권에서는 위빠사나(Vipassana)라는 수행법이 전해지고,
한국을 비롯한 중국, 일본 등 북방 불교권에서는 선종의 화두(話頭)나 공안(公案)의 의미를 추구하는 간화선과
조용히 자신의 본성을 비추어 보는 묵조선(黙照禪) 등의 수행법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참선이란}
참선의 자세
참선을 하는 데는 시간과 공간에 구애를 받지 않아야 하겠지만, 처음 시작하는 사람은 환경이 조용한 곳이 좋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절에서는 부처님이 모셔진 법당이나 선방 등 정해진 공간에서 하고, 집이나 직장에서는 특별히 참선을 할 수 있는 공간이 없기 때문에 일정한 곳을 선택해서 참선을 하면 될 것입니다.
참선의 자세도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黙動靜)에 걸림이 없이 자세를 취해도 되겠지만 전통 수행법인 결가부좌(結跏趺坐)나 반가부좌(半跏趺坐)를 하는 것이 좋습니다.
결가부좌와 반가부좌를 하는 방법은
*주위를 정돈한 다음 좌복을 깔고 그 자리에 편안하게 앉습니다.
*앉는 자세는 먼저 왼쪽 다리를 오른쪽 다리의 허벅지 위에 올려 놓고
*남은 오른쪽 다리를 왼쪽 다리 허벅지 위에 올려 놓으면 됩니다.
*허리와 양 어깨는 편한 상태로 쭉 펴고 두 손은 먼저 왼손 등을 오른 손 위에 포개어 올려놓고 엄지와 엄지를 살짝 마주 닿게 하면 됩니다.
이 자세는 오랫동안 앉아서 수행하는데 적합합니다.
그러나, 초보자는 다리에 쥐가 나는 등 장애가 있을 수 있으므로 힘이 든다고 느껴질 때는 몸을 움직여 굳은 자세를 유연하게 풀어줄 필요가 있습니다. 익숙해질 때까지는 약 30~50분 등으로 시간을 정해 놓고 단계적으로 시간을 늘려가는 것이 좋습니다.
또, 참선을 한다고 억지로 오래 앉아 있다 보면 몸에 무리가 생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때는 아쉬워 말고 잠시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법당이나 방안 또는 도량을 거닐면서 몸의 균형을 맞추어 조절해 주는 것이 좋습니다. 이것을 방선(放禪) 또는 경행(輕行)이라고 합니다. 이 때에도 화두를 잊고 잡된 생각을 해서는 안됩니다. 방선이나 경행 역시 참선의 연장선상에 있기 때문입니다.
반가부좌는 결가부좌가 어려운 사람들에게 적합한 것으로 결가부좌 자세에서 다리 한 쪽만을 다른 다리의 허벅지에 올려 놓는 자세입니다.
참선을 할 때는 호흡도 매우 중요합니다. 그냥 마음대로 숨을 들이 마시고 내쉬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렇게 하면 마음이 답답하고 혼란스러워 집니다. 참선을 할 때 호흡을 잘하면 정신이 집중되고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그래서 참선을 할 때 호흡은 단전호흡법을 취하되 단전호흡법에 머무르면 안됩니다.
먼저, 자세를 바르게 하고 거친 숨을 몇 번 몰아 쉰 다음 입으로 숨을 쉬는 것이 아니라 코로 숨을 들이 마셨다가 내쉽니다. 이 때 주의해야 할 것은 코로 숨을 쉬되 콧구멍의 미세한 털도 움직여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호흡은 아랫배 즉, 단전까지 내려 보냈다가 천천히 내쉬는 방법으로 계속하면 됩니다.
어떤 사람은 행주좌와 어묵동정이 모두 수행법이 아님이 없다고 하여 기존의 수행법과 선지식의 가르침을 부정하고 각자 나름대로 독특한 수행법을 개발해서 공부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매우 위험하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불교의 수행법을 배우는 사람은 전래된 수행법과 선지식의 말씀에 의지해서 수행법을 잘 익혀 공부해야 할 것입니다.
수식관(數息觀)
참선을 하다보면 여러 생각이 끊임없이 생겼다가 소멸합니다.
어느 때는 찰나지간에 나의 생각을 이끌고 어디론가 가버리기도 하고 또 어느 때는 과거, 현재, 미래를 넘나들며 기억을 되살리기도 합니다. 때문에 초보자는 자기 생각을 붙잡을 수가 없습니다. 한 생각에 몰두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호흡을 관찰하며 공부하는 방법이 나왔는데 이를 수식관(數息觀)이라고 합니다. 이 수행은 숨을 들이 쉬면서 들숨을 관찰하고, 숨을 내쉬면서 나간 숨을 관찰하는 수행법입니다. 이 때 호흡은 무리하지 않는 범위에서 천천히 깊게 숨쉬기를 합니다.
숨을 쉬는 것은 우리의 생명을 유지하는 행위이지만 숨에 의식을 집중하고 살아가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긴장하거나 불안한 마음이 있을 때 천천히 그리고 깊게 숨을 쉴 때 마음의 긴장과 불안이 풀어집니다. 이러한 긴장 이완 효과 뿐만 아니라 수식관은 분별심을 없애는 수행법입니다.
경전에서는 수식관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조용한 장소를 택한다.
그리고 결가부좌 한다.
마음에서 다른 생각을 없애고 눈을 코 끝에 둔다.
그리고는 호흡에 의식을 집중한다.
즉 긴 숨이 나가면 숨이 길다고 알고, 나가는 숨이 짧으면 숨이 짧다고 알고, 들어 오는 숨이 차면 숨이 차다고 알며, 들어 오는 숨이 따뜻하면 숨이 따뜻하다고 알고, 나가는 숨이 따뜻하면 나가는 숨이 따뜻하다고 안다.
몸을 모두 관찰하여 들숨, 날숨이 모두 이와 같음을 안다.
숨이 있으면 숨이 있다고 알고, 숨이 없으면 숨이 없다고 안다. 만약 숨이 마음으로부터 나가면 또한 마음으로부터 나간다고 알고, 만약 숨이 마음으로부터 들어 오면 또한 마음으로부터 들어 돈다고 안다.
이와 같이 사유하여 욕심으로부터 해탈을 얻고 악함이 없으며 깨닫고 관찰함에 기쁨과 편암함을 얻으면 이를 초선(初禪)의 단계라 한다
이 수식관은 마음에 더 이상 분별하는 마음이 없어지는 단계를 최고의 경지로 삼는 수행법입니다..
부정관(不淨觀)
부정관은 말 그대로 우리 몸의 부정한 모습을 보는 것을 말합니다.
『묘지로 가서 시체(해골)의 부정한 모습을 보고 거처로 돌아와 발을 씻고 편안히 앉아 마음과 몸을 유연하게 가지고 모든 번뇌를 떠나 그 시체와 나의 몸을 비교하며 관한다. 즉 마음을 집중하여 발목, 정강이, 넓적다리뼈, 허리뼈, 등뼈, 옆가슴뼈, 손뼈, 어깨뼈, 목뼈, 턱뼈, 이빨, 해골 등에 마음을 집중한다. 그 다음에는 앉은 자리, 한 방안, 한 집안, 한 가람, 한 고을, 한 나라에 가득히 썩어 가는 시체가 있는 것을 관한다. 이것을 부정관이라 한다』
이 부정관음 탐욕과 애욕이 많은 사람들에게 인생이 무상함을 깨우쳐 탐욕과 애욕에서 벗어나게 하는 수행법입니다..
지관(止觀)과 삼매(三昧)
지(止)는 마음이 적정하여 온갖 번뇌를 그침을 말합니다. 수행을 하면서 마음이 여러 가지로 흔들려 정신의 집중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지혜의 세계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따라서 마음에 왔다 갔다 하는 망상의 흔들림을 보고 이들이 모두 찰나에 변화하는 것임을 알고 멈추게 하는 작업을 지(止)라고 하는 것입니다.
관(觀)은 산스크리트어 비파사나(vipasssana)의 의역으로 마음이 지의 상태에 이르면 자신의 마음 속에 왔다 갔다 하는 마음의 움직임을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자신의 마음을 보게 되면 현상의 세계에서 쉽게 끌려가던 마음 씀씀이를 보게 됩니다. 그리하여 자신이 그동안 무엇에 흔들리고 욕심을 부리고 조급해 했는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앎은 자신을 지혜의 세계로 이끌고 갑니다.
삼매(三昧)는 산스크리트어 사마디(samadhi)의 음사어로 잘못 발음 된 말이 널리 퍼진 것입니다. 삼매는 지관의 상태에서 자신의 마음을 보는 지혜가 깊어져서 외부의 어떤 소리나 변화에도 흔들리지 않고 집중하고자 마음이 몰입한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선하는 사람은 참선삼매, 염불하는 사람은 염불삼매에 들었다고 말하고 무아지경에 빠졌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흔히 독서에 몰입한 사람을 보고 독서삼매에 빠졌다고 말하는 예가 여기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지에서만이 최상의 지혜인 무분별지(無分別智)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간화선(看話禪)
인도불교가 중국불교로 이어지면서 수행체계에도 하나의 변화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이른바 화두(話頭)나 공안(公案)인데 이는 하나의 문제를 깊이 참구하여 그것이 본래의 의미를 확실히 깨닫는 간화선으로의 전개인 것입니다. 이 수행법은 공안이나 화두를 통해서 수행자로 하여금 큰 의심을 일으키게 하고 스스로 그 의심을 해결하여 깨닫게 하는 수행법입니다. 인도불교의 선정법은 4성제, 8정도, 12연기 등의 교리의 의미를 수행자가 탐구의 대상으로 삼는데 반해, 중국의 선종에서는 언어보다는 그 이면에 숨겨져 있는 근본 내용의 정확한 의미를 곧바로 찾아서 확인하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따라서 참선은 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 하여 경전의 가르침에 메이지 않고 그 밖에 길이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달마대사를 중국 선종의 초조(初祖)로 삼아 6조 혜능대사에 이르기까지 선종은 중국에서 번창하였습니다. 초조 달마스님과 2조 혜가스님과의 만남에 관한 이야기는 극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괴로워 찾아 온 혜가스님에게 달마스님은 "아픈 마음을 이리 가져오너라. 그러면 내가 치료해 주겠다"고 일갈했습니다. 특히 선종에서는 극단적인 모순으로 보이는 말도 서슴지 않고 하고 있습니다. 중국의 조주스님은 어떤 스님이 와서 물러보기를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하니 "있다" 하였고, 다른 스님이 와서 물으면 "없다"하여 앞뒤가 다른 대답을 하기도 하였는데, 이런 말이 1,700여 개나 정리되어 공안이나 화두로서 후대 수행자들이 풀어야 할 문제로 남아 있습니다. 이처럼 간화선은 초심자들에게 매우 어렵게 여겨지지만 앞의 수식관보다 훨씬 확실하고 호방한 수행법이어서 출가수행자들이 주로 몰두하는 방법입니다.
{간경(看經)}
불교에서 경전은 부처님의 말씀이요, 교훈이요, 진리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경전은 부처님 열반 이후 정법을 전하는 보고(寶庫)로 여겨졌고, 따라서 경전을 신행의 지침으로 삼게 된 까닭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법화경> 보문품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어디서든지 이 경을 설하거나 읽거나 외우거나 쓰거나 이 경전이 있는 곳에는 마땅히 칠보로써 탑을 쌓되, 지극히 높고 넓고 장엄하게 꾸밀 것이요, 또 다시 사리를 봉안하지 말아라. 왜냐하면 이 가운데는 이미 여래의 진신(眞身)이 있는 까닭이니라』
경전이 부처님 진신사리와 다름 아님을 나타내는 경구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불교경전은 단순한 책이 아니라 부처님의 진신사리로서, 불상이나 불탑과 같이 예배 대상이다. 뿐만 아니라 책이 귀하던 예날에는 경전 한 권이 갖는 의미가 각별했으며 경전을 통하여 모든 교육이 이루어졌으므로 경전은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예로부터 우리 선인들이 경전을 통한 수행의 한 방법으로 간경에 지극한 정성을 보인 것도 이러한 까닭입니다.
간경(看經)은 경전을 보고 읽는 것을 말합니다. 경전은 바른 삶의 길을 제시하는 지혜의 창고입니다. 따라서 경전을 읽고 외우며 몸에 지님으로써 얻게 되는 공덕이 무한히 크기 때문에 간경의 수행의 한 방법으로 정착되었습니다.
원래 경전은 중생들에게 깨달음의 길을 널리 펴고자 하여 만들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경전을 통해 깨달음을 이해하고 그와 같이 실천하기 위해 읽었으나, 뒤에는 읽고 외우는 그 자체가 하나의 수행법으로 인식되었습니다. 또한 부처님 앞에서 경전을 읽고 부처님의 덕을 찬탄하며 원하는 일이 속히 이루어지도록 발원하기도 하고 또한 죽은 자를 위해 독경해서 그 공덕으로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바라며 명복을 빌기도 하였습니다.
간경은 뒤에 경전을 읽는 모든 행위를 일컫게 되었습니다. 풍경(諷經), 독경(讀經), 독송(讀頌)이라 하기도 했습니다. 이들의 의미를 구별해서 쓰는 경우도 있으나, 지금은 흔히 구별 없이 쓰고 있으며, 독경․예배를 부지런히 한다고 하여 근행(勤行)이라고도 합니다.
예로부터 경전을 읽기에 앞서 먼저 몸을 깨끗이 하고 단정히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였습니다. 몸을 깨끗이 하는 과정을 통해 마음을 추스려 경전의 의미를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입니다.
경전을 읽을 때에는 마음 속으로 의미를 이해하면서 보아야 하는데 염불처럼 소리를 내어 읽기도 합니다. 이 때는 염불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소리를 놓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경전을 보면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반드시 주위의 스님이나 선지식을 찾아가 그 뜻을 이해하고 넘어 가는 것이 경전 읽기의 바른 방법입니다.
{염불(念佛)}
염불이란 일반적으로 마음 속으로 부처님을 항상 생각하는 것을 말합니다. 흔히 주위에서 '나무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등 부처님을 부르는 소리를 들어 본적이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부처님께 귀의하고 모든 것을 부처님의 뜻에 따라 수행하는 것이 염불입니다. 염불에는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진리를 생각하는 법신염불과 부처님의 공덕과 모습을 마음에 그려보는 관상(觀像)염불, 그리고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는 칭명(稱名)염불이 있습니다.
<아함경>에서는 세 가지, 여섯 가지, 열 가지로 염불의 종류를 구분하고 있습니다. 즉 연불을 지극한 정성으로 하면 번뇌가 사라져 극락에 태어나거나 열반을 얻을 수 있다고 합니다.
<대승경전>에서는 삼매에 들어 염불하는 염불삼매를 설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르면 염불은 죄를 없애고 삼매 중에 부처님을 친견하는 것은 물론, 부처님의 나라에 태어나기를 발원하면 반드시 태어난다(艶佛往生)고 합니다. 그래서 <아미타경>에서는 깨달음을 이루지 못한 사람이라도 임종할 때 일념으로 아미타불을 열 번만 부르면 서방정토에 왕생한다고 하였습니다.
염불은 중국에 와서 그 내용과 방법이 더욱 발전하였습니다. 모든 부처님을 마음 속에 떠올리는 '통(通)염불'과 특정한 부처님만을 마음 속에 떠 올리는 '별(別)염불'로 구별하기도 하였는데, 이런 구분보다 어떤 형태로든 부처님 이름을 부르고 신앙하는 일이 일반인들이 실행하기 쉬우므로 나중에는 아미타부처님을 부르는 것만을 염불이라고 했습니다.
염불은 쉽게 행할 수 있는 수행법으로써 대중의 호응이 높았습니다. 어려운 교리를 공부하지 않아도 극락왕생 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일반대중이 선호했습니다. 신라시대 원효스님이 무애박(無碍瓠~커다란 표주박)을 두드리며 '나무아미타불'을 지성으로 부르면 극락에 왕생할 수 있다고 가르치신 이래 염불은 지금까지 불교인의 수행법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염불하는 방법은 부처님을 그리워하면서 지극히 부르는 것입니다. 즉 언제나 부처님과 함께 하며 살기를 발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염불을 하면서 자신의 소리를 생생하게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음이 산란해져 입으로는 염불을 하면서도 속으로는 외도, 마군, 잡생각을 하게 됩니다. 부처님을 부르는 동작 하나에도 정신을 모아 흐트러짐 없는 상태가 진정한 염불입니다. 지극정성으로 염불해서 부처님을 친견했다는 사람도 있고, 몸에서 빛을 발하는 방광(放光)을 얻었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보다 진심으로 부처님을 그리워 하고 생각하는 과정에서 마음에 사심이나 탐욕이 사라지는 경지를 체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근(精勤)
정근은 선법(善法)을 더욱 자라게 하고, 악법(惡法)을 얼리 여의려고 부지런히 쉬지 않고 수행한다는 뜻입니다. 이는 염불과 같이 한 마음 한 뜻으로 불․보살님의 지혜와 공덕을 찬탄하면서 그 명호를 부르며 정진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산만한 마음을 안정시켜 편안하게 하며 어떤 환경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맑고 밝아지게 하는데 그 의의가 있습니다.
정근을 할 때에는 다른 생각들을 다 놓아 버리고 오직 평온한 마음으로 부처님의 한량없는 공덕을 믿고 일념으로 정진해야 합니다. 불․보살님의명호를 부르면서 그 명호에 집착하거나, 무엇인가 얻으려고 하면 오히려 정근에 장애가 됩니다. 항상 자세를 바르게 하고 기운을 안정시켜 몸을 흔들거나 경거망동하게 하지 말아야 하고, 음성은 너무 크게도 작게도 하지 말고 기운을 적당하게 하여 고르게 해야 합니다.
정근할 때는 마음을 안정시키는 방법의 하나로 염주를 돌리거나 절을 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그리고 정근의 대상과 일정한 시간을 정할 수도 있습니다. 대개 아침과 저녁으로 예불을 모실 때에는 석가모니불 또는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부르며 정근하고, 부처님의 위신력에 의해서 서방정토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발원할 때는 나무아미타불 또는 지장보살의 명호를 부르며 정근합니다.
기도란 무엇인가
기도란 일반적으로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느낄 때 신이나 그 밖에 신비한 힘에 의지하여 간절하게 비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불교에서 기도는 권청(勸請) 즉, 일체 중생들이 어리석은 마음을 떨쳐버리고 하루 속히 지혜의 눈이 열리도록 부처님께 청하는 의식으로 모든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원력과 바른 깨달음을 성취하여 모든 이웃들에게 기쁜 마음으로 회향하겠다는 서원의 뜻이 더 큽니다.
불교의 기도는 불․보살님의 위신력을 찬탄하고 다생에 지은 모든 업장을 참화하며 감사한 마음으로 일체중생과 함께 하기를 발원하고 회향하는 것입니다.
기도발원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의지하며 이 생명 다하도록 실천하겠다는 성스러운 마음에서부터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통해서 나와 이웃 그리고 모든 중생들에게 불․보살님의공덕이 함께 하기를 서원하고 또한 자신의 편협된 마음을 부처님의 마음으로 되살리는 것입니다.
기도는 어떻게 하는 것인가
불자들이 가정에서 정기적으로 기도하려면 먼저 일상 생활에서 기도할 수 있는 편한 시간과 공간을 정해 놓은 다음, 절에서 기도하는 것처럼 하면 됩니다. 따라서 기도를 하는데도 몸과 마음의 자세와 호흡이 중요합니다. 즉 기도와 참회를 하고자 할 때는 앉는 자세부터 바르게 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두 무릎을 꿇고 앉는 자세를 취하고 그 밖에 결가부좌나 반가부좌를 선택해서 앉으면 됩니다.
옷차림도 편안한 복장이 좋습니다.
기도할 때에 앉는 법을 강조하는 이유는 바른 자세에서 바른 호흡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바른 호흡이 중요한 것은 호흡이 안정되어 있을 때 자연히 정신도 안정되어 쉽게 기도에 몰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실제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면서 기도하다 보면 호흡은 자연스레 안정이 되기 때문에 너무 호흡을 의식할 필요는 없다고 합니다.
기도할 때 마음은
첫째 믿음이 중요합니다. 즉 기도가 결코 헛된 것이 아니며 부처님의 가피가 나와 함께 함을 깊이 믿어야 하고,
둘째로는 참회하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평소 우리 자신의 잘못된 생활에 대해 반성하고 기도하기에 앞서 자신의 마음을 참회하고 비우는 것이요,
셋째로는 주변의 모든 이웃에게 자비로운 마음을 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상의 모든 중생이 나와 한 몸임을 깨닫고 그들 모두에게 평화와 안락이 깃들기를 바라며 누구에게도 원망이나 미움을 갖지 않는 마음입니다.
이와 같은 마음으로 기도를 하게 되면 기도는 참다운 공덕을 쌓게 된다고 합니다.기도할 때 독송하는 경전은 기도의 내용에 따라 각각 다릅니다. 먼저 경전을 독송하는 것은 경전을 통해서 불․보살님의 서원과 나의 정성이 하나가 되는데 있습니다.
기도의 방법에는 예로부터 전해오는 다섯 가지 덕목이 있는데 그 첫째는 불․보살님께 귀의하여야 하고, 둘째는 향과 꽃으로 공양하고 보시하여야 하며, 셋째는 3배 또는 108배 등으로 예배하고, 넷째는 업장을 소명하고 복덕을 성취하기 위하여 참회 발원하여야 하며, 다섯째는 불․보살님의 명호를 부르며 정근하는 염송이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기도의 종류- 관음기도/지장기도/약사기도/칠성기도/참회기도
<관음기도>
우리 나라를 비롯하여 중국, 일본에 가장 뿌리 깊이 내린 것이 관음신앙입니다. 이 관음신앙과 연관된 경전은 ≪반야심경≫ ≪천수경≫ ≪법화경≫ 등입니다. 이 경전들은 다른 경전에 비해 쉽게 구할 수 있습니다.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은 산스크리트어 아바로키떼스바라(Avarokitesvara)를 뜻으로 옮긴 말입니다. 관자재, 관세음, 관음 등으로 음역 됩니다. 관세음이란 세상의 모든 소리를 다 관찰한다는 뜻이며, 사바세계의 중생들이 괴로움에 허덕일 때 관세음보살님을 불러 구원을 청하면 32응신(應身)으로 몸을 나타내어 구원해 주신다고 합니다.
관세음보살상은 어머니 같이 인자하시고 자비로우시며 후덕한 모습으로 왼손에 연꽃을 들고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이 연꽃은 중생이 본래부터 구비하고 있는 불성을 표현한 것입니다.
중생이 관세음보살님께 귀의하고 그의 명호를 부르거나 찬탄, 공양하면 이런 공덕이 있다고 합니다.
『불에도 타지 않고 물에도 떠내려가지 않으며, 바람에도 날리지 않고 칼과 몽둥이에 잘리거나 다치지 않으며, 귀신에게 시달리지 않고 쇠고랑을 차지 않으며 도적의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신다. 또 항상 관세음보살을 생각하고 공격하면 욕심 많은 사람은 욕심을 여의게 하고…. 아들을 원하면 아들을 낳고, 딸을 원하면 어여쁜 딸을 낳을 것이다.』≪법화경≫보문품
<지장기도>
우리 나라의 지장신앙은 삼국시대부터 매우 성행했는데 신라의 김교각스님이 중국 안휘성에 있는 구화산에 가서 수도 정진하였는데, 그 지방 사람들로부터 지장보살로 추앙된 것이 그 기원이라고 합니다. 지장보살은 지혜와 자비를 구족하고 있으며 특히 자비의 실천을 강조하신 분입니다. 지장보살은 지옥에서 고통 받는 중생들이 모두 성불하기 전에는 결코 깨달음을 이루지 않겠다는 서원을 세우신 대비원력의 보살입니다. 이 보살님은 항상 지옥에 계시면서 오늘도 육도(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를 윤회하는 중생을 구제하고 계십니다.
≪지장보살보원경≫에 의하면 지장보살을 예배하고 공경하면 이런 공덕이 있다고 합니다.
풍년이 들며, 집안이 평안하고, 죽은 조상이 천상에 태어나고, 부모가 장수하며, 원하는 것을 얻으며, 수재나 화재가 없고, 헛되이 허비하는 것이 없으며, 나쁜 꿈이 없고, 출입시 신장이 보호하며, 훌륭한 인연을 많이 만날 것이다.
지장신앙은 우리 나라를 비롯해 중국, 일본 등 여러 나라에서 봉행되고 있습니다. 이 신앙이 널리 신봉되는 것은 ≪지장보살본원경≫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부모가 장수하고', '조상이 천상에 태어난다'는 효사상의 영향입니다. 특히 우리 나라에서는 선망부모와 일가친척, 그리고 제반 천도의식을 봉행할 때 지장기도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약사기도>
우리 인간이 한 평생을 살아 가면서 몸이 아프고 병이 들고 늙고 죽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도 인간은 아픈 몸을 다스리기 위해 여러 가지 처방을 쓰기도 합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일찍이 만가지 모든 병은 마음에서부터 생긴다고 하는 것을 깨달으시고 모든 중생들에게 마음을 먼저 다스릴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병의 근원인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없애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에는 사람의 모습과 인종, 그리고 문화가 각기 다르듯이 욕심을 버리고 건강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아프고 병든 사람도 있게 마련입니다. 그와 같이 병들어 아픈 사람들이 병을 다스리기 위해 약사여래 부처님께 기도 정진하는 것을 약사기도라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약사전이 있는 사찰은 약사여래를 모시고 있으며, 이런 사찰은 아픈 사람이 기도 정진하여 처방의 효과를 보았다는 기록이나 설화가 많이 있습니다.
약사여래는 정확하게 약사유리광여래 부처님입니다. 약사여래가 계시는 세계가 동방에 잇는 정유리세계이므로 동방정유리계의 교주라고 지칭되기도 합니다.
약사여래신앙의 모체인 ≪약사유리광여래본원경≫에는 약사여래의 12가지 서원이 나옵니다. 그 중에서 에섯번째와 일곱번째 서원이 정신적, 육체적 병고의 해결과 회복입니다. 그 다음으로 생명을 연장하는 방법을 설하고 '12가지 서원을 성취시켜 주는 신령스런 주문'을 들 수 있습니다. 이러한 약사여래의 가피를 구하고자 하는 것이 약사여래 기도이며, 5세기 무렵 수나라 시대부터 민간에 유행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칠성기도>
불교가 전래되기 전부터 우리 나라에는 산천과 하늘을 숭배했습니다. 즉 칠성은 하늘, 산신은 대지, 용왕은 물의 상징이자 그 세계의 지배자를 뜻합니다.
불교가 전래되자 산신과 칠성은 자연스럽게 사원의 한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고 불교와 융합하여 계승되었습니다. 이것이 후대에는 도교나 민속신앙과 합쳐져 칠성이나 산신, 용왕에 대한 예경으로까지 이어졌습니다.
예로부터 우리 나라 사람들은 산신과 칠성에 대한 신앙을 자연스럽게 받아 들였습니다. 특히 자손창성, 부귀영화, 수명장수를 기원할 때는 일반적으로 칠성기도를 올렸습니다. 이것은 태양을 숭배하며 하늘의 자손이라 생각했던 조상들의 전통과 관습에서 비롯한 것입니다. 이처럼 칠성 신앙은 바로 재래의 토착신앙과 불교가 엮어낸 문화인 것입니다.
<참회기도>
참회기도는 진실하지 못한 마음으로 그 동안 알게 모르게 지은 모든 죄업을 소멸하기 위해 부처님께 그 잘못을 뉘우치고 참회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참회기도에는 이참(理懺)기도와 사참(事懺)기도가 있습니다.
이참기도는 과거와 현재에 지은 모든 죄업은 마음에서 생긴 것이며, 마음 바깥에서 일어나는 것이 하나도 없다고 관찰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마음이 본래 공적(空寂)한 줄 알아서 모든 죄의 모습도 공적하다고 보는 것을 말합니다.
사참기도는 몸으로는 부처님께 예배를 드리고, 마음으로는 부처님의 성스러운 모습을 그리면서 과거와 현재에 지은 모든 죄업을 참회하는 기도입니다.
참회할 때 외우는 것을 참회문이라고 하며, 우리 나라에서는 ≪화엄경≫보현행원품의 '지난 날 지은 모든 악업은 무시 이래 탐욕, 성냄, 어리석음으로 말미암아 몸과 마음으로 지었사오니 제가 이제 그 모든 것을 참회합니다' 등의 예가 있고,
또 ≪천수경≫에는 『죄는 자성이 없으니 마음에 따라 생길 뿐, 마음이 멸할 때 죄도 없어지네. 죄와 마음이 함께 없어져 모두 공하면, 이것이 바로 참다운 참회라 한다』고 하였으며 신라 시대의 원효스님은 <대승육정참회문>을 지어 참회의 본 면목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또 서산대사도 <선가귀감>에서 참회를 이렇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허물이 있으면 참회하고 잘못된 일이 있으면 부끄러워 할 줄 아는 데에 대장부의 기상이 있다. 그리고 허물을 고쳐 새롭게 되면 그 죄업도 마음 따라 없어질 것이다. 즉 참회란 먼저 지은 허물을 뉘우치고, 다시는 짓지 않겠다고 맹세하는 일이다. 부끄러워 한다는 것은 안으로 자신을 꾸짖고 밖으로는 드러내는 일이다. 마음이 본래 비어 고요한 것이므로 죄업도붙어 있을 곳이 없다.